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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상상과 현실의 중국 역사기행 원문보기 글쓴이: 이철락
티벳의 역사를 간단히 보면......(길지만 꼭 한번 읽어보시길... 나중에 티벳과 몽고관련 역사기행이 적지 않게 나올것입니다~~)
티벳이 역사기록에 나타나는 것이 중국춘추전국시대 강족이다.강족 거주위치는 칭하이성(청해) 이고, 티벳은 같은 계열의 민족이지만 역사에 등장하지 못한 시기이다. 티벳인은 언어족으로 티벳어-중국어족이니 우랄어-알타이어족인 북방민족과는 선사시대에는 다른 역사경험을 가진 것으로 볼수 있다.
4세기(5호16국시대)에는 초원지대와 북중국을 장악했던 선비족(몽골계,알타이어족) 일파가 강족을 정복 지배하여 토욕혼(청해)을 건국하였다. 이시기 토번은 티벳지역에서 건국하여 국가모습을 갖춘 왕조로 성장한다.
티벳역사 전성기을 만든 토번왕 송첸캄포(당태종 시기)가 토욕혼과 전쟁을 시작하여 대부분 땅을 빼앗고 토욕혼은 작은 소국으로 전락한다. 토번위력에 압박받은 당은 문성공주를 토번으로 시집보내고 당나라 산물을 제공하는 것으로 화평을 얻는다.
당현종 중기에는 당과 토번이 먼 변방 소발률(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지배권을 놓고 전쟁을 하게 되는데 고선지의 활약으로 당이 승리하여 동서문명교류역사의 중요한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현종 말기 안록산반란때에는 토번이 장안을 점령 약탈하는 일도 발생하였고, 토번은 당의 지원으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던 토욕혼을 멸망시키고 중앙고원 전체를 통일하였다.
9세기에는 토번도 멸망하고 군소국가들이 난립하는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11세기 청해/깐수성은 탕구트(장족)가 서하를 건국하였으나, 몽골 징기스칸에 멸망하고 만다.
티벳은 여러 라마교 종파로 각각 분리된 상태에 있었는데, 징기스칸 손자 고덴이 사카파의 고승 사카판디타를 초청하여 티벳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여기서 최왼제도가 생겨났는데 이는 1911년까지 티벳역사의 정치외교제도 골격이 되었다. (바로 이 백탑사에서 벌여진 역사적인 사건임)
쿠빌라이때에는 사카파 티벳고승 팍빠가 국사가 되어 라마교는 몽골제국의 국교로서 보호 육성되고 쿠빌라이는 전륜성왕으로 칭송되었다. 사카파는 티벳에서 우월적지위를 행사하는 종교정치권력의 중심점으로 행정치안, 세제, 종교등에서 원으로부터 독립적인 권한을 가지게 된다.
명나라 때에는 중국왕조가 군사안보까지 지원해주는 최왼제도는 존재 할 수 없었다. 이때 티벳은 여러 종파가 분열되어 존재하였는데, 모든 고승/왕이 외교관계를 요청하면 명은 거절할 수도 없었지만 이이제이 전략과 부합하여 3법왕 5왕 모두 외교관계를 가지게 된다. 동아시아 국가간에 있었던 조공관계와 비슷한 관계를 중국과 티벳이 가지게 된다.
티벳은 고산지대라서 중국에서 재배되는 차가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물품이다. 티벳은 말을 조공품으로 주면 명나라 조정은 차를 티벳 국가들에게 하사해 주는데 일반 시장에서 교환 할 수 있는 물품 교환가치의 수배에서 수십배 많은 차를 주었다. 티벳 여러 국가들이 수시로 조공회수를 늘리고, 사람 파견규모도 점차 대형화 되면서 명조정의 경제적 압박이 심하여 횟수 인원수를 제한하곤 했는데 이러한 제한은 종종 분쟁이 발생하여 실효성이 없었다.
여기서 잠시 눈을 돌려 조공무역 이해를 위하여 다른 지역관계를 보자 조공횟수 인원수 제한 문제는 여러번 명과 유목제국간의 긴장/분쟁이 발생하여 명이 조공을 받지 않는다는 이유로 침입 약탈과 전쟁이 벌어지곤하였다. 조선은 농경민족 국가라서 명이 조공 안 받겠다고 해서 전쟁까지 벌일 필요가 없는 자급경제사회였으나, 유목국가에게 중국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은 생존에 절대적이다.
티벳역사는 원부터 긴밀한 관계를 가져온 유목민족과 분리될수 없고, 이들과 티벳은 운명공동체 관계이다. 원이 중원에서 쫒겨나서 북방민족들이 분열되는데 몽골(징기스칸 후손), 오이라트(툰트라 산림인에서 신강성, 카자흐스탄에 이주한 유목민), 여진이 북방 역사주인공이었던 중요한 민족이다.
초기에는 오이라트가 흥기하여 에센칸(~1454)이 토목보전투에서 명나라 영종을 포로로 잡아 북방초원을 제패하였다. 초원에는 징기스칸의 자손(황금씨족)이 아니면 칸이 될 수 없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에쎈은 많은 징기스칸의 후손들을 살해하고 칸의 지위를 지키고자 하였으나, 불문율로 인하여 결국 살해당하고 만다. 얼마 남지 않은 징기스칸 후손인 몽골 다얀칸(~1524)이 흥기하고 손자인 알탄칸이 광대한 영토를 이어 받아 초원을 지배한다. (다얀칸과 알탄칸에게 명군은 여러번 전투에서 괴멸적 타격을 받는다)
알탄칸(~1582)의 고민은 여러 다얀칸의 자손중에서 지도력를 확보하기 위하여 티벳 겔룩파 고승 소남가초를 초청하여 최왼관계를 맺게된다. 알탄칸은 소남가초를 달라이라마로 처음으로 칭송 하는데, 소남가초는 종교적인 이유로 3세로 호칭하였다. 알탄칸은 티벳에서 겔룩파의 우월적 지위를 지원해 주었다.
달라이라마3세(소남가초)는 알탄칸을 전륜성왕으로 칭송하고 전 북방 초원에 라마교를 포교하였고 알탄칸의 손자를 달라이라마4세로 지명한다. 북방초원이 모두 라마교에 귀의하여 달라이라마의 종교 교화력이 절대적으로 된 시점이다. 만주는 여진족 누르하치(~1629)가 후금을 건국하고, 아들 홍타이지(~1643)는 조선전쟁후에 내몽골 지역에서 몽골 대칸인 차하르부 릭단칸을 격파한다. 릭단칸은 청해로 가서 재기를 노렸으나 사망하고, 릭단칸의 왕비와 아들이 대원제국 옥새를 홍타이지에게 양도한다.
홍타이지는 여진족, 몽골족, 한족(요동 거주 한족) 모두를 모아 놓고 이들의 추대로 징기스칸의 대업을 이어 받았다고 선언하는 의식을 가지게 된다. 청은 명의 한족중국이 아니라 중국과 북방 초원을 모두 소유할 권리가 있다는 논리이다.
홍타이지 아들 순치제가 북경을 점령하고 먼저 해야 할 일이 바로 최왼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청왕조가 몽골제국 옥새와 병행하여 달라이라마의 종교지도에 의한 정통성 확보가 이루워 지기 때문이다. 순치제는 달라이라마5세를 북경으로 초대하고 국사로 모신다. 청황실은 이에 대한 댓가로 라마교의 지원육성 그리고 달라이라마의 티벳지배권을 보호해주는 의무를 가지는 관계이다.
청조는 북방민족의 위협은 중원제국의 흥망에 직결된 사안인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남명정권 전쟁하는 중에 북방민족을 안정시키는 노력의 결과이다. (참고로 청제국은 한족국가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해주는 사례가 17세기 러시아와 체결한 네르친스키 국경조약문서인데 4개 언어로 쓰여져 조인된다. 이 문서는 국제공통어 라틴문자, 러시아문자, 만주문자, 몽골문자이며 한문은 제외되어 있다)
당시 북방 민족구성은 오이라트족는 초로스, 두르베트, 호쇼트(청해 거주), 토르구트 4개부족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몽골족은 막북(현재 몽골)의 할하, 막남(내몽골)의 차하르, 요동의 거란계열 몽골족이 있었다. 여진족은 건주여진(압록강위), 해서여진(두만강위), 동해여진(흑룡강가)으로 분류될수 있다
건주여진 출신 누르하치가 부족을 통일하고 해서여진 일부, 거란계 몽골,한족(만주거주) 및 조선족(만주거주)을 제압했다. 홍타이지가 잔여 해서여진, 동해여진, 차하르몽골(대원 옥새를 양도한 몽골부족)을 제압했다.
두르베트와 초로스가 합하여 준가르 라는 새로운 북방 강국이 건국하여 갈단칸은 위그르(투르크족)를 복속시키고 신장성/카자흐스탄 지배하였다. 그리고 갈단칸은 막북몽골, 청해를 위협하였는데, 당시 동맹관계는 청 강희제, 티벳 달라이라마 5세, 청해 구시칸, 몽골 할라부족 4각 동맹으로 러시아와 협력하는 준가르를 견재하고 있었다. 달라이라마5세는 상게가쵸를 데시(관리자)로 임명하여 티벳을 통치하다 1682년 서거하면서 상게가초가 티벳을 기존동맹에서 이탈하여 준가르로 기울어져 있었다.
준가르(갈단칸)가 몽골 할라부을 침공하자 청조에 지원을 요청하고 내몽골로 피난하였다. 강희제는 이러한 찬스를 이용하여 팔기군을 이끌고(1696년) 할하부족과 함께 준가르의 갈탄칸을 몽골초원에서 격파한다. 할라는 몽골로 돌아가고 청조에 편입되는 계기가 되었다. 갈단의 패배에 발맞추어 1705년 청의 동맹인 호쇼트가 티벳을 침입하여 상게가쵸를 살해하고 달라이라마 6세을 폐위시키고 새로운 6세를 옹립하였고 청은 이를 적극 찬성하게 된다. 1717년 준가르 쪼왕랍텐칸은 티벳을 침공하여 호쇼트 칸을 살해하였다. 강희제는 1720년 군대를 티벳에 파견하여 준가르를 격퇴하였다. 이러한 소동으로 북방 여러부족 칸들이 모두 소멸되는 결과가 되었다. (준가르전쟁은 이후 건륭제때 끝나는데 청이 신강성을 지배하게 된 결과이다)
강희제는 겔상가쵸를 달라이라마6세로 정하고 5명의 카론(지방통치자)를 두어 달라이라마를 보필케 하고 군대를 철군하였다. 1727년에는 카론간의 분쟁이 발생하여 옹정제가 군대를 파견하여 진압하고 주장대신을 파견 티벳 내부 행정을 청이 개입하는 단초가 되었다.
1788,1791년 네팔 구르카가 티벳을 침공하자 건륭제는 군대를 파견제압후 철수한다. 청군대의 출동은 1793년 장내선후장정(요즘말로 조약)이 발표되게 되었다. 장정의 중요 내용은 1) 신임 달라이라마 지명에 간섭 2) 통화/상업/조세/행정 감독 3) 티벳국방 달라이라마호위대창설 및 지방군 편성 4) 초원지대(몽골,청해) 불교활동의 사전보고 등이었으나 19세기 이후 청 전성기의 쇠퇴, 달라이라마의 반발로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건륭제는 쿠빌라이의 환생이라고 주장하고 열하(승덕 피서산장 이야기 참조)에 대규모 불교사찰을 건축한다.(청재정이 피폐해진 때가 건륭제 말기인데 티벳원정, 신강성 준가르전쟁 및 청 본토에서의 대규모 불사등이 중요한 요인이다.) 티벳이란 땅이 경제적이익을 가져오는 지역이 아니고 단지 외몽골, 내몽골, 청해, 깐수, 신강성 지역의 청황실 통치에 도움을 주기 위하여 달라이라마를 존중한 것이다
주장대신은 청황실과 달라이라마를 연결해주는 일(요즘말로 대사)이 임무였고 국방을 책임져 주는 나라의 대사이니 티벳 행정업무를 보조하거나 감시하는 정도의 기준이지 결코 달라이라마의 티벳통치력에 침해할 수 있는 위치는 기본적으로 아니었다. 몽골도 경제적 가치가 있는 지역은 아니었고 청조가 국방에 필요한 병력확보등을 위하여 국방예산을 지원하고 지역민에게 자치권을 인정하는 통치구조를 가지고 있다. 1840년 아편전쟁으로 외국에 대한 청의 대응능력의 급속한 쇠퇴는 티벳에서도 벌어졌다.
영국은 인도를 중심으로 식민통치권을 확장/안정하려고 노력하였는데 북으로 러시아와 아프가니스탄/페르시아에서, 동으로 네델란드와 태국에서, 북동쪽으로 청과 티벳에서 충돌하게 된다. 영국은 2개의 동심원을 그려서 1차 동심원은 네팔, 부탄, 아삼으로 하여 직접 통치하고 2차 동심원은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태국, 티벳으로 중립지대로 하려고 하였다.
1845년에는 티벳 라다크지방을 점령하고, 1860년 시킴왕국을 침공하고, 네팔과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티벳은 영국의 위협에 단호하게 대처하여 쇄국정책을 취하게 되는데, 이교도인 영국 또는 서양인과 교류하지 말것을 승려 및 관리에게 서약하도록 하였다.
영국과 티벳은 1차 (1888년), 2차(1903년) 전쟁을 벌이게 된다. 1888년 영국군 2000명과 티벳민병 900명이 티벳남부 야퉁에서 부딪치게 된다. 카사(티벳내각)는 민병 1만여명을 추가 투입하지만 영국군에 참패하였다. 이에 주장대신은 티베트 항전을 만류하는 조언으로 카사는 결국 야퉁 탈환을 포기하고 1차 라사조약을 체결하는데 티벳 남부 도시들을 개방하여 통상하는것이 주요 내용이다
1895년 달라이라마13세(텝툽가초)가 즉위하는데 이분이 티벳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동분서주 했었던 지도자였다
1904년 티벳이 자유로운 통상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영국군 3000명이 침입하여 2차전쟁이 벌어지는데 강력한 무력을 가진 영국군이 티벳민병을 격파하고 라사를 점령하게 된다. 1904년 영국-티벳대표간 2차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조약 내용은 1)티벳-영국 경계선과 2)통상확대/관세철폐 3)영국인 통행 4)티벳진지철거 5) 750루피 전쟁배상금 등이다
달라이라마13세는 몽골로 망명하여 2차조약을 승인하지 않고 1) 러시아 지원을 추진하였으나 러일전쟁중의 상태라 별 수득을 얻지 못하였고 2) 1908년에는 북경 서태후를 만나 영국대응 전략 및 티벳과 중국간 관계 재설정을 하려고 하였으나 달라이라마13세는 소득없이 큰 불쾌감을 가지게 되었다 (청황제 앞에서 끊어앉으라는 것인데 예전에는 국사인 티벳고승 에게 없었던 의식이었다) 이때가 아마 달라이라마13세가 티벳독립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가지게 된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달라이라마13세는 라사로 귀국한다.
영국은 러일전쟁에서 패전한 러시아와 1907년 페테르부르크에서 영러협정을 체결해 1)티벳에 러시아 비간섭을 확인. 2) 영국과 러시아는 티벳에서 청은 명목상 종주권을 인정하지만 내정간섭은 금지한다고 합의했다. 또한 영국은 청의 티벳파견대표와 1906년 양국 모두 티벳정치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합의하였으나 청조정이 이협정안을 공인하지 않았다. 영국의 티벳 중립지대 설정시도와 달라이라마13세의 독립움직임은 청조에 큰 충격을 줬다. 1909년 청조는 티벳에 대한 영토권을 확보하기 위해 사천성 군대를 라싸로 파병했다. 1910년 청군은 라싸를 점령하고 이에 대항하여 달라이라마13세는 인도로 망명하여 항쟁하였다. 청은 달라이라마의 칭호를 박탈하고 2인자인 판첸라마9세를 옹호하였으나. 판첸라마는 응하지 않았지만 달라이라마의 판첸라마간 갈등이 생기는 계기가 된다.
청군에 티벳 민병들이 항쟁하던 중에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났다. 티벳민병의 반격으로 보급문제가 생긴 청군이 패주하였다. 달라이라마13세가 귀국하고 모든 한족 및 주장대신을 추방했다. 1912년 위안스카이는 “중화민국 영토는 22행성, 내외몽골, 티베트, 칭하이로 한다”고 규정하고 티벳 행성을 설치하는 문제가 다시 제기됐다. 베이징주재 영국공사 조던은 위안스카이에게 “중국이 티벳에 대해 명목상 종주권이 있을 뿐 주권은 없다”고 전한다.
달라이라마13세는 민병대를 통해 위짱(라사지역)뿐 아니라 캄(티벳동부)과 암도(티벳북부)에서 한족세력을 몰아내었다. (1차 충돌) 영국공사 조던은 중국정부가 추가 티벳파병에 대해 항의하고, 중국군의 철수와 중화민국승인을 연계하고 또한 영국군의 티벳 개입압력으로 중국군의 진격이 멈춘다. 1912년 달라이라마13세는 티베트에 귀국한다.
1913년 중국대표 천이판, 티벳대표 뢴첸새자, 영국대표 맥마흔이 인도심라에서 3자회의를 개최한다. "티벳를 내장과 외장으로 구분하고 외장티벳은 자치를 승인하고 중국은 군대와 관리를 외장에 파견할 권리가 없다" 협의 하였으나 중국정부는 비준하지 않았다. 심라회의에서 영국과 티벳대표는 인도와 티베트의 국경지역 경계선(맥마흔선)을 국경선으로 한다는 문서에 서명하도록 요구했다. 이것이 나중에 중국과 인도간 국경분쟁의 단초가 된다.
티벳은 자국이 통치했던 지역을 인도국토로 한 국경선을 인정할 수 없었지만, 영국의 지원필요성으로 조건부로 비준을 유보한다. 조건은 영국이 티벳독립에 도움을 주는 것, 캄의 중국군을 철수 건인데 영국이 동의한 이 조건은 실현되지 못했다.
심라회의 후 영국이 제공한 차관 300만달러로 티벳은 군대를 증강한다. 1917년 티벳-중국간 국경분쟁으로 티벳이 금사강과 창두를 점령했다. (2차 충돌) 1930년 티벳군 4000명이 캄을 점령하고 청해까지 진격하였으나 중국군의 반격으로 패배한다. (3차충돌) 신해혁명이후 티벳은 최왼관계가 소멸하여 티벳은 당연히 독립국이라는 것과
중국은 티벳이 중국의 영토라는 관념차이로 3차례의 군사충돌이 있었다. (몽골은 과거 할부부족과 청황실의 관계소멸로 독립을 선언하고 소련의 지원으로 1921년 분리 독립한다)
1933년 달라이라마13세가 사망하자 중국 조문단이 파견되어 라사에 중국 몽장위원회, 영국 공사관이 설립 협의 된다. 티벳은 영국의 지원으로 독립을 희망하였으나, 영국은 인도 중국간 완충지대라는 정책을 유지하였다. 티벳은 1949년 몽장위원회에 근무하는 한족에게 티베트를 떠나라고 요구하고, 외교관이 영국, 미국 ,인도 ,네팔파견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벌였다.
중국은 국공내전이 종료되어 1950년 인민해방군은 창두를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티벳군 5700명이 죽고 2000여 명이 포로가 되었다. 1951년 중국과 티벳은 17조문 협약을 체결한다. 1) 제국주의 세력을 티벳에서 추방 2) 티벳 지방정부는 인민해방군 보급에 협조 3) 티벳은 민족자치를 실행할 권리 4) 티벳 현행 정치제도를 유지 티벳 독립을 추진하는 게릴라의 저항은 1951년 이후에도 계속 되었다.
중국는 티벳지배 준비작업으로 청장공로는 1954년, 신장공로는 1957년에 개통하고 캄과 암도에서 토지개혁을 진행했다. 1958년 게릴라조직의 결성 및 대규모 항쟁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1959년 대듀모 유혈사태가 벌어지는데 그 이유는 라사주둔 중국군대가 달라이라마를 초정 경극관람을 요구하는데 호위병을 없이 단신으로만 오라고 하였다. 달라이라마가 호위병 없이 이동하는 사례가 없었고 라사시민 사이에 달라이라마가 중국군에 구금될 것이라는 예상으로 많은 시민들이 포탈라 궁앞에서 중국군의 진입을 저지하기 위한 시위가 있었다. (라사는 1950년부터 캄지역, 암도에서 중국군과 교전에서 피난온 난민이 많았다.) 시위대가 궁을 1주일정도 지킨 후에 달라이라마는 티벳게릴라의 지원으로 라사를 빠져나온다. 달라이라마 탈출후 10일후 중국군이 비무장 시위대에게 발포로 대규모 학살이 자행되는데 첫날
15000명이 살해되었다. (중국기록은 사망자는 87000 명 이다)
달라이라마14세는 인도로 망명했다. 1959년 중국군의 서부 티벳점령도 이루워져서 전티벳을 중국군이 장악하였다. 1959년 시작은 항쟁은 1961년에 대체로 진압됐다. 1966년에는 중국 문화대혁명 광풍이 티벳에서 밀려와 홍위병들이 6000여 사원을 파괴하고 10개 정도의 사원만 모습을 유지했다. 종교탄압때 수많은 인명이 살해되고 대부분의 문화재가 파괴됐다. 티벳분쟁에 대한 논지는 티벳인은 종교/인권탄압으로 말하고 있고 중국은 인민해방군에 의한 농노들을 해방 및 토지개혁 으로 정당성을 주장한다. 1950년 부터 1970년 까지 티벳인의 희생자가 많았다. 희생자는 게릴라 전투와 피신과정, 비무장 시위대 진압, 사원파괴 과정에서 발생하였고 티벳망명정부에서 주장하는 사망자는 120만명(실종자 포함)인데 상당 설득력 있다고 보여진다.
1980년대에 들어 중국의 개혁·개방 물결은 티벳에 영향을 주여 금단의 땅인 티벳에 외국인도 통행할 수 있게 되고 한족의 티벳이주 및 경제권을 장악. 중국정부의 서장 개발 투자가 이루워 지고있다. 1987∼88년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가 있었지만 중국정부는 철저한 탄압으로 진압하였다. 티벳인권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이 이때부터 형성되었고 중국정부는 이를 내정간섭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티벳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원은 인도 네루수상이 1959년 달라이라마14세의 망명을 허용하고 인도북부 다람살라에 임시정부 수립을 지원하고 난민들을 수용하여 주였다.
(제3세계의 훌륭한 지도자 인도 네루수상과 유고의 티토서기장이 동서냉전이 극심하였을때 약소민족을 지원했던 대표적인 정치가 였던것 같다.)
1960년대에 이미 인도가 티벳은 중국영토 인정하여 분쟁을 종료하였고 중국과 교류를 위하여 국제적으로 티벳의 독립을 인정해 주고 있는 국가는 없다. 현재로서는 티벳이 자주독립할 수 있는 여건은 조성되어 있지 않고 앞으로도 간단해 보이지는 않는다.
이상은 네이버 지식에서 가지고 온 내용임
白塔寺
1229년 몽고제국이 서하제국을 멸망시키고 감숙성지역과 청해성 일부분을 점령할 때, 여러 세력으로 분리되었던 티벳지역은 거대한 위협을 느끼고 있었는 데, 징기스칸 손자 고덴이 사카파(薩加派)의 고승 사카판디타를 초청하여 티벳에 대하여 협의하였는데, 백탑사가 바로 西藏 宗敎 領袖 薩迦班智達(薩班이라 함) 과 몽고의 대표 西路軍 總帥 징키스칸의 손자 활단(闊端)이 거행한 “凉州會談”이 열린 역사적인 장소.
薩迦班智達이 “萨班致蕃人書”를 발표하여 티벳불교가 티벳을 벗어나 초원지대로 전파하고 티벳이 몽고제국의 영향아래 있다는 역사적인 증거가 있는 곳이며 또한 薩迦班智達이 량주(무주)이 수십년 동안 불법을 설하였고 원적한 곳.
징키스칸의 손자 활단은 살반이 원적한 후 살반대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여기에 42.7미터의 살반의 靈骨塔을 세우고 주위에 99개의 백탑을 세웠다고 함. 그래서 백탑사라고 함.
현재 중국정부에서 티벳은 이때부터 중국땅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음. 몽고족도 중국 56개 민족의 한 민족이고 또한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도 중국땅에서 있었으므로 당연히 중국의 역사이다(중국은 한족의 국가가 아닌 다민족의 국가라는 것도 엄청 강조하고 있음~~) 라는 의미로…(서부지방의 소수민족의 역사를 왜곡시키는 서북공정이라고 합니다. 뭐던지 덩치가 큰 쪽이 힘이 있는 쪽이 양보하면 서로가 원만해지지 않겠느냐 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문제는 중국이 어떤면에서 대국의 입장에서 양보를해주면 좋은데 소인배의 행동을 하는 면도 적지 않는 느낌도 있고....)
우리입장에서 보면 약소민족의 불행한 처지를 알 수 있습니다만, 흘러가는 역사의 일부분으로서 양측 입장의 정당성과 서로의 이익추구를 위하여 주장하는 논리를 한번 더 냉정하게 생각해야 할 부분입니다.
최근 조성한 징키스칸 손자와 티벳 고승의 동상
1개의 큰 탑과 99개의 탑이 있는 백탑사
돌 앞이 이전에 있었다는 백탑사의 유적임.
징키스칸의 손자 활단은 살반이 원적한 후 세운 42.7미터의 靈骨塔
대단한 규모의 살반 영골탑
100개의 백탑
백탑사내 박물관
원나라 영토
라마불교 영수인 살반이 무위까지 간 여정
현재 중국에서 티벳이 중국영토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 곳이 백탑사 박물관인 느낌임~~(왜곡시킨 부분도 좀 있는 것 같고)
살가파의 살반대사 : 박물관내에 있는 설명서를 읽어보니 참 위대했던 스님이었음. 미개하고 문자도 없었던 유목민족이었던 몽고족을 정신적으로 교화시킨 점은 역사적으로 남을 것이라 봄~~
원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전의 중국땅(금나라, 남송, 서하제국, 대리국, 토번, 몽고, 서료 등)
무슨 무협지 보는 느낌이 있는 흥미진진한 시대였음. 대만작가 김용선생의 많은 무협소설들이 바로 이때의 배경으로 했음.
아침 천제산 석굴에서 잠깐 본 아줌마인데 녕하회족자치구 박물관에서 근무하다가 현재 북경이공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역사학자라함. 백탑사 박물관에서 약 1시간 동안 중국역사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교류했음.
십수년동안 전 중국을 돌아다니며 보고 듣고 주워들은 이야기가 많은 곤륜산의 중국 여러지역의 역사관련 이야기하니 나중에 북경에 돌아가서 시간나면 저의 역사기행을 들어보고 싶다고 하길래 명함 한장 주었음.
아마도 중국사람 중에서도 중국 땅, 특히 역사기행을 저만큼 돌아다닌 사람이 많지 않아서리~~~~~~~
백탑사 앞에 있는 옛날 집인데 규모를 보아서 지주의 집인 것 같음. 중국 서부지역은 이전에 마적들이 많은 관계로 돈 많은 지주가 살았던 장원들의 담을 높이 쌓았음.
아래의 내용도 네이버 지식에서 가지고 온 것인데 동서양 학자들의 글을 인용하면서 전반적인 부분은 잘 정리한 글이라고 보는데, 후반부는 예수교 전파를 목적으로 판단하여 작성한 글이란데서 찝찝하지만~~~~~~
중국 티벳족과 라마불교
I. 티벳족의 다양성과 유사성
1. 티벳족 전체 인구
티벳족은 중국에서는 '칭장까오위엔(靑藏高原)'이라고 부르는 티벳고원에 살고 있다. 중국어 표현으로는 티벳족을 장족(藏族)이라고 한다. 티벳족 스스로는 자기들을 보(博)라 부른다. 전 세계적으로 티벳족의 전체 인구는 약 700만 정도이다. 이들 중 중국에 거주하는 티벳족이 673.6만명(중국민족통계연감, 1997)이고, 나머지는 네팔에 6만 명, 인도에 10만 명, 부탄에 3000명, 기타 미국, 대만, 유럽 등지에 소수가 살고 있다.
2. 티벳족의 하위 집단 : 언어 차이에 따라 하위 집단의 정체성 보유
티벳인을 복음화 할 때, 단순하게 접근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언어와 문화가 다른 다양한 종족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언어를 기준으로 티벳족은 다시 라싸장족, 캄바장족, 암도장족, 짜롱장족으로 나뉜다. 그들은 각기 다른 방언을 쓸 뿐만 아니라 생김새와 기질도 차이가 난다. 따라서 티벳족을 단일 집단으로 보고 사역을 시도하거나 전략을 수립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4개의 티벳종족 모두에게 '각각' 사역이 전개되어야만 티벳족 전체가 복음에 노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3. 티벳족의 유사성과 동질성
한편 이들에게 나타나는 공통적인 유사성과 동질감이 있다. 바로 '종교'와 '문자'이다. 위의 4집단은 모두 라마불교를 믿는다. 종교는 그들의 세계관을 비슷하게 만들고 있다. 티벳인 모두의 정신적 고향은 티벳불교의 성지인 라싸이다. 티벳인들에게 동질감을 강화시키는 다른 요소는 바로 '티벳문자'이다. 전체적으로 글자나 문법은 같지만 각각의 종족집단별로 어휘나 발음에 차이가 난다.
Ⅱ. 티벳족의 지리적 분포와 집단별 특징
1. 중화인민공화국 내 티벳족 거주 지역 분포
*서장자치구(西藏自治區) 내 티벳족 250만 명
*사천성(四川省) 내 티벳족 127.4만 명
아패(阿覇) 장족강족자치주 57.8만 명, 아패주 총인구의 72.3%
감자(甘孜) 장족자치주 69.6만 명, 감자주 총인구의 81.0%
*청해성(靑海省) 내 티벳족 99.7만 명
해북(海北)장족자치주 14.8만 명(자치주 총인구의 58.6%)
황남(黃南)장족자치주 17.5만 명(92.2%),
해남(海南)장족자치주 24.3만 명(63.7%),
과락(果落)장족자치주 11.5만 명(91.9%),
옥수(玉樹)장족자치주 24 만 명(96.5%),
해서(海西)몽고족장족자치주 7.6만 명(24.6%),
*감숙성(甘肅省) 감남(甘南) 장족자치주에 34.3만 명(54.3%),
*운남성(운남성) 적경(적경) 장족자치주에 27.7만 명(4.2%)
2. 중국내 티벳족 하위종족(집단)의 특징
1) 암도인 : 감숙, 청해성 자치지역과 사천성 아바자치주 북동부 지역(阿覇, 若爾盖, 紅原 등)에 걸쳐 분포되어 있는 암도인은 외모가 잘 생겼고 언어도 제일 고급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들의 거주 지역은 산으로 둘러싸인 고원지대이다. 그곳은 초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은 대부분 양과 야크 소를 키우는 목축을 하고 있다. 소외되고 고립된 지역이며 열악한 환경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다. 일부 저지대의 평원에는 농업과 공업단지가 최근 조성되었다. 암도인 가운데 기독교인은 약300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2) 캄바인 : 티벳 자치구의 동쪽에 있는 창도를 중심으로 자치구의 동부와 사천성 서부 간즈자치주 지역(주로 甘孜, 德格, 康定, 理塘지역), 및 운남성 장족자치주지역에 살고 있는 캄바인은 과거 숙련된 전사들로서 지금도 붉은 줄을 꼬아 머리에 쓰고 허리에 칼을 차고 다닌다.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은 고원지대로서 메콩강 양쯔강 살원강이 시작되는 발원지이지만 강수량이 255mm밖에 되지 않아 건조하고 춥다. 그들은 티벳어군의 캄어를 사용한다.
3) 라싸인 : 라싸인은 라싸를 중심으로 거주하고 있는데 이곳은 티벳의 정치 경제 종교의 중심지이다 이곳의 언어는 크게 보아 라싸시와 산남지구를 중심으로 한 전장(前藏)방언과 시가체(日喀則)지구를 중심으로 한 후장(後藏)방언으로 나눌 수 있다.
4) 짜롱인 : 짜롱인은 주로 사천성 아바자치주와 간즈자치주 일부지역에 살고 있다. 이들은 산악지대에 살면서 주로 반농반목에 종사하고 있다. 이들이 사는 곳은 비교적 굴곡이 많은 산악지역이어서 지역별로 방언의 다양성이 크다. 어떤 사람은 약 18개의 방언으로 구분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들이 사는 곳은 간즈자치주의 丹巴, 道孚 등지와 아바주의 金川, 小金, 黑水, 馬爾康, 汶川, 理縣등의 현이다. 이들 중 평야와 가까운 지역에 살고 있는 짜롱족은 일찍부터 강족이나 한족과 같은 민족들과 교류를 하며 생활하였다. 고도가 낮은 지역 가까운 교외지역에 살고 있는 짜롱족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Ⅱ. 현재 티벳 선교의 장애물과 기회
1. 지리적인 환경
티벳족들은 평균 해발 3000m 이상의 고산지역에 주로 살고 있어, 선교사들이 이러한 환경에 적응하며 생활하는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칭하이나 라싸 등지에서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들을 보면 산소 결핍으로 사역자들이 건강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다른 지역에 비해 가족의 적응 자녀교육 등 선교사의 복지 면에서도 상대적으로 다른 지역보다 매우 열악하다.
2. 중국 정부와의 정치적인 갈등과 긴장
티벳족은 역사적으로 독립국가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다른 소수민족과 다르게 독립을 이루려는 움직임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특별히 해외에 망명중인 달라이라마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중심의 종족이므로 이로 인해 중국의 중앙 정부와 늘 긴장상태를 이루고 있다.
3. 라마불교의 세계관
티벳족은 라마 불교라는 종교로 그들의 아이덴티티가 형성된 종교집단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유난히 종교적인 세력이 그들의 삶과 의식구조를 강하게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지리적인 여건 때문에 오랫동안 외부와 단절됨으로 인해 다른 사상이나 세계관과의 접촉기회가 없어 그들의 종교적 세계관은 오랫동안 강화되어 왔으며 이를 헤치고 들어갈 공간이 상대적으로 비좁다고 판단할 수 있다.
4. 사회적인 결속
이슬람과 마찬가지로 티벳족도 종교지도자나 종교기관이 지역사회의 중심에 놓여있고 사회관계의 중심이 위치하고 있다. 티벳인들의 거주지에 가보면 라마사원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활불'과 같은 종교지도자들은 그들의 의사결정에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짓는 것에서부터 죽은 부모의 장례법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일생의 모든 일들을 라마승과 상의하여 결정한다.
또 공산화 이후 현재까지 그 수가 줄어들어 있더라 하더라도 각 가정마다 거의 한 두명은 라마승려이다. 이들을 통해 모든 티벳인은 자연스럽게 라마교와 연결되어 있다.
5. 장애물에 대한 우리의 고백
상기한 티벳 복음화의 장애는 결코 영속적인 장애가 아니다. 관점과 접근방법에 따라 오히려 현재의 티벳종족 상황은 복음화의 기회로 작동된다. 마치 구약의 가나안 땅을 정탐했던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은 믿음의 눈으로 전략적으로 바라보면 티벳 복음화의 큰 공간과 기회가 보인다. 바로 중국의 개혁개방이 주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변화가 선교 기회를 확대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이것을 기화로 서구의 문화, 문물이 유입되면서, 라마불교를 더욱 더 약화 혹은 세속화시키고 있는 것도 복음의 수용성을 높이고 있다.
Ⅲ. 라마불교 이해
1. 라마교 이전의 티벳 종교와 라마교의 탄생
1) 라마의 의미
라마(喇徥)란 티벳어의 음역으로서, "높은 스승", "교사"를 의미하는 말이다. 보통 이들의 학문은 깊이가 있어, 사람들이 사표(師表)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대표적인 예로서 달라이 라마와 빤찬 라마를 들 수가 있다. 라마가 아닌 보통 승려들은 통상적으로 "짜바(札巴)"라고 불렀다. 티벳인들은 "라마 스승이 없이, 어떻게 석가모니에 가까이 할 수 있는가?"라고 하여, 곧 라마를 천상(天上)의 석가모니에 현현(顯顯)으로 비유하고 있다. 이처럼 티벳에서는 라마교 사원의 지도자와 고승을 "라마"라고 통칭하여 부르고 있다.
라마교는 티벳지역 불교의 속칭이다. 이 때문에 티벳인들은 "라마교"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싫어한다. 티벳인들은 자기네 종교를 일컬어 "상결등파(桑結登巴)"라고 부르는데, 이는 바로 불교를 의미한다. 그래서 라마교 대신 "티벳불교"라고도 한다. 티벳 지역에 불교가 유입된 것은 기원(AD) 7세기경이다. 이 때 중국 내지와 인도에서 불교가 전래되었는데, 불교의 전래 이후로 원래부터 티벳 지역에 존재하던 전통 종교인 "본교(本敎)"와 상호 영향을 끼치면서, 갈등과 융합의 과정을 거쳐 10세기경에 독특한 티벳 불교를 형성하게 된다.
2) 토착종교 - 본교
본교는 일종의 다신(多神)적 종교로, 티벳 고원의 옛 민간 자연 숭배에 기원한 종교이다. 우주 만물에 정령이 있다는 정령(精靈)신앙이다. 본교의 특징은 기복(祈福)에 있다. 이 종교는 복을 불러들이고 재앙을 막는 것을 목적으로 한 민족 종교로서 부족 시대 당시 원래 "무"부족에게서 "챠"부족에게로 계승되어 전해졌다.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하여 생명신 "라"를 숭배하였으며, 병에 걸리면 각종의 악마를 물리치고, 죽음에 즈음해서는 희생으로 바쳐진 가축을 이끌고 영원한 죽음의 나라에 이르러, 조상의 영력과 함께 끝없는 휴식을 누릴 것을 염원했다.
본교의 무사(巫師), 무당(巫堂)은 신과 통하는 선지자로서, 그 최고 대표자를 "시엔루어미빠오(賢若米保)"라고 불렀다. 이 사람은 재앙을 해결해주는 해결사였으며, 귀신 신의 대표자였다. 당시에 각종의 무술, 무당 행위가 많았는데, 심지어 인간의 혼인, 장례, 질병 등에 영향을 끼쳤다. 당시 본교의 무사, 무당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으며, 그 권력 또한 막강했다. 후에 투르판 왕조 시대에 이르면 "짠푸"의 장례식 및 새로운 "짠푸"의 임명 등에 본교의 무사, 무당이 주관을 하게 된다. 이 때에 이르면, 본교 무사의 지위가 자연적으로 노예주 귀족으로 전환이 된다.
본교의 급속한 발전은 투르판 왕조 체제를 위협하는데 까지 이르는데, 특히 본교 교의의 원시 평등제 등이 강력한 왕권 권립에 악영향을 미치고, 본교가 왕권 신수설과 왕권의 지고 무상에 도움을 주지 못하게 되었다. 즉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본교가 백성들을 통치하기 위한 정신적인 이데올로기로서 적합하지 않게 되어 가던 바로 이러한 때에 불교가 티벳 지역에 전래되었다. 불교는 불교가 가진 "인과 응보", "생사 윤회", "순종", "인내", "지옥과 천당 설" 등 본교에 비해 왕실의 집권과 통치에 강력한 힘이 되었다. 또한 비교적 높은 정신적 차원의 욕구를 만족시켰기에, 당시 투르판 왕실에 열렬한 환영을 받게 되었다.
불교와 본교의 갈등은 결국 전통 종교를 숭배하던 무사와 각 씨족 부락의 귀족들이 투르판 왕조의 불교 옹호에 위협을 느껴, 자기의 세습적인 권력의 유지를 위해 불교와 이후 수백 년간 투쟁을 벌이게 된다. 후에 불교는 다신교인 본교의 많은 부분을 양보하여, 본교의 수많은 신과 본교 의식을 대량 흡수하였다. 본교의 우주관과 신관을 살펴보면 오늘날 티벳 불교와 유사한 많은 점을 발견할 수가 있다.
본교에서는 우주를 신, 인간, 마귀로 나누어 각각 이들이 통치한다고 주장한다. 이 가운데 신은 천상의 높은 곳에서 천신과 여섯 형제, 권속을 거느리고 있다고 믿는다. 최고의 신은 "쓰빠(什巴)"이다. 한편 인간세계의 통치자는 "짠푸(贊普)"라고 불렀는데, 바로 천신의 아들이다. 짠푸는 천신의 위탁으로 인간을 통치하는데, 일단 그의 임무는 완성했기에, 하늘 사닥다리를 타고 천계(天界)로 돌아갔다고 믿고 있다. 그 후 인간은 천신의 보호 아래 있다고 본다. 한편 지하와 자연에도 각종의 정령, 용(龍), 악마가 있다. 용신은 바닷가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데, 재산과 부를 가져다주며, 인간의 질병을 주관하는 신이다. 이 밖에도 "연신(年神)"은 모든 나무와 돌에 살면서 자연 재해를 다스리는 신이다. 또 지신(地神)은 토지신이며, 이외에 집, 장막신, 부뚜막 신 등 모든 인간 생활이 신과 관련되어 있다.
또한 인도의 밀교인 탄드라 불교의 대사 연화생(蓮華生)이 티벳에 신비한 무술(巫術), 주문 등을 본교와 융합시켜 전파시켰다. 이를테면 본교의 가장 기본 의식인 화제(火祭)의 도입하였을 뿐 아니라, 전승되어 오던 축귀(逐鬼) 등 의식과 익숙하던 신령(神靈)이 불교의 옷을 입고 재등장하였다. 티벳인들은 이로 인해 불교에 대한 이질감과 거리감을 극복하였을 뿐 아니라, 거기에 불교의 "자비", "중생", "평등" 및 "인과 윤회", "극락세계" 등의 개념이 고달픈 현실 생활로부터 평민과 노예들에게 정신적인 위로를 제공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10세기경에 이르면 티벳화된 불교가 뿌리를 내리고 형성이 되게 된다. 종합적으로 말하면 라마교는 불교의 교의를 기초로 전통적인 티벳 지역의 본교의 형식, 의식과 혼합이 되어 형성된 새로운 불교 종파로서 이후 티벳 지역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2. 라마불교의 발전과 영향
1) 7세기 쏭짠깐부왕의 불교 수용
라마교는 7세기에 강성했던 투르판 왕조의 쏭짠깐뿌(松贊干布) 때에 불경을 티벳어로 번역하고 지식인과 귀족들에게 교육 및 소개로 투르판에 널리 퍼지게 된다. 쏭짠깐뿌는 네팔, 인도 등에서 많은 학자들을 초청하였을 뿐 아니라, 180개의 사원을 세웠다. 이후 8세기 중엽 이후, 투르판 왕실의 지지 하에 큰 발전을 이룩하게 된다. 779년에는 쌍예사(桑耶寺)를 건립하여, 이후부터 티벳인들 가운데 출가승 제도가 시작되었다. 당시 처음으로 쌍예사에 출가한 귀족과 평민은 모두 7명이었는데, 이들 승려의 비용 전부를 왕실에서 제공했다. 이후 라마교는 티벳의 투르판 왕조가 9-11세기에 분열 상태에 빠지게 됨에 따라, 각 교파들이 각지의 봉건 귀족 할거 정치 세력들과 긴밀하게 연합한 정교 합일의 현상을 보이면서 발전을 하게 된다. 라마교의 대표적인 교파는 닝마파(寧瑪派), 까당파(厊當派), 까쥐파(厊擧派), 및 겔룩파(格魯派)이다. 이중 닝마파는 다른 파와 달리 당시 유행하던 신법(新法)의 다른 교파와 대립하고 있어서 큰 사원 집단 세력을 형성하지는 못했다. 다른 파중에서 밀교를 중시하던 까쥐파의 경우는 라마교 중 가장 먼저 활불(活佛)제도를 채용하여, 자기 교파의 권력을 강화시켜 나간 것이 특징이며, 낡쟈파의 경우는 라마교의 가장 큰 특징인 정교 합일 정권의 시작이기에 그 의미가 있다.
2) 쫑카바의 종교개혁과 이후 겔룩파의 발전
한편 현재 달라이 라마가 속한 겔룩파는 당시 티벳 통치자들의 라마교를 이용한 강력한 봉건 통치의 필요에 부응했을 뿐 아니라, 일반 사람들의 라마교 각 파의 전횡과 횡포에 대한 염증도 치료하면서 등장했다. 쫑카바의 「종교개혁」(1357-1419)으로 창건된 파이다. 겔룩파는 1409년에 라싸에 간덴사를 건립하여, 정식으로 탄생하게 되며, 1415년 이후 중앙의 왕조로부터 신임을 받게 되면서, 사원이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16세기 중엽 이후에는 전 티벳적으로 정치, 경제력을 보유하게 되면서, 다른 교파를 압도하게 된다
이후 겔룩파는 1546년에 까쥐파의 활불제도를 도입하여, 달라이 라마와 빤찬 라마 및 다른 상층 라마의 전세제(轉世制)를 통해 독특한 권력과 기득권의 세습 및 백성들에 대한 계속적인 설득력과 믿음을 사게 된다. 현재까지 전세제를 통한 달라이 라마와 빤찬라마는 각각 제14세, 제11세에 이르고 있다. 먼저 달라이 라마의 전세 계보를 야마구치 즈이호의 「티벳불교사」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야마구치 즈이호, 1995:186).
현재까지 달라이 라마는 제 14세 까지 이르고 있다. 인도 망명 정부의 달라이 라마가 14세 달라이 이다. 1세- 겐둔 骓빠(1391∼1474), 2세- 겐둔 강쪼(1475∼1542), 3세- 소남 강쪼(1543∼1588), 4세- 융텐 강쪼(1589∼1616), 5세- 카왕 로상 강쪼(1617∼1682), 6세- 린첸 짠얀 강쪼(1683∼1706), 카왕 예셰 강쪼(1686∼1725), 7세- 로상 겔상 강쪼(1708∼1757), 8세- 로상 쟘팰 강쪼(1758∼1804), 9세- 로상 룬툭 강쪼(1805∼1815), 10세- 로상 뽩팀 강쪼(1816∼1837), 11세- 로상 께둡 강쪼(1838∼1855), 12세- 카왕 로상 틴레 강쪼(1856∼1875), 13세- 카왕 로상툽텐 강쪼(1876∼1933), 14세- 카왕 로상 예셰 텐징 강쪼(1935∼).
한편 빤찬라마의 전세 계보는 다음과 같다.
현재까지 판첸 라마는 11세에 이르고 있다. 중공에 호의적이던 판첸 라마 10세가 1990년에 죽은 뒤 판첸 라마 11세 옹립을 놓고 티벳 망명 정부와 중국이 각각 판첸을 옹위하여, 서로 진짜 판첸 이라며 주장하고 있다. 1세- 게렉 펠상뽀(1385∼1438), 2세- 소남 촉키 랑뽀 (1439?∼1505?), 3세- 로상 돈둡(1505∼1565), 4세- 로상 츄키 겔뵅(1570∼1662), 5세- 로상 예셰 펠상뽀(1663∼1737), 6세- 로상 펭덴 예셰(1738∼1780), 7세- 로상 펭덴 텐뽀 니마(1782∼1832), 8세- 로상 펭덴 츄키 탁뽀 펭페 왕츄크(1855∼1882), 9세- 로상 츄키 니마 게렉 남겔(1883∼1937), 10세- 로상 틴레 룬둡 츄키 겔뵅(1938∼1990).
겔룩파의 유명한 사원으로는 짜이붕사(쓰레풍사), 세라(色拉寺), 간덴사, 타쉬룸포(瑬什倫布), 라부렁사(拉卜楞寺), 타얼사(塔爾寺) 등이 있다. 티벳에서의 이후 라마교 사원은 막대한 승려 조직과 독립적인 사원 경제를 바탕으로 그 권력을 확대화 시켜 나갔다. 어떤 평가에 의하면 중앙과 남부 티벳에 있는 땅의 43%가 사원의 소유라고 추정했다. 당시 대사원의 부(富)에 대해 로버트 오어의 글을 인용해 보면 사원의 권력과 힘이 막강했음을 알 수가 있다(1987: 122).
당시 대사원의 부(富)는 짜이붕사의 소유지에서 평가될 수 있다. 라싸 근처의 이 사원은 1950년 당시 세계에서 제일 넓었고 거기에서 25, 000명의 농노들이 일을 한 185개의 장원 소유지들을 가지고 있었다. 재붕사는 또한 16, 000명의 목동을 필요로 한 30개의 목장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당시에 소작농들과 목동들은 지주에게 생산물의 대부분을 내어 주고 여러 형태의 강제 노동을 해야 하는 농노와 같았다.
따라서 사원이 소유한 43%의 이외의 땅에 대해 35%는 티벳 정부에서 소유하여 소작농들에게 빌려준 반면 귀족은 22%를 소유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이런 부(富)와 토지 소유로 인해 티벳 봉건사회를 지탱해 주던 귀족과 라마교 사원의 권력유지가 가능했다. 각 사원 내부에는 엄격한 봉건적인 교리와 계층이 있어서, 지위가 높은 상층의 라마는 특수한 영주 계층화하여, 세속 봉건주인 농노주, 귀족, 사대부 층과 상호 결탁하여 티벳 사회에서 정권과 신권(神權)을 밀접하게 결합시켰다. 당시 라마교 사원의 승려계층의 구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각종 종교적인 훈련과 직업 훈련을 받고 사람들의 생노병사(生老病死)와 길흉상혼(吉凶喪婚) 등을 주관하는 승려들이 있었다. 이들은 "까이상빠(蓋桑巴)", "둔상빠(鈍桑巴)" 등으로 불렸다.
2) 경전을 배우는 라마로, "뻬이치아와(貝恰氃)"라고 불렸는데, 이들은 상층 신분으로 상승하는 부류로써, 라싸의 3대 사원 승려들의 정통이자, 티벳 사회의 중요한 지식인들이었다. 일반적으로 "라마"라고 했다.
3) "공예승(工藝僧)"들로서,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인재들이 있었다. 조각, 동상 주조, 회화, 인쇄, 수학 등의 기술을 갖춘 자들이 있었다.
4) "잡역승"과 "군인 승려"가 있다. 이들은 각 종 육체 노동, 노역에 종사하는 승려들로서, 군인 승려는 경전을 읽고 암송하는 것이 아니라, 사원의 재산과 안전을 위해 전문적으로 무술을 단련했다. 이들은 유사시에 사원 무장의 기본적인 요소가 되었다. 출신 성분이 낮고 집안이 가난해서 주로 육체 노동에 종사한 부류들이다.
5) "집사승(執事僧)"이 있다. 이들은 사원의 집사 역할을 했던 자들로, 행정, 사법, 재무, 총무, 경제 등을 담당했다. 권력이 막강했으며, "꺼꾸이(格貴)" 혹은 속칭 "티에방(鐵棒: 철방망이)" 라마라고 불렸다. 금은으로 장식된 철방망이를 자신의 권위로 삼았기 때문이다. 승려의 기율을 담당했다.
6) 소위 "활불(活佛)"이라 일컫는 달라이와 빤찬 밑에 있는 상층 계급의 승려들이 있었다. 이들 활불들은 모두가 "전세(轉世)"제도를 채용, 세습을 했다. 모든 전세된 활불들은 라싸에 있는 3대 사원에서 경전 학습과 토론, 질문 등을 통해 새로이 지위를 확정 받아야 했다. 전체 승려 가운데 상층부의 승려와 라마들은 라마 총수의 4% 정도였다.
경제적으로 라마교 사원은 티벳 지역의 3대 영주중 하나였다. 공산화 전에 전체 티벳에 모두 2, 700여 개의 사원이 있었는데, 이들이 실제 경작지의 39%를 소유하고 있었다. 또한 400여 개의 장원과 9만 명의 농노가 있었다. 사원에서는 지세(地稅)와 가축세, 고리대와 상업적인 착취 등을 통해 사람들의 생활을 더욱 핍절하게 했다. 사원의 특권으로 사람들을 착취할 수 있었던 세금의 종류를 로버트 오어는 다음과 같이 열거하였다.
당시에 티벳 농노들은 매우 가혹한 세금을 내야 했다. 세금의 종류도 많아서, 이발세, 창문세, 새로 낳은 송아지세에서부터 모든 종류의 종교 예식에 대한 징수까지 총 45개의 세금들이 라마교 사원에 의해서 징수될 수 있을 정도였다. 공산화 직전에 티벳에는 모두 12만 여명의 승려들이 있었다. 이는 전체 티벳 인구수의 10%에 해당하는 것이다. 당시에 부분적으로 심한 가난의 원인도 있어서, 많은 평민의 아들들이 심지어 1950년에는 전 티벳 남자들 중의 20-25%가 라마교 사원에 들어갔다. 라마교는 겔룩파의 종교개혁 이후 계속적으로 승려들의 결혼과 자녀를 갖는 것을 금지했기에, 공산화 전 시기에 이르면 전 사회적으로 생산에 종사하는 노동 인구가 적었다. 이에 반비례하여 종교 활동이 너무나 많아서, 당시 티벳의 사회 생산력은 매우 저조 낙후된 상태였다. 티벳에 있어서의 중국 공산당의 무력 통치가 너무 지나쳤다는 비난을 받고 있으면서도, 공산화 전의 티벳에서의 라마교의 발전과 그 기득권의 세습으로 인해 이 부분에서 그 기득권을 누리지 못하는 수많은 농노와 평민들이 공산화 초기시기에 공산당을 지지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로버트 오어의 다음 글은 바로 중국 공산당의 티벳 통치에 대한 긍정 점이자, 바로 중국 공산당 자신이 티벳을 봉건 낙후에서 해방시켰다고 구체적으로 주장하는 말이므로 참고로 인용한다. 로버트 오어는 일곱 가지로 중국 공산당의 티벳 통치의 긍정 점을 기술하고 있다.
1) 1951년 경 중국 공산당은 티벳의 상당수의 농민들의 환심을 산 것과, 사원들과 달라이 라마의 전통적인 권력 구조를 약화시킴으로 인해 티벳에서의 완전한 세력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2) 티벳에서의 불교 세력을 파괴하는데 있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공의 무력이 지나쳤다는 데 동의하면서도, 어쨌든 새로운 사회질서를 시작했다는 점이다.
3) 토지가 라마교 사원들과 관리, 지주에게서 몰수되어 농노들에게 나누어졌다.
4) 공중 보건 프로그램과 설비들이 지저분하고 간단한 위생 설비 마저 갖추고 있지 못하던 시(市)들에 도입이 되어 사회 환경이 많이 개선되었다.
5) 전기를 가설했다.
6) 철강의 생산과 석탄 채굴 등 산업 발전을 시작했다.
7) 티벳의 시골 지방을 6천개 이상의 인민 공사로 재편성하여, 경작지의 80% 까지 관개시설을 증대하였다.
Ⅳ. 라마불교의 인생관과 그 영향
1. 현실보다 내세 지상주의
한편 라마교의 인생관과 세계관에서는, 모든 인간의 현실 세계를 "고통"으로 보고 있기에 이 세계를 떠난 "열반(涅槃)"의 상태에 들어가려고 노력한다. 이들은 극락세계에 가기 위해선 빈 마음으로 부처를 예배하고 삼보(三寶)에 귀의(歸依)하며, 고통스러운 수도(修道)를 연마해야만 가능했다. 또 만약 금생(今生)에 선(善)을 행하면 내세(來世)에 복(福)을 누리며, 금생에 악(惡)을 행하면 내세에 지옥에 간다고 주장한다. 티벳인들이 신봉하던 윤회설이 얼마나 티벳인들에게 영향이 많은지를 티벳에서 7년 동안 살았던 하인리히 하러는 자기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1989: 238).
"티벳인들은 윤회설을 신봉하였기에, 파리나 지렁이 같은 미물도 죽이지 않았다. 찻잔에 파리가 빠지면 큰 일이라도 난 것처럼, 법석을 떨며 파리를 안전 지대로 대피시킨다. 겨울이 되면 티벳인들은 개울의 물고기가 죽을까 걱정하여 얼음을 깨고 물고기들을 건져 봄까지 양동이에다 키운다. 그들은 죽은 부모 형제나, 조상들이 여러 가지 동물로 다시 태어난다고 굳게 믿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윤회설은 일상 생활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공적인 일에도 적용된다. 특히 달라이 라마가 참선을 하던 3년 동안, 전국의 건축업자들에게는 산 생명을 죽이지 말라는 포고령이 내려졌다. 애벌레와 곤충들이 건축 공사 때 죽기 쉽다는 이유로, 공사를 전면 금지시켰던 것이다. 훗날 공사 감독을 맡은 나는 인부들이 땅 속의 벌레들을 다치지 않게 하려고, 삽질을 조심스럽게 하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보았다".
2. '오체투지'등 행위중심의 구원관
따라서 이런 종교적 세계관에서는 인간이 부처에 대해 맹신하게 되는 것이다. 라마교의 중심지는 티벳의 수도인 라싸이다. 라싸는 티벳어로 "신의 땅"이란 뜻이다. 이 곳은 티벳족 사람들의 정치, 경제의 중심지 일뿐 아니라, 바로 정신세계의 중심지로서 성지(聖地)로 여기고 있다. 멀리 윈난(雲南), 쓰촨(四川), 칭하이(靑海) 및 깐수(甘肅) 등지에서 티벳족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이 곳에 찾아온다. 이들은 재산이나, 험산 준령을 마다 않고 라싸에 오는 것을 일생 최대의 영광이라고 여긴다. 라마교의 중심지인 티벳 라싸로의 종교 행렬에 관한 다음 두 글들은 종교 신앙이 어느 정도 티벳인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잘 알 수가 있다.
"…불교 속에 살아 숨쉬는 티벳인들의 삶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조캉사원을 돌아봐야 한다. 당태종의 딸 원싱(文星)공주가 송짠깐뿌 왕에게 시집오면서 가지고 온 불상과 불경을 모시기 위해 창건한 조캉사원은, 이 절에서의 참배가 평생 소원일 만큼 종교적으로 가장 신성시되는 곳이다. 순례 객들은 수천 킬로미터(km)떨어진 서쪽 끝이나, 북쪽의 칭하이성, 서남쪽의 네팔, 심지어 인도에서까지 몇 개월, 몇 년이 걸려서라도 이 곳을 찾는다. 그리고는 오체투지(五體投地)를 끝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 "(중앙일보, 1996. 8. 29)
"탐사 팀은 딩칭으로 가는 산길에서 우연히 오체투지를 올리며 라싸로 향하는 순례자 한 명을 만났다. 이름은 쒀바(索巴, 28세). 칭하이성에서 목축업을 하는 티벳인이다. 그는 지난해 11월 고향을 떠나 풍찬 노숙을 마다하지 않고 여덟달째 땅바닥에 엎드려 절을 올리며, 라싸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그는 먼 거리를 절을 하며 가기 위해 몸 앞에는 양가죽을 대고 양손에는 양철과 가죽으로 만든 보호 대를 낀 모습이었다. 절을 할 때는 두 손을 모아 합장한 손이 머리 위로 올라갔다가 머리에서 내려오는 손이 입술을 한번 건드리고 가슴서 멈춘다. 무릎을 꿇은 뒤 두 손으로 바닥을 밀면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땅에 밀착한다. 두 팔을 머리 위로 곱게 편다. 세 발짝 걸어가 절 한 번하고 일어날 때마다 내걸음씩 전진하는 의식이 반복된다. 두팔을 쭉 뻗어 넙죽 엎드리며 이마가 땅에 닿는 오체투지례를 올릴 때마다 진지함과 경건함이 배어 나왔다.…언제쯤 순례 목적지인 라싸 조캉사원에 도착할 것 같으냐는 질문에 그는 앞으로 1년쯤 걸릴 것 같다고 말했다. 사흘 뒷면 라싸로 들어갈 예정인 탐사 팀에게는 그의 고행 길이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안 갔다. 그는 오랫동안 노숙을 한 탓에 몸에서 쉰내가 나고 지친듯한 모습이었지만 표정만은 밝았다. 아마도 순례를 통해 갖게 된 종교적 확신이 표정에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도대체 무엇이 이처럼 엄청난 종교적 정열을 이끌어 내는 것일까. 아마도 사람이 죽으면 사십 구일 안에 환생한다는 라마교의 교리가 이들이 힘겨운 오체투지 순례에 나서게 하는 힘의 원천일 것이다. 즉 순례 여행을 통해 내세에 좀 더 나은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믿음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중앙일보, 1996. 8. 22).
3. 일상 생활에 미친 영향
한편 티벳인들은 일상생활 가운데 불교 의식이 생활화되어 있어서 티벳인들이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마니퇴라는 손으로 돌리는 "기도 바퀴"를 들고 다니면서, 경전을 암송한다. 이 마니퇴는 오랜 세월 동안 라마교의 일상화된 기도 기구이다. 사람들의 의(衣), 식(食), 주(住), 행동, 결혼, 생로병사에 라마교는 또한 많은 영향을 끼쳤다. 라마들은 일반인들과는 다른 의복을 입었다. 라마들끼리도 서로 다른 계급과 교파에 따라, 승려 복과 승려 모자 색깔이 달랐다. 보통의 라마들은 자홍색(紫紅色)의 다리가 드러나는 긴치마를 입고, 상의로는 조끼를 입고, 그 위에 자색(紫色)의 가사(袈裟)를 둘렀다. 닝마파의 승려들은 붉은 색의 모자를 썼으며, 겔룩파는 누런 황금색의 모자를 썼다. 티벳의 사품 이상의 승려 관리들은 황포(黃袍)를 입고, 붉은 구름이 수놓인 신을 신었다. 또 사품 아래는 자색 혹은 남색의 긴 도포에다, 남색 구름을 수놓은 신을 신었다.
또한 일반 티벳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무론 하고, 대부분 몸에 호신용의 부적인, 불상이나, 불경 경문, 사리(舍利), 옥, 비단 등을 지니고 다녔는데, 이는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외에도 라마교는 티벳인들의 음식에도 많은 금기(禁忌)를 가했다. 아직도 많은 지역에서 티벳인들은 물고기, 새우, 닭과 달걀을 먹지 않는다. 한편 활불(活佛)라마들은 식사 전에 먼저 꼭 경(經)을 외우며, 일반 신도들은 밥을 먹기 전에 술이나 차(茶)를 세 방울을 떨어뜨려 부처에 대한 예(禮)를 표했다. 주거하는 주택도 라마교의 영향으로 부유한 집은 집집마다 경문통(經文桶: 큰 마니퇴를 가리킴)을 가정마다 비치해 놓았다. 경문통의 크기도 각각 다르며, 종류도 나무, 소가죽, 동(銅)으로 된 것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또 모든 가정마다 지붕에 경문 깃발과 색색의 헝겊으로 된 라마교 깃발을 걸어 놓은 모습을 볼 수가 있다.
Ⅴ. 라마불교의 특성
라마교를 언급할 때 가장 큰 특성은, 티벳 사회의 변혁이 항상 정치적인 역학 관계에 의해, 그 중에서도 특히 티벳 국내뿐만이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압력에 의해 변혁이 초래됨에 따라 라마교의 변용이 그런 변혁에 대응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 글의 앞부분에서 살펴보았듯이 공산화 이전 시기의 티벳과 공산화 이후의 티벳 역사에서 이 점은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즉 과거 투르판 왕조 성립 이후 지금까지 티벳의 국내외적인 변화에 따라 라마교가 그에 대응하여, 자기 생명력을 유지하고 발전 공간을 확대시켜 왔음을 볼 수가 있다. 각 시대에 따라 티벳 사회가 변모하는 모양에 의해 라마교가 변용을 취하게 되는데, 더 중요한 것은 라마교가 어떻게 변하더라도 티벳인들은 언제나 너그럽게 그 불교를 받아들여 한결같이 그들의 생활양식으로 삼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바로 여기에 티벳에서의 라마교의 전통과 역사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라마교의 큰 특성으로 먼저 이해하고 구체적으로 라마교의 특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불교를 모태로 하는 불교이면서도, 원시 불교는 물론 동남 아시아 일대에 전파된 소승 불교나 중국, 한국, 일본으로 전해진 대승불교와 전혀 다른 형태로 독특하게 전개 발전하였는데, 풍토로서의 티베트 불교인 라마교로서 알려진 불교로 탄생되었다. 둘째, 몽고, 때로는 중국 본토 및 인도, 캐시미르 주의 라다크 등으로 확산되어 번지기는 했지만, 여하튼 티벳 고원이라는 폐쇄 사회에서 생겨나고 성장했다는 점을 들 수가 있다. 셋째, 티벳 내부에서는 물론, 몽고 등을 포함한 총괄적인 라마교 권에 있어서는 정치와의 결탁이 중국이나 일본의 불교에 비해 훨씬 심하다는 점이다. 넷째, 활불사상이 존재함으로써, 라마교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이는 다른 나라의 불교와 뚜렷이 구별되는 특징이다.
이런 특성에 입각하여 티벳에서의 불교가 라마교라고 불리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언급해 보면 우선 첫째로, 티벳에서의 불교가 가진 주술(呪術)적인 성격 때문이다. 종교 일반에 있어서 주술이란 신앙하는 자가,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아직 믿지 않는 자가, 현실 생활 속에서 "양재초복(攘災招福)"을 모종의 신령한 능력을 가진 자에게 기대하는 데서 생긴다. 따라서 주술을 부릴 줄 아는 자는 당연히 특수한 "영능자(靈能者)"이어야 하는데, 티벳인들은 이러한 능력을 갖춘 자를 "라마(즉 활불)"라고 생각한다. 티벳 불교는 인도 불교의 밀교사상의 영향을 직접 받아서, 주술성이 농후한 측면도 있지만, 동시에 티벳인들 자신이 종교적인 주술에 관심이 많았다는 점도 묵과할 수 없다. 즉 주술 등을 좋아하고 샤만을 믿으며, 때로 마술적인 것까지도 좋아하는 민족성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것이다. 이는 불교가 티벳에 도입되기 이전에 먼저 티벳에 존재해 오던 전통 종교 본교의 특성이기도 하다. 원래 본교에서는 본교의 무사가 신통한 능력을 갖춘 자로서, 귀신과 대화하며, 이들을 쫓기도 하는 능력 있는 자로 신봉하고 있었다. 이들은 주문, 부적, 신비한 무술, 제사 등을 중요시 여겼다. 이런 티벳 민족의 종교적 경향으로 인해 티벳 사회는 전근대적인 모습과 후진성을 띨 수밖에 없었다. 일반적으로 종교현상이란 그것이 발생하고 전개되는 사회의 반영이라고 보는 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시점에서 티벳 사회의 후진성은 곧 라마교 그 자체의 후진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보통이다.
둘째로 티벳인들의 라마에 대한 광적인 존숭(尊崇)이 티벳 땅에 라마교를 탄생시킨 이유이기도 하다. 원래 불교에서의 "삼보귀의(三寶歸依)"주장에 대해, 라마교에서는 라마보(寶)를 추가한 "사보귀의(四寶歸依)"가 행해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라마는 삼보와 신앙자간의 중개자로서 숭배되며, 영원한 진리인 법(法)도 스승인 라마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앙자와 결부될 수 없다. 따라서 라마 교도에게 있어서 라마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자이다. 즉 원래 라마란 스승, 선지식(先知識) 또는 선우(善友)의 뜻으로 교법을 신앙자에게 교시하는 자였는데, 이러한 의미에서 본래 인격, 인간 자체였던 인간이 삼보의 총합 체로서, 삼보 이상의 존재로 승화된 것이 라마교의 특성이다.
셋째로 라마 내지 라마 보에 대한 특이한 신앙이 결국은 라마교의 독특한 활불사상으로 까지 발전이 되었다. 활불사상은 라마 교도들이 삼보 이상으로 존숭하는 라마 보의 당체(當體)인 라마가 비밀 탄트라의 관법에 다라 자기의 영혼을 그 육체에서 쉽게 버리고 자유로이 다른 육체에 옮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서 생긴다. 영혼과 육체의 분리,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전생이 활불사상을 낳은 사상적 배경이다. 티벳에서는 일반적으로 덕이 높은 라마가 죽은 뒤 그 영혼이 유아(幼兒)의 육체에 전생(轉生)하게 된다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그 육체를 제공하느냐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게 됨으로, 활불 라마로 지정된 유아 및 그 친족이 받는 과보는 매우 크다. 전생 능력은 많은 수행을 쌓은 라마, 즉 성직자에게만 인정되는 것으로, 속세에 사는 사람이 쉽사리 발휘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넷째로 활불사상의 사회적 구현으로서 종교가 정치와 결탁하였다. 달라이 라마를 정점으로 하는 법왕제(法王制)는 티벳의 독특한 통치 형태로서 라마 교도들에게 널리 신봉되었다. 야마구치 즈이호가 티벳 불교를 연구한 글에 의하면 활불사상과 티벳 불교사의 상호 관련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일반적인 견해에 따르면 라마 불교에 활불사상이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로서 우선 티벳에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그 땅에 토착하고 있던 본교의 영향이 컸음을 지적할 수 있다. 중앙 아시아에서 발생한 것으로 생각되는 일종의 샤머니즘인 이 본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우주간에는 무수한 영혼이 떠다니고 있으며, 이 세상의 길흉화복은 모두 이들 영혼의 작용에 의해 생긴다고 한다. 이 영혼들을 달래고 "양재초복(攘災招福)"하려면 덕있는 수행자의 작법(作法)이 필요한데, 활불사상도 이러한 본교의 영향으로 생겨났다고 한다. 둘째로, 티벳인의 국민성 중에 종교적인 영위(靈威)를 인정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즉 티벳인의 장례법이나 세습법 등의 의식을 볼 때, 티벳인의 사상 중에는 영적인 존재를 강하게 긍정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이러한 국민성이 활불의 존재를 낳는 결과가 되었다. 셋째로, 현실적인 이유겠지만 14세기 말 쫑카바에 의한 종교개혁 이후 승려의 육식, 대처 제도 등이 금지되었다. 따라서 상층의 덕망 높은 라마의 경우에는 그 때까지 세습에 의해 승적(僧籍)을 계승하던 것이 후계의 선정으로 고심하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활불사상이 곧잘 이용되었다고 한다. 티벳 불교에서 활불사상이 존재한 이유로 제시한 위의 설은 일반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각기 수긍할 만한 점들을 많이 내포하고 있다.
라마 불교의 역사를 개관하면서 알 수 있는 것은 라마 불교가 각 시대의 지배자나 권력자들에 의해 형성되어 왔다는 점이다. 즉 티벳에 불교가 최초로 전래된 것은 쏭짠깐뿌에 에 의해서였고, 그 후 약 200년간 티벳 불교는 번창일로를 걸었다. 그리고 티송 데뵅 왕의 시대를 전성기로 하여 랄파첸의 약불(溺佛)의 시대를 지나 랑다마에 의한 폐불(廢佛)사건에 이르른다. 그후 수백 년에 걸쳐 왕통의 단절로 인한 전국시대가 펼쳐지면서, 불교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사이 코르레 왕에 의해 일시적으로 왕통이 되살아나고 린첸 상뿌의 노력으로 비밀 교의 부흥이 이루어지면서, 나리 지방의 호족인 예셰우의 초청으로 아티샤가 티벳에 들어왔다. 그로부터 200여 년 후 원조의 쿠빌라이 칸에 의해 티벳의 통치권이 팍파에게 넘겨짐으로써 싸쨔 왕조가 세워지고, 원 명의 정권이 교체될 무렵 쫑카바에 의해 종교개혁이 이루어졌다. 또한 15세기 말 이후에는 달라이라는 최고위자를 중심으로 한 법왕제가 확립되었고, 중국이 티벳을 자치구로 만드는 1959년까지의 500년 동안 달라이 라마는 법왕으로서, 티벳을 통치한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을 더듬어 볼 때, 티벳 불교의 형성자, 즉 라마교를 담당한 사람은 그 당시의 권력자였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자기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서 불교를 이용했던 것이다.
이는 라마교가 발전할 수 있는 정점으로서 역할을 했다. 원래 어느 나라의 불교를 막론하고 그 역사를 보면 그 나라의 불교가 통치권자의 생각과 사고에 따라 변천해 왔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이런 면에서 라마 불교는 그 담당자들이 소수의 권력자들이었으며, 그들의 지상 목표는 권세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권력 추구에 주력했다. 그래서 점차 라마교는 본래 그 주인공이어야 할 대중이 거의 무시되어 버리거나, 혹은 수동적인 입장밖에 취할 수가 없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형성된 불교를 그대로 신봉하는 형태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로부터 라마교의 특색 중의 하나인 불변성이 형성되었으며, 불변성의 그 정점에 바로 법왕제가 존재했던 것이다.
Ⅵ. 결론 : 선교적 과제
1. 라마교에 대한 기독교적인 변증
먼저 티벳이라는 나라가 그 체제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초창기부터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채택하고 수용한 것이 바로 라마불교란 사실을 알고, 이런 티벳의 정치와 종교의 본질적인 핵심을 이루고 있는 라마교에 대한 기독교적인 변증학(Apologetics)이 이루어져야 한다. 원래 라마교는 권력의 정점에 있는 자들이 자기의 종교적인 권력과 세속권력을 통합시키려고 달라이 라마란 법왕제를 채택하여, 그 권력과 부를 소수에게 제한한 것으로, 이는 불교의 "자비", "중생" 개념과도 대치될 뿐 아니라, 기독교적으로 보았을 때 인간의 욕망과 그 욕망을 지속시키기 위해 "환생"이란 개념을 도입하여 인간 위에 인간이 군림한 "인간권력의 바벨탑"이다. 라마교는 철저한 귀족위주의 계급사회의 체제 이데올로기로서, 노예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평등하고 자유로운 인격체로 창조하신 사실에 정면 위배되는 것이다. 여기서 불교에 대한 기독교적인 변증과 함께 봉건적 통치체제에 대한 기독교적인 답변도 요구된다.
또한 라마교는 원래부터 다신교적인 정령(精靈)신앙을 바탕으로 하던 티벳 지방의 전통종교인 본교(本敎)의 주술적이고 기복적인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기에 사람으로 하여금 인지(認知)를 발달시키고, 인간의 창조적인 능력을 개발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수동적이고 자연에 두려움을 가져 결국 우상에게 무릎을 꿇도록 하였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땅을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문화명령의 수호자이자 청지기로써 천지만물을 잘 다스리고 통치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에 외경을 품고 기복을 구하는 어리석은 모습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인간성 자체를 왜곡시킨 것이다. 따라서 라마교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본교라는 샤머니즘에 대한 기독교적인 변증작업도 필요하다.
결국 사탄은 주술, 기복, 자연에 대한 두려움 등을 달라이 라마와 빤찬라마라는 "활불"의 어린아이로의 전세(轉世)란 환생의 방법으로 인간에게 있는 죽음과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두려움을 무지몽매한 방법으로 해소시킨 것이다. 바로 이 부분에도 기독교적인 변증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죽음과 심판, 영생에 대한 바른 변증을 통해, 라마교의 미신에서 벗어나서 광명대로의 생명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더 깊은 라마교의 하나하나 교리에 대한 기독교적인 변증이 있어야 한다.
2. 토착화와 현장화의 모색
원래 라마교 자체도 따지고 보면 외래종교인 불교가 티벳지역의 전통과 문화 속에 토착화되어 그 지역의 전통종교의 많은 요소를 함유하였기에 거부감 없이 티벳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특별히 티벳지역은 종교라는 단일한 민족적 특성이 강한 장애와 막을 치고 있는 지역이므로, 기독교 선교가 티벳에서 이루어지려면, 먼저 기독교의 토착화와 현장화 작업이 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먼저 티벳의 일처다부제도, 결혼제도, 사회생활 가운데 나타나는 비성경적인 요소와 라마교라는 이교적 본성과 연관된 부분으로 주술, 마술, 우상숭배 등은 최고로 가능한 한 토착화되어야 할 것이다. 이밖에 티벳의 전통 문화와 관습중 그대로 유지해도 되는 부분은 잘 변별하여 그 문화가운데, 하나님의 선하심을 나타내는 것을 복음과 잘 연결시켜 주어야 한다.
다만 한가지 기독교의 토착화와 현장화 문제는 비단 티벳의 문제일 뿐 아니라, 중국자체에서도 사회주의 중국 안에서 "상황화된 신학"으로 나타나고 있어서, 티벳에 있어서 기독교의 토착화와 현장화 작업에는 더 많은 영적인 민감함과 지혜, 통찰력이 요구되는 문제여서 쉽지가 않다. 또한 토착화와 현장화의 문제는 바로 토착화시켜야 할 기독교의 본질과 내용에 대해 충분한 신학적인 준비와 지식을 갖추고 있어야 함으로 단기간 안에 이루어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티벳의 효율적인 선교를 위해서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과제가 바로 토착화와 복음의 현장화란 과제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토착화와 현장화는 혼합주의와 구별되어야 하기에 문화와 선교와의 관계에 유의하면서 토착화와 현장화에 장애가 되는 티벳의 문화들을 변별해 내고, 가교(架橋)가 되는 문화들을 변별하여 이를 티벳 선교의 접촉점으로 삼아야 한다. 물론 티벳 선교에 있어서도 기독교 선교적 접촉점을 휘한 성경적인 모본은 바로 이 땅위에 성육신하여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 것은 틀림이 없다.
3. 지속적인 개혁개방 정책을 통한 경제발전과 사회적인 공간의 확대 필요
티벳은 중국 안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중의 하나이다. 이유는 사람이 거의 살 수 없는 희박한 산소량과 고원지대라는 지리 환경적인 위치와 또한 그 땅이 산출할 수 있는 식량자원과 에너지 자원의 부족으로 인해서 이다. 게다가 티벳이 신봉하고 있는 라마교라는 종교 자체는 "발전" ,"근대화", "현대화"라는 개념보다는 "윤회"와 "반복" 및 인간에게 "피동성"을 요구하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물론 "근대화"나 "경제발전"이 항상 기독교 선교에 적극적인 요소로서 기독교 선교를 부흥시켰다고는 말하지 못하지만, 그러나 분명한 것은 경제발전을 통해 사람들의 삶이 편리하고 윤택해졌을 뿐 아니라, 근대화와 경제발전을 통해 더불어 "개방된 외재적 환경"과 그 땅의 사회적인 공간의 확대되고 열리는 기회가 제공되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바로 79년 이후 중국 공산당이 취한 개혁과 개방정책으로 인해, 전 중국이 개방화되면서, 티벳도 외부에 재개방되어 일단 그 땅에 경제발전을 위한 기술과 기술자들이 들어가면서 함께 복음이 들어가고 성경말씀을 통한 교육과 또한 국제화 시대에 발맞추기 위해 영어교수에 대한 문호를 개방하게 된 것은 분명히 기독교 선교의 하나의 새로운 기회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문제는 중국공산당이 원하는 사회주의 시기의 중국이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도입하고 시장을 개방하는 것을 원하고 있는데, 이에 반해 티벳의 전통종교인 라마교가 과연 라마교가 가진 폐쇄적인 세계관속에서 이를 수용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근대화와 경제발전은 그 종교적 영역에 있어서 전통종교를 세속화시키기 때문이다. 이는 달라이 라마와 라마를 정점으로 계속 권력을 유지시켜 온 라마교의 교리 자체와 근본적으로 공존할 수 없는 부분인 것이다.
4. 티벳을 다스리고 있는 중국 공산당의 변화와 변화 가능성
티벳의 갈등은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시기의 중국과의 관계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지정학적인 티벳의 위치와 영향으로 티벳은 중국의 고대 역사 속에서 중국 내륙의 중원 지방에서 과연 누가 정권을 장악하는 가에 따라, 결국 중국 역대 왕조의 교체와 변동에 따라 함께 영향을 받으면서 그 역사를 유지해 올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티벳의 민족적 특성인 라마 불교의 전민족 신앙이라는 전통과 라마교의 명맥을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티벳 내에서 현실 권력을 장악한 정권에 부합하여, 그 세력의 위호를 받으며, 불교를 발전시켜야 했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티벳 자체의 군사력과 권력 유지 능력이 약한 경우에는, 중국의 한족, 몽고족, 만주족 정권의 속국으로서 있으면서 달라이 라마라는 법왕을 통해 그가 종교를 통해 티벳 지역에 실제적인 통치를 하는 것을 용인 받을 수 있었다.
이와 같이 티벳 문제는 티벳 자체의 변화와 변화 가능성보다는 실제로는 중국 공산당 자체의 변화와 변화 가능성에서 찾아야 한다. 이것이 티벳 문제를 볼 때의 현실적인 고려사항이다. 현재 중국 공산당은 티벳을 중국의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로 소수민족에 대한 정책을 가지고 통치해 오고 있다. 현재 중국 공산당은 북한, 구소련 및 동구의 공산당과는 달리 변화에 성공한 공산당으로서 나름대로 자신감이 많으며, 통치스타일 면에서 그 어떤 정권보다도 강력한 전제주의 식의 통치와 관리를 행하고 있다. 이는 소수민족 부분에서도 마찬가지이고 티벳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기에 티벳에 대한 기독교 선교는 전체 중국과 중국 공산당에 대한 이해와 이들의 정책 및 경제발전을 통한 기회를 잘 살펴서 선교해야 한다. 현재의 티벳은 80년대에 비해 더 많이 개방되어 더 많은 외국인들이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여전히 많은 지역이 외국인이 들어갈 수 없는 금지구역이며, 또한 중국 공산당이 민감하게 여기는 "정치와 종교" 부분에서가 아닌 기독교 선교가 순수한 복음적 필요 외에도 실제로 중국의 필요를 채워주고, "사회개발" 및 "경제발전", "교육제고"와 "의료 발전" 등 다각적인 방법으로 다양하게 전개되는 것이 좋은 시기임을 명심하여 이런 방면의 인재들이 많이 배출되어져서 현재의 선교의 외부적인 기회를 잘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네이버 지식에서 티벳역사를 찾아보면 대부분 티벳을 동정하는 내용이 많습니다(상당기간 타 민족에 의해 핍박받은 우리민족의 역사가 생각나고 또한 중국을 싫어하는 이유에서 상당한 이유인 것 같음) . 또한 다른 관점의 내용도 좀 있습니다~~
(돌고 돌아가는 역사 , 특히 남의 나라 역사를 가지고 왈가불가할 자격이 없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제3삼자의 입장에서 티벳의 역사를 정확한 역사적인 관점에서, 객관적인 현실적인 관점에서 파악을 하고 판단을 해야 할 것이 아닌지~~ 한국에 살고 있는 극단의 종교인들도 남들이 신봉하고 있는 타 종교를 좀 존중해줄줄 아는 사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