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다음카페 함안조씨 감찰공파 하림유사(下林遺事)입니다. 이 글을 주변의 관계자분들께 많이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관정 조성래 올림
2024년 10월 27일에 함안조씨 감찰공파 조일제(1942년생, 마산), 조광제(1959년생, 부산), 조성래(1959년생, 양산 통도사 관정 스님) 등 3명은 임진왜란 이후 판서공파 일가(一家)들이 정착해서 살고 있는 충남 서천(舒川)으로 갔다. 함안조씨 판서공파 종친회 조의제(1951년생) 회장 (전) 총무 조대규, 총무 조용주 등을 만나서 판서공 조신도(趙信道, 1554 -1595, 42세亡)와 감찰공 조민도(趙敏道, 1556-1592, 37세亡) 형제의 정려(旌閭)비각의 문화재 지정 신청 건을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양 파가 한 건으로 문화재 지정 신청은 이의 없이 하기로 했고, 신청 업무 일체는 감찰공파 조성래가 책임지고 하기로 했다. 2천만 원의 용역비 등의 비용은 양 파의 일가들에게 동참금을 받아서 하기로 했다.
회의후 서천에 있는 판서공 조신도의 외동아들 조영복(趙英復)과 그의 아들 징현(徵鉉)과 손자 함윤(咸胤), 증손자 이룡(爾龍) 등의 묘소를 참배했다.
조영복 등 4분의 선조 묘는 한 곳에 선영을 이루어서 잘 조성되어 있었다. 산소의 상석은 1960년대에 놓은 것인데, 격이 있었다.
위의 상석에는 "가선대부(嘉善大夫) 행동지충추부사(行同知中樞府事) 함안조공(咸安趙公) 이룡지묘(爾龍之墓) 배공인회진임씨(配恭人會津林氏) 합폄(合窆)"라고 적혀 있다. 조이룡(趙爾龍)은 판서공 조신도의 고손자(高孫子)이다. 가선대부는 조선시대 종2품의 문관의 품계이다. 동지중추부사는 조선시대 중추부에 소속된 종2품의 관직이다.
위의 두 사진은 감찰공파 족보에 실려 있는 조신도와 그의 아들 조영복의 족보이다.
위의 함안조씨 판서공파의 파조 판서공 조신도의 족보는 제가 이미 번역해서 이 카페에 올려놓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그의 아들 조영복의 족보를 번역해 올립니다.
조영복(趙英復, 1582-1644, 63세 별세, 함안조씨 18대, 판서공파) 족보 번역
(판서공 조신도趙信道의 자) 조영복은 처음에는 휘(諱)를 ‘복영(復榮)’이라고 했고, 자(字)를 ‘효선(孝先)’이라고 했다. 나중에 ‘복영(復榮)’을 ‘영복(英復)’으로 개명했다. 그는 1582년(선조15, 임오년)에 태어났다. 부친인 군수 조신도 공(公)이 1593년(계사癸巳년)에 대장군(大將軍)의 직책을 받아서 임진왜란에 뛰어들 때, 그는 부친으로부터 유서와 초상화를 받아서 덕산(德山) 가야동(伽倻洞)으로 피난 갔다. 피난 중에 부친이 한강(漢江) 전투에서 순절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전투지[戰地]로 달려가서 유해(遺骸)를 수습하려 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대성통곡을 하고 돌아와서 결국 위패[后= 신령神靈]를 만들어서 충남 서천(舒川) 죽동(竹洞)으로 이주하여, 거기에 사당(祠堂)을 건립하고, 그 안에 위패와 함께 영정(影幀)을 봉안했다. 불행하게도 그 사당에 홍수로 물[沒]이 들어서 남겨둔 기록을 휩쓸어 갔다. 간신히 공신록(功臣錄)과 유서만은 건져낼 수 있었다. 조영복은 1644년(갑신년) 11월 10일에 별세했다. 묘소는 충남 서천군 마동면(마동면과 마서면이 '마서면'으로 통합됨) 신교(薪橋)리에 있고, 계(癸)좌 방향이다.
조영복의 부인은 한산(韓山) 이씨이다. 장인은 이수영(李壽永)이고, 그는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이다. 부인은 1582년 임오년에 태어나서 1646년 (병술년)에 65세에 별세했다. 묘는 부부 합장묘로서 신교(薪橋)리에 있고, 계(癸)좌 방향이다.
(역자 해설)
1. 조영복은 부친인 온양 군수 조신도 공(公)이 1593년(계사癸巳년)에 왕실로부터 대장군(大將軍)의 직책을 받아 임진왜란에 뛰어들 때, 12살이었다.
2. 판서공 조신도의 유서는 미국으로 이민 간 종손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종손의 연락처는 알지 못한다고 했다.
3. 수해 때 건져낸 서훈록(敍勳錄) 중 <호성원종공신록권(扈聖原從功臣錄卷)>은 현재 조의제(趙義濟, 1951년생) 종친회 회장님이 소장하고 있다. 다음은 그 공신록의 사진이다.
<호성원종공신록권(扈聖原從功臣錄卷)>의 표지가 홍수 때 훼손되어, 다시 표지를 만들어 붙여서 위와 같이 써 놓았다.
위의 사진 중 우측 페이지의 끝행에 "삼군수(三郡守) 조신도(趙信道)"라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판서공 조신도(趙信道)는 위의 공신록 총 86쪽 중 제 9쪽에 나온다. 이것은 제 1등 공신으로서 그만큼 조신도의 공이 컸음을 의미한다.
4. 조영복의 처가는 고려 시대의 대표적인 시인이자, 사상가이고, 정치가였던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의 후손이다. 목은 이색은 성리학자였지만 불교를 좋아했던 인물이다. 목은 이색은 함안조씨 전서공 조열(趙悅) 선조와 태조 이성계 등의 스승이다.
첫댓글 扈從(호종)은 車架(임금이타는수레)를 모시고
호위했다는 뜻이니까 선조가 의주로 피난(도망)
갈때 같이호위했던 충신들의 명단을 기록한것이
扈從忠臣錄券인듯 ㅡ
扈從(호종)은 車架(임금이타는수레)를 모시고
호위했다는 뜻이니까 선조가 의주로 피난(도망)
갈때 같이호위했던 충신들의 명단을 기록한것이
扈從忠臣錄券인듯 ㅡ
예 형님 해석이 정확합니다. 扈(호)는 뒤따를 호이고, 從(종)도 뒤쫓을 종이라서 호종은 따라간다는 뜻입니다. 호종(扈從 )은 임금이 탄 수레를 호위하여, 따라가며, 뒤쫓아오는 적을 격퇴하는 일을 맡은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 공신들에게 이 책을 한 권씩 내려주면서 표창과 표창장을 대신했다고 합니다.
忠臣을功臣으로정정합니디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