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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브릿지가 무너졌다(London bridge is down)”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2세 96세로 서거, 찰스 왕세자 왕위 계승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재위, 임명장을 건낸 총리 모두 15명이나 돼
“런던 브릿지가 무너졌다(London bridge is down).” 영국 왕실과 정부가 내부적으로 여왕의 사망 사실을 전파할 때 쓰는 말이라고 한다.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지난 9월 8일 96세로 서거했다. 재위 70년 동안 영국 국민뿐 아니라 전세계의 사랑을 받은 여왕 서거에 애도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왕위는 여왕의 큰아들 찰스 왕세자가 계승했다.
영국 왕실은 현지시간 9월 8일 여왕이 여름 휴가를 보냈던 스코틀랜드 밸모럴성에서 평화롭게 세상과 작별했다고 발표했다. 웃는 모습으로 리즈 트러스 신임 총리를 임명한 지 불과 이틀 만의 서거 소식에 영국은 큰 슬픔에 빠졌다.
2차 세계 대전 직후인 1952년, 25세 나이로 왕위에 오른 엘리자베스 여왕은 국가 통합의 상징으로 존경을 받아왔다.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재위한 여왕이 임명장을 건낸 총리는 모두 15명에 이른다.
올해는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여왕 재위 70년 째다.
Wikipedia(위키백과)에 의하면, 엘리자베스 2세(Elizabeth II)는 영국을 포함한 16개국과 기타 국외 영토와 보호령의 왕이다. 본명은 엘리자베스 알렉산드라 메리 윈저(영어: Elizabeth Alexandra Mary Windsor), 호칭은 ‘영국 연방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 폐하(영어: Her Majesty Queen Elizabeth II of the United Kingdom)’라고 부른다. 그녀는 1952년 2월 서거한 부왕 조지 6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왕위를 계승한 맏아들 찰스 왕세자의 나이가 벌써 74세이다.
엘리자베스 2세는 또한, 영국 외에도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호주), 뉴질랜드, 자메이카, 바베이도스, 바하마, 그레나다, 파푸아뉴기니, 솔로몬 제도, 투발루, 세인트루시아, 세인트 빈센트 그레나딘, 벨리즈, 앤티가 바부다, 세인트키츠 네비스 등의 왕이기도 하다. 왕이 군림하는 영국 연방 16개국의 총인구는 보호령까지 포함해서 1억 2,900만 명이 넘는다. 이들 국가는 실질적으로는 연방 총독이 대표하고 있다. 따라서 이론적으로 그는 막강한 권세를 가진 셈이지만 정치적 문제에 개입하지는 않는다.
엘리자베스 2세는 그 밖에도 영국 성공회의 수장, 노르망디 공작, 랭커스터 공작, 맨 섬의 영주, 피지의 최고 추장, 함대 사령장관 등의 다양한 직함도 보유하고 있다.
2012년 6월, 재위 60주년을 맞는 엘리자베스 2세는 64년 동안 재위했던 빅토리아 여왕에 이어 영국 역사상 두 번째로 다이아몬드 주빌리를 맞이하는 군주가 되었다. 군주가 96세가 되는 해인 2022년 6월 2일에는 군주의 재위 70주년을 기념하는 플래티넘 쥬빌리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1926년 4월 21일 태어난 엘리자베스 2세는 1952년 2월 6일 부친인 조지 6세가 세상을 뜨자 25세의 나이로 왕위를 이었다. 여왕이 최장 재위 영국 군주가 되는 동안 왕위 계승 1순위인 찰스 왕세자는 74세가 됐다. 다이애나비에게서 태어난 손자 윌리엄이 결혼해 여왕에게 증손주 조지 왕자와 샬럿 공주까지 안겼다.
'군림은 하되 지배하지 않는다'는 영국 군주로서 여왕은 재위 기간 윈스턴 처칠을 시작으로 리즈 트러스까지 모두 15명의 영국 총리를 맞았다. 여왕은 매주 한 차례 총리와 독대를 해왔다.
그의 치세에 대영 제국의 다른 식민지들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달성함으로써 이후 그가 왕위에 오른 후 그동안 54개국이 가입한 영국 연방 가운데 절반인 32개국은 공화국이 되었고 5개국은 독자적인 군주를 가지게 되었지만, 16개국은 아직도 영국 군주를 자국의 국가원수로 삼고 있다.
엘리자베스 2세는 각각의 나라에서 다른 정식 칭호를 가지고 있었다. 영국에서의 정식 칭호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대브리튼 및 북아일랜드연합왕국과 그 밖의 왕국과 영토의 여왕, 영국 연방의 우두머리, 신앙의 옹호자이신 엘리자베스 2세 폐하(Her Majesty Elizabeth the Second, By the Grace of God of 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 and of Her Other Realms and Territories Queen, Head of the Commonwealth, Defender of the Faith)’이다. 그녀는 지구상에서 2개국 이상의 독립국을 다스리는 유일한 군주였다.
이 때문에 법적으로 그는 이따금 서로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 나라의 국가원수로서의 얼굴을 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2003년에 일어난 이라크 전쟁의 경우, 전쟁에 찬성하며 참여한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 여왕의 입장을 가지는 한편, 전쟁에 반대한 캐나다 여왕으로서 행동할 수도 있다. 실제로 영국 이외의 나라의 왕으로서 행동하기도 하므로(특히 그 나라에 체재하는 경우 : 예를 들어 캐나다 체제 중에는 캐나다 왕으로, 오스트레일리아 체제 중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왕으로, 파푸아뉴기니 체제 중에는 파푸아뉴기니 왕으로 행동함) 이 문제는 매우 까다롭다고 할 수 있다.
1947년 엘리자베스 2세는 에든버러 공작 필립과 결혼하여 3남 1녀를 두었다. 본래 그리스와 덴마크의 왕자로 태어난 에든버러 공작 필립은 필립 마운트배튼으로 개명한 후 영국에 귀화해 에든버러 공의 작위를 부여받았다.
엘리자베스 공주의 유일한 자매는 1930년에 태어난 마거릿 공주이다. 두 공주는 집에서 그들 어머니의 감독 아래 교육을 받았다. 그들의 가정교사는 매리언 크로퍼트였다. 그녀는 이튼 칼리지의 학장 C. H. K. 마틴과 함께 역사를 공부했으며 또한 현대 언어에 박식하여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말할 줄 알았다. 세계 성공회 공동체(Anglican Communion)의 상징인 캔터베리 대주교로부터 종교학을 수업받은 그녀는 신심 깊은 성공회 신자이기도 했다.
1936년 에드워드 8세가 자식을 남기지 못한 채 하야하고 그의 아버지가 조지 6세로서 왕위에 올랐다. 조지 6세에게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엘리자베스는 곧바로 차기 왕위 계승자가 되어 본격적인 제왕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가 열세 살이 되던 해,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그와 그의 어린 여동생 마거릿 공주는 버크셔 주의 윈저 성으로 대피하였다. 일부에서 공주들을 캐나다로 대피시켜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의 하틀리 성에 머무르게 하자는 제안을 하자, 그들의 어머니는 “아이들은 나 없이 지내지 않을 것이며, 나는 왕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왕은 결코 조국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원저에서 엘리자베스 공주와 마거릿 공주는 성탄절에 가족과 친구들을 초대하여 왕실 직원들의 아이들과 함께 무언극을 연출하였다. 그녀가 13살이 되었을 때 먼 친척이자 미래의 남편이 될 그리스 출신의 필립 왕자를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영국 해군에 복무하던 그를 본 엘리자베스는 첫눈에 반하여 그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1945년, 스무 살의 엘리자베스 공주는 전쟁에 직접 참가해 조국에 봉사하고 싶다며 아버지 조지 6세를 설득하여 끝내 허락을 받아냈다. 3월 4일 그녀는 또래 여자들이 봉사하는 영국 여자 국방군에 입대하여 구호품 전달 서비스 부서(WATS; Women's Auxiliary Territorial Service)에 배치되었다. 여자들로 구성된 WATS는 1938년 창설 당시에는 주 업무가 취사, 사환 업무, 부대 내 매점 관리 등의 비(非) 전투업무였으나, 전쟁이 커지자 운전, 탄약 관리 등의 전투업무로 확대됐다. 그곳에서 엘리자베스 영국 공주는 No 230873 Second Subaltern Elizabeth Windsor로 불리며 군용 트럭을 모는 운전사로 복무하여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였다.
엘리자베스는 그리스와 덴마크의 필리포스와 결혼하였다. 이들 내외는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9세의 방계후손으로 재종숙질녀간이다. 한편, 빅토리아를 조상으로 두어 삼종 남매뻘 이기도하다.
필립은 그리스에서의 왕위에 관한 권리를 포기하고, 결혼에 앞서 에든버러 공의 작위를 받기 전에 간결하게 필립 마운트배튼 중위로 불렸다. 필립은 그리스 왕족으로 덴마크 왕실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사운덴부르크글뤽스부르크 왕가의 일원이자 올덴부르크 왕가의 계통이었다.
1947년 7월 두 사람의 약혼이 선포되고 11월 20일에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 후 두 사람은 1949년 7월 4일까지 윈들즈햄 무어에 살았으며, 나중에 대저택인 런던의 클래런스 하우스로 이사하였다. 슬하에 총 3남 1녀를 두었다.
웨일스 공 찰스 왕세자 (1948년 11월 14일 출생)
프린세스 로열 앤 (1950년 8월 15일 출생)
요크 공작 앤드루 (1960년 2월 19일 출생)
웨식스 백작 에드워드 (1964년 3월 10일 출생)
1951년에 들어서 조지 6세의 건강이 나빠지면서 엘리자베스는 자주 왕실 행사를 대행하게 되었다. 특히 건강을 1순위로 요구하는 외국 순방은 더욱 엘리자베스의 몫이었다. 그녀가 케냐에 도착했을 때 1952년 2월 6일 조지 6세가 폐암으로 서거했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조지 6세의 서거는 자동으로 그의 맏딸이자 웨일스 공작 부인의 작위를 받은 엘리자베스에게 왕위가 돌아감을 의미했다. 엘리자베스에게 부왕의 부고 소식을 전한 사람은 남편인 필립 공이었다. 그 후 왕실 일행은 즉시 영국에 돌아왔다.
맨 처음 엘리자베스는 1952년 2월 6일 캐나다 추밀원에 의해 캐나다 왕으로 선포되었다. 그의 영국 왕으로서의 선포는 다음 날 세인트 제임스 궁전에서 이루어졌다.
1년 후인 1953년 3월 24일에 조모 메리 대왕대비가 폐암으로 서거하였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임종 시 그의 소망은 손녀의 대관식이 뒤로 미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은 1953년 6월 2일 TV를 통해 전 세계에서 2,500만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웅장하게 거행되어 여왕으로 정식 즉위하게 되었다. 당시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은 대전쟁 후 위축되어가던 영국의 대외적 위상 회복과 국내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을 화려하게 진행할 것을 지시하였다고 한다. 전쟁 중이던 대한민국도 국무총리 서리 백두진을 특별대표로 하는 사절단을 대관식에 파견하였다. 대관식 후 왕과 필립 공은 주거지를 군주의 주요 관저인 런던 중심부에 있는 버킹엄 궁전으로 이사했다.
엘리자베스 2세는 입헌군주답게 공공연하게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표명하지 않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치세 내내 일반 대중을 상대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 자제를 고수해왔다. 따라서 여왕의 정치적 관점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적절한 선에서는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한 예로 마거릿 대처 총리가 포클랜드 전쟁을 벌였을 때에는 명목적이지만 전쟁에 대한 왕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엘리자베스 2세는 승인을 하면서도 “앤드루 왕자가 전투기 조종사로 전쟁에 참가하기에 부모로서 매우 걱정스럽다.”라며 나름대로 전쟁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였다.
대처가 총리직을 끝낸 다음 엘리자베스 2세는 “나는 무슨 일이든 그저 강하게 밀어붙이는 그녀를 싫어했다.”라고 사석에서 말했다. 이런 여왕의 중심을 잃지 않는 범위에서 하는 신중하면서도 정치적인 표현은 국민에게 묘한 매력을 발휘하였다. 다시 말해서 왕의 존재는 상징적인 것 이상으로 국민과 정치를 중재해 주는 완충 역할을 한다는 느낌을 갖게 했다.
엘리자베스 2세는 국가수반으로서 의회를 소집하고 해산하며 매년 가을 영국 정부의 정책을 요약하는 개회사와 함께 의회의 새로운 회기를 연다. 또한 왕은 선거를 통해 영국의 총리가 선출되면 그를 임명한다. 영국은 명예혁명 이후로 국왕이 내정에 간섭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군주에게는 암묵적으로 지속돼 온 국왕의 정치적 권한이 있었다. 집권 세력이 의회에서 불신임됐을 때 새 총리를 지명할 수 있는 권한이다. 엘리자베스 2세는 두 차례 총리를 지명한 적이 있었지만 논란에 휩싸이자 1965년 이 권한을 스스로 포기했다.
사회적으로는 엘리자베스 2세는 즉위 후 남편과 함께 각국 국빈들을 초청하고, 영국 각지의 기관, 기업체, 지역사회 등을 방문하여 많은 내외국인 방문객들을 맞아왔다. 더불어 영국 적십자사, 영국 문화원, 영국 학술원 등을 포함한 620개가 넘는 자선단체와 기관을 후원하고 있다.
1999년에는 김대중 대통령의 초청으로 대한민국을 방문해 하회마을과 성공회 서울 주교좌 대성당, 이화여자대학교 등을 다녀갔다. 또, 2004년에는 노무현 대통령, 2013년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공식초청으로 버킹엄 궁을 방문하기도 했다.
필자 가족은 1986-1990년까지 4년간 직장 관계로 영국에서 살았고, 특히 아들은 그후 지금까지 36년동안 영국 시민권자로서 영국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여왕의 서거가 남의 나라 일 같지가 않다. 삼가 여왕의 명복을 빈다.
(정리/임윤식)
*편집자 주 : 상기 내용의 상당부분은 Wikipedia에서 발췌인용하였으며, 사진은 6년 전 여왕의 90회 생일을 맞아 영국왕실에서 공개하거나 BBC에서 공개한 사진, 그리고 2022년 9월 8일 여왕 서거후 영국 왕실 홈페이지 및 각국 언론에 발표된 사진들을 주로 스캔 또는 다운받았음을 밝혀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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