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수정안]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 광복 81년, 주권자에게 다시 물어야
이원영 (국토미래연구소장, 시민인권위 공동위원장)
81년 전 우리는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되찾았다. 그러나 되찾은 것은 주권이라는 형식이었을 뿐, 그 주권을 실제로 잘 쓰는 능력까지 함께 얻은 것은 아니었다.
150년 전 동학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 외쳤고, 광복은 그 염원이 일차로 응답받은 사건이었다. 그러나 하늘을 되찾는 것과, 그 하늘의 뜻을 매 순간 빠르고 현명하게 묻고 답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지금 한국 앞에 놓인 과제는 그 어느 때보다 무겁다. AI가 국가의 생산력과 군사력을 동시에 재편하고 있고, 패권을 지키려는 미국은 동맹국의 주권마저 쉽게 넘본다.
날로 강대해지는 14억 인구의 중국이 지척에 있고, 일본과 러시아라는 오래된 강국들도 여전히 국경을 맞대고 있다. 특히 극우가 장악한 일본은 미국의 매파와 결합하여 동북아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5천만 인구의 나라가 살아남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국력의 크기가 아니라 국력을 쓰는 방식의 정교함으로 승부하는 것. 그 정교함의 핵심이 국가 전체의 의사결정능력이다.
정체(停滯)라는 이름의 정복
나라가 속국이 되는 것은 대개 군사적 정복이 아니라 정체를 통해 온다. 구한말이 정확히 그 경로였다. 조선은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니었다. 그런데 세도정치가 결정을 소수 가문에 가두면서, 서구 열강의 접근과 산업화의 물결이라는 시대의 압력에 반응하는 속도 자체를 잃었다. 군사적으로 정복당하기 훨씬 전에, 이미 결정할 능력을 잃은 나라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런 공백은 반드시 밖에서 메워진다. 동맹국의 전투기가 통보 없이 우리 상공을 드나들고, 주둔지에서 벌어진 유해물질 사고가 10년 전과 판박이로 반복되어도 국가 차원의 신속하고 일관된 대응이 만들어지지 못하는 장면들이 그 증거다.
안에서 결정하지 못하면, 밖에서 결정한 것을 통보받게 되어 있다.
지금 우리 안을 들여다보면 어떤가. 국민동의청원은 5만 명이 동의해도 처리율이 사실상 0%다. 핵발전소(원전)처럼 수만 년을 가는 결정이 밀실에서 정해진다.
양극화가 깊어지는데도 기본소득과 기본주택으로 상징되는 기본사회의 청사진은 여전히 도착하지 않았고, 4대강에는 녹조가 다시 창궐하며 원전은 축소가 아니라 확대의 길로 들어섰다.
나눠야 할 공유부를 나누지 않고, 지켜야 할 공유부를 고갈시키는 것이다. 지난봄 67%(갤럽)였던 지지율이 넉달만에 43%대로 내려앉은 것(리얼미터 기준)은 개별 정책의 실패가 아니라 이 원리의 귀결이다. 하나하나는 작은 지체처럼 보이지만, 쌓이면 구한말 세도정치와 같은 결과를 낳는다.
위기 앞에서 구조를 다시 그린 사람들
역사에는 정확히 반대의 길을 걸은 사례들이 있다. 위기 앞에서 국가의 의사결정 구조 자체를 재설계해 다음 세기의 토대를 놓은 순간들이다.
기원전 508년 아테네의 클레이스테네스는 귀족 가문의 표 매수를 원천 차단하기 위해 혈연 기반 4부족을 지역 기반 10부족으로 재편하고 500인 평의회를 추첨으로 구성했다. "누가 다스리는가"가 아니라 "다스림을 만드는 절차 자체"를 바꾼 것이다.
같은 시기 로마는 왕정을 무너뜨리며 집정관을 반드시 두 명 뽑아 서로 거부권을 갖게 했고, 평민회와 호민관 제도로 계급 갈등을 제도 안으로 끌어들였다. 의사결정구조의 재편이 팍스 로마나를 이끌었다.
1787년 필라델피아에서는 13개 주가 무정부 상태에 빠졌던 연합규약 체제의 실패를 딛고, 55인이 넉 달간 협상해 연방주의와 삼권분립이라는 새로운 아키텍처를 발명했다.
같은 시기 조선에서는 삼봉 정도전 대감이 나라가 세워지기도 전에 설계도를 그리고 있었다. 《조선경국전》은 왕조가 시작되기 전에 완성된 청사진이었고, 그 청사진이 오백 년을 지탱했다.
베네치아는 유력 가문의 담합을 막으려 추첨과 선거를 열 번 넘게 교차시키는 도제 선출 절차를 고안했다.
1949년 독일은 바이마르가 왜 무너졌는지를 정확히 진단하고 그 실패에 대한 직접적 응답으로 기본법을 만들었다.
이 사례들이 공통으로 물은 것은 하나다. 옳은 결정이 나올 확률을 어떻게 구조적으로 높일 것인가.
광장이 증명한 것, 그리고 증명하지 못한 것
이 사례들에 못지않게 자랑스러운 성취가 우리에게도 있다. 지난 10년, 한국은 어느 나라도 이루지 못한 것을 두 차례나 해냈다.
대통령을 두 번이나 무혈로 끌어내린 나라, 단 한 건의 폭력 사태 없이 23주 동안 연인원 1700만 명이 광장을 지키고도 스스로 쓰레기를 주워 담았던 나라. 시민이 몸으로, 거리에서 직접 증명한 결정력이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광장이 두 번이나 정권을 바꿔놓은 뒤에도 그 권력을 낳는 규칙 자체는 그대로다. 소선거구제는 건재하고, 거대 양당의 적대적 공생은 여전하며, 국민발안과 시민의회는 여의도 문턱을 넘지 못한다.
40퍼센트의 지지로 100퍼센트의 의석을 가져가는 왜곡이 반복되면 정치 지형은 두 진영으로 응고되고, 응고된 양당은 서로를 절멸시키려는 듯 싸우면서도 실은 서로의 존립을 보장한다. 이 구조에서 정당은 정책정당이 아니라 정권정당으로 굳어가고, 당내 경쟁조차 노선 투쟁이 아니라 자리싸움으로 퇴화한다.
대리인은 위임받는 순간부터 구조를 바꿀 유인을 잃는다. 자신이 그 구조 안에서 선출되고, 그 구조를 통해 권력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규칙을 쥔 자들에게 규칙 개정의 전권을 맡겨두는 한, 혁명은 늘 정권교체로 끝나고 구조교체로 이어지지 못한다.
'보여주는 주권'과 '행사하는 주권'
이 정부는 국민주권시대를 내걸고 국무회의와 업무보고를 생중계했다. 취임 초에는 이 형식이 지지를 떠받쳤는데 지금은 오히려 갉아먹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의사결정은 기승전결의 순서를 밟는데, 초기의 회의에서 오가는 말은 대부분 방향을 세우는 기(起)와 승(承)이어서 반대할 경우의 수가 거의 없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국정은 필연적으로 전(轉)과 결(結)로 내려간다. 선택가능한 경우의 수 여덟 개 중 하나가 선택되고 일곱이 죽는 장면이 매주 생중계되는 것이다. 예로부터 권력자가 기승에 서고 전결은 참모에게 맡긴 것은 겸양이 아니라 계산이었다.
그렇다고 공개를 접자는 말이 아니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이 권위를 유지하는 것은 민주국가에서 중요한 원칙이다. 권위를 훼손하지 않는 방식으로 실효성을 거두는 길이 얼마든지 있다.
조선의 사관은 왕의 언행을 낱낱이 적었고 왕은 자기 실록조차 볼 수 없었다. 다만 그 기록은 사후에, 여러 사초를 대조해 편찬된 뒤 세상에 나왔다.
기록은 검증을 거쳐 남고, 중계는 검증 이전에 퍼진다.
그러니까 기승에 해당하는 방향은 공개로 진행하되 전결에 해당하는 구체적인 시책은 숙의와 판단 후에 위임자로 하여금 발표하고 실행케 하는 것, 그런 구분이 기술적으로 있어야 한다. 그래야 권위가 손상되지 않는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따로 있다. 생중계는 국민에게 보여주는 주권이다. 그러나 주권의 본질은 국민이 직접 행사하는 데 있다. 대통령이 결정하는 것을 보는 것과 국민이 결정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국민주권정부를 표방한다면 대통령이 국민 앞에서 말하는 시간을 늘릴 것이 아니라, 국민이 직접 답할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위임과 양도 사이
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개별 개혁 하나하나보다 더 근본적인 과제다. 우리 모두의 의사결정능력이 가장 효과적으로 발휘될 체제로 국가 전체를 재설계하는 것, 그리고 그 재설계의 과정 자체를 거대 양당의 담합에 맡기지 않는 것이다.
그 설계는 대의제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옆에 몇 겹을 더 놓는 일이다.
국민투표 발의권을 대통령 한 사람의 재량에서 풀어내는 것. 되돌릴 수 없거나 세대를 넘는 결정은 국민이 직접 답하게 하는 것.
매번 국민투표에 부칠 수 없는 사안은 추첨으로 뽑힌 시민이 충분한 정보와 시간을 갖고 숙의하는 시민의회에 맡기는 것. 응답 없는 청원이 자동으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절차를 심는 것.
위임에는 반드시 해지 조항이 있어야 한다. 국민이 멈추게 하고 되물을 수 없다면, 그것은 위임이 아니라 양도다.
물론 이 방안들을 단정적으로 밀어붙이자는 것이 아니다. 시급한 것은 이 문제를 국민적 차원에서 논의하는 공론의 장을 여는 일이다.
소선거구제가 어떻게 표의 등가성을 무너뜨리는지, 비례성을 높이는 대안이 무엇을 바꿀 수 있는지, 선관위의 구성과 감독을 어떻게 여야의 손 밖으로 꺼낼지를 이해관계 없는 시민들이 마주 앉아 학습하고 토론하는 자리 — 선거개혁 시민대토론회가 그 시작이다. 개헌 논의가 다시 열린 지금이 그 좁고도 귀한 창이다.
하늘을 되찾는 일과, 하늘에게 묻는 일
동학이 "사람이 곧 하늘"이라 외친 지 150년, 그 하늘을 형식적으로 되찾은 지 81년이 지났다. 클레이스테네스의 아테네도, 제헌회의의 미국도, 삼봉의 조선도, 전후 독일도 위기 앞에서 그 답을 설계로 내놓았다. 구한말의 조선은 그러지 못해 결정할 능력 자체를 잃고 외부의 결정에 종속되었다.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다. 날개를 접은 채 떨어지면 추락이지만, 펴면 활공이 된다. 엔진만으로는 이륙할 수 없다. 이 나라의 날개는 시민사회이고 주권자다. 통제와 독점의 습관을 버리고 그 날개를 펼 때, 지금의 하강은 방향을 되찾는 선회가 될 수 있다.
시민은 통치의 대상이 아니라 공동 설계자다. 운전대를 잡았다고 해서 차의 주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목적지를 정하는 것은 언제나 주권자인 국민이다. 광복 81주년, 다시 원점에 서서 주인에게 물어야 한다. 그게 국민주권정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