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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핵심교리
■ 삼법인(三法印)
불교의 근본 교의 중 삼법인이란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말한다. 여기에 일체개공(一切皆空)을 합쳐 4법인이라 하기도 한다.
법인(法印)이란 우주법계의 근본 구성원리로 불교의 일정 불변한 근본진리란 뜻이다. 하나하나 풀어 설명하면.
『이 세상의 온갖 것은 변하고 또 변하는 것 그 움직임이 끊임이 없네(諸行無常)』
『변하고 변하는 그 모든 것 서로가 의지하여 도와서 있고 홀로 있을 수는 없는 것이네(諸法無我)』
『조화를 이루어 안정이루네(涅槃寂靜)』
『이 세상 모든 사물을 이름하여 공이라 하는 하나의 근원에서 만들어지네(一切皆空)』
이와 같이 4가지 근본원리가 우주 삼라만상을 지배한다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참으로 기가 막힌 우주의 통찰이라 아니할 수 없다. 허공에 떠있는 무수한 별의 움직임으로부터 생사의 문제까지 삼법인 사법인에 맞추어 보면 풀리지 아니하는 문제가 없다.
헤겔의 변증법도 삼법인을 본뜬 것에 불과하다. 삼법인을 우리의 삶에 응용해보면, 우리의 몸에서부터 거대한 대자연에 이르기까지 그 모두는 허공으로부터 빨아들인 기운을 호흡하며 그를 바탕으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름하여 공이라 하는 무한자의 세계는 삼라만상의 모두를 형성하는 모체이고, 생물학, 식물학, 동물학 등 제반학문은 공의 세계를 갖가지로 설명해 놓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공에 대한 바른 이해가 불법의 진수요 요체라 말씀하신 부처님 말씀은 여기에 연원을 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만들어져 있는 만상은 모두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 하나도 없고 동물은 식물을 밑바탕으로 또 식물은 동물의 썩은 시체를 밑거름으로 생명을 유지해 갑니다. 식물이 없다면, 동물이 존재할 수가 없고, 부모가 없으면 내가 없고, 또 네가 없으면 나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삼라만상은 이같이 상호 뗄래야 뗄 수 없는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만약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타(他)를 파괴한다면 결국 스스로 파멸의 길로 접어들 것은 불을 보듯 명백한 일입니다. 이 같은 상호연관성을 제법무아라 하지요.
또 이 같은 연관성은 궁극의 안정을 향해 나아가는 데 이를 열반적정의 차원으로 이야기합니다. 인간이 끊임없이 태어나고 죽는 물결 속을 헤치며 생사를 반복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열반적정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만큼 그 어느 것도 변해 가는 것입니다. 이 같은 끊임없는 변화를 제행무상이라 합니다. 삼법인, 사법인이야말로 대자연과 이 우주의 운행에 대한 법칙성을 지극히 과학적으로 구성해 놓은 진리 중의 진리라 할 수 있습니다.
■ 팔정도(八正道)
팔정도는 팔정도지(八正道支) 또는 팔정도분(八正道分)이라고도 한다. 불교를 실천 수행하는 중요한 종목을 여덟가지로 나눈 것이다. 팔정도는 이 수행 방법이 중정(中正) 중도(中道)의 정도로서 완전한 수행 방법임으로 성인의 도로 나타내어 성도(聖道)라고도 한다.
(1) 정견 (正見)
정견은 [바로봄]을 뜻한다. 곧 올바른 견해이다. 이 정견은 유무(有無)의 편견을 벗어난 정중(正中)의 견해이다. 곧 사(사)와 정(正)을 분별하는 견해이고 바른 견해로 편견없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고도 한다. 바로 보는 것이 바른 삶의 시작이다.
(2) 정사유(正思惟)
정사유는 올바른 생각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입장을 바르게 생각하는 것을 말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이치에 맞게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바르게 사유한다. 바르게 마음먹는다.'는 뜻으로 '생각할 바'와 '생각 안할 바'를 바르게 잘 분간하는 것이다.
(3) 정어 (正語)
올바른 말, 곧 온갖 망어(妄語) 사어(사語)등을 하지 않는 말이 정어이다. 올바른 생각에 의해 하는 말이고 항상 바른 생각과 바른 말을 하여 구업을 짖지 말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부드러운 말을 해야 한다. 이는 '진실되고 올바른 언어생활'을 말한다. 즉 거짓말, 꾸며대는 말, 서로 이간시키는 말, 남을 성나게 하는 말 등을 하지 않는 것으로 '바른 견해'의 적극적 실천이다.
(4) 정업 (正業)
올바른 행위, 살생이나 도둑질 따위의 악한 행위를 하지 않고 선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 이것도 역시 '바른 견해'의 적극적 실천인 것이다.
(5) 정명 (正命)
'올바른 생활 수단'을 말하는 것으로 바른 견해에 입각한 전체적인 생활에 있어 바른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는 곧 정당한 방법으로 의식주를 구하는 것으로 남과 나를 다같이 이롭게 하는 바른 직업을 갖는 것도 그 뜻의 하나이다.
(6) 정정진 (正精進)
올바른 노력, 한 마음으로 노력해 나가는 것을 뜻한다. 이는 곧 노력으로 인하여 아직 발생하지 아니한 악을 나지 못하게 하며, 나지 아니한 선을 발생하게 하는 일이며, 옳은 일에는 물러섬이 없고 밀고 나가는 정열과 용기를 뜻하기도 한다. 이는 바로 불자의 구도 자세라 할 수 있다.
(7) 정념(正念)
올바른 정신과 생각, 사념을 버리고 항상 향상을 위하여 정신을 집중시키는 것을 말하며 바른 생각을 말한다. 또한 '바르게 기억하는 것'으로 생각할 바에 따라 잊지 않는 것이다. 참된 진리를 항상 명심하고 기억하여 다른 잡념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사유와 함께 내면적인 마음의 기초를 확고하게 다니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마음속에 정견 (正見)이 가득차고 항상 하도록 하는 것이다.
(8) 정정 (正定)
'바르게 집중(集中)'한다는 말로서, 마음을 한 곳에 모으는 것인데 '삼매(三昧)'라는 음역어를 통해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수행법이다. 이는 정념이 더욱 깊어진 상태로서, 정념의 성취로 몸과 마음의 조화가 이루어지고 지극히 잘 조화되고 통일된 마음에 온갖 번뇌와 어지러운 대상이 모두 쉬게 되면서 마치 가을 하늘에 지혜의 달이 뚜렷이 빛나는 경지를 뜻한다.
■ 사성제(四誠諦)
제(諦)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진실, 사실, 진리 등을 가리키는데 쓰이며, 동시에 엄숙한 단어를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사성제는 '네 가지 거룩한 진리'라는 말이다. 즉 고(苦) 집(集) 멸(滅) 도(道)의 네 가지를 설하여 이것을 신성한 종교적 진리로 삼고 있는데서 사성제라고 부르는 것이다. 마치 의사가 병을 치료함에 있어 병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 원인을 알아 낸 다음, 건강한 상태의 정상적인 표준을 알아서 거기에 맞는 치료 방법을 강구하듯이, '고→ 집→멸'을 알고 멸에 이르는 바른길을 행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1) 고성제 (苦聖諦) 의 뜻
우리 인생의 현실은 고(苦)라는 것으로 경전은 8가지 괴로움(八苦)을 들고 있다. '어떤 것이 고성제인가?' 생(生)하고, 늙고, 병들어, 죽고, 미운 것과 만나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고,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것은 괴로움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오취온(五取蘊, 나라고 取着된 몸과 마음)은 괴로움이다. 불교에서 '괴롭다'라고 말할 때, 그것이 인생에서의 행복을 전면 부정한 것은 아니다. 부처님은 일반적으로 물질적 정신적인 여러 형태의 행복을 인정하였다. 그러한 행복을 인정하고 찬양한 후, 그것들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기 쉽다'라고 하였다. 즉 무상한 것은 무엇이든지 괴롭다는 속성을 가진 의미에서 괴로움인 것이다.
(2) 집성제 (集聖諦)의 뜻
괴로움의 집(苦集)이라는 성제는 위에서 말한 괴로움이 어떻게 해서 발생하게 되는가의 이유를 밝혀주고 있다. 집(集)이라는 술어는 원래 '결합하여 일어난다'는 뜻으로 한자의 뜻대로 '모은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집기(集起)라고 하면 뜻이 더 잘 통할 것이다. 이는 괴로움은 연기(緣起)한 것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가리킨 것이다. 경에서는 집성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그것(集)은 재생(再生)의 원인이 되는 갈애로서 격렬한 탐욕에 묶여 있으며, 여기저기 새로운 기쁨을 찾아 나선다. 다시 말해 그것은 욕애(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망), 유애(존재 그 자체와 형성에 대한 갈망), 무유애(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갈망)등이다' 인간에게 온갖 괴로움과 윤회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여러 가지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탐욕 욕망 갈애 열망 등이다. 그러나 연기법에서 보았듯이 모든 것은 상대적이며 상호 의존적이기 때문에 하나의 절대적인 원인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고의 근본 원인으로 간주되고 있는 탐욕도 다른 것, 즉 느낌(受)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며, 이 느낌은 접촉(觸)에 의해서 일어나게 되어 이러한 과정이 반복적으로 순환되면서, 결국 연기적 의미의 '집 (集, 緣起)'이 되는 것이다.
(3) 멸성제(滅聖諦)의 뜻
괴로움의 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는 집제와 정확하게 반대되는 개념이다. 고의 원인이 애 탐 등의 집기라면 멸제는 그것을 없애버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괴로움 또는 고의 지속에서 해탈하고 벗어나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생사의 괴로움이 무명에서 연기한 것이라면 무명의 멸진을 통해 우리는 그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가 있을 것이다. 괴로움의 멸이라는 성제는 우리에게 이 명백한 사실을 깨우쳐주고, 동시에 괴로움이 사라진 그러한 종교적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지를 원적, 혹은 열반이라고 하여, 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해탈하고 생사를 초월하여 불생불명의 진리를 체득한 경지를 말한 것이다.
(4) 도성제 (道聖諦)의 뜻
도제는 열반에 이르는 방법 곧 실천하는 수단을 말한다. 그 방법은 여덟 가지의 수행 방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가 곧 팔정도의 수행방법이다. 괴로움의 멸에 이르는 길이라는 도성제는 위에서 제시된 멸의 경지에 도달하는 방법이다. 즉 고의 멸진에 이르는 구체적인 실천항목인 것이다. 종교의 생명은 말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걸어가는데 있다는 말이 있다. 걸어간다는 것은 곧 실천수행을 의미하는 것이다. 도성제의 구체적인 실천 항목으로서는 '성스러운 팔지(八支)의 길'이라 불리는 팔정도가 있다.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의 여덟 가지 실천사항을 가리킨다. 사성제는 이처럼 고 집 멸 도의 네 가지 진리이다. 이 진리는 고제, 집제를 유전(流轉)하는 인과로 나타내고 멸제, 도제는 깨달음을 위한 인과로 나타낸다. 곧 고 집은 세간의 인과 속에서 흘러가는 것이고, 멸 도는 세간의 인과를 초월하여 깨달음을 얻는 행위이다.
■ 12연기(十二緣起)
모든 중생들이 불성을 망각하고 현실의 고통바다에서 헤매는 원인과 그 결과를 열두 가지 단계로 나타낸 것을 십이연기법이라 합니다. 십이연기법은 십이인연라고도 하며 만상은 실체가 없고 서로 인연 따라 일어나고 의지하는 관계라 하는 사실을 설명해 줍니다.
1.무명(無明)은 어리석음의 근원인 무지를 의미합니다. 어리석고 진리를 알지 못해서 사물의 도리를 옳게 판단하지 못하는「한 생각(一念)」 이 번뇌와 악업을 힘입어 고과를 낳게 합니다. 그러므로 무명은 번뇌의 근본이며 악업의 시초요, 중생을 만드는 원인입니다.
2.행(行)은 무명이 일으킨 작용을 말합니다. 무명이 작용하여 식을 일으켜 몸과 입과 뜻의 탐, 진, 치, 만의(慢疑)등 삼독심 내지는 오독심을 의미합니다.
3.식(識)은 행의 결과로 얻어진 분별을 의미합니다. 현재의 몸을 조직하는 중심체이며 성격을 형성하는 모체가 됩니다.
4.명색(名色)은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말하는데 색수상행식의 오온 가운데 수상행식의 무형체를 명이라 하고, 지수화풍의 유형체를 색이라 합니다.
5.육입(六入)은 탁태된 후 눈, 귀, 코, 혀, 몸 뜻이 외계와 접촉하는 여섯 곳이기에 육입이라고 합니다.
6.촉(觸)은 정신적인 감지의 단계를 의미합니다. 근(根)과 진(塵) 과 식(識)을 화합시키는 작용을 말합니다. 출생 후 2∼3세까지의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맡는 등 외부의 경계에 접촉하는 촉각을 말합니다.
7.수(受)는 고통을 피하고 즐거움을 느끼는 단계를 말합니다. 외계로부터 받아들이는 고와 락의 감각을 말합니다.
8.애(愛)는 탐욕의 마음으로 즐거움을 구하는 단계로 이해득실의 욕망, 모든 것을 욕구하여 만족을 얻고자 하는 본능적 욕심 특히 재생의 애착을 갖게 함을 말합니다.
9.취(取)는 집착의 단계를 말합니다. 자기의 사랑하는 바를 놓치지 않으려는 아집을 뜻합니다.
10.유(有)는 존재성을 얻는 것. 즉, 애(愛)·취(取)로 말미암아 미래의 결과를 있게 하기 때문에 유라 합니다.
11.생(生)은 애·취·유 등에 의해 혹업을 지어 일으켜 다음 세상에 출생하는 찰나를 말합니다.
12.노사생(老死生)과 노사(老死)가 서로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어 잇달아 생겨나는 죽음을 말합니다. 다시 받은 몸이 병들어 죽는 것을 일컬으며 생 받는 자의 필연적인 결과를 의미합니다. 이같이 생명은 갖가지 인(因)이 쌓여 끊임없이 돌고 돌아 끊일 날이 없습니다. 무명을 인연으로 해 삼계육도(三界六途)를 이같은 열둘의 단계로 재현하며 끊임없이 윤회하는 것을 십이인연의 인과라 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상징물
■ 법륜(法輪)
부처님의 교법으로 일체 중생의 번뇌를 씻는 것을 법의 수레바퀴로 표현했다. 초기 불교의 교단에서는 부처님의 설법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으나 중국에서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분류하는 교상판석에 많이 붙여 사용하였다.
대표적인 주창자로는 축도생. 길장. 진체. 현장 등이 있다. 축도생은 부처님의 일대교설을 선정법륜. 방편법륜. 진실법륜. 무여법륜의 4법륜으로 분류하였고, 길장은 근본법륜. 지말법륜. 섭말귀본법륜의 3법륜으로, 진제는 전법륜. 조법륜. 지법륜의 3법륜으로, 현장은 사제법륜. 무상법륜. 요의법륜의 셋으로 분류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이와 같은 법륜설을 널리 채택한 고승은 신라 원효스님이다. 원효는 그의 저서인 <열반종요> <법화경종요> 등에서 이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길장의 3종 법륜에 대하여 원효는 근본법륜이란 부처님이 처음 성도하여 화엄회상에서 보살들을 위하여 일인일과의 법문을 말한 것이고, 지말법륜은 복이 엷고 조기가 둔한 무리들이 그 깊은 일인일과의 법문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일승을 삼승으로 나누어 설한 것이라 했다. 섭말귀본법륜은 부처님이 40년 동안 삼승의 법문을 설하여 그들의 근기를 향상시킨 뒤에 다시 삼승을 일승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하여 설한 <법화경>등의 가르침이라 했다. 또 진제의 3법륜에 대해서는 유상법륜. 무상법륜. 무상무상법륜으로 바꾸어서 해설하였다. 유상법륜은 오직 성문승을 지향하는 사람을 위한 것으로서 사제를 근본으로 하여 법륜을 즐기는 교법이며 <아함경>이 이에 해당한다. 무상법륜은 보살승을 지향하는 사람을 위한 것으로서 법의 공성을 근본으로 하여 법륜을 굴리는 교법이며 <반야경>이 여기에 해당한다. 또 무상무상법륜은 삼승을 모두 지향하는 이를 위한 것으로서 법공과 무자성을 근본으로 하여 법륜을 즐기되 위가 없고 더 받아들일 것이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이름을 붙였으며 <해심밀경>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했다.
■ 연 꽃
연꽃은 불교를 상징하는 꽃이다. 부처님은 설법을 하실 때에도 연꽃의 비유를 많이 들었다. 또한 선가에서 '염화시중'의 미소요, 이심전심의 묘법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어느 날 영산회상에서 부처님이 설법을 하시지 않고 곁의 연꽃 한 송이를 들어 대중에게 보였는데 제자 중에 가섭존자가 홀로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이것은 마음으로 속속들이 전하는 도리로서 선종에서는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한 이치라 하여 중히 여기고 있다.
연꽃이 불교의 상징적인 꽃이 된 것은 다음 몇 가지 이유에서이다.
첫째, 처렴상정이다. 연꽃은 깨끗한 물에서는 살지 않는다. 더럽고 추하게 보이는 물에 살지만, 그 더러움을 조금도 자신의 꽃이나 잎에는 묻히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불자가 세속에 처해 있어도 세상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아름다운 신행의 꽃을 피우는 것과 같다.
둘째 화과동시이기 때문이다. 연꽃은 꽃이 핌과 동시에 열매가 그 속에 자리를 잡는다. 이것을 '연밥'이라 하는데, 즉 꽃은 열매를 맺기 위한 수단이며 열매의 원인인 것이다. 이 꽃과 열매의 관계를 인(因)과 과(果)의 관계라 할 수 있으며 인과의 도리는 곧 부처님의 가르침인 것이다.
셋째, 연꽃의 봉오리는 마치 우리 불교신도가 합장하고 서 있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부처님 앞에 합장하고 경건히 서 있는 불자의 모습은 마치 한 송이 연꽃이 막 피어오르는 것과 흡사한 것이다. 이러한 몇 가지 이유에서 연꽃은 불교의 상징적인 꽃으로 사랑을 받는 것이다.
연꽃(蓮華)은 연화(蓮花)라고도 하는데 소택(沼澤, 늪지대)에 생(生)하는 숙근초본식물(宿根草本植物)이다. 꽃의 색향(色香)이 사랑스럽고 또 진흙 가운데 나서 청정(淸淨)한 꽃을 피우는 것으로 인도에서는 고래(古來)로 진중(珍重)한 보배로 여기고, 불교(佛敎)에서도 높여서, 불타(Buddha)나 보살의 좌(坐)를 흔히 연꽃의 받침으로 한다.
연꽃은 뿌리는 진흙 속에 뻗고 잎은 수면에 떠 매끄럽게 뻗어난 줄기 끝에 꽃이 피는데 해가 뜨면서 서서히 피어나서 해가 지면서 서서히 오므리는 청황적백(靑黃赤白)의 우아한 꽃이다. 연꽃은 진흙 수렁에서 자라면서도 물들지 않고 더럽혀 지지 않는 깨끗함과 향기로움을 지니고 있다. 연꽃은 꽃망울의 맺힘과 동시에 蓮實(연씨)도 함께 맺혀 나오고 꽃이 핌과 동시에 연씨도 함께 실과(實果)로 성장되어 나오다 꽃이 완전히 滿開(만개)했을 때 연씨도 완전히 익어 간다(인과동시,因果同時). 또한 연꽃은 처음 꽃잎이 피어나면서는 그 속의 열매를 보호하고, 꽃잎이 떨어지면서 열매를 내 보이며, 꽃잎이 떨어지면 드디어 잘 익은 열매만 남게 된다.
이것은 연꽃의 속성으로 부처님의 一代時敎(일대시교)를 비유한 것으로 처음에는 방편(方便)의 가르침으로 시작해서 차츰차츰 제자들의 수준을 끌어올려 드디어는 방편은 떨어지고 진실한 모습, 즉 실상만이 남아 천지 우주 이대로 극락이요 불국토 임을 연꽃으로 비유한 것이다.
연꽃의 색깔은 여러 가지로 피어 청련, 황련, 백련 등으로 희유한 꽃이요, 아름다운 꽃이다. 연꽃은 물 속에서 피는 꽃도 있고, 혹은 수면에 떠서 피는 꽃도 있고, 물밖에 높이 솟아 있는 꽃도 있다. <부처님의 隨機說法(수기설법) 中에서> 불교 경전에는 연꽃에 대한 말씀이 자주 나오고 특히 최고 경전이라고 불려지는 묘법연화경(묘법연화경), 華嚴經(화엄경)등 에서도 가르침을 연꽃에 비유하여 가르침을 폈다. 蓮華心(연화심)이란,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마음을 自性淸淨心(자성청정심)이라 하여 근본 마음은 물들지 않는 청정한 마음이므로 우리의 마음을 연꽃에 비유하여 표현한 것이다.
蓮華座(연화좌)란 불보살이 앉으시는 자리를 말하는데 이는 사바세계의 塵土(진토)와 같은 곳에 중생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물들지 않고 청정함을 연꽃에 비유한 것이다. 蓮華衣(연화의)란 스님들의 법복인 가사를 뜻하는 것으로 가사의 청정함을 연꽃에 비유한 것이다. 蓮華藏世界(연화장세계)란 불교의 가장 이상적인 세계로서 연꽃에서 出生한 세계, 또는 연꽃 중에 含藏(함장)된 세계란 뜻이다.
연화장 세계는 향수로 된 바다 가운데 커다란 연못이 피어 있듯 본래 法身佛(법신불)이 천잎의 연화대에 앉았는데 천 잎이 각각 한 세계가 되고 그곳에 화현한 일천 석가모니불이 계시며 다시 백억 나라에 모두 부처님이 계신 곳이라 한다. 蓮華台(연화대) 蓮華心(연화심) : 自性淸淨心(자성청정심) 蓮華座(연화좌) 拈華微笑(염화미소)
■ 금강저
밀교의식에 쓰이는 작법용 불구로 번뇌를 없애는 보리심을 상징한다. 제존존상이 가진 법구 또는 스님들의 수행도구로 사용된다. 원래는 고대 인도의 무기였다. 밀교에서 불구로 채용한 것은 제석천이 금강저를 무기로 삼아 아수라를 쳐부순다는 신화에서 비롯됐다.
우리나라의 밀교계 종파에서는 진언을 외우며 수행할때 항상 금강저를 휴대하게 되어 있다. 근본 뜻은 여래의 금강과 같은 지혜로써 능히 마음속에 깃든 어리석은 망상의 악마를 파멸시킨다는 것이다. 밀교의 만다라에는 금강부의 여러 존상들이 모두 금강저를 가지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열반경>에는 금강역사가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금강저로 모든 악마를 티끌같이 쳐부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에 근거하여 우리나라의 신중탱화에서는 동진보살이 반드시 금강저를 들고 있다. 금강저는 금.은.동.철 등으로 만들어지며 불교의 금속공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형태는 손잡이 양쪽이 뾰족한 끝을 가졌다.
모양에 따라 뾰족한 끝이 하나인 것은 독고, 2.3.4.5.9 갈래로 갈라진 것은 2고저. 3고저. 4고저. 5고저. 9고저라 한다. 최초에는 그 형태가 무기형으로 뾰족하고 예리했으나 불구로 사용되면서 끝의 가락이 모아지는 형태로 바뀌었다. 이들중 독고가 가장 오래된 형태이다.
손잡이 좌우에 불꽃 모양을 조각한 것은 보저라 하고, 탑을 조각한 것은 탑저라고 한다. 이들은 밀교의 단에 봉안되는데 탑저는 중앙에 나머지는 사방에 배치한다. 현존하는 금강저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길이 22cm의 고려시대 청동5고 금강저가 소장돼 있으며 일반사찰에서는 조선시대의 금강저를 볼 수 있다.
고려시대의 사경. 변상도에는 가장자리를 금강저문으로 장엄한 예가 자주 나타나며, 현존 신중탱화에서는 대부분 금강저를 볼 수 있다.
■ 불교기
불교기는 서기 1952년, 일본에서 거행된 "世界 佛敎徒 友誼會(세계 불교도 우의회)"에서 미국 국적을 가진 스리랑카 대표 "올코트(Colonel Henry Stell Olcott)"가 부처님께서 成道 시에 성체에서 육종의 색광이 방출되는 것을 근거하여 "일면 육색기(一面六色旗) 를 설계하여 세계 불교기로 제출하여 통과되어, 현재 모든 불교국가와 불교 단체에서 사용하고 있다.
청색 황색 적색 백색 주황 청색 황색 적색 백색 주황 이 旗(기)는 가로와 세로의 비율이 3:2이며 바탕은 다섯 가지 의 색(청,황,적,백,주황)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다섯 가지 색깔은 전세계 각종 인종의 얼굴 색을 상징하는데 그 중에서 가로로 그은 선은 전세계 인류가 두루두루 화목 하는 것을 표시하고, 세로로 그은 선은 세계의 평화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을 표시한다.
또한 불교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이 다섯 색깔은 부처님의 相好(상호)를 나타내는데 옆으로 그은 선은 부처님의 가르침 을, 아래로 내려그은 선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영원히 변함없다는 뜻을 각각 나타내고 있다.
청색 : 불교의 자비와 평화를 상징.
황색 : 中道 즉 空有(공유)를 여윈 究竟(구경)에 철저한 것 을 상징.
적색 : 福慧(복혜)를 성취하고 吉祥(길상)을 장엄하는 것을 상징.
백색 : 淸淨解脫(청정해탈)과 法爾如是(법이여시: 있는 그대로의 모습) 곧, 天然(천연)의 도리를 상징.
주황 : 불법의 본질인 지혜가 견고하며 장엄함을 상징.
오색의 혼합 색은 眞如不二(진여불이)를 상징. 요약해서 말하면 불교기는 민족과 국적과 피부의 색을 분별하지 않고 일체 중생이 모두다 佛性이 있으며 이 마음이 부처이며, 이 마음으로 부처를 이룬다는 뜻을 상징.
■ 만자(卍字)
범어 Srivatsalksana(수리밧살크사나), 万字, 萬字, 卍字 라고도 한다. 길상해운(吉祥海雲), 길상희선(吉祥喜旋)이라고도 쓴다. 吉祥(길상)과 행운의 표시이다. 삼십이상(三十二相)의 하나로 불타의 가르침에 덕상(德相)이 있고 또 불타의 수족(手足), 두발(頭髮)과 허리에도 있다고 한다.
이에 상당한 범어는 네 가지가 있지만 Srivatsa(슈리밧사)란 말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이 말은 모발이 말리어 겹치고 합해져 해운(海雲)같은 모양이란 뜻이다. 따라서 만자(卍字)란 길상만덕(吉祥萬德)이 모이는 곳을 뜻한다. 또한 만자(卍字)는 십자와 마찬가지로 예로부터 세계 각지에서 사용되었는데, 그 기원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불교나 절을 나타내는 기호나 표시로 쓰이고 있다. 모양은 중심에서 오른쪽으로 도는 우만자(右卍字)와 왼쪽으로 도는 좌만자(左卍字)로 크게 나누어진다.
그런데 이 卍자를 입체적으로 형상화시켜서 세워 놓고 볼 때 앞에서 보면 卍 모양이 되지만 뒤쪽에서 보면 우만(右卍)자 모양으로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인도의 옛 조각에는 右卍(우만)자가 많으나 중국, 한국, 일본에서는 굳이 구별하지는 않는다.
■ 일원상(一圓相)
둥근 원을 불교에서는 일원상이라고 하는데, 우주만유의 본원 또는 원융무애한 법을 상징한 다. 그래서 선가에서는 일원상을 1천7백 공안(화두)의 하나로 삼고 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일원의 근본을 추구하는 것이 ○자 화두다. 예로부터 선방에서는 일원상을 벽에 그려 놓고 참선정진해 오고 있다. 이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입장처인 일원의 진경에 들어가기 위한 수행방법이다.
서산대사가 쓴 <선가귀감(禪家龜鑑)>에 보면 중국의 육조 혜능대사가 이르기를 '여기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스러워 일찍이 나지도 않았고 죽지도 않았다. 이름지을 길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다.'고 했다. 서산대사는 주해(註解)에서 한 물건을 일원상으로 표시했다. 또 삼조 승찬대사는 일원상을 <신심명(信心銘)>에서 '허공같이 뚜렷하여 모자랄 것도 없고 남을 것도 없다.' 라고 말했다.
법정은 <선가귀감> 역주에서 일원상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마음. 성품. 진리. 도라 하여 억지로 이름을 붙였으나 어떤 이름으로도 맞지 않고 무슨 방법으로도 그 참 모양을 바로 그려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무한한 공간에 가득 차서 안과 밖이 없으며 무궁한 시간에 사뭇 뻗쳐 고금(古今)과 시종(始終)도 없다.
또한 크다, 작다, 많다, 적다, 높다, 낮다 시비할 수 없으며, 거짓. 참 등 온갖 차별을 붙일 길이 없어 어쩔 수 없이 한 동그라미로 나타낸 것이다. 이것을 더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 당나라 혜충국사(慧忠國師, ?-775)는 97가지 그림으로 가르쳐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애써 보아도 도저히 그 전체를 바로 가르칠 수 없어 이것을 가르친다면 입을 열기 전에 벌써 가르친다며 '알거나 알지 못한 데에 있지 않다.' 고 했다.
그러므로 일원상의 이치를 분명히 알면 팔만대장경이나 모든 성인이 소용없다고 법정스님은 설명을 덧붙였다. 불문에 들어와 이러한 공안을 참구한 뒤 원불교를 개교한 소태산은 일원상을 원불교의 상징 즉 종지(宗旨)로 삼았다. 따라서 원불교는 일원상을 신앙의 대상, 수행의 표본으로 삼고 있다.
■ 염주
염주는 불·보살께 예배할 때 손목에 걸거나 손으로 돌리는 법구의 하나이다. 또 염불하는 수를 세는데 쓰기도 하는 염주는 2등분씩으로 줄여 54개, 27개의 단주(수주)로도 제작되고 있다.
108개로 한 것은 108번뇌의 끊음을 표현한 것이고, 절반인 54개로 한 것은 보살 수행의 계위인 4선근, 10신, 10주, 10행, 10회향, 10지를 나타내고, 또 절반인 27개로 하는 것은 소승의 27현성을 상징한다고 한다.
■ 스님들의 호칭 중 선사, 종사, 율사 등의 의미는
우리말의 스님이란 스승님의 준말이라는 설도 있고, 승가의 준말 승(僧)에 존칭 어미 님자를 붙여 승님이라고 하던 것이 변해서 스님이 되었다는 설도 있어 분명하지 않습니다만, 아무튼 스님이라고 하면 불교의 출가 수행자를 높여 부르는 말임엔 틀림이 없습니다.
스님을 높여 부르는 말에는 화상(和尙), 사문(沙門), 대덕(大德), 대사(大師) 등이 있습니다.
화상이란 본래 스승이란 뜻으로 평생 가르침을 받는 은사스님을 뜻하던 말인데 나중에는 그냥 덕 높은 스님을 칭하게 된 말이며, 사문이란 본래 쉬라마나라고 해서 바라문교에 대응하던 인도의 새로운 사상적 지도자들을 칭하던 말로 석가모니 부처님도 사문 중의 한 사람으로 통했는데 그 후 불교에서 출가 수행자를 일컫게 된 말입니다.
대덕이란 덕이 높은 분, 대사란 큰스님을 뜻합니다. 한편 스님들에게는 그 행적이나 덕성에 따라 여러 가지 칭호를 붙이는 경우가 있는데, 조사(祖師), 종사(宗師), 선사(禪師), 율사(律師) 법사(法師) 등이 그것입니다.
이 중에서 조사란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정통의 법맥을 이어받은 덕이 높은 스님들을 일컫는 말이었고, 조사란 한 종파를 일으켜 세운 학식이 높은 스님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또한 선사란 오랫동안 성을 수행하여 성의 이치에 통달한 분을 일컫는 말이고, 율사란 계율을 전문적으로 연구했거나 계행이 철저한 분을 지칭하는 말이며, 법사란 경전에 통달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선양하는 스님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밖에도 국사(國師), 왕사(王師), 제사(帝師)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이러한 명칭은 역사적으로 한 나라의 황제나 국왕이 덕 높은 스님들을 나라의 정신적인 지도자로 모시기 위해 위촉했던 직책이었습니다.
■ 한국불교를 빛낸 스님들에는 어떤 분들이 계신가
1600년 한국불교의 역사를 통해서 후세의 우리들에게도 귀감이 되고 있는 훌륭한 스님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그 가운데에서 특히 몇 분만을 골라서 거론하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만, 우리 불자들이 꼭 기억해둘 만한 분들을 꼽아보겠습니다.
우선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승랑(僧郞)과 담징(曇徵, 백제의 겸익(謙益)과 혜총(慧聰), 신라의 원광(圓光)과 자장(慈藏), 대안 (大安)스님을 들 수 있겠습니다. 이 가운데 승랑은 일찌기 중국으로 건너가 상당한 학술적 성과를 이룬 분이고, 담징과 혜총은 일본에 불교와 함께 많은 문화를 전수하신 분이며, 겸익은 인도까지 가서 경전과 율장을 가지고와 번역한 분입니다.
그리고 원광은 세속오계를 설해 화랑도 정신의 기초를 제공한 분이고, 자장은 황룡사 구층탑을 만들고 신라 불교의 기초를 다진 분이며, 대안은 민중교화에 매진하신 분이었습니다. 또한 통일신라 시대에는 원효(元曉)와 의상(義湘), 원측(圓測), 혜초(慧超)스님들을 들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 원효는 교학의 발전과 민중교화에 지대한 공헌을 한 분이고, 의상은 신라 화엄종의 효시가 되는 분이며, 원측은 중국에서 활약한 학술적인 업적이 뛰어난 분이고, 혜초는 인도에 유학하여 <왕오천축국전>이라는 기행문을 남긴 분입니다.
한편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의천(義天)과 지눌(知訥), 일연(一然) 및 휴정(休靜), 유정(惟政)스님들을 들 수 있겠습니다. 이 가운데 대각국사 의천은 고려 천태종의 창시자이고, 보조국사 지눌은 정혜결사를 일으켜 수행의 풍토를 진작시킨 분이며, 일연은 <삼국유사>를 지어 민족정기를 선양한 분입니다.
또한 서산대사 휴정과 사명대사 유정은 임진왜란때 승병을 조직하여 나라를 지켰을 뿐 아니라 교단의 기풍을 쇄신시킨 분들입니다.
■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의 차이는?
기원전 1세기 무렵 인도에는 많은 도시 국가들이 있었고, 그 경제적 번영에 힘입어 여러 종교들이 번성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그릇된 출가중심적 불교 이타행(利他行)이 결여된 소승적(小乘的)인 것과 믿음에 대한 반성으로 일어난 것이 바로 대승불교 운동입니다.
이 운동의 주안점은 계율이나 교법에 얽매여 전통을 고집함으로써 형식화되어 가는 부파 불교의 벽을 깨뜨리고 특정인 즉 출가 수행승 만이 중심이 되는 좁은 생각을 물리치자는 것이었습니다. 중생은 본래 불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석존의 자비와 지혜를 믿고 보살의 길인 육바라밀의 완성을 위해 정진한다면 누구나 붓다가 될 수 있으며, 그것이 석존의 참뜻이었고, 석존이 현세에 출현했던 근본목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운동은 서력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시작되었고 2~3세기에 이르러 용수, 제바 등의 뛰어난 사상가에 의해 사상적 체계가 확립되었습니다. 이른바 초기 대승불교시대로서 기나긴 대승불교의 역사를 통해 대승불교의 특징이 가장 두드러졌던 시대라 하겠습니다.
대승불교의 사상적 특징으로는 붓다관을 새롭게 하여 무수한 붓다와 보살을 창조해냈다는 점입니다. 무신론적인 소승에 대해 대승은 유신론적이며, 1불 사상에서 다불(多佛)사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즉 과거불사상(過去佛思想)을 발단으로 해서 미래불사상(미래에 미륵불이 출현해서 석존 대신 중생을 구제한다는 사상)이 일어났으며 아울러 내세불사상(서방정토의 아미타불 또는 동방묘회국의 아촉불)과 시방변만불사상(十方遍萬佛思想 : 이 세상의 사방 어느 곳에나 붓다가 가득 차 있다는 사상, 그 대표적인 것이 비로자나불이다.)으로 발전하고 나중에는 내재불사상(內在佛思想 : 붓다는 현재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존재한다는 사상)으로까지 발전했습니다.
다음 특징으로는 소승이 자기형성에 중점을 둔데 반해 대승은 대중구제에 중점을 두었다는 점입니다. 즉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上求菩提), 아래로는 대중을 교화한다는(下化衆生) 출가주의에서 재가주의로 중점이 바뀐 점입니다. 또 보살이라는 새로운 이상상(理想像)을 만든 점입니다.
보살이라는 말은 원시경전에도 나오지만 원시경전에서는 부처가 되기 전의 석존 즉 <수행자로서 불도에 정진하는 자>라는 뜻이었으나 대승에서는 이를 확대 해석해서 불교도의 이상적인 모습으로 정립하게 되었습니다. 소승에서는 아라한은 될 수 있어도 붓다가 될 수는 없다고 한데 대해 대승에서는 모든 중생 보살도인 육바라밀을 완전히 닦으면 해탈한다고 했습니다.
동시에 붓다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끝으로 소승의 분석적 방법에 대해 대승에서는 직관적 방법을 중시한 점입니다. 불교식 표현으로는 분별(分別)적 방법에서 무분별(無分別)적 방법으로 변한 것입니다. 즉 분별지(分別智)에 대한 무분별지(無分別智 ? 般若라고도 함)라는 술어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석존이 연기설을 설한 것도 그 방법은 분석적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분별의 가르침 즉 지혜의 도(道)는 범속한 대중으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렵지만 석존 당시의 제자들이 대부분 교육 받은 귀족 출신의 우수한 지성들이었음을 감안할 때 석존의 이런 분석적인 방법에 수긍이 가는 것입니다. 이런 분별적인 엘리트주의의 불교를 직관적 방법에 의해 대중쪽으로 되돌리려고 한 것이 대승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부처님을 부르는 열 가지 명칭 - 여래십호(如來十號)
부처님의 위대한 덕성(功德相)을 나타내는 열 가지 명칭을 여래십호라 합니다.
각각의 명칭은 여래(如來), 응공, 정변지, 명행족, 선서, 세간해, 무상사, 조어장부, 천인사, 세존 등이며 간략하게 설명해 보면, 첫 번째로, 여래(如來)란 범어로 tathagata라 하는데 이것은 ‘진리로부터 온 사람’이란 의미와 ‘피안에 도달한 사람’이란 두가지 의미로 해석됩니다. 그래서 ‘진리를 여실히 깨닫고 가셨다’는 의미로 여거(如去)라고도 합니다.
두 번째, 응공(應供)은 범어로 arhat인데, 온갖 번뇌를 끊어서 인간, 천상의 중생들로부터 ‘마땅히 공양받을 만한 덕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세 번째, 정변지(正偏知)는 범어로 samyaksambuddha(삼먁삼불타)라 하는데, 이것은 일체의 자비를 갖추어 온갖 우주간의 물심 현상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정각(正覺), 등각(等覺), 정등각(正等覺), 등정각(等正覺), 정진도(正眞道)라고도 부릅니다.
네 번째 명행족(明行足)은 범어로 vidyacarana-sampanna라 하는데, ‘지혜와 실천을 겸비한 이’란 의미로 명(明)은 무상정변지(無上正偏知), 행족(行足)은 각족(脚足)이란 뜻으로 계(戒), 정(定), 혜(慧)의 삼학(三學)을 가리킵니다. 즉, 부처님은 삼학의 각족에 의하여 무상정변지를 얻었으므로 명행족이라 하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선서(善逝)는 sugata라 하여, 호거(好去), 묘왕(妙往)이라고도 번역합니다. 이 의미는 ‘깨달음의 세계로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으로 다시는 생사의 바다에 빠지지 않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다시 말하면 ‘윤회에서 벗어나 대지혜에 안주한다’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 세간해(世間解)는 ‘세상을 잘 아는 이’란 뜻으로, 범어로는 lokavid라고 합니다. 좀더 설명하면, 부처님은 세상의 모든 생활원리를 알아서 고통받고 있는 세상 사람들을 구제한다는 뜻에서 부르는 이름으로 진리의 세계 뿐 아니라 세속적인 삶의 속성도 알고 계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곱 번째 무상사(無上士)는 범어로는 anuttara(아뇩다라)를 말하는데, ‘더없이 높은 분’을 의미한다. 복덕과 갖춤은 물론 계행(戒行) 등이 완전하여 이보다 더 완전한 이가 없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다른 말로 무상장부(無上丈夫)라고도 합니다.
여덟 번째 조어장부(調御丈夫)는 ‘사람들을 올바르게 이끄는 분’이란 의미로, 부처님은 대자(大慈), 대비(大悲), 대지(大智)로써 중생에 대하여 부드러운 말, 간절한 말, 또는 여러 가지 말을 써서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에서 부르는 이름입니다. 범어로는 purusa-damya-sarathi 란 합니다.
아홉 번째 천인사(天人師)는 ‘하늘과 인간의 스승’이라는 뜻으로 이들을 모두 해탈케 하는 원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열 번째 불세존(佛世尊)은 범어로 buddha-lokanatha라고 하며, 불타는 ‘깨달은 사람’, 세존은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다’는 뜻으로, 합쳐서 ‘깨달음을 얻은 존귀한 사람’ 이란 의미가 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이와 같은 덕성을 갖추고 중생들의 제도에 힘쓰시는 분으로 인류의 모범이며, 위대한 스승입니다.
■ 불교의 각 종파들은 어떻게 해서 성립되었나
본래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중국으로 전파된 이후 상당기간은 경전을 한역(漢譯) 즉, 한문으로 옮기는 것이 커다란 과제였고, 사실상 중국불교의 가장 큰 업적 가운데 하나는 방대한 양의 불교 경전들을 거의 남김 없이 번역해 냈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번역이 완성되자 이번에는 수많은 경전들의 교학(敎學) 사상적위치를 확인하고 그들 사이의 체계를 세우는 것이 새로운 과제가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인도에서의 불교에서는 일정한 시기를 두고 꾸준히 교학이 발전하며 그때그때 새로운 경전들이 만들어 졌지만, 그것이 중국에 전해질 때는 그 발전의 순서나 역사성이 무시된 채, 특히 대승과 소승의 경전들이 마구잡이로 뒤섞여 유입이 되었으므로 도대체 어떤 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본질이고 어떤 것이 부수적인 것인가 하는 강한 의문이 제기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당대의 뛰어난 스님들은 불교 교학의 사상적 체계를 세우는데 모든 노력들을 경주하게 되었는데, 그와 같은 일을 우리는 교상판석(敎相判釋), 또는 줄여서 교판(敎判)이라고 하며 그에 따라 성립된 것이 중국불교의 각 종파(宗派)였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불교사상 전반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수행체계와 교단조직을 수립한 것이 종파로서, 이 같은 종파를 최초로 세운 이는 천태종(天台宗)의 창시자인 지의(智)였습니다. 그리고 교학상의 다른 입장이나 중요시하는 경전과 수행법에 따라서 화엄종(華嚴宗), 삼론종(三論宗), 법상종(法相宗), 율종(律宗), 선종(禪宗), 정토교(淨土敎) 등 여러 종파가 제각각 발전하여 마침내 종파불교라는 중국불교의 가장 큰 특색을 이루게 되었는데, 이같이 종파를 앞세우는 전통은 한국이나 일본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쳐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 12연기에 대하여
불교는 인간이 죽음을 포함한 모든 고뇌에서 벗어나는 문제에 대해 명백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인간의 근본적인 고뇌(八苦)는 숙명적이거나 우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지가 원인이 되어 받게 되는 필연적인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연기에 따라 고의 원인을 밝히고 단계적으로 고뇌가 일어나는 과정을 설명한 것이 12연기법입니다. 12연기를 12지(支)연기라고도 합니다. 지(支)란 가지라는 뜻으로 고가 일어나는 단계를 12가지로 분석한 것입니다. 인간의 고뇌는 무명(無明)에서 비롯됩니다.
즉 인간은 밝혀 알았느냐(明), 밝히지 못했느냐(無明)에 따라 모든 업(業)과 괴로움, 생사윤회가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명과 무명 사이에는 과연 어떤 차이가 있는지 12연기의 차례에 따라 살펴보기로 합니다.
무명(無明)
: 실재(實在)하지 않는 무상한 것을 실체(實體)로 착각하고 그 무상한 형체를 완전하고 영원한 것으로 집착해버리는 어리석음을 말합니다. 즉 진리에 대한 무지(無知)인 것입니다. 연기(緣起)와 사제(四諸)의 도리도 모르고, 선악도 모르고, 참다운 인생관도 없으니 인생의 고뇌와 불행이 생기는 원인이 됩니다.
행(行)
: 이처럼 밝지 못한 상태(無明)로 행동하고 말하고 생각함으로써 습관, 성격, 소질 등 바르지 못한 자기가 형성되어 갑니다. 즉 이른바 업(業)이 지어지는 것입니다.
식(識)
: 이러한 行에 의해 형성된, 잠재된 힘으로 육근(六根)을 통해 받아들인 모든 인식을 판단하는 작용을 하게 됩니다. 분별하는 인식작용을 말합니다.
명색(名色)
: 명(名)은 정신적인 것을 말하며 색(色)은 물질적인 것을 말합니다. 명색은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이 결합된 상태로 인식작용에 의해 일체의 존재가 현상적으로 나타남을 말합니다.
육처(六處)
: 명색이 있으므로 그것을 지각하는 능력이 일어납니다. 곧 눈, 귀, 코, 혀, 몸, 의지(意志)라는 육처가 그것입니다.
촉(觸)
: 촉이란 <접촉한다> <충돌한다>라는 뜻으로 감각하는 기관(육처)과 그 대상인 육경(六境 : 色, 聲, 香, 味, 觸, 法) 과 감각, 지각의 주체(六識 : 眼識, 耳識, 鼻識, 舌識, 身識, 意識)가 화합, 접촉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이 세가지가 만나므로 감각과 지각의 인식작용이 생기는 것입니다.
수(受)
: 수(受)는 감수작용을 말하는 것으로 촉에 의해 즐거움이나 괴로움, 그리고 즐거운 것도 아니고 괴로운 것도 아닌 느낌의 세 가지가 일어납니다.
애(愛)
: 애는 심한 욕구(渴)를 말합니다. 수(受)에 의해 일어난 맹목적인 욕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취(取)
: 애(愛)에 의하여 일어난 욕구가 추구하는 대상을 소유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그릇된 소유의 마음으로 살상하고 훔치며 망녕된 언어를 사용하고, 사취하는 등 몸과 언어로써 업(業)을 짓게 됩니다.
유(有)
: 취(取)에 의하여 <있음>이 발생합니다. 몸과 말로써 짓는 행동 뒤에 일어납니다. 유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욕망이 있는 욕계(慾界)와 욕망은 없으나 물질이 남아 있는 색계(色界)와 욕망과 물질은 없으나 정신적인 것이 남아 있는 무색계(無色界)가 그것입니다. 이 삼곈는 모두 생사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생(生)
: 이러한 유(有)로 말미암아 존재 자체가 형성됩니다.
노사(老死)
: 생으로 말미암은 늙음과 죽음의 괴로움을 말합니다. 즉 생사에서 비롯되는 근심과 슬픔과 번뇌와 괴로움이 있게 됩니다. 이 생과 사는 단순히 육체적인 생사만이 아니라 자신이 나고 죽는다는 생각에서 오는 정신적인 괴로움을 말합니다.
■ 부처님의 가르침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인가 ? 삼법인
우주와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를 탐구하여 올바른 삶, 가치 있는 삶을 이루기 위한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은 현실에 대한 정확한 관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불교에서는 예로부터 삼법인(三法印)이라 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의 가장 큰 특징을 다음과 같은 세가지로 요약해 왔습니다만, 이것은 말하자면 우리 현실에 대한 투철한 관찰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세 가지란 무엇일까요.
첫번째는 제행무상(諸行無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덧없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들은 쉽사리 영원한 것을 꿈꾸지만 이 세상에서 참으로 영원한 것을 찾아보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모든 것은 한 순간도 쉴새없이 변해가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언젠가는 죽어갈 것처럼 이 세상 모든 존재는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을 겪고 있다는 것이 불교의 첫번째 진리입니다.
두번째는 제법무아(諸法無我)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에는 독자적인 실체라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쉽게 생각할 때는 모든 사물들에 나름대로의 본성이라는 것이 있어 그것이 그 사물을 다른 모든 것과 구별시켜 주는 것으로 이해하가 쉽지만, 잘 살펴보면 어떤 것이든 그것이 그것일 수밖에 없는 독자적인 성품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일정한 원인과 조건에 의한 결과로서 존재하는 것으로, 그 원인과 조건 자체가 끊임없이 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세번째는 일체개고(一切皆苦)입니다. 모든 것은 괴롭다는 뜻입니다. 현실은 이처럼 끊임없이 변해가는 것이고 독립불변의 실체가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그것들이 영원하기를, 본질적이기를 바라고 집착하기 때문에 세상은 온통 괴로움에 휩싸여 있다는 것이 불교의 진리입니다.
■ 열반으로 나아가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팔정도
불교에서는 인간 삶의 괴로움이 갈애로부터 비롯되며 수행을 통해 마음속의 번뇌와 무명을 없애면 고요하고 평안하며 자유자재한 열반의 경지에 이른다고 합니다만, 그와 같은 열반에 이르는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팔정도 (八正道)라 하여 다음과 같은 여덟 가지 수행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정견(正見)입니다. 올바른 견해를 뜻하는 것으로서, 인생의 현실이나 사물의 이치에 대해 아무런 걸림이 없이 올바르게 바라보는 것이 불교수행의 첫 번째 덕목인 것입니다.
두번째는 정사 (正思) 입니다. 올바른 생각을 뜻하며, 특히 마음으로 짖는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세 가지 악업을 제거해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번째는 정어(正語)입니다. 올바른 말을 뜻하는 것으로서, 입으로 짓는 거짓말과 이간질, 욕설, 아부 등 네 가지 악업을 소멸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네번째는 정업(正業)입니다. 올바른 행동으로서, 몸으로 짓는 살생과 도둑질, 음행의 세 가지 악업을 소멸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섯번째는 정명 (正命)입니다. 올바른 생활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특히 정당한 방법으로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을 의미한다. 재가신자들의 입장에서는 올바른 직업을 택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여섯번째는 정정진(正精進)입니다. 바른 노력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끊임없이 노력하여 물러섬이 없는 마음가짐을 지니는 것입니다.
일곱번째는 정념(正念)입니다. 올바른 기억을 의미하며, 옳은 생각들을 잊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여덟번째는 정정(正定)입니다. 올바른 정신집중을 의미하는 것으로, 특히 삼매(三昧)의 수련을 통해서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는 수행을 뜻합니다.
말하자면 올바른 참선이나 염불, 기도의 수행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 불자들이 일상 생활 속에서 실천해야 할 덕목은 ? 육바라밀
우리 불자들은 스스로가 보살 즉, 언젠가는 부처님이 될 존재임을 자각하고 일상생활이 그대로 수행의 터전임을 깊이 명심하여 실천 수행에 힘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만, 그때 불자들이 실천해야 할 덕목은 육바라밀(六波羅蜜)을 이야기합니다.
여섯 가지 완전한 수행을 뜻하는 것으로서, 그 여섯 가지란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반야(般若)입니다.
첫번째, 보시바라밀이란 남을 위해 아낌없이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예로부터 재시(財施). 법시(法施). 무외시(無畏施)라 하여 세 가지 보시를 권장하고 있는데, 재물이나 가르침을 베푸는 것과 아울러 남을 두려움에서 구해주는 덕행을 뜻하는 것입니다.
두번째, 지계바라밀은 계율을 준수하는 것으로, 특히 계율을 기계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주변과의 관계 속에서 효율적으로 지혜롭게 운용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세번째, 인욕바라밀은 욕된 것을 참고 견디는 자세를 말합니다. 올바른 길을 가기 위해서는 때로는 아무리 참기 힘든 것도 인내하고 수용하지 않으면 안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네번째, 정진바라밀은 끊임없는 노력을 뜻합니다. 스스로 옳은 길을 가고 있다는 굳은 신념을 지니고 쉼 없이 한 길을 가는 용감한 자세를 일컫는 말입니다.
다섯번째, 선정바라밀은 정신집중의 수련을 이야기합니다. 정신을 한곳에 모으는 수행을 통해 어지럽고 산란한 마음을 안정시킴으로서 언제나 동요됨이 없는 삶의 자세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여섯번째의 반야바라밀은 지혜가 완성된 생활을 뜻합니다. 사물의 참다운 이치 즉, 연기의 이법을 올바로 터득해 아무데도 걸림이 없고 집착이 없는 슬기로운 생활의 자세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 삶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불교의 실천원리는 ? 사성제
인간 삶의 유한한 현실을 직시하며 그와 같이 불완전한 상황에서 벗어나 보다 옳은 삶, 보다 가치 있는 인생을 성취하기 위한 가르침인 불교는 그 실천원리를 사성제(四聖諦)라고 해서 다음과 같은 네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성제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는 뜻으로, 경전에 의하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 네 가지 진리 안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네가지 진리란 무엇일까요.
첫번째는 고성제(苦聖諦)로서, 말하자면 괴로움에 관한 진리입니다. 즉 나고 병들고 죽는 것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는 것, 구하지만 얻지 못하는 것 등 우리 인생은 온통 괴로움 투성이라는 것이 첫번째 진리입니다.
두번째는 집성제 (集聖諦)로, 괴로움의 원인에 관한 진리입니다. 즉 이 세상이 이와 같이 괴로운데는 분명한 원인이 있으며,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갈애(渴愛)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갈애란 타는 듯한 목마름과도 같은 집착을 뜻하는데, 현실의 모든 것들은 일정한 조건에 의해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거기에 끈질기게 집착하고 그로 말미암아 괴로움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멸성제(滅聖諦)로, 괴로움의 소멸에 관한 진리입니다. 즉 괴로움은 갈애 때문에 생기는 것이므로 갈애만 없애면 괴로움은 자연히 소멸하여 영원히 평안하고 안락하며 아무런 걸림이 없는 이상적인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불교에서는 그러한 경지를 열반(涅槃)이라 합니다.
네번째는 도성제(道聖諦)입니다. 괴로움이 소멸된 이상적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방법으로서, 그것은 여덟 가지 바른 길 즉,팔정도(八正道)를 이야기합니다.
■ 중도(中道)란? - 중간, 중용과 어떻게 다른가?
중도란 <중간 길> 또는 좌우에 치우치지 않는 <한 가운데>라는 식의 중간주의나 타협적인 중용(中傭)이 아닙니다. 중도의 <중(中)>이란 팔정도의 <정(正)> 즉 <바른 길>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실제 인간생활에 적용되는 요긴한 도리로서, 공리공론(空理空論)이 아닌 정도(正道)를 말하는 것입니다.
좌, 우 중간할 때의 중간은 좌, 우에 대한 위치적인 처지를 말하지만 중도의 중은 그런 고정적인 위치에서 벗어난 좀 더 자유로운 자연성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있는 그대로 보되 걸림(선입견, 편견 등)이 없는 상태입니다. 석존은 다섯 비구들에게, 「나는 쾌락도 고행도 무익하고 하등한 것이어서 다 버렸으며, 두 극단을 버림으로써 중도를 깨닫게 되었고, 중도를 깨달음으로써 인간세상의 일들을 바르게 통찰하고 바르게 인식하는 눈을 뜨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즉 석존이 깨달은 연기의 법, 무상, 무아 등은 모두 이 <중도의 눈>으로 관찰한 결과인 것입니다. 연못의 진흙은 결코 깨끗한 것은 아닙니다. <더러움>입니다. 반면에 백련(白蓮)은 말할 것도 없이 아름답고 순백한 <깨끗함>입니다. 이 더러움과 깨끗함은 극히 대조적입니다.
그러면서도 연꽃은 이 더러움 속에서 피어납니다. 진흙과 연꽃과는 서로 양극을 이루지만 사실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不可分)의 관계, 즉 불이(不二)인 것입니다. 인간들이 대립적인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는 생 - 사, 승 - 패, 정 - 부정, 독 - 약, 선 - 악, 더 나아가 나 - 너라는 것은 모두 둘이 아닌 하나이며 다만 인간이 이를 둘로 갈라서 차별을 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도의 <중>은 둘이 아니라고 보는 눈(觀)인 것입니다. 어느 쪽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은 중도가 아닙니다. 선, 악도 역시 그렇습니다. 선한 사람, 악한 사람이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과 연에 따라 선인도 되고 악인도 되는 것입니다.
사성제 중의 고제 ? 고도 성스러운 진리라고 한 까닭도, 이 고가 있음으로써 극복의 길을 찾을 수 있고 또 고가 있음으로써 낙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고락도 하나입니다. 모든 것을 고정적으로 또는 집착해서 보는 것은 중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번뇌가 곧 보리(깨달음)라고 하는 것입니다.
■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의 과거칠불은 어떤 분들인가
과거세에 계셨던 부처님들을 과거불(過去佛)이라고도 합니다만, 불교에서는 특히 아득히 먼 옛날부터 석가모니 부처님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에는 모두 일곱분의 부처님들이 계셨다고 해서 과거칠불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다시 말해 그 일곱분이란 비바시부처님(毘婆尸佛), 시기부처님(尸棄佛), 비사부부처님(毘舍浮佛), 구류손부처님(拘留孫佛), 구나함모니부처님(拘那含牟尼佛), 가섭부처님(迦葉佛), 석가모니부처님(釋迦牟尼佛)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 석가모니 부처님은 물론 인류 역사상 이 땅에 실제하셨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분으로서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불교의 경전들은 모두가 석가모니 부처님에 의해 직접 설해졌거나 또는 그 분에 의해 설해지는 양식을 취하는 것입니다만, 그 분을 제외한 여섯 부처님들은 경전의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알려지게 된, 말하자면 전설적인 부처님들입니다.
한편 경전에 따라서는 이 이외에도 석가모니 부처님에게 장차 부처님이 되리라고 수기(授記)를 한 것으로 유명한 연등부처님(燃燈佛)을 위시하여 24분의 과거세 부처님을 드는 경우도 있고 53분을 드는 경우도 있는데, 그 정확한 숫자나 부처님의 이름이 우리들의 올바른 신행에 중요한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한 때 당신이 깨달은 진리란 사람이 다니지 않는 오래된 옛길을 발견하고 그 길을 따라가서 번성했던 옛 도시를 찾아내게 된 것과 같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는데, 그와 마찬가지로 불교에서 가르치는 수행의 길은 부처님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존재하던 영원하고도 보편 타당한 것으로서 다만 석가모니 부처님에 의해 최초로 발견되고 우리들에게도 설해지게 된 것임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 석가모니 부처님은 성도 후 어떤 생활을 하셨나
보리수 아래에서 최고의 진리를 깨닫고 부처님이 되신 석가모니부처님은 그 이후 인류역사상 유례가 없을 만큼 완벽하고도 완전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흔히 부처님이 깨달으신 진리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들이 많습니다만, 깨달음이야말로 부처님을 부처님일 수 있게 한 것이라면 우리들은 그 깨달음의 내용을 다름 아닌 부처님의 삶의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석가모니부처님은 부처님이 되신 후 어떤 생활을 하셨을까요. 경전에 의하면 석가모니부처님은 깨달음을 이룬 직후에 잠시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펴지 않을 생각을 하셨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깨달은 진리는 너무도 깊고 미묘한 것이어서 온갖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일반인들은 얘기해 봐야 알아듣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최고의 진리를 깨달았으므로 더 이상 의지할 스승도, 그 무엇도 없다는 생각에서 심한 외로움을 느낀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내 당신이 깨달은 것은 진리로 말미암은 것이므로 그 진리를 의지처로 삼고 스승으로 삼아 진리의 전파에 평생을 바치기로 생각을 바꾸셨습니다.
그리하여 석가모니부처님은 녹야원에서 안냐탸 콘단냐 등 다섯 비구를 상대로 최초의 가르침을 펴신 이래 80세를 일기로 돌아가실 때까지 오직 스스로의 헛된 욕망과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고통받는 중생들의 제도에만 매진하셨습니다.
우리들은 초기경전 속의 여러 가지 일화들을 통해서 권위적이거나 계시적인 자세를 철저히 배격하고 누구나 긍정할 수 있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입장에서 인생의 참다운 가치를 일깨우고자 노력하시던 석가모니부처님의 자상하고도 인자하신, 그야말로 지혜와 자비가 충만한 삶의 모습들을 무수히 만나게 됩니다.
■ 석가모니 부처님은 어떤 방법으로 제자들을 가르치셨나
이 세상 모든 이들에게 진정한 안락과 행복의 길을 열어 보이기 위해서 가르침을 펴기 시작한 석가모니 부처님은 제자들을 가르치는데도 위대한 인류의 스승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셨습니다. 상대의 입장을 충분히 헤아려서 그에 알맞는 가장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교화의 방법을 채택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주로 사용하셨던 교설의 방법들에는 어떤 것이 있었을까요.
첫째, 부처님은 설법을 하실때 비유나 인연담을 많이 하셨습니다.
둘째, 부처님은 가르침을 펴실 때 문답을 자주 사용하셨습니다. 대화를 통해 가르치면서 상대가 올바로 이해하고 있으면 그대로 긍정하기도 하고 틀렸으면 되묻기도 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상대방의 이해를 도우셨습니다.
셋째, 운문의 형태로 가르침을 설하신 경우가 많았습니다. 입으로 염송하기 쉬운 운문을 통해서 암기와 기억을 도운 것입니다. 우리들이 자주 접하는 경전 중에 <법구경(法句經)>이라는 것이 있습니다만, 그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운문으로 된 가르침들을 모아놓은 것입니다.
넷째, 당시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던 설화나 가르침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재해석하는 방법을 많이 쓰셨습니다. 기성의 고정관념에 사로 잡혀 있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무작정 부정하기보다는 일단 긍정하면서도 새로운 입장에서 올바른 이해를 일깨우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독특했던 부처님의 교화 방법은 위의(威儀)를 통한 방법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최고의 진리를 깨달은 이의 참으로 완전 무결한 삶의 모습을 대중들 앞에 있는 그대로 펼쳐 보이심으로써 대중들 스스로가 감화 받도록 하신 것이었습니다.
■ 석가모니 부처님의 십대제자는 어떤 분들인가
석가모니 부처님 아래 출가한 제자들은 수없이 많습니다만, 그 가운데 특히 뛰어났던 열 분을 우리는 부처님의 10대제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사리풋타로, 우리들이 사리불(舍利弗) 또는 사리자(舍利子)라고 하는 분입니다. 지혜가 특히 뛰어났던 분이라 지혜제일이라고 합니다.
두번째는 마하목갈라나로, 목건련(目 連) 또는 목련(目連)이라 알려진 분입니다. 신통력이 뛰어났으므로 신통제일이라 하는데, 효성이 지극해 어머니를 지옥에서 제도한 일화로 유명합니다. 사리풋타와 함께 초기 교단의 양대지주 역할을 했지만, 두 분 모두 부처님 보다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번째는 마하캇사파로, 대가섭(大迦葉) 또는 그저 가섭(迦葉)이라고 합니다. 금욕적인 생활이 뛰어났으므로 두타제일이라고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입멸하신 후 교단의 후계자가 되어 경전의 결집을 주재했습니다.
네번째는 아누룻다 즉, 아나율(阿那律)입니다. 수행을 너무 열심히 하다 눈이 먼 일화로 유명한데, 안보고도 아는 신통을 얻었으므로 천안제일이라고 합니다.
다섯번째는 수부티 즉,수보리(須菩提)입니다. 연기설을 잘 이해했으므로 해공제일이라고 합니다.
여섯번째는 푼나 만타니풋타 즉, 부루나(富樓那)입니다. 설법제일이었습니다.
일곱번째는 마하캇차나 즉, 가전연(迦 延)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풀어서 설명하는데 뛰어나 분별제일이라합니다.
여덟번째는 우팔리 즉, 우바리(優波利)로, 계율을 잘 지켜 지계제일이라 합니다.
아홉번째는 라훌라 즉, 라후라(羅喉羅)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친아들로, 밀행제일이라 합니다.
열번째는 아난다 즉, 아난(阿難)으로, 부처님을 가까이 모시며 설법을 가장 많이 들어 다문제일이라 합니다.
■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라는 것이 있던데
예로부터 인간의 삶은 그저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삶과 죽음을 거듭 하면서 윤회(輪廻)하는 것이라고 믿어 왔던 인도 사람들은 성자나 위인들의 생애도 그저 한생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랜 생의 인연에 따라서 이루어진 결과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경우에도 고타마 싣닷타라는 한 인간으로 우리들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이전에 오랜 동안 여러 생을 전전하면서 선행을 쌓은 결과 그와 같이 위대한 인격자가 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거기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라는 것이 민간 설화의 형식으로 만들어지고 사람들 사이에 유포되게 되었습니다.
<자카타> 혹은 <본생담(本生譚)>이라고 불리어지는 이 이야기들 속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은 아득한 옛날부터 왕이나 왕자, 수행자, 상인등의 민간만이 아니라 원숭이, 앵무새, 비둘기, 코끼리 등 동물로까지 바꿔 태어나면서 온갖 미담과 선행의 주인공이 되고 있습니다.
어렵고 딱딱할수 밖에 없는 교리들이 주된 내용을 이루는 다른 경전들에비해 옛날 이야기식으로 쉽고 재미 있으면서도 인과응보(因果應報)나 권선징악(勸善懲惡)의 가르침을 일깨우는 이 이야기들은 일반 민중들 사이에 상당한 인기를 누리게 되었고 그양도 대단히 많아졌습니다.
남방불교쪽에 전하는 대장경 안에서는 <자카타>가 독립된 한 부류를 이루면서 모두 540여편이나 수록되어 있습니다. 한편 역사적으로는 설화 속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여러 가지 다른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에 자극받은 일반 신자들 사이에 우리도 선행을 쌓아나가면 언젠가는 부처님이 될 수 있겠다는 신앙을 불러 일으켜 대승불교(大乘佛敎)가 흥기하는 촉매 역할을 하게 된 것도 바로 이 본생담입니다.
■ 석가모니부처님 당시의 교단은 어떤 모습이었나
불교의 교단을 의미하는 승가라는 말은 인도의 옛말 상가를 소리나는 대로 옮긴 것으로, 본래는 공화정를 펴던 고대인도의 부족공동체나 상업활동을 위한 조합을 의미하던 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교단이 상가라는 말로 불리웠던 사실을 보면 많은 사람들의 합의에 의한 민주적인 운영방식이 교단의 기본적인 지도이념이었음을 쉽게 엿볼 수 있었습니다. 불교교단은 출신 부족이나 계급에 관계없이 누구나 입문할 수 있었으며, 일단 교단의 일원이 되면 먼저 출가하고 나중에 출가한 차이에 따른 위아래는 있었지만 대체로 완전한 평등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특히 계급을 중시하여 계급이 다른 사람과는 결혼은 물론 식사나 대화조차 금지되어 있던 당시의 인도사회에서는 엄청나게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출가수행자의 생활은 일반적으로 사의지(四依止)라고 해서 다음이 네 가지 규정이 이상적인 것으로서 제시되고 있었습니다.
즉 그 첫번째는 탁발(托鉢)로서 식사는 걸식에 의해 하루에 한 끼만을 먹었으며, 두번째는 분소의 (糞掃衣)로 옷은 남이 버린 누더기를 고쳐서 입었습니다. 세번째는 수하좌(樹下坐)라고 해서 나무 밑이나 숲 속, 동굴, 무덤가 같은 곳에서 기거했으며, 네번째는 부란약(腐爛藥)이라고 해서 병이 났을 때는 소의 오줌을 발효시켜만든 허술한 약만을 썼습니다.
말하자면 극도의 내핍과 금욕 및 철저한 계율의 준수만이 초기불교의 생활상으로서, 그것은 수행생활의 외적인 형식을 중시해서가 아니라 출가수행자들이 온갖 헛된 욕망과 탐욕을 벗어버리고 오로지 진리의 탐구와 그 전파에만 전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남들과 똑같이 그런 생활로 평생을 보낸 이가 바로 석가모니부처님이셨습니다.
■ 석가모니부처님의 사리탑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부처님이 사셨던 나라, 인도에서는 옛부터 사람이 죽으면 화장을 하는 관습과 더불어 타고 남은 유골을 수습하여 숭배하는 유골숭배의 풍습이 있었습니다만, 석가모니부처님께서 45년간의 중생구제와 진리전파를 위한 일생을 마치고 쿠시나라에서 입멸(入滅)에 드시자 부처님의 장례도 재가신자들에 의해 인도의 전통예식대로 화장으로 치뤄졌습니다.
그것은 부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부처님의 제자인 출가수행자들은 부처님의 장례같은 일에는 관여하지 말고 오로지 진리탐구에만 힘쓰라고 유언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쿠시나라에 살던 말라족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부처님의 장례를 치르고나자 이번에는 부처님의 유골을 처리하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뒤늦게 부처님의 입멸소식을 전해들은 여러 나라의 왕들이 각기 생전의 부처님과의 인연을 빌미로 부처님의 유골을 요구하며 심지어는 군대를 동원하는 사태까지 벌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때마침 도냐라는 한 바라문이 부처님의 생전의 덕을 일깨우며 중재에 나서서 유골을 여덟 등분하여 여덟 나라에서 각기 사리탑을 세워 공양하도록 하였습니다. 또, 유골 분배가 끝난 후 현장에 도착한 모리야족은 할 수 없이 화장을 하고 남은 재를 가져갔고 도냐에게는 유골을 분배할 때 썼던 병이 주어졌는데, 그들도 각기 그것들을 탑을 세워 봉안했습니다.
그것을 근본팔탑(根本八塔) 혹은 근본십탑 (根本十塔)이라고 합니다만, 그후 아쇼카왕 때에는 불교를 널리 포교하기 위해 여덟 개 탑 속의 유골을 꺼내 인도 전역에 팔만사천개의 사리탑을 세웠다고 합니다. 불자들은 대대로 사리탑을 석가모니부처님 대신으로 여기며 정성껏 공양해왔는데, 사리탑의 사리란 인도의 옛말 사리라에서 온 말로, 유골을 의미하던 말입니다.
■ 석가모니부처님의 탄생에 얽힌 설화가 많은데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애를 다룬 경전이나 전기들에는 부처님의 탄생과 관련하여 수많은 설화들을 전하고 있습니다만, 그 중에는 특히 요즘 사람들로서는 이해가 힘든 얘기들이 자주 눈에 띕니다.
예를 들면 마야부인이 태자를 낳기 위해 당시의 풍습대로 친정인 콜리성을 찾아가던 길에 룸비니동산에서 갑자기 산기를 느껴 아셔카나무 꽃가지를 잡고 옆구리로 태자를 출산했다든가, 그때 천지가 진동하고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렸으며 온갖 천신들이 나타나 예배하고 연못 속에선 용들이 나와 오색의 따뜻한 물을 뿜어 태자를 씻어 주었다는 등의 이야기들이 그것입니다.
특히 갓 태어난 태자가 사방으로 일곱걸음씩을 걸은 뒤에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 오직 나홀로 존귀하도다. 온 세상이 모두 고통 속에 잠겨 있으니 내 마땅히 이를 편안하게 하리라.'라는 선언을 했다고 경전에는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이와 같은 이야기들에는 도대체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부처님의 전기를 저술한 사람들의 입장을 이해한다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즉 작가들은 부처님의 위대성을 보다 감명 깊게 전하기 위하여 부처님은 탄생부터가 보통 사람들과 달랐음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의 이상의 신비적인 이야기들 안에는 많은 암시들이 숨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옆구리로 태어났다는 것은 인도의 고대 종교인 바라문교에서의 교리 중에는 바라문의 탄생은 이마로, 크샤트리아의 탄생은 옆구리로, 바이샤의 탄생은 평범하게, 수드라의 탄생은 발등으로 탄생한다고 믿어 왔던 신화적인 말들을 (아리안 족이 인도를 침입, 식민통치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런 것들을 만들었다고 함.) 끌어들여 석가모니 부처님이 왕족 출신이였음을 나타내고, 탄생 때의 이변들은 부처님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인류역사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음을 일컬으며, 일곱 걸음을 걸은 것은 부처님이 육도윤회(六道輪廻)에서 벗어나 해탈(解脫)을 이루셨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 석가모니부처님이란 어떤 사람인가
불교의 교조 석가모니 부처님 (釋迦牟尼佛)은 일찌기 우리 와 같은 한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 우주와 인생의 최고진리를 깨닫고 완성된 삶으로 나아 가신 역사상 그 실재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그분은 지금으로 부터 2,600여 년전 인도의 동북부지방 히말라야 기슭에 있던 한 작은 나라인 카필라밧투의 태자로서 태어 나셨습니다.
아버지는 연로한 숫도다나왕이었고, 어머니는 마야부인이었습니다. 태자는 태어날 당시 카필라밧투의 국민들이 태자에게 걸었던 기대가 얼마나 컸었는지는 태자의 이름을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는 의미의 싯닷타라고 지었던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생모인 마야부인이 태자를 낳은 지 이레만에 돌아가시고 이모 마하파자파티부인의 손에 의해 양육되게 된 것을 제외하고는 생활에 별다른 어려움이 없이 풍족한 유년시절을 보내고 총망받는 젊은이로 성장한 싯닷타태자는 이윽고 생.노.병.사라는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에 부딪쳐 심각하게 고뇌하던 끝에 29세 때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권한과 부모 처자를 버리고 출가 수행자가 되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것은 유한한 인생의 현실에서 벗어나 참다운 삶의 길을 찾아나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후 6년간 당시의 전통적 수행방법인 선정 (禪定) 과 고행(苦行)에 피나는 노력을 경주했지만 궁극적인 만족을 얻을 수 없었던 태자는 35세 때 마침내 두가지 수행을 모두 포기하고 네란자라 강변의 보리수 아래에서 깊은 명상에 잠겨 있던 중 샛별이 뜨는 것을 보고 크나 큰 깨달음을 이루어 진리의 완성자 곧 부처님이 되셨습니다. 부처님은 깨달은 이, 진리에 눈뜬 이를 의미합니다.
■ 미륵불은 어떤 분이며 어떻게 모셔야 하나
미륵부처님(彌勒佛)은 먼 훗날 이 땅에 출현하셔서 중생들을 제도하실 미래세의 부처님으로, 지금은 도솔천에서 천인들을 위해 설법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미륵부처님이라고도 하고 아직은 부처님이 아니므로 미륵보살이라고도 하는데, 미륵이란 인도의 옛말 마이트레야를 소리나는대로 옮긴 것으로 본래는 사랑, 우정, 자애 등을 의미하던 말이었습니다. 따라서 한문으로 번역할 때는 뜻으로 옮겨 자씨보살(慈氏菩薩)이라고도 합니다.
한편 초기경전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미륵이라는 이름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본래 실존 인물에서 유래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미륵부처님에 대한 믿음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게 된 것은 <관미륵보살상생도솔천경>과 <미륵당래하생경> <미륵대성불경> 등이 나오고부터 입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에서 <미륵상생경>과 <미륵하생경>의 내용에 따라 역사적으로 미륵부처님에 대한 믿음은 상생신앙과 하생신앙의 두가지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상생신앙(上生信仰)이란 현제 미륵보살이 계시는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희구하는 아미타신앙과 흡사한 왕생신앙이고, 하생신앙(下生信仰)이란 앞으로 이 땅에 출현하실 미륵부처님을 숭상하여 십선업(十善業)을 닦으며 그분의 구원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미륵하생경>에 의하면 장차 전륜성왕이 지배하는 세상이 오면 미륵이 태어나 용화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이루고 세 차례의 설법으로 무수한 중생들을 제도하여 이 땅에 용화세계(龍華世界)를 건설하시리라는 것으로, 이와 같은 미륵부처님을 모신 전각을 우리는 용화전(龍華殿), 미륵전(彌勒殿), 자씨전(慈氏殿)이라고 합니다.
한편 불교에서는 미래불인 미륵부처님 이외에도 과거불, 현재불 등을 모시는데, 이를 통틀어 삼세불(三世佛)이라고 합니다.
■ 비로자나 부처님은 어떤 분이며 어떻게 모셔야 하나
비로자나 부처님(毘盧蔗那佛)은 달리 비로사나불(毘盧舍那佛)이라고도 쓰고 줄여서 노사나불(盧舍那佛) 또는 자나불(蔗那佛)이라고도 하는데, 비로자나란 인도의 옛말 바이로차나를 소리나는대로 옮긴 것으로 본래는 태양을 의미하던 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뜻으로 옮길 때는 변일체처(遍一切處) 또는 광명변조(光明遍照)라고 하는데, 태양이 모든 곳을 두루 비추는데 비유해서 이렇게 번역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밀교에서 대일여래(大日如來)라고 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가지 이름을 지니고 있는 비로자나 부처님은 <화엄경>과 밀교 경전들의 교주인 법신불(法身佛)로서, 말하자면 우주와 인생에 깃들어 있는 영원무변하고 보편타당한 진리를 본체로 하는 부처님입니다.
다시 말해 석가모니 부처님을 비롯한 모든 부처님들의 본질인 진리 그 자체를 인격화 해서 모시는 부처님으로, 부처님들의 본질인 진리 그 자체를 인격화해서 모시는 부처님으로, 온 우주에 두루 충만해 있고 이 세상 모든 것 안에 내재해 있어 다른 입장에서 살펴본다면 세상 만물이 이 비로자나 부처님의 화현입니다.
이와 같은 비로자나 부처님에 대한 해석은 예로부터 불교계 내부에서 대단히 구구하여 일치된 견해가 없었습니다. 또한 진리를 몸으로 하고 있는 그 속성상 특별한 형상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만, 사찰에서 모시는 비로자나 부처님의 불상은 흔히 지권인(智券印)이라고 해서 오른손으로 왼손의 집게 손가락을 말아쥔 손모양을 하고 계십니다.
여기에서 오른손은 부처님의 세계를 뜻하고 왼손은 중생세간(衆生世間)을 뜻하는 것으로, 부처님과 중생, 깨달음과 어리석음이 본래 둘이 아님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같은 비로자나 부처님을 모신 전각을 보통 화엄전(華嚴殿), 비로전(毘盧殿) 또는 대적광전(大寂光殿)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 아미타 부처님은 어떤 분이며 어떻게 모셔야 하나
아미타 부처님은(阿彌陀佛)은 다른 말로 무량수불(無量壽佛) 또는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고도 하는데, <아미타경>이나 <무량수경> <관무량수경>등에서 주로 설해지고 있는 부처님입니다.
무량수경에 의하면 이 부처님은 아득한 옛날 세자제왕불이라는 부처님아래에서 출가하여 법장비구로 있을 때 유명한 48대원을 세우고 오랜동안 수행을 쌓았기 때문에 그 과보로서 부처님이 되신 것으로, 현재는 서쪽으로 10만억 국토를 지나 극락(極樂)이라는 곳에서 가르침을 베풀고 계신다고 합니다.
극락(極樂)이란 아미타 부처님의 원력에 의해 세워진 불국토로서, 다른 말로 안양국(安養國) 또는 안락국(安樂國)이라고도 하며 온갖 죄악이나 괴로움이 없는 청정하고 평안하며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곳이라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이야기한 48대원은 누구든지 그곳에 가기를 원하여 아미타 부처님의 명호를 열번 부르면 모두 그곳에 태어나게 하겠다는 것을 비롯하여 모두가 중생구제를 위한 대자대비의 맹세들로 가득차 있는데, 그로 말미암아 먼 옛날부터 이 부처님은 많은 이들의 신앙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말하자면, 괴로운 삶의 현실에서 허덕이는 중생들에게 극락에 왕생하여 보다 편안하게 불도를 닦을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계시는 분이 바로 아미타 부처님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아미타 부처님을 사찰에서 모실 때는 보통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 또는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을 함께 모시며, 아미타 부처님이 모셔진 전각은 무량수전(無量壽殿), 극락전(極樂殿) 등으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한편 불교에서는 서방 극락정토의 아미타 부처님만이 아니라 동방 묘희세계의 아촉불(阿 佛) 등 동서남북의 방위와 관련된 부처님들이 많이 있는데, 이런 부처님들을 타방불(他方佛)이라고 합니다.
■ 약사여래 부처님은 어떤 분이며 어떻게 모셔야 하나
약사여래(藥師如來) 부처님은 보다 갖추어진 이름으로는 약사유리광여래(藥師琉璃光如來) 부처님이라고 하는데, 동방으로 갠지스강 모래알 수의 열 배에 해당하는 국토를 지나 정유리정토(淨琉璃淨土)라는 곳에 계신다고 합니다.
본래 <약사여래본원경> <약사유리광칠불본원공덕경> 등에서 주로 설해지고 있는 이 부처님은 보살이었을 때 12가지 서원을 세우고 수행을 하여 부처님이 되셨다고 하는데, 그 12가지 서원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자신이나 남들의 몸에 광명이 치성할 것,
둘째 위덕이 높아서 중생들을 모두 깨우칠 수 있을 것,
셋째 중생들의 욕망을 모두 만족시켜 모자람이 없도록 할 수 있을 것,
넷째 모든 중생들의 대승의 가르침을 이끌어 들일 수 있을 것,
다섯째 모든 중생들이 깨끗한 업을 지어 삼취정계를 구족하게 할 수 있을 것,
여섯째 모든 불구자들이 온전한 몸을 갖게 할 수 있을 것,
일곱째 몸과 마음이 안락하여 위없는 깨달음을 얻도록 할 것,
여덟째 모든 여인들이 남자가 되게 할 것,
아홉째 마구니나 외도의 나쁜 소견을 없애고 부처님의 올바른 지견(知見)을 얻도록 할 것,
열째 나쁜 왕이나 강도 등의 고난으로부터 모든 중생들을 구원할 수 있을 것,
열한번째 모든 중생들의 배고픔을 면하여 안락하게 할 수 있을 것,
열두번째 가난해서 의복이 없는 이들이 훌륭한 옷을 얻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의왕(大醫王)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모든 이들을 질병으로부터 구원할 뿐 아니라 중생들에게 온갖 현세이익을 베푸는 구제불(救濟佛) 가운데 한 분이 바로 약사전(藥師殿)이라는 전각에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함께 모시어 손에 약병을 들고 계신 모습이 특징입니다.
■ 관세음보살은 어떤 분이며 어떻게 모셔야 하나
대승불교의 수많은 불. 보살 가운데에서 대중들과 가장 친근한 분이라면 단연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들 수 있겠습니다. 이같은 관세음보살은 달리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광세음보살(光世音菩薩), 관세자재보살(觀世自在菩薩) 또는 줄여서 관음보살(觀音菩薩)이라고도 합니다.
<법화경> ‘보문품’에 의하면 이 보살의 이름을 특히 관세음이라고 하는 이유는 언제나 세간의 소리를 관찰하고 계시기 때문으로 갖가지 고난을 겪고 있는 중생들이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듣고 일심(一心)으로 그 이름을 부르면 그에 따라 33가지 응화신(應化身)으로 나타나서 즉시 구원하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관무량수전>에 의하면 이 보살은 사람이 죽어갈 때 아미타 부처님을 모시고 나타나 그를 극락세계로 맞이해간다고 하며, <화엄경>에서는 바다에서 재난을 당한 이들을 구호하는 분이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불교의 깊은 교리를 알든 모르든 관계없이 누구나 어려움에 처하여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부르면 난을 피하고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으로, 부르는 사람들의 바램에 따라 언제 어디서든지 그 모습을 나투어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 바로 관세음보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생구제의 대승정신을 온몸으로 구현하고 계신 자비의 화신이라 할 수 있겠는데, 그런 만큼 예로부터 이 보살에 대한 신앙이 성행하여 수많은 영험담이 전해져 내려오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관세음보살은 일반적인 성관음(聖觀音) 이외에도 천수(千手), 십일면(十一面), 백의(白衣), 수월(水月), 여의륜(如意輪) 등 여러 가지 모습으로 모셔지고 있는데, 이는 대상에 따라 다양한 관세음보살의 구제활동을 제각각 형상화 시켜낸 것입니다.
그리고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은 원통전(圓通殿), 대비전(大悲殿), 관음전(觀音殿) 등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어떤 분이며 어떻게 모시나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양옆에 모시기도 하고 때로는 비로자나 부처님의 좌우에 모시기도 하는 보살로, 말하자면 각기 지혜와 행원(行願)이라는 부처님의 두 가지 커다란 덕성을 상징하는 분입니다.
이 가운데 문수보살의 문수라는 이름은 본래 인도말 만주슈리를 소리나는 대로 옮긴 말, 문수사리(文殊師利)를 줄인 것으로, 달리 만수실리(曼殊室利)라고도 하고 묘길상(妙吉祥) 또는 묘덕(妙德)이라 번역하기도 합니다. 여러 대승경전에 두루 등장하기도 하여 주로 부처님의 지혜를 대변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분으로, 비교적 초기에 속하는 경전에서부터 나오고 있으므로 본래 대승불교가 성립할 당시의 실제 인물에서 유래된 분이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와 같은 문수보살을 사찰에 모실 때는 손에 칼을 들고 있거나 사자를 타고 있는 형상을 한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번뇌를 단호하게 끊어버리는 칼이나, 용맹과 위엄의 상징인 사자를 통해 지혜의 준엄한 성격을 암시한 것이라 보여집니다. 보현보살은 달리 변길(遍吉)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기도 하는 분인데, 주로 깨달음과 중생구제를 향한 실천행의 의지 즉, 행원을 상징하는 보살입니다.
그러므로 문수보살이 사자를 타고 있는데 비해 보현보살은 흰 코끼리를 탄 경우가 많은 것도 행원이라는 것의 성격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말하자면 묵묵하게 그러나 꾸준히 한 길을 가는 코끼리를 통해서 보살도 실천의 올바른 자세를 일깨우는 것으로, 이와 같은 보현보살의 뛰어난 실천력은 특히 <화엄경> <보원행원품>의 귀절들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지혜와 실천이라는 두 가지 이상을 통해 대승보살도의 영원한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 지장보살과 대세지보살은 어떤 분이며 어떻게 모시나
지장보살(地藏菩薩)은 다른 이름으로 지지보살(持地菩薩), 묘당보살(妙幢菩薩) 또는 무변심보살(無邊心菩薩)이라고도 하며 <대승대집지장십륜경> <지장보살본원경> <점찰선악업보경> 등에서 주로 설해지고 있는 보살입니다.
<지장십윤경>에 의하면 지장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입멸하신 후 미륵부처님이 이 땅에 출현하실 때까지 육도윤회의현 실세계에 몸을 나투어 중생들을 구제하도록 석가모니부처님으로부터 위촉받은 분이라고 합니다. 흔히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이 아무도 없어 지옥이 텅빌 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는 서원으로 유명한 이 보살에게는 따라서 대원본존(大願本尊)이라는 수식어가 붙어다닙니다.
말하자면 중생제도의 맹세가 누구보다도 강하고 위대한 분으로서, 그 원력의 힘으로 자신의 안락은 뒷전으로 돌리고 지옥이든 천상이든 고통받는 중생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쫓아가서 그를 구원하는 분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지장보살은 흔히 삭발을 한 체 지팡이나 지혜를 상징하는 보배구슬을 든 형상을 하고 계신 경우가 많은데, 특히 지옥 중생들의 제도와 관련하여 명부전(冥府殿)이나 지장전(地藏殿)의 보존으로 모셔지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관세음보살과 함께 아미타부처님의 옆에 모셔지기도 합니다.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은 득대세(得大勢), 대정진(大精進)이라고 하며 본래 관세음보살과 함께 아미타부처님을 보좌하는 보살로 잘 알려져 있는 분입니다. <관무량수경>에 의하면 관세음보살의 이마에 아미타부처님의 화불을 모시고 있는데 비해 보병을 지니고 있는 것만이 다를 뿐 그 형상이 관세음보살과 거의 흡사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역사상 독립적으로 신앙된 일은 없이 다만 아미타부처님의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로서만 모셔지는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