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한동안 추위가 기승을 부리더니, 며칠 포근한 날씨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날짜는 벌써 2월 중순, 봄도 머지 않았습니다.
저는 가끔 딸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다가, 제가 더 재미있어서 열중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그랬는데요. '사랑에 빠진 개구리'라는 제목의 동화책이었습니다. 주인공인 초록색 개구리는 하양 오리를 사랑합니다. 주위 친구들은 어떻게 색깔이 다른데 사랑을 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지요. 하지만 개구리의 '사랑'은 오리에게 전해지고, 둘은 '행복한 한 쌍'이 됩니다. 사랑은 어떤 경계도, 어떤 차이도 뛰어넘는다는 얘기죠. 어린이들을 위한 책이라 아주 쉽게 쓰여졌지만, 저는 '참 예쁜 얘기'라는 생각이 들어 이 책을 혼자서도 여러 번 들여다봤습니다.
- 외로운 여우 이야기
지난주 토요일, 저는 제 딸과 함께 어린이 뮤지컬을 보다가 이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여우야 뭐하니, 동산에 꽃피면 나하고 놀자'라는 긴 제목의 뮤지컬입니다. 초연은 아닙니다. 2001년 처음 무대에 올라, 어린 자녀를 둔 엄마들에게 상당히 입소문이 났던 작품입니다. 그 해 서울 아동청소년 공연예술제에서 최고 인기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제가 문화부에 있을 때였지만, 직접 보지는 못해 아쉬웠던 기억이 납니다. 이번에는 올해 6살이 된 제 딸을 데리고 가서 볼 수 있었습니다.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동산에 가족도 친구도 없는 어린 여우 한 마리가 살고 있습니다. 여우라면 천년호, 구미호, 이런 게 생각나지만, 이 여우는 심심하다며 나무 할머니와 달님에게 놀아달라고 보채는 철없는 여우입니다. 하지만 움직일 수 없는 나무 할머니와 멀리 하늘 위에 떠있는 달님이 여우와 놀아주기는 쉽지 않죠. 예를 들면 이런 장면입니다.
"할머니, 나랑 숨바꼭질 하자. 내가 술래할게. (돌아서서 눈 감고)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꼭꼭 숨어라. 이제 찾는다! (뒤로 돌아서 나무 할머니가 그대로 있는 걸 보고는)어? 할머니, 아직 안 숨었어? 왜 빨리 안 숨어? 다시 한다, (돌아서서 다시 눈 감고)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어? 아직도 안 숨었네? 나랑 숨바꼭질 하자니까~~"
- 사내아이가 된 여우
여우는 어느 날 아랫동네 순이가 노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됐습니다. 여우는 순이와 함께 놀고 싶었지만, 순이가 여우의 모습을 보고 놀랄까 봐 몰래 숨어서 훔쳐보기만 합니다. 나무 할머니는 여우의 간절한 소망을 알고 여우를 사내아이의 모습으로 만들어줍니다. 사내아이의 모습이 된 여우는 신이 나서 순이가 살고 있는 동네로 내려갑니다.
여우는 곧 순이와 친구가 되고, 다른 아이들과도 어울려 신나게 놉니다. 고무줄놀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오재미, 우리집에 왜 왔니, 닭싸움....... '여우야 뭐하니...'의 어린이들은, 비록 누덕누덕 기운 옷에 헐렁한 '꽃무늬 빤쯔'를 입었을지언정, 신나게 노는 동안에는 아무런 걱정도, 근심도 없습니다. 아 참, '아이스케키'도 생각나시죠? 짓궂은 남자 아이들의 '아이스케키' 장난 때문에, 이 작품 속의 순이가 그랬던 것처럼, 여자 아이들 참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요즘 아이들도 이런 장난을 치는지 모르겠습니다.
문화부를 떠날 즈음, '나의 살던 고향은'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저도 동네 골목길에서 정말 신나게, 원없이 놀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연출자는 6,70년대의 골목 놀이를 무대 위에 재현했다고 밝혔습니다. 저 같은 어른 관객에게는 향수를 자아내고, 어린이 관객에게는 호기심을 느끼게 하는 장면들입니다.
- 여우 꼬리를 들켜서...
하지만 여우 소년의 행복은 오래 가지 않습니다. 나무 할머니는 물을 조심하라고 그렇게 일렀건만, 여우 소년은 순이와 같이 시냇물에서 징검다리 놀이를 하다가 그만 물에 빠집니다. 항상 모든 마술은 이렇게 풀리게 마련입니다. 무도회에 간 신데렐라가 그만 자정을 넘겨 재투성이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처럼, 여우 소년은 물에 빠져 다시 꼬리 달린 여우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여우는 더 이상 그런 모습으로 순이에게 나타날 수 없다고 생각해, 나무 할머니와 달님이 있는 동산으로 도망칩니다. 여우에게 나무 할머니와 달님은 '모습이 바뀌어도 여우는 언제나 여우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보름달에서 반달로, 초생달로 모습이 바뀌지만, 항상 달은 달인 것처럼 말이죠. 나무 할머니와 달님은 순이와 동네 친구들에게 솔직히 말하고 사과하면 받아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우는 용기를 얻어 다시 사내아이의 모습으로 순이를 찾아가지만, 미처 진실을 고백하기 전에, 짓궂은 골목대장 석필이의 방해로 친구들 모두에게 여우 꼬리를 들키게 됩니다. 친구들은 모두 놀라 가버리고, 혼자 남은 여우는 힘없이 동산으로 돌아갑니다. 석필이는 '사람으로 둔갑한 천년 묵은 여시'를 잡으러 가자며 동네 꼬마들을 몰고 여우를 쫓아갑니다. 여우는 석필이에게 맞고 울면서 나무 할머니에게 도망갑니다.
- 다시 친구가 된 여우
가엾은 여우! 여우는 친구들과 즐거웠던 한 때를 그리워하면서 동산에 정성 들여 꽃을 심고 가꿉니다. 그리고 꽃밭마다 친구들의 이름을 새긴 푯말을 세웁니다. 순이, 꽃님이, 맹구, 석필이, 봉팔이, 달자...... 꽃들로 가득한 동산에서 여우는 그 꽃들을 친구 삼아 이름을 부르며 혼자 놀고 있습니다. 때마침 달님이 떠올라 혼자 놀고 있는 여우와 꽃밭을 환하게 비춥니다. 이 장면은 참 안쓰럽고도 예쁩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서 참느라 혼났습니다. 제 뒷자리의 여자아이가 '왜 이렇게 눈물이 나지?'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렇게 제 감정이 마구 여우에게 '이입'된 데에는 음악도 큰 몫을 한 것 같습니다.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를 비롯해, 우리에게 친숙한 구전동요와 창작동요들, 그리고 대금과 해금, 징, 장고 연주자들의 라이브 연주는 때로는 흥겹게, 때로는 구슬프게 여우의 마음을 관객에게 전해주고 있었습니다. (저는 '여우야 뭐하니.....'를 쓰고 연출한 김성제 씨의 다른 작품들, '피아노와 플룻으로 만든 그림 연극'과 '춤추는 강아지'도 봤는데, 모두 라이브로 연주되는 음악이 인상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여우야 뭐하니....'는 특히 국악기를 사용해 더욱 신선하게 느껴집니다.)
중간에 저를 포함한 몇몇 관객들을 눈물짓게 하기도 했지만, 이 뮤지컬은 해피 엔딩입니다. 여우가 그리워진 순이는 친구들을 이끌고 동산에 오르고, 어린이들은, 여우가 순이를 빼앗아갔다고 미워하던 석필이까지도, 여우의 진심을 알게 됩니다. 이제 여우는 꼬리 달린 여우의 모습으로도 아이들과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모두가 행복한 가운데,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리면서 막이 내립니다.
공연장을 나서니, 로비에서는 또 한바탕 신나는 놀이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모두 다 오재미 하나씩을 집어들어 박을 터뜨렸습니다. 공연 시작 30분 전부터도 로비에 배우들이 나와 어린이 관객들과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줄넘기 등을 하며 신나는 놀이판을 벌입니다. 중간 휴식 시간에도 마찬가집니다. 제 딸은 휴식 시간에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에 끼어들었습니다.뛰다가 그만 넘어져서 한바탕 울기도 했지만요.
- 아쉬운 점도 있지만......
공연에 아쉬운 점도 없진 않습니다. 제 딸은 대체로 공연을 재미있게 봤지만, 중간에 조금 지루한 듯 딴청을 피우기도 했습니다. 이 공연은 휴식 시간 포함해서 2시간 정도 걸리는데, 어린이들에게는 조금 부담스러운 시간 아닌가 싶습니다. 아이들의 놀이 부분은 이 작품의 '매력 포인트'이긴 하지만, 길어지다 보니 요즘 어린이들에게는 지루하게 느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저도 중간에 좀 지루한 감이 있었습니다.
이 뮤지컬은 여우에게 중요한 조언자가 되는 나무 할머니를, 나무 모양의 무대장치 중간에 모니터를 설치해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이 모니터에는 나무 할머니를 연기하는 배우의 얼굴이 크게 클로즈 업 됩니다. 그런데 모니터 화면이 잘 선명하게 안 보이고, 여기 비치는 배우의 연기도 어색한 느낌이 들어 아쉬웠습니다. 달님을 표현하는 애니메이션도 좀 더 더 세련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끔 '어린이'를 연기하는 성인 배우들의 연기가 부자연스럽게 보이기도 했고요.
- 중요한 것은 겉모습이 아니다
하지만 저는 공연을 보고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집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돌아와서 저는 동화책 '사랑에 빠진 개구리'를 책장에서 다시 꺼내 읽어봤습니다. '여우야 뭐하니....'는, 초록색 개구리가 하양 오리를 사랑할 수 있는 것처럼, 모습이 다른 여우와 사람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이 중요하다고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생긴 게 다르다고 따돌림당하는 여우는 어쩌면 우리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를 겉모습만으로 판단하고 상처를 주고, 소외시키고 있지는 않은가요. '여우'를 떠올리면서, 교육 현장의 '왕따' 문제가, 노동 현장의 외국인 노동자 문제가 생각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인가요.
제 딸이 이 '여우야 뭐하니......'를 보고, 이런 '메시지'들을 과연 제대로 알아차렸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 딸은 여우가 아이들에게 맞고 도망갈 때, 작은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안타까워했고, 아이들이 여우를 다시 친구로 받아들였을 때 활짝 웃으며 기뻐했습니다. 요 며칠, 제 딸은 날마다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를 흥얼거리고 있습니다. 이 정도면 잘 봤다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