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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기연맹의 내선일체운동 연구 ― 조선인 참가자의 활동과 논리를 중심으로 ― |
韓 國 精 神 文 化 硏 究 院 韓 國 學 大 學 院 歷 史 專 攻 : 李 昇 燁 |
碩士學位論文 |
녹기연맹의 내선일체운동 연구 ― 조선인 참가자의 활동과 논리를 중심으로 ―
指導敎授 權熙英 |
韓 國 精 神 文 化 硏 究 院 韓 國 學 大 學 院 歷 史 專 攻 : 李 昇 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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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기연맹의 내선일체운동 연구 ― 조선인 참가자의 활동과 논리를 중심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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碩士學位 論文으로 提出함 (1999. 11. 30) |
韓 國 精 神 文 化 硏 究 院 韓 國 學 大 學 院 歷 史 專 攻 : 李 昇 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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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論文을 李昇燁의 文學碩士學位 論文으로 認定함.
1999年 12月 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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審査委員長 ㊞ 審査委員 ㊞ 審査委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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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 國 精 神 文 化 硏 究 院 韓 國 學 大 學 院 |
목 차
머 리 말 1
Ⅰ. 재조일본인 사회와 녹기연맹 7
1. 재조일본인의 아이덴티티 7
2. 녹기연맹의 결성과 활동 13
Ⅱ. 녹기연맹의 내선일체운동과 조선인 18
1. 내선일체운동으로의 방향전환 18
2. 녹기연맹의 내선일체운동 25
3. 조선인의 참여와 활동 35
Ⅲ. 조선인 내선일체론자의 논리 42
1. 정세인식과 사상적 영향 42
2. 자기부정과 제국으로의 동화 49
3. ‘평행제휴론’과의 대립 및 내선평등의 촉구 58
맺 음 말 74
<부록 1: 녹기연맹 연표> 78
<부록 2: 녹기연맹 관련 문헌목록> 92
참고문헌 104
ABSTRACT 111
머 리 말
1937년 7월, 中日戰爭 勃發 이후, 식민지 조선사회는 全面的 再編의 길에 접어들게 된다. 이른바 ‘戰時體制’ 아래서의 물적․인적 動員 정책과, 동원의 효율성을 위한 사상․문화적 同化策으로서 ‘皇民化’ 정책이 전면화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전시체제로의 재편과정에서, 조선민중에 대한 동원 이데올로기로서 내세워진 것이 ‘內鮮一體’의 구호였다. 식민지 통치권력은 ‘同權利 同義務’를 암시하는 ‘내선일체’란 구호를 통해 민족적 차별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조선인의 願望을 자극함으로써, 물적․인적 동원에 대한 조선인측의 저항을 최소화하고, 나아가 자발적 협력을 이끌어내고자 하였다.
조선사회의 戰時體制化, 특히 ‘내선일체’의 구호 아래 진행된 사상․문화적 방면에서의 재편은 하나의 ‘운동’으로서 추진되었는데, 본질적으로 통치권력측에 의한 官製운동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그 底流에는 ‘민간’ 차원의 움직임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식민지사회의 지배민족으로서 존재하던 朝鮮在住日本人(이하 在朝日本人으로 약칭)이나, 자발적으로 식민통치에 협력하고, 나아가 일본민족으로의 同化를 꿈꿨던 일부 조선인들의 존재가 그것이다. 지금까지의 식민지시대 연구에서 이들의 존재는 무시되거나, 혹은 ‘식민통치의 나팔수’, ‘앞잡이’ 정도로 간과되어 온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각종 단체를 형성하여 조선총독부에 의해 주도된 여러 정책과 운동에 협력함으로써 실천적 추진력으로 기능하였으며, 나아가 구체적 정책과 이론을 제공함으로써 식민지 통치권력의 정책방향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이들의 활동에 의해, 동원의 구호로서 내세워졌던 ‘내선일체’는 비로소 구체적 내용을 가진 사회적 담론으로 형성될 수 있었으며, 민간 각 부문에서의 전쟁협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었다.
결국, 전시체제하 식민지 조선사회의 재편과정은, ‘日本帝國의 단일한 의지가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직접 관철되었다’는 식의, 또는 ‘일본인 대 조선인’, ‘통치권력 대 민중’이라는 식의 단순한 시각으로는, 그 올바른 모습을 그리기 어렵게 되고 만다. 조선 식민지정책 자체가 일본 내의 정당, 관료, 재벌, 군부, 우익단체 등 이해를 달리하는 여러 집단의 대립과 이견 속에서 수립된 것이며, 조선총독부에 본국 내각의 입장이 그대로 관철될 수 있는 구조도 아니었다. 표면적으로는 조선총독부가 입법․행정권을 장악하고 無所不爲의 권력을 행사한 듯한 조선사회 역시, 다양한 정치적․민족적․계급적 이해관계의 긴장과 상호작용 위에서 움직여 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녹기연맹은 식민지시대 말기 식민지 조선사회에서 통치권력과 민간의 상호작용을 통한, 권력의 사회적 顯現 과정의 重層性을 보여주는 한 가지 실례라 할 수 있다. 애초 在朝日本人 지식층을 중심으로 한 국가주의적 종교단체로 출발했던 녹기연맹은, 이후 전시체제 하에서 급조된 관변단체들과는 달리, 독자적인 이념적 지향과 개인의 자발적 참여로써 구성된 민간단체로서 내선일체운동을 先導的으로 수행하였다. 특히 다수의 조선인이 참여하여 녹기연맹의 이론적․실천적 기반을 형성하였다는 것, 식민지 통치권력측의 정책방향에까지 영향력을 미치며 식민지시대 말기 조선사회의 재편에 一翼을 담당했다는 점은 특히 주목되는 부분이다.
중일전쟁 이후 조선의 전시체제화 및 ‘황민화’운동을 전반적으로 다룬 연구로는 미야타 세쯔코(宮田節子)1), 崔由利2)의 연구가 있다. 미야타의 연구는 중일전쟁 이후 태평양전쟁 말기에 이르는 시기의 創氏改名, 志願兵制度, 敎育令改正, 徵兵制度 등의 정책사례와 그것에 일관하고 있는 통치정책의 基調에 대해 밝히고 있으며, 이에 대한 조선민중의 저항, 내선일체론을 둘러싼 통치권력과 조선인 협력자들 간의 視角差 등에 대해 다루고 있다. 특히 조선인측의 내선일체론에 내재된 ‘차별로부터의 탈출’ 논리를 밝혀냄으로써, 이후 보다 확장된 시각에서 조선인들의 ‘親日’ 행위에 접근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최유리는 조선지배정책의 기조가 되어 왔던 同化政策이 중일전쟁을 계기로 보다 ‘내선일체’론으로 보다 강화되어 전개되었지만, 그 실상은 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 國民總力朝鮮聯盟 등의 형태로 확대강화되어 가는 전시동원정책의 이데올로기였음을 밝히고 있다. 한편 오구마 에이지(小熊英二)는 日本民族論에 관한 일련의 저작에서, 일본 식민학․식민정책의 맥락 속에서 조선의 황민화정책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3)
황민화정책의 구체적 내용에 관한 연구도 다수 있다. 創氏改名,4) 日本語普及5), 內鮮結婚6), 神道정책7) 등 다양한 부분에 관한 연구성과가 나오고 있으나, 아직까지 깊이 다루어지지 못한 부분이 많으며, 전혀 前人未踏인 채 남아 있는 부분 또한 적지 않다.
식민지재주 일본인 일반에 관한 연구로는 尹健次,8) 미야케 찌사토(三宅ちさと)9)의 연구가 있으며, 재조일본인에 관한 연구는 카지무라 히데키의 선구적 연구10) 이래로 주로 일본인 연구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그 대부분이 한말-식민지초기의 재조일본인 형성과정에 관한 것이며,11) 전시체제기의 재조일본인사회를 대상으로 포함하고 있는 것은 양적으로 많지 않아서, 카세타니 토모오(綛谷智雄),12) 타바타 카야(田端かや),13) 사키모토 카즈코(咲本和子)14) 등의 연구에 그치고 있다.
조선인 ‘친일파’에 관한 것으로는 林鍾國15)의 선구적 업적과, 그 뒤를 이은 민족문제연구소(구 반민족문제연구소)와 김삼웅, 정운현 등의 연구물16)이 대표적이며, 그 밖에 각 부문별로 이루어진 ‘친일’ 행위를 규명한 것들도 있다.17) 그러나 이 중 상당수가, 특히 대중적 취향의 단행본으로 간행된 것들이 더욱 그러한데, 개별 인물의 ‘친일’ 행위에 대한 사실 확인과 폭로에 그치고 있어, 학문적 성과로 언급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측면이 있다.
식민지시대 말기 조선인의 轉向과 내선일체 논리에 관한 연구는 최근들어 집중적으로 나오고 있다. 각각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의 전향을 다룬 김민철,18) 이명화19)의 試論的 연구 이후로, 池昇峻,20) 이경훈,21) 李秀日,22) 마쯔다 토시히코(松田利彦),23) 카와 카오루(河かおる)24) 등이 구체적인 인물․단체를 대상으로 그들의 전향논리를 분석하였다.
녹기연맹에 관한 관한 최초의 연구는 任展慧에 의해 이루어졌다.25) 여기서 그녀는 식민지 조선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여성활동가였던 오쿠무라 이호코(奧村五百子), 후찌자와 노오에(淵澤能惠)와 함께 녹기연맹의 여성활동가 쯔다 세쯔코(津田節子)에 대해 다루었다. 뒤를 이어 타카사키 소오지(高崎宗司)는 녹기연맹의 결성과 활동내용에 관한 개괄적 사항과, 조선인 활동가들에 대해 다루었다.26) 최근의 것으로는, 나구모 사토루(南雲智)가 녹기연맹 기관지 綠旗의 總目次 및 著者名別 索引, 그리고 解題를 발표하여 연구를 위한 유용한 기초자료로서 제공한 바 있다.27)
그러나 아직 녹기연맹에 대해 충분한 연구가 축적되어 있지 않은 까닭에, 이상의 연구들 역시 녹기연맹의 활동 일반에 대해 사실 확인을 중심으로 한 개괄적인 연구에 머물러 있으며, 따라서 많은 부분이 공백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녹기연맹 성립의 배경이 된 재조일본인사회의 상황과 그들의 민족적 正體性 문제, 재조일본인 중심의 종교단체로부터 ‘내선일체의 실천’을 표방하며 사상운동단체로 변모되어 간 과정, 조선인의 참가상황 및 그들의 논리에 대한 규명 등이 충분히 연구되지 못한 상태라 하겠다.
본 연구에서는 녹기연맹의 활동을 통해 다음과 같은 문제에 다소나마 접근하는 실마리를 찾아 보려 한다.
첫째, 식민지 조선사회가 전시체제로 재편되어 가는 과정에서, 식민지 통치권력의 정책에 호응하며 진행된 민간의 움직임, 곧 ‘아래로부터의 운동’이라는 문제이다. 민간의 재조일본인과 조선인, 그리고 이들에 의해 구성된 사상운동단체 녹기연맹의 활동을 살펴봄으로써, 전시체제로의 재편과정에서 민간이 수행한 역할과 통치권력과의 상호작용의 양상에 접근하는 실마리를 찾아 보고자 한다.
둘째, 식민지공간에서 한일 양민족이 직면했던 自我正體性의 문제이다. 식민지공간의 지배민족으로서의 재조일본인, 그리고 피지배민족으로서 저항운동의 한계를 절감했던 일부의 조선 지식인들이 직면해야 했던 민족적 아이덴티티의 위기란 어떤 것이었는가, 이를 극복하기 위한 그들의 선택은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양자가 찾을 수 있었던 합일점은 어떤 것이었으며, 그것이 식민지공간에서 어떤 형태로 표출되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살펴 보고자 한다.
셋째, 식민지시대 말기의 전향에 대한 문제이다.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일컬어지는 이 시기의 전향문제의 全體相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들이 표명했던 논리에 대한 분석과 더불어, 다양한 전향논리가 담고 있는 특징과 상호간의 편차에 대해 밝히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녹기연맹의 조선인 내선일체론자들이 제시했던 논리는 무엇이었으며, 이들의 논리가 여타의 전향자들과 차별성을 보이는 지점은 어디였는지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이러한 문제에 접근하는 단서를 찾아 보고자 한다.
이상의 문제의식 하에서 본 논문은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제Ⅰ장에서는 재조일본인의 존재양태와 그들이 직면했던 아이덴티티의 위기, 그리고 그 극복방안으로서 출발한 녹기연맹의 운동에 대해 살펴보겠다. 제Ⅱ장에서는 녹기연맹이 본래의 종교단체로서의 성격을 벗어나 내선일체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는 과정, 운동의 구체적 내용, 그리고 거기에 참여한 조선인들의 행동 동기와 녹기연맹에서의 역할 등에 대해 살펴보겠다. 제Ⅲ장에서는 녹기연맹의 조선인 이데올로그들의 정세관과 그들이 받았던 사상적 영향, 민족운동으로부터의 전향과 帝國으로의 同化의 논리, 그리고 굴절된 형태로 드러나는 ‘민족의식’의 양상을 다루어 보도록 하겠다.
Ⅰ. 재조일본인 사회와 녹기연맹
1. 재조일본인의 아이덴티티
19세기 후반 開港과 함께 조선에 渡航하기 거주하기 시작한 在朝日本人 인구는, 일본의 韓國倂合 이후 급격히 증가했다. 1876년 54명으로부터 1910년에는 17만 1천명으로 급격한 성장을 보였다. 그리고 이 숫자는 식민통치가 안정화되어 가는 것에 비례하여 1920년대 이후로는 매5년마다 10만명에 가까운 인구증가세를 보이면서, 1942년에는 최대치인 75만명을 기록하고 있다.28) 지역별로는 특히 京城 지역에 가장 많은 인구가 밀집하여, 1942년 현재 약 17만명에 가까운 일본인이 밀집, 경성 인구의 15%를 점하고 있었다.29)
재조일본인은 식민지 조선에서 본국과는 떨어진, 또한 원주민인 조선인과도 떨어진 상황에서 나름의 植民者社會를 형성해 나갔다. 이러한 경향은 식민통치가 안정화되어 가는 것에 비례30)하였는데, 특히 경성은 종로를 중심으로 한 조선인 거주지역과, 남산을 중심으로 한 일본인 거주지역이 확연히 분리될 정도로 재조일본인의 독자적인 커뮤니티를 형성하였다.31) 이들은 식민지 조선에서 지배자로서의 위치를 점하고 있었으며, 조선에서 이루어지는 일체의 활동에서 주도권을 행사했다. 이들은 이미 식민초기부터 거류민단을 구성하고 일본의 식민정책에 직․간접적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재조일본인은 식민지시대 조선인의 日本人觀을 형성시켰으며, 그들의 존재와 행동은 조선인에게는 식민지배의 일부로서 받아들여졌다. 한 재조일본인 여성의 다음과 같은 진술은 주목할 만하다.
[...]뭔가 게이죠[京城]에서는 일본인이 뽐내고 있는 것 같았어요. 일본인으로서 얌전하고 검소하게 사는 것을, 서로가 도와주고 양보하는 것을 미덕으로, 일본인의 자존심이라고 생각했던 나에게는 京城의 남산 주변의 생활은 그렇지 못하다고 느낀 거지요. 외지에서는 마음대로 행동하는 거지요.32)
피지배민족인 조선민중의 입장에서는, 일본의 식민통치란 총독정치의 구체적인 정책보다도, 지배민족인 재조일본인들과의 일상에서의 접촉을 통해 형성되는 이미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초기 식민자의 대부분은 메이지(明治) 초기 급격한 자본주의화에 의해 형성된 몰락 상인․빈농․몰락 士族 등으로서, 국내에서의 생활고를 피해 식민지에서 오직 금전만을 노리고 방약무인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33) 이후 식민통치의 본격화․안정화와 함께 재조일본인 사회의 구성도 점차 군인․관료․기업의 중견 엘리트 등이 증가하지만, 억압적 식민통치의 질서 위에서 생활하는 이상, 그들 식민자가 피식민자를 대하는 태도에는 나아질 것이 없었다. 단순한 “풍속․습관․문화의 차이에 지배․피지배의 관계”가 씌워졌을 때, 그것을 차별의식으로 발전하고, “피지배자를 인간이라고 느끼지 않게”되는 단계로까지 발전하고 만다.34) 이러한 식민지 일본인의 이른바 ‘帝國意識’은 식민통치의 전 기간에 걸쳐 지속되었다.
사실상, 조선인들이 일상에서 직면하는 일본인의 방약무인한 언행과, 그로 인해 조선인들의 일본식민통치에 대한 이미지의 형성은 권력측에게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여졌다. 1933년 朝鮮憲兵隊司令部에서 발간한 朝鮮同胞에 대한 內地人 反省資錄은 이러한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조선헌병대의 정보망을 통해 입수된 ‘일본인의 조선인에 대한 몰상식한 언동’ 68건을 수록하고 있는데, 조선통치와 內鮮融和를 저해하는 가장 큰 요인은 “소위 공산주의사상도 사회주의기구도, 獨立思念도 아닌, 무사려 무분별한 내지인의 경솔한 언동”이라 지적하고 있다.35)
그러나 식민지의 지배민족으로서 군림하는 한편으로 그들은 제국 본국으로부터 소외된 존재이기도 했다. 재조일본인은 호적법상 분명한 ‘내지인’이었지만, 조선에 거주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內地法律’, 곧 帝國憲法의 직접적용을 받지 못했고, 따라서 帝國議會에의 참정권조차 주어지지 않는 존재였다. 그들은 일본과 조선 사이의 ‘境界’에 서 있었다. 이러한 면들은 그들에게 재조일본인 특유의 正體性을 형성시켰다.
한편으로는 본국으로부터의 소외에 대한 불안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에 대한 애정과 집착이라고 할 만한 감정이 형성되었다. 그것은 대륙으로 뻗은 신천지 조선을 정복한 지배민족으로서의 성취감과 자부심, 異域의 문화에 대한 일본적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과 이국정서적인(exotic) 만족감, 기존의 사회․인간관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구축한 공간에 대한 애착 등이 혼재되어 있는 것이었다.
식민자 1세대의 대부분이 조선에서 삶을 영위하면서도 마음 속에는 언제나 고국 일본을 그리며, 언젠가는 錦衣還鄕할 것을 꿈꾸고 있었지만, 현실적인 삶의 조건은 이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조선의 토지는 이미 식민자들에게는 삶의 터전으로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內地’로 돌아간다는 것은 그들의 願望처럼 쉽사리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농업․어업 入植者들은 그 존재 자체가 해당지역의 토지에 緊縛되어 있었거니와, 상업이나 공무 및 자유업 종사자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구분
연도 |
합격자 총수 |
在朝日本人 |
朝鮮人 | |||||||
합격자수 |
發令先 |
합격자수 |
發令先 | |||||||
朝鮮 |
內地其他 |
未詳 |
朝鮮 |
內地其他 |
未詳 | |||||
1927(昭和2) |
295 |
1 |
1 |
0 |
0 |
0 |
0 |
0 |
0 | |
1928(昭和3) |
371 |
1 |
1 |
0 |
0 |
0 |
0 |
0 |
0 | |
1929(昭和4) |
336 |
3 |
2 |
1 |
0 |
1 |
1 |
0 |
0 | |
1930(昭和5) |
204 |
2 |
2 |
0 |
0 |
0 |
0 |
0 |
0 | |
1931(昭和6) |
252 |
3 |
3 |
0 |
0 |
3 |
2 |
1 |
0 | |
1932(昭和7) |
238 |
2 |
2 |
0 |
0 |
2 |
2 |
0 |
0 | |
1933(昭和8) |
326 |
3 |
2 |
1 |
0 |
14 |
13 |
1 |
0 | |
1934(昭和9) |
302 |
4 |
4 |
0 |
0 |
15 |
15 |
0 |
0 | |
1935(昭和10) |
265 |
4 |
4 |
0 |
0 |
6 |
5 |
0 |
1 | |
1936(昭和11) |
194 |
2 |
2 |
0 |
0 |
4 |
3 |
1 |
0 | |
1937(昭和12) |
144 |
4 |
4 |
0 |
0 |
6 |
6 |
0 |
0 | |
1938(昭和13) |
197 |
1 |
1 |
0 |
0 |
6 |
3 |
3 |
0 | |
1939(昭和14) |
214 |
1 |
1 |
0 |
0 |
14 |
12 |
1 |
1 | |
1940(昭和15) |
238 |
5 |
5 |
0 |
0 |
12 |
10 |
0 |
2 | |
1941(昭和16) |
229 |
1 |
1 |
0 |
0 |
9 |
7 |
1 |
1 | |
1942(昭和17) |
411 |
3 |
3 |
0 |
0 |
13 |
9 |
1 |
3 | |
1943(昭和18) |
547 |
9 |
6 |
3 |
0 |
23 |
4 |
11 |
8 | |
計 |
4,763 |
49 |
44 |
5 |
0 |
128 |
92 |
20 |
16 |
※ 출전: 戰前期官僚制度硏究會 編/秦郁彦 著, 戰前期日本官僚制の制度․組織․人事(東京大學出版會, 1981)에서 재정리.
※ 재조일본인은 조선에서 專門學校나 大學을 졸업한 사람을 추출. 따라서 재조일본인으로서 일본 ‘內地’의 高校(專門學校), 大學 출신자는 집계에서 누락되었음.
조선총독부의 경우, 소수의 親任官(大臣級)이나 勅任官(次官, 局長級)을 제외하면, 관리 대부분의 인사이동은 조선총독부 및 그 所屬官署 내의 범위에서 이루어졌다. 곧, 관료의 경우에도 일단 식민지에 발을 들여 놓은 이상, 대부분은 식민지에서 관료생활을 마감하게 되는 인사행정의 구조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표 1>은 조선 식민지시기 전기간(수치가 나타나는 것은 1927년~1943년)의 高等文官試驗 行政科 합격자 중 재조일본인과 조선인을 정리한 것이다. 이 통계에서 보면, 조선인 합격자 총 128명 중 약 71.9%, 재조일본인 합격자 총 49명 중 약 89.8%에 이르는 수가 조선으로 부임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인, 조선인을 막론하고 조선에 緣故가 있는 사람은 원칙적으로 조선에 근무지를 발령한다’36)는 관행적 인사원칙에 따른 것이었다.
재조일본인 1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들은 결국 조선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했다. 식민지 출생 2세들의 성장과 함께 재조일본인 사회는 일종의 세대교체에 직면하게 된다. 2세들의 사고와 행동방식은 그들의 부모세대와는 현격한 차이를 드러낸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 자체가 변화한 것이다.
“조부의 시절에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사회가 명백히 구별되어, 언어의 측면에서도, 조부가 雇員으로서 총독부에 들어갔을 무렵에는, 통역관으로부터 정기적으로 조선어를 배웠다고 한다. 조부는 간단한 조선어는 말할 수 있고, 한글 문자도 어려움 없이 읽는 듯하다. 조부들은 조선의 사회를 강하게 의식하면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언제나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일본 內地에서 쫓기듯이 건너온 가난한 자신들에게도, 지배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 우월감과, 조선인을 지배하기 위해, 자신들이 최전선에 서 있다고 하는 자부심이 식민지 1세인 조부들의 의식에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는 것은 용이하게 상상할 수 있다.
어머니의 세대는 다르다. 태어날 때부터, 장애 없이 일본어가 통하는 ‘자신들의 경성’이었다. 이미 조선인은 자신들을 위협하는 존재가 아니며, 어머니들 식민지 2세에게 있어서, 그들은 이미 하나의 ‘풍경의 일부’로까지 되어 있었다.”37)
식민지의 생활 공간은 그들이 일본의 전통과 문화, 일본식의 예의범절을 익힐 만한 기회를 제공해 주지 않았다. 부모세대의 ‘고향’이란, 이들 2세들에게는 ‘內地 어딘가에 있는 原籍地’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했고, 한번 만나본 적 없는 친척들에 대해 혈연적 친족의식을 가진다는 것도 바라기 어려웠다. 심지어 2세들 사이에서는 ‘재조일본인 方言’과 같은 것이 형성되어 사용되기까지 했다.38)
이러한 2세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부모세대의 걱정어린 감정이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부모세대들에게 식민지 출생의 2세들은 일본인도 조선인도 아닌, 일본과 조선 사이에서 민족적 아이덴티티를 상실한 존재로 비추어졌으며, 이 새로운 세대는 일본적인 것을 중시하는 부모세대에 의해 ‘조선아이(朝鮮っ子, 朝鮮っ兒)’라는 호칭으로 불렸다. 재조일본인 여성의 다음과 같은 회고는 ‘내지 출신’의 일본인의 눈에 비친 ‘조선아이’들의 부정적 측면을 보여준다.
[...]풍토가 성격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아요. 내가 여학교 시절에 내지에서 전임해 온 젊은 여자 선생님이 ‘식민지의 인간’이라는 말로 우리를 야단쳤기 때문에 우리도 불쾌했어요. <‘식민지의 인간’이 어떻다는 겁니까?> “여러분은 너무나 단순하고 너무 밝고 아주 멍하고... 더군다나, 조잡하다”고 너무 여러번 말씀하셨기 때문에 좋은 기분이 아니었는데 확실히 그런 면도 있는 것 같아요[...]39)
물론 이것은 식민지 이주자에 대한 본토 출신의 우월감에 근거한 일종의 선입관일 수도 있다. 다만, 여기에 묘사된 ‘조선아이’들의 모습이 사실인가 아닌가를 떠나서, 가령 이것이 순전히 선입관이라 하더라도, 본토 출신의 교육자가 가지고 있는 식민지 출신자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엿보는 데는 무리가 없다. 또한 재조일본인 2세들이 자신들에게 향해지는 본토 출신자들의 시선을 통해 스스로의 아이덴티티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재조일본인 2세 중에서는 자신들의 환경과 존재에 대해 적극적인 가치부여를 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다소간 우려와 경멸의 어감을 담고 있는 ‘조선아이’란 호칭을 스스로 받아들이며, ‘조선아이’로서의 자아를 확립하려 했던 것이다. 재조일본인 2세로서, 초기부터 녹기연맹의 운동을 주도한 모리타 요시오(森田芳夫)는 자신의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찾아 나서고 있다.
나는 자신의 原籍이 어디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쓴웃음짓지 않을 수 없다. 오카야마(岡山)라고 대답은 한다. 그러나 나는 오카야마에 간 적이 한번도 없다. 아버지는 일찍부터 조선에 와 살았고, 오카야마에는 먼 친척들이 몇 있을 뿐이다. 아버지의 墓도 조선에 있다.
나는 소년 시절을 조선의 시골에서 보냈다. 중학 시절 이후는 경성에서 살고 있다.
고향의 추억, 어린 시절의 추억, 모두 조선이다.
‘내지에 돌아간다’고 조선에 와 있는 내지 사람들은 말한다. 나에게는 ‘내지에 간다’는 기분은 들어도 ‘내지에 돌아간다’는 기분은 들지 않는다. 내가 돌아갈 곳은 조선 밖에는 없다.40)
단지 고향에서 떨어져 있다는 사실로 언제나 불안을 안고 살아가던 부모세대와는 달리, 조선을 자신의 공간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지’에 대한 귀속의식을 떨쳐 내는 것은 ‘조선아이’로서 자아를 확립하는 첫 단계였다.
모리타는, 전통을 모른다는 것, 일본의 역사적 유산으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것을 ‘조선아이’의 결점으로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여기서 ‘조선아이’의 아이덴티티를 찾아 내려 한다. “전통을 모르기 때문에, 참으로 올바른 것을 파악할 수 있으며, 因襲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있기 때문에, 비판과 취사선택이 가능하다”41)는 적극적 입장이 도출되는 것이다.
“전통을 떠난 자유롭고 신선한 사고방식”이 가능한 조선에서는, 각지방의 방언이 한데 섞여 ‘재조일본인 방언’과 같은 것을 형성하고 이것은 표준어에 가까운 것이 된다고 한다. 또한 가정의 요리, 연중행사, 풍속습관도 자연히 각 지방의 것이 종합되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다고 보았다.42) 이런 까닭에 섬나라 근성과 인습을 벗어버린 새로운 일본문화는 조선에서 건설될 것이며, 이것은 일본문화가 세계화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라는 인식으로 발전한다.
“우리들은 조선에서 태어나 조선에서 자란 것을 비통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아니 그것을 큰 자랑으로 삼자. 그리고 장차 세계화되려 하는 일본정신 飛躍의 第一步의 땅에서, 우리들이 하지 않으면 안될 聖業에 매진하자.”43)
녹기연맹은 그 출발부터 이러한 재조일본인 특유의 상황과 결합되어 있었다. 식민지 거주 일본인들에게 國體意識을 각성시키고, 2세들에게 문화적 전통을 습득시키고자 하는 재조일본인사회의 요구가 녹기연맹 활동의 한 축이었다면, 다른 측면에서, 모리타 요시오가 내심을 토로한 것과 같이, 本國의 일본인과는 구별되는 ‘在朝日本人으로서의 아이덴티티’가 이들의 결합을 강고하게 만들어 주는 다른 축이었다.
녹기연맹에 참여했던 인물들은 대개 京城에 在住하는 재조일본인 유력계층이었다. 그들은 재조일본인 사회를 이끄는 입장에 서 있었고, 나아가 조선사회의 일반 대중에 대한 지도를 自任하고 있었다. 녹기연맹이 표방했던 ‘社會敎化’란 이같은 사정을 배경으로 하여 진행되었다.
2. 녹기연맹의 결성과 활동
녹기연맹은 京城帝國大學의 조그만 써클에서 출발했다. 豫科의 化學敎授인 쯔다 사카에(津田榮)는 第一高等學校, 東京帝大 학생시절부터 日蓮宗에 깊이 빠져 있었는데, 그가 직접적으로 관계했던 것은 일련종의 일파인 國柱會였다.44) 1914년 타나카 찌가쿠(田中智學)에 의해 창시된 在家 신도 중심의 敎壇인 國柱會는 國體精神의 宣揚을 내세우며 발족하여,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 일본의 대외침략에 호응하여 공공연히 ‘침략적 태도’를 내세우는 등, 국가주의적 성격이 농후한 단체였다.45)
國柱會의 조선상륙은 이미 1894년 그 前身인 立正安國會의 이토오 찌레이(伊東智靈)가 인천을 통해 입국, 조선국왕에게 올리는 타나카 찌가쿠의 편지와 저서 佛敎夫婦論을 전달한 데서부터 시작된다.46) 이토오는 1904년 다시 조선에 입국하여 인천에 정착, 잡화상을 경영하며 포교에 힘쓰던 중, 1909년 鑛産業 투자의 실패와 잡화상 화재 등을 겪고 漢城으로 활동공간을 옮겨 立正安國會 京城布敎所를 설립하였다.47) 日蓮宗系의 護國寺와 합동으로 本化佛敎硏究同志會를 조직했다가, 1914년 11월 일본 본토에서의 國柱會 출범에 발맞추어 同志會를 國柱會 京城局으로 개칭하고, 이듬해 하쯔네쵸오(初音町) 200번지에 國柱會館을 신축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48)
그러나 1918년 2월, 이토오의 죽음과 함께 조선에서의 國柱會 활동은 상당 기간 休止期를 맞이하게 된다. 이토오의 死後 여성조직인 國柱婦人會(1918년 10월), 청년조직 靑年護國團과 산하의 아동조직 護國少年團(1919년 7월) 등을 비롯, 1921년 10월에는 하즈모토 유키야스(筈元行安) 등 京城醫專生들에 의해 京城天業靑年團이 조직되기도 했으나 모두 오래지 않아 유명무실해져 버리고 말았다. 1923년 무렵에 이르러서는 國柱會 京城局 활동이 극도의 침체에 빠져, 회합의 출석자가 10명을 채우지 못하는 상태가 이어졌다고 한다.49)
1924년 4월, 쯔다 사카에가 京城帝國大學 豫科의 화학교수로 부임한 것은, 國柱會 운동에 부흥의 전기가 되었다. 이듬해인 1925년 1월, 豫科 立正會를 조직하였고, 2월 11일 紀元節을 맞아 京城天業靑年團 復興式을 거행하였다. 이후로 京城帝大의 立正會에 소속된 학생활동가들이 운동의 주력을 담당하게 된다. 1928년 4월에 결성된 ‘妙觀同人의 모임’은 國柱會 및 京城天業靑年團 내의 혁신적인 학생활동가들의 움직임이 가시화된 것이었다.50) 이들은 妙觀文庫를 설치하여 기관지 妙觀, 綠旗 아래에서(綠旗の下に)를 발간하는 한편으로 妙觀同人硏究所(1931년) 등을 조직하는 등, 이후 綠旗聯盟으로 이어지는 이념적 기초를 형성해 나갔다. 당시 경성제대에 재학중이던 쯔다 사카에의 동생 쯔다 카타시(津田剛, 철학과), 스에 모쿠지로오(須江杢二郞, 의학과), 모리타 요시오(森田芳夫, 사학과) 등, 妙觀同人의 주요 멤버들은 이후 녹기연맹의 중추를 형성하게 된다. 같은 해 11월에는 쯔다 사카에의 妻 세쯔코(節子)에 의해 여성을 대상으로 한 日曜會, 야마자토 히데오(山里秀雄)를 중심으로 明治靑少年會가 결성되기도 하였다.51) 운동의 확장, 학생활동가들의 사회진출과 함께 1931년에는 기존 妙觀同人會의 조직을 재편하여 綠旗同人會로 재출발하였다. 그러나 당시까지도 회원수 30명 남짓되는 조그만 조직에 지나지 않았다.52)
운동주체의 형성과 더불어 이루어진 또 하나의 움직임은 日蓮主義 운동의 횡적 연대였다. 1930년 3월 京城 國柱會館에서 거행된 제1회 日蓮主義修養會에 大邱, 元山, 群山 등지의 國柱會系 인사들이 참가함으로써 전국적 연대를 결의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1930년 9월, 쯔다 사카에와 國柱會 京城局, 天業民報 大邱支局, 大邱天業靑年團의 조직 대표자들이 모여 全鮮綠化聯盟을 결성하는 것으로 이어졌다.53) 妙觀文庫에서 발행해 오던 부정기 간행물 녹기 아래에서는 全鮮綠化聯盟의 기관지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며, 이듬해 8월부터는 월간으로 정례화되어 발행되었다.54) 그밖에 1931년 5월의 全鮮日蓮主義聯盟, 같은 해 11월의 全鮮國體主義學生聯盟(기관지로 學生綠旗 발간)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전국적 연대를 모색하였다.55)
비록 ‘종교수양’과 ‘사회교화’를 표면에 내걸고는 있었지만, 일련종, 특히 국주회 계통은 일본불교의 흐름 중에서도 국가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띠는 흐름이었다는 것을 고려할 때, 이들의 활동이 전혀 정치적 성격을 탈각한 종교수양에 국한되어 있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말하자면 이들의 종교수양 및 사회교화 자체가 국가주의적 이념의 학습과 보급, 그리고 체계화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이들이 스스로의 상징으로 삼았던 ‘綠’이라는 것의 의미를 생각한다면 이들이 지향했던 바가 명확히 드러난다.
‘綠’을 운동의 상징으로 삼은 것은 田中智學의 國柱會 운동에서부터 확인된다. 1920년 9월, 國柱會本部가 기존의 월간잡지 毒鼓를 개편하여 일간신문 天業民報를 창간하였는데, 녹색의 신문용지를 사용하여 ‘녹색 신문’ 또는 ‘綠報’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綠’에 대해 “희망의 색, 蘇生의 색, 日本國體의 意氣, 日蓮主義의 標色”이라는 의미부여를 하고 있다.56)
이같은 ‘綠’의 이미지는, 사회운동이 전성기를 맞이하는 1930년대 초의 綠旗同人會 시기에 이르러서는, 공산주의, 피, 투쟁 등을 상징하는 ‘赤’에 대해, 그리고 아나키즘, 공포, 죽음 등을 상징하는 ‘黑’에 대항하는 日本主義의 표상으로서 보다 적극적으로 전면에 내세워지기에 이른다. 이들은 ‘綠’이 ‘충만한 생명력’, ‘절대평화’, ‘雄大深遠’을 표징한다고 설명하고 있다.57)
이들의 이념적 지향은 이른바 ‘昭和維新’을 부르짖으며 쿠데타를 기도했던 일본 내의 국가주의적 흐름과 대동소이한 것이었다. 스스로가 밝히고 있는 바, “기존의 국가개조운동이 폭력을 주요한 수단으로 삼았던 것에 비해, 이들은 社會敎化를 통해 그 목적을 달성하고자 한다”는 정도가 차이점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녹기연맹의 이러한 사상적 경향은 활동 초기에 경찰로부터 위험시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58)
녹기동인회의 부정기 기관지 綠人의 발간 등을 통해 사상적 통일성을 확보한 이들은, 1933년 2월 11일, 기존의 綠旗同人會, 綠旗硏究所, 共濟部, 全鮮綠化聯盟, 全線國體主義學生聯盟 등을 산하에 통합하여 綠旗聯盟으로 출범하였다.59) 약 50여명의 회원으로, 강령과 사업내용을 확정하고 상근직원을 두는 한편으로, 본부 건물60)을 확보하고 조직체계를 정비하였다. 성인부, 부인부, 학생부61) 등의 체계를 마련하여 다양한 계층의 회원을 대상으로 한 체계를 마련하였으며, 여학교를 졸업한 재조일본인 2세를 대상으로 하는 1년제 교육기관 淸和女塾을 개설하였다.
녹기연맹에서 가장 눈여겨 보아야 할 조직은 綠旗硏究所이다. 1931년 ‘妙觀同人硏究所’로 출범하여 ‘綠旗同人硏究所’(1931년 말), ‘綠旗硏究所’(1933년), ‘綠旗日本文化硏究所’(1938년) 등으로 改稱되며 활동한 이 연구소는 글자 그대로 ‘녹기연맹의 腦髓’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日蓮主義 이론연구의 한편으로, 녹기연맹 내부의 각종 연구회를 지도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
녹기연맹의 이같은 조직체계 정비는 상당 부분 ‘內地’에서 이루어진 國柱會 운동의 先例에 기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연구소(1897년 獅子王硏究所)와 자료실 및 출판기관(1897년 獅子王文庫) 설치, 기관지 발간(1897년 妙宗, 1912년 國柱新聞, 1919년 毒鼓), 후생․수익사업체 운영(1905년 醍醐館, 1917년 國柱産業株式會社), 나아가 의료기관 설치(1919년 獅子王醫院)에 이르기까지 國柱會의 운동과정을 통해 형성된 조직 체계․운영상의 경험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녹기연맹의 활동이 획기적 도약의 계기를 마련한 해는 1936년으로, 월간잡지 綠旗를 발행하는 한편, ‘錄의 生活運動’을 제창하였다. 녹기라는 매체를 통해 이른바 ‘사회교화’, 곧 녹기연맹이 표방하는 바의 국가주의 이데올로기 작업을 보다 확대된 규모로 수행할 수 있게 되었으며, ‘녹의 생활운동’을 통해서는 ‘일련주의자의 소규모 써클’이라는 기존의 모습으로부터 벗어나, 사회적․대중적 영향력을 미치는 실천의 단계로 나아가게 되었다. ‘녹의 생활운동’이란 “일본국 고유의 국체정신에 기초하여 동양 및 서양의 문화를 종합하고 금후 아시아와 세계를 지도함에 만족해야 할 일본인의 생활을 창조하고자 하는 신생활원리”62)라는 것이 이들의 설명이다. ‘녹의 생활운동’은 일련주의 이념을 일상생활의 문제에까지 확대적용시킨 것이었다.
이 시기까지의 활동의 중심은 재조일본인 및 그 2세들에 대해 국체정신을 함양시키고 일본인으로서의 자각을 일깨우는 데 놓여 있었다. ‘기원절 봉축 대학․전문학교 학생 대강연회’(1936년)를 개최하여 학생층을 대상으로 일본주의의 가치관을 강조하는 한편, 식민지 청년층의 개인주의적․소비적 생활태도를 비판63)하는가 하면, 여성을 대상으로 淸和女塾을 개설하여 일본문화와 예의작법 등에 대한 교육을 하기도 하였다.
Ⅱ. 녹기연맹의 내선일체운동과 조선인
1. 내선일체운동으로의 방향전환
1937년 1월, 한사람의 조선인이 녹기연맹에 가입한다. 그리고 이것은 이후 녹기연맹의 활동을 획기적으로 뒤바꾸는 전기가 된다. 조선인 내선일체론자 玄永燮64)의 가입이었다. 아나키즘운동으로부터 전향한 이 조선인 論客은 녹기연맹에 새로운 운동의 방향과 논리를 공급하는 한편, 그 자신 녹기연맹을 발판삼아 1930년대 후반기 이후 대표적인 조선인 ‘內鮮一體論者’로 활약하게 된다. 그의 존재가 녹기연맹의 활동을 이해하는 데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여기서 전향 이전까지의 행적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현영섭은 1906년 서울에서 玄櫶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현헌은 일본의 한국병합 후 京城高普 및 京城女子高普 敎諭를 역임했으며, 1921에는 學務局 視學官 및 學務局 編修官을, 그리고 1931년부터는 江原道 參與官을 거쳐, 1934년 中樞院 參議에 이른 인물이었다.65)
-현영섭은 1920년 京城第一高等普通學校에 입학했는데, 그때 이미 마르크스나 크로포트킨 등의 사회주의․아나키즘 서적을 원서로 읽는 등,66) 좌익사상에 심취해 있었다. 1925년 高普 졸업 후 쿄오토(京都)로 건너가 조선인 노동조합에서 활동한 바 있으나,67) “노동에도 견디지 못하고, 또 노동운동의 실제 체험을 보고 환멸을 품”고서 ‘완전히 패배해서’ 조선으로 돌아오고 말았다고 한다.68)
이듬해인 1926년 京城帝國大學 豫科에 입학했다. 대학 시절에는 아나키스트로서 申南澈 등 마르크스주의 학생들과 논쟁을 벌이곤 했다고 한다.69) 그가 운동의 표면으로 드러난 것은 1929년의 光州學生運動이었다. 鄭麟澤, 李鍾駿, 曺圭宣 등과 함께 경성제대에서의 운동을 주도했다.70) 이밖에 1930년 金容讚, 李錫圭, 昇黑龍 등과 함께 二十世紀書房을 창립하여 아나키즘 사상운동의 근거지로 삼았다. 二十世紀書房은 近代思想硏究會(에스페란토어 강습)와 自由聯合新聞 경성지국 업무를 겸하고 있었다.71)
1931년 3월 京城帝國大學 法文學部 文學科(영문학전공)를 졸업한 후, 7월 17일 元心昌을 따라 중국에 渡航, 南華韓人靑年聯盟에 가맹하고, 연맹원의 교양, 외국문헌의 번역, 기관지 사설의 집필, 내외에 있어서 운동상황의 소개 및 연락 등을 담당했다. 같은 해 11월 13일 일본에 잠입, 元心昌의 명에 따라, 토오쿄오의 張祥重, 스즈키 야스유키(鈴木靖之)와의 연락을 맡고, 또한 샹하이(上海) 체재중 전후하여 3회에 걸쳐 연맹원 元心昌, 白貞基를 통해, 운동자금 150弗 정도를 제공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이때 한편으로는 토오쿄오부(東京府) 學務部 社會課에서 臨時雇로 일하고 있었다.
1932년 7년 1월 조선으로 돌아와 샹하이로부터 연락사명을 띠고 파견되어 있던 郭興善에게 李錫奎를 소개, 샹하이와의 연락방침을 협의했다. 1933년 12월 다시 토오쿄오로 돌아가서는, 東興勞働同盟員 梁一童, 타케우찌 테루요(竹內てる代), 카미야 마사시(神谷暢) 등과 연락하고, 1934년 9월경 아나키스트계 단체 기관지 黑色新聞에 獄死한 독일 아나키스트 뮤젬의 「노동자의 노래」를 번역투고하는 등, 이면에서 아나키즘의 선전선동에 복무했다.72)
1935년 11월 20일 警視廳에 의해 검거되고, 12월 23일 治安維持法 위반으로 送局73)되었다가, 이듬해 초,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체포 당시 이미 내면적으로는 ‘전향’의 입장을 굳히고 있었던 것이 참작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그의 아버지가 중추원 참의를 맡고 있는 고위관직자라는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현영섭의 사고변화와 전향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전향 이전 단계 및 전향과정에서 쓰여진 저작물을 비교․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전향 이전 시기, 특히 아나키스트 활동기의 사고를 엿볼 수 있는 黑色新聞 등 운동단체에서 발간된 매체를 현재로선 찾아볼 수 없으며, 기타 합법적 출판물에 발표된 저작도 그리 많지 않은 형편이다.74) 여기서는 전향 이후의 술회와, 전향과 검거에 이르는 기간에 발표된 몇 편의 논설을 통해 그의 사고변화 과정을 추적해 보기로 하겠다.
현영섭은 자신이 아나키스트가 된 심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내가 생각한 아나키즘은 와일드의 「사회주의 하의 인간정신」에 표현되고 있는 예술적 아나키즘이었다. 모파상의 수필 「물 위」에 나오는 사상, 톨스토이의 문명비평에 보이는 사상, 귀이요의 도덕론에 보이고 있는 자유사상, 입센의 희곡에 나오는 개인주의, 휘트먼의 시나 에머슨이나 소로우의 사상, 러스킨, 모리스, 스티르너의 사상, 프랑스 문학정신(라브레, 졸라, 지드)--이들의 사상에 매료되었다. [...] 아나키스트라고 선언하는 사람들에게 깊이 共鳴을 느꼈던 것은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나키즘이란 「잠시의 행복」에 나오는 주인공과 같이 사회의 부패에 대한 항의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건설적 가치는 적은 것이다. 일체의 국가주의자(나는 공산주의자도 그 중에 포함하여 생각했다. 스탈린은 국가주의가 아닌가 하고)가 권력남용에 빠지지 않도록 감시하는 것이 아나키즘이라고 해석했다. 나의 아나키즘이라는 것은 철학적 허무주의였다. 윤리적 개인주의였다. 아나키즘을 실천화한 길드 사회주의, 생디칼리즘, 농민자치주의에 기대를 걸지 않고 있었다. 일찌기 푸르동(프랑스의 아나키스트)을 번역했던 신메이 마사미찌(新明正道) 씨는 ‘아나키즘은 박물관적 존재’라고 했지만, 사회사상에 있어서 아나키즘의 위치는 인식하고 있었다. 마음 약한 아나키즘 동정자였다.”75)
전향 이후의 사후적 회고라는 점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그가 아나키즘에 경도된 것이 개인의 자유와 개성의 중시라는 사상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바쿠닌, 크로포트킨 類의 사회변혁, 폭력투쟁보다도, 스스로가 밝히고 있듯, 막스 스티르너類의 개인주의 달성을 至上價値로 삼고 있는 입장에 경도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실제로 자신이 ‘예술적 아나키즘’의 典範으로 든 오스카 와일드의 「社會主義下의 人間精神(The Soul of Man under Socialism)」을 新興 7호(1932년 12월)에 번역․게재하기도 했다. 이 글에는 짧은 역자서문(譯序)이 붙어 있는데, 집필일자가 1932년 10월 8일이라 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해외에서의 활동에서 잠시 돌아와 경성에 머물던 시기, 즉 조직활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있던 시기에 집필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글에서 그는 “현재와 如한 사회주의만으로는 부족하다. 개성 자아의 요소를 무시한 사회주의는 실패한다”는 오스카 와일드의 논지를 빌어, 사회주의에 개성존중이 缺落되어 있음을 비판한다. 나아가 “개인의 자유와 책임을 期치 아니하고 막연하게 사회의 外的 환경만 변혁하면 낙원이 오는 줄로 아는 사람들은 결국은 一人의 최고독재 하에서 束縛밧는 생활을 하고야 만다”고 하여 소비에트의 사회주의체제와 조선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76)
현영섭 자신의 기술에 의하면, 내면적인 전향이 이루어진 시기는 1935년 봄 무렵이었다. 일본에서의 생활경험과 서구인에 의한 日本硏究書를 통해 ‘일본을 다시 보게 될 기회’를 마련하게 되었으며, 관공서에 근무하는 친일적 성향의 조선인들로 구성된 ‘朝鮮問題硏究會’에 참여함으로써 결정적인 전환이 이루어졌다고 한다.77)
朝鮮日報에 1935년 11월 19일(警視廳에 검거되기 전날)부터 11월 29일까지 8회에 걸쳐 연재된 「個性擁護論--그것의 現代的 意義에 대하야」는 검거 직전에 씌여진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은 저명한 문학가와 사상사를 끌어대며 ‘현대와 개성’, ‘우리들과 개성’, ‘개성과 사회’, ‘개성의 생물학적 기초’ 등 衒學的 논의를 전개하지만, 장황한 서술에 비해, 정작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가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내면적 전향’ 이후에 집필된 이 글에서도 개성의 강조, 조선에서의 개성의 박약함에 대한 비판 등은 충분히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개인의 존재, 개성에 대한 중시라는 측면은 후일 내선일체운동에 가담한 이후에도 일관되게 이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석방 이후인 1936년 여름, 이전의 사고와는 일정한 단절이 일어났음을 보여주는 글이 每日申報에 1936년 8월 1일부터 8월 3일까지 3회에 걸쳐 게재된 「한개의 反省」이다. 이 글에서 눈에 띄는 것은 조선 문화계가 기존에 안고 있던 병폐로서 ‘사상의 급진성’을 들고, 그것을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다.
“朝鮮에서 急進性은 貪慾, 疑惑, 嫉妬, 憎惡, 誤解, 利己, 暴力等의 雜然한 奇妙한 混合物에 不過하다는 것을 認識할 必要가 잇다. 滑稽에 갓가운 時代遲의 思想이다. 이 抽象的思想의 正價를 究明함으로써 우리들은 心情의 健康性과 明朗性을 回復할수 잇다. 우리들이 現實을 眞實로 把握한다면 亞細亞, 東洋이라는 것이 훨신 生命力잇는 事物로서 眼前에 낫타날것이다. 內省한다면 內省할수록 階級이 아니라 人間 或은 人格이라는 것이 根本的이라는 것을 自覺하게 될것이다.”78)
이어서 그는 스스로도 사상적 급진성과 서구문화에 중독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었고, 이에 대한 반성과 함께 “抽象과 思辨”에서 벗어나 “現實을 正確히 判斷하고 處理”할 것을 제기한다. 그리고 그 한가지 방법으로서 “우리들 生活의 根本動力인 儒敎思想을 徹底히 硏究”할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79)
각각 검거와 석방 전후로 집필된 이 두 편의 글을 통해, 최소한 현영섭의 의식에서 큰 진폭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또한 이 두 편의 글을 통해 일관된 변화의 연속성을 파악하기에는 매우 어렵다. 「個性擁護論」에서 강조했던 바의 개인․개성에 대한 철저한 가치부여는 「한개의 反省」에서는 다소간 부정되는 듯 하다가, 이후 내선일체의 논리 속에서 다시 살아나게 된다. 또한 「한개의 反省」에서 과거에 스스로가 부정해 왔던 유교사상에 잠시 주목하며 전통적 가치를 받아들이는 듯 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오래지않아 내선일체의 논리 속에서 다시금 철저히 부정되고 만다.
결국 이 시기의 현영섭은 현실운동으로서의 아나키즘을 포기한 이후 겪게 된 극심한 가치관의 혼란과 분열,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모색기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個性擁護論」이 자신이 가진 모든 지식을 동원해 현란하고 현학적 수사로써, 과거 아나키즘에서 구했던 개인주의의 가치를 어떻게 해서든 구출해 보려는 몸부림이었다면, 「한개의 反省」은 그 對極의 逆偏向으로서 과거의 사상과 활동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과 현실 적응을 모색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극단의 편향으로 흘렀던 이 두 입장은, 이후 前者의 개인주의에 대한 강조는 개인의 존재에 근거한 내선일체론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後者의 ‘동양사상의 연구’와 ‘思辨에서 現實로’의 주장은 각각 아시아주의․일본주의의 수용과 내선일체의 실천이란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80)
좌충우돌의 모색을 통해 최종적으로 도달한 입장은 朝鮮及滿洲 1936년 9월호에 발표된 「정치론의 한토막(政治論の一齣)」이란 글을 통해 표명되었다. ‘조선어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副題가 붙어 있는 이 글에서 그는, 개인적 경험을 前面에 내세움으로써 다소 산만하고 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후 전개될 내선일체론의 원형을 보여주었다. 그의 출발은 전향 이후 그가 겪게 된 개인적 고민으로부터 시작한다.
“나는 계급적 사상을 청산하고 일본의 公民이 되려 한다. 그런데도 내가 매일 고뇌하는 것은, 내가 조선인이라는 특수관념에서 脫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조선인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서 생활하고 싶은 것이다.”81)
그러나 이것이 용이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조선어의 존재가 허락되는 한 조선인적 사상경향은 존재”하기 때문이며, 이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서는 “먼저 조선어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언어를 동일하게 하여 감정적 융합을 꾀하고”, 이를 통해 “內鮮人에 대해 출발의 평등, 기회의 균등, 공평한 경쟁”82)을 부여할 것을 요청했다. 이를 위한 구체적 방책으로서, 학교에서 조선어교육을 폐지할 것, 조선어 신문에 國語(日本語)欄을 마련할 것, 國語獎勵試驗을 실시하여 우수자에게 賃金上의 혜택을 줄 것, 內鮮結婚을 장려할 것을 제안하며, 이를 통해 조선인이 조선적인 일체의 것과 絶緣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내적 전향과 검거, 출소 이후의 치열한 모색을 거쳐 마침내 내선일체론에 도달한 현영섭은 녹기연맹에서 자신의 사상을 실현할 공간을 찾게 된다. 그가 녹기연맹에 가입하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발표한 「정치론의 한토막」이 녹기연맹 간부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을 것으로 추측하는 견해83)가 있으며, 경성제국대학 시절의 인맥관계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84)
이후로 녹기연맹의 운동은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게 된다.85) 綠旗 2-1(1937년 1월호)에 발표된 「조선인의 사상동향(朝鮮人の思想動向)」은 지상에 최초로 등장한 내선일체론인 동시에, 최초로 게재된 조선인의 글이기도 했다. 현영섭의 연맹 가입․활동을 일대 계기로 하여 녹기연맹은 내선일체로 운동방향을 확립하게 되는데, 1937년은 그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1937년 한해동안 현영섭은 綠旗 지상에 8편의 글을 발표, 녹기연맹에서의 내선일체론을 선도했다.86)
이러한 현영섭의 정력적인 문제제기에 호응하듯, 녹기연맹은 綠旗 지상을 통해 내선일체론 논의를 확산시켜 나간다. 綠旗 2-4(1937. 4)의 ‘朝鮮特輯’에서는 내선일체 논의와 함께, 조선의 불교, 조선왕조의 家系 등 조선문화와 전통에 대한 일본인측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기획물을 편성하고 있다. 여기서 다소 주목되는 것은, 內鮮間의 상호이해를 돕기 위해 마련된 것으로 보이는, 「조선인으로부터 내지인에게(朝鮮人より內地人へ)」, 「내지인으로부터 조선인에게(內地人より朝鮮人へ)」이라는 지면인데, 여기서 조선인측의 의견이 주로 차별의 폐지와 인격적인 대우를 요구하는 내용인 데 반해, 일본인측은 조선인측의 舊態를 반성할 것, 일본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할 것 등을 요구하고 있어, 내선일체 문제를 바라보는 相互間의 視角差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녹기연맹 내부에서 내선일체론이 논의되는 한편으로, 연맹은 조직적 변화를 겪는다. 1937년 5월의 제5회 총회에서는 ‘綠의 생활운동’ 제1차 3개년계획을 수립하는 한편으로, 규약개정, 그리고 부속기관 綠旗診療所 개설이 논의되었다.87) 조직의 확대와 활동내용의 다양화가 이루어지고, 그에 照應하는 형태의 규약개정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조직활동의 확대와 함께 나타난 현상이, 기존에 연맹을 주도해온 理事長 쯔다 사카에(津田榮)를 대신하여, 그의 동생 쯔다 카타시(津田剛)가 前面에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조직 내부에서 누구에게 지도권이 옮겨가는가 하는 차원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비교적 현실정치에 거리를 두고 있었던 쯔다 사카에에 비해, 쯔다 카타시는 다분히 정치지향적인 인물이었다.88) 쯔다 카타시의 浮上과 함께, 녹기연맹은 보다 직접적으로 정치적 활동에 진입하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현영섭을 연맹에 영입한 것, 그리고 그로 하여금 綠旗의 지면을 통해 내선일체론을 제기할 공간을 마련해 준 것, 모두가 쯔다 카타시의 헤게모니 장악 과정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재조일본인만을 교화의 대상으로 삼아 온 녹기연맹이, 조선인으로까지 그 대상을 확대하는 것, 그리고 현실정치적 색채를 강하게 띠는 사회운동에 새롭게 뛰어든다는 것은, 쉽게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조직의 정치․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쯔다 카타시와, 자신의 내선일체론을 실현할 공간을 찾고 있던 현영섭의 이해관계가 일치될 수 있었을 것이다. 현영섭에 의해 녹기연맹 내부에서 내선일체론이 제기되고, 쯔다 카타시의 후원 아래 이 논의가 조금씩 확산되어 나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의 발발은 녹기연맹 내부에서 논의의 폭을 넓혀가고 있던 내선일체론을 더욱 加速化시켰다. 전쟁발발 열흘 후인 7월 17일, 녹기연맹은 京城府 및 朝鮮․京畿道․京城敎化團體聯合會의 후원을 얻어 ‘北支事變大講演會’를 주최하는 등, 정세변화에 발빠르게 대처한 바 있는데,89) 이같은 정세변화에 힘입어 녹기연맹 내부에서도 내선일체론이 호응을 넓혀 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약 1년간 綠旗 지상에서 내선일체가 논의된 끝에, 마침내 내선일체론이 녹기연맹의 主力目標로 설정되었음을 말해주는 글이, 綠旗 2-11(1937년 11월)에 게재된 쯔다 카타시의 「내선일체론의 발흥과 우리들의 사명(內鮮一體論の勃興と我等の使命)」이다. 그는 이 글에서, 중일전쟁 이후 쏟아져 나온 내선일체론이 여러 갈래를 이루고 있고, 그 각각이 內地延長論, 內鮮融和論․自治論, 民族主義的 偏向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하고, 日本國體의 이해를 통해 이러한 편향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90) 이러한 일본국체의 자각을 통한 강력한 결합이 바로 녹기연맹임을 상기시키면서, “全朝鮮에 산재한 1천의 연맹원은 참으로 이 半島思想界의 역사적 전환기에 즈음하여 2천만 동포의 燈臺이자 眼目이 아닐 수 없다”91)라고 하면서, 향후 내선일체운동의 전개를 조직의 중심과제로 제시하기에 이른다.
2. 녹기연맹의 내선일체운동
1938년 이후 녹기연맹은 내선일체운동에 전면적으로 나서게 된다. 이번에도 그 선두주자는 玄永燮이었다. 1938년 1월, 그는 조선인의 나아갈 길(朝鮮人の進むべき道)을 출간하며, 자신의 내선일체론을 精練된 형태로 피력한다.92) 이후 한해 동안 녹기연맹의 내선일체운동이란, 사실상 현영섭과 그의 책에 대한 집중 지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綠旗 지상을 통해 광고는 물론, 독자들의 독후감을 연속으로 게재하였으며,93) 책의 홍보를 위해 연맹의 總主事 야마자토 히데오(山里秀雄)가 慶南․北 각지에 출장을 가기도 하는 등,94)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조선인의 나아갈 길은 일본 언론계의 泰斗 토쿠토미 소호오(德富蘇峰)가 東京日日新聞에 書評을 쓰기도 하는 등95)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발매 1년간 11판, 1만 4천부를 발행하는, 당시로서는 空前의 대성공을 거두었다.96)
현영섭의 성공에 발맞추어 綠旗 誌上에서도 내선일체론이 전면화되었다. 綠旗 3-3(1938. 3)은 ‘新朝鮮號’로 기획되어 「조선의 현단계와 녹기연맹(朝鮮の現段階と綠旗聯盟)」(쯔다 카타시), 「새로운 조선문화의 건설(新しき朝鮮文化の建設)」(모리타 요시오), 「신일본건설에 있어서 반도의 역할(新日本建設に於ける半島の役割)」(현영섭), 「내선일체와 언어의 문제(內鮮一體と言葉の問題)」(쯔다 사카에) 등의 글을 게재했다. 이후로도 「반도의 학생생활을 말하는 좌담회(半島の學生生活を語る座談會)」(綠旗 3-10), 「조선사람들의 생활을 말하는 좌담회(朝鮮の人達の生活を語る座談會)」(綠旗 3-11), 「新半島色: 벗을 말한다(友を語る)」(綠旗 4-3), 「내지인 청년에게 바란다: 조선인 청년으로부터(內地人靑年に望む: 朝鮮人靑年より)」(綠旗 4-9) 등, 中日戰爭 開戰, 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의 결성 등으로 내선일체의 슬로건이 고양되는 분위기 아래서 일본인의 조선․조선인 이해, 조선인의 일본이해, 나아가 양자간의 融和를 의도하는 특집물이 다수 편성되었다.
1938년 3월에 이루어진 직제개정은 내선일체운동에 전력하기 위한 조직체계의 재편이라는 성격을 띠었다. 가장 큰 특징은 조직이 사상보급 중심체제로 바뀌었다는 점으로서, 기존의 綠旗硏究所가 綠旗日本文化硏究所로 기능이 강화되었다.97) 한편 主幹職이 신설되면서 쯔다 카타시가 주간에 취임하였는데, 이는 쯔다 카타시가 연맹의 실권자로 등장함으로써, 이전부터 진행되어 왔던 지도권 移讓이 일단락되었음을, 그리고 향후 녹기연맹이 더욱 정치활동에 무게를 두고 나아갈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1938년 8월, 綠旗가 新聞紙法의 인가를 얻어, 정치문제를 정면에서 거론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이러한 경향은 더욱 가속화되는 계기를 맞았다.98) 현영섭 이후로 점차 조선인 필자들이 綠旗 지상에 글을 게재하게 되었고, 綠旗도 그 대상독자를 조선인에게까지 확대하게 된다. 이는 또한 1938년 이후 조선인의 연맹 가입이 急增하는 것과 궤를 같이 하는 현상이기도 하다.
이듬해인 1939년 5월의 제7회 총회에서 녹기연맹은 ‘내선일체의 실천’을 4대 목표 중 첫번째로 내걸며 비로소 내선일체운동을 조직의 목표로 公式化했으나,99) 사실상 이것은 지금까지의 활동내용을 사후에 明文化한 것에 불과했다.
1939년 11월에 발간된 今日의 朝鮮問題 講座(전6권)는 녹기연맹의 내선일체운동이 구체적인 양상으로 전개되기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내선일체’가 단지 구호로서 당위적으로 외쳐지던 단계를 벗어나, 그 실현의 구체적 방도가 논의되기에 이른 것이라 할 수 있다.
‘내선일체’의 구호가 다만 당위적으로 외쳐질 뿐, 그 구제적 내용을 갖추지 못하고 있음은 총독부측도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모든 정책은 내선일체에 歸一해야만 정책수행의 실제적 효과가 나타난다. 따라서 내선일체를 정치상, 사회상 모든 방면에서 완전히 구체화시키는 것이 가장 긴급한 일”이라고 하면서, 조만간 내선일체에 대한 해설서의 출간을 기획하고 있었다.100)
금일의 조선문제 강좌는 이같은 사회적 요구에 대응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지금껏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어 온 내선일체론의 여러 경향에 대해 비판하고, 그 정통의 이론을 확립하려 한 쯔다 카타시의 內鮮一體의 基本理念으로부터 시작하여, 일본의 대륙정책과의 관련 하에서 조선의 전시체제 구축을 논한 大陸兵站基地論解說, 내선일체의 문화적․인류학적 근거를 역사 속에서 찾고 있는 國史와 朝鮮, 나아가 학제개혁과 의무교육, 지원병문제, 조선인의 전향 문제, 생활개선운동에 이르는 다양한 측면의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다. 이로써 녹기연맹은 혼란상태에 빠져 있던 내선일체의 논의에 일정한 기준을 마련해 주며, 이른바 ‘정통’으로서의 이론을 확립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후 녹기연맹의 활동은 여러 측면에서 전개되는데, 여기서는 그 일례로 創氏改名을 둘러싼 녹기연맹의 활동을 살펴보자. 1939년 11월 10일 창씨개명에 관한 두 개의 制令(제19호, 제20호)이 公布되고 1940년 2월 11일 紀元節을 맞아 시행101)되었는데, 녹기연맹은 이에 발빠르게 대처하여, 사회적으로 두드러지는 활동을 보였다.
1940년 1월 중순 ‘氏姓制度의 權威者’인 京城帝大의 마쯔모토 시게히코(松本重彦) 교수를 顧問으로 삼아 ‘씨창설 상담소(氏の名付け相談所)’를 개설하였다. 동년 8월 10일까지 8개월간 총 923건, 총인원 3386명, 수속에 관한 상담까지 포함하면 총 5050명에 이르는 상담이 이루어졌다.102) “京城府나 裁判所에서조차, 뭔가 [창씨개명과 관련한]문제가 생기면 ‘녹기연맹에 가라’고”103) 할 정도였으며, “총독부로 수신되는 ‘씨창설 상담’도 녹기연맹으로”104) 보낼 정도였다. 상담소를 개설하는 한편, 창씨개명의 입문서로 누구나 알 수 있는 씨의 해설(誰もわかる氏の解說), 씨창설의 참정신과 그 수속(氏創設の眞精神とその手續)을 발간했다. 누구나 알 수 있는 씨의 해설은 1940년 2월부터 3월까지 1개월 사이에 19판을 찍을 정도로 많이 팔려 나갔다고 한다.105)
창씨개명 신고가 시작된 1940년 2월, 綠旗 5-2는 ‘氏創設의 문제 특집’을 실었다. 이 특집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쯔모토 시게히코(松本重彦)의 「씨 이야기(氏の話)」에서는 氏의 역사적 유래, 조선의 姓과 구별되는 특징, 조선인에게 氏創設의 제도가 주어진 것에 대한 의의 등을 설명하였다. 이와지마 하지메(岩島肇) 「씨제도의 창설(氏制度の創設について)」은 조선에 시행되는 氏制度가 家의 관념을 확립하는 의의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내선일체의 이상을 실현하는 방도라는 것, 그리고 氏創設의 수속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밖에, 사회변화에 따라 조선의 姓은 이미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음을 논증하는 이마무라 토모에(今村革丙)의 「조선의 성에 대하여(朝鮮の姓について)」, 조선 대가족제도의 붕괴로 인하여 새로운 가족제도의 수용과 씨창설의 필연성을 논한 金斗憲의 「조선가족제도의 현단계(朝鮮家族制度の現段階)」 등의 글이 특집을 구성하고 있다. 요컨대, 조선인에게 씨창설의 필연성과 그 의의를 다각적으로 납득시키려 했던 것이다.106)
금일의 조선문제 강좌 발간 및 창씨개명에 관련된 이같은 활동은, 전시체제하 식민지 조선에서 녹기연맹이 수행한 사회적 역할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실례라 할 수 있다. 통치권력측에 의해 당위적으로 외쳐진 슬로건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 주며, 그 구체적인 내용을 공급해 주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충분한 준비 없이 졸속으로 집행된 ‘황민화’ 정책의 공백을 메꾸어 주기도 한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녹기연맹의 조직적 실천에 못지않게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 외부의 각종 戰時協力團體에 대한 人的支援의 측면이었다. 다음의 <표 2>에서 보는 것과 같이, 녹기연맹을 주도했던 인물 상당수가 외부단체에서 동시에 활동하고 있었다. 또한 해당 단체에 직접 참가하지 않는 경우에도 時局講演會에 연사로 등단하여 발언하거나, 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등, 전시체제하의 각종 활동에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하였다.
이 중에서도 가장 괄목할 활동을 보인 이는, 主幹으로서 녹기연맹을 대표하며 활동했던 쯔다 카타시였다. 그의 대외적 활동으로 눈에 띄는 것은 國民總力朝鮮聯盟 및 조선 문화계의 재편에 관련된 활동이다. 그는 國民總力朝鮮聯盟 출범 당시부터 思想部 參事를 맡아 활동한 이래, 1942년에는 이사 및 宣傳部長, 이듬해의 직제 개편에서는 弘報部長을 맡는 등,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같은 시기, 녹기연맹의 현영섭이나 모리타 요시오 등도 선전업무 및 출판물 편집업무의 책임자로서 활동했는데, 이는 결국 다년간의 녹기연맹 활동에서 검증된 이론구축과 대중선전의 실무능력을 인정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이들 녹기연맹의 활동가들은 당시 식민지 조선의 전시체제하에서 제1류의 이데올로그로서 각광받으며 부각되었던 것이다.
쯔다 카타시의 활동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 조선문화계의 재편에서 보여준 주도적인 역할이다. 그가 식민지 조선의 문화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은 朝鮮文人協會에 참여하면서부터였다. 1939년 10월 20일 발기인으로 참여, 10월 22일
단체(설립연도) |
참가자(연도/직위) |
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38) |
津田榮(38/참사) 玄永燮(38/본부 주사) |
朝鮮文人協會(39) |
津田剛(39/발기인→39/내지인 간사→41 총무부 상무간사→42/총무) 津田節子(40/전선순회강연회 강사) 金龍濟(42/상무) 李石薰(41/간사→42/상무) |
國民總力朝鮮聯盟(40) |
津田榮(40/補導部參事) 森田芳夫(41/문화위원 학술부문연락계→42/전무참사, 선전부 편집과장) 津田剛(40/사상부 참사→41/문화위원교화부문연락계, 각종 논문심사위원→42/이사 겸 선전부장→43/홍보부장) 山里秀雄(41/문화위원 출판부문연락계) 三木弘(41/문화위원 생활부문연락계) 須江杢二郞(41/문화위원 생활부문연락계) 須江愛子(부인지도위원) 天野道夫(=玄永燮, 본부 주사) 上田龍男(=李泳根, 문화부) |
皇道學會(40) |
天野道夫(=玄永燮, 40/이사) 上田龍男(40/발기인) 津田剛(40/발기인) 津田節子(40/발기인) |
臨戰對策協議會(41) |
朴仁德(41/상무위원) |
朝鮮臨戰報國團(41) |
朴仁德(41/평의원→41/부인부 지도위원) |
大日本婦人會 朝鮮本部(42) |
津田節子(42/이사, 경기도지부 간사) |
半島新文化硏究會(42) |
津田剛, 森田芳夫(42/발기인) |
大東亞文學者大會(42) |
津田剛(42/조선대표, 43/조선대표) 牧洋(=李石薰, 43/조선대표, 불참) 金村龍濟(=金龍濟, 43/조선대표) |
朝鮮文人報國會(43) |
津田剛(44/이사장→44/심의원→45/평의원) 牧洋(=李石薰, 43/소설․희곡부 간사장) 金村龍濟(=金龍濟, 43/시부회 간사→44/시부회 간사장→45/상무간사) |
朝鮮言論報國會(45) |
永河仁德(=朴仁德, 45/이사) 星野相河(=裵相河, 45/평의원) 天野道夫(=玄永燮, 45/순회강연 강사) 上田龍男(=李泳根, 45/순회강연 강사) |
※출전: 林鍾國, 親日文學論, 平和出版社, 1963; 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 總動員 1-1(1939년 6월); 綠旗 各號 말미의 「綠旗ニュース」; 이영근, 이 멍에를 메오리까, 교회교육연구원, 1985.
※조선인 참가자의 경우, 해당단체 활동 당시에 기재된 이름에 따랐다. 이외에도 녹기연맹의 회원으로서 각종 시국단체활동에 참여한 인물이 적지 않지만, 여기서는 녹기연맹의 상근자를 중심으로 한 주요 활동가만을 정리했다.
결성대회준비회에 참석하여 김문집, 박영희 등과 함께 대회준비위원으로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10월 29일 개최된 결성대회에서는 內地人側 幹事로 선출되었다.107) 41년 8월의 규약 및 임원 개정․개편에서는 총무부 상무간사로 선임108)되었으며, 이후로 경성제대 교수 카라시마 타케시(辛島驍)와 더불어 전시체제하 조선의 문단 및 문화계를 재편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109)
그는 1942년부터 매년 1회씩 개최된 大東亞文學者大會에도 참여했다. 토오쿄오에서 개최된 제1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李光洙, 兪鎭午, 朴英熙, 카라시마 타케시(辛島驍) 등과 함께 조선대표로 참석했으며, 43년 제2회 대회에도 유진오, 兪致眞, 崔載瑞, 李石薰(출석 중지), 金龍濟 등을 인솔하고 朝鮮總代表로서 참석했다.110)
그런데, 쯔다 카타시는 본격적인 창작물이라곤 한편도 없어, 도저히 문인이나 문화계인사라고 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그가 조선문화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한편으로, 조선문단 대표로서 대동아문학자대회에까지 참석할 수 있었을까? 물론 총독부측에 의한 강력한 지원이나, 그가 전시체제하의 대표적 이데올로그로 활동하고 있었다는 사정도 고려해 볼 수 있다. 또한 월간잡지를 발간하는 녹기연맹의 주간이라는 점에서, 일단 넓은 의미에서 문화계 인사에 포함될 수도 있다. 그러나, 전시체제하에서 각 부문별로 조직된 外廓團體 대부분이, 비록 실제로는 권력측의 의지가 그대로 관철되는 것이었지만, 형식상으로나마 해당 부문의 인사들을 중심으로 ‘자발적’으로 조직되는 형태를 취했음에 비추어 볼 때, ‘局外者’나 다름없는 쯔다 카타시가 문화계 재편에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권력측의 의지에 의해 강제성을 띠고 조직된 외곽단체라 할지라도, 해당부문 구성원들의 반발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해당부문의 대표적인 인물을 내세우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렇다면 쯔다 카타시는 어떻게 조선 문화계 인사들의 반발을 극복하면서, 문화계에 入城할 수 있었을까? 여기서 崔載瑞의 존재가 주목된다. 쯔다 카타시, 현영섭, 최재서 등은 경성제대 예과 3회의 동기생으로서, 이 세 사람은 학창시절 무척 가까운 사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111) 외톨이였던 최재서는 현영섭을 제외하곤 조선학생들과 교유가 없었고, 주로 일본학생들, 특히 쯔다 카타시와 곧잘 어울렸다고 한다. 이 때문에 경성제대 예과의 조선학생들의 모임인 文友會에서 집단폭행을 당할 뻔한 적도 있었다. 위기일발의 상황에서 최재서를 구해준 것이 현영섭이었다.112) 후일 최재서가 四男의 이름을 ‘剛’이라 지었던 것도, 쯔다 카타시와의 밀접한 관계를 시사하고 있다.
최재서를 통해 조선의 문단에 영향을 끼친 흔적은, 최재서의 주재하에 1941년 11월에 창간된 國民文學(인문사 발행)의 지면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쯔다 카타시, 모리타 요시오, 쯔다 세쯔코 등 녹기연맹의 활동가들을 비롯, 오다카 토모오(尾高朝雄), 타나카 히데미쯔(田中英光), 金龍濟, 李石薰 등 녹기연맹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학자․문인 등이 대거 국민문학 지상에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 한가지, 녹기연맹의 성격규정과도 관련하여, 언급해 두고 싶은 것은, 식민지시대 말기의 쯔다 카타시의 이같은 영향력 있고 왕성한 활동으로 인해, 외부의 시각에서 본 녹기연맹의 이미지가 규정된 측면이 크다는 점이다. 쯔다 카타시가 조직의 대표자로서 전시체제하 조선문화계의 재편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녹기연맹도 이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쯔다 카타시의 활동을 녹기연맹 그자체의 성격규정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다소 주의를 요한다.
마치 녹기연맹이 성립 당시부터 총독부측의 외곽단체로서 출발하였고, 일본의 패전 직전까지 통치권력측의 명령에 따르는 別動隊와 같은 조직이었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게 된 것이다. 예컨대, 임종국의 親日文學論에서 처음 언급된 “綠旗 한권을 가지면 玄海灘을 헌병 검문 없이 내왕할 수 있었다”113)는 말이나, 일제하의 사상탄압에서 “표면상 문화단체였을 뿐, 실은 총독부의 외곽정보단체였다는 설까지도 있었다. 이 선에서 녹기연맹은 총독부가 터놓고 하기 어려운 매수․회유 등의 사상파괴공작을 수행한 흔적이 보이고 있다”114)는 언급이 그것이다. 이러한 ‘소문’은 대개 사실무근으로 보이지만, 이같은 소문이 등장하게 된 데에는 쯔다 카타시의 대외활동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115)
그러나 이같은 일반의 인식과는 달리, 녹기연맹 그 자체는 ‘외곽정보단체’도, ‘사상파괴공작단체’도 아니었다. 오히려 내부의 구성원들은 마지막까지 녹기연맹을 ‘사회교화단체’, 또는 ‘종교수양단체’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초기부터 이어온 일상적인 활동을 그대로 지속하고 있었다. 그 일례로 淸和女塾을 들 수 있다. 1940년대에 청화여숙을 다닌 바 있는 요시오카 마리코(吉岡萬里子) 씨에 의하면 ‘당시에 재조일본인 사회에서 청화여숙은 신부수업학교(花嫁學校)로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또한 그녀 자신도 청화여숙의 수업내용 중에서 국가주의적 이념을 학습받은 기억이 없으며, 녹기연맹이 내선일체운동을 수행한 단체라는 것도 전쟁이 끝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고 한다.116)
이러한 현상을 몇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보자. 우선, 녹기연맹이 총독부의 자금지원을 받으며 외곽단체로서 기능했다는 주장117)에 대해 살펴보자. 임종국이 예시한 1940년도 회계보고118)에서 녹기연맹은 총독부로부터 600원, 경기도로부터 200원, 京城府로부터 300원, 총 1,100원의 補助金을 수령했다. 그러나 이것은 녹기연맹의 해당연도 총수입인 54,194원 41전의 2%에 불과한 돈이다. 장부 외의 秘資金이 존재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교화단체 보조금 명목으로 수령된 이 돈이 녹기연맹의 운영을 좌우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녹기연맹의 구성원 문제이다. 녹기연맹의 운동은 그 초기 단계에서부터 지식인들(대학․전문학교 학생)에 의해 이루어졌음은 앞에서 살펴본 바이다. 조직확대 이후에도 이것은 마찬가지였다. 대학․전문학교 교수, 총독부 관료, 의사, 기업가 등 당시 재조일본인 사회의 상층을 이루는 이들의 참여가 높았으며, 여성부 및 청화여숙은 이들의 아내나 딸들로 구성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녹기연맹이 총독부의 외곽단체로서 행동부대와 같은 활동을 하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셋째, 이같은 경향은 기관지 綠旗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전쟁의 격화와 함께 綠旗 지상에서도 이른바 ‘時局色’이 강화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동시기에 나온 다른 잡지들에 비해 생활, 건강, 문예 등 ‘非時局的’인 지면이 적지 않았다. 지상에 게재된 조선인 작가들의 소설작품에 국한해 살펴보아도, 노골적으로 ‘시국색’을 띤 작품의 비중은 높지 않다.119) 또한 1940년대에 들어서도 매호마다 회원들의 신변잡기적 수필, 하이쿠(俳句) 등이 게재되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을 통해, 녹기연맹의 성격에 접근하는 하나의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녹기연맹이 표방했던 이념과 활동이 가지는 정치적 성격의 이면에는, 여전히 초기부터 이어져 내려온 인간적 유대에 기반한 ‘동호회’ 또는 ‘수양단체’로서의 성격이 유지되고 있었으며, 이것이 녹기연맹의 주변으로 회원들을 강하게 결집시키는 유인요소가 되었다. 녹기연맹은 이와 같은 강고한 인적 결합의 바탕 위에서 독립된 조직적․재정적 기반을 확보하고 지속적으로 활동을 수행해 나갈 수 있는 추진력을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녹기연맹은 ‘종교수양단체’라는 일면을 최후까지 유지했고, 이것이 재조일본인의 결합을 지켜주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역설적이게도, 전시체제하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3. 조선인의 참여와 활동
현재 조선인의 녹기연맹 참여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자료는 綠旗에 게재된 신입연맹원과 新讀者(정기구독자) 紹介欄이다. 다음의 <표 3>은 이 중 1936년부터 1939년 2월분까지를 정리한 것이다. 1939년 2월 이후로는 창씨개명이 실시됨에 따라, 이름만으로는 조선인과 일본인을 구분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아, 정확한 인원 파악이 어려운 형편이다.
연도 구분 |
新入聯盟員 |
新讀者 |
1936 |
3 |
|
1937 |
6 |
|
1938 |
25 |
11 |
1939 |
25 |
13 |
1940(1-2월) |
16 |
6 |
※ 綠旗 매호 말미의 ‘新聯盟員 소개’ 및 ‘新讀者 소개’에 의거함.
1937년에 현영섭이 가입하기 이전에 이미 3인의 조선인 회원이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韓格富, 金浩吉, 徐奎煥 등이다. 이 중 徐奎煥은 신원을 파악할 수 없지만, 韓格富는 당시 경성제대 예과 11회(1934년)생으로 理科에 재학중이었다. 또한 金浩吉을 金洪吉의 誤植으로 본다면,120) 그 역시 韓格富와 동기생으로 文科乙類에 재학하고 있던 인물이 된다.121) 이들은 경성제대 예과의 立正會 활동을 통해 녹기연맹 학생부에 소속된 것으로 보인다.
1937년에도 조선인의 가입은 크게 늘어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1938년을 기점으로 하여 조선인 참가자가 급증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38년에 전년도의 4배가 넘는 인원이 새롭게 녹기연맹에 참가하여 1939년에도 비슷한 정도의 참가율을 보이고 있다. 1938년이란 해는, 앞서 언급했던 바, 녹기연맹이 조직적 결의를 통해 내선일체운동에 전면적으로 나서게 되는 해였다. 또한 새해 벽두에 현영섭의 문제작인 조선인의 나아갈 길이 발간되어 바람을 일으킨 해이기도 하다. 다시말해, 1938년 조선인의 녹기연맹 참가가 급격히 증가하게 된 것은, 연맹의 내선일체운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증가추세는 創氏改名-志願兵制-徵兵制 실시로 이어지는 황민화정책의 전성기인 1940년대에 접어들면서 보다 명확해진다. 1940년 1-2월 두 달간의 수치만으로도 벌써 전년도 참가인원의 65% 가까운 숫자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綠旗 5-10(1940년 10월호)에 밝힌 바로는, 당시의 회원 총수 2천명 중 약 30% 가량을 조선인이 점하고 있었다고 한다.122) 이 수치가 사실이라면, 1940년 한해 동안만 약 500여명의 조선인이 녹기연맹에 들어갔다는 것이 된다. 마침 1940년 4월 1일부터 6월 10일까지의 기간 동안 讀者倍加運動 및 春季會員擴大運動 등을 수행한 결과, 이 기간 동안의 신입회원만 621명에 달했다고 한다.123) 신입회원 중 조선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지는 추세였음을 감안한다면, 1940년 10월 현재 조선인 회원이 600여명에 달했다는 위의 수치도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다고 할 것이다.
쯔다 카타시는 후일에, 1943년에 이르러 녹기연맹의 회원은 5천명으로 불어나고, 그 중 3천명이 조선인이었다고 회고했는데,124) 이 진술대로라면, 1940년 말에서 1943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일본인 회원의 증가세는 정체되어 있는 반면, 조선인 회원의 증가가 폭발적으로 이루어져, 결국에는 녹기연맹의 다수를 점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회원수의 증가와 비례하여 綠旗 집필자 중에서 조선인이 차지하는 비중도 높아갔다.125) 조선인의 회원가입이나, 綠旗 집필자의 증가가 외적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126)
그렇다면 이같은 조선인들의 참가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조선인의 참가는 녹기연맹이 내선일체운동을 표방하면서 급증하기 시작해, 식민지 조선에서 ‘황민화’ 정책이 극에 달하는 1940년대에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결국 조선인의 증가현상은 내선일체운동 및 황민화정책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일본인의 경우와는 뚜렷이 구별되는 지점에서 조선인의 참가 동기를 분석하게 된다.
우선, 조선인들의 녹기연맹 참가를 일종의 ‘정치 참여’의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녹기연맹을 내선일체운동으로 이끌었고, 수많은 조선인을 녹기연맹으로 향하게 한 장본인인 현영섭은 1939년에 발표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불교단체(綠旗聯盟, 全日本眞理運動과 같은)의 지지자이며, 禪宗的 경향을 띠고는 있지만 대중에게 특히 일본인이 되고자 하는 조선인에게 불교를 설하기보다도 神道를 설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확신하는 사람이다. 불교의 본질은, 내 생각으로는 자유주의이며, 개인주의라는 느낌이 든다. 일본의 불교는 신도로 완전히 몰입해 그 정신을 살려 내어야 할 것이다. 시대는 이미 그러한 곳에 와 버렸다. 만약 녹기연맹이 日蓮宗의 단체라면, 나는 곧바로 탈퇴함에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日蓮主義的 분위기를 완전히 말소한 녹기연맹은 발전할 것이다. 眞理運動도 淨土宗運動이라면 결코 발전하지 못할 것이다.”127)
녹기연맹의 조선인 참가자로서 특유의 ‘전투적 내선일체론’을 피력했던 현영섭의 이 말에 담긴 함의는 무엇일까? 아마도 현영섭, 아니 녹기연맹에 참여했던 조선인 대다수는 불교수양단체로서의 녹기연맹보다는, 내선일체운동을 하는 정치적 조직으로서 녹기연맹을 사고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정치활동’의 공간이었고, 그것을 녹기연맹에서 찾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에게는 정작 녹기연맹을 특징짓는 ‘日蓮主義의 가르침’이나 ‘綠의 생활운동’보다도, 정치활동을 위한 ‘발판’의 역할을 할 조직이 필요했을 따름이다.128)
綠旗日本文化硏究所에서 일하던 현영섭이 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연구소를 사임하고, 이어 그 자리를 채웠던 이영근 또한 야마토쥬쿠(大和塾)에 활동공간을 마련하면서 녹기연맹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현상은, 외부의 여러 조직에서 兼務하면서도 끝까지 녹기연맹에서의 직책과 임무를 버리지 않았던 일본인 회원들과 비교해 볼 때 매우 대조적이다. ‘정치활동’을 위해 더 나은 조건을 찾아 미련없이 녹기연맹을 떠난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후 1943년 말미에 와, 현영섭은 녹기연맹이 기반한 이념적 기반인 日蓮主義에 대해 “순수한 일본사상일 수 없는 일본사상”이라고 규정하면서, 조선의 사상적 전진을 위하여, 조선의 古典, 유럽철학, 유교 및 불교 등과 더불어 배격의 대상으로 거론하기에 이른다. 129)
또 한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내선일체가 실현되는 공간’으로서의 녹기연맹이다. 녹기연맹은 조선사회에서 내선일체를 구현하기 위한 실천을 할 뿐만 아니라, 조직 내에서 내선일체를 실현하고 있었다는 측면이 조선인 참가자들을 유인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나구모 사토루는 이러한 측면에 대해, “조선인이 일본인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진지하게 믿고서 綠旗의 활동에 모여든 사람들은, 일본인도 조선인도, 녹기연맹이란 하나의 공동체 속에서는, 정신과 정치가 융화되고, 민족을 넘어서는 평등, 평화가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다”고 분석한 바 있다.130) 다음의 인용문은, 비록 녹기연맹 스스로에 의해 언명된 것이긴 하지만, 내선평등의 원칙이 관철되고 있는 녹기연맹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과연--재미있군. 잠깐, 약점을 찌르는 것 같네만, 연맹에는, 그러한 반도사람들과 다른 내지인과의 사이에, 예를 들면 급료라든가 그밖에 차별이 있는가? 어떤 상태로 하고 있는 건가?”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네. 급료는 다른 곳에 비교하면, 대학출신도, 전문학교 출신도, 모두 박봉으로 자랑이 될 수 없겠지만, 내선간의 차별 따위 절대로 없다네. 그래서 녹기연맹, 내선일체운동의 本據니까--”131)
거의 언제나 조선옷을 입고 다니는 쯔다 세쯔코나, 조선의 역사․문화에 애정어린 시선을 보내는 모리타 요시오와 같은 일본인이 있었으며, 例會나 修養會 등의 자리에서 일본인 회원을 대상으로 ‘日本精神’이나 ‘國體論’을 강의하는 현영섭, 이영근 등의 조선인도 있었다. 이같은 모습을 통해 조선인 참가자들이 느꼈을 흥분과 감동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내선일체’의 슬로건 아래 차별이 상존하는 사회구조에서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조선인 참가자들은 녹기연맹의 각종 활동을 통해 민족적 차별에서 벗어난 한사람의 인격체로서 일본인들--그것도 재조일본인의 상층부--과 동등한 일본인으로서 만나는 경험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녹기연맹에서 활동했던 조선인 중 사회적 지명도와 활동력을 가진 사람들을 정리해 보면 <표 4와> 같다. 녹기연맹과 직간접의 관계를 맺었던 조선인 인사를 망라한다면 훨씬 더 많겠지만, 여기에서는 녹기연맹에 직접적으로 소속되어 있었거나, 녹기연맹을 내선일체운동의 주요한 공간으로서 삼고 있었던 인사들만을 정리하였다.
그렇다면, 녹기연맹에서 조선인 활동가들은 어떤 역할을 수행했을까? 현영섭의 등장과 활동이 녹기연맹이 내선일체운동으로 나아가게 된 계기가 되었음은 이미 앞에서도 살펴 보았다. 綠旗日本文化硏究所에서 근무하던 현영섭이 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으로 자리를 옮기자, 그의 뒤를 이어 이영근이, 그리고 이영근이 떠난 뒤에는 배상하가 이어가며 前任者의 자리를 채워 갔다.
이들 조선인 내선일체론자들은 녹기연맹의 두뇌라 할 녹기일본문화연구소의 이데올로그가 되어 활약하며, 단순한 ‘앞잡이’에 그치지 않고, 녹기연맹의 이론형성에 한 몫을 담당하며, 녹기연맹의 이념적 내용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활동분야 |
인물(창씨명/ 직업) |
직업적 운동가 |
孔元檜(小山元照/ 전 공산주의 활동가, 전향자) 金鍾林(金光秀雄/ 全鮮學生精神聯盟 간사, 녹기연맹) 裵相河(星野相河/ 녹기연맹) 孫弘遠(野村弘遠/ 목요회간사) 李壽龍(朝野溫知/ 전 아나키스트 활동가, 전향자) 李泳根(河本․上田龍男/ 연합청년단, 녹기연맹, 京城大和塾) 玄永燮(天野道夫/ 녹기연맹, 精動聯盟 주사) |
관료 |
徐丙旭(金子․大城征西郞/ 만주국협화회 수도본부) 安龍伯(竹山龍伯/ 조선총독부 학무국) 李源甫(李家源甫/ 총독부 사회교육과장, 전북지사, 중추원참의) 李恒寧(延原光太郞/ 총독부 학무국, 창녕군수) 張憲根(張間憲四郞/ 중추원참의) 鄭僑源(鳥川僑源/ 황해․충남․충북지사, 중추원참의, 精動聯盟 이사) |
언론․문화계 |
金東煥(白山靑樹/ 삼천리사․대동아사 주간) 金聖珉(宮原惣一/ 소설가, 소설 綠旗聯盟 저자) 金龍濟(金村龍濟/ 동양지광사․시인) 朴英熙(芳村香道/ 조선문인협회 간사장) 徐春(조선문화사 사장) 李光洙(香山光郞/ 작가) 李東珪(월간야담사) 李石薰(牧洋/ 조선문인협회 상무간사) 張赫宙(野口稔/ 소설가) 鄭人澤(소설가, 매일신보 기자) 朱耀翰(松村紘一/ 시인, 조선문인보국회 시부회장) 崔載瑞(石田耕造/ 평론가, 國民文學 주간) |
교육계 |
朴仁德(永河仁德/ 덕화여숙장) 徐斗銖(徐野斗銖/ 이화여전 교수) 宋今旋(福澤玲子/ 이화여전 강사․가정여학교․덕성여학교) 兪鎭午(보성전문 교수․ 문예가) 李淑鐘(宮村淑鐘/ 성신여학교장․총력연맹부인부) 趙圻烘(진명고녀 교유․성신여학교 교유) |
조선인 참가자의 역할이 특히 두드러지는 부분은 ‘내선일체론의 구체화’란 면이었다. 하나의 당위적 구호에 지나지 않았던 ‘내선일체’가 이들 조선인 참가자들의 손에 의해 비로소 구체적 실천방안의 길을 찾을 수 있었다. 녹기연맹이 ‘내선일체의 本據’로서 자리할 수 있었던 것은, 선도적으로 내선일체론을 제기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정치권력이 하지 못하는 실천적인 부분의 구체적 방안을 마련해 줄 수 있었기 때문이며, 이것의 상당부분은 조선인 참가자들의 활동에 힘입은 바 크다. 이하에서 몇 가지 대표적인 사례를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國語常用’의 문제를 살펴보자. 현영섭이 부르짖은 ‘조선어 전폐론’은 일본어 습득을 위해 고통을 겪어야 했던 조선인 현영섭 자신의 경험에 바탕해 있었던 것다. 그가 제기한 ‘국어상용’에 이르는 구체적인 방안과 같은 것은, 외국어로서 일본어를 배워본 경험이 없는 일본인들로서는 생각해 내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가 ‘국어상용’을 주장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일본인으로의 완전한 동화를 목표로 한 것이지만, 한편으로 조선인측의 ‘경쟁력’을 이유로 들고 있다. 실질적으로 일본어를 모르는 경우 생활하기 불편해져 버린 상황에서 언어 습득을 위한 이중부담을 벗어버리지 않고서는, 조선인은 결코 일본인과 동등해지거나 앞설 수 없다는 논리이다.132) 그는 이러한 문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정에서도 일본어를 常用할 것과, 학교교육에서 조선어를 전폐하고 일본어를 모르는 아동을 위해 豫科를 개설하여 교육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또한 조선어 신문의 일부를 점차 일본어지면으로 바꾸어 나갈 것, 일본인의 인명을 전부 일본어 발음으로 읽을 것 등의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였다.133) 나아가 일본어 자체의 변혁, 즉 國字改良, 로마자 사용과 같은 개혁안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일본어의 국자개량 논의는 이전부터 일본인 스스로에 의해 있어 왔던 것이지만, 그의 논의에는 복잡한 한자읽기나 철자법의 혼란이 조선인의 일본어 학습에도 대단한 지장을 초래하고 있다는 이유가 추가되어 있다.134)
녹기연맹 부인부가 중심사업으로 추진한 조선인의 ‘생활개선운동’에서도 조선인 여성지도자들에 의해 그 구체적인 개선의 지점이 포착될 수 있었다. 쯔다 세쯔코에 의해 주도된 婦人問題硏究會의 활동은, 손정규, 조기홍, 임숙재 등 조선의 대표적인 여성지도자들에 의해 도시와 농촌에서의 衣․食․住 및 冠婚喪祭를 망라하는 생활상의 개혁방안이 제출될 수 있었다. 연구성과를 결집하여 출간한 현대조선의 생활과 그의 개선(現代朝鮮の生活とその改善)에서는, 조선의복의 개량방안을 제안하면서 그 裁斷 설계도까지 싣는 등 구체적이고 상세한 실천방안을 내놓고 있다.
Ⅲ. 조선인 내선일체론자의 논리
1. 정세인식과 사상적 영향
녹기연맹에서 활동한 조선인 내선일체론자들이 모두 동일한 정세인식과 전망 아래서 내선일체를 사고했던 것은 아니었겠지만, 어느 정도 공통된 의식 기반 위에서 출발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이 사고했던 정세판단의 내용을 크게 조선독립의 가능성, 민족운동의 현상, 국제정세에 대한 인식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조선독립의 가능성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의 문제이다.
玄永燮은 조선의 독립은 “불합리하며 불가능”135)한 것으로서, 조선의 민족독립운동에 대해 “몰락할 필연성”136)에 처해 있는 것으로 보았다. 수천년간의 타락을 물려받은 舊韓國政府는 무능하고 부패했기에, 일본에 의한 병합은 “조선에 있어서 ‘메이지 유신’이었으며, 조선은 이 병합에 의해 舊來의 陋習을 전부 혁신하고, 생명에 넘치는 新朝鮮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137)이라 하였다.
조선은 일본제국의 일부로서 이미 일본의 정치․경제에 제약되어 있으며,138) 조선 경제의 90%까지가 일본경제에 의존하고 있는 현실139)에서 볼 때, 이미 조선의 존립자체는 일본과 긴밀한 연결 속에서 성립하고 있는 것이라 보았다. 따라서 일본으로부터의 분리란 사실상 기대하기 어려운 것으로 “조선인이 일본으로부터 떨어지는 것은 죽음을 의미”140)하는 것이라 하였다. 특히 그가 주목한 것은 근대문명의 수입경로로서의 일본이었다. 일본의 한국병합 이후 신분질서의 차별이 철폐되고, 교육 및 위생시설이 보급되었다는 측면141)을 실례로 들고 있다. 조선에 존재하는 근대문명이란 모두가 일본의 영향 하에 성립된 것으로서, 현체제에 반대하는 사회주의운동조차 일본 사회주의운동의 영향을 받으며, 일본어로 번역된 서적을 통해 이론화되고 성장해 갔다는 사실142)을 든다.
李泳根의 경우에도 조선의 독립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극히 부정적인 전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1938년 미국 유학시절 캘리포니아의 한인 농장에서 노동을 하던 중, 중일전쟁의 추이와 조선의 독립가능성에 관해 미주 한인들과의 사이에 의견충돌을 일으켰다. ‘미국이 중국을 도와 일본을 패망시킬 것이고, 벌써 러시아 비행기는 한강철교를 파괴했다. 곧 우리가 들어가서 한국을 해방시키고 독립을 선언한다’143)는 극히 낙관적인 전망을 피력하는 미주 한인들의 입장에 대해 반박을 가하다가 그들의 반발에 직면한 바 있다. 이후 그는 조지아州의 에모리대학에 입학하여 중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입장을 대변하는 강연활동을 하다가, 미주 한인들이 가하는 생명의 위협을 피해 로스엔젤레스 日本領事館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돌아오기에 이른다.144)
둘째, 이들은 이상과 같은 정세판단에 근거하여 당시의 민족운동에 대해서도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반일 민족운동이란, “支那의 抗日救國運動이나 소비에트 러시아가 강대해지는 것을 그저 觀望하며 그것에 의뢰하고자 하는 사대적 근성․노예근성”145)에 젖어 있는 것으로, 결국은 몰락할 운명에 처해 있는 것으로 보았다.
현영섭은 민족주의진영에 대해 “저 민족주의자의 지배를 받을 정도라면 죽음을 택하는 편이 좋을 지도 모르겠”146)다는 극단적인 언사를 쓰며 강한 불신감을 나타내고 있다. 조선독립을 지향하는 입장 자체에 대해서는 앞서 살펴보았듯 ‘조선독립불가론’의 입장에서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또한 운동의 현상적 측면에서, 민족주의운동은 끊임없는 파벌싸움을 통해 스스로 세력을 약화시켜 결국에는 사회주의운동에 지도권을 빼앗기게 되었다고 보았다.147) 민족주의 사상이란 “하등의 과학적 배경을 가지지 않은 제멋대로의 감정으로 조선에 있어서는 민중의 무지에 호소”148)하는 것일 따름으로, “假政府를 만들어 政爭에 빠져 정치노름을 한, 그들 저주받을 민족주의자들”149)은 결국 “옛날의 조선의 지배계급이 멋대로 마음껏 했던 것과 같이, 자유롭게 설치고 싶은” 권력욕 때문에 “타도 제국주의의 미명(?)에 의해, 조선의 민중을 유혹하는 것”150)이라 비판했다.
사회주의운동에 대한 현영섭의 비판은 한층 더 매섭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원론적 비판으로부터 현실사회주의의 실상에 대한 고발, 그리고 조선사회주의운동의 과거행태에 대한 비판에 이르는 다각적 측면에서 비판을 가하고 있다.
현영섭의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적 입장은 당시 세계적으로 관심을 모았던 앙드레 지드의 소비에트 러시아 비판과도 관련되어 있다. 소비에트 러시아 여행기 및 소비에트 기행 修正에 드러난 사회주의 국가의 실상에 대한 폭로를 인용하며, 소비에트 러시아는 “마르크스주의 국가도 아니며, 공산주의 신봉자의 국가도, 이미 아니다”151)라는 결론을 내린다.
조선 사회주의운동에 대해서는 조선의 사회경제적 상태, 특히 빈농과 도시빈민의 생활상태의 비참함과 조선인 차별로 인해 사회주의로 경도되었다는 시각152)을 가지고 있어 다소간 동정적이다. 그러나 현실적 운동에 대한 사후평가로서는 조선사회주의운동의 派閥性을 비판하고 있다.
“조선의 사회주의자는 역시 조선에서 자란 성향을 발휘하여, 排日的이 되거나, 혹은 섹트주의, 파벌주의가 되거나 했다. 공산주의운동을 하여도, 샹하이, 토오쿄오, 京城, 시베리아, 滿洲라고 하는 식으로, 지방적으로 분파가 만들어져, 전조선에 걸친 통일체를 형성할 수 없었다.”153)
한편 아나키즘에 대해서는 “無政府主義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항의로는 될 수 있지만, 정치를 실제로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154)한 것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아나키즘이 조선사회에서 개인의 개성과 독립심을 강조한 점, 그리고 공산주의의 인간통제에 대해 비판을 가한 점 등이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결국 “인격에만 집중해서, 국가, 사회를 무시하는 부분에 그들의 치명상이 있다”155)고 보았으며, 특히 민족주의에 경도되어 폭력수단을 통해 일본으로부터의 이탈을 꾀한 점은 큰 결점으로 비판하고 있다.156)
셋째, 국제정세의 흐름에 관해 어떻게 파악하고 있었으며, 향후의 세계질서에 대해 어떻게 전망하고 있었는가 하는 측면이다. 현영섭은 滿洲事變과 中日戰爭으로 이어지는 국제정세의 변화가 조선의 민족운동진영에 미친 영향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內地에 있어서 滿洲事變이, 사상계에 分水嶺을 그었다고 한다면, 그러한 것을 반도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다. 만주사변 발발 이래 전향한 민족 내지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에 그 전향을 표명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지만, 支那事變을 계기로 하여 완전히 전향을 증명한 것이다. 이 의미에 있어서 만주사변이 조선민중에게 미친 정신적 영향은 지나사변의 그것에 비하면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작은 것이었다고 해도 좋다. 전자는 반도 인텔리에게 반성을 요청했고, 후자는 일반대중에게 그 생활감정이나 태도를 일변시켰을 정도로 심각한 영향을 미쳤고, 또 미치고 있는 것이다.”157)
주지의 사실이지만, 1930년대 중반을 전후하여 이루어진 민족운동의 쇠퇴와 운동가들의 대량 전향이란 현상은, 단순히 당국의 탄압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통해 드러난 일본의 강대함에 대한 실감과 운동의 전망에 대한 절망에 근거하고 있었던 것이다. “쇼오와(昭和) 5년[1930년]까지의 21년 간은 조선사람 2천3백만 거의 전부가 정신적으로는 일본인이 아니었”지만, “滿洲事變의 결과 國際聯盟도 큰 움직임을 하지 않고, 오히려 국제연맹이 진 형태가 되었던 것입니다. 거기서, 일본은 의외로 강하다, 조선의 독립은 도저히 바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158) 라는 徐椿의 고백은 국내에 있던 조선인들이 정세변화에 대해 어떻게 느끼고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조선총독부의 공안검찰은 중일전쟁 직후의 조선인 민족운동의 현상에 대해, “帝國의 의연한 태도와 皇軍의 압도적 전승에 의해 현저히 시국에 대한 인식을 깊게 하고, 자기의 微力 내지 他國力의 박약함에 의존하기 어려움을 통감”하여 “불온사상을 개조함에 이르게 되었다”159)는 분석을 하고 있다. “만주사변 당시 그들[조선인 주의자들]이 끝끝내 그것을 주의사상의 선전선동에 악용했던 사실을 상기한다면, 그간 완전히 격세의 감이 들지 않을 수 없다”160)고 평가할 정도로, 중일전쟁에서 일본의 연이은 승전과 국제정세의 흐름은 이제 더 이상 조선의 독립 내지 사회혁명의 가능성에 비관적 요소로 작용하여 조선인 민족운동가들의 태도변화를 불러왔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정세판단은 민족운동으로부터의 전향자 및 지식인들로 하여금 새로운 방식의 운동, 즉 현체제 내에서 가능한 방식의 운동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들 중 대다수가 타협적인 노선으로서 朝鮮自治論의 방향으로 기울어 갔으며, 소수는 녹기연맹의 현영섭, 이영근, 배상하 등과 같은 급진적 내선일체론의 방식을 선택하였다.
녹기연맹의 조선인 내선일체론자 중, 이영근의 경우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중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의 반일여론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며 자진해서 일본의 입장을 대변하는 강연활동을 벌인 것은 일본의 승리를 확신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행동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裵相河의 경우, 그의 정세인식 내용을 명확히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중일전쟁을 계기로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되어 있던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고 내선일체론의 이데올로그로 변모했다는 점에서 볼 때,161) 그 역시 조선의 독립 내지 사회혁명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는 것이라고 판단했으리라 생각된다.
녹기연맹의 조선인 내선일체론자들이, 단기적으로 조선독립의 가능성에 대해 부정적인 결론을 내리면서 중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를 낙관하고 있었다면, 보다 장기적으로는 어떠한 전망을 가지고 있었을까? 이들은 당시 세계적으로 대두하고 있었던 블록화 경향에 주목했다. 1930년을 계기로 종래 다수의 국가가 난립했던 국제관계에서 수개국의 일집단으로 연합하여 블록을 구성하는 경향162)에 대해 필연적인 역사의 흐름이라 보았다. 이러한 블록화의 경향은 가까운 장래에 세계를 몇 개로 구획하게 될 것이라 전망했다. 현영섭은 향후 세계는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소련 블록, 북미 합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아메리카 블록, 유럽제국을 포함하는 유럽 블록, 그리고 일본을 중심으로 만주국, 중국, 그밖의 태평양 제국을 포함하는 동아 블록으로 구획될 것으로 전망했다.163) 論者에 따라 블록의 구획에서 다소간의 차이는 있지만, 공통적으로 동아시아블록의 형성은 필연적인 것으로 전망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블록화의 경향은 동서 양대블록의 구성,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세계통일로까지 이어진다고 보았다.
현영섭은 세계는 하나의 단위로 통합될 것이라 전망하며, 현재는 그 과도기로서 대국가의 형성과 블록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고대 그리스는 小國家의 연합체였고, 로마는 大國家였다. 중세는 여러 소국가가 난립한 시기였으며, 근대의 국가는 연합 내지 병합에 의해 성립된 것이다. 1차세계대전 후 “民族自決主義라는 거짓투성이의 원리”가 등장, “人爲的 小國家主義가 일시 유럽을 풍미했으나, 대독일국가, 대로마제국의 형성운동에 의해 이 원칙은 파괴되었다”164)는 것이다.
대국가주의의 득세를 증명하는 실례로서 독일․이탈리아의 스페인 진출,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1938. 5. 13), 체코슬로바키아의 병합(1939. 3. 16), 메이메르지방 점령(1939. 3. 23),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병합, 알바니아 병합 등을 거론하면서, 소국가주의(민족자결주의)의 원리는 사실상 붕괴했으며, 결론적으로 “현대의 경향은 대국가주의의 길”이라 파악했다.165)
대국가주의적 경향이 거역할 수 없는 세계사적 흐름이라는 인식, 이것은 결국 내선일체의 방향은 역사적 필연이라는 사고로 이어짐으로써, 스스로의 논리에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이와 함께, 내선일체는 동양의 일체화, 나아가 세계의 일체화로 나아가는 첫걸음이 되는 것으로, 내선일체는 곧 인류의 평화로 이어지는 것이라는 논리로 이어지면서166), 내선일체에 대한 적극적 의미부여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상의 정세인식과 더불어 이들의 내선일체론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사상적 조류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크게 보아 이들의 논리에서 아시아주의와 ‘近代의 超克’론적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아시아주의는 메이지시기 서양의 침략에 대항하여 아시아 제민족, 특히 동아시아 3국의 연대를 주창하면서 시작된 흐름이다. 그러나 이러한 저항적 의미의 이면에서는 일본의 팽창을 뒷받침하는 논리로서 기능하여, 한국병합, 대동아공영권 건설 등의 이념적 기초를 형성하기도 하였다.167) 독자적 文明史觀에서 아시아주의를 정립한 오카쿠라 텐신(岡倉天心)에 대해 현영섭은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텐신이 말하는 동양적 자유의 정신이라는 것은, 자유와 통제의 종합이 요구되는 인류의 前途에 커다란 암시를 던져주는 것이라고 나는 확신하고 있다. 개인주의란 것이, 좌우 兩翼으로부터 전면적으로 말소되려 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텐신으로부터 동양의 모태로부터 태어난 자연스런 자유의 정신에 관해 배우는 것도 무의미하지 않을 것이다.”168)
결국 ‘동양의 단결’이란 것은 정치적 협동체의 건설만이 아니라, 문명적 차원에서의 문제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서구 근대문명이 봉착한 한계상황으로부터 극복, 새로운 대안의 모색이 동양문명의 복권을 통해 시도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경향은 태평양전쟁과 대동아공영권 건설론을 계기로 하여 보다 精緻한 이론적 형태를 갖추게 된다. 그것이 ‘近代의 超克’ 논의이다.169) 이전의 아시아주의가 백인 제국주의에 대한 아시아인의 공동대응, 그리고 동양문화의 재발견을 통해 서구 근대문명에 대항하려 했던 것이라면, ‘근대의 초극’은 그로부터 한걸음 더 나아가 서구 근대문명 중심의 세계사적 질서 자체에 도전하는 적극적 의미를 가진다. 곧 대아시아주의가 서구에 대한 대항이란 성격이 강했다면, ‘근대의 초극’은 문명사적으로 서구 자체의 극복을 시도한 것이라 하겠다. 서구인에 의해 발명되고 조직된 근대성 자체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던지면서, 역사적으로 그 수명을 다한 서구 중심의 근대를 동양문명을 통해 초극한다는, 문명사적 전환의 야심만만한 주장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동양문명이란, 결국은 그 핵심에 일본주의 내지 천황제 이데올로기가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서 결국은 침략적 논리의 일익을 담당하는 결과로 귀결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경향의 생성과 전파는 단순히 지적 영역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당대의 정세변화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타케우찌 요시미(竹內好)는 太平洋戰爭의 開戰을 하나의 “知的 戰慄”로 받아들이며, ‘약한 자(중국 및 아시아) 괴롭히기’를 그만두고 ‘강자(米英)’를 토벌하는 쪽으로 방향전환을 했으며, 이러한 방향전환을 통해 제국주의전쟁의 질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170) 일본의 좌익전향자들이 ‘근대의 초극’ 논의에 동의하며 태평양전쟁에 대한 협력활동에 나서게 된 것은 이와 같은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의 지식인들에게서도 이와 유사한 모습이 발견된다. 金基鎭이 자신의 전쟁협력활동을 참회하는 글에서 태평양전쟁을 阿片戰爭의 보복으로 파악하고 협력을 결심하게 되었다는 심경을 밝히고 있다. 역시 당대의 지식인들이 정세변화와 관련하여 대아시아주의 내지 ‘근대의 초극’적 사상적 입장을 수용했음을 엿볼 수 있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이후 나는 이제 일본이 이제서야 동양인을 대표해서 ‘아편전쟁’ 이래 동양을 침략하던 진정한 상대방과 대결하는 것이니까 이에는 협력하는 것이 떳떳하다는 생각을 일으켰다. 7년의 만주사변 이래 과거 5년간 중국과 싸워온 일은 안 할 짓을 공연스레 한 것이니까 이것에는 외면했지만, 극동 3민족의 공동의 ‘적’과 대결하는 짓은 흥패간에 한번 해볼 만한 일이라고 느꼈다는 말이다.”171)
2. 자기부정과 제국으로의 동화
조선인 이데올로그들의 내선일체론은 조선인으로서 자기 존재의 부정으로부터 시작된다. 1930년대 중후반, 조선의 독립은 도저히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되는 정세, 다른 한편에서 현실로서 존재하는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가혹한 식민지통치. 이러한 상황에서 현상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했을까? 당대의 조선인들이 취한 입장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질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비타협적 독립노선을 견지하는 입장이다. 주로 일본의 통치권력에서 벗어나 있는 국외망명자 집단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극소수의 국내 사회주의계열 운동가들이 이러한 입장을 견지했다.
둘째는 현존하는 일본제국의 통치를 기정사실화한 위에서, 조선민족의 자치를 통해 현상을 타개해 보려 하는 입장이다. 1920년대부터 이어지는 ‘민족주의 우파’의 자치론계열과, 1930년대의 전향자 대다수가 이러한 입장에 섰다고 볼 수 있다.
셋째는 민족차별이 존재한다면, 그 차별의 근원이 되는 민족의 구별 자체를 없앰으로써 불평등한 현실을 타개하려는 입장이다. 중일전쟁을 전후한 시기의 전향자 중 일부와, 특히 녹기연맹의 조선인 내선일체론자들이 이러한 입장에 서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세 갈래의 입장은 각각의 정세판단과 가치관에 따른 것이지만, 비타협적 독립노선 및 자치론적 입장과 내선일체론이 극명하게 갈라지는 지점은 民族共同體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있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입장이 상당한 인식의 차이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양자 모두 민족공동체의 존재를 핵심적 가치기준으로 놓고 있었다. 반면, 내선일체론, 특히 녹기연맹의 내선일체론자들172)의 출발점은 민족공동체의 上位에 위치하고 있는 ‘개인’의 존재였다. 이들이 주목한 것은 차별받는 ‘조선민족’이라기보다는 차별받는 ‘朝鮮籍의 개인’이었다.
이것은 조선인 내선일체론자들의 세대적 특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녹기연맹의 전임자로 활동했던 玄永燮, 李泳根, 裵相河, 金龍濟, 李石薰을 비롯하여, 녹기연맹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활동했던 安龍伯, 崔載瑞 등은 모두 식민지 조선의 ‘신세대 지식인’에 속하는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1910년 일본의 한국병합을 전후해 출생해서, 1920년대의 京城 등 대도시에서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낸 세대이다. 1920년대는 “바야흐로 개화라는 남루한 충격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회를 모색”173)하며 식민지 조선에 본격적으로 ‘근대’가 자리잡기 시작한 시기였다. 이른바 ‘文化統治’ 하에서 ‘改造論’과 ‘文化主義’의 영향력 아래 새로운 사상사조가 밀려들어오는 동시에, 경성은 근대적 도시공간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가던 시기174)이기도 하다. 舊學의 영향에서 벗어나, 일관되게 정비된 근대적 학제를 통해 초등교육에서부터 대학교육까지 받는 것이 가능해졌던 이들 세대는, 이 같은 환경 아래서 “근대적인 각종의 담론이 만들어 내는 근대적 주체”175)로서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민족공동체로부터 완전히 떠난 ‘개인’의 존재란 허용될 수 없는 것이었으며,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들 ‘개인’들 역시 ‘朝鮮籍’에 속해 있는 자로서 정치․사회적 불평등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개인의 입신영달만을 꾀하려 해도 식민지 피지배민족으로서의 개인은 어느 곳에서나 차별을 겪어야만 했다. 이른바 식민통치의 ‘앞잡이’인 총독부 관료가 된다 해도, 급료에서의 차별을 감수해야만 했고,176) 민간부문에서의 취직은 더구나 바라기 어려워, 대학을 졸업하고도 중학교 교사 이외에 조선인 지식분자를 맞아주는 자리란 찾기 어려웠다.177)
구세대의 지식인들이 자신의 존재를 민족공동체와 동일시하며 독립국가수립이나 사회혁명과 같은 방식을 통해 민족문제의 해결을 모색했지만, 이들 신세대의 지식분자들은 전혀 다른 출발점에서, 전혀 다른 해결방식을 도출해 냈다. 개인을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용인해 주지 않는 것은 민족공동체의 존재였으며, 이 민족공동체의 해체를 통해 민족공동체에 소속되어 질곡당하는 개인의 해방을 꾀했던 것이다.
일찍이 미야타 세쯔코(宮田節子)는 내선일체론에 내포되어 있는 조선인측의 ‘차별로부터의 탈출’ 논리를 지적한 바 있다.178) ‘차별로부터의 탈출’의 첫걸음은 조선인으로서의 자기존재의 부정으로부터 시작된다. 미야타는 이러한 자기부정에 대해, “도대체 ‘완전히 일본인화한 조선사람’을 어떻게 조선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현씨[현영섭]의 논리의 급소”179)라고 평가했지만, 사실 이것은 ‘급소’라기보다는 ‘定石’이자 ‘核心’으로 파악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이들에게 있어 질곡받고 있는 주체란 조선의 ‘민족공동체’라기보다는 ‘朝鮮籍의 개인’이었으며, 따라서 ‘개인’의 관점으로부터 문제를 풀어 나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나는 조선인의 참된 행복을 위해, 조선인의 이같은 태도[排日的 태도]는 하루라도 빨리 청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또 마음의 깊은 곳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한, 젊은 세대의 조선인은, 낡은 세대의 조선인이 괴로워 했듯이 역시 고통스러워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조선인의 불만에 대해 폭격을 가하고자 하는 것이다.”180)
현실모순의 탈출방책으로서 자기부정, 이것은 조선인이 스스로의 마음가짐을 변화시키는 데서 출발한다. 구세대가 겪었던 고통은 ‘조선민족’으로서의 아이덴티티에 기인하고 있었다. 이 아이덴티티가 계승된다면, 또한 동일한 고통이 계승될 것이라는 논리이다.
그러나 조선민족으로서의 아이덴티티의 부정이란, 역시 인식의 대전환을 요구하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따라서 보다 면밀한 자기부정의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 요구되었다. 조선의 역사와 문화, 민족성에 대한 총체적 부정이 수반되었던 것이다.
“병합 전의 조선은 지옥이었다고 해도 좋다. 오랜 동안 支那의 지배와, 愚劣하고 탐욕스러운 지배계급에 의해 민중의 생활은 극도로 짓밟히고, 민중은 삶을 저주했던 것이다 러시아제국은 조선에까지, 그 동방침략의 마수를 뻗쳐 왔다. 日露戰爭에 의해 일본의 서구인의 동양침략에 대한 제지가 없었더라면, 조선인은 전부 백인의 노예가 되어 멸망했을 것이다.
과거의 조선! 근대과학의 세례를 받은 우리들의 눈에 비친 조선의 역사는 전부 암흑의 역사였고, 우리가 오늘날 생존해 있는 것이 불가사의할 정도로, 과거와 현대는 완전히 面目을 달리하고 있다. 조선이라는 칭호는 東國與地勝覽에 의하면 ‘東表日出之地에 있는 고로’ 이름 붙여진 것이라 한다. 아침의 신선함이라는 칭호는 희망과 생명에 찬 것이지만, 조선의 역사는 그 이름을 완전히 배반하는 事實로 충만해 있다.“181)
檀君朝鮮은 신화로, 箕子朝鮮은 사대주의의 역사왜곡이라 치부되며, 과학적으로 검증된 조선사의 시작은 衛滿朝鮮과 樂浪이지만, 漢民族 식민지통치에 불과한 것으로 순수한 조선사의 시작은 三國時代로부터 시작한다고 보았다. 삼국시대에는 순수한 조선문화의 諸相을 발견할 수 있지만, 신라의 삼국통일을 계기로 다시 支那의 屬邦이 되어 천년을 괴로워했으며, 내부적으로는 탐욕한 지배계급의 압박과 착취가 지속된 암흑의 역사였다고 하였다.182) 지나의 지배는 문화적으로 조선 독특의 것을 발달지키는 것을 막아, 결국 조선문화에서 支那的인 것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상황이며, 불교와 유교도 약간의 공헌을 제외하면, 결국 타락과 형식주의에 빠져 국가쇠망의 원인이 되고 말았다고 보았다.183)
그러나 이와 같은 역사 및 문화전통에 대한 전면부정은 자칫하면, 향후의 가능성까지도 부정하는 결과가 될 위험성이 있다. 현영섭 자신의 표현을 빌면, “만약 우리들의 역사가 일체 惡과 罪過로 가득찬 것이었다고 한다면, 우리들은 도저히 구제받을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상황이 되기 때문에, 다소간 비판의 강도를 낮추며, “암흑의 역사, 문화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조선인의 선조에게도, 예외는 있었다. 왕성한 생활력, 창조력을 가지고 있었던 시대도 있었다”고 하며 일말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184)
역사와 문화전통에 대한 부정은 현재의 조선인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개인과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가족주의,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허위와 관료주의, 그리고 개인의 각성이 지체된 상황 등이 한데 어우러져 총체적으로 조선인 사회의 부패와 타락상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보았다.
역사와 문화, 그리고 현재의 조선인 생활에 대한 극단적 부정은 조선인이란 존재 그 자체를 죄악에 가까운 것으로 몰아 감으로써, 총체적 자기부정의 근거를 완성한다.
“조선에서 영화감독을 했던 李慶孫이란 사람과 샹하이에서 만났을 때, 그는 조선인을 극렬하게 욕했었다. ‘조선인은 인간으로 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의 학생시절에 조선인 학생 친구들과 모여 함께 조선문제를 논했을 때, 어느 학생이 ‘조선인이 전부 죽는다면 함께 기쁘게 죽을 것이다’ 라고 극히 절망적인 말을 토했던 적이 있었다. 정말로 양심이 있는 자라면 이 말을 극단적인 말이라고만 생각할 수 있을까.”185)
기존의 아이덴티티는 완전히 부정되고,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아이덴티티의 형성이 요구되었다. 그들이 선택한 새로운 대체물이란, 말할 것도 없이, 帝國 日本으로의 同化를 통해 일본인으로서의 同一視를 경험하는 것, 곧 “일본인으로서 새롭게 태어나는 것”186)이었다.
“[...]만약 민족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의 이상을 추구하는 이외에 살 길을 알지 못한다면, 日本國土 乃至 東洋에서는 살아서는 안된다. 자살하든가, 반항하여 형무소에서 살든가, 외국으로 도망가지 않으면 안된다. 결국 자살이다. 참으로 일본국가를 사랑하지 않고서, 가면을 쓰고 살고 있는 약간의 위선자가 되기보다도, 자살해 주었으면 하고 생각한다.
자살을 원하지 않는다면, 일본국가를 사랑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187)
현영섭은 여기서 의식적 ‘노력’을 말하고 있다. 새로운 자아정체성의 형성이란, 조선인으로서의 자아를 버리고, 제국 일본으로의 동일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조선인 개개인의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本能的으로 일본인이 되는 것”188)에 도달하기까지, 끊임없이 스스로를 속여가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우리가 아무리 Things Korean을 증오해도, 무의식적으로 심어진 조선인적 인생관--유교적 가족주의이다--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는지 자못 의문이다. 의식적으로는 조선인적 사상의 오류를 청산하고, 새로운 인생관--올바른 일본인이 가져야 할 그것이다--을 파악할 심산이지만, 무의식적 세계에 있어서는 역시 조선인인지도 모르겠다. 증오는 왜곡된 사랑일 수밖에 없다.189)
조선인으로서의 자기를 부정하기 위해서 조선역사와 문화에 대한 평가절하와 정서적 단절을 위한 ‘노력’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엄연한 이민족인 일본민족에 자아를 동일시하기 위해서는 역시 그에 상응하는 근거가 마련되어야만 했다. 역사적 근거로서는 식민사학의 성과물인 ‘同祖同根論’이 수용되었고, 문화적․정서적 일체감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일본문화에 대한 연구와 조선인 생활 일반에 일본문화를 수용할 것이 요구되었다. 이들이 비록 유년기, 청소년기부터 制度敎育을 통해 일본문화를 접할 기회가 많았고, 일본문화에 대해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완전한 동일시의 과정이란 역시 상당한 의식적 노력을 수반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었다. 달리 표현하면, 自律的․意志的 洗腦의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이 싫다면 어쩔수 없이 싫은 거다. [...]조선인이 일본국민이 된 이상은 태도를 선명히 하여, 이 일본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취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거기에는 조선옷이나 조선말을 사용해도 좋으니까, 일본정신을 연구하고 이해하는 그것에 共鳴해야 한다."190)
일본인으로서 다시 태어나기 위해 거쳤던 자율적․의지적 세뇌의 과정은 이영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발적으로 日本靑年團과 國民精神文化硏究所를 찾아 훈련과 이론학습을 받았고, 이 과정을 통해 “초속도로 제작된 일본인이 되어 버렸다”.191)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친일파가 되었는데, 이 운명에 거스를 힘도 없으니 정말 일본이 무엇인가를 알아 보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무서운 반동이다. 나를 강제로 축출한 내 민족에 대한 반역을 시도했다. 우선 일본을 공부해 보자. 일본, 그 속으로 깊이 깊이 파고들 계획을 세웠다. 192)
‘일본국가를 사랑하려는 의식적 노력’이 지적․정서적 차원에서 수행되는 동화의 노력이라고 한다면, 실천적 차원에서의 동화를 위한 ‘노력’, 이른바 ‘내선일체의 실천’은 그 쌍을 이루는 것이었다. 이것은 지적 차원에서의 동일시를 보다 촉진시키는 동시에, 이념을 사실로서 기정사실화시키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지적 영역에서의 동일시의 노력이 조선인 스스로를 속이기 위한 것이었다면, 실천적 영역에서의 동일시를 위한 노력은 조선인 자신만이 아니라 ‘內地人’까지 속이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차별로부터의 탈출’이란 차별당하는 측의 자기부정에 의해서보다는, 차별하는 측의 태도에 달려 있는 것이다. 곧, 조선인이 차별의 근원이 되는 조선인으로서의 존재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과 맞물려, 차별하는 측에서 이들 ‘일본인으로 다시 태어난 조선인’들을 동질적 민족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인정하고, 내부에 수용해 주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인 내선일체론자들은 어떻게 일본인측으로부터 같은 민족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단기적으로는 선전을 통한 설득으로 그들의 溫情에 호소하여 양해를 구하는 한편, 일본인측의 현실적 이해에 봉사함으로써 양보를 얻어내는 것이었으며, 장기적으로는 조선인으로서의 흔적 자체를 소멸시킴으로써 차별의 근원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一視同仁과 八紘一宇를 내세우는 國體論이나, 同祖同根論 등의 논리를 통해 조선인차별에 대한 비판의 근거를 마련하는 동시에 일본인측의 시각변화를 촉구했다. 다음과 같이 총독의 권위를 빌어 차별에 대항하는 논리를 마련하기도 했다.
“조선은 식민지가 아니다. 조선을 식민지시하는 자가 있으면 두들겨패 버리라는 것은 우리들의 총독 미나미 각하가 반도의 대표적 인텔리에게 하신 말씀이다.”193)
이와 함께 志願兵이나 徵兵, 勞務動員 등의 人的動員, 그리고 供出이나 國防獻金 등의 物的動員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함께 전쟁을 수행하는 ‘일본인’으로서 스스로의 존재를 인정받고자 하였다.
“지나사변에 즈음한 조선인의 銃後熱誠은 아직 충분치 않지만, 이와 같은 행동은, [일본에 반항했던 역사적 죄과를] 갚음이 되고, 명실공히 皇國臣民이 되는 길을 앞당기는 일이 될 것이다. 아직 우리는 조건부 일본인이다. 선거권도 없고, 의무교육도 없고, 병역에 나갈 의무도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우리의 생활정도는 낮고, 또 애국심에 있어서 내지인보다 아직 특별히 차이가 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남의 집에 양자로 들어간 사람이, 바로 금고의 열쇠를 건네받을 리가 없는 것이다. 참으로 그 남의 집 사람이 완전히 되어 버릴 필요가 있을 것이다.”194)
이후 지원병제도 실시에 즈음해서는 동등한 권리를 얻기 위한 대가로서 ‘조선인의 피’를 직접적으로 요구하기도 하였다. “내지인이 칠만명 나라를 위하여 죽었다면, 우리들도 삼만명이 죽어야만” 비로소 내선무차별평등에 도달할 기본조건이 이루어진다고 절규했던 것이다.195)
한편, 보다 장기적인 차원에서는, 創氏改名, ‘國語常用’, 內鮮結婚 등을 통해, 차별의 근거가 되는 조선인으로서의 존재 자체를 말살하려 하였다. 이것은 두 가지 차원의 경로, 즉 內的으로 조선인이 스스로 조선인이라는 것을 완전히 망각하는 것과, 外的으로 일본인이 더이상 조선인을 구별할 수 없게 되는 상태를 목표로 하고 있다. 현영섭은 1938년 여름 총독과 회견한 자리에서 예의 ‘조선어 전폐론’을 피력했는데, 조선인측의 ‘무의식적인 융합’, 즉 아이덴티티의 완벽한 재구성을 위해 ‘조선어전폐’와 ‘神道의 수양’을 제안하고 있다.
“世界를 統一한다고 하는 것은 歷史的으로 오래인 根據를 가지고 잇스나 한번도 實現된 된 일은 없다. 이러한 世界的인 理想을 생각할 內鮮一體의 問題는 極히 작다. 그러나 朝鮮人이 完全한 日本人이 되기 爲하야는 無意識的融合인, 卽 完全한 內鮮一元化에서부터 되지 안으면 안될 것인 즉 從來에 體驗치 안은 神道를 通해서 는 朝鮮語使用全廢에 依하지 안으면 안될줄 안다”196)
조선어의 전폐라든가, 창씨개명의 원형적 사고로서 조선인 이름의 訓讀197)과 같은 것이 조선인 현영섭의 입을 통해 처음으로 터져나왔다는 사실은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흔적 지우기’의 일환인 것이다. 만약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차별의 근거는 존속하며, 따라서 민족적 차별로부터 끝끝내 벗어날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들의 입장은 철저히 급진적이었으며, 민족성의 철저한 말살을 목표로 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끝내 조선인이 독특의 생활감정이나 언어를 고수한다면, 조선의 풍속습관을 견지한다면, 배타적 정치적 감정으로까지 발전할 것이라 단언하며, 우리의 자손이 불행한 날을 맞을 것을 ‘예언’한다. 그 불행을 나는 거의 병적으로 느끼기에, 끝내 급진적 입장을 고수하는 것이다.”198)
이러한 과정을 통해 도달하는 최종 목표는, ‘新日本民族’ 즉 확대된 민족의 형성에 있었다. 조선인으로서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고 동등한 권리를 획득한 조선인의 모습을, 현영섭은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그것은 제국에 동화함으로써 차별로부터 벗어나는 계기일 뿐 아니라, 지금껏 억눌려 왔던 조선인의 가능성을 보다 확대된 형태로 실현시킬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나는 꿈꾼다. 半島의 청년이 대다수 임금과 나라를 위해 기쁘게 죽는 날을! 완전히 일본화한 조선인 중에서 宰相이 나오는 그 찬란한 날을! 백년 후일까 수백년 후일까.”199)
이들이 동화하려고 했던 일본은 동아시아의 조그만 섬나라 일본이 아니었다. 바야흐로 동아시아를 석권하며 국제질서를 뒤바꾸어 놓고 있는 아시아의 盟主, 나아가 세계를 半分하여, 그 절반을 지배하면서 서양의 백인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영광스런 사명을 수행할, 세계의 중심으로서의 일본이었다. ‘조선인 중에서 일본의 宰相이 나온다’는 말이, 그저 조그만 섬나라 일본의 총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따라서 제국 일본에 동화된다는 것은 단순히 피지배자의 위치에서 벗어난다는 소극적 의미를 넘어, 한순간에 세계를 지배하는 민족의 일원이 된다는, 劇的 轉換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약소민족으로서가 아니라, 웅대한 世界統一者의 한패”가 될 수 있으며, “노력하기에 따라서 일본인의 자격을 얻어 세계에 雄飛”200)할 수 있는 것이다. 大民族主義의 미래상은 거역하기 힘든 매력으로서 다가왔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이 꿈꾸었던 최종목표였다.
이것은 내선일체론으로의 달콤한 유혹인 동시에 내선일체론자들이 스스로의 사고와 행동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일찍이 ‘조선인을 위한다’고 자부하는 어떤 민족주의자도 조선인을 차별로부터 구해내지 못했고, 더욱이 세계의 지배자로 일으켜 세우는 것은 생각도 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그런데, 내선일체론자들은 이것을 현실화시키고 있지 않은가. 비록 지금은 “조선인은 물론 내지인으로부터도 이상한 놈 취급을 받”고 있지만, 결국에는 “詩人的 직관력에 의해 미래를 통찰했음에 틀림없다는 것이 명확해” 지리라201) 꿈꾸었던 것이다.
3. ‘평행제휴론’과의 대립 및 내선평등의 촉구
1) ‘평행제휴론’과의 대립
이상과 같은 내선일체론자들의 논리가 그 나름의 체계와 근거를 갖추고 있다고는 해도, 여전히 일반적인 조선인의 정서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현영섭의 경우, 조선인의 나아갈 길의 발표를 통해 대표적인 내선일체론의 논객으로 각광받으며 부상했지만, 이와 동시에 조선인 사회로부터는 적대적 시선을 한몸에 받게 되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조선인 저널리즘은 空前의 판매부수를 기록한 이 책에 대해 일언반구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침묵의 항의”를 보냈다.202) 각계에서 비난의 투서가 날아들었고, 옛친구조차 반성을 촉구하는가 하면,203) 심지어는 대학의 일본인 은사에게도 외면당해야 했다.204)
대다수 조선인들이 현영섭의 논리에서 가장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朝鮮語 全閉’로 상징되는 조선문화의 폐기와, 이를 통해 초래될 민족성의 상실, 민족의 해체라는 상황이었다. 이것은 논리 이전의 문제로서, 정서적 차원에서의 격렬한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저항심리에 대한 변명으로서, ‘아일랜드인이 영어로써 자신의 독특한 문화와 정서를 표현하듯이 조선의 문화와 정서도 일본어를 통해 능히 표현될 수 있으며, 조선어도 역사연구를 위한 고전언어로서는 존속할 것’205)이며, 일본어가 동아시아의 공용어가 되어가는 상황에서 일본어를 통해 조선인의 미묘한 감정, 개성을 표현함으로써 조선문화는 세계적 보편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논리206)를 펼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궁색한 변명으로서, 조선인들의 저항적 정서를 잠재울 만한 설득력을 가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사실 조선어 페지가 가져올 민족문화의 파괴라는 결과에 대해서는, 현영섭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아니, 오히려 민족성 유지의 근원이 되는 민족문화의 파괴를 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었다. 적어도 그의 논리체계 속에서는 ‘조선의 빈곤한 문화전통’을 지키는 것보다는 자기부정을 통한 평등의 획득, 그리고 제국으로의 동화를 통한 지배민족으로의 편입이란 목표가 보다 상위의 가치에 놓여 있기 때문이었다.
조선어 전폐와 조선문화 말살에 대한 저항심리는, 반일적․민족주의적 경향의 인물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적극적으로 일본의 전쟁수행에 협력하고 나선 이른바 ‘친일파’ 일반에게서조차 순순히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이었다. 현영섭은 이러한 경향을 통틀어 ‘自治論’ 또는 ‘協和的 內鮮一體論’, ‘內鮮聯合論’ 등으로 부르며 자신과 대립적 입장에 위치시켰다. 이하의 논의에서는, 1939년 쯔다 카타시가 내선일체의 기본이념에서 제시한 구분방식에 따라, 녹기연맹과 같이 민족의 해체와 제국으로의 완전동화를 표방하는 입장을 ‘同化一體論’으로, 자치론 및 조선문화 존속의 입장을 ‘平行提携論’으로 지칭하도록 하겠다.207)
비록 현영섭 등 녹기연맹의 이데올로그에 의해 한덩어리로 뭉뚱그려져 표현되긴 했지만, 이른바 ‘평행제휴론’적 입장 내부에도 다양한 편차가 있었다. 東亞協同體論․東亞聯盟論 등의 이념에 자극받아 朝鮮自治의 입장을 주장하는 적극적인 부류가 있는가 하면, 內外地의 一元化를 지지하면서도 다만 문화적 측면에서의 ‘조선적인 것’을 보존하고자 하는 소극적 입장도 존재했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현영섭 등의 ‘동화일체론’적 입장에 있어서는 무의미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민족의 해체를 통해 현존하는 차별의 근원을 근본적으로 해소시키고자 하는 입장에서 볼 때, 어떤 형태로든 일본 내지와 구별되는 ‘조선적인 것’을 지키려 하는 입장은, 정치적 의미에 있어서는 동일한 것이었다. 따라서 구체적인 주장의 편차에 관계없이 무조건적으로 배척되어야 할 대상에 불과했으며, 구태여 그 갈래를 나누는 것조차 무의미한 것이었기 때문이다.208)
‘평행제휴론’ 측에서 목표로 하는 ‘조선문화의 존속’과 ‘조선민족의 존속’이란, 완전동화를 통해 차별의 근거를 철폐하려는 입장에서는 ‘차별의 씨앗을 존속’시키는 것에 다름아니었다. 따라서 이들은 “‘自治’의 꿈이 얼마나 어리석고 열등한 꿈인지, ‘一體’의 꿈이 얼마나 아름답고 우수한 것”209)인지를 역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들 ‘자치론’의 세력은, 현영섭 스스로가 인정하고 있듯이, 자신들보다도 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210)
1938년 12월에 삼천리사 주최로 개최된 ‘時局有志圓卓會議’에서 두 입장은 첨예한 갈등을 드러냈다. 印貞植은 “내선일체라 하면 곧 조선어의 폐지 조선의복의 禁用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그런 무지한 徒輩야 말로 가이없는 인간들”211)이라 하여, 한자리에 참석한 현영섭을 겨냥한 듯한 격렬한 비판의 언사를 쏟아놓았다.
이어서 발언한 현영섭은 예의 ‘철저히 과거를 청산하고 일본의 이상을 지지할 것’, 그리고 ‘조선인에게는 사수할 개성도 그리 많지 않으며’, 더우기 “[조선인의] 개성을 넘우 堅守하는 결과 내선일체의 이상을 障害함이 있으면 아니됨으로 언어풍속에까지도 融合一體가 필요”하다는 논지를 펼쳤다.212)
그러나 그는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사회를 맡은 車載貞은 ‘조선인의 개성 견지가 내선일체에 장해’가 될 수 있다는 현영섭의 문제제기에 대해, 단어의 순서를 살짝 바꾸어 “조선문화를 위해 내선일체란 것이 장해가 되는 일이 없겠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논의해 줄 것을 청하며, 부정적인 결론을 유도하는 듯한 의사진행을 하였다.213) 발언을 요청받은 李光洙도 현영섭의 편은 아니었다.
“朝鮮語를 廢止한다고 一部에 떠드는 자가 있지만 이런 政策은 朝鮮人의 感情을 도리혀 惡化해서 反對의 效果를 낳지나 안을가 憂慮합니다. 朝鮮의 言語文化 등 이런 것은 끝까지 保存하지 않으면 안되리라고 생각합니다.”214)
뒤이어 발언한 李覺鍾 역시 표현은 완곡하지만 앞서의 발언자들과 같은 입장이었다. “땅 속에 묻힌 樂浪文化나 新羅文化까지 끄집어내어 현대 국민생활에 활용하는 이 때에 조선문화라고 해서 배척한다는 것은 일본의 취할 길이 아니라”고 하며, 미나미 총독도 자신과의 면담 석상에서 조선문화 존중의 입장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고 말했다.215)
時局有志圓卓會議 席上에서 “무지한 도배”니 “가이없는 인간들” 등의 가장 강렬한 비난의 표현을 써 가며, 현영섭류의 내선일체론을 공박했던 인정식은, 이후 직접적으로 현영섭을 거명하며 그의 조선어 전폐론 주장에 대해 원색적인 비판을 가하기도 하였다.216)
“玄永爕氏의 所論이 氏自身의 말로는 理想主義라 하지만 事實은 理想主義도 아무것도 아니다. 確實히 思考하는 方法에 있어서는 옛날의 아나ー키즘의 無體系的인 殘滓를 많이 엿볼 수가 있다. 個人의 感情과 主觀的 偏見에서 出發하여 무엇이든지 되는대로 客觀世界를 一律的으로 規定하려는 것이 果然 하나의 思想이라 할 수가 있을가. 이것은 無意味한 로ー만티시즘의 手淫이 아니면 痴人의 꿈에 떠러지기가 쉽다.”217)
이와 같은 사방으로부터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동화일체론’을 견지하던 녹기연맹의 조선인 내선일체론자들은 나름대로 의지하는 바가 있었다. 그것은 조선통치의 최고책임자인 총독 미나미 지로오(南次郞)에 의해 천명된 ‘내선일체’의 정의였다.
“내가 항상 역설하는 것은 내선일체는 상호간에 손을 잡는다든가 모양이 융합한다든가 하는 그런 미지근한 것이 아니다. [...] 모양도 마음도 피도 살도 모두가 일체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 내선은 융합이 아니며, 악수도 아니며, 心身 모두 정말로 일체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218)
미나미의 이 발언은 修辭로 포장되어 그 구체적인 내용을 파악하기엔 다소 애매한 점도 있지만, 곧 이어 닥쳐올 창씨개명․지원병․교육령개정 등을 고려해 볼 때, 적극적인 동화정책의 실시를 시사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은 또한, 그동안의 내선일체론 논의를 통해 녹기연맹의 이론--‘동화일체론’--이 ‘정통’으로서의 위치를 승인받았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아무튼 현영섭은 미나미의 표현을 그대로 빌려, ‘異體同心’으로서 皇道를 받아들이고 정책에 협력한다는 ‘協和的 內鮮一體’(=‘평행제휴론’)는 ‘악수형 내선일체’ 이며, 거기에 반해 자신들이 주장하는 ‘동화일체론’이야말로 총독이 언명한 대로의 ‘一心同體’인 ‘徹底一體論’이라 주장한다. 결국 녹기연맹의 조선인 내선일체론자들은 ‘평행제휴론’과의 대립에서 자기 논리의 근거를 식민지 통치권력 및 최고통치자의 권위를 빌어 확보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1938년 말부터 1940년에 걸쳐 벌어진 상황변화는 이들 동화일체론자들에게 불안요인으로 다가왔다. 東亞聯盟論이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과 함께 ‘평행제휴론’의 경향이 고조되기에 이른 것이다. 만주사변의 주역으로서 당시 육군 제16사단장이었던 이시하라 칸지(石原莞爾) 中將에 의해 제기된 동아연맹론은, ‘東亞 諸國의 독립’, ‘東亞 諸國의 국방의 공동’, ‘東亞 諸國과의 경제의 일체화’를 슬로건으로 내걸며, 중일전쟁의 早期 和平을 주장했다. 1939년 10월 ‘東亞聯盟協會’가 발족하며 조직화된 운동으로서 대두되기에 이르렀다.219)
동아연맹론은 조선에서의 내선일체화 정책을 비판하며 조선 ‘자치’론을 제창하는 등, 독자적인 조선론을 제기했다. 그러나 동아연맹론에서 말하는 ‘자치’란 기존의 자치론에서 주장하던 ‘朝鮮議會設置’와 같은 것이 아니라, 식민지 행정에서 조선인 관료의 비중을 높이는 정도를 이르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220)
비록 조선독립을 용인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일본이 “複合民族國家임을 확인하고, 국내에 있어서 民族協和에 전폭적으로 노력할 것”, “조선 내에 있어서 특히 내지와의 사이에 강도 높은 통일을 요하는 사항 이외에는 고도의 자치를 행할 것”221)을 주장하는 등, ‘내선일체’ 정책을 무리하게 추진하는 조선통치의 현상에 대해 비판을 가하며, 조선문화의 존속을 인정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동아연맹론의 주장은 상당수 조선인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총독정치에 대한 조선인의 저항의 근거로 작용하기도 하였다.222)
동아연맹론이 정세 속에서 힘을 얻게 된 계기는 1938년의 코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聲明과 1940년의 支那派遣軍總司令部 聲明이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정부는 國民黨 정부에 대해 강경정책으로 일관했으며, 중국측도 일본에 대해 강경한 태토를 견지했다. 이러한 입장은 1938년 1월 코노에 수상이 “國民政府를 상대로 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더욱 굳어져 갔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되며 쉽사리 수습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일본정부는, 국민정부 내의 친일파를 유인해 내는 쪽으로 전략을 전환한다. 1938년 11월에는 ‘東亞新秩序聲明’을 발표하고, 뒤이어 12월에는 ‘善隣友好’․‘共同防共’․‘經濟提携’의, 이른바 코노에 3원칙을 발표한다. 이것은 결국 국민정부 내의 和平派 왕자오밍(王兆明)의 탈출과 난징(南京)의 傀儡政府 수립(1940년 3월)에 이르게 된다. 동아연맹은 ‘코노에 성명’이 하나의 國策으로 위치하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스스로 코노에의 ‘3원칙 성명’을 충실히 실행함을 표방하며 발족했던 것이다.223)
뒤이어 동아연맹론의 입지점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준 것이 1940년 4월 29일 天長節에 발표된 支那派遣軍總司令部의 성명 「파견군 장병에 고함(派遣軍將兵に告ぐ)」이었다. 당시의 總參謀長 이타가키 세이시로오(板垣征四郞)의 이름을 따 일명 ‘이타가키 성명’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 성명은, 우선 ‘서양 제국주의에 대항한 동양인의 자각’을 환기시키며 시작된다. 코노에 3원칙에 근거한 日滿支 3국의 협력의 필요성, 일본은 중국의 통일강화를 희망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일만지 3국은 더이상의 분열항쟁을 피하고, 道義的 결합 위에서 동아연맹을 결성할 것을 제안하였다. 아울러 이 성명의 말미에는 그동안 일본군과 민간인이 중국에서 보인 醜態와 失行을 강하게 비판하며, 중국인의 전통과 습속을 존중할 것을 요청하였다.224)
이로써 “지금까지 동아연맹론은 민간단체와 개인의 언론에 불과하였으나 板垣 성명에 의하여 이 동아연맹론이 한 개의 國論으로 등장하기 시작”225)하게 되었다. 일단 國論化한 것은 對中國政策의 측면이었지만, 이와 함께 동아연맹론이 담고 있는 다른 측면, 즉 조선‘자치’론도 그에 편승하여 힘을 얻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변화에 대해 현영섭, 이영근 등 녹기연맹의 이데올로그들은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식민지 통치권력과 총독의 권위에 기대어 ‘동화일체론’을 주장해 왔던 이들로서는, 보다 上位의 강력한 권력이 동아연맹론을 公式化함으로써 초래될 지도 모르는, 기존 조선 통치정책 상의 변화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현영섭 등 녹기연맹의 ‘급진적 내선일체론자’들이 동아연맹론 지지자들의 집중적인 표적이 되었음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226) 이시하라 역시 녹기연맹이 조선총독부의 황민화정책에 협력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었다고 한다.227)
이같은 불리한 상황을 맞아 이들은 두 가지 논법으로 동아연맹론에 대항했다. 첫번째는 동아연맹론의 國論化를 인정하면서도, 이것을 조선에 적용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守勢的 대응이었다. ‘日滿支 3국의 연맹에는 찬성하지만, 이미 일본의 일부가 되어 協和나 融和단계를 넘어 완전한 一體의 단계로 나아가고 있는 조선에 연맹론을 적용하여 日鮮協和나 日鮮融和를 주장하는 것은 反動에 불과’228)하다고 주장했다. ‘동아연맹론이 활발히 대두됨에 따라 내선일체운동도 다소간 변화할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내선일체의 근본방침은 변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두번째는 동아연맹론의 조선‘자치론’에 경도된 조선지식인들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반도인은 일본과 결혼한 것이다. 그런데도 別居를 주장하는 것과 같이, 동아연맹이론의 조선 적용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상당수 있다. 당국이 取締하고 있기 때문에 침묵을 지키고 있을 따름이다. 우리 약간의 완전한 일체론자는 우리의 자발에 따라 동아연맹 조선적용론자, 즉 內鮮聯合論者와 싸우는 것이다.”229)
조선민족을 몽상하는 자는 “남편을 품에 안으면서 연인을 떠올리는 바람둥이 여자와 같은 존재”로서 이들은 “반도민중 위에 군림하려는 정치적 야심에서 이를 주장”하는 것이며,230) “국법의 합법적 측면을 이용해 몰래 민족운동을 전개하려는 夢遊病者”231)라 비난했다.
그에 비해 자신들, 내선일체론자는 “반도인 전부가 지위가 올라가든, 가난해지든, 일본민족으로서의 자랑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만을 바라는 것이라 하였다.232) 이것은 다시 처음으로, 즉 흔적의 소멸을 통해 평등을 지향하는 이들의 근본적인 문제의식으로 되돌아간다. 내선연맹을 주장하는 것은 조선을 독립된 민족단위로 존속시킴으로써, 결국 “조선을 영원히 피지도자로 떨어뜨리려 하는”233) 잘못된 선택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선일체론자들이 동아연맹론의 대두에 민감한 위기의식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동아연맹론은 조선 식민지정책에 이렇다할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으며, 총독부측의 탄압으로 인해 대중적인 논의를 형성하지도 못하고 말았다. 1939년 朴熙道, 張德洙, 姜永錫, 金龍濟 등에 의해 조직된 朝鮮東亞聯盟本部는 비합법조직으로 始終했으며, 기관지 東亞聯盟 조차 합법적으로 배포될 수 없었다.234)
동아연맹론의 확산이 조선 식민지통치에 가져올 악영향을 느낀 것은 조선총독부만이 아니었다. 당시의 토오죠오(東條) 정권측으로서도 정치적 대립관계에 놓여 있던 동아연맹론의 세력을 견제하려 하였고,235) 동아연맹의 ‘조선자치론’은 탄압을 위한 좋은 구실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1년 12월에 가서는 동아연맹 스스로도 “東亞聯盟 결성의 4개 조건은, 독립국가 간에 적용되는 것이며, 만약 이것을 國內民族인 일본, 조선 양민족 간에도 적용하고, 따라서 조선의 정치는 독립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심각한 曲解”236)라 하여 동아연맹론이 조선인측의 독립 의지를 북돋고 있다는 世論에 대해 명확하게 부정하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1942년 3-4월에는 曺寧柱 등 쿄오토(京都) 지역의 조선인 동아연맹 참가자 6명이 ‘동아연맹 운동을 이용하여 조선독립운동을 기도한다’는 혐의로 검거되는 등,237) 잇따른 탄압으로 인해 동아연맹론이 조선 식민지정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여지는 점차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2) 내선평등의 촉구
1940년 朝鮮總督府 學務局 소속으로 근무하며 한해 남짓 녹기연맹의 회원으로서 활동했던 李恒寧은 현영섭의 내선일체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일본사람이 소위 내선일체란 걸 얘기하는데, 내선일체란 것은 일본사람들이 한국사람보고 일본사람 되라는 거거든. 그러면 이쪽에서는 뭔고 하니, 그걸 거꾸로 이용해 가지고서, ‘우리가 일본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차별을 전폐해 줘야 할 것 아니냐. 모든 차별을 없애야 할 것 아니냐’. 그러니 이쪽에서는, 일본사람은 ‘황국신민이 돼라’ 그러는 것이고, 이쪽에서는 ‘황국신민이 될 테니까, 되기 위해서 차별을 철폐해 줘야 할 것이 아니냐’. 그 차별철폐 운동에 현영섭이다, 이런 사람들이 섰다고 볼 수 있다 그말이야.”238)
증언자의 가치부여가 개입되어 있을 수 있는 事後的 회고이기는 하지만, 이상의 진술을 전혀 근거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릴 수만은 없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민족으로의 동화를 위해 내선일체론자들은 단기적으로 국체론에 입각한 설득과 전쟁수행의 협력을 통해 일본인측의 태도변화를 촉구했지만, 현실적으로 차별은 여전히 뿌리깊게 남아 있었다.
대부분의 조선민중이 일상적으로 차별을 체감하고 있는 현실에서, 조선인 내선일체론자들의 논리는 과연 얼마나 설득력을 얻을 수 있었을까? 한편으로는 이들 조선인 이데올로그들 자신이 차별의 피해자이기도 했다. 그토록 철저한 자기부정을 통해 제국에의 동화를 염원했건만, 제국은 여전히 그들을 異民族으로 위치지으며, 그들의 신뢰를 배반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인 내선일체론자들은 한편으로는 인정받기 위해 더한층 협력의 강도를 높이며 조선민중에게 황민화를 재촉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완곡한 방식으로, 그러나 끊임없이 내선차별의 철폐를 요구했다.
1940년 요시다(吉田)란 창씨명을 쓰는 오오사카(大阪)의 재일조선인이 운전수로 일하다 직장이 폐업한 후, 새로운 직장에서 채용통보를 받았으나 서류를 보고 조선인임을 알게 된 회사측에서 결정을 번복, 아무런 이유 없이 채용을 취소하는 일이 있었다. 大阪每日新聞 지상을 통해 이 사실을 접한 현영섭은 뿌리깊은 민족차별에 대해 항의했다. 그는 “우리가 내선일체를 외치는 것은, 민족적 감정도 없이 국어만으로 생활하고, 일본국민으로서 일체의 수행을 쌓고, 戰場에서 비굴한 짓을 하지 않고, 일본의 풍습을 모방하고, 자신의 것으로 삼는 사람들이,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불행해 지는 것을 막기 위함”239)이라고 하면서, 일본인측의 각성을 촉구했다.
“반도에서 태어났어도 그 능력에 따라, 그 성실에 따라, 그 근면에 따라 내지인과 같이 보답받지 않으면 안된다. 반도인이 내지인을 사랑해도, 반도인이라는 이유로 고뇌하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國策이며 人道的 문제이다.”240)
또한 그는, ‘너무나도 빈곤한 까닭에, 일본적 생활을 영위할 수 없다’고 하며, 내선일체의 기초조건으로서, 조선인에게 ‘먼저 풍요로운 생활을 주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자신, 일본적 생활을 실천하기 위해 일본식 가옥을 빌려 생활하고 있지만, 높은 家賃에 견디지 못해, 조만간 다시금 조선인 빈민가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는 불평을 토로하고 있기도 하다.241) 물론 언제나 이러한 차별 철폐에 대한 요구와 한쌍을 이루어, 조선인측의 황민화노력과 銃後協力을 촉구했음은 물론이다.
이영근의 경우에도, “일본인으로서 皇化의 열매를 거두고 있는 조선인을 만주․지나나 남방 여러 민족과 동일시하여 영구히 별개의 존재로서 피지도자적 지위에 만족시키려 하는” 것에 대해 항의하며, ‘비록 新附의 백성일지라도 황실에 충성을 다하며 鍊成을 계속하는 자는 결국 동일한 민족으로 渾然融合되어 온 것이 일본의 역사적 경험’이었다는 논리로 조선인 차별을 시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242)
민족차별은 취업이나 입학, 임금, 배급 등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상호간에 형성된 일종의 ‘感覺’으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었으며, 그러기에 더욱 體感的이었다. 다음과 같은 徐椿의 항의는 당시 조선민중이 느끼고 있었던 체감적 차별과 그에 대한 반발의 정서를 잘 보여주고 있다.
“[...]모멸당했다고 하는 점은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으로, 郵便局의 窓口라든가 驛의 出札口에서 매일같이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모멸당한다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거스름돈이 있다, 없다 하는 조그마한 일로 싸움이 일어날 경우 자신이 조선인이기 때문에 모멸당하는 것이려니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조선인과 내지인이 정말로 일체가 되어 萬世一系의 天皇을 모시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기 위해서는, 차별당하거나, 한편이 우월감을 가지거나, 다른 편이 편견을 가지고 마찰하는 것 같은 일은 피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조선에 있는 내지인은 그 점에 특히 주의를 기울일 것을, 언제나 염두에 두고서 생활하지 않으면, 입이나 붓으로 이것저것을 강조해도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243)
사실 이들의 내선차별에 대한 항의는 하등 새로울 것도, 특별할 것도 없다. 민족운동진영에서의 식민통치 비판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친일파’ 일반에게서도 끊임없이 제기되어 온 문제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중일전쟁 발발 1년을 맞아 조선사회의 ‘지도적 인사’들을 한자리에 모아 ‘朝鮮總督府 時局對策調査會’를 열었을 때도, 李升雨, 玄俊鎬 등 악명 높은 ‘친일인사’들이 민족차별을 지적하며 시정을 요구했던 것이나,244) 衆議院 議員 朴春琴이 朝鮮參政權, 內地渡航制限 撤廢를 요구한 것245)은 익히 알려져 있는 사례이다. 또한 조선인 관료집단의 임금차별 철폐요구 역시 1920년대 후반 이래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246)
이러한 ‘친일적’ 조선인들의 민족차별에 대한 문제제기는 한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권력측의 지배이데올로기를 그대로 이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帝國憲法體系上 違憲的 요소까지 있었던 ‘外地特別統治’의 방침247)을 견지해 온 식민지 조선․대만에 대해, 중일전쟁 이후 당면한 전시동원의 필요에 따라 ‘內鮮一體’․‘內台一如'의 슬로건이 제창되었는데, 이것은 장기적 계획 하에 이루어진 것이라기 보다는, 어디까지나 목전의 필요에 따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의 動員이데올로기로서 제기되었던 ‘내외지 일원화’나 천황제 이데올로기로서 ‘一視同仁’ 등이, 역으로 식민지 피지배민족에 의해 차별철폐의 이론적 근거로 전환되어 활용되기에 이른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식의 차별철폐논리는 그 자체, 권력측의 이데올로기에 기반해 있는 만큼, 체제 내적이라는 한계를 지니며, ‘권리의 요구’라는 형태보다는 ‘施惠를 청원하는’ 형태를 띠게 마련이다. 또한 ‘有權解釋’을 통치권력측에서 장악하고 있기에 몇마디 말로, 예를 들어 ‘民度의 차이’라든가 ‘황민화의 정도’ 등의 이유로 간단하게 부정될 수 있는 한계를 안고 있기도 했다.248)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치권력에 의해 언명된 다분히 임시방편적인 동원이데올로기로서의 ‘내외지 일원화’, ‘차별철폐’의 논리는 결국 권력측의 목을 졸라왔다. 슬로건으로서의 ‘내선일체’와 차별이 온존하는 현실과의 간극은, 민중으로 하여금 그 논리적 허구성에 대해 반박하고 저항하게 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청년․학생층이 ‘내선일체’ 이데올로기에 가장 빨리 적응했지만, 그렇기에 또한 가장 빨리 논리적 허구성을 깨닫고 반박하게 되었다는 사실249)은 그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민중의 저항은 결과적으로 애초의 동원이데올로기 자체를 무색케 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식민지 민중에게 ‘당근’을 주겠다는 약속이 이제는 자신에게 ‘채찍’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여기에 태평양전쟁의 戰況 악화, 통제경제의 강화, 식민지 인력동원의 증대와 함께 권력측에 가해지는 압력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외지 일원화’로 나아가는 세 가지 제도개혁이 추진되기에 이른다. 內外地行政一元化(1942. 9. 11 閣議決定) 및 조선․대만에 대한 外地呼稱 廢止(1945. 3. 26 議會決議), 外地參政權 賦與(1945. 3. 7 閣議決定, 議會決議를 거쳐 4. 1 公布), 戶籍法 改正(1944. 12. 閣議決定) 등이 그것이다.250) 이 조치들 모두가 부분적․제한적이며, 더욱이 그나마 일본의 패전으로 인해 식민지에서 실제로 시행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것이 가지는 의미, 즉 기존의 외지 특별통치를 기본으로 해 왔던 식민통치와 그 배경이 되어 온 법체계를 그 根幹에서부터 변화시키는 결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중에서도 가장 민감하고, 또 關鍵的인 것이 호적법 개정이었다. 내선차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조선인 내선일체 론자들이 여기에 주목하지 않았을 리 없다. 이하에서 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3) 호적법 개정문제: 내선일체 실현의 최종단계
모든 조선인이 완벽한 일본어를 구사하고, 일본식의 氏名을 사용하며, 일본식의 생활습관을 몸에 갖추는 것만으로 조선인이 완전한 일본인이 되는 것일까? 조선인 스스로가 완전히 일본문화를 내면화시킨 경우에 있어서도, 아니 스스로가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해 버린 단계에 있어서조차 조선인으로서의 ‘꼬리표’는 남게 된다. 이 ‘꼬리표’ 역할을 하는 것이 호적이었다.
戰前 일본의 법률체계에서는 1890년 「大日本帝國憲法」 시행을 기준으로 하여, 이전 영유지역을 내지, 이후 편입지역을 외지로 구분하는 규정이 있었다. 호적의 경우에도 地域籍으로서 내지와 외지를 구분하고 있었는데, 내지에 본적을 가진 경우 내지인, 외지에 본적을 가진 경우 외지인으로 불렀으며, 조선인은 외지인 중 조선에 본적을 가진 자를 이르는 것이었다. 호적법의 체계상 本籍轉屬禁止 조항에 의해 혼인이나 양자와 같은 신분행위를 제외하곤 地域籍 간의 이동은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었다.251) 따라서 이러한 호적법 체계가 변하지 않는 이상, 내지인의 자손은 영원히 내지인, 외지인의 자손은 영원히 외지인이라는 법적 규정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일찍이 1924년에도 조선민족 동화의 근본책으로서 조선인의 성명을 일본식으로 개명하고, 조선인의 原籍을 한번 전부 내지로 옮긴 다음, 조선에 寄留하는 것처럼 고쳐 조선인이라는 증거를 전부 인멸키자는 나카야마 테쯔(中山哲)의 주장252)이 있었지만, 조선인 내선일체론자들이 주목한 것도 바로 이 부분이었다.
‘호적법의 개정’이란 문제는 조선인 내선일체론자들이 염원했던 ‘차별로부터의 탈출’의 법적 확인이자, 조선인이었던 흔적을 지우는 마지막 과정으로서, 내선일체 실현의 최종 단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물론 호적법의 개정은 기존에 내지와 외지를 구분해 온 법체계 전체의 개정과도 연관되는 문제이다. 작게는 호적법의 개정, 크게는 法域 구별 철폐를 통해 동등한 법적 신분을 얻고자 했던 것이다.
실제로 창씨개명 실시 이후에는 이름이나 용모만으로 조선인과 일본인을 구별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민족적 차별이 온존하는 상황에서 민족을 구별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때 민족 구별에 유용하게 사용되는 것이 原籍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조선인’, ‘일본인’ 하는 차별을,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민족을 구별할 수 있었다.
결국 ‘내선일체’의 이념이 표면적으로는 관철되는 듯한 분위기 아래, 민족차별은 보다 은밀한 형태로 여전히 상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영섭은 이러한 현상을 지적하면서, 그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호적법의 개정--구체적으로는 轉籍의 허가--을 주장하였다.
“[...]이력서의 원적에는 조선출신임이 밝혀져 있다. 내지에 적을 가진 타이피스트만을 찾는 상점이 많다. 호적법은 희망자에 따라 내지로 적을 옮기는 것도, 또는 조선으로 옮기는 것도 가능하게 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것은 후일 해결될 문제이지만, 무엇보다도 창씨는 제일의 출발이다.”253)
이러한 인식은 다른 내선일체론자, 예컨대 이광수 같은 인물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같은 교육을 받고, 같은 신궁 참배를 하고, 같은 말을 하며, 같은 사실을 생각하여, 친구가 되고 부부가 되는 중에 반도인의 얼굴은 완전히 변해 버려서 호적 조사라도 하지 않는 한 내지인인지 반도인인지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호적의 이동까지 허가되게 된다면 호적을 찾아보아도 알 수 없게 되지 않겠는가. 이를 목표로 내선일체라 하겠지만[...]”254)
현영섭에 비하면 매우 완곡한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광수 역시 호적문제를 내선일체의 마지막 관건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호적 조사라도 하지 않는 한 내지인인지 반도인인지 알 수 없게 될 것”이라는 기술은 표면적으로는 내선일체가 성공적으로 진행된 결과를 나타내는 표현이지만, 사실상 호적법이 조선인에게 ‘꼬리표’로서 기능하게 될 것에 대한 우려의 표현이기도 하다. 따라서 “호적의 이동까지 허가되게 된다면” 하는 완곡한 어법을 통해 법률 개정의 희망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조선인 내선일체론자들이 호적법의 문제를 제기한 것은 영원히 차별이 지속될 지도 모른다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서만은 아니었다. 현실적으로 호적상의 구별은, 내선일체로 나아가는 구체적 방도의 하나인 內鮮結婚에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고 보았다. 조선인 남성이 일본인 여성과 결혼하는 경우, 그 자식은 당연히 朝鮮籍에 편입되어 조선인으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이것이 현실적으로 내선결혼을 가로막을 뿐더러, 일본인 어머니에 의해 일본식 생활양식에 의해 자라난 2세의 사회․정치적 존재는 여전히 조선인으로 묶여 있기 때문에 많은 곤란을 겪게 된다고 보았다.255)
사실상 轉籍 허가와 호적법의 외지시행이란 “일본인의 경계에 관한 정책의 근본적 변경”256)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런 측면에서 조선인 내선일체론자들은 정확하게 핵심을 파악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호적문제란 대단히 민감한 문제였으며, 현실적 해결책에 있어서도 매우 조심스런 방안을 제시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내선결혼에 의해 태어난 아이는 모두 내지인이 될 자격”을 부여한다거나,257) 내지 재주 조선인 중 일본에 완전히 동화된 이들에게서부터 내지로의 轉籍을 허용한다거나 하는 등의, 점진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었다.258) 이것은 후일, 내각 및 조선총독부측이 조선인의 轉籍 기준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그 일차적인 대상으로서 內地에 재주하는 조선인으로서 일본으로의 동화정도가 높은 이들을 상정했던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259)
맺 음 말
綠旗聯盟은 1933년 京城의 在朝日本人社會를 기반으로 하여, 京城帝大 豫科 敎授 쯔다 사카에(津田榮) 一族의 주도로 결성되었다.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사회는 지배민족으로서의 帝國意識과 아울러, 本國으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정치적․문화적 소외의식을 함께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배경에서 在朝日本人 특유의 아이덴티티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일본의 문화전통에 무지한 식민지출신 2세의 성장은 재조일본인사회에서 하나의 문제점으로 떠오르는 동시에, 새로운 아이덴티티 형성의 출발점이 되었다. 佛敎修養과 社會敎化를 표방하며 시작된 녹기연맹의 운동은 이같은 재조일본인사회의 상황과 요구에 기반하고 있었다.
녹기연맹은 국가주의적 성격이 강한 日蓮主義를 이념적 기초로 하고 있었다. 이들의 초기 활동은 日本國體論의 학습과 교육, 재조일본인 2세에 대한 일본문화전통의 교육 등에 중점을 두고 있었으며, 이후 中心運動으로 설정하고 수행한 ‘綠의 生活運動’이란 일련주의에 근거한 국가주의 이념의 일상화․생활화를 목표했던 것이었다.
1937년 조선인 내선일체론자 玄永燮의 등장은, 녹기연맹의 운동에서 획기적인 轉機가 되었다. 아나키즘운동으로부터 전향한 그의 문제제기를 통해 녹기연맹 내부에서는 內鮮一體의 논의가 선구적으로 시작되었고, 이것은 쯔다 카타시(津田剛)가 주도권을 장악하며 연맹의 활동이 보다 직접적으로 현실정치에 접근하는 것과 궤를 같이 하여 진행되었다.
1937년 7월, 中日戰爭의 발발을 계기로 조선총독부는 內鮮一體를 구호로 내걸며 조선인측의 인적․물적 전쟁협력을 이끌어 내려 하였다. 그러나 동원의 이데올로기로서 내세워진 만큼, 內鮮一體論은 그 구체적인 槪念定義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그저 당위적인 구호로서 외쳐질 수밖에 없었다. 이같은 혼란상황에서, 內鮮一體論의 구체화를 통해 이것을 생명력 있는 사회적 담론으로 살려낸 것이, 일찍부터 선도적으로 내선일체론을 논의해 왔던 녹기연맹이었다.
이들의 활동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들은 그때까지 혼란스럽게 진행되어 온 內鮮一體의 논의에서 理論的 定立을 시도하는 한편, 그 구체적인 실천의 방안을 제시하였다. 1939년 11월에 출간된 今日의 朝鮮問題講座는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비로소 內鮮一體論은 공허한 구호의 차원에서 벗어나, 나름의 내적 논리와 구체성을 갖춘 이데올로기로서 자리잡을 수 있었다.
또다른 한가지는, 전시체제하의 각종 단체와 운동에 중추적 활동가를 공급하였다는 측면이다. 玄永燮, 李泳根 등은 조선인으로서 대표적인 ‘전투적 내선일체론자’로서 활동했으며, 女性界의 대표적 名士로서 ‘가정으로부터의 皇民化’를 주도했던 쯔다 세쯔코(津田節子), 문화예술계 재편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쯔다 카타시, 國民總力朝鮮聯盟와 같은 단체에서 선전활동을 수행했던 모리타 요시오(森田芳夫) 등, 조선사회 재편의 중요한 지점에는 녹기연맹의 활동가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녹기연맹이 내선일체운동에 전면적으로 매진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 조선인 참가자의 확대였다. 1938년을 기점으로 증가하기 시작한 조선인 회원은, 1940년 이후 폭발적으로 늘어나, 1943년 경에는 수적으로 일본인 회원을 넘어서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경향은 내선일체운동을 통해 일종의 정치활동을 행하고자 했던 조선인들의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며, 조선인 참가자들은 녹기연맹의 조직 내에서나마 민족차별을 벗어난 인격체로서의 대우를 경험할 수 있었다.
조선인 참가자들은 단순히 ‘앞잡이’가 아니었다. 녹기연맹의 방향전환을 이끌어 내었던 조선인 내선일체론자 玄永燮 이후로, 많은 조선인 회원들이 내선일체론의 구체화, 특히 조선인을 대상으로 하는 구체적 실천방안을 마련하는 데 큰 역할을 수행했다. 그들 스스로가, 조선인으로서의 생활경험에 기초하고 있었기에, 일본인측에서는 생각해 낼 수 없었던 구체적인 실천방안의 제시가 가능했던 것이다.
녹기연맹의 조선인 내선일체론자들은 식민지시대 말기 조선 지식인들의 轉向論理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단기적으로는 민족운동의 퇴조, 滿洲事變․ 中日戰爭 등을 통해 드러나는 일본의 현실적인 힘,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세계적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블록화의 경향을 보면서 조선독립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지었다.
이같은 정세판단 아래서 이들이 취한 길은, 조선인으로서 자기존재의 철저한 부정과 제국으로의 동화를 통해 일본민족으로 편입하는 것, 이를 통해 민족적 차별로부터 영구적으로 벗어나는 것이었다.
지적․정서적 차원에서는 조선민족성에 대한 철저한 부정과 일본문화․일본정신의 체득이 요구되었고, 실천적 차원에서는 일본인으로부터 동일한 민족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인정받기 위한 노력이 요구되었다. 일본측이 내세웠던 一視同仁이나 八紘一宇의 이념에 근거하여 조선인에 대한 차별적 시각의 교정을 요구하는 한편으로, 물적․인적 전쟁동원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의무수행에 수반되는 권리의 획득을 기대하였다. 보다 장기적인 차원에서는 創氏改名, ‘國語’常用, 內鮮結婚 등을 통해 차별의 근거가 되는 조선인으로서의 자기 존재 자체를 완전히 말살하려 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새로운 민족공동체, 즉 ‘新日本民族’의 형성을 지향했으며, 이것은 ‘차별로부터의 탈출’일 뿐만 아니라, 아시아를 무대로 팽창해 가는 일본의 힘에 편승하여, 스스로를 지배민족의 일원으로 편입시키는 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이같은 ‘同化一體論’의 입장은, 조선인 사회 일반은 물론이고, ‘親日的’ 입장 일반에서도 소수에 지나지 않았고, 오히려 전쟁수행에 적극 협력하면서도 민족공동체의 保全 혹은 自治을 꾀하는 ‘平行提携論’의 입장이 다수를 차지하여 있었다. 여기서 양자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평행제휴론의 입장에서 동화일체론은 현실을 무시한 급진주의이며, 무엇보다도 정서적으로 수용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했다. 반면, 동화일체론의 입장에서는 민족성의 유지를 주장하는 평행제휴론은 곧, 차별의 근거를 존속시키는 어리석은 주장에 지나지 않았다. 玄永燮과 印貞植의 논쟁, 그리고 綠旗聯盟과 東亞聯盟의 갈등관계는 양자 사이의 대립과 긴장을 보여주는 실례였다.
녹기연맹의 조선인 내선일체론자들의 願望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의 민족차별은 여전히 常存하고 있었다. 이들은 조선민중에게 일본인으로서 인정받기 위한 가일층의 협력을 요구하는 한편으로, 완곡하지만 꾸준히 민족차별의 철폐를 요구했다. 이들의 차별철폐 요구는, 권력측의 이데올로기에 기반해 있는 이상 근본적으로 한계를 지닌 것이었다.
그러나 이 한계가 조선인 내선일체론자들의 논리에 대한 평가 그 자체가 될 수는 없다. 내선일체론의 두 가지 얼굴, 곧 동원이데올로기로서의 측면과 민족차별 철폐의 측면 중, 끝내 전자만이 관철된 것은 아니었다. 戰況의 악화와 식민지 인력동원의 증대라는 상황은, 권력측이 더이상 미봉책으로 일관할 수 있는 여지를 좁혀 갔다. 마침내 1944년 이후 戰局이 극도로 악화된 상황에서 식민지관련 정책의 일대 전환을 의미하는 제도개혁이 이루어지기에 이른다. 內外地行政 一元化, 參政權賦與, 戶籍法 改正이 그것이다. 이 중 호적법의 개정이야말로 차별 철폐의 법적 확인이며, 내선일체 실현의 최종단계로서, 일찍부터 조선인 내선일체론자들이 주목해 온 부분이기도 하였다.
전시체제하 총독부에 의해 급조된 외곽단체와는 달리, 녹기연맹은 독자적인 이념적 지향 위에서 개인들의 자발적 참여로 구성된 민간단체로서 ‘황민화’운동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녹기연맹의 활동은 위로부터 강제된 전시체제의 형성과 아울러, 아래로부터 그것을 협력․지원하는 움직임이 존재했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1939년 이래 조선인 회원수의 급증이라는 현상은, 녹기연맹의 활동이 식민지 조선사회의 재편에서 민간단체로서의 역할 수행에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在朝日本人과 조선인 내선일체론자들이 보여준 논리의 궤적은 식민지 공간에서 굴절되어 표출된 민족적 아이덴티티의 한 형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상의 연구에서 다루지 못한 부분을 중심으로 향후의 과제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綠旗聯盟의 성립 기반이 되었던 在朝日本人社會의 한 측면을 살펴보았지만, 보다 확장된 차원에서의 접근을 통해 식민지 지배체제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었던 在朝日本人社會 一般의 전체상을 그려낼 필요가 있다. 둘째, 녹기연맹과 同時期에 식민지 조선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던 여러 佛敎 宗派 및 국가주의적 흐름들을 살펴봄으로써, 녹기연맹의 戰時體制下에서의 위치와, 그들이 수행한 역할에 대해 보다 명확한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 셋째, 녹기연맹과 직․간접으로 관련을 맺고 있던 조선인 인사들에 대해 충분히 다루지 못했다. 특히 李光洙, 崔載瑞 등은 그들의 轉向과 對日協力活動이 녹기연맹과의 밀접한 관계 아래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이는 바, 향후의 연구과제로 삼으려 한다. 넷째, 조선인 ‘親日派’ 내부의 이견과 대립지점이 존재했음을 확인했으나, 상대적 위치파악에 그치고 말았다. 전시체제하의 조선인 ‘親日派’들의 유형분류와 각 입장의 특징 파악을 통해, 식민지시대 말기 조선 사상계의 전체상을 그려낼 것이 요청된다.
<부록 1>
녹기연맹 연표
[범례]
① 이 연표는 綠旗聯盟의 주요 활동상을 정리한 것이다. 여기에는 녹기연맹의 前史를 이루는 國柱會 京城局의 활동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② ‘정세사항’ 란에는 녹기연맹의 활동과 관련되는 해당시기의 주요한 사항들, 예컨대 戰況, 動員政策, 皇民化政策, 조선인측의 轉向 및 협력활동 등을 주로 기재하였다.
③ 연표의 간결함과 可讀性을 위해, 인명표기는 한자 그대로, 書名․論文名․演題 등은 原語에 가깝게 직역하여 기재하였다.
④ 해당사항의 정확한 일자를 알 수 없는 경우, 월 단위까지만 기재하였다.
녹기연맹 |
정세변화 |
1881 日蓮宗의 渡邊日運, 부산에 도항하여 日宗會堂 창립.
1894.10.18 伊東智靈, 田中智學의 「上朝鮮國王書」를 휴대하고 조선으로 출발. 인천을 통해 조선 입국. 杉村 代理公使를 통해 국왕에게 편지와 책을 전달함. 1895.3. 日蓮宗 佐野前勵, 조선국왕을 알현하여 승려의 도성출입금지를 해제해 줄 것을 요구하여 허락을 받음. 1897. 日蓮宗, 한성에 日宗會堂 설립(1898년 이전, 1907년 護國寺로 개칭). 1904.여름 伊東智靈, 仁川에 잡화상을 개점하여 경제적 기반을 마련함. 商業會 의원, 民團 의원으로 선출됨. 이후 日蓮宗의 日宗會堂과 관련하며 활동함. 1909. 伊東智靈, 日蓮主義운동 자금마련을 위해 永東郡의 黑鉛광산에 투자했으나 실패. 인천의 잡화상 화재. 한성으로 이주하여 남대문로 부근에 거주. 平戶商店 京城支店長 木村勘三의 후원을 받으며 立正安國會 京城布敎所 설립. |
1877.10. 일본 大谷派 本願寺 승려 奧村円心 釜山 상륙, 이듬해 釜山別院 설립. 1884.1. 田中智學, 蓮花會를 개칭하여 立正安國會 창립. 1893. 일본 淨土宗 野上運海, 한성에서 조선포교 시작.
1895.6.17 일본, 台灣總督府 설치.
1897.10.12 大韓帝國 선포.
1904.2.8 러일전쟁 발발. 1904.2.23 韓日議定書 조인. 1904.8.22 제1차 韓日協約 조인.
1905.11.17 제2차 韓日協約(乙巳條約) 조인. 1906.2.1 統監府 설치.
1910.6. 幸德秋水 등의 大逆事件. 1910.8.29 일본, 韓國倂合. |
녹기연맹 |
정세변화 |
1911.9.말 伊東智靈과 護國寺 主任 加藤淸亮이 협의하여 本化佛敎硏究同志會 결성(永樂町 1丁目). 1911.12. 聖祖 630遠忌를 맞아 本化佛敎硏究同志會 發會式 거행. 1913.6. 水原에 本化佛敎硏究同志會 지부 결성. 1914.9.14 본부에서 파견된 保坂智宙, 南山町 京城호텔에서 공개강연회. 이외에도 각 방면에서 도합 16회에이르는 활발한 강연 활동. 1914.11.2 本化佛敎硏究同志會, 國柱會 京城局(局長: 野中健造)으로 개칭. 1915.7.8 國柱會館 신축 개시(初音町 200番地, 10.1 落成式).
1917.3. 伊東智靈, 國柱會本部의 춘계강습회에 출강. 이때 東京帝大 樹洽會員이었던 津田榮도 강습회에 참가. 1918.2.28 伊東智靈 사망. 1918.10.1 國柱婦人會 결성. 1919.3.1 伊東智靈 1週忌를 맞아 본부에서 파견된 長瀧, 京城日報社 주최로 日之出小學校에서 ‘我國과 近代思潮’ 강연. 1919.9.7 靑年護國團 조직. 그 산하로 추정되는 護國少年團도 함께 조직(이들 중 다수가 후일 녹기연맹의 중추를 이룸). 1921.10.18 京城醫專 4년생 筈元行安의 주도로 京城天業靑年團 창립. 회원 38명(조선인 3명 포함). 이듬해 이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로 진출함에 따라 유명무실화. 1923. 國柱會 京城局 활동, 극히 침체(회합 출석자 평균 10인 이하). 1924.봄 山里秀雄, 京城商業 敎諭로 부임. 1924.4.3 津田榮, 京城帝大豫科 교수로 부임. 1924.6.30 佐藤英雄, 大邱에서 天業靑年團 조직. 1924.11. 津田榮, 豫科 학생 및 化學敎官을 |
1914.11.2 田中智學, 立正安國會를 개칭하여 國柱會 창립.
1918.8. 北一輝, 國家改造案原理大綱 집필. 1919.3.1 3.1운동.
1920.12.9 일본 社會主義同盟 결성.
1922.7.15 日本共産黨 결성. 1923.1.15 田中智學, 天業靑年團 창립. 1923.5. 改造社에서 北一輝의 日本改造法案大綱 출간됨. 1923.9.1 關東大震災. 1923.11.10 「國民精神作興詔書」 渙發. 1924.1.15 敎化團體聯合會 설립(동년 4월 中央敎化團體聯合會로 개칭). 1924.3.25 사상선도를 목적으로 하는 ‘各派有志聯盟’ 창립. 1924.5.2 京城帝大 豫科 개교.
1924.12.1 里見岸雄, 里見日本文化學硏究所 창립. |
녹기연맹 |
정세변화 |
모아 日蓮主義 학습 모임을 조직. 1925.1.14 京城帝大豫科 立正會 발회(발족당시 生徒 40명이 참가했으나 이후 激減, 3명만이 남게 됨). 1925.봄 신입생 黑木七美, 木內勝男, 宮田實 등 立正會 참가. 이후 이들에 의해 조직적 기초가 형성됨. 1925.2.11 天業靑年團 復興式(단장: 津田榮, 國柱會 京城局). 1926.1. 京城天業靑年團, 朝鮮神宮 社頭宣傳 시작. 1926.봄 豫科立正會, 프린트판 잡지 寂光 제1호 발간. 한편 大學에 진학한 立正會員들에 의해 大學立正會가 조직됨. 1927.7. 國柱會本部의 明治節 제정운동에 호응하여, 경성에서도 운동 개시. 明治會 京城支部 발회. 1928.4 ‘妙觀同人의 모임’ 발족. 1928.4.3 妙觀文庫, 妙觀 창간(창간호로 종간). 1928.4.29 城大生 5명이 八紘寮 설립(大和町2丁目), 공동생활․연찬활동. 이듬해 2월 7일 폐쇄. 1928.11. 津田節子를 중심으로 日曜會(婦人部의 前身) 조직. 山里秀雄을 중심으로 明治靑少年會 조직. 1929.11.14 妙觀文庫, 綠旗 아래에서 창간(1935.11.1 제61호로 종간, 綠旗로 해소). 1930.3.하순 제1회 日蓮主義修養會 개최(3일간, 國柱會館). 1930.9. 津田榮, 野中健造(國柱會京城局), 佐藤英雄(天業民報大邱支局長), 龜井貞人(大邱天業靑年團長) 등을 중심으로 全鮮綠化聯盟 결성. 1931.5. 全鮮日蓮主義聯盟 결성. 학생회원 津田剛 등 南鮮 각지에서 순회강연. 1931.가을 城大 文科系 학생을 중심으로 妙觀同人硏究所 조직. 會館재건계획을 비롯, 「圓融的日蓮主義의 理論과 實踐」, 「祖國의 黎明은 다가온다」 등 팜플렛 간행, 日曜會의 不 |
1925.1. 上海에서 日本共産黨 재건 결정.
1925.4.17 朝鮮共産黨 결성. 1925.4.22 治安維持法 공포. 1925.6.1 田中智學의 발의로 明治會 창립. 1925.9. 日鮮融和를 목적으로 하는 東亞聯盟 창립.
1927.2. 日本共産黨, 赤旗 간행. 1927.3.3 明治絶 제정(11.3).
1928.3.15 日共黨員 대량 검거.
1928.7. 內務省에 特別高等警察課 설치. 憲兵隊에 思想係 설치.
1929.4.16 日共黨員 대량 검거. 1929.11. 光州學生運動. 1929.12. 里見日本文化學硏究所, 國體科學聯盟으로 개칭.
1931.3. 櫻會의 쿠데타 미수(3월사건). 1931.6. 제1차 카프 검거. 1931.6.17 총독 齋藤實 사직. 1931.7.2 萬寶山事件. 1931.7.14 신임총독 宇垣一成 부임.
1931.9.18 滿洲事變 발발. 1931.10. 櫻會의 쿠데타 미수(10월사건). |
녹기연맹 |
정세변화 |
用品整理모임 개시 등 운동이 활성화. 이후 妙觀文庫․妙觀同人會․妙觀同人硏究所 등의 ‘妙觀’은 전부 ‘綠旗’로 개칭. 1931.11.15 全鮮國體主義學生聯盟을 결성하고 그 기관지로 學生綠旗 창간(1935.11.15 제41호로 종간, 綠旗로 해소). 1932.5.15 晨光閣(新會館) 落成式. 1933.2.11 綠旗聯盟 출범. 기존의 綠旗同人會, 硏究所維持會, 共濟部, 全鮮綠化聯盟, 全鮮國體主義學生聯盟 등을 산하로 통일. 1934.5 淸和女塾 설립(塾長: 津田よし江). 1935.2.11 綠人 창간(1936.2.11 제4호로 종간, 綠旗로 해소). 1936.1.1 綠旗 창간. 1936.2.11 紀元節奉祝 學生大講演會 개최(京城府民館). 1936.5.17 녹기연맹 제4회 총회(日本赤十字社 朝鮮本部). 「綠의 生活運動에 관한 方針書」 결의. 1936.6.1 山里秀雄을 녹기연맹 본부직원으로 영입, 사무국 및 교무국 주사 겸 淸和女塾 塾監. 1936.7 부인부, 양모회수운동 전개. 1936.7.25 제1회 婦人部大會(2일간,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 모토는 ‘남과 함께 잘 되자’, ‘일본과 함께 뻗어나가는 가정’. 1936.8 家庭會(거주지역별 소모임) 개시. 1936.9 회원과 독자를 대상으로 「明治天皇御製」 보급활동. 1936.10.11 녹기연맹주최, 京城府후원의 ‘東亞의 현상을 말하는 府民講座’ 개최(2일간 府民館 中講堂).津田剛 ‘일본에 있어서 준전시체제의 현단계’, 稻葉岩吉 ‘만주사변 今昔觀’, 池田林儀 ‘支那의 정치와 재벌’, 井原潤次郞 ‘동아정세의 看望’ 등. 1936.11.7 청화여숙, 제3회 가사전람회-‘음식물에 관한 전람회’ 개최(2일간, 晨光閣 및 청화여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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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11 京城帝大 反帝同盟 사건. 1932.1.28 上海事變 발발. 1932.2. 血盟團사건 1932.3.1 滿洲國 건국. 1932.4.30 安昌浩 검거. 1932.5.15 5.15 사건. 1932.11.10 총독부, 精神作興運動 개시. 1933.2.25 京城敎化團體聯合會 발회. 1933.3.27 일본, 국제연맹 탈퇴. 1933.6.7 일본공산당 佐野學․鍋山貞親 옥중 전향성명.
1934.5. 제2차 카프검거. 1934.11 時中會 조직. 1935.1.22 廣田 外相, 제국의회 연설에서 3원칙(日中親善, 중국의 적화방지, 滿洲國 승인) 발표. 1935.8.3 일본정부, 國體明徵 발표. 1936.1.15 心田開發懇談會 1936.2.26 2.26사건.
1936.7.13 총독부, 外事警察制 실시.
1936.8.5 南次郞, 조선총독에 취임. 1936.8.25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 사건. 1936.9.20 大東民友會 창립.
1936.10.21 총독부, 사상범 감찰을 위해 주요도시 7개소에 監察所와 출장소를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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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기연맹 |
정세변화 |
1936.12. 玄永燮, 녹기연맹 가입. 1937.1.14 玄永燮, 편집국 업무를 담당(3월부터 綠旗硏究所 연구원 겸임). 1937.2.11 綠旗同志會 창립. 연맹활동의 재정지원, 직영사업 경영. 1937.2.11 녹기연맹 주최, 京城府․京城敎化團體聯合會 후원의 紀元節奉祝大講演會 개최(府民館 中講堂). 森田芳夫 ‘東洋思上에서 본 現下의 非常時’. 城大敎授 尾高朝雄 ‘국가와 개인’ 강연. 1937.4. 녹기연맹본부 增改築. 1937.7.17 녹기연맹 주최, 京城府, 朝鮮․京畿道․京城敎化團體聯合會 후원의 ‘北支事變大講演會’ 개최(長谷川町 公會堂). 津田剛 ‘北支事變의 本質과 그 前途’, 朝鮮軍參謀 深堀游龜 ‘시국에 대한 국민의 각오를 호소한다’ 강연. 강연회 참석자 일동의 명의로 首相․陸軍大臣․支那駐屯軍司令官 앞으로 격려전보 발송. 1937.7. 玄永燮, 팜플렛 北支事變과 朝鮮 집필, 朝鮮敎化團體聯合會가 수만부를 인쇄․배포. 1937.8.1 國威宣揚武運長久祈願祭 개최(朝鮮神宮). 1937.8.8 玄永燮, 총독부의 순회시국강연 강사로 초빙되어 황해도 일원에서 ‘북지사변의 본질과 동아의 재건’ 강연(4일간). 1937.9.7 玄永燮, 총독부의 제2차 순회시국강연 강사로 초빙되어 忠南 일원에서 강연(5일간). 1937.9.18 綠旗醫院 開院(院長:須江杢二郞). 1937.10.23 제1회 녹의 생활 수양회. 1937.11.3 明治會京城支部 주최, 總督府․京城府․京城敎化團體聯合會․綠旗聯盟 후원으로 제8회 明治節의 밤 개최. 津田剛 ‘明治天皇의 大御心과 東洋의 平和’, 陸軍少佐 齋藤二郞 ‘北支戰線에서 돌아와’ 강연. 1937.11.12 綠旗醫院, 老幼者 무료건강상담. 1937.12.12 南京陷落奉祝式 개최(朝鮮神宮). 津田剛 ‘南京陷落의 의의와 日支事 |
1936.12.12 朝鮮 思想犯保護觀察令 공포. 1936.12.15 이재유 등 조공재건운동 검거. 1937.1.12 每日申報 國語面을 신설. 1937.1.23 일본, 군부와 정당의 충돌로 廣田내각 총사직. 1937.2.2 일본, 林銑十郞 내각 성립. 1937.3.18 총독부, 집무중 일본어를 사용하도록 각 관서에 지시. 1937.4. 총독, 5대 시정방침(國體明徵, 鮮滿一如, 敎學振作, 農工竝進, 庶政刷新) 발표. 1937.4.14 假出獄思想犯處遇규정 발표. 1937.6.6 修養同友會 사건.
1937.7.7 중국 蘆溝橋에서 중일 양군 충돌. 1937.7.8 國民徵用令 공포.
1937.7.29 일본군, 북경 점령.
1937.8.13 일본군 육전대 上海 공격(上海事變). 1937.8.20 여성단체 愛國金釵會 결성, 금비녀 헌납운동.
1937.9.10 내각,軍需工業動員法․輸出入品臨時措置法․臨時資金調停法 등 공포. 1937.9.14 총독부, 軍需動員法 실시 결정. 1937.9.23 제2차 國共合作 성립. 1937.10.1 총독부, 皇國臣民誓詞 제정. 1937.11.5 조선중앙일보 폐간. 1937.11.6 日獨伊 防共協定 조인. 1937.11.9 전문․대학생 단발령. 1937.11.11 일본군, 上海 점령. 1937.11.20 국민정부, 重慶 천도. 1937.12.13 일본군, 南京 점령. 1937.12.23 天皇 眞影을 각급 학교에 배부, 경배케 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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變의 장래’ 강연. 1938.1.15 조선인의 나아갈 길 神前奉納 및 發行奉告祭(朝鮮神宮). 1938.1.29 冬季特別硏究會, 주제는 ‘新日本建設에 관한 문제를 중심으로’(2일간). 津田節子 ‘新日本의 家庭道’, 森田芳夫 ‘新日本建設에 있어서 半島文化의 지위 특히 녹기연맹의 문화적 사명’, 현영섭 ‘新日本建設에 있어서 조선인의 역할’, 津田剛 ‘次代日本文化論序說’ 강연. 1938.2.11 京畿道知事로부터 表彰. ‘사회교화․사상선도․시국인식 심화의 공이 현저’. 1938.2.11 綠旗聯盟․京城府 합동주최, 朝鮮敎化團體聯合會․京城敎化團體聯合會 후원으로 紀元節奉祝講演 및 映畵會 개최(府民館 大講堂). 玄永燮 ‘新日本建設에 있어서 半島의 역할’, 津田剛 ‘皇道日本과 東亞의 再建’ 강연. 1938.3. 조선인의 나아갈 길 10판 발행. 1938.3.10 녹기연맹 직제개정. 녹기연구소가 녹기일본문화연구소로 개편․강화되면서 사상보급중심체제로 재편. 1938.4. 팜플렛 「長期戰과 銃後報國」 일본어 및 조선어로 2만부(연말까지 2만5천부) 발행, 전국에 배포. 1938.5.6 新日本 동인 佐藤春夫․保田與重郞․佐藤龍男 등이 北支特派員 부임여로에 경성방문. 7일에 玄永燮․森田芳夫 등과 회견. 1938.5.22 제6회 녹기연맹총회(府民館). 綠의 생활운동 확대․강화를 결의. 主幹職 신설(津田剛). 1938.6.10 財團法人 生活改善中央會(회장: 伯爵 林專太郞)에서 녹기연맹 부인부 表彰. 1938.6.10 里見岸雄, 鮮滿巡講 도정에 京城방문, ‘세계에 빛나는 日本國體’ 강연(府民館). 1938.6.30 玄永燮, 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 常務幹事로 위촉, 녹기연맹 본부 |
1938.1. 모든 잡지의 면지나 판권에 皇國臣民誓詞를 게재토록 함. 1938.1.15 육군성, 조선에 지원병제도 실시 계획 발표. 1938.1.16 일본정부, 中國國民政府를 상대로 하지 않는다고 성명.
1938.2.9 平北老會,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으로 인정.
1938.2.26 조선육군지원병령 공포.
1938.3.3 제3차 조선교육령 개정 공포. 1938.3.10 安昌浩 사망.
1938.3.31 改正朝鮮靑年訓練所規定 공포. 1938.4.1 국가총동원법 공포.
1938.4.19 총독부, 중등학교 조선어시간을 수학․실업으로 대체시킬 것을 지시.
1938.5.22 興業俱樂部 총검거.
1938.6.18 修養同友會 葛弘基 등 16명, 전향 성명, 大東民友會 입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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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 및 편집주임직 사퇴(녹기연구소 연구원직은 보유). 1938.7. 津田榮, 國民精神總動員 京城聯盟 相談役․京畿道聯盟 理事로 위촉. 1938.7.1 津田節子, 南次郞 朝鮮總督과 면회, ‘조선인의 생활향상은 가정개조에서 시작. 이를 위해서는 조선인 생활의 장단점을 분석하여 계획성있게 이루어져야 함’을 밝힘. 1938.7.8 玄永燮, 南次郞 朝鮮總督과 면회, ‘感情的 內鮮一體를 위해서는 國語를 철저히 보급해야 함’을 건의. 1938.7.31 녹기연맹 주최, 조선총독부 학무국 후원 金剛山 國體明徵夏期講習會 개최(5일간, 江原道 外金剛 溫井里). 津田榮, ‘敎育勅語의 철저한 이해와 國體信念’, 森田芳夫 ‘과거 및 현재의 非常時와 日本國體’,경성제대 교수 高木市之助 ‘文藝道와 臣民’, 津田節子 ‘銃後와 婦人’. 1938.8.16 京畿道知事로부터 新聞紙法에 의한 綠旗 발행을 인가받음. 1938.9. 朝鮮軍關係의 陸軍病院 전부에 綠旗 每號를 기증하기로 결정. 1938.9.2 綠旗耳鼻咽喉科 永登浦分院 개원(분원장: 본원장 須江杢二郞 겸임). 1938.9.10 津田節子를 중심으로 조선의 여성지도자들이 모여 부인문제연구회 발족. 1938.9.16 津田榮, 朝鮮防共協會 京畿道聯合支部 評議員으로 위촉. 1938.10. 津田節子, 非常時國民生活改善會 위원으로 선출. 1938.10.13 부인부, 만주이민단 자녀에게 완구보내기운동(15일간). 1938.10.29 淸和女塾․녹기연맹 부인부, 玩具에 관한 전람회(3일간, 本町 大澤商會 3층홀). 이후 釜山, 鎭海, 平壤 등지에서 순회전시. 1938.12. 勝尾信彦 「시국을 어떻게 볼 것인가」, 臼井儉吾 「聖戰이 지향하는 |
1938.7.7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발회.
1938.7.11 張鼓峰에서 日蘇 양군 충돌.
1938.7.24 전향자단체 時局對應全鮮思想報國聯盟 결성.
1938.9. 육군특별지원병 훈련소 준공. 1938.9. 興業俱樂部 申尙雨 등 54명, 전향성명서 발표.
1938.9.10 조선장로교총회, 신사참배 결의.
1938.9.24 朝鮮聯合靑年團 발족.
1938.11. 수양동우회 이광수 외 28명, 사상전향서를 제출. 1938.11.3 近衛 수상, 동아신질서 건설 성명. 1938.11.28 李碩圭, 大東一進會 조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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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 발간, 銃後報國强調週間에 약 1만부 배포. 1939.1. 須江愛子, 淸和女塾 塾監으로 전임. 1939.1. 「日本國民訓」 발간, 이후 3월까지 3천부 보급, 3천부 增刷. 1939.2. 李泳根, 녹기연맹 가입. 1939.2.11 녹기연맹 주최, 國民精神總動員 京城聯盟 후원 ‘紀元節 奉祝 國民精神發揚 講演會’ 개최(府民館 大講堂). 廣島文理科大學 名譽敎授 吉田賢龍 ‘東亞의 新建設과 日本精神의 高揚’ 강연, 영화 ‘靑春角力日記’ 상영. 1939.3. 勝尾信彦 「시국을 어떻게 볼 것인가」, 臼井儉吾 「聖戰이 지향하는 것」 합계 6천부 추가 보급. 1939.3. 팜플렛 「八紘一宇의 基礎로서의 일본정신」 간행, 4월말까지 1만부 보급. 1939.4. 인사이동. 柳澤七郞 녹기연맹 강사 겸 綠旗農生塾長 임명, 津田節子 본부 主事代理兼務 면임, 崔世濬 敎務主任 임명. 1939.4.1 津田榮, 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 기구개편으로 參事에 추천. 1939.4.16 綠旗農生塾 開塾式(朝鮮神宮). 塾長 柳澤七郞, 入塾生 4명. 1939.5.14 제7회 녹기연맹총회(府民館). 內鮮一體, 農村敎化, 時局에 대응하는 生活刷新, 國民保健 및 體位에 기여한다는 4대 목표 제시. 녹기연맹을 財團法人化할 것 결의. 1939.5.30 제1회 綠의 生活硏究會. 津田剛 ‘現代日本과 綠의 生活觀’ 講話. 1939.6.28 臼井儉吾 大佐의 「聖戰下에 있어서 조선의 進路」를 支那事變 2주년 기념으로 발간. 1939.8.8 부인부․청화여숙, 6월 이후 수합된 완구를 滿洲拓士團에 기증. 1939.8.12 天皇機關說 배격의 발기인 蓑田胸喜 來城, 반도호텔에서 津田榮․森田芳夫․玄永燮 등과 회담. 1939.8.31 大橋壽子, 淸和女塾講師 겸 綠旗 |
1939.1. 東洋之光 창간. 1939.1.5 平沼騏一郞 내각 성립. 1939.1.24 초등학교 교과서 전면 개정.
1939.3.14 황군위문작가단 발족.
1939.3.30 군사교련을 필수과목화.
1939.5.12 노몽한사건 발발.
1939.6.11 천도교본부, 挺身聯盟 결성. 1939.6.15 朝鮮春秋會, 排英國民大會. 1939.중반 朝鮮東亞聯盟本部 조직. 1939.7. 전문학교․고등학교 입시에서 영어과목 폐지. 1939.8.5 全朝鮮排英同志會聯盟 결성.
1939.8.16 조선 최초로 防空훈련 실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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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文化硏究所 연구원에 임명. 淸和女塾 敎務系 업무. 1939.10.3 東亞聯盟建設要綱 저자 杉浦晴男 渡滿 도중 京城驛에서 도중하자, 역에서 녹기연맹 간부들과 회견. 1939.10.27 청화여숙․녹기연맹 부인부, ‘食物에 관한 전람회’ 개최(3일간, 本町 大澤商會 3층홀). 방문객 약 2천명. 1939.11.17 國柱會 창립자 田中智學 사망. 1939.11.27 今日의 朝鮮問題講座(전6권) 출간. 1939.12. 부인부의 朴仁德 등, 全鮮思想報國聯盟 주최 橋北國語講習會 교육을 담당. 1940.1.7 녹기연맹 주최, 官民內鮮有識者 20명을 초청하여 松本重彦의 씨창설 설명회 ‘氏의 역사적 정신과 그 창설에 관하여’ 개최(千代田그릴 別室). 1940.1.11 氏創設相談部 개설. 매주 목요일에는 면접상담(담당: 城大敎授 松本重彦). 이후 3개월간 약 1500명 500건 상담. 1940.2. 누구나 알 수 있는 氏의 解說 출간. 1940.2.11 津田榮, 朝鮮總督 南次郞으로부터 사회교화 공로자로 表彰. 1940.2.11 精動京城府聯盟․綠旗聯盟 주최, 2600년 紀元節 奉祝大講演會(府民館). 吉田貞治 ‘神武天皇의 御鴻業을 기리어 받들며’, 徐椿 ‘現下의 時局과 국민의 각오’, 津田剛 ‘八紘一宇와 世界新秩序’ 강연. 영화 ‘出征譜’ 상영. 1940.2.16 津田剛, 新生活宣言 출간. 1940.2.20 누구나 알 수 있는 氏의 解說 17판 重刷. 1940.3.27 누구나 알 수 있는 氏의 解說 개정증보판 발행. 1940.3.31 氏創設의 참정신과 그 手續 발간. 1940.4. 기존의 ‘綠의 生活硏究會’를, ‘新生 |
1939.9. 조선국방부인회 결성. 1939.9. 朝鮮學生愛國聯盟 결성. 1939.9.21 王兆明, 화평친일정권 수립 성명. 1939.10. 人文評論 창간. 1939.10.8 東亞聯盟協會 발족. 1939.10.16 조선유림대회, 朝鮮儒道聯合 결성, 국민정신총동원운동에 협력할 것을 결의. 1939.10.29 朝鮮文人協會 결성.
1939.11.10 朝鮮民事令 개정.
1939.11.11 黑龍會, 日韓合倂功勞者感謝慰靈祭 개최(博文寺).
1940.1.4 朝鮮映畵令 공포.
1940.1.16 米內光政 내각 성립.
1940.2.11 창씨개명 접수 개시.
1940.3.5 국민협회, 조선 참정권 청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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活硏究會’로 확대․개편. 지역별․계층별 모임으로 세분화. 1940.4.1 春季聯盟員擴大運動․讀者倍加運動 시작. 1940.5. 녹기연맹 주최, 國民精神總動員 朝鮮聯盟․京城日報社 후원, 紀元2500年記念 懸賞論文 ‘肇國의 精神과 朝鮮의 將來’ 모집개시. 1940.5.19 녹기연맹 제8회 총회(府民館 中講堂). 新日本文化建設에 기여, 內鮮一體完成의 추진력 구성, 全鮮敎化網의 組織을 목표로 설정. 津田榮, ‘國策의 動向과 綠의 生活運動의 先驅的役割’ 강연. 1940.6.10 春季擴大運動 결과 신입회원 621명 가입. 1940.8.6 森田芳夫, 南次郞 조선총독의 菊池寬․久米正雄․大佛次郞․中野實․小林秀雄 일행 환영회(總督官邸)에 출석. 1940.8.10 氏創設相談所 업무종료. 총상담건수 923건, 총상담인원 3386명(수속에 관한 상담을 포함하면 5050명). 1940.9.15 須江杢二郞․上田龍男 본부강사 임명. 1940.10.11 財團法人 中央敎化團體聯合會에서 ‘多年間 국민교화에 진력한 공로’로 選獎狀 수여. 1940.10.12 綠旗聯盟 平壤支部 發會式. 기타 海州支部, 仁川支部도 비슷한 시기에 開設. 1940.10.20 綠旗學生塾 開塾式(塾長 津田剛). 1940.10.26 忠淸北道支部 發會. 1940.11.1 현상논문 당선작 발표. 1等 없이, 2等1席에 星野相河(裵相河) 당선. 입상자 및 심사위원 좌담회(京城日報社 貴賓室), 施賞式(總督府 總督室), 좌담회(綠旗聯盟本部) 등의 행사. 1940.11.20 國民總力朝鮮聯盟, 事務局役員 결정. 津田榮(補導部參事), 津田剛(思想部參事) 등 6명을 선임. 1940.11.23 부인부․청화여숙, 처녀들의 생활 |
1940.5.1 경성부민 식량배급에 매출표제 실시. 1940.5.10 朝鮮出版協會 결성.
1940.6.29 外相 有田, 大東亞共榮圈 건설 주장. 1940.7.1 총독부, 학생의 만주․중국 여행 금지. 1940.7.6 일본, 社會大衆黨 해산. 이후 10월까지 모든 정치단체 해산. 1940.7.22 제2차 近衛내각 성립. 1940.8.5 菊池寬․久米正雄․大佛次郞․中野實․小林秀雄 등, 京城府民館에서 공개강연회. 1940.8.10 東亞日報․朝鮮日報 폐간. 1940.9.27 日獨伊 삼국동맹 성립.
1940.10.12 大政翼贊會 성립. 1940.10.12 조선문인협회원, 지원병 훈련소 체험입영.
1940.10.16 國民總力朝鮮聯盟 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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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람회 개최(1주일간, 京城丁子屋). 관람자 1만 2천명. 이후 仁川, 平壤, 群山, 釜山 등지에서 순회전시. 1940.11.30 津田節子, 朝鮮文人協會에서 조직한 全鮮講演會 강사로 辛島驍, 崔載瑞, 白鐵 등과 함께 출발, 西鮮 각지에서 ‘시국과 여성의 생활개선’ 강연. 1940.12. 星野相河, 綠旗日本文化硏究所 및 편집부 업무에 참여. 1940.12. 興亞文化出版株式會社 창립. 1940.12.10 金泉支部 결성식. 1940.12.26 仁川支部 결성식. 1941.1. 總力聯盟에 文化部가 신설되며 委員에 津田榮, 山里秀雄, 津田剛 등이 취임. 津田節子는 婦人指導常務委員으로 선임. 1941.2.11 기원 2601년 봉축식. 1941.2.16 鎭南浦支部 발회식. 1941.3.28 綠의 생활 특별강습회 ‘27世紀의 人生觀’(3일간, 연맹본부). 1941.3.30 제9회 녹기연맹총회(府民館 中講堂). 津田剛, ‘世界의 現狀과 生活文化의 建設’ 강연. 1941.4. 綠旗 권두에 ‘皇國臣民의 誓詞’ 게재 개시. 1941.4.7 忠北支部, 약 1개월과정의 家庭婦人國語講習會 시작. 1941.4.18 德和女塾 개교(塾長: 永河仁德). 1941.4.23 제1회 綠의 隣組家庭會. 1941.7.6 釜山支部 發會式. 1941.7.6 忠南支部 發會式. 1941.7.31 全州支部 發會式(支部長: 松波 全北新聞社長). 1941.8.16 咸北支部 發會式(支部長: 中樞院參議 張間憲四郞). 1941.10. 源平義郞 연맹본부 복귀. 牧洋, 편집부 업무 참여. 總務部 신설. 1941.10.4 녹기연맹 주최, 國民總力朝鮮聯盟 후원, ‘戰時國民生活展覽會’ 개최(9일간, 丁子屋). 總督夫妻를 비롯, 2만명 이상이 관람. 이후 羅南, 全州, 群山, 大田, 釜山, 大 |
1940.12.25 皇道學會 결성.
1941.1. 新時代 창간. 1941.1.10 신문지등게재제한령 공포․시행. 1941.1.25 조선음악가협회 결성.
1941.2.12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 공포. 1941.3.7 국가보안법 공포. 1941.3.25 조선교육령 개정, 소학교를 국민학교로 개칭. 1941.3.31 국민학교규정 공포, 조선어학습 폐지.
1941.4.13 日蘇불가침조약 조인.
1941.5. 제1회 잡지통제로 四海公論 등 21종 폐간. 1941.7.1 조선어전보 폐지. 1941.8.1 미국, 침략국에 대한 石油禁輸. 1941.8.24 興亞報國團準備委員會 결성. 1941.8.25 三千里社 주최 임전대책협의회.
1941.9.3 朝鮮臨戰保國團 결성. 1941.10. 人文評論을 國民文學으로 개제. 1941.10. 재일조선인 지원병 응모 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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邱 등지에서 순회전시. 1941.10.5 京城支部 發會式(朝鮮神宮). 1941.11.12 京城支部, 思想文化講座(2일간, 中央無盡會社例會場). 津田剛 ‘內鮮一體의 新展開’, 森田芳夫 ‘內鮮問題의 歷史的考察’, 三木弘 ‘日本精神과 半島生活의 方向’, 星野相河 ‘半島思想界의 現狀과 그 前途’. 1941.12. 綠旗農生塾, 梧柳洞일대가 공장지대화함에 따라, 京義線 金郊驛 부근((黃海道 金川郡 金山面)으로 이전. 1942.2. 津田榮, 國民總力朝鮮聯盟의 評議員으로 추대. 1942.2. 津田榮, 東京第一高等學校 敎授로 轉任. 1942.2.5 부인부, 제1회 決戰下의 婦人講座 개최(遞信事業會館).津田節子 ‘싸우는 日本의 女性’, 廣川幸三郞 ‘戰時下의 食事’ 강연. 기타 요리 및 의복 전람회. 1942.3. 國民總力朝鮮聯盟, 津田剛의 生活哲學槪說, 三木弘의 赫土에 그린다를 추천도서로 선정. 1942.3.14 津田節子, 大日本婦人會朝鮮本部 發會式에서 理事로 취임. 1942.3.22 제10회 녹기연맹총회(府民館). 津田剛, ‘日本文化의 再編成’ 강연. 1942.4.30 綠旗聯盟․國民總力京城府聯盟 공동주최, 海軍協會京城分會․京城日報․大阪每日新聞 후원으로 ‘九軍神의 밤’ 개최(府民館 大講堂). 津田剛 ‘殉國의 精神’, 黑木剛一 ‘아, 九軍神’ 강연. 1942.5. 本部, 機構改編(1室5部制: 主幹室, 總務․敎務․編輯․庶務․婦人部). 1942.5.1 釜山支部의 山田鐵雄, 本部 敎務主任으로 취임. 1942.6.20 鏡城支部 결성식(郡廳會議室). 1942.8. 朝鮮社會事業協會의 후원으로 綠旗乳幼兒相談所 개설, 京城帝大 敎授 高井俊夫 및 矢崎光子, 大熊 |
1941.10.18 東條英機 내각 성립. 1941.10.22 朝鮮臨戰報國團 결성. 1941.11.15 조선언론보국회 결성.
1941.12.8 일본군, 진주만 공격, 태평양전쟁 발발. 1941.12.16 일본군, 홍콩 점령. 1941.12.22 전시범죄처벌특례법 공포.
1942.1.2 일본군, 마닐라 점령. 1942.1.18 日獨伊 군사협정 조인. 1942.1.21 東條 수상, 大東亞共榮圈 건설의 지도방침 표명.
1942.2.15 일본군, 싱가포르․말레이 점령.
1942.3.1 일반가정의 금속류 강제 회수.
1942.4.7 육군특별지원병 신체검사 시작. 1942.4.8 石原莞爾, 世界最終戰論 발간.
1942.5. 三千里를 大東亞로 개제. 1942.5.1 조선어학회 기관지 한글 폐간. 1942.5.8 閣議, 조선에 징병제 실시 결정.
1942.6.5 미드웨이해전. 1942.6.18 신임총독 小磯國昭 부임. 1942.7. 국민총력 조선연맹, 가정의 鍮器공출 지시. 1942.7.26 조선연극협화와 조선연예협회가 통합, 조선연극문화협회 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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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변화 |
良惠 등을 초빙하여 매주1회 상담(丁子屋 社交室). 1942.8. 新女性 창간. ‘반도 유일의 부인잡지’로서 1만부 발행. 1942.8.20 淺野茂子 추도회(京城大和塾 2층강당). 1942.9. 津田剛, 森田芳夫 등, 半島新文化硏究會 발기인으로 참여. 1942.9.23 綠旗日本文化硏究所 이외의 일반직원을 대상으로 하는 ‘綠會硏究會’ 개시. 1942.9.24 綠旗金郊農生塾 落成式. 1942.11. 津田剛가 國民總力朝鮮聯盟 理事 겸 宣傳部長으로, 森田芳夫가 동 專務參事 겸 宣傳部 編輯課長으로 임명. 源平義郞가 森田의 후임으로 綠旗聯盟 編輯部長에 취임. 金村龍濟․牧洋가 편집부에 참여. 1943.2.12 京城支部, 제1회 특별연구회(2일간, 淸和女塾). 중견회원 약 40명 참석. 津田剛 ‘半島에 있어서 日本的 性格의 育成’, 須江杢二郞 ‘決戰下에 있어서 綠旗聯盟의 使命’ 강연. 1943.3.19 綠旗農生塾, 國民總力黃海道聯盟 및 黃海道農會로부터 表彰. 1943.3.25 京城支部 주최, 國民總力京城府聯盟 후원으로 제1회 府民講座 개최(遞信事業會館). 京城師團 福永憲 ‘時局의 現段階’, 森田芳夫 ‘神武天皇의 御東征과 大東亞戰爭’ 강연. 1943.4. 德和女塾을 흡수, 직접경영. 1943.4.1 綠旗, 用紙難으로 四六倍版으로 발간 개시. 1943.5.1 忠北支部, 가정부인을 대상으로 國語講習會 개시. 1943.7.18 小林秀雄․林房雄 등의 來城을 맞아 座談會 개최. 辛島驍, 寺田瑛, 寺本喜一, 芳村香道, 牧洋, 金村龍濟, 兪鎭午, 崔載瑞 등 참석. 1943.7.19 婦人部, 總力聯盟․大日本婦人會 후원으로 綠旗乳幼兒相談所 개설 및 新女性 발간 1주년 기념 婦 |
1942.8.17 延禧專門을 敵産으로 몰아 접수.
1942.10.1 조선어학회사건. 1942.10.1 朝鮮靑年特別鍊成令 공포. 1942.11.4 제1회 대동아문학자대회(東京 大東亞會館). 1942.12.5 제1회 敎育審議委員會에서 1946년부터 의무교육 실시를 결정.
1943.2.1 일본군, 과달카날에서 철퇴 개시.
1943.3.1 조선에 징병제 공포.
1943.4.3 제1회 國語文藝總督賞 시상(수상자: 金村龍濟 亞細亞詩集). 1943.4.17 조선문인보국회 결성.
1943.7.28 해군특별지원병령 공포. |
녹기연맹 |
정세변화 |
人大講演會 개최(府民館). 九州帝大 遠城寺宗德 ‘싸우는 독일의 어머니를 보고서’, 津田節子 ‘황국의 家風과 女性’ 강연. 1943.8.19 津田剛, 金村龍濟 등 大東亞文學者大會 참석을 위해 출발. 1943.말 津田節子, 병상의 시어머니 よし江와 함께 東京으로 이주. 그 뒤를 이어 須江愛子가 淸和女塾 및 부인부 활동을 총괄함. 1944.3. 綠旗를 興亞文化로 改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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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8.25 제2회 대동아문학자대회(東京 大東亞會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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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2>
녹기연맹 관련 문헌목록
[범례]
① 이 문헌목록은 綠旗聯盟 및 (株)興亞文化出版에서 발간한 각종 출판물, 외부 출판사에서 간행한 녹기연맹 관계자의 저작, 그리고 戰後의 회고록․추모문집 등을 망라한 것이다.
② 현재까지 파악된 관련 문헌을 종류별로 분류하고, 간략한 소개를 덧붙였다. 발행연도는 西紀로 환산하였고, 발행장소가 京城인 경우에는 발행지를 따로 표기하지 않았다.
③ 소재가 파악된 문헌 중, 戰前에 발행된 것은 소장처를 밝혀 두었다. 다만, 동일한 문헌이 여러 곳에 소재하고 있는 경우, 대표적인 한두 곳을 기재하였다.
④ ‘소재불명’이라 기재된 문헌은 현재 實物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서평 또는 광고 등을 통해 발간 사실을 파악한 것을 가리킨다. 이 경우 해당 문헌의 소개는 서평 및 광고의 내용에 따랐다.
⑤ 녹기연맹 관계자료 중 綠人, 綠旗 및 단행본 일부는 辛珠栢 편, 戰時體制下 朝鮮總督府外廓團體資料集(高麗書林, 1997)에 포함되어 影印 출간된 바 있다. 영인본에 수록된 경우, □影 표시를 달아 그 사실을 밝혀 둔다.
⑥ 문헌의 소재 파악 및 수집에는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다. 김인덕, 나구모 사토루(南雲智), 로쿠탄다 유타카(六段田豊), 미즈노 나오키(水野直樹), 아라키 아쯔코(新木厚子), 이대화, 이향규, 장석흥, 진노 스스무(神野進), 최기영, 타카사키 소오지(高崎宗司), 호테이 토시히로(布袋敏博). 지면을 빌어 諸位께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1. 잡지
寂光, 京城帝大豫科立正會.
프린트판으로 1926년 봄에 창간호를 발행하였다. 상세사항 및 소재불명.
妙觀, 京城天業靑年團 妙觀文庫.
1927년 4월 3일 발행하여 창간호로 끝났다. 4․6판 프린트 소책자, 42면. 소재불명.260)
綠旗の下に, 京城天業靑年團 妙觀文庫.
1929년 11월 14일부터 妙觀文庫에서 4․6판 소책자(부정기간행물)로 발간하다가 1933년 5월 제2호부터는 綠旗聯盟에서 4․6배판 소형신문 형태의 월간지로 발행하였다. 1935년 11월 제61호로 終刊, 이후 綠旗로 통합되었다. 소재불명.
學生綠旗, 綠旗文庫.
학생운동(全鮮國體主義學生聯盟)의 기관지로 1931년 11월 15일부터 4․6배판 소형 신문 형태로 綠旗文庫에서 발간, 1932년 3월 제3호부터는 월간으로 전환, 1933년 4월 제16호부터는 綠旗聯盟에서 발간되었다. 1935년 11월 제41호로 종간되고 綠旗에 통합되었다. 소재불명.
綠人, 綠人發行所.
창간호(1935.2.), 제2호(1935.5.), 제3호(1935.9.), 제4호(1936.2.)로 총 4호 발행. 연4회 발행의 ‘思索과 硏究 季刊誌’를 표방하며 발행되었으나, 1936년 1월부터 綠旗를 발행함에 따라 1936년 2월 종간호를 내며 폐간했다. 국판으로 1, 2호는 60면 내외, 3, 4호는 90면 내외의 분량이다. 매호마다 소수 필자에 의한 전문적인 글로만 이루어져 있는데, 이러한 작업을 통해 녹기연맹 성립 초기의 이념적 통일성을 확보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影
綠旗, 綠旗聯盟.
1936년 1월부터 1944년 2월까지, 1936년과 1937년 12월의 정기휴간을 제외하고는 한번도 휴간없이 발간되어 총 96호가 발행되었다. 1938년 8월에는 新聞紙法의 인가를 얻어 정치 기사를 다룰 수 있게 되었고, 1940년 12월에는 興亞文化出版株式會社를 창립하여 위탁 발행하였다. 국판으로 발간되다가, 用紙 수급의 어려움으로 인해, 1943년 4월호부터는 4․6배판으로 판형이 커졌다. 국립중앙도서관에 1936-1942년분이 소장되어 있고, 1943년분은 일본 東京經濟大學 사쿠라이(櫻井)문고에 소장되어 있다.261) 그 외 일본 국회도서관과 고려대 도서관, 민족문제연구소 등에도 일부가 소장되어 있다. 일부 □影
興亞文化, 興亞文化出版株式會社.
綠旗가 改題되어, 1944년 3월부터262) 발간되었다. 현재 자료의 소재를 알 수 있는 것은, 일본측 연구자의 개인소장분, 그리고 일본 국회도서관 소장분 數冊에 불과하다. 新女性의 광고를 통해 1944년분 일부의 주요목차는 확인할 수 있다.
新女性, 興亞文化出版株式會社.
여성 대상의 월간잡지로서, 1942년 8월, 綠旗의 자매지로 창간되었다. 현재 소재가 확인되는 것은 1944년분 10책 뿐이다(1944년 8호는 결호, 9․10호는 합병호로 발간). 4․6배판 각호 50면 내외. 서강대 도서관 소장.263)
2. 녹기 팜플렛
녹기팜플렛264)의 기획의도에 대해 스스로 “팜플렛의 효과는 절대적으로 크다. 운동발전에 따라 각종의 팜플렛을 필요로 한다”고 밝히고 있다. “매우 평이하게 쓰여지고, 가격도 높지 않은, 한권으로 묶여있는 책”265)을 발간함으로써 녹기연맹의 이데올로기를 대외적으로 전파하려 했다. 이하 소장사항를 別記하지 않은 것은 모두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影
(1) 녹기팜플렛
第1輯 須江杢二郞, 圓融的日蓮主義の實踐と理論, 綠旗文庫, 1931.
4․6판 본문 133면. 田中智學에 의해 체계화된 日蓮主義 이념을 평이하게 해설하고, 현실에서의 ‘자기수양과 사회의 조직화, 체계화’를 위한 ‘전투적 실천’ 방향을 제시. 녹기연맹 초기의 이념적 기반 형성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第2輯 津田剛, 祖國の黎明は迫る, 綠旗文庫, 1932.
4․6판 본문 78면. 국내 및 국제정세, 일본의 대륙정책에 대해 개관하고, 이러한 문제를 國體主義에 의해 해결해 나갈 수 있음을 주장. 녹기연맹 초기의 정세관 및 정치적 지향을 보여주고 있다.
第3輯 津田剛, 極東問題の基本的構成
綠人 창간호(1935. 2)에 게재된 바 있는 「東亞を貫くもの: 極東問題の基本的構成に關する一考察」을 팜플렛으로 재간행. 서지사항․소재불명.
第4輯 津田榮, 人間生活の本質と日本國體の精神, 綠旗聯盟, 1936.
4․6판 56면. 綠人 제4호(1936. 2)에 게재된 같은 제목의 글을 팜플렛으로 재간행. 전편 ‘인간생활의 본질’, 후편 ‘일본국체의 정신’으로 구성. 소재불명.
第5輯 森田芳夫, 孫先手マラソン優勝と日章旗マーク抹消事件, 綠旗聯盟, 1936.
4․6판 본문 23면. 東亞日報․朝鮮中央日報의 일장기말소사건에 대한 녹기연맹의 입장 표명. 조선인측의 사상경향에 우려를 표시하고, ‘사회교화’에 대한 연맹의 사명을 확인.
第6輯 佐藤泰舜, 大乘精神講話, 綠旗聯盟, 1937.
4․6판, 본문 114면. 저자는 京城帝大 조교수로서, 이 책은 경성제대 문학회에서의 강연, JODK 放送講話 및 綠旗 지상에 연재한 것((1936년 7월~1937년 5월) 등을 묶어 출간한 것이다.
第7輯 ?
서지사항 불명
第8輯 津田榮, 長期戰と銃後報國, 綠旗聯盟, 1938.
1938년 4월, 일본어 및 조선어 번역본으로 2만부(연말까지 2만5천부) 를 발행, 전국에 배포하였다. 소재불명.
(2)강연팜플렛
第1輯 津田榮, 日本文化の世界的意義.
서지사항․소재불명.
第2輯 津田榮, 八紘一宇の理想とその實現.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第3輯 津田剛, 世界の動向と日本, 綠旗聯盟, 1933.
4․6판 본문 28면. 1933년 2월 11일 紀元節 기념 ‘日本再認識講演會’(京城府 社會館)에서의 강연 내용을 수록한 것. 국제주의, 국가주의, 블록화의 경향 등, 국제정세에 대해 개관하고, 國體精神에 기반한 일본의 진로를 논구.
第4輯 森田芳夫, 外來思想と日本國體, 綠旗聯盟, 1933.
4․6판 본문 22면. 위의 책과 마찬가지로 1933년 ‘日本再認識講演會’에서의 강연을 수록한 것이다. 일본 國體論의 근거가 되는 역사적 연원, 三種의 神器 등에 대해 설명하고, 사회 내의 분열을 불러일으킨 각종 외래사상을 국체정신에 근거해 융화통일시켜 갈 것을 주장.
第5輯 津田榮, 明治天皇と日本國體.
서지사항․소재불명.
第6輯 森田芳夫, 日本建國理想の發展.
서지사항․소재불명.
第7輯 伊藤憲郞, 今日の思想問題.
저자는 조선총독부 廣州․光州․釜山地法 등의 판사를 역임. 서지사항․소재불명
第8輯 角和善助, 將來戰の謎.
저자는 육군 輜重兵 少佐. 서지사항․소재불명.
第9輯 黑田幹一, 獨逸人の生活.
저자는 京城帝大 豫科 교수. 서지사항․소재불명.
第10輯 岡田貢, 高麗時代迄の京城
저자는 경성부 촉탁. 서지사항․소재불명.
3. 금일의 조선문제 강좌
「금일의 조선문제 강좌」는 “내선일체의 깃발 아래, 약진 조선의 제문제의 실체를 구명”266)한다는 목적에서 기획되었다. 1939년 ‘내선일체의 실현’이 녹기연맹의 중대임무로 규정되면서, 그때까지 구호로서 외쳐지던 ‘내선일체’가 가일층 구체화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는데, 「금일의 조선문제 강좌」는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결과물이라 하겠다. 4․6판 전질 540면.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影
第1冊 津田剛, 內鮮一體の基本理念, 綠旗聯盟, 1939.
第2冊 鈴木武雄, 大陸兵站基地論解說, 綠旗聯盟, 1939.
第3冊 八木信雄, 「學制改革と義務敎育の問題」/ 海田要, 「志願兵制度の現狀と將來への展望」, 綠旗聯盟, 1939.
第4冊 綠旗日本文化硏究所, 朝鮮思想界槪觀, 綠旗聯盟, 1939.
第5冊 孫貞圭 外, 現代朝鮮の生活とその改善, 綠旗聯盟, 1939.
第6冊 森田芳夫, 國史と朝鮮, 綠旗聯盟, 1939.
4. 단행본
녹기연맹 발행의 단행본을 주제별로 분류해 살펴 보았으며, 「녹기팜플렛」과 「금일의 조선문제 강좌」 등의 시리즈물은 제외했다. 서평, 광고 등을 통해 발간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책들도 포함시켜, 그 제목에서 내용을 유추하여 분류하였다.
1) 불교․철학
森田芳夫, 槪觀佛敎史, 綠旗聯盟, 1935.
4․6판 본문 231면. 인도에서 불교의 발생, 支那로의 전래와 지나불교의 발전, 메이지 이후에 이르는 일본불교의 전개과정을 통사적으로 서술하고, 향후 일본불교가 나아갈 바에 대해 서술. 서울대, 고려대 도서관 소장.
津田剛, 新生活宣言, 綠旗聯盟, 1940.
4․6판 본문 156면. 1940년 2월 16일 출간. 애초 綠の生活宣言이란 제목으로 기획되었으나, 출간시에 改題. 주로 綠旗에 집필했던 논설 등을 일관된 체계에 따라 재편한 것으로서, 일본 국체론적 시각에서 세계문화 및 정세를 진단하고, 이를 생활운동과 연결. 연이은 二七世紀の世界觀, 生活哲學槪說과 함께, ‘津田剛의 철학 3부작’으로서 녹기연맹의 이념적 기초를 확립. 국립중앙도서관․숙명여대 도서관 소장.
津田剛, 二七世紀の世界觀, 興亞文化出版株式會社, 1941.
4․6판 본문 162면. 27세기란 皇紀를 기준으로 한 것(西紀 1941년=皇紀 2601년)으로서, 일본 중심의 세계사적 대전환기를 맞아 國體精神에 근거한 생활 및 인생관의 대전환, 곧 ‘綠의 생활’ 이념을 논구하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숙명여대 도서관 소장.
津田剛, 生活哲學槪說, 興亞文化出版株式會社, 1941.
4․6판 본문 221면. ‘津田剛의 철학 3부작’ 완결편으로서, 이전의 저술에 비해서 철학서로서의 엄밀한 체계가 두드러진다. 칸트 이후 현상학에 이르는 유럽 근․현대의 철학적 흐름, 니시다(西田)철학으로 대표되는 일본 현대철학, 불교, 기독교, 神道 등에 대한 비판적 고찰 위에서 자신의 ‘생활철학’의 체계를 수립하고 있다. 1942년 3월 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에 의해 추천도서로 선정된 바 있다. 서울대 도서관 소장. 1942년 東京 三敎書院에서 재출간되기도 했다.
2) 국체론
綠旗聯盟 編, 日本國民訓, 1939.
수첩크기 82면. 1939년 1월 발간, 이후 3월까지 3천부를 보급하고, 다시 3천부를 增刷하였다. 神勅大詔, 詔勅, 明治天皇御製를 비롯하여 제종교의 설법 등을 편집, 일상의 수양에 도움이 되게 하려는 목적에서 편찬. 일본 나라(奈良) 縣立도서관 소장.
吉田賢龍, 八紘一宇の基礎としての日本精神, 綠旗聯盟, 1939.
4․6판 36면. 일본국체론에 대한 평이한 해설서. 1939년 3월에 간행하여 4월말까지 1만부를 보급하였다. 소재불명.
吉田賢龍, 日本精神과八紘一宇, 綠旗聯盟, 1939.
4․6판 46면. 八紘一宇の基礎としての日本精神의 조선어 번역본. 소재불명.
3) 국제정치․군사론
勝尾信彦, 時局を如何に見るべきか, 綠旗聯盟, 1938.
4․6판 14면. 중일전쟁 발발 후 국제정세에 대한 조선군 보도부장의 해설. 1938년 12월, 아래의 聖戰のめざすもの와 함께 발간하여 銃後報國强調週間에 합계 약 1만부 배포. 1939년 3월에는 다시 6천부 추가 보급. 소재불명.
臼井儉吾, 聖戰のめざすもの, 綠旗聯盟, 1938.
4․6판 24면. 이른바 ‘성전’을 수행하는 일본의 논리를 설명한 제20사단 참모장의 글. 소재불명.
臼井儉吾, 聖戰下に於ける朝鮮の進路, 綠旗聯盟, 1939.
중일전쟁과 동아의 재편, 대륙병참기지로서의 조선, 조선의 총후봉공과 내선일체의 실현 등을 다루고 있다. 1939년 6월 28일 支那事變 2주년 기념으로 발간. 소재불명.
大熊良一, 戰爭と協同組合, 興亞文化出版株式會社, 1945.
4․6판 본문 379면. 저자는 朝鮮金融組合聯合會 調査課長으로서, 전시 통제경제 하에서의 각종 협동조합운동의 사례와 조선에서의 실천방향에 대해 논하고 있다. 국민대 도서관 소장.
4) 정치․내선일체론
玄永爕, 朝鮮人の進むべき道, 綠旗聯盟, 1938.
4․6판 본문 204면. 조선인 내선일체론자 현영섭의 ‘전투적’ 내선일체론. 과거의 조선, 현대 조선인생활의 비판, 민족주의․사회주의 비판, 조선인의 나아갈 길, 부록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5) 여성․가정․생활
綠旗聯盟婦人部 編, 家事の工夫, 綠旗聯盟, 1937.
소재불명.
綠旗聯盟 編, 生活豫定表, 綠旗聯盟.
1937년 이래 매년도마다 발간. 현재 1941년도분까지 발간사실이 확인됨. 서지사항․소재불명.
綠旗聯盟 編, 綠の生活の栞, 綠旗聯盟, 1937.
소재불명.
綠旗聯盟婦人部 編, 家庭食事讀本, 綠旗聯盟, 1940.
4․6판 130면. 주식인 쌀에 대하여, 부식물에 대하여, 식사하는 법 등의 내용으로 구성. 소재불명.
綠旗聯盟婦人部 編, むすめの會計帳, 綠旗聯盟, 1940.
소재불명.
三木弘, 赫土に描く, 興亞文化出版株式會社, 1941.
4․6판 본문 275면. 화가로서 綠旗의 삽화를 그려온 필자가 조선의 의식주에 대해 느낀 점과 그 개선방향에 대해 논한 글모음. 고려대 도서관 소장.
綠旗聯盟, 戰ふ日本の家庭, 興亞文化出版株式會社, 1942.
서지사항․소재불명.
津田節子, 戰ひと女性文化, 興亞文化出版株式會社.
서지사항․소재불명.
高井俊夫, 育兒と看護の實際, 興亞文化出版株式會社, 1944.
4․6판 본문 358면. 경성제대 조교수인 필자가 육아 및 유아질병에 대한 어머니들의 이해를 위해 집필한 것으로, 녹기연맹의 綠旗乳幼兒相談所 설치․운영과 일맥상통한다. 국민대 도서관 소장.
津田節子, 日本の母と子, 興亞文化出版株式會社, 1944.
4․6판 260면. 전시하 여성생활에 관한 글모음. 일본 家政學院大 소장.
6) 대중계몽서
綠旗日本文化硏究所, 誰もわかる氏の解說, 綠旗聯盟, 1940.
4․6판 56면. 씨창설의 의의, 조선의 성과 일본의 씨, 씨창설의 구체적 방법 등을 서술, 창씨개명제도의 갑작스런 시행을 맞아 당황하는 조선인들에게 실제적 지침을 제공하려 하였다. 출간 1개월만에 19판 重刷, 같은 해 3월말에는 개정증보판을 발간하였다. □影
綠旗日本文化硏究所, 氏創設の眞精神とその手續, 綠旗聯盟, 1940.
4․6판 본문 209면. 일본의 씨와 조선의 성의 차이, 씨창설의 의의, 조선식 성 대신 씨창설을 해야 하는 이유 등에 관해 綠旗 지상에 실렸던 글들을 재수록하고, 권말에는 부록으로 창씨개명에 필요한 수속과 구체적인 이름짓는 법에 관한 안내, 한자의 일본어 音訓讀 일람을 수록하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綠旗聯盟 編, 決戰靑年手帳, 興亞文化出版株式會社, 1944.
서지사항․소재불명
綠旗聯盟 編(?), 國民必勝鍊成訓, 興亞文化出版株式會社, 1944.
서지사항․소재불명
綠旗聯盟 編, (全鮮學童綴方集) 徵兵の兄さんへ, 興亞文化出版株式會社, 1944.
4․6판 240면. 지원병․징병 및 태평양전쟁을 소재로 한 소학생 작문집.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影
7) 문예
加納辰夫, 杏花に戰ひぬ, 綠旗聯盟, 1940.
국판 44면. 綠旗(1940년 7월~9월)에 연재되었던 종군화가 加納辰夫의 전쟁문예를 단행본으로 출간. 소재불명.
三木弘, 土のことば, 興亞文化出版株式會社, 1944.
4․6판 300면. 조선의 농촌 및 생활문제를 소재로 한 글모음으로 일종의 ‘조선풍토기’. 애초에는 朝鮮と神社生活으로 예고되었었다. 소재불명.
張赫宙, わが風土記, 綠旗聯盟, 1942.
조선․만주 기행문 및 조선문학의 현상에 대한 글을 모았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같은 해 東京의 赤塚書房에서 재출간되기도 하였다. 赤塚書房本은 영남대 도서관 소장. □影
張赫宙(野口稔), 岩本志願兵, 興亞文化出版株式會社, 1944.
4․6판 본문 248면. 지원병, 징병 및 銃後報國을 소재로 한 4편의 단편소설과 1편의 방송극 대본을 모은 작품집.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重松髜修, 續 朝鮮農村物語, 興亞文化出版株式會社, 1945.
4․6판 433면. 中央公論社에서 간행된 朝鮮農村物語의 續編으로서, 綠旗(1942년 9월호~1943년 11월호)애 연재한 것을 모아 출간했다. 단국대, 서울시립대 도서관 소장.
綠旗聯盟 編, 大和塾日記, 興亞文化出版株式會社, 1944.
4․6판 130면. 淸和女塾 출신으로서 大和塾 일본어강습회에서 일하다 20세로 사망한 淺野茂子의 유고집.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影
立野信之, 大義生きん, 興亞文化出版株式會社, 1944.
4․6판 340면. 소재불명.
湯淺克衛, 遙かなる地平, 興亞文化出版株式會社, 1944.
4․6판 340면. 만주개척단을 소재로 한 소설. 소재불명. 1940년 東京 東亞公論社에서 출간된 것을 재간행한 것으로 보인다. 東亞公論社本은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5. 기타 출판사에서 간행한 녹기연맹 관계자의 저작
金聖珉, 綠旗聯盟, 東京: 羽田書店, 1940.
4․6판 본문 419면. 조선인측의 皇民化와 내선일체운동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 제목과는 달리 녹기연맹의 활동을 직접적인 소재로 삼고 있지는 않으며, 다만 “‘녹기연맹’이란 現下의 조선에서 내선일체운동의 표어”라는 데에서 이러한 제목을 붙이고 있다.267) 일본 국회도서관․東京經濟大學 櫻井文庫 소장.
森田芳夫, 御稜威に甦る朝鮮, 國民總力朝鮮聯盟, 1944.
4․6판, 본문 134면. 국립중앙도서관․고려대 亞硏 소장. 역사적․인류학적 차원에서 내선일체의 필연성을 찾고 있다. □影
上田龍男, 大義に生きる: 日本民族への意志, 每日申報社, 1941.
4․6판 본문 242면. 일본정신을 자각하기까지 자신의 체험과 감상을 밝히는 한편, 내선일체에 이르기 위한 조선청년들의 각성과 노력을 촉구하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경희대 도서관 소장.
上田龍男, 朝鮮の問題と其の解結, 正學硏究所, 1942.
4․6판 본문 71면. 내선일체 실현에 장애가 되고 있는 일본인 및 조선인측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그 해결책을 논의하고 있다. 현상에 대한 비판이 직설적으로 기술된 까닭에 한정출판하여 지도층 인사들에게만 배포하였다. 일본 京都大學 人文科學硏究所 소장.
上田龍男, すめら朝鮮, 日本靑年文化協會, 1943.
4․6판 본문 292면. 제1편 ‘朝鮮史觀의 재검토’에서는 역사적으로 살펴본 내선일체와 한국병합을, 제2편 ‘결전하의 조선’에서는 일제말기 각분야에 걸친 사회재편과 전쟁동원을 다루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한국정신문화연구원 소장.
上田龍男, 朝鮮靑年に急告す, 靑年朝鮮社, 1945.
4․6판 본문 62면. 戰局의 악화로 B29의 일본 본토 공습이 진행되던 1945년 5월에 출간. 조선청년들에게 가일층의 전쟁협력과 일본정신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野中健造․森田芳夫 編, 智靈遺響, 國柱會京城局, 1936.
國柱會의 조선․만주 포교에 선구적인 역할을 수행한 이토오 찌레이(伊東智靈: 1852~1918)의 추모문집. 특히 森田芳夫의 「伊東 선생에 의한 朝鮮日蓮主義運動의 開拓」, 同 「伊東 선생 入寂後의 朝鮮日蓮主義運動 發展史」 등은 녹기연맹의 前史로서 國柱會활동 및 녹기연맹 태동기의 활동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료라 할 수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일본 國柱會本部 소장.
津田榮, 獨逸現代の敎育思潮と制度, 東京:目黑書店, 1930.
4․6판 본문 253면. 1927~1929년간 독일유학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독일의 學制와 교과과정별 내용과 특징 등을 소개하고 있다. 津田榮는 이 책의 출간을 기점으로 연구자에서 교육자로 轉身, 동년 7월에는 總督府 視學委員에 위촉되기에 이른다. 고려대 도서관 소장.
津田榮, 基礎無機化學, 東京: 裳華房, 1940
4․6판 본문 342면. 고등학교용 화학교과서로서, 녹기연맹측은 이 책에 대해 “일본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적 문화”와 화학을 결합시킴으로써 “지금까지 미국적 또는 독일적이었던 화학교육이 완전히 일본적으로” 변화되게끔 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268) 중앙대 도서관 소장.
玄永爕, 新生朝鮮の出發, 大阪屋號書店, 1939.
4․6판 본문 375면. 綠旗를 비롯한 각종 잡지에 게재했던 내선일체론 관련 논설들을 모았다. 국립중앙도서관․국립국회도서관 소장. □影
6. 전후 녹기연맹 관계자의 회고․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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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기농생숙 숙장이었던 저자가 자전적 소설 형식으로 식민지 조선에서의 활동을 기록했다.
‘柳澤七郞著 韓野に生きてを中心に’(君島一郞․柳澤七郞 對談, 1969)
일본 學習院大學 東洋文化硏究所 소장 中央日韓協會 자료, 5인치 녹음테이프 2릴(등록번호: T348, T349).
이영근, 이 멍에를 메오리까, 교회교육연구원, 1985.
해방 후 미군 통역, 국회 전문위원, 서울신문 상무 등을 역임하고, 渡美 후 牧師로 활동한 이영근의 회고록.
田川孝三․森田芳夫 외, 須江杢二郞さんを偲ぶ, 1958.
須江杢二郞 사망 1주기를 맞아 간행한 추도문집. 일본 學習院大學 東洋文化硏究所 소장 中央日韓協會 자료.
津島武信, わがあゆみ, 1980.
朝鮮油脂工業所를 경영하며 綠旗聯盟 활동을 재정적으로 지원한 바 있는 저자의 회고록.
津田榮, 私の步んでた理科學敎育の道, 東京:大日本圖書, 1982.
津田榮의 화학 및 화학교육에 관한 유고집. 주변인물들의 회고와 연보, 저작목록이 덧붙여져 있다.
淸和の會 編, 白き花, 1974.
津田節子의 추도문집. 節子의 유고, 청화여숙 졸업생 및 주변인물들의 회고문으로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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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ssimilationist Movement of
Ryokki Renmei in Colonial Korea:
Focucing on Korean Participants' Activities and Discourse
LEE Sung-Yup
Major in History
The Graduate School of Korean Studies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Ryokki Renmei(綠旗聯盟: Green Flag Leage) was established in 1933, that was based on Japanese immigrant society of Keijō(京城), and leaded by Tsuda Sakae(津田榮) and his family. Japanese immigrant society of colonial Korea had imperial mentality of ruling ethnicity, and political-cultural alienation from native country at the same time. This condition influenced their identity. Growing of young generation who is ignorant in the japanese cultural tradition was not only a problem in the immigrant society, but also became a starting point of new indentification. The Ryokki Renmei's movement aimed at Buddhist training and social edification, was based on these conditions and needs of Japanes immigrant society.
Ryokki Renmei's ideological foundation was Nichirenism(日蓮主義), the statist Budhism. Their activities in the early stage were focucing on studing and teaching Japanese statism, Japanese cultural tradition to the young generetion. And later, they decided and practiced the ‘living movement of green(綠の生活運動)’, the life style of statist Nichirenism.
In 1937, the participation of Hyŏn Yŏng-Sŏp(玄永燮), a Korean who apostatized from the anarchist movement, became a decisive turning point. He claimed the ‘integration of Japan and Korea(內鮮一體)’, and suggested the discussion about it in the organization. Now, Ryokki Renmei's activities were concerned about actual political situation, under the hegemonic influence of Tsuda Katashi(津田剛).
With the outbreak of Sino-Japanese War in July 1937, Government-General raised the slogan ‘integration of Japan and Korea’ for the effctual mobilization. But the slogan was nothing but a temporary shift, and the definition was also ambiguous. So it could not avoid falling into a sort of hollow Sollensethik. In the chaos, Ryokki Renmei that had leaded the discussion of integration before the war, could theorize the definition, and organize it as social discourse.
Their activities are able to be devided into two part. First, they attempted to generalize the integration theory, and propose actual policy. On the other hand, they provided ideologues and activists available for many kinds of government-related organization.
With the progress of movement, the number of Korean participants increased. They were not a just running dog of Japanese Imperialist. They could concretize the theory and policy from their own ethnic viewpoint and exprience. We can see a slice of political apostasy of Korean intellectual through their logic.
They concluded that Korean independent is impossible from judging various situations; the ebb tide of liberation movement, Japan's realistic power, and the worldwide trend of regional bloc. The perpect denial of Korean ethnic identity and assimilation to the empire, that was the way they selected to escape from the discrimination. In a short term, they appealed the discrimination based on kokutai(國體: the essence of Japanese Empire) ideology, and required the equal right proportionate to the equal duty. And in a long term, they attempt to annihilate the basis of discrimination in itself by Japanizing of name, ordinary use of Japanese language, intermarriage, etc. Furthermore, this process was not only for the escape from the discrimination, but also for the rebirth to the ruling nation in Asia, through making the ‘new Japanese nationality’.
Neverthless, this opinion was minority not only in the Korean general society, but in the ‘pro-Japanese group’ who endeavored to maintain the ethnic identity or to gain the self-government notwithstanding cooperating the mobilization policy. They, so-called ‘assimilationist’ and ‘cooperationist’, criticized each other that ‘stupid to keep up the basis of discrimination’ and ‘impractical radicalist’. We can find the illustration in the complication between Hyŏn Yŏng-Sŏp and In Chŏng-Shik(印貞植), or Ryokki Renmei and Tōa Renmei(東亞聯盟: East Asian League).
Though the hope of Korean ideologues of Ryokki Renmei, the discrimination existed in the real world as usual. They demanded war cooperation to Korean people the more, in the other hand required the abolition of the discrimination in a roundabout way but stubbornly. However, their logic of requiring the equality was based on ideology of political power, so that had been limited essentially.
Differ from government-related organizations that composed hastily by Government-General, Ryokki Renmei that organized by personal spontaneous participation, bore a part of integration and mobilization movement. These activities are, with the forming of war basis from the top, back up it from the lower part. Especially, the phenomenon, the increase of Korean participants since 1939, can explain that they succeeded in practice as non-government organizaton on the war basis. Besides, logic of Japanese immigrant and Korean apostates is significant, because we can see the refracted ethnic identity in the space of colony through it.
☞ 출처 : < http://wednes.neti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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