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정견이 하나하나 실현되어 가는 것과 때를 맞추어 최승로는 988년(성종 7년)에 종1품 문하수시중에 올랐으며, 청하후에 봉작되어 식읍 7백 호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 최승로는 이미 환갑을 넘긴 노쇠한 몸이었다. 여러 차례 사직을 원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계속 성종을 보필해야 했다. 성종은 개혁의 선봉에 서 있던 최승로를 잠시도 떠나 보내고 싶지 않았다. 이듬해 989년(성종 8년) 최승로는 더는 연로함을 이기지 못하고 6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최승로의 부음이 전해지자 성종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공훈과 덕행을 표창하고 태사 벼슬을 추증했다. 또한 베 1천 필∙밀가루 3백 석∙쌀 5백 석∙유향 100냥 등을 하사하여 장례비로 쓰도록 했다.
자신의 말년을 온통 고려사회를 정비하는데 바친 개혁가 최승로는 치밀한 개혁안을 바탕으로 중앙집권화를 도모하면서도, 결코 귀족세력을 무시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오히려 귀족사회의 안정을 바란 그였지만, 그렇다고 서민들의 삶도 무시하지 않았다. 성종 대에 고려가 안정된 국가의 기틀을 갖추게 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최승로의 공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승로는 죽기 전 자신의 웅지를 펼칠 기회를 준 성종을 생각하며 이렇게 찬양했다.
다행히도 천 년 만에 지존을 만나 재주 없이 직책을 더럽히며 서원(西垣)에 있네 문장이야 감히 같이 있는 현사들을 바라보랴만 임금의 깊은 총애 모름지기 자랑하여 후세에 보여주리 크나큰 감명으로 눈물만 흘리고 뛸 듯한 기쁨에는 오히려 말이 없네 보답할 방법 생각하나 끝내 얻지 못하니 오직 남산 갈 길 빌면서 성은에 절할 뿐
성종 대에 쌓은 최승로의 명성은 제7대 목종까지 이어진다. 목종은 최승로를 성종의 묘에 합사하여 그의 공로를 치하했으며, 덕종은 대광∙내사령이란 벼슬을 추증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