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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어떤 사내
- 은유시인 -
그 사내는 아주 어렸을 적, 그러니까 철들기 전 코흘리개 소년 때부터 신문보급소에서 신문배달을 해오며 잔뼈가 굵어온 사내이다.
이미 불혹을 훌쩍 넘긴 나이에 말을 유난히 더듬는, 그러면서도 ‘내겐 한복이 더 잘 어울린다.’며 늘 한복만을 즐겨 입는 보통 체격의 그러면서도 임산부처럼 배가 유난히 불거진 사내이다.
그는 부산의 사하구 다대동과 장림동 등지에서 국제신문과 조선일보 등 신문 보급소를 세 군데나 하고 있으며, 노래방도 두 군데나 차려 영업을 하고 있다. 또 얼마 전에는 장림동 다소 외진 곳에서 ‘4500냥 한식뷔페’까지 했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실패하여 문을 닫았다.
내가 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1996년 7월경, ‘사하신문’이란 지역 신문사를 차리면서 국제신문에 간지로 우리 사하신문을 끼워 넣기 시작했을 때, 국제신문 다대 보급소장인 그를 만나게 되면서부터였다.
그는 말을 심하게 더듬어서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려면 거듭 되풀이 물어봐야할 지경이었다.
그는 그때부터 내가 운영하던 사하신문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자신의 꿈도 그런 신문을 발행해보는 것이라 했다.
더듬는 말투하며 어눌한 태도하며 거기에 도무지 세련되지 않은 옷차림하며…….
‘그런 몰골로 어찌 점잖고 지체 높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인터뷰를 할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 그를 보면서 대번에 느껴지는 내 솔직한 생각이었다.
사하신문은 무료지였으며 처음 한동안은 일반 일간신문과 같은 규격의 대판규격으로 매주 16면씩 30,000부를 부산일보사나 국제신문사 등지에서 인쇄, 발행하였다.
16면 중 4개면은 칼라 면으로 편집디자인 스타일도 이미지를 많이 활용하여 화려함에 있어선 신문 보다는 잡지에 가까웠다.
4개면은 사하지역에서 일어난 사건 사고와 여러 가지 소식을, 2개면은 사하 주민들이 알아야하는 지역정보를, 4개면은 사하지역의 기관 단체의 소개와 사하지역 인사들의 인터뷰 관련 기사를, 3개면은 각종 문화관련 행사와 신간도서 소개 및 연재소설 등을 게재하였다.
따라서 신문 내용 거의 모두가 사하 지역과 사하 주민들과 관계되는 내용으로 채워 넣었다.
관련사진들은 대부분 슬라이드로 촬영하고 드럼스캐너로 분해하여 사용하였으며, 연재소설 삽화라든가 기사와 관련된 일러스트는 자체에서 직접 제작하여 넣었다.
그러니 사진이든 그림이든 디자인이든 단연 최고 수준이었으며, 기사도 나무랄 데가 없을 만큼 수준급이었다.
인쇄까지 선명하여 전국 400여 지역신문 가운데서 가장 돋보이는 신문이었음은
당시 국회 언론분과위원이었던 ‘박종웅’국회의원은 물론, ‘배동욱’ 지역신문 중앙회장도 인정하였다.
사하신문은 사하구 내의 은행, 우체국, 새마을금고, 동사무소, 관공서 등 350여 군데에 배부대를 설치하여 매주 신문이 발행될 때마다 6,000부는 이들 배부대에 일일이 쫓아다니며 꽂아놓았고, 24,000부는 부산일보나 국제신문 24개 보급소에 각 1,000부씩 나누어 주고 신문에 간지로 끼워 배부하였다.
그러나 사하신문이 아무리 디자인과 편집이 좋고 볼거리나 유익한 정보가 많더라도 사하란 엄연히 대도시 부산에 속한 지역이다. 따라서 수많은 중앙지들이 또 부산일보, 국제신문과 같은 지방지들이 버티고 있으며, 또한 벼룩시장, 부산시대 등 수많은 무료 생활정보지 등도 지천에 깔려 있고 부산은행보, 부산문화회관보, 부산시보, 사하구청보 등 각종 단체나 기관 회보 등이 역시 무료로 각 가정에 배달되는 상황에서 사하신문에 눈길 주는 이들이 그리 흔치 않았던 것이다.
결국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인지라 억지로 42호까지 발행을 하고는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뒤로 ‘우리동네 사하’란 제호의 생활정보 책자를 3개월 간격으로 발행했다.
타블로이드판의 올 칼라로 30,000부씩 발행했었는데, 책자로서는 제법 판형이 컸었고 상당히 화려한 책자였다.
사하구는 16개 동이 있으며, 인구 40만 명에 가구 수는 11만 세대, 상가 점포수는 40,000개가 넘는 시골로 치면 제법 규모가 큰 도시라 할 수 있을 만큼 규모가 큰 곳이다.
불과 두세 개 동을 묶어 발행하는 ‘마을문화’, ‘상가로’, ‘도심가’, ‘공팔공’, ‘디오 21’등은 10,000권 남짓 발행하는데 비해 ‘우리동네 사하’는 세 배나 많은 30,000부를 발행하였고 광고료는 기존 생활정보지류와 동일하게 받았음에도 광고를 내어주는 광고주들은 오히려 불만이 많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이 30,000부를 16개 동으로 나누면 실제 한 동에 2,000부 밖엔 차례가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부분 이 생활정보 책자에 광고를 내주는 업소들은 통닭집, 중국집, 학원 등으로써 동네 장사인 까닭에 아무리 부수가 많고 아무리 잘 만든 책자일지라도 자신들 영업장 주변에 몇 권이나 뿌려지느냐에 따라 광고를 내주고 안내주고 하는 것이니 이래저래 손해만 볼 수밖엔 없는 것이다.
사하 전역을 상대로 광고를 할 만한 대형업소들은 생활정보책자에는 광고를 내려 하지 않는 것이 ‘생활정보지는 격에 떨어진다.’라든가 ‘전단이나 신문광고가 오히려 효과가 더 있다.’라는 이유에서였다.
결국 이 생활정보 책자도 세 번 발행하는 것으로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엔 타블로이드 판형에 8면 올 칼라 ‘생활정보 사하’란 생활정보 신문을 격주로 발행했다.
이 신문 역시 30,000부씩 발행했으며, 앞전 신문이나 책자가 안 된 것에 대한 오기가 작용했던 것이다. 벼룩시장처럼 구인구직과 부동산정보, 그리고 개업광고만 실어도 괜찮을 듯싶었다.
사하지역에는 기업체가 400개 가까이 있고, 크고 작은 점포가 40,000개가 있다. 이 기업체나 점포들이 종업원을 구하더라도 이왕이면 출퇴근에 시간을 덜 뺏기는 사하에 거주하는 사람을 쓰기를 원할 것이다. 그리고 사하에 거주하는 사람들 역시 집과 가까운 직장을 원할 것이다.
사하는 부산의 외곽 지역으로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많고 신축중인 아파트나 빌라 등도 꽤 많다. 그리고 집을 새로 장만하여 이사하는 사람들 70% 이상이 자신이 현재 거주하는 지역에서 버스 정류장으로 몇 코스 내외의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이사하려는 심리가 있다. 그 이유는 가장의 직장이나 아이들 학교 때문이다.
그리고 사하에는 한 주에 평균 열 곳이 문을 닫는다면 열 곳 이상이 신장개업을 한다. 따라서 ‘생활정보 사하’ 만큼은 꼭 될 줄 알았으나 역시 네 번 발행하고는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땐 더 이상 무엇을 해보려 해도 빚만 잔뜩 생긴 데에다 의욕마저 다 꺾인 상태였다. 그리고 밀린 전기세가 100만원이 넘었고, 1년 넘게 밀린 전화세는 자그마치 400만원이 넘었기에 곧 이어 사무실 전기도 끊기고 전화도 끊겼다.
그뿐만 아니라 밀린 급료도 500만원 돈이요, 사무실 임대료도 10개월이 넘게 밀려 있어 그야말로 숨이 막힐 지경이요, 모든 것이 엉망으로 돌아갔다.
10년 전에 겪은 부도를 극복하는 데엔 그다지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으니 내 일생을 통해 금전적으로 가장 혹독하게 시달렸던 때가 바로 그즈음이었던 것 같다.
결국 모든 직원들을 어거지로 한꺼번에 내보내고 더 이상 이런 헛된 짓거리를 벌리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혼자서 미친 듯이 학원이나 대형 업소들을 찾아다니며 홍보인쇄물 등 일반 인쇄물을 주문 받아 밤낮없이 일을 하기 시작했다.
신문보급소를 한다는 그 사내는 ‘생활정보 사하’란 생활정보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할 즈음, 내 밑엣 직원, ‘손 아무개’이사에 의해 생활정보신문의 다대, 장림, 하단지역 광고 영업권을 갖는 조건으로 500만원을 보증금으로 걸고 들어왔었다.
그러나 신문이 이후 두 번인가 더 발행되고 중단되자 500만원을 당장 내놓으라며 하루가 멀다 하고 땡깡을 부리는 것이었다. 그 500만원은 이미 몇몇 직원들의 밀린 급료로 지불된 이후였다.
결국 그 돈은 몇 차례로 나뉘어 한 달 보름 만에 돌려주었는데, 그 때문에 그가 그리 곱게 보일 리는 없었다.
그 사내는 내가 생활정보신문을 중단하고 직원들을 모두 내쫒자 그 즉시로 그중 자칭 ‘신문 도사’라는 손 이사와 김 부장 등 두 직원과 눈이 맞아 다른 곳에 사무실을 얻고 ‘서부산신문사’를 차렸다.
결국 차린 지 몇 개월 만에 자칭 도사들로 말미암아 적잖은 금전적 손해를 보고는 손을 털었던 것이다.
이후 그는 내게 몇 번인가 찾아와서 ‘사하신문’을 다시 만들자고 제안을 하였다. 그리고 그는 ‘신문해서 돈을 벌 생각은 추호도 없다.’며, 또 ‘매달 300만 원 정도는 꼴아 박아도 괜찮다.’라며 은근히 자신의 경제적 능력을 과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사하라면 지긋지긋하다.’고 고개를 절래 절래 내저었으며, 또 ‘지금 이렇게 혼자서 일하니 마음이 날아 갈듯 편하고, 돈도 벌고 있지 않느냐.’며 그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불과 몇 달 사이에 밀린 전기료며 전화세며 임대료는 물론, 밀린 급료도 다 정리하고 그한테 보증금으로 받았던 돈도 다 돌려주고도 오히려 수중에 몇 백이 고여 있으니 좋았고, 무엇보다도 데리고 있는 사람이 없으니 그게 더 홀가분했던 것이다.
전화세가 매달 평균 40만원 돈이 나왔는데 혼자 있고부터는 월 3만원도 안 나오며, 전기료도 월 30만원이 넘게 나오던 것이 4만원 남짓밖엔 안 나오는 것이다.
그것뿐이랴? 화장지도 한 뭉텅이 사다 놓으면 열흘도 못 가던 것이 나 혼자 쓰게 되니 반년이나 가는 것이다.
그러니 신문이다 뭐다해서 돈은 돈대로 날리고 고생은 고생대로 했으니 ‘혼자 있는 게 이렇게 좋은 걸 왜 그 짓한다고 사서 고생을 했었나?’싶었던 것이다.
그 어려운 와중에서도 회사에 대해 눈곱만큼도 애정을 보이지 않던 직원들의 불성실과 게으름, 불평불만은 또 어떻고?
그 사내가 하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자 결국 난 이런 제안을 그에게 했다. ‘사무실과 편집장비, 사무집기, 전화 등 사업에 필요한 모든 것은 내게 다 갖춰져 있으므로 내가 제공하겠다. 대신 당신은 한 아가씨 월급과 사무실 유지비 일체를 책임져라. 그리고 신문은 격주로 8면, 월 2회 10,000부씩 제작하고 그 편집료로 매달 나에게 300만원씩 지불해라. 취재와 인터뷰 등 기사는 내가 작성하되, 당신은 신문 보급소를 하는 만큼 업소들을 많이 알 터이니 광고를 책임져라. 그리고 신문 제호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 사하신문으로 정하자.’
그러나 그 사내는 이 약속마저 끝내 져버렸다. 아가씨 월급은 부담하였으나 사무실 유지비는 한 푼도 부담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게 매달 100만원씩만 지불했다. 그렇게 3개월이 지난 다음 어느 날, 내겐 사전 의논조차 없이 아가씨마저 데리고 갔다. 그 3개월 동안 신문은 단 한차례만 발행했을 뿐이다. 창간예비호로…….
몇 번씩 기사를 바꿔가며 편집을 완성해도 광고 한 건을 못 물고 오는 것이다.
그러니 광고 지면을 비운 상태로 신문을 찍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사내는 신문이 제대로 못 나온 책임이 자신에게 있었음에도 괜히 내게 고까운 감정을 가졌던 것이다.
그 사내는 이후 별도로 사무실을 얻고 장비와 집기들을 갖추고 직원을 셋이나 쓰면서 지난 일 년여 두 달에 한번 꼴로 겨우겨우 몇 번에 걸쳐 신문을 '개차반'으로 발행하여 오더니 어제 내게 다시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직원들 모두가 그만 뒀다. 달라는 대로 월급을 줘도 제멋대로더라. 이미 투자한 돈과 까먹은 돈만 7천만 원이 넘는다. 전번 요구사항을 다 들어 줄 테니 한번만 도와 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 또한 내년 2월초부터 새로운 잡지 하나를 창간할 것이다. 이번 잡지는 내 몸이 으스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나 혼자서 취재, 편집, 인쇄. 배부, 수금을 다 할 것이다. 그래서 돈을 엄청나게 벌어 볼 계획이다.’라며 점잖게 거절했다.
- 끝 -
(200자 원고지 32매 분량)
2002/12/28/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