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에 김용만 선생님이 쓴 '새로쓰는 연개소문전'에 있는 글을 인용합니다. 개인적으로 이글 보고서 약간 의문이 생겨서 제 나름대로 글을 쓴 것도 하단부에 올려둡니다.(글이 제법 깁니다.) 아직 제 스스로도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 역사문 카페에는 올리지 않고 정리만 해두고 있었는데 여러 가능성의 측면에서 여기에 올려봅니다. 첫번째 것은 김용만 선생님의 글이고 둘째부터는 제 생각을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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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죽음과 관련해서 가장 큰 논란은 그가 죽은 시점이다. 그것은 고구려 멸망과 연개소문이 어떤 관련이 있는가라는 문제를 푸는 가장 중요한 열쇠이기 때문이다.
고구려 멸망의 책임이 연개소문에게 가장 크게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개 그의 죽음을 665년, 혹은 666년으로 본다. 고구려가 멸망한 시점에서 불과 2~3년 전이다. 따라서 연개소문 생전에 생긴 여러 문제점이 고구려가 멸망하게 된 중요한 원인이라는 것이다.
이와 정반대의 입장에 선 사람은 신채호다. 그는 연개소문이 고구려 멸망과 전혀 관계가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는 삼국사기 등에 기록되어 있는 666년 연개소문이 죽었다는 것이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백제 멸망 이전인 657년에 죽었다고 했다.
신채호는 남생묘지명에서 남생이 막리지가 된 시점을 연개소문이 죽은 해라고 주장했다. 남생이 막리지에 올랐다는 것은 곧 정권과 병권을 다 잡은 증거이며, 연개소문이 이때 죽었기 때문에 남생이 그 직위를 이어받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막리지는 동시에 여러 명이 있을 수 있다. 연개소문이 막리지 자리를 지켰던 647년에도 보장왕의 둘째아들 임무가 막리지로 활동했다. 또 신채호가 657년에 죽었다고 했던 연개소문은 662년 당나라 방효태군과 싸워 사수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연개소문이 이미 죽었다면 당나라가 굳이 죽은 연개소문을 불러 와서 사수전투를 기록할 까닭이 없다.
무엇보다 그의 주장의 잘못은 남생이 막리지에 오른 시점이 그가 24세때인 657년이 아니라, 28세인 661년이라는 점이다. 신채호가 당시 남생묘지명을 제대로 구해보지 못해서 원문을 착각했던 것이다. 남생이 승진을 한 내용을 담은 원문은 다음과 같다.
남생이 나이 9살이 되자, 선인의 지위를 주었다.(중략) 15세에 중리소형을 주었고, 18세에 중리대형을 주었으며, 23세에 중리위두대형으로 고쳐 임용했고, 24세에 나머지 관직은 그대로 하고 장군을 겸하게 했다. 28세에는 막리지로 임용하고 삼군대장군을 겸해주더니 32세 때에 태막리지로 더해 군국을 총괄하는 아형원수가 되었다.
그는 “나머지 관직은 그대로 하고 장군을 겸하게 했다. 28세 兼授將軍, 余官如故, 卄八라는 10글자가 빠진 것을 모르고 묘지명을 읽었기 때문에 이같은 착오를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657년은 분명 연개소문이 죽은 해가 아니다. 신채호의 주장대로 남생이 막리지에 오른 해에 죽었다고 해도 그 해는 661년이 된다. 그의 657년 설은 부정되어야 한다..
연개소문의 죽음에 대해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보장왕 25년 연개소문이 죽고 남생이 대신 막리지가 되었다. 처음으로 국정을 맡고, 여러 성들을 나아가 살펴보기 위해 그의 아우 남건과 남산으로 뒷일을 맡게 했다.
그런데 이 기록은 구당서를 인용한 것인데 그 내용은 이렇다.
(건봉 원년) 6월 임인, 고구려 막리지 연개소문이 죽었다. 아들 남생이 그 아버지의 벼슬을 계승했다. 남생이 도생 남건에게 쫓기는 바가 되자, 아들 연헌성을 사자로 보내어 항복을 청할 것을 알려왔다. 좌요위대장군 계필하력에게 병사를 이끌고 그를 돕기 위해 마중나라가로 명령했다.(주 : 명령한 시점이 사건 기록 기준)
보장왕 25년과 건봉 원년은 666년이다. 따라서 666년을 연개소문이 죽은 해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666년 6월 임인 날은 연개소문이 죽은 시점이 아니다. 연개소문이 죽은 후에, 남생이 고구려에서 도망쳐서 당에가 항복을 하고, 이를 접수한 당에서 계필하력에게 남생을 맞이하라고 명령한 시점이 그날일 뿐이다. 따라서 연개소문의 사망일시는 이보다 한참 이전이며, 사수전투를 승리로 이끈 662년 이후가 된다.
그렇다면 66년 6월 이전에 연개소문이 죽었다고 추정할 수 있는 시점은 그의 아들인 남생이 부친의 권력을 이어밭은 때라고 볼 수도 있다. 이렇게 볼 때 남생이 32세에 태막리지에 올랐던 665년이 연개소문의 사망 연대로 거론될 수 있다. 현재 학계에서는 665년에 연개소문이 죽었다는 것이 가장 많은 지지를 얻고 있다.
그러나 665년에 연개소문이 죽었다고 보기에는 몇 가지 점에서 의문이 따른다.
일본서기 천지천황 3년 (664년) 10월조의 기록을 보자
이달에 고구려 대신 연개소문이 그 나라에서 죽었다. 여러 자식들에 유연해 말하기를 ‘너희 형제는 고기와 물 같이 화합해 작위를 다투는 일은 하지 말라. 많일 그런 일이 있으면 반드시 이웃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라고 했다.
일본측 기록은 연개소문의 죽음에 대해 중국측 기록보다 더 구체적인 사실을 전하고 있다. 그렇다면 연개소문은 662년 10월에 죽었다고 할 수 있을까?
일본서기 천지천황 6년 10월조에는 다음 기록이 있다.
고구려의 대형 남생이 성을 나가 나라 안을 돌보았다. 이때 성 안의 두 아우가 측근 사대부의 나쁜 말을 듣고서, 남생을 성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이 때문에 남생은 당에 가서 그 나라를 멸망시킬 것을 모략했다.
일본서기는 중극측 사료와는 달리 남생이 당으로 달아난 사건을 3년 터울을 두고 다른 사건으로 구분지어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연개소문의 죽음과 남생이 당으로 투항한 시점을 같은 연대로 보는 견해는 물론, 2년 터울로 발생했다고 추정해왔던 665년 설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따라서 665년 설은 일본서기를 참고할 경우 분명 재검토되어야 한다.
연개소문의 죽음에 관해서는 당시 고구려와 적대적인 당나라보다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그의 죽음을 알려주었을 일본측 사료에 나온 정보가 더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된다.
그런데 일본서기는 남생이 당에 가서 나라를 멸망시키려고 했던 시점을 667년 10월로 기록하고 있다. 남생묘지명에는 남생이 아들 헌성을 보내 당에 구원을 요청한 시점을 666년으로 길고하고 있고 남생이 당에 들어간 시점은 667년으로 기록하고 이싿.
남생이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n이해 아들 헌성을 보낸 시점을 기준으로 한다면 일본서기가 1년이 틀린 것이 된다. 일본서기는 고구려에서 보낸 사신을 보내 고구려 내부의 정보를 얻은 것이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입장에서 남생이 나라를 멸망시키려고 했다고 일본에 알린 시점은 666년이지 667년이라고 보기 어럽다. 남생은 666년 6월에 당군을 끌어들여 고구려를 공격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일본서기에서 남생이 모반한 사건을 667년 10월에 기록한 것은 1년을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더 나아가 이 사건과 3년의 시차를 두고 발생한 연개소문의 죽음도 664년이 아닌 663년에 발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연개소문의 죽음과 남생의 모반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 사건이다. 일본서기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고구려에 관한 정보를 하나하나 맞추어 가다가 1년씩 밀려서 기술했을 가능성이 많다.
연이은 사건을 앞의 것은 정확하고 뒤의 것은 1년을 늦추어서 기록했다고 볼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적다. 반면 일본서기의 사건 발생연대가 실제 시점과 1년 정도 틀린 것은 여러 사례가 있다. 연개소문의 혁명은 661년으로 1년 빠르게 기록되어 있다. 또 안원왕의 계승자를 둘러싼 귀족간의 내분 사건은 544~545년보다 1년 늦은 545~546년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연대 오차는 많은 반면 사건간의 발생 터울은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일본서기를 통해서 연개소문의 죽은 연대를 살펴본다면 664년 혹은 663년이 된다. 이 연대가 검토되어야 하는 이유는 연개소문이 죽은 후, 곧장 아들 남생이 부친의 직위를 계승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즉 665년 설의 문제는 권력자가 죽은 후, 곧장 후계자가 그 직위를 계승한 것으로 보려고 했다는데 있다.
독재자가 죽었을 경우, 독재자의 아들은 곧장 직위를 계승하지 않고 상례를 치른 후, 천천히 직위를 계승하는 예가 많다. 북한의 경우 1994년 7월 김일성 주석이 죽은 후, 후계자인 김정일은 3년 3개월이 지난 1997년 10월이 되어서야 조선노동당 총비서직에 올랐다. 김정일이 굳이 3년 이상을 기다린 것은 강력한 지도력을 가졌던 전임자에 대한 예우와 함께 그의 후광을 받아서 튼튼한 권력 기반을 만들 시간을 벌기 위함이라고 판단된다. 강한 카리스마를 가졌던 권력자가 죽었을 경우 그의 장례 기간에는 누구도 선뜻 나서서 그가 정해놓은 후임자를 공격하기가 어렵다. 고구려의 장례풍습은 3년 상이다. 사람이 죽으면 집 안에 안치해 두었다가, 3년이 지난 뒤 좋은 날을 가려 장사를 지내는데, 부모와 남편의 상에는 모두 3년 복을 입었다. 광개토대왕의 경우 391년 18세에 즉위해 39세인 412년에 죽었다. 그런데 광개토대왕의 시신을 산릉에 모시고 비를 만든 것은 414년 9월 29일이다. 광개토대왕의 장례도 3년 상이었다. 백제 무령왕릉의 경우도 2년 3개월, 즉 3년 상을 치뤘다. 연개소문은 왕은 아니지만, 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갖고 있었으므로 국상으로 3년상을 치렀을 것이다.
그렇다면 연개소문이 죽은 후, 장례기간이 종결된 다음에야 남생이 부친의 직위를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 남생 또한 연개소문이 죽기 전에 이미 다음 번 후계자로 내정되어 막리지 겸 삼군 대장군에 오를 만큼 장례기간이 종결되기 전에 부친이 가졌던 태막리지 자리에 오를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즉 연개소문이 죽은 시점을 남생이 부친의 직위를 계승한 665년보다보다 이른 663년 10월이라고 보고자 한다. 이 시점은 일본서기 기록의 1년 착오를 고친 시점이며, 고구려의 장례풍습을 고려해 판단한 시점이다.
연개소문이 생전에 막강한 권력을 가졌던 만큼 그의 장례도 성대하게 치러졌을 것이다. 남생은 부친의 장례를 치른 후, 665년 말에 이르러 태막리지에 올라 부친의 모든 권력을 물려받았다. 남생은 이 시점에 전국을 순회하기 시작한다. 만약 장례가 끝나지 않았다면, 상주인 남생이 전국을 돌아다닐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또한 남생이 동생인 남건, 남산과 권력 투쟁을 벌이는데, 이것이 연개소문의 장례가 끝나지 않은 시점에서 벌어진 것이라면 고구려인의 정서에서 용납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남생이 태막리지가 된 연대를 근거로 연개소문의 죽은 연대를 추정한 665년 설은 고구려의 장례풍습 등을 볼 때 합리적인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연개소문은 610년대에 태어나서 환갑을 넘기지 못하고 663년 곡루ㅕ인의 평균 수명인 55세에 가까운 나이에 죽었다. 그의 죽음의 원인은 기록된 바가 없다. 다만 , 662년 2월에도 군대를 지휘해 당나라 방효태의 옥저도행군을 몰살시킬 만큼 기력이 있었으므로, 노환보다는 병으로 죽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겠다.
어쩌면 백제 구원이 뜻대로 되지 않자, 과로와 스트레스로 죽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고구려가 백제 구원에 적극 나서지 못한 것도 연개소문의 건강에 이상이 있었던 것이 한 원인이 되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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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3년 8월 당은 왜 갑자기 선박건조를 멈추라고 했을까? 643년부터 국력을 기울인 이 대사업을 왜 멈추어야 했을까? 국력소모가 대단했고 이 때문에 반란도 자주 일어났지만 백제를 멸망시키고 고구려 역시 2차 전쟁에서 멸망의 위기로 몰고 갈 만큼 이 사업의 효과는 대단했다. 때문에 당으로써는 더 많은 배를 계속 건조해야 옳다. 그럼 왜 중단한 것일까? 만약 그 이유가 2차 전쟁에서 상륙전을 함에도 전쟁에서 졌기 때문이라면 전쟁이 끝난 1년 5개월 뒤에서야 중지했다는 것을 설명할 수 없다. 그렇다면 국력소모가 크고 반란이 자주 일어나서? 그렇다고 보기에는 그 당시 대규모 민란이 일어났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더욱이 4년 뒤인 667년에 고구려에 파견된 당군의 병력 추정치는 자치통감을 토대로 할 때 100만 명에 육박하기 때문에 막대한 국력소모 탓에 이 사업을 중단했다고 보기도 힘들다.(물론 기록상의 과장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선박건조를 하지 않아도 될 이유가 무엇일까? 글쓴이가 조심스럽게 추측컨대 이 당시 연개소문이 사망하거나 혹은 중한 병에 들었다는 소문이 당 조정에 들어갔기 때문에 선박건조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한 듯 하다. 이것은 이미 김용만 선생님이 『새로쓰는 연개소문전』에서 고증한 것을 보더라도 비슷한 결과가 나온다. 단 김용만 선생님은 사망 시점이 10월, 글쓴이는 8월 이전으로 생각한다. 물론 일본서기는 대개 연대가 잘못되거나 속이는 일이 다반사지만 월, 일만큼은 상세히 적고 있기 때문에 연도가 틀릴 수는 있어도 월, 일이 틀린다고 보기는 힘들다. 때문에 글쓴이가 생각하는 8월 사망 가능성은 낮은 편이다. 고구려에서 직접 사신이 가서 알린 것이라면 10월에 사망했고 8월 이전부터 중한 병에 시달리던 시점에서 친당 성격을 가지고 있는 누군가가 연개소문 대신 국정을 운영했고 이 사실이 당에 알려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혹은 연씨 3형제의 분란에 대한 일본서기의 667년 10월 조 기록을 검토해 보면 김용만 선생님의 주장처럼 663년 10월이 아니라 662년 10월일 가능성도 있을 것 같다. 단 여기서는 그 설명을 생략하고 다음 주석으로 옮긴다.
주지할 것은 연개소문이 대당 강경파였다는 점이다. 당으로써는 계속적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지 않으면 국력을 축적한 고구려가 언젠가는 당나라 중심의 국제질서를 무너뜨리고 당을 멸망시킬 수도 있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었다. 비단 당 태종 이세민이 고구려 마저 꺾어 천하에 하나 뿐인 진정한 천자가 되겠다는 야망이 아니더라도 당으로써는 고구려를 무너뜨려야 국가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고구려는 당에게 있어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런데 이런 고구려를 주도하는 연개소문이 사망했다면 당은 굳이 국력을 기울여 고구려를 공격해야 하는 명분이 없어진다. 적어도 국력의 회복을 위해서라도 전쟁 준비를 일시적으로 멈추어야 했다. 당시 당은 막대한 물자를 쏟아 부은 2차 고․당 전쟁에서까지 패함에 따라 또 한번 전쟁을 일으키면 자칫 당 자체가 수나라와 같이 자체 붕괴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점에서 당 내부에서는 전쟁 회의론이 불기 시작했을 수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 당나라 정벌을 부르짖는 연개소문이 사망하거나 국정 운영을 할 수 없다면? 고구려로써도 이미 전쟁에 두 번 이겼지만 막대한 국력을 소모하고 점차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더 이상의 전쟁을 수행하기에는 큰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는 만큼 불리하지 않은 조건으로 당과 종전 협상을 맺으려고 할 것이다. 실제로 2년 뒤 고구려에서는 당 고종이 주최한 봉선 제사에 태자 복남을 파견시켜 고구려가 당 중심의 국제질서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면 종전 협상은 이보다 훨씬 이전에 맺었을 것이다. 아마도 전쟁 준비를 멈추는 663년 8월이 아닐까 한다. 이 종전 협상을 주도한 사람은 바로 연남생이었던 것 같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연개소문에게 모든 권력을 물려받은 그가 과연 2년 뒤 봉선 제사에 태자 복남이 파견되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었을까? 2차 전쟁에서 계필하력과 대결한 남생은 당군의 위력을 피부로 느낀 바 있다. 국내 여론이 점차 전쟁 회의론으로 흘러가는 것을 기회로 연남생은 당과의 화친을 주장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연남생으로 대표되는 주화파와 주전파는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666년 남생의 국내 순무를 기회로 남건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단순히 형제간의 권력 투쟁이라고 보기보다는 이미 연개소문이 일으킨 바 있는 영류왕 시해 사건과 비슷한 맥락으로 봐야 할 듯 하다.
김용만.「연개소문은 언제 죽었는가?」,『새로쓰는 연개소문전』, 바다출판사 2003 p.274~28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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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 천지천황 6년 10월, 즉 667년 10월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고구려 대형 남생이 성을 나가 나라 안을 돌보았다. 이때 성 안의 두 아우가 측근 사대부의 나쁜 말을 듣고서, 남생을 성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이 때문에 남생은 당에 가서 그 나라를 멸망시킬 것을 모략했다.]
그런데 이때는 당에서 고구려 평양성을 포위하기 직전 상황이다. 때문에 김용만 선생님은 이 반란 사건이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는 연개소문의 사망기록인 천지천황 3년 10월, 즉 664년 10월 조 기록과 함께 1년의 기록 오차라고 보고 있다. 하지만 이 경우 666년 6월에 남생을 구하러 오는 당의 계필하력이 오는 시기와 4개월 뒤지게 된다. 그 오차를 고구려에서 일본까지 소식이 전해지는 기간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계필하력이 666년 6월 남생을 구하기 위해 원정을 떠나기 전 연남생은 당에 구원요청을 하기 위해 자신의 휘하에 있던 대형 불덕, 대형 염유 등의 고위급 인사와 마지막으로 자신의 아들인 연헌성을 차례로 보낸다. 여기서 연헌성이 사절로 간 때가 666년이지만 가장 마지막에 갔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들 사절이 오가는 시간을 다 합친다면 그 거리가 최소한 국내성에서 유성까지의 거리라고 해도 단시일 내에 도착할 성질의 것은 아닐 것이다. 더욱이 영주에서 장안의 당 조정에까지 보고를 하고 영을 내리는 시간까지 합친다면 계필하력이 6월 출병하는 시기보다 수개월 앞서 교섭을 하였을 것이고 최초로 대형 불덕을 보냈던 때는 아무리 늦게 잡아도 666년 초였을 것이다. 그리고 남건형제의 반란이 일어나고 남생이 바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낸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한동안 평양의 남건 형제와 군사대치를 한 시간도 포함시켜야 한다. 초기에 남생이 그렇게 밀리지 않고 오히려 근방의 오골성까지 점령하는 등 오히려 남건 형제가 밀리는 판국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남생이 오히려 불리해지는 시기까지의 군사대치는 최소한 한달 이상 걸렸을 것이다. 그리고 반란 사건이 일어나고 처음 남건 형제가 왕명을 빌어 남생을 소환하려 했을 때 남생이 이를 거부한 것으로 볼 때 남건 형제가 정국을 완전히 장악하는데 걸리는 시간과 왕명을 빌어 남생을 소환하려 했다 거부당하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이보다 훨씬 이전인 665년 말에 발생했을 것이다. 결국 일본서기의 667년 10월이 1년이 아닌 2년 앞당겨진 사건이라고 봐야 합리적이다. 이 경우 연개소문의 사망에 대한 일본서기 기록과 연계해서 연씨 3형제의 분란에 대한 기록이 실제 사실과의 오차가 1년이 아닌 2년일 가능성이 더 높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이 경우는 기록 시점을 어디에 잡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연남건의 반란을 기준으로 잡을 것이냐, 연남생의 당나라 투항을 기준으로 잡을 것이냐가 관건이다. 첫 번째의 경우는 위와 같은 결론이 나오지만 두 번째 경우는 천남생 묘지명에 667년에 당나라 조정으로 갔다는 기록 때문에 기록 오차 가능성은 발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연남생의 당나라 투항 사실에 초점을 두는 경우 다음과 같은 모순이 발생한다.
우선 천남생 묘지명과 자치통감에는 연남생의 입조 기록이 667년으로 되어 있다. 물론 이 투항이 666년에 벌어졌다고 한다면 실제로 내부한 것이 아닌 투항 그 자체에만 초점이 맞추어져서 666년 10월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연남생이 당군을 끌어들이기로 한 시점은 666년 초로써 실제로 당군이 출병한 것은 6월인데 일본서기를 서술할 당시 고구려 사신이 도착한 것이 10월이라고 할지라도 기록을 할 때에 실제 투항을 했던 사건이 일어난 시간을 적었을 것이다. 만약 도착한 시간에 초점이 맞추어 졌다면 일본서기에서는 고구려 사신의 도착을 적었어야 옳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사신의 도착 시기를 기준으로 그 사건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실제 사건이 벌어진 달을 적었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천지천황의 6년 10월조 기록의 시점은 남건 형제의 모반에 맞추는 것이 옳다.
물론 연도 오차가 나는 것이 연씨 3형제의 분란에 한해서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원래의 기록대로 664년 10월에 사망했고 형제간의 분란이 아까 검토한 것처럼 연남생의 국내 순수 이후인 665년 10월에 일어났다면 연남생은 대략 8월에서 9월 즈음에 국내 순수를 시작했다는 얘기가 된다. 여기에서 순수를 한다는 것은 정권 교체에 대한 국내 불안을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다. 연개소문이라는 불세출의 인물이 사망했고 정치적 성향이 상반되는 인물이 권력을 계승했다면 국내 순수를 당연히 해야 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연남생이 연개소문 사망 직후에 권력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터울을 두고서 공식적인 권력 계승을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터울을 둔 이유는 연개소문의 국상을 치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 경우 김용만 선생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우리나라에서 국가 원수급 인사의 사망에 흔히 행해졌던 3년 상 풍습을 생각한다면 고작 1년도 안되어 상을 마치는 것은 그 당시를 본다면 모양새가 별로 좋지 않게 된다. 김용만 선생님의 663년 10월 가정 역시 그 시차가 2년으로 1년이 모자란다. 때문에 연개소문의 사망기사 역시 664년 10월이 아닌 2년 앞선 662년 10월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김용만.「연개소문은 언제 죽었는가?」,「3차 고-당 전쟁」,『새로쓰는 연개소문전』, 바다출판사 2003 p.274~28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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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남생 묘지명과 최헌행장에는 연남생이 내란에서 불리해지자 당에 3명의 사자를 차례로 보냈던 것으로 전한다. 이 중 최헌행장에는 첫 번째로 간 대형 불덕이 요동의 고구려 성을 통과하지 못했다고 하고 있다. 아마도 국경지대에 있던 고구려 군이 남생의 매국 행각을 보고 분개한 나머지 통과시키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다면 이런 사실이 전해지던 때가 대형 불덕이 잡히기 전이든 후이든 최소한 그 이후에 가는 사자는 비밀리에 조심스럽게 가야 한다. 게다가 국내성에서 당나라 장안성까지의 거리가 상당한 만큼 가는 거리만 해도 7천여 리에 이르는데 단시간에 이를 주파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치통감에서 5월에 고구려의 내란 소식을 듣고 6월에 계필하력을 보냈다 것은 적어도 최초로 그 소식을 접한 것이 5월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사신을 보냈던 때는 언제일까? 최단시간으로 추정을 해볼 필요가 있다.
처음 불덕이 국내성에서 출발해 요하에서 잡혔을 경우 그 거리가 대략 5백여 리 정도라면 말을 타고 급히 가면 하루면 요하에 도착하게 된다. 그런데 국경을 넘는 과정에서 국경 수비대와 어느 정도 실랑이를 벌이고 또한 당에 가는 서신에 대해 해당 성주가 이 사실을 알았을 경우와 이것을 대외적으로 알리고 최종적으로 남생에게 알려지는데 걸리는 시간이 최초 출발 시점에서 대략 2~3일 정도가 걸렸을 것이다. 그럼 상황이 더 악화된 상황에서 남생은 반드시 당의 원조를 얻어야 한다. 소식을 들은 즉시 대형 염유를 보내었다면 최소한 요하까지는 이전과는 달리 밤을 틈타 비밀리에 가야 했을 것이고 하루 갈 거리를 2~3일을 소비해야 한다. 요하를 건넌 후 유성까지 이르는데 최대한 빨리 간다고 해도 1400리 거리를 3일 안에 갈 수는 없으니 유성까지 도착하는데만 6일 정도를 소모해야 한다. 유성에 도착을 한 후 소식이 전해질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염유가 직접 가는 것과 두 번째는 유성에서 파발이 갔을 가능성인데 아마도 이 당시 염유가 직접가지는 않고 파발이 갔을 가능성이 크다. 대형의 관등이 결코 낮은 것은 아니지만 비밀리에 갔었던 만큼 전권 대사의 성격을 띄기는 힘들었을 것이며 이 때문에 당나라 유성에서는 염유와 그 서신을 신용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안이 사안인 만큼 최대한 빨리 파발마를 통해 서신이 전달되어 조정의 명령을 기다렸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염유는 이때 당 조정의 반응을 알 수가 없게 된다. 유성에서 서신을 파발로 당나라 장안성까지 보냈을 시간이 대략 10일 정도 걸린 다고 본다면 염유가 처음 출발하고 나서 16일이 지나서야만 남생의 구원 요청을 당 왕실에서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당 왕실에서는 이에 대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확실하지 않은 정보와 신용으로는 또 다시 전쟁을 일으키기에 고구려라는 상대가 너무 힘에 부쳤던 것이다. 그렇다면 당 조정에서는 이 서신의 내용을 믿지 않고 그냥 무시했을 가능성이 크다. 염유가 전권 대사의 성격을 띄고 갈 가능성이 크지 않음과 파발마를 통한 서신 전달, 그리고 이것을 무시했던 당 조정의 반응을 볼 때 당시 이를 기록한 실록에 제대로 기록되지 않다고 본다면 후의 정사 기록에 이것이 남아 있을 수가 없다. 총 3번의 사신을 보냈음에도 마지막 연헌성의 기록만 남은 것은 이것 때문일 것이라고 본다.
어찌 되었든 만약 염유가 서신에 대한 답을 듣기 위해 유성에 남아 있었다면 그가 국내성으로 돌아온 시점은 최초 출발한 날에서 32일이 지난날이어야 한다. 만약 염유가 그때 답신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고구려로 돌아갔다면 출발한 지 10~12일이 걸려 다시 되돌아 왔겠지만 당의 출병사실에 대해 소문이나 또 다른 사람을 이용해야 하는 만큼 직접 듣는 것보다도 시간이 더 걸렸을 것이다. 때문에 여기서는 직접 남았을 가능성을 놓고 봐야 한다. 그런데 당에서는 큰 반응을 보이지 않자 결국 염유가 당 유성에 남아 그 사실을 알고서 국내성에 도착해 남생에게 전했고 그 때문에 남생은 위급한 사정을 잘 알릴 수 있게 아들인 헌성을 직접 보냈다면 그 이전에 갔던 대형급 관료들과는 달리 당에서는 남생의 아들로써 아버지의 뜻을 대신하는 전권 대사의 성격으로 파악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연헌성의 행보는 당 조정에서도 함부로 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에 장안성에서 직접 고종과 만났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서신을 최대한 빨리 보내야 하는 입장에서 연헌성이 직접 파발마를 타고 갔다면 그 시간 역시 출발 시간에서 아무리 빨라도 16일 정도는 소모해야 한다. 그렇다면 전부 대형 불덕이 출발하는 그 시점에서 당에 헌성이 도착한 5월까지 대략 52일 정도가 소요된 셈이다. 물론 최단 시간을 합한 것이기 때문에 중간에 예기치 못한 변수를 생각하면 60일이 걸릴 수도 있다. 5월에 도착을 했다면 대략 언제인지도 중요한데 계필하력이 6월에 출병했다는 기록을 볼 때 최소한 5월 중순에 도착해야만 당 조정에서 모든 것을 검토하여 출병안을 짠 후에야 병력 출동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대형 불덕이 최초로 출발한 시점은 아무리 늦어도 3월 중순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