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는 상고사 관련 서적 수거령을 내렸다.
수거해서 더욱 연구하고 상고사를 집대성한 것이 아니라 상고사를 숨겼다..
그러다가 일제에 침략 당하고 상고사 서적들은 일제에 의해 사라졌다.
조선왕조가 상고사 서적을 수거해서 감춘 것은 아마 위화도 회군의 명분이 훼손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
즉, 요동이 한민족의 땅일 뿐 아니라 주활동무대 였다는 기록을 숨길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영토를 되찾고자 정벌에 나선 장수가 회군을 해서 왕위 찬탈했다' 고 비난 받을 것이기 때문..
그래서 상고사를 지워버린 것으로 저는 추측합니다.
1) 조선왕조의 상고사 관련 서적 수거령
2) 드러나는 진실들..
황하문명보다 훨씬 오래된 홍산문명(요하문명)의 발굴
그러나 상고사 서책을 수거하고 감춰도.. 홍산문명의 자취는 남아있다.
왕조가 상고사를 지우다니..
위화도에서 회군하고 뒤이어 고려 왕권을 빼앗은 것이 정당성 없는 왕위찬탈로 평가될 것이 두려웠을까?
한반도에는 참 희안한 일들이 많았다.
홍산문명
드넓은 땅 만주(滿洲). 지금은 중국의 영토가 되었지만 그곳에는 우리 선조들의 역사가 살아 숨쉬고 있다.
내몽고 자치구 적봉시(赤峰市)에 있는 홍산(紅山). 붉은 산이란 뜻이다.
(이곳에서) 1984년 중국 고고학계를 충격에 빠뜨린 사건이 발생했다.
5000년전의 여신상(女神像)이 발견된 것이다.
전 세계로 타전된 이 발굴소식은 새로운 문명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홍산문화를 정점으로 화려한 꽃을 피웠던 문명은 요하 일대에서 집중적으로 발굴되고 있어
일명 ‘요하문명’ 이라 불린다.
1980년 초 만리장성 북쪽 요서 지방 일대에서 어마어마한 신석기 유적이 무더기로 발굴되기 시작했다.
그게 요하문명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것은 기원전 7천 년까지 올라가는 소하서문화가 가장 이른 시기인데,
그보다 더 이른 시기의 유적과 유물이 나올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이렇게 신석기 문화를 발굴하고 나니까 중국 입장에서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오랑캐의 땅이라고 했던 지역에서 황하문명보다 시기도 더 앞서고,
문화의 발전수준도 더 높은 유물이 무더기로 쏟아지니까 기존의 역사학계에서는 난감했던 것이다.
오랑캐의 땅에서 중화문명의 중심인 황하문명보다 앞선 유적들이 나오니까….
결국 중국은 요하문명의 발견과 더불어서 상고사에 대한 전체적인 재편 작업에 들어갔다.
중화문명은 요하문명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요하문명의 출현은 중국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1980년대부터 황하문명보다 더 오래되고 더 발달된 문화가 만리장성 이북지역에서 발굴됐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중국은 만리장성을 중원과 변방을 가르는 북방한계선으로 인식해 왔다.
중국은 중화문명의 기원이 한 곳이 아니라 여러 곳이라는, 이른바‘다(多)기원론’을 들고 나왔다.
중국은 오랫동안 황화문명을 중화문명의 기원지로 보았지만,
1970년대 들어서는 장강문명, 그리고 최근엔 요하문명을 시원지로 삼고 있다.
중국은 이제 그들의 자부심이었던 황하문명과 만리장성을 넘어 요하문명을
그들 문화의 원형으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요하 일대는 원래 중화민족의 시조라는 황제의 영역”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여기가 황제가 활동하던 곳이고, 황제가 여기서 문명을 건설하고 내려오면서 또 중원에서 문명을 이뤘다고 주장한다.
세계 4대문명보다 오래된 문명의 등장으로 4대문명의 판도가 달라지고 있다.
오랫동안 역사 교과서는 황하-메소포타미아-나일-갠지스 강 문명을 세계 4대 문명으로 불러왔다.
중국은 중국의 뿌리는 황하문명이라고 주장을 해왔으며 만리장성 이북은
‘오랑캐의 땅’으로 “문명이 없다”고 주장해왔다.
그런데 만리장성 서북쪽 1000여km 지점에서 실로 놀라운 고대 문명이 발견되었다.
요하 상류지역에 그보다 최소 1000년 이상 앞선 고대 문명이 존재했다고 한다.
이를 근래 들어 ‘제5의 문명’이라고도 부르고 '요하문명'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여기서 나온 유물과 유적을 검토해보니 분명히 중국문명과는 확연히 다르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상식처럼 알았던 중국문명(황하문명)이 아니라 동아시아 문명이라고 해야 한다고
이 책은 설명하고 있다.
만리장성을 늘리는 이유
중국은 만리장성 이북은 ‘오랑캐의 땅’으로 “문명이 없다”고 주장해왔다.
이제 그 문명을 자기네 문명이라고 주장해야 하니 만리장성을 엿가락처럼 늘려야할 이유가 생겼다.
만리장성은 실제로 (중간에 갈라져 나온 가지를 모두 합하여) 6,400km 정도다.
8,851km라는 만리장성의 길이는 새로 발표한 동단지점까지(원래는 고구려박작성임) 포함한 길이인 것이다.
홍산문명(요하문명)이 우리 한민족의 상고시대 도시국가라는 증거
1. 적석총
장례문화는 민족의 고유사상을 그대로 반영한다.
'돌무지무덤'이라 불리는 적석총은 우리 한민족 고유의 무덤형태다.
중국한족은 토광묘를 쓴다.
적석총, 고인돌 등 거석문화는 우리문화.
우하량 적석총 복원도 :
우하량 근처에서 발견된 한변 100 미터의 거대한 적석총
이집트의 계단식 피라미드보다 1000 년이 앞선다.
거대한 건축물들을 쌓으려면 강력한 제정일치 사회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2. 수암옥
홍산과 흥륭와 문화(BCE 6200년)에서 발견된 옥기의 재질은 수암옥이다. (압록강 바로 위, 수암)
같은 요하문명인 흥륭와에서 나온 옥귀걸이와 동일한 형태가 강원도 고성에서 발견되었다.
기원전 6000 년경으로 추정되는 흑륭와 옥귀걸이, 사해 옥귀걸이, 고성 문암리 옥귀걸이의 모양이
모두 같은 것은 그 당시 이 지역이 같은 문화권이라는 증거다.
3. 웅녀상
곰을 大地의 神으로 인식한 것은 한민족 고유의 토템이다.
홍산문화에서 출토된 여신상
여신묘 곰발바닥 소조
웅녀상은 여러 개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조상신 숭배로 보여진다.
웅녀국의 후예들이 아닌가 생각되며 특이한 것은 여신상이 너무나 사실적인 인간의 모습을 나타낸 것인데,
이것은 '神化된 인간'을 숭배한 것으로 인격신을 섬겼던 우리 한민족의 정서와도 맞는다.
4. 용봉문화
천자문화와 연관되있는 것으로 '채옹'도 인정했듯이 천자문화는 한민족으로부터 나온 문화다.
5. 역사기록
요하문명이 나온 곳은 후에 고조선의 강역이다.
고구려때까지 우리 땅이었던 곳으로 상고시대부터 우리 한민족의 주 활동무대다.
이곳에 도시국가가 있었다는 기록은 환단고기에 나오는 배달국 신시밖에 없다.
6. 유전자분석
홍산문화에서 나온 유골을 mtDNA 분석한 결과,
가장 많은 분포를 나타낸 35.71%가 16172라는 하위 변이에 속하며 이는 중국한족에서는 잘 나타나지않고,
대부분 우리 현대 한국인과 일본인의 유전자에서 나타나는 변이다.
실제로 현대 한국인중 일부는 이 유전자변이와 완벽하게 일치한다.
만약, 'N9a-16172'라는 유전자변이 형태를 가진 분이 있다면 이분들은 웅족의 직계후예,
우리나라에는 6~7%가 N9a이라고 한다.
홍산문화 우하량 유적 유골 mtDNA 분석결과 http://yayul.egloos.com/2426041
"황허문명은 농업 중심의 왕권국가였고, 랴오허 문명(발해문명)은 복합적인 신권국가였던 것 같다.
차하이·싱룽와 문화(BC 6000년 전)에서 홍산문화(BC 4500~BC 3000년)에 이르기까지….
용형 돌무더기와 옥결이 출현하고(차하이·싱룽와) 곰과 용, 새를 형상화한 옥문화가 꽃피고,
신전과 제단, 적석총 등 제사유적이 출현하고(훙산문화)….신권 중심의 문화였다.” - 徐子峰 교수
7. 빗살무늬토기
중국학자들은 황하 지역과 전혀 다른 요서 지방 토기의 가장 큰 특징이 빗살무늬(지(之)자문) 토기라고 밝히고 있다.
중국학자 '왕혜덕'이나 조선족 대련대학 '유병호' 역시 요하문명의 특징은 빗살무늬 토기와 조상 숭배 풍속이며,
대련대학 '설지강' 역시 흥륭와 문화의 특징은 빗살무늬(지(之)자문) 토기라고 주장하였다.
중국학자 '풍운학'은 지(之)자문(빗살무늬) 토기는 요서 일대(요서 문명)와 흑룡강 중·하류 지역,
한반도, 일본 등지에서 발굴되는데 이들은 모두 같은 문화권이라고 주장하였다.
요하 일대에서 발굴되는 빗살무늬 토기는 중국 중원의 황하 일대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북방 계통의 문화이다.
요하 문명의 주도세력들은 중원에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빗살무늬가 전파되는 길로 이동한 세력임을 알 수 있다.
결국 BC 6000년 당시 부터 만주와 한반도 그리고 요서 지방과 발해만 연안은 중원과 다른 독자적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이 문화는 결국 예·맥족(고조선과 고구려)으로 이어졌다
빗살무늬 토기들이 나온 곳들을 살피면 이른바 발해문명권,
다시 말해 중국인들이 말하는 동이족의 영역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인(人)자형은 한반도 압록강·대동강·재령강·한강유역은 물론 두만강과 동해안,
그리고 남해안 등 전국적으로 분포되고 있어요.
지(之)자형은 평북 의주읍 미송리 동굴유적, 경남 통영 상노대도, 김해 수가리 유적에서 보이고….
빗점무늬는 대동강의 궁산·남경유적, 재령강의 지탑리 유적, 한강유역의 암사동 유적,
동북부의 서포항 유적 등에서 확인됩니다.
한반도 전역을 포함한 발해연안이 바로 빗살무늬 토기문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죠.”(이형구 교수)
또한 한반도에서는 처음으로 옥결(옥귀고리)이 나온 강원 고성 문암리(BC 6000년)와, 양양 오산리(BC 5000년)에서는
초기 신석기 문화의 양대토기인 덧띠무늬 토기와 빗살무늬 토기가 함께 나오기도 했다.
문암리 유적을 발굴한 신희권 국립문화재연구소 연구관은 “차하이-싱룽와에서 나온 유물을 본 결과
문양을 그려넣은 기법이나 토기의 기형이 문암리와 상당히 유사하다”면서 “발해연안과 한반도가 같은 문화권임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라고 보았다.
글출처 :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7) - 빗살무늬 토기문화 경향신문 2007년 11월 16일
“전형적인 북방문화입니다. 그것은 한반도로 해서 일본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결국은 요하문명은 동북아시아의 시원문명임과 동시에 주요한 세력들은 몽골, 만주, 한반도, 일본으로 이어지는
북방문화 계통이라는 것입니다.”_ 우실하 교수
“요하일대는 우리민족과 매우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그 범위도 요하를 훨씬 벗어나서 요동반도와 한반도에 이르는 발해연안벨트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요하문명이라고 한정해서 말하기보다는‘발해연안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이
합리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_ 이형구 교수
첫댓글 귀한자료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