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나무는 아름답고 꽃은 향기롭지만, 레몬 자체는 먹을 수 없어요….”
피터 폴 앤 메리, <레몬 트리> 중에서
일찍 찾아온 더위가 올해도 심상치 않다. 이런 날, 차가운 레모네이드 같은 영화 한 편 만나면 좋겠다 싶은데, 이름만 상큼한 영화 <레몬 트리>는 실상 꽤 진중하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국경지대의 한 레몬 농장이 배경인 이 영화에서 샛노란 레몬 열매는 단지 해갈이나 젊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최근 SNS에 떠돌던, 이스라엘의 시리아 폭격에 희생된 어린이들의 처참한 사진을 떠올리자니, 이즈음 이런 영화 다시 불러내보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유린된 생명들에 관한 우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위치한 요르단강 서안, ‘웨스트 뱅크’의 레몬 농장 곁에 이스라엘의 신임 국방장관 나본 부부가 이사를 온다. 문제는 레몬 농장이 장관 관저의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한다고 이스라엘 정보국이 판단한 것. 빽빽한 레몬 나무들이 테러범들의 접근로가 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스라엘 정부는 농장주인 과부 살마 지단(히암 압바스)에게 레몬 나무를 모두 베어버릴 것을 통보하고 배상을 약속한다. 부친이 시작하여 50여 년 지켜온 농장을 포기할 수 없는 살마는 이스라엘 군부를 상대로 사상 초유의 소송을 준비한다. 젊은 변호사 지아드(알리 슐리만)가 살마의 무모한 전투를 돕기로 했다.
<레몬 트리>의 초반, 살마는 젊은 나이에 죽은 나무 한 그루를 애도하는 의식을 치른다. 이 장면은 살마에게 레몬 나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미지다. 즉, 레몬 나무는 그에게 영혼이 있는 생명이며 그 자신이었다. 살마가 1심에서 패소하고 농장 출입권까지 박탈당한 이후, 방치된 레몬 나무들과 낙과들은 그러므로 부당한 현실과 폭력 앞에 무력하게 꺼져가는 생명들에 관한 진술이다.
다만 나본(도론 타보리)이 말하듯이, 이 주제가 “3천 년 동안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한” 문제이며, 여전히 민감한 정치적 사안임을 영화는 잊지 않는다. <레몬 트리>가 전적으로 팔레스타인 편에 서서 이스라엘의 만행을 폭로하거나 둘 사이의 대립각을 앞세우는 ‘정치 영화’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물론 절대적 약자가 강자에게 펀치를 날리는 것으로 희망과 감동을 선사하는 할리우드식 법정영화도 아니다. 대신 영화는 팽팽한 긴장을 유지한 채 살마 주위의 사람들을 소개하면서, 휴먼 드라마로서의 우회로를 택한다. 어쩌면 당연하다. 1954년 예루살렘에서 태어나 미국, 캐나다, 브라질에서 자란 이스라엘 감독 에란 리클리스는 이 영화를 이스라엘과 독일, 프랑스의 자본으로 만들었다.
용기가 만들어낸 사랑과 유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이야기가 예정된 수순을 따라 단순히 흘러가는 듯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자면 <레몬 트리>의 세계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레몬 농장에 관한 소송이 진행되는 메인 플롯은, 살마와 변호사 지아드의 사랑 이야기와 옆집 여자, 즉 국방장관의 부인인 미라와 그 남편의 이야기들로 겹겹이 둘러싸여 있다.
10년 전 남편과 사별했고, 세 자녀는 멀리 떨어져 있거나 제각기 살기에 바빠 얼굴 보기도 힘든 살마에게 지아드는 유일한 도움이자 다가오는 사랑이었다. 특히 엄격한 이슬람 사회에서 용인되기 힘든 둘의 관계가 욕정이나 연민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뢰와 존경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지아드는 러시아에 두고 온 아내와 딸이 있지만,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일을 하면서 장관의 딸과 정혼해야 하는 상황이다. 지켜야 할 것을 지키기 위해 맞서 싸우지 못하는 자신의 젊음에 비해 거침없는 용기와 깊은 슬픔을 담은 살마 얼굴의 주름은 그에게 그 자체로 아름다움이었다.
용기에 관한 한 미라(로나 리파즈 미셸) 역시 살마를 스승 삼을 만하다. 미라는 남편의 처사가 비겁하고 과도하다고 느끼지만, 그에게는 남편을 거스를 수 있는 용기도 살마를 대면할 수 있는 자유도 없다. 보호라는 명목으로 스물네 시간 지키고 있는 정보국 요원들이 미라의 대저택을 ‘감옥’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결국 각자의 영역에 구금된 두 여인은 제대로 만나지도 못하지만, 짧은 몇 번의 눈 마주침이 둘 사이에 미묘한 유대를 만들어내는 것을 영화는 말없이 따라잡는다. 그리고 미라는 어쩌면 홀로 사는 살마보다 지독한 자신의 외로움에 직면하게 된다.
배제가 낳은 고립
한편 영화에서 유일하게 승승장구하는 나본은 겉보기와는 달리 그중 가장 심각하게 갇혀 사는 인물이다. 본의 아니게 가해자의 위치에 서게 되었지만, 나본은 나름 평화주의자다. 굳이 국경지대로 이사하면서 그는 팔레스타인 총리를 파티에 초대하기까지 했다. 단, 그에게 평화는 높은 담을 사이에 두고 적과 공존하는 것이다. 그리고 절대로 위협받지 않는 것. 그러니 “평화란 단순히 접촉의 부재에 의해 지탱되는 적대감의 부재를 훨씬 넘어선다”는 가르침이 나본에게 통할 것 같지는 않다(「배제와 포용」, 한국IVP 역간). 그에게는 지켜야 할 조국과 가정은 있었으나, ‘포용’을 위해 타자에게 내어줄 공간은 전혀 없다.
그래서 그는 결국 안전하게 모든 것을 지켜낼 수 있었을까? 나본과 살마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영화의 마지막 이미지는 마침내 고립되는 것이 누구인지, 콘크리트 벽은 누구를 위한 것이며, 누가 진짜 자유로운 존재인지 우리에게 진지하게 물어온다.
폭력으로 얼룩진 세상에서 지켜야 할 유일한 것이 나 자신의 구원이고 신앙인 한 우리는 나본과 결코 다르지 않다. 그것은 나본의 경우처럼, 대개는 타인을 향한 ‘배제’를 담보로 한 것이며, 그 결과는 자주 고립과 상실로 나타난다. 신념에서 비롯된 폭력과 그로 인한 고립이 외부의 감금보다 더욱 견고할진데, 신과 신앙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배제의 결과는 말할 것도 없다.
‘먹을 수 없는’ 레몬 열매가 살마의 손에서 쥬스가 되고 피클이 되어 정성스레 병에 담길 때, 손 대접과 차별 없는 시원한 나눔이 되었음을 기억한다. 깨어진 관계도 영적 갈증도 결국은 그렇게 회복되고 해갈되는 것일지 모른다. 나는 지금, 얼음 띄운 레몬수가 무한 제공되는 카페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
최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