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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해석의 원칙 과 변칙
--- 언어예술의 실상과 허상 읽기- --
金宇鐘
1.작품은 독자가 읽어줌으로서 완성된다.
문학은 언어예술이다. 언어는 화자가 말하고 청자가 들어서 완성된다. 작품에서 작자는 화자이고 독자는 청자다.
그런데 일상적 언어와 달리 문학 작품에서 화자와 청자는 따로 분리되어 있다. 그래서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자칫 멀리 달아나 버린 허상 쫓기가 될 수도 있다. 작자의 의도와는 달리 황당한 오답을 정답으로 알거나 의도적으로 만들어내기도 한다 . 그것이 주요한 문학사적 평가일 때는 그 문화집단의 큰 수치가 된다.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실제로 최상급의 비중을 차지해온 서정주와 윤동주의 작품이 그런 변칙 현상이 나타난 대표적인 예가 된다. 그로써 작자에게는 좋든 나쁘든 자신과는 다른 작품이 만들어지고 유언비어처럼 유포되기도 한다.
2. 문학작품은 특정 상황 속의 실체다.
문학 작품은 책방의 인쇄물이나 디지털 기기의 음원으로 독자에게 주어진다. 그런데 이것은 추상적 기호일 뿐 작품의 실체가 아니다. 작품은 특정 자각가 특정 시간과 공간의 현장에서 나타낸 언어현상인데 독자가 만나는 책이나 컴퓨터 모니터에는 작자가 없다. 작자가 없는 기호는 그 언어의 일부다. 그리고 그 자리에 없는 작자의 인격과 그의 숨소리와 그 시대적 배경도 모두 작품으로서의 언어기능을 지니기 때문에 이 현장 상황이 달라지면 청자가 듣는 의미도 달라진다.
3. 같은 기호의 다양한 의미
서울의 남산골 딸깍발이 허생의 아내(박지원의 <허생전>에서) 가 배고파서 바가지를 긁으며 도둑질이라도 해오라고 극언을 했을 때의 ‘배고파요’ 와 100년이 지난 현대인이 살 빼려고 굶다가 말하는 ‘배고파요’ 는 의미가 다르다.
박지원이 100여년 전에 선비의 아내를 통해서 바가지를 긁으며 말하게 한 '배고파요' 에는 못 먹어서 허기진 슬픔이 있고 학문만 하는 남편에대한 원망이 있지만 그로부터 100년 뒤 살빼기의 '배고파요'에는 아무 때라도 다시 먹을 수 있는 여유의 당당함이 있고 날씬해서 예뻐질 희망이 기쁨이 있다. 또 허생의 가출은 관념론에 지나치게 빠져 있던 학문적 풍토에 대한 실학파의 도전적 변신이 있고 살빼기는 실학파의 사회참여가 아니다. 그리고 허생전에서 실학파의 실천적 의지를 읽게 되고 작품가치를 논할 수 잇는 것은 박지원이 누구인지 작자에 대한 지식도 작용해서 그렇게 읽고 감동의 정도도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품을 인쇄물 속의 기호로만 읽고 따로 분리된 작자와 그 시대벼경을 함께 일기 않는 것은 귀가 멀어져서 말귀를 충분히 못 알아 듣는 결과가 된다.
그리고 보청기를 달 듯이 멀리 떨어져 나간 작자와 그 시대적 공간적 배경을 상상 또는 실제적 탐구로 설정한 상황 속에서 읽어야 한다.
나 단식투쟁의 ‘배고파요’는 의미가 모두 다르다. 문학 작품은 언어로써 특정 공간과 시간의 차이를 지닌 현장 상황 차이에 따라서 동일 기표(記表)라도 기의(記意)가 다르다.
문학 작품은 특정 시간과 공간 구조 속의 인간이 실행한 언어이현상이기 때문에 현장상황을 떠난 기호로서만의 작품은 작자의 의도를 완전하게 전할 수 없다. ‘배고파요’의 의미는 남산골의 그 가난한 선비의 삶을 보며 거기서 그 말을 직접 들어야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박지원 사망 후 100 여년이 지난 지금 그 한 마디 단어의 의미를 해석하라는 시험문제 답안을 쓰려면 지금 남산골 방문 대신 작품 전체를 읽어야 정답의 근사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실학자 박지원과 그 싱황을 연구하고 이희승 교수의 <딸깍발이>를 읽어도 더 도움이 될 것이다.
화자의 언어는 어떤 특정 시간과 공간 속의 살아 있는 사람이 그 상황에서 고저 장단을 달리하며 감정까지 실어서 토해낸 실체다. 그런데 작품은 그 상황이 배제된 추상적 기호일 뿐이며 실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독자는 그 추상적 기호를 가상적인 상황 속에 놓고 의미를 찾게 된다.
가상적 상황은 실제적 상황이 아닌 이상 독자가 만들어 내는 상상 속의 상황이다. 그러므로 작자가 제시한 추상적 기호가 반이고 독자가 설정한 가상적 상황이 반으로 더 해져 반과 반으로 하나가 된 의미 단위가 완성되며 이것이 작품 해석의 기본 원칙이다.
아내가 책만 읽는 선비 허생에게 돈을 못 벌면 도둑질이라도 해오라 하고 배고파요 했을 때 그 시대 배경과 당시 선비계층의 어려운 사정을 충분히 이해할 준비가 되지 않은 독자는 결코 독자의 의도를 완전하게 읽어낼 수 없다.
한 시인이 일제 억압 속에서 저항하며 마지막 작별의 시를 쓰고 생체실험으로 작고했는데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의도적으로 이 사실을 외면하고 시를 읽는 것은 몽유병자가 허상을 따라가기다. 그런 시는 세상에 있을 수 없다.
기호만으로 주어진 작품을 그것이 쓰인 또는 쓰였으리라고 생각되는 가상적 상황을 설정하며 읽을 때 이것은 작자(화자)가 간섭할 수 없는 청자의 몫이다. 그 상황은 화자가 전하는 의미와 밀접한 친근성과 필연성을 유지해야 되지만 자의적이어도 화자는 청자를 간섭할 수 없는 배타적 영역 밖에 있다.
예외는 있지만 그것은 원칙 밖의 현상이다.
조지훈의 <승무>를 말하는 강의 시간에 한 학생이 첫 련의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고이 접어서 나빌레라‘의 끝 단어를 ’나비일레라‘의 준 말이라 하자 다른 학생이 그것은 ’나불나불하다‘라고 반론을 제기한 일이 있다. 그러자 교수는 자신의 판단을 유보하고 조지훈 시인을 직접 만나서 문의한 후 다음 시간에 ’나빌레라‘는 ’나비일레라‘의 준말이라고 전했다. 물을 필요조차 없는 간단한 문제인데 신중한 태도를 취한 것이지만 작자에게 묻는다는 것은 지극히 드믄 예외 현상이다.
<제망매가>의 작자 월명사는 천 2백 여년 전에 작고했기 때문에 아무도 만날 수 없다. 같은 시기의 동네 사람이라 해도 그의 상가에 조문하러 가서 누이가 죽던 날 그렇게 바람이 불고 나무닢이 흩어졌느냐고 물으며 작품해석의 정답을 찾는 것은 원칙에 벗어난다.
이렇게 단절된 상태에서 독자는 작자를 어떤 현장 상황속에 그려놓고 작품을 해석하고 감상하게 된다. 화자가 말하는 현장이 생략된 언어현실은 존재할 수 없다.
월명사가 향가에서 누이를 잃고 슬픈 서정시를 읊었다면 독자는 일찍 돌아가신 그들의 부모님, 배고파 울던 어린 누이를 두고 혼자 절에서 목탁을 두드리다가 목 놓아 우는 법당의 젊은 이, 바람에 흩어지는 낙엽등 어떤 현장 속의 작자를 상상으로 설정하며 작품에 접근한다. 이같은 현장상황이 없는 작자와 작품은 있을 수 없으니까 이를 배제한 해석은 현실에 없는 허상 쫓기다.
이 경우에 독자는 물론 작자로부터 주어진 의미의 영역을 훼손하지 않는 친근성을 유지해야 되지만 그것은 필연성을 무시하고 지극히 자의적일 수도 있기 때문에 때로는 의도적으로 작품을 훼손하고 작자의 존엄한 가치를 침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한국문학에서는 윤동주의 대표작들과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가 그 작품들이 쓰인 언어현장을 외면하는 해석으로 지극히 왜곡되고 오답이 정답처럼 많이 알려지고 있다.
문학은 언어 예술이고 언어 현상이며 이는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 교수의 말을 빌어서 설명해도 좋다.
그는 언어를 랑그(langue)와 빠롤(parole)로 구분하고 있다.
우리는 문학작품을 작자가 말하는 실제적 현장을 떠난 기호로 받아들인다. 그것은 서점 책방 속에 갇혀 있는 기호이기 때문에 추상적이다. 핸드폰으로도 읽는데 그 속에 살아있는 시인은 없다. 실제하는 사물이 아니다. 실제적 언어현상은 특정 시간과 공간의 구조 속에서 나타난다. 이것이 빠롤이고 추상적 기호로서의 서점가의 언어나 컴퓨터에 내장된 언어는 랑그다.
빠롤이 빠를레( Parlais ? )라는 동사에서 온 것이듯이 문학 작품은 살아 있는 특정인의 입으로 나오며 작품으로 쓰고 싶도록 동기가 부여된 현장 상황의 움직이는 산물이다. 난폭한 파시스트들의 국가적 폭력에 분노하고 사랑과 평화를 찾는 문학만이 아니라 가녀린 날개로 하늘 끝까지도 날아오르려는 작은 새의 날개짓에 감동해서 쓴 시 한 줄도 그같은 실제적 현장 상황의 움직이는 언어현상이다. 그리고 그 현장 속의 언어는 같은 기호라도 뜻이 모두 다르다.
다음 예로 다시보자.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라고 을픈 양사언(楊士彦)의 태산과 현대인이 관광객으로 케이블카 타고 잠간 다녀 오는 태산은 높이가 다르다. ‘나뷔야 청산 가자 / 범 나뷔 너도 가쟈’ 라고 한 무명시인의 나비와 60만 마리를 죽여가며 연구한 제주도 생약연구소의 석주명의 나비는 다르다. 자연과학자로서의 석주명도 인류에 기여하지만 그는 꽃에서 푸대접 하면 잎에서나 자고 가자고 나비라는 생명체를 자신과 같은 고독한 생명체로 동일시 한 어느 무명시인의 인문학적 발상이 말하는 나비와는 다르다. 그가 제주도를 떠날 때 어느 스님이 살아남은 나비들을 놓아주고 가 달라고 부탁했다는 일화는 다 같이 나비라 말해도 저마다 다른 나비를 의미하고 있으므로 작품해석의 정답을 묻는다면 단답형이든 사지선다형이든 하나만을 정답으로 정하기는 어렵다. 그 대신 <나뷔야 청산 가자>에서 나비의 의미는 석주명이 아닌 그 시인의 정황 속에서 얻어져야 작자의 의도에 접근하게 된다.
작품 해석의 3 갈래
ㄱ. 발표 현장 상황 없는 책 속의 문학......기호만 읽기
ㄴ. 발표 현장의 가상적 상황 + 기호 읽기
ㄷ. 발표현장의 실제적 상황 + 기호읽기
ㄱ의 해석 방법은 김현승교수(1972년 ‘한국현대시해설, 관동출판사)의 <국화옆에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그 후 서정주를 찬미하는 문인과 교수들의 해석방법이 거의 비슷하다.
’작품과 작가는 별개 아닙니까?
서정주의 친일활동과 작품은 별개로 분리해서 봐야한다는 뜻이다. 당연한 논리인 듯 문단의 풋내기들도 항의하며 대든다. 작품과 작자는 따로 실제로 분리되어 있으니가 이런 논리가 먹힌다. 그렇지만 작품은 엄연히 작자의 정신세계의 소산이다. 1947년 11월에 작자가 이를 써서 경향신문에 발표하지 않았으면 그 작품은 없다.
그런데도 작자와 작품은 별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김현승의 해석이 나온다.
이러므로 생명은 신비롭고 존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생명의 신비함과 존엄성을 이 시는 가장 훌륭한 노래로써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생명의 존엄성을 이 시는 가장 훌륭하게 노래 했다고 말했지만 이것은 생명의 존엄성을 가장 악랄하게 말살하고 부정한 대표적인 시다. 아시아에서 자국국민과 우리 민족을 비롯해서 천만 또는 2천만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는 일본의 히로히토 천황을 그 학살행위로 인한 최고의 영웅처럼 찬미했다면 김현승의 해석은 사실과 정반대의 거짓 해석이 된다. 이는 작품과 작가를 완전히 분리한 해석법으로 나온 것이다. 이보다 3년 전인 1944년작 <마스이 오장 송가> 는 ’옥쇄작전‘으로 온국민을 죽음으로 몰아 넣던 작전의 찬미가다.이는 ’생명의 존엄성‘ 이 아니라 생명 경멸과 조롱이다. 같은 시기의 <무제>(일문)는 일본군이 갑판 위에서 이글이글 통닭구이가 되면서 기뻐하는 모습을 찬미하고 어머니들이 더 많이 자식들을 그곳으로 보내라고 선동한 작품이다. 그후 5.18 광주시민광장이 피바다가 돈 직후 서정주와 황금찬은 TV에서 그를 극찬하며 대통령으로 모시자 했고 그후 서정주의 전두환 찬미가가 이어졌다. 그런데 이는 최초 등단 시기의 <화사> <문둥이> 등에서도 꼭같다. 생명의 존엄성과 정반대로 시작하고 끝난 시인이다.
그런데 이 시들을 거꾸로 해석하는 것은 작자와 작품을 완전히 분리해서 보기 때문에 발생하는 오류다. 이는 특히 예술원 회원 다수에게 나타나고 최근 네이버를 검색한 결과도 6~7개 항목이 모두 유명 평론가의 것과 이를 따르는 해석으로 도배되어 있다.
이것이 수십년간 국정국어교고서에서 우리 국민을 가르쳐 온 것도 그런 배경을 은폐했기 때문이다. 1990년에 교과서에서 퇴출되었지만 아직 그런 해석방법이 위력을 지닌다. 명문대 교수와 유명시인과 평론가들이 그렇기 때문이다.
또 이런 해석법은 윤동주의 대표작들에 대해서도 나타남으로서 일제암흑기에 옥사한 그의 문학적 업적을 를 빛내고 가장 사링받는 그를 허상으로 지워버리려 하고 있다.
뉴라이트
허상으로 조작되는 윤동주 문학
윤동주의 대표작들은 대부분 1941년 작이다. 그가 스스로 골라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묶은 자필시집 19편중 14편이 그렇고 나머지도 비슷하다. 누이 동생 윤혜원이 1.4후퇴 후 고향에서 가져 온 습작까지는 약 200편이지만 작자 스스로 뽑아 19펹ㅇ 14편이 1941년 작이라면 이 특별한 연대를 떠나서 그의 시를 말할 수는 없다.
통시태 공시태 ㅔㅔㅔㅔㅔㅔㅔㅔㅔㅔㅔㅔㅔㅔㅔㅔㅔㅔ
고 나머지도 이에 가깝다. 그러므로 1941년의 의미를 떠나서 윤동주ff 말하기는 어렵다.
1941년은 시간개념이지만 그것은 특정 공간 속의 시간이며 윤동주 대표작들은 여기에 공시태(共時態) 통시태(通時態)로서 나타난 실제적 문화유산이다. 이 공시태는 태평양으로 확대된 일제 침략전쟁이고 징병, 징용, 정신대, 위안부, 치안유지법, 국어학자들의 투옥 고문 사망, 창씨개명, 국민총동원령 그리고 윤동주의 생체실험과 반민족 반인륜적 친일 악마주의 문학까지 모두 포함된다. 그리고 이를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역사적 관점에서 본 형태가 통시태다.
그런데 작품을 여기서 완전히 격리시켜 허공에 띄워놓고 봐야 작품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 ㄱ형이며 이는 이미 1934년 김환태 평론가 발명한 문학이론으 연장선에 있다.
<예술의 순수성>(1934년 조선중앙일보)에서 그는 모든 예술은 사상성 목적성 사회성을 없애야 순수성이 유지된디고 주장했다. 순수문학이라는 용어는 여기서 안 나왔지만 곧 이어서 쓰이기 시작하고 해방 후 한국문학의 주류가 되었다. 그 주류는 서정주 김동리 조연현이 주축이 되어 형성되었고 이들은 문단권력을 장악했다. 반공과 함께 정치적 투쟁의 결과다.
최초의 이론이 김환태에 의해서 정립되었기 때문에 그는 이 분야의 공로자가 되었지만 필자의 현대소설사에서 언급된 이부분이 김환태 생가의 문학비에 그대로 기록된 것은 필자의 주장과는 반대로 오해 될 수 잇다. 순수문학을 부정하기 위해서 인용된 부분이기 때문이다.
사상성 목적성 사회성을 버린 문학은 허상일 뿐이다.
이것이 윤동주 작품 해석에서 비슷하게 영혼을 빼버린 해석으로 나타나며 그것은 그의 문학을 허상으로 만들게 된다.
이어령은 <<암흑에서 태어난 빛의 공간-윤동주의 <서시>의 세계>>에서 그의 문학을 ” 전기적 상황적‘ 견지에서 보지 말고 시를 순수한 ’시적구조‘의 견지에서만 읽어야 한다고 말하며 <서시>를 풀어 나갔다. 그리고 전기적 상황적 입자의 해석을 정치적 해석이라 바꿔말하며 그런 해석은 윤동주의 문학을 ’독립기념관의 유물처럼‘ 만들게 된다고 말했다. 이것은 윤동주의 <서시> 같은 작품을 그가 옥사하고 독립유공자 애국장을 받은 인물이 되기까지의 전기적 배경에서 해석하는 방법을 비판한 것이다. 그런 해석은 ’정치적 해석‘일 가능성을 지적했다. 1968년에 순수참여논쟁에서 김수영의 참여 시를 정치적인 불온시로 비판했던 것과 같다. 문학이 그렇게 되면 홍범도 장군처럼 ’독립기념관의 유물처럼‘되기 쉽다고 걱정한 것이다.
일본 후쿠오카의 ’윤동주의 시를 읽는 모임‘(1998년)에서 이 논문이 소개되고 토의가 전개되었다. 다수가 찬성한 것은 아니지만 윤동주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해석방법이 공감을 주기도 하는 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다. 일제의 과거사를 스스로 기억하며 그 희생자를 찾아서 모인 자리인데 그 과거사를 빼고 시를 읽게 되는 모순에 빠질 우려가 있다.
윤동주의 <서시>를 ’전기적 상황적‘ 건지에서 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서시>가 일제의 선전포고 18일 전의 작품이고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가 죽음의 전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이고, 어머니와 모든 사랑하는 것에 대해 작별하는 <별 헤는 밤>이 유서이고, ’조용히 피를 흘리겠습니다‘라고 한 <십자가>가 목숨을 건 저항이고 그것이 모두 1941년 작인데 이 현장을 빼면 윤동주와 그의 시는 모두 사라지는 셈이다.
또 윤동주는 망명한 교포들이 몰리고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된 곳에서 자랐고 죽는 날까지 기독교 신자였다. 같은 해에 함께 태어나고 함께 자라고 함께 형무소에서 죽고 함께 용정 동산교회 묘지에 묻힌 송몽규는 낙양군관학교 출신이고 함께 독립운동 한 유공자이며 그 필연적 결과 없이 그의 시는 설명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암흑속의 별이라고 나는 <암흑 속의 마지막 별>을 1976년 월 ’문학사상‘에 발표했다. 그 후 이 자리에서 논하는 이어령의 평론도 <암흑에서 태어난 빛의 공간>이니 내 평론과 제목이 거의 같고 또 내 평론은 이어령이 청탁해서 그의 문에지에 쓴 것이다. 그런데 암흑기의 별이나빛이라는 인식은 동일하지만 해석방법은 달리해야 된다는 것이 되는데, 그렇게 해석하면 윤동주는 암흑에서 태어난 별은 아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에서 ’하늘을 우러러‘는 ’낮은 데서 높은 곳을 쳐다본다는 것‘이니까 ’지상에서 천상의 영원성을 염원하고 있는 것‘이라 말하고 ’시를 순수한 건축물의 구조만으로서‘ 봐야 시가 바로 읽힌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전쟁포고 18일 전이고 작자도 곧 전쟁터로 나가서 개죽음 당할 터이고 온 인류가 도수장으 짐승들처럼 죽음 직전에 밀려 있고 이미 중국인 30만 학살(중국측 집계)을 고향에서 다 듣고 알고 있으면서 십자가 밑에서 조용히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흘리겠다고 말한 윤동주가 쳐다본 하늘은 그 다위 애매모호한 영원성이 아니다. 하늘을 쳐다 보니 너무 높고 아득해서 영원하다는 말에 왜 감동하나? 매일 쳐다보는 하늘 아닌가? 하늘이 일문번역에서 공(空)이 아니라 천(天)이라야 된다는 주장도 이 때문에 나왔다. 윤동주가 우러러본 하늘은 머리 위의 하늘이 아니라 가슴 속에 있다. 당 속에도 잇을 것이다. 한님은 어디에나 계시다고 말하는 신앙의 입장에서는 그렇다. 이를 머리 위의 푸른 하늘로 해석하면 그것은 시가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다가 마지막으로 유서나 다름 없는 시들을 쓰고 고향의 어머니와 사랑하는 모든 것에 작별을 고하는데 이 사실을 전연 못듣고 목 본양 하늘이 얼마나 높은지 자로 재기나 하는 것은 윤동주 시인에 대한 모독이 되기 쉽다.
..................................................(2024년 상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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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학사에서 이처럼 작품을 쓴 작자의 배경을 완전헤 배제하는 해석방법은 문학이 애초부터 그런 배경과 무관하게 창작되어야 순수하다는 황당한 논리에서 시작되엇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배경없이 쓴 작품이라면 굳이 그런 상황속에서 작품을 읽을 필요가 없다. 그것이 김환태의 순수문학 이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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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배경으로부터 완전히 떠난 작품을 가상하는 것은 사회성 목적성 사상성을 없애자고 한 김환태의 잘못된 순수문학론으 연장선ㅇ 있다. 그리고 그 순수문학론이 바로 그 해에 문인 칠팔십명이 체포되고 일본에서는 고바야시다키치등 3명이 경찰서에서 맞아 죽으며 전향하고 항복하게 되엇듯이 그 문학론은 항복문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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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문학 창작이 사회 참여적 목적의식을 지니면 시대적 환경변화 후에는 무용지물이 된다는 주장은 잘못이다. 윤동주는 일제 통치하에서 저항하며 피를 흘리겠다고 선언할만큼 적극적 목적의식의 사회참여자였지만 일제가 떠난지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또는 더 찬란하게 빛난다. 일제라는 국가적 폭력은 인간 집단 어디서나 아마도 영원히 인류의 사랑과 평화를 파괴하는 상징적 존재이고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도 우리에게 주어진 영원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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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으로 해석한 <국화 옆에서>
이 작품은 윤동주의 대표작들과 둘이서 나란히 우리 문학사에서 가장 관심이 집중되어 온 작품이다. 작자는 교과서와 참고서를 통해서 최장기간 독자와 만나고 해방 후 문단 주류를 형성한 대표적 작가로서 우리 문학의 흐름에 미친 영향이 너무 크다.
그런데 이 작품도 이어령의 해석방법과 곡 같은 방법으로 작품배경을 떠난 허상으로 해석되어 있다.
배경이 삭제된 허상은 ’생명 탄생의 신비성과 존엄성‘으로 시작 되었고 배경 속의 실체로 본 그것은 일제 전쟁의 주범을 위대한 악마로 극찬한 것이다. 반민법 발효를 눈 앞에 두고 이미 실권을 장악한 친일파들이 저항하던 1947년 11월 작품이므로 일제가 물러간 뒤의 친일문학이 된다.
김현승 교수는 ’한국현대시해설‘ (1974년 관동출판사)에서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이러므로 생명은 신비롭고 존엄하지 ㅇ낳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생명의 신비함과 존엄성을 이 시는 가장 후륭한 노래로서 표현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시가 발표되기 3년 전의 <무제>에서는 일본군 병사들이 갑판 위에서 이글이글 타 들어가는 모습을 찬미하며 어머니들에게 도 다시 그 죽음의 바다로 자식들을 보내라고 선동하고 있다. 생명의 존엄성을 이만큼 짓뭉개버리는 시는 따로 없을 것이다. <국화 옆에서>는 그 시적 서술문장의 논리와 어휘의 객관적 의미로 봐도 생명 말살의 악마적 찬미가다. 은유법의 자유로운 자의적 해석으로서가 아니라 사전적의미와 다름없는 환유법으로 그대로 읽어도 그렇다. 보편화되고 상식화된 ’소쩍새‘가 전쟁터에서 죽은 넋이라는 환유법 대로만 읽으면 된다. 그런데 전쟁 직후 1947년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빼고 친일문학의 전기적 배경도 빼고 맨 처음부터 <문둥이> <화사>처럼 생명을 조롱하고 유럽 악마주의 문학의 원조로 ㄱ록되어 있는 샤를르 보드렐르를 극찬한 것등 모든 전기적 시대적 배경을 빼고 허공에 뜬 고무풍선 보듯 작품을 해석하면 작자의 의도를 백프로 거꾸로 돌리는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이런 서정주 찬미가 예술원회원인 유종호 신경림이나 이어령으로 이어지고 최근의 네이버 검색으로 보면 찬사만 10여개 항목이 반복되고 지난 2015년 경까지 나온 접집에도 부끄러운 것은 빠져서 은폐된 셈이다.
<국화 옆에서>가 거의 노골적으로 맞선 친일파 운동과 달리 미화된 것은 작자와 작품을 그런 실제 현장 속의 작품으로 보지 않고 허상을 그리려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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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런 평가에서 일부 비평가들이 해온 작품해석은 매우 의도적인 오류일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면 모두 학벌을 갖춘 유명 전문가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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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언어에술이다. 언어는 화자가 의미를 전하고 청자가 받아들임으로써 완성된다. 그런데 청자가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해를 의미한다. 화자가 어머니를 불렀는데 청자가 강아지를 부른 줄 알았다면 언어는 성립되지 못한 것이다.
윤동주가 <서시>에서 ‘ 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고 말했는데 ‘모든 살아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로 알아들었다면 그것은 문학으로 성립되지 않은 것이다. 자의적인 의역은 다음 문제다. 언어는 사회적 약속이므로 산 것은 산 것이고 죽은 것은 분명히 죽은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이것은 간단한 논리지만 언어는 페르디낭 드 소쉬르가 랑그와 빠롤로 구분했듯이 작자와 분리해서 활자화 되거나 디지털의 음원으로 전해진 경우와 작자 자신에게서 직접 듣는 경우를 구분해야 한다.
문학에서 청자(독자)는 작자를 직접 대면하지 않는 이상 작자의 소리와 그 표정을 읽을 수 없다. 그런데 아쉽게도 화자(작자)는 살아 잇는 사람으로서 작품을 쓰고 발표한다.
살아 있는 사람은 특정 시간 특정공간에 갇혀 있는 사람이다. 윤동주는 한반도가 아닌 간도 출신이고 <서시>를 쓸 때는 서울에 있으면서 연희대 조기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징병 징용 학도지원병 정신대위안부 국김총동원령 예비검속령 우리말 박탈 일어강요 창씨개명 그리고 아시아에서 2천만이 죽는 대학살의 진군나팔이 울리던 때다. 이미 우리 당 아닌 중국의 용정에서 어린이 늙은이까지 30만명 대학살의 소식을 듣고 중일 전쟁이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기 18일 전에 이 시를 썼다. 그리고 그가 습작기의 작품을 포함해서 200여편의 시와 산문 중 19편이 첫 시집에 실려 있고 그 중 15편이 모두 1941년 작이다. 그렇다면 이런 특정환경 조건을 외도적으로 완전히 배제해버린 상태 속의 <서시> 해석은 용압될 수 없다.
살아있는 사람의 시는 그런 환경조건에서 나온 언어이며 이를 배제한 언어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평론가 이어령은 <어둠에서서 태어나는 빛의 공간-윤동주 ‘서시’의 세계>에서 이런 환경조건을 배제해야 그 시를 바로 이해하게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가윤동주의 전기적(傳記的 )요소를 잊고 ,시의 구조, 즉 언어로 구성되는 순수한 건축물으 구조만으로 읽어 보면 종래와는 다른 시점에서 이 시를ㄹ 맛볼 수 잇을 것이다.’
간이라고 긍정적인 평가를 전제하면서도
서정주와 윤동주는 작고시인이고 정호승은 현역이지만 이미 70대 중반이고 1972년 등단 후 50년을 쉬지 않고 정진해 왔으므로 이것만으로도 일생의 업적을 평가할 단계가 되었다.
그런데 이들중 서정주는 문인 교수와 일반 독자들의 많은 찬사를 받는 한 편 문학사상 최고의 악명으로 1990년 국정교과서 심의에서 퇴출된 시인이다. 1936년 <벽>으로 등단 후 2000년에 작고하기까지 ‘전집 ’으로 출간된 그의 전집에는 친일반민족행위 또는 그 후의 유사한 작품은 빠져 있다.
그러므로 한국 또는 인류 문화에 바르게 기여한 작가와 작품을 평가하는 기록물에서 서정주는 원천적으로 텍스트 접근이 차단되어 있거나 연구 결과가 허위문서가 되기 쉽다. 그리고 감춰진 작품들이 반민족적 행위임이 들어난다면 그 내용을 알면서도 감춘 교수와 문인들은 결과적으로 공범이 된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반공법 문제만 아니라면 공존하는 아량이 있는 사회이고 그럴 수 밖에 없도록 지구상에서는 기형적으로 진화한 사회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빛나는 가장 대표적인 시인은 윤동주와 정호승이다.
윤동주는 세계2차대전까지 온 인류가 전쟁으로 죽음의 고난이 닥쳐 왔던 시기에 우리 민족과 함께 온인류의 사랑과 평화를 외치고 구원의 메시지를 던지고 간 시인이다. 이를 위해 스스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기를 선언하고 간 시인은 이 세상에 윤동주밖에 없다.
파시스트들의 폭력으로부터의 구원은 인류의 영원한 과제이므로 그의 문학은 지금도 찬란하게 빛난다.
정호승은 70년대 군사정권의 폭력과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모순 속에서 고통받는 약자들에 대한 사랑으로 선풍적 인기를 얻으며 2020년대에 이른 시인이다. 그의 문학은 언어로서의 시집만이 아니라 유명작곡가와 가수와 하나가 되어 새로운 문예양식으로 인류의 근원적 슬픔과 고독을 위로하고 있다. 우리 문학사에서 이만큼 다양한 계층의 다수로부터 이만큼 열광적인 사랑을 받아 온 시인은 없다.
찬란하게 빛나며 사랑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