노래 부르는 한 해
얼마 전 TV에서 아이유의 ‘밤편지’라는 노래를 양희은씨가 부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똑같은 노래인데 그 맛이 얼마나 다른지, 마치 다른 곡을 듣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각자 가진 음색과 삶의 경험, 철학과 노력이 결집돼 같은 노래가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신앙도 노래와 같습니다. 누가 부르느냐에 따라 그 맛과 아름다움이 전혀 다릅니다. 누군가의 모창을 하면 결국 그건 자신의 노래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노래가 됩니다. 그 때문에 노래는 나의 것으로 노래해야 합니다. 나만의 목소리로 말이죠.
노래는 부르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악보만을 두고 노래라 하지 않는 것처럼 신앙도 그러합니다. 수십년 동안 노래는 부르지 않고 악보만 교정하고 있는 건, 성경공부만 하고 삶에서 실천하지 않는 신앙과 같습니다. 조금 틀리더라도 부를 때 비로소 노래가 되듯이 조금 부족해도 실천해야 신앙이 됩니다.
2019년 새해에 우리는 더 많은 삶의 노래를 부르기 원합니다. 아이들의 엉터리 흥얼거림이 사랑스럽듯 우리의 미숙한 실천도 하나님께 그러할 것입니다.
/김민정 목사(좋은목회연구소) [출처] - 국민일보
▣ 노래 중의 노래
“울면 안돼 울면 안돼 산타할아버지는 우는 애들에겐 선물을 안 주신데 산타할아버지는 알고 계신대 누가 착한 앤지 나쁜 앤지 오늘 밤에 다녀가신데 잠잘 때나 일어날 때 짜증 낼 때 장난할 때도 산타할아버지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신대 울면 안돼 울면 안돼 산타할아버지는 우리 마을을 오늘 밤에 다녀가신대”
산타할아버지는 어린아이의 신이며, 크리스마스의 주인이 되었다. “너는 다른 신에게 경배하지 말지니라. 이는 주가 질투라 이름 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니라.”(출 34:14; 수 24:19)고 말씀하신 그 하나님이 우리 아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이 노래에 대하여 질투하실 것이다.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도 질투를 가지고(민 25:11)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처소들에 있는 모든 영적인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신(엡 1:3; 약 1:16-17)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우리의 아이들의 하나님이 되게 하며, 아이들로 찬미토록 해야 한다(마 21:15-16). 누구의 눈물을 흘리게 한 적이 있는가? 나를 적대하는 자들의 울부짖음을 당신은 듣는가?(약 5;4) 이 날이 헛된 날이 아니라(사 58:1-5) 생각나는 은혜가 있어 화해하는 날이 되어 평강이 있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만일 네가 예물을 희생단에 가져오다가 거기서 네 형제가 너를 적대할 어떤 것이라도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희생단 앞에 놓아두고 그 길로 가서 먼저 네 형제와 화해하고 그 후에 와서 네 예물을 바치라.”(마 5:23-24) 동방의 현인들처럼 당신도 이 날에 예물을 드릴 것이다. 그러나 가장 가까이 있는 당신의 부모가 자식인 당신으로 섭섭해 하며, 울고 있는지 모르겠다. 먼저 화해하기 위해 일어서라. 당신의 이웃이, 당신의 부하 직원이 당신을 원수로 여길지 누가 알겠는가? 화평의 길을 알고(롬 3:16-17) 그 길을 들어가라. 적어도 이날을 그렇게 보내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 것을, 아버지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을 어떻게 믿게 하겠는가? 번쩍이는 불빛이겠는가? 번쩍이는 불빛은 술집에 있다.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의 하나 됨에 있다.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을 하나로 완전하게 하사,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를 보내어 그들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옵소서.”(요 17:23) 성탄절에 모아진 예물들을(나는 특히 돈을 말하는 것이다. 시시한 과자부스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난한 교회들에게 전부 나눠주라. 당신과 당신의 교회는 성탄절이라고 불리는 이 날에 이 일을 해야 한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의 배(belly)가 아니다(빌 3:18-19). 우리의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사 자신의 유일하게 난 아들을 주신 분이시다(요 3:16). 그 아버지에 그 아들들이기를.
노래 중의 노래인 아가(솔로몬의 노래, Song of Solomon)는 “나의 사랑하는 이여, 서두르소서. 향료들의 산들 위에 있는 노루와도 같고 젊은 사슴과도 같이 되시옵소서.”(아 8:14)라는 기다림으로 끝을 맺는다. 성경도 “이 일들을 증거하신 분께서 말씀하시되, 반드시 내가 속히 오리라, 하시도다. 아멘. 주 예수님, 과연 그러하옵니다, 오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모두와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계 22:20-21)하며 주님의 오심에 하나님의 사람 성도의 화답으로 끝을 맺는다. 송년회로 이 모임 저 모임 기웃거리기보단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우리가 그분께로 함께 모일 것을 두고”(살후 2:1) 깨어 있기를 바란다. 성탄절로 예수님의 초림을 생각하고, 12월로 이 해를 보내면서 헛되고 헛된 시간을 보내지 말고, 죄짓는 일들을 하지 말고 그분의 약속대로, 의가 거하는 새 하늘들과 새 땅을 기다리는 자들로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화평 중에 그분께 발견되기를 힘쓰기를 바란다(벧후 3:13-14).
/이영규 목사(춘천 안디옥성결교회)
▣ 사랑과 희망의 노래
어제 소설 한 권을 다 읽었다. 두문불출(杜門不出)하고 하루 종일 책만 읽다보니 이틀 만에 260페이지가 넘는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길 수 있었다. 그 내용이 해피엔딩이 아니라 그런지 뭔가 아릿한 앙금이 남겨져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햇빛을 쬐면 피부가 민감하게 반응하여 피부암에 걸려 죽거나, 나이가 들면 전신마비가 와서 고통 속에서 죽게 되는 XP라는 희귀병을 앓고 있는 불쌍한 소녀의 이야기였다. 그 소설의 줄거리를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그 소녀 카오루는 밤마다 거리로 나가서 자신이 작사하고 작곡한 사랑과 희망의 노래를 부른다. 그러다가 바다에서 서핑surfing을 즐기는 한 소년을 만나게 된다. 해변에서 밤새도록 이야기하다가 동이 틀 무렵이면 미친 듯이 달아나는 소녀를 보면서 그 소년은 이상하게 여긴다. 나중엔 그녀의 언니를 통하여 그 비밀을 알게 되고, 그들의 사랑은 더욱 깊어만 간다. 어느 날 그 소녀는 자신의 손가락들이 마비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가온 자신의 죽음을 감지하게 된 것이다. 그 소녀는 행복을 품고 죽기 위하여 그 소년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고 해변에서 사랑을 나눈다. 그리고 그 소녀는 19살 꽃 다운 나이에 예정된 죽음을 맞이한다. 태어나서 한 번도 햇빛을 마음껏 즐길 수 없었던 그녀의 관 안에는 노란 해바라기 꽃들이 가득 차 있었다.
그 소년이 병원으로 찾아왔을 때 떨리는 목소리로 그 소녀는 고맙다고 하면서 자신의 마지막 노래를 부르면서 깊은 잠속에 빠지고 만다. 그리고 그 마을의 거리와 찻집에서 그녀의 노래가 들려오고, 라디오에서도 그녀의 허스키하고 달콤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게 된다. 그 소녀의 언니는 해변에서 해바라기 무늬가 있는 돗자리 위에 앉아있다. 카오루의 남자친구였던 코지가 바다에서 서핑하고 있는 모습을 그녀는 카우로의 노래를 들으면서 지켜본다. 늘 그래왔듯이 죽은 동생에게 코지의 이야기를 해주기 위해서였다.’
간결한 단문으로 이어지는 그 소설을 재미있게 읽으면서, 때 묻지 않은 향이 깃든 동양화 한 점을 감상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어린 나이로 희귀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지만, 그래도 순수한 사랑을 품고 노래하며 갔으니 행복한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가만히 따져보면 그 소녀보다 10년, 20년, 그 이상을 건강하게 살고 있는 성인들은 큰 복을 받은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그래도 그 소녀와 같은 순수한 사랑과 노래가 없는 불안하고 삭막하며 허전한 인생을 지금까지 살고 있다면, 과연 그 소녀보다 행복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온갖 죄와 욕망에 사로잡혀 어두운 인생길을 벌레처럼 기어가고 있는 존재들이 현대인들일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 하루도 건강하게 살아있음을 감격하면서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하자.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고 희망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후회 없는 성실한 믿음의 삶을 지금부터 시작해보자.
/김학규
▣ 영적 노래
1741년 8월 22일, 56세 때 헨델은 자택의 조그마한 방에 앉아 신들린 듯 오선지에 악보를 그려놓고 있었다. 무아지경에 빠져 곡을 짓고 있었다. 남자 하인이 먹을 것을 갖다 주었으나 한 시간 이상이 지나도록 음식엔 손도 대지 않았다.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구슬픈 아리아 부분을 작곡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따금씩 멍하니 창문 밖을 응시하였고 미친 듯이 어깨를 구부리고 있었다. 드디어 21일이 지나 9월 14일, 완성된 악보를 책상 서랍에 넣은 다음 촛불을 끄고 깊은 잠에 빠졌다. "메시야"가 완성된 과정이다. 그는 전 3 부에 약 2시간 30분 소요되는 이 최대작을 불과 22일 만에 완성했던 것이다.(제1부는 7일, 제2부는 9일, 제3부는 6일 동안)
1743년 런던 초연 때 영국의 왕 조지 2세가 임석하였는데 '할렐루야 코러스' 부분에 다다르자 왕은 감격한 나머지 벌떡 일어났으므로 측근은 물론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습관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의 어느 부활절, 시내교회 연합성가대가 열렬하게 합창할 때 감명깊게 들었던 추억을 가지고 있다. 한 번쯤 아니 수십 번 들어도 벅차오르는 기쁨은 '메시야'가 단순히 명곡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거기에도 마치 성령의 감화를 받아 성경을 기록한 방식대로 신령한 기운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헨델은 메시야를 작곡하고 있는 동안 깊은 영적세계로 빠져들곤 했다. 책상 앞에서 끊임없이 흘린 눈물, '할렐루야 합창' 부분이 완성되는 순간 외친 탄성, 곧 "나는 내 앞에 열린 천국을 보았으며 위대한 신을 만났다."고 한 사실들을 종합해보면 '메시야'가 단순히 한 인간의 천재나 영감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성령께서 보이지 아니하는 가운데 헨델과 함께하셨던 것이다. 영원토록 통하는 영적 노래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우리 인간에게는 기쁨이요 평화이다.
(조만제)
* 기도: 찬양 받기에 합당하신 주님,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온전한 찬양도구가 되게 하옵소서. 어떤 형편에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찬양할 수 있게 하옵시고, 입술만의 찬양이 아니라 영혼의 찬양을 드리게 하옵소서. 나의 삶이 찬양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노래, 찬송, 음악에 관한 성경 말씀
0 (에스라 2:41) 노래하는 자들은 아삽 자손이 백이십팔 명이요
0 (느헤미야 7:44) 노래하는 자들은 아삽 자손이 백사십팔 명이요
0 (느헤미야 12:46) 옛적 다윗과 아삽의 때에는 노래하는 자의 지도자가 있어서 하나님께 찬송하는 노래와 감사하는 노래를 하였음이며
0 (시51:14)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0 (시편 69:30)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
0 (시95: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0 (시편 95:2)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0 (시편 96:1)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0 (시편 104:33) 내가 평생토록 여호와께 노래하며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0 (시편 137:3)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0 (시편 147:7) 감사함으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수금으로 하나님께 찬양할지어다
0 (에베소서 5:19)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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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민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