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계절 여름이다. 여름 바다는 생각만 해도 들뜬다. 여름 바다 백사장에 파묻은 추억이 떠오르고 추억의 사람이 떠오른다. 여름 바다는 젊음과 사랑의 상징. 젊은 사람은 물론이고 젊고 싶은 사람이 여름 바다를 찾으며 사랑을 이룬 사람은 물론이고 사랑을 이루고 싶은 사람이 여름 바다를 찾는다.
서면은 부산의 중심. 젊음과 사랑의 도시다. 다 좋은데 아쉬운 게 하나 있다면 바다가 없다는 것. 바다에서 멀찍이 떨어져 서면의 여름은 뭔가 허전하다는 것. 아쉽고 허전한 마음을 달래는 묘안이 있다. 서면의 옛날 풍경을 떠올리면 어떨까. 서면은 옛날 바다였다. 바다였는데 홍수 따라 떠밀려온 토사가 바다를 메웠다고 소설가이자 향토사학자 최해군 선생은 저서에서 밝힌다.
바다였음은 지명과 기록에서도 엿보인다. 우선 지명. 서면 일부인 전포동에선 매년 5월 `밭개마을 경로잔치'가 열린다. 밭개는 전포동 원래 지명이다. 전포는 밭이 많은 포구란 뜻. 밭 전(田) 개 포(浦)를 쓴다. `개'는 얼핏 고어 같지만 지금도 흔히 쓰는 일상어다. 개펄 갯마을 갯낚시 갯바위 등등이다. 포구가 들어간 전포동이란 지명에서 이곳이 바다였음을 알아챈다.
기록은 난중일기에 나온다. 난중일기는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 장군이 난중에 쓴 일기. 임란 첫 해인 1592년 9월 1일 일기를 보면 어느 산 어느 언덕에 정박한 왜선 470여 척 가운데 100여 척을 대파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 어느 산이 황령산이고 어느 언덕이 제일제당이 있던 서면 더샾센트럴스타라고 최해군 선생은 추정한다. 9월 1일을 양력으로 바꾸면 10월 5일. 10월 5일 해전을 부산포해전이라 한다. 부산포해전 승전일이 부산 시민의 날이다. 추정이 맞다면 부산포해전 격전지는 서면이 되는 셈이다. 난중일기 해당 기록을 간추려 본다.
`부산성 동쪽 한 산에서 5리쯤 되는 언덕 밑 세 곳에 둔박한 왜선이 모두 470여 척 있었는데 우리의 위세를 바라보고 두려워서 감히 나오지 못하고 있으므로 여러 전선이 곧장 그 앞으로 돌진하자 배 안과 성 안, 산 위, 굴에 있던 적들이 총통과 활을 가지고 거의 다 산으로 올라 여섯 곳에 나누어 머물며 내려다보면서 철환과 화살을 빗발처럼 우레처럼 쐈다.'
동천은 서면과 맞닿은 하천. 자성대 바다로 이어지기에 동천을 따라 배가 오갔다. 동천으로 배가 다녔다는 기록은 일제강점기 1936년에도 보인다. 조선방직과 대선주조 등 당시 동천 유역 5대 기업이 부산시장 격인 부윤에게 1936년 5월 1일 낸 진정서가 그것이다. 동천에 토사가 쌓여 배 운항에 지장이 많으므로 속히 준설해 달라는 진정이었다. 당시 대선주조는 문현동 동천 입구에 있었다.
올해는 부산이 직할시로 승격한 지 50년 되는 해. 부산이 애초 바란 건 직할시가 아니라 특별시였다. 특별시 여론이 형성된 것은 광복 이듬해인 1946년. 서울이 경기도에서 분리돼 그 해 8월 16일 특별시로 승격되면서다. 여론 형성 과정을 거쳐 1949년 6월 `부산특별시승격기성회'가 출범하면서 `大부산' 10대 구상을 밝힌다. 구상 하나가 `대선양조장에서 서면까지 배가 다니도록 동천을 운하로 만들겠다'는 거였다. 동천 운하는 서면에서 제2대와 3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지태의 선거공약이기도 했다.
바다의 계절 여름. 서면에 바다가 없어서 아쉽고 허전하지만 마음의 눈으로 보면 서면 여기저기가 바다다. 마음의 귀로 들으면 서면 여기저기서 바다 소리가 난다. 여름 바다가 젊음과 사랑의 상징이듯 여름 서면 또한 젊음과 사랑의 상징이다. 젊은 사람은 물론이고 젊고 싶은 사람이라면 여름 서면을 찾아보라. 사랑을 이룬 사람은 물론이고 사랑을 이루고 싶은 사람이라면 여름 서면을 찾아보라. 서면의 바다 풍경이 그대 마음의 눈에 보이리라. 서면의 바다 소리가 그대 마음의 귀에 들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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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