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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4. 03. 09(일/음력 02.09)
▲창녕조씨 시조 조계룡 묘단(昌寧曺氏始祖曺繼龍 墓壇).
소재지 : 경북 경주시 안강읍 노당 2리 초재마을
▲시조 태사공 묘단 비(始祖太師公墓壇碑)
■ 시조 태사공 묘단 비명(始祖太師公墓壇碑銘)
신라 태사 부마도위 창성부원군 조공 휘 계룡 묘단 비명 전서
창녕조씨 시조 신라 태사 부마도위 창성부원군 묘단 비명 병서
보국숭록대부 행 이조판서 겸 지경연춘추관사 판의금부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성균관사 풍산 홍량호 근찬
후손 통정대부 행 동래도호부사 봉진 경서 후손 통정대부 행 홍문관 부응교 지제조 겸 경연시강관 춘추관 편수관 세자시상원 사서 석정 경전 하늘과 사람은 엄연히 갈라졌으되 왕왕 하늘의 정기가 변하여 사람으로 태어나는 일이 있으니, 하늘이 보낸 제비 알을 먹고 태어난 상(商)나라의 시조라든지, 상제(上帝)의 큰 발자국을 밟음으로써 잉태되었다는 주(周)나라 시조의 일 따위는 시경(詩經) 아송편(雅頌篇)에 실려 전하니 전혀 허황하다 못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큰 박에서 박(朴)씨가 태어나고, 계림에서 김(金)씨가 나고, 금합(金盒)에서 수로왕(水露王)이 나고, 흙구덩이에서 제주 세 성씨가 난 것이다. 이러한 것이다.
소자첨(蘇子瞻)이 일찍이, 신인(神人)의 탄생이 범인(凡人)과는 다르다고 한 것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조씨 시조가 용지(龍池)에서 난 이치도 어찌 이와 다름이 있겠는가.
조상이 후손에게 육신의 자리는 물려주고 사라져도, 그 기맥(氣脈)은 하나로 이어져, 제사(祭祀)의 향촉(香燭)과 꿈자리에서의 감응(感應)이 천백(千百)년이 지나도 어긋난 적이 없다. 이제 시조공이 담운공(澹雲公)의 꿈에 나타나신 것을 보아도 그 이치는 조금도 괴이한 일이 아니다.
원래 조씨 시조의 묘는 대(代)가 너무 멀어 실전(失傳)하였다. 그런데 담운공이 일찍이 꿈에 한 사당(祠堂)에 들어가니 사람 소리가 있어 '어찌 내 비(碑)를 세우지 않는가?' 하기에 두루 살펴보았더니, 산 밑에 한 고총(古塚:오래된 무덤)이 있고 그 위에 풀이 무성하며 그 아래 흙색은 모두 붉은데, 앞에 있는 큰 돌에 '曺繼龍'이란 석 자가 씌어 있었다.
시조 묘인 줄을 알고 황송히 놀라 그 쪽을 향하여 두 번 절하고 깨어보니 바로 꿈이었다. 마음속으로 기이하게 여겼는데, 마침 영천 사는 종인(宗人>촌수가 먼 일가) 선적(善迪)의 글에 '우리 시조의 분묘가 경주 초제리(草堤里)에 있다.
옛 부터 조씨 시조묘라 알려져 왔는데, 병란을 겪는 동안 잊어 버렸으나 어쩌다 경내(境內)에 침범하는 자가 있으면 갑자기 이변(異變)이 생기는 까닭에 오늘까지 골 안에 사람 무덤이 없었다.'는 말이 있고, 뒤에 또 화순(和順) 사는 종인(宗人) 선행(善行)의 구보(舊譜)에도 '시조묘가 경주부 북쪽40리 밖 자옥산(紫玉山) 밑 초제(草堤) 신좌(辛坐) 언덕에 있다.' 하였으니, 앞의 선적의 글은 그 지방 사람들의 전설에 의한 것이고, 뒤의 선행의 보첩(譜牒)은 선대의 기록에서 나온 것인데, 이 두 가지가 꼭 부합하여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
마침내 영남 종인들이 가서 살펴보니 그 지형, 땅 색깔과 묘역(墓域) 좌향(坐向)이 꿈에서 본 그대로이므로 봉분을 개수하고, 초목(樵牧>땔나무를 베고 가축 기르는 일)을 금계(禁戒)하여 지금까지 전하여 왔다.
대개 생민(生民)의 시초가 저렇게 신비로와 정백(精魄: 죽은 사람의 영혼)은 반드시 육신과 함께 사라지지 않는 법이라, 담운공은 문자과 덕행이 온 세상의 모범이 되고 타고난 자질이 허명충담(虛明沖澹)하여 능히 신명(神明)과 교응(交應)할 만한바,굴원(屈原)이 말한, '끝없이 허정(虛靜:비어 고요함)하고 염유(恬愉:편안하고 즐거움)하여 태초와 이웃할 수 있는 그런 경지'에 가까웠으므로, 조손(祖孫)의 영혼이 은은한 가운데 성용(聲容:서리와 모습)으로 서로 접할 수 있는지라, 이 어찌 예사 마음으로 헤아릴 수 있는 일이겠는가.
옛날 류자후(柳子厚)가 쓴 양양(襄陽) 조승(趙丞)의 묘지(墓誌)에 '그 아들이 들에서 울고 있는데, 눈이 쑥 들어가고 수염이 많은 사람이 나타나 자기의 성이 조(趙)라고 하면서 그 아이 아비의 무덤을 알려 주었다.'는 것은, 그 지극한 효성에 감동한 신이 그 같은 모습으로 가탁(假託)하여 알려 준 것이니, 천 년 전후의 사실이 이같이 들어맞는 것은 참으로 신기하지 않은가.
당시에 담운공이 너무 늙어 몸소 성묘하지 못하고 훗날을 기약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뒤에 그 손자 회진(晦振)이 공의 유지(遺志)를 좇아 천 리를 다니며 같은 길을 걷는 여러 후손을 불러 모아 앞의 현몽(顯夢) 사실을 질정(叱正>고쳐 바로잡음)하고, 또 영천에서 나온 글과 화순에서 얻은 보첩을 증험(證驗>증거로 삼음)하며 다시 견문을 참고하니 모두 부합하는 지라, 마침내 소분고재(掃墳告祭 : 무덤을 청소하고 제사를 지냄)하고, 전국의 여러 후손들과 함께 묘단을 모으고 비를 세웠다. 담운공이야말로 훌륭한 손자를 두었다 할 것이요,
당시의 영윤(令尹) 유한모(兪漢模)는 공의 외손자이었는데 지주(地主)로서 이 역사(役事)를 도우니 또한 외손 노릇을 훌륭히 하였다 이를 만하다.
삼가 조씨의 세보(世譜)를 살피건대, 시조의 모당(母堂:어머니)은 신라 한림학사 이광옥(李光玉)의 따님인데, 아기 때의 속병이 자라면서 더욱 고질이라, 사람들이 '창녕 화왕산 용지(龍池)가 매우 영이(靈異)하다는데 가서 빌어 보라.' 하기에, 목욕 제계하고 못가에 이르니 갑자기 운무가 일어 대낮이 캄캄하다가 안개가 걷히면서 병이 낫고 그로부터 태기가 있었다.
예향(禮香)씨의 꿈에 한 장부가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동해 용왕의 아들로서 이름은 옥결(玉결)인데 바로 이 아이의 아비라. 모름지기 이 아이를 잘 돌보아라. 크게는 공후(公候)가 될 것이고 적어도 경상(卿相)은 틀림없을 것이며, 자손만대가 명옥 같이 빛나리라.'고 말하였다.
그 사실을 진평왕에게 아뢰었더니, 왕이 불러본즉 풍모가 특이하고 겨드랑에 '曺'자 같은 글무늬가 있어 그로써 성을 내렸으며 자란 뒤 공주를 아내로 삼았다.
일찍이 언젠가 왜구가 동래(東萊)를 침범하였을 때, 왕이 공으로 하여금 군졸로 막게 하니 홀로 말을 타고 나아가 고삐를 부여잡고 차근차근 타이르니 왜인들이 엎드려 '공이야말로 천인이시다.' 하고서는 군대를 철수하여 물러갔다고 한다. 이 사실이 비록 정사(正史)에는 보이지 않으나 오래도록 전하여 내려오는 이야기이니 조금도 무계(無稽)하다 못할 것이다.
그 후 후손이 크게 번창하여 여덟 분의 평장사(平章事 : 고려 정2품)와 아홉 분의 소감(少監>고려 종4품)이 연달아 났으니 우리나라 조씨 성 가진 사람은 다 그 후예다.
담운공의 휘(諱)는 명교(命敎)로 벼슬이 천관소재(天官少宰) 예문관 제학에 이르렀던 분으로 진평왕 때와는 천이백 년의 시대가 떨어진다. 나 풍산(豊山) 홍량호(洪良浩)는 이런 사실을 듣고 신비롭게 여겨, 여기 담운공의 기록과 이 지방 사람들이 전하는 바를 기술하여, 돌에 새겨 멀리 백 세대 후에라도 여기가 조씨 시조의 묘소임을 알게 하고자 한다. 이 글을 봉분에 새기지 않고 따로 단에다 새기는 것은 신중을 다함에서이다. 기리어 새기노라.
하늘 정기 변모하여 사람으로 화(化)하니
용지에 탄생의 영험이 내렸도다.
신인(神人)이 어루만져 내 아이라 이르시고
왕은 겨드랑이 조문(曺紋)에 따라 성씨를 주시 도다.
싸움터에 거마(車馬) 위용(偉容) 늠름히 나아가니
왜적의 무리들 두려워 물러갔다.
팔평장(八平章) 구소감(九少監) 자손 더욱 번창 컨만
천 년토록 그 유택(幽宅) 아득터니
어느 한 밤 영사(令嗣) 꿈에 오셨나니
요요(寥寥)하던 사당(祠堂)에 계신 그 말씀
나 있느니 멀지 않은 초제(草堤) 저 언덕
유전(流傳) 고첩(古牒) 질정하니 틀림없어
송구하고 슬픈 맘 몸 둘 바 없었어라
점장이 아니라도 영락없으니
소 떼도 밟지 않은 네 척 묏벌 안
정결한 제수로 묘사 지낼 제
한 굼게 신인의 숨결인 양 물이 솟아나
그대 효성 감응하여 이 터에 흐르나니
천억 년 다할 것가 후손 빛나라.
▲화왕산 창녕조씨 득성지비(火旺山昌寧曺氏得姓碑)
■ 창녕조씨 득성지비(昌寧曺氏 得姓地碑)
◇건립연대 : 서기1897년 광무원년(光武元年) 정유(丁酉)
◇크기 : 길이 2.5m, 폭 1.46m의 암석에 1.70m×56cm 의 구획을 정해 다듬어내고 그 내부에 刻字 하였다.
◇건립자 : 관재사(觀齋使) 조시영(曺始永)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창녕읍 옥천동 산322 화왕산성내.
◇문화재지정 : 경상남도 문화재 : 제246호 지정(2003.04.17)/창녕군 향토 문화재 14호
◇소유자 : 창년조씨문중(昌寧曺氏門中)
◇건립배경
사적 제64호인 화왕산성 안에 있는 이 비(碑)는 신라 진평왕 때 화왕산정 못에서 曺氏姓을 얻게 되었다 하여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龍潭근처(東門)에 높이 2.4m, 의 자연석에다[昌寧曺氏 得姓之地]란 비석을 세운 것이다.
▲남명조식선생초상화(南冥曺植先生生肖像畵)
탄신 500주년을 맞이한 남명 조식(1501~1572년) 선생의 표준영정을 제작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 남명학연구원 등 남명학 관련단체들은 지난 82년 남명 선생 후손들이 진주에 살았던 조원섭 화가에게 의뢰해 그린 전신상을 영정으로 널리 사용하고 있으나, 이는 지정된 표준영정이 아니어서 탄신 500주년 기념행사를 맞은 만큼 이제라도 표준영정을 제작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조 화가의 남명영정은 현재 산청군 시천면내 덕천서원의 숭덕사에 비치돼 있으며 남명학연구원 등 관련단체에서 지난 20년간 사용해 왔으나, 72세까지 생존했던 남명 선생의 모습과는 다르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어 정부가 기록을 토대로 새로운 표준영정을 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달리 영정을 제작하기가 어렵다면 조 화가의 영정이 널리 사용돼 온 점을 감안, 이 영정을 표준영정으로 지정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문화관광부 관계자는 이에 대해 “표준영정 지정은 국가적인 인물의 경우 시.도나 문중에서 작가의 의견 등 서류를 첨부해 신청하면 심의위원회에서 심의한 뒤 지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관련단체 관계자는 “경의(敬義)철학으로 선비정신의 표상이 된 실천유학자 남명 선생의 표준영정조차 지정되지 않았다는 것은 정부에서 훌륭한 학자들의 관리를 소홀히 한 것”이라며 “지금부터라도 표준영정을 지정하고 남명 선생의 업적을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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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조씨(昌寧曺氏)
창녕(昌寧)은 경상남도 북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옛 창녕현(昌寧縣)과 영산현(靈山縣)이 합하여 이루어진 곳이다.
본래 삼한시대에 불사국(不斯國), 이후의 빛벌가야(非火伽倻) 지역이었다.
신라에 의해 555년(신라 진흥왕 16) 하주(下州)가 설치되었고, 565년(진흥황 26) 비자화군(比自火郡) 또는 비사벌군(比斯伐郡)으로 개칭되었고, 757년(경덕왕 16)에 화왕군으로 바뀌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창녕군으로 고치고, 1018년(현종 9) 밀성군(密城郡: 密陽)의 속현이 되었다.
1172년(명종 2)에 창녕군에 속하기도 하였다. 1274년(원종 15)에 영산현에 감무가 파견되면서 독립하였다.
1414년(태종 14)에 창녕현으로 되었고, 1631년(인조 9) 창녕현이 영산현에 합쳐졌다가 얼마 후에 복귀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대구부 창녕군·영산군이 되었으며, 1896년에 경상남도 창녕군·영산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영산군의 일부를 병합하였다. 1960년 창녕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창녕조씨(昌寧曺氏)의 시조 조계룡(曺繼龍)은 신라시대 제26대 진평왕의 사위로 전해오고 있다.《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는 한림학사(翰林學士) 이광옥(李光玉)의 딸 예향(禮香)이며, 그의 출생에 대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예향은 창녕현 고암촌(鼓巖村) 태생으로 그녀가 우연히 병이 생겨 화왕산(火旺山) 용지(龍池)에 가서 목욕재계하고 기도를 올리니 신기하게 병이 완쾌되었고 몸에는 태기가 있었다.
어느날 밤 꿈 속에 장부가 나타나 “이 아이의 아버지는 용의 아들 옥결(玉玦)이다. 잘 기르면 자라서 경상이 될 것이며 자손만대 번영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그 후 아들을 낳으니 겨드랑이 밑에 ‘조(曺)’자가 뚜렷하게 씌어져 있었다. 이것을 본 이학사가 왕에게 고하니 왕이 신기하게 여겨 성을 조(曺)로 하고 이름을 계룡(繼龍)으로 하사하였다고 한다.
그는 진평왕의 사위가 되었고, 보국대장군상주국대도독태자태사(輔國大將軍上柱國大都督太子太師)에 올랐으며,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알 수 없다.
신라 말에 아간시중(阿干侍中)을 지내고 고려 태조의 딸과 결혼한 조겸(曺謙)을 중시조로 하고 있다.
후손들이 조계룡을 시조로, 조겸을 중시조로 삼고 창녕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문헌에 의하면 조씨는 본관이 10여 본이 전해지고 있지만 모두 창녕조씨에서 분적되었다고 한다.
파명(派名)을 살펴보면, 감사공파(監司公派),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 대사헌공파(大司憲公派), 매계공파(梅溪公派), 밀직사공파(密直使公派), 부사직공파(副司直公派), 부제학공파(副提學公派), 사의공파(司議公派), 사정공파(司正公派), 사직공파(司直公派), 상서공파(尙書公派), 상호군공파(上護軍公派), 생원공파(生員公派), 선무랑공파(宣武朗公派), 수찬공파(修撰公派), 승지공파(承旨公派), 시랑공파(侍郞公派), 시중공파(侍中公派), 장양공파(莊襄公派), 중추공파(中樞公派), 지중추공파(知中樞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참판공파(參判公派), 청구당공파(靑邱堂公派), 총제공파(摠制公派), 충순위공파(忠順衛公派), 충익공파(忠翊公派), 태복경공파(太僕卿公派), 태학사공파(太學士公派), 판부사공파(判府事公派), 판윤공파(判尹公派), 현감공파(縣監公派), 헌납공파(獻納公派)로 나뉘어졌다.
●창녕조씨의 연혁과 인물
신라 말기 아간시중(阿干侍中) 조흠(曺欽)의 아들 조겸은 고려 태조의 딸 덕공 공주(德恭公主)에게 장가들었으며, 태악서승(太樂署丞)이라는 벼슬을 지냈다. 또 조겸의 아들 조서(曺瑞)는 형부원외랑을 지냈다.
조서의 아들 조연우(曺延祐)로부터 조자기(曺自奇)에 이르기까지 8대에 걸쳐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냈고, 그 뒤 6대는 소감(少監) 벼슬을 배출하여 고려 명문가의 지위를 굳혔다.
조저(曺著)는 고종 때 과거에 급제하고, 병마도원수를 거쳐 벽상삼중대신 문하시중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과 보문각 태학사를 역임하였고, 연주부원군(聯珠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장양(莊襄)이다.
조광한(曺匡漢)은 충렬왕 때 중시에 장원하고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고 창성군(昌城君)에 봉해졌으며, 조익청(曺益淸)은 충숙왕부터 공민왕(恭愍王)에 이르기까지 5대에 걸쳐 사직을 보필한 공으로 좌정승에 오르고 하성부원군(夏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사후 공민왕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양평(襄平)이다.
조계방(曺繼芳)은 공민왕 때 등과하여 벼슬이 직제학에 이르고 홍건적의 난 때 왕을 호종하여 공을 세웠으나, 태조 이성계가 집권한 뒤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창녕에 은둔하였다. 조민수(曺敏修)는 공민왕 때 홍건적의 난을 격퇴한 명장이다.
그는 충근보리공신에 녹훈되고, 벼슬은 문하시중에 이르렀다.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에서 회군하였으나, 반기를 들어 창녕으로 귀양 가서 죽었다. 조비형(曺備衡)은 조선 태종 때 무과에 급제하고, 함길·평양·경상 3도의 병마도절제사를 역임하고 공조판서를 지냈다.
시호는 안무(安武)이다.
조상치(曺尙治)는 세종과 문종, 단종 때 성삼문·박평년 등과 함께 교류하고 집현전 부제학을 지냈다.
하지만,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영천으로 물러나 자신의 묘비를 미리 써놓고 외부와의 접촉을 끊었다.
조상치의 호는 단고(丹皐)·정재(靜齋)이며, 정조 때 충정(忠貞)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조상치의 후손 중에서 벼슬에 오른 사람이 많았고, 문중도 번성했다.
조석문(曺錫文)은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적개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성종 때 부원군에 진봉되고 시호는 공간(恭簡)이다.
조위(曺偉)는 성종 때의 문장가로 그의 자형이 점필재 김종직이다. 어려서부터 김종직에게 수학하였으며, 과거에 급제한 뒤 성종의 총애를 받고 호조참판을 지냈다. 또 성균관 대사성과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지냈다.
그는 홍문관의 관료들과 ‘두시언해(杜詩諺解)’를 완성하였으며, 그 서문을 썼다.
또 저서로는 ‘매계집(梅溪集)’이 있고,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조숙기(曺淑沂)는 건주 정벌에 공을 세웠으며, 병마절도사와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조치우(曺致虞)는 대구부사와 사옹원정을 역임하였으며, 왕으로부터 소학 1부를 하사받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조계은(曺繼殷)·조계상(曺繼商) 형제는 중종반정에 공을 세웠으며, 형인 조계은은 벼슬이 종부시정(宗簿寺正)에 이르고, 아우 조계상은 벼슬이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조세우(曺世虞)는 성균관 생원으로 있으면서 권신인 김안로와 허항 등을 탄핵했으며, 그의 재종손인 조응남(曺應南)·조진남(曺鎭南) 형제, 종손인 조열(曺悅)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조직하여 창녕 대산진에서 왜군을 크게 무찔렀으나 순절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응남·순남 형제는 정려(旌閭)되고 조열은 훈정(訓正)으로 제수되었다. 조광원(曺光遠)은 을묘왜변(명종 10년) 때 경상도순찰사로 활약하였으며, 우찬성을 지냈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조선조 창녕조씨의 인물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남명(南冥)학파를 이룬 조식(曺植)이다.
그는 명종과 선조 때 조선의 대학자로 퇴계 이황에 견줄 수 있는 인물이다. 그는 지리산 기슭에 은거하며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여러 제자와 후학을 가르쳤는데, 조식의 후학들과 수많은 제자들이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일어났다.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도 그중 한 사람이다. 호는 남명이며, 광해군 때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정(文貞)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았다.
저서로는 ‘남명집’ ‘남명학기(南冥學記)’ ‘유편(類編)’ ‘파한잡기(破閑雜記)’ 등이 있다.
조광익(曺光益)은 선조 때 중시문과에 장원하고 벼슬이 의금부도사에 이르렀다. 조호익(曺好益)은 강동에 유배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웠다. 정주목사를 역임하였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며, 저서로는 ‘지산집(芝山集)’ 등이 있다.
조탁(曺倬)은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하였으며, 경기관찰사와 형조참판을 지냈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의 아들 조명욱(曺明?)도 영의정에 추증되어, 조몽정·조탁·조명욱 3대가 영의정에 추증되는 영예를 누렸다.
조우인(曺友仁)은 시와 서화에 능했으며, 벼슬은 첨지중추부사와 우부승지를 역임했다. 조한영(曺漢英)은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한 척화파의 한 사람이다. 그는 김상헌·채이항 등과 함께 청나라에 잡혀가 투옥되었으나 의주로 이감되어 석방되었다. 하흥군에 봉해지고 벼슬은 한성부 좌윤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조석중(曺錫中)은 조(曹)씨로 되어있던 성씨를 정조의 명을 받아 조(曺)로 환원하고, 이를 사용할 것을 문중에 전달했다.
‘창녕조씨지선록(昌寧曺氏知先錄)’을 편찬하였으며, 벼슬은 충청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조봉진(曺鳳振)은 창녕조씨 시조의 재실인 종덕재(種德齋)의 기문을 지었고, 이조판서를 역임했다. 조석여(曺錫輿)는 좌찬성을 지내고, ‘창녕조씨경진대보(昌寧曺氏庚辰大譜)’를 엮고 서문을 지었다.
●창녕조씨 근현대인물
조성환(曺成煥)은 구한 말 참위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이동녕·이상설·김구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그 뒤 만주로 건너가 북로군정서를 조직하고 군사부장을 역임했다. 다시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국무위원이 되었으며, 광복군 설립의 기초를 닦았다.
조만식(曺晩植)은 간디의 무저항주의와 안창호의 민족자강운동에 감동하여 민족산업을 증진시키는 데 기여하였으며, 백성의 생활조건을 개선시키며 독립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광복 후에도 북한에 남아 있다 6·25전쟁 때 평양형무소에서 공산당에 의해 살해되었다.
또 죽산 조봉암은 일제강점기엔 좌익계열 독립운동을 했지만, 해방 후에는 이승만 정권에서 초대 농림부 장관을 역임했다.
하지만, 자유당과 결별하고 진보당을 결성하여 대통령 후보에 나섰으나, 진보당 사건으로 사형당했다.
그 외 창녕조씨 인물로는 제헌의원 조국현을 비롯하여 조재천 조명환 조일환 조창대 조영규 조형부 조덕현 조기상 등이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장관으로는 조재천(법무장관)·조정환(외무장관) 등이 있으며, 학계에서는 조재호(전 서울교대 학장)·조무성(전 광운대 총장)·조좌호(전 성균관대 총장)·조규상(가톨릭의대 교수)·조준승(경북대 의대학장) 등이 있고, 법조계에는 조우현 변호사 등이 있다.
또 한국 바둑계의 거성인 조훈현 9단도 창녕조씨이며, 판소리 명창 조상현, 성악가 조수미, 가수 조성모, 태진아(조방헌)도 창녕조씨 인물이다.
자료>필자가 인터넷 자료들을 수집 편집한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