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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수련: 아무것도 아니어도 괜찮아(월간마음수련3월호)
마음수련 웹진에서 퍼왔습니다 마음수련 테마 기획 아무것도 아니어도 괜찮아
마음수련 테마기획
"아무것도 아니어도 괜찮아"
마음의 시대, 나를 찾는다 (1)
우리는 경쟁이 상식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지금보다 더 나아져야 하고, 이루어야 하고, 가져야 하고, 그래서 무엇인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옛날보다 나아졌는데, 여전히 마음은 궁핍합니다. ‘가난한 마음’이 되라 했건만, 끝없이 견주며 빈곤한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아무것도 아닌 나’가 되는 일은 자존의 상실이나 위축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참된 자신이 되는 일입니다. 세상의 모든 마음을 품을 수 있는, 가장 낮지만 가장 큰 하늘의 마음입니다
“한 평 속에 갇힌 원숭이면 어때요, 호떡 굽는 게 행복해요”
노래 부르고 마술 보여주는 호떡 장수 김민영씨의 ‘호떡 인생론’
서울 남영역 삼거리. 길거리 호떡집 아저씨가 와이셔츠에 나비넥타이를 매고 호떡을 굽는다. 노점이지만 배달도 되고 음식물 배상보험, 화재보험에도 버젓이 가입돼 있다. 손님을 위해 노래를 불러주고 마술도 보여준다. “이런 생각을 해요. 나는 ‘한 평 속에 갇힌 원숭이’라고요. 이렇게 서서 호떡을 굽는 게 행복해요. 사실 전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근데 경기가 안 좋다고 모두 찌푸린 요즘에도 저는 좋기만 해요.” 한때는 주식투자로 거액을 날리고, 자살까지 생각하며 절망 속을 헤맸던 김민영씨. 마흔여섯에 어렵사리 호떡 장사를 시작하며 땀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는 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무엇이나 할 수 있는, 자신감 하나만큼은 최고”라고 스스로를 소개한다.
취재, 사진 정하나
공사판 질통을 짊어지고 깨달은 것
2001년, 무덥던 여름 어느 날 김민영씨는 굳은 결심을 하고 인력사무소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소개받아 공사판에서 이틀 동안 일을 했다. 생전 처음 질통을 진 그에게 열 살은 어려보이는 젊은 미장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반말투였다. “아저씨 빨리빨리 해.” “밑에 가서 저거 가져오고!” 그는 땡볕에서 벽돌과 자재를 나르며 아무 말 없이 시키는 대로 일을 했다. “질통을 지고 일하는 무리 속 한 사람, 참으로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 중 하나였지만 이상하게 마음은 편안한 거예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 연약해 보이는 여자들, 묵묵히 함께 일하던 사람들 하나하나가 대단해 보였어요.” 주식투자로 빚더미에 올라앉아 자살까지 생각하던 그때, 공사장의 인부가 된 김민영씨는 참으로 소중한 것을 얻는다. “이틀을 그렇게 하고 나니 자신감이 생기는 겁니다. 정말 인생의 가치가 땀이구나, 내가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는 그만큼 노력하고 땀 흘리는 것이 진실한 삶이라는 것을 안 거지요.
무슨 일인들 못하겠나, 아무것도 없다는 걸 인정하고 다시 시작해보자, 그렇게 마음을 다잡게 된 겁니다.” 수개월 동안 좌절과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던 그가 다시 일어난 날이었다. 1957년 전북 김제에서 3남 3녀 중에 셋째로 태어난 그는 농공고를 졸업하고 지금은 ‘KT 링커스’가 된 한국통신공중전화 익산 지점에 입사했다. 어린 시절 워낙 가난하게 자라서 안정된 가정을 일궈보고자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그 덕분에 입사한 지 9년 만에 5급에서 4급으로 승진하며 과장이 되었다. 점차 살림이 펴지며 여윳돈도 생기자 욕심이 생겼다.
주식에 관심이 쏠렸고, 처음엔 가볍게 시작했는데 갈수록 시세 차익이 불어났다. 나중에는 아예 노트북과 전화통을 붙들고 수시로 정보를 찾고, 넣다 뺐다 거래에 매달렸다. 99년에는 거래량이 12억 원에 달했다. 하루가 다르게 돈이 불어나니 주식만 생각하면 밥을 먹지 않아도 즐거울 정도였다 한다. 조금만 더 불려서 큰 건물을 사고, 더 큰 부자가 되고…. 그러나 화려한 꿈은 거기까지였다.
추락을 거듭해 2001년 초, 12억은 몇 백도 안 되는 돈이 되었고, 남은 것은 빚과 눈덩이처럼 불어난 카드빚뿐이었다. 나락으로 떨어진 그는 어떤 희망도 찾을 수가 없었다. “사는 게 허무해지고 비참하고 처절했지요. 당시에는 모든 게 내 탓이라는 생각도 없었어요. 원망뿐이었죠. 안되면 세상 탓, 잘되면 나 잘나서 잘된 거라는 그런 오만을 가지고 살고 있었던 겁니다.”
“사람은 쪽팔려 봐야 마음이 바뀝니다”
죽음도 생각했지만 가족들에게 더 큰 짐을 떠안길 수는 없었단다.
이렇게 가다가는 가족들마저 잃을 것 같은 두려움에, 그는 자존심을 내던졌다. 생전 처음 찾아간 ‘인력사무소’ 그리고 공사장의 막노동. ‘바닥’이라 생각했던 그곳에서 그는 살아갈 힘을 얻은 것이다. 2001년 봄, 부족함 없이 살던 김민영씨네 다섯 식구는 전북 익산을 떠나 서울의 10평 남짓 허름한 전세방에서 다시 시작을 했다. 큰딸이 중학교 1학년, 막내가 다섯 살이었다. 아내는 파출부와 식당일을 했고, 그는 퀵서비스 같은 일을 닥치는 대로 했다. 그렇게 해서 모은 돈으로 그해 7월, 무더위에 호떡집을 시작했다. 그의 나이 마흔여섯이었다. “안정된 직장에 다녔다는 마음이 있으니 처음엔 처량하고 창피했죠. 그걸 감내한 거지요. 앞으로 다시는 일어설 수가 없을 것 같았는데, 이젠 어떤 일도 할 수 있으니, 그래서 사람은 ‘쪽팔려’ 봐야 되나 봐요.(웃음) 그래야 생각을 바꿀 수가 있잖아요.”
그는 “지나간 과거는 부도난 수표고 미래는 약속 어음이니 땀과 노력으로 쌓은 것만이 결과를 만들어준다”고 말한다. 그는 손님들이 찾아주는 호떡을 만들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했다. 나비넥타이에 정장을 했던 것도 손님을 신으로 모시겠다는 마음에서였다. 맛있는 호떡을 만들기 위해 서울 시내의 호떡 가게란 가게는 다 들러 맛을 보고 연구 분석을 했다. 밤 11시에 집에 와서도 다시 호떡을 만들며 날이 새도록 실험을 했다. 과일부터 한약재까지 안 넣어본 것이 없었다. 한 달, 두 달이 지나자 맛있다며 찾아주는 단골손님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또 한 번의 욕심이 시험으로 다가왔다. 호떡 장사를 시작한 지 6개월 정도 되었을 무렵, 다시 주식에 손을 댄 것이다. 뭔가 크게 한 건 할 수 있을 것 같았단다. 그나마 모은 돈에 빚까지 끌어들여 7천여 만원을 투자했지만, 금요일에 산 주식이 사흘 뒤에 거래정지가 되어버렸다. 한동안 그는 호떡도 굽지 않고 방황했다. 아내도 그에게 실망하고 힘들어했다. 그는 다시 한 번 부끄러움과 자책감에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그 후 그는 정말로 주식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그날 이후로 호떡을 위한 그의 노력은 가히 눈물겨운 것이었다. 만능 엔터테이너가 무색할 정도로 어떻게 하면 손님을 즐겁게 해줄 수 있을까 연구했다. 웃음치료사, 레크리에이션, 마술까지 섭렵한 그는 마술 3급, 레크리에이션 2급, 웃음치료사 2급 자격증까지 갖게 되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온 지 8년째, 지금은 빚도 다 갚았고 다섯 식구가 살 집도 마련했다.
그의 이야기가 방송에 나가면서 여기저기서 강연 요청이 끊임없이 들어오는 명강사가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거리에서 호떡을 굽는다. “제 취미가 노력이에요. 머리가 나쁘거든요. 그러니까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어요. 마술 한 가지를 보여 드리기 위해 손에 멍이 들 때까지 연습을 합니다. 땀으로 이룬 것은 쉽게 사라질 수 없잖아요. 그걸 모르면 사람은 죽는 날까지도 끊임없이 헛된 욕심 부리며 힘들게 사는 겁니다. 12억을 인생 수업료로 냈다는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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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무것도 아니어도 괜차나,,
아무것도 아니면 정말 편해 ㅋㅋㅋ
아무것도 아니어도 괜찮아!!
손님들이 찾아주는 호떡을 만들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했다. 나비넥타이에 정장을 했던 것도 손님을 신으로 모시겠다는 마음에서였다. 맛있는 호떡을 만들기 위해 서울 시내의 호떡 가게란 가게는 다 들러 맛을 보고 연구 분석을 했다. 밤 11시에 집에 와서도 다시 호떡을 만들며 날이 새도록 실험을 했다. =>정말 대단하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