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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연명색]에서..
명색을 물질과 정신으로 보면.. 정신적인 식에서 물잘인 명색이 생긴다는 게 되어..
문제가 생기는데 그것을 시중에서는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식이 어떻게 하여 정신과 물질을 만들어 내는 것일까
12연기에서 식(識)은 ‘재생연결식’을 말한다. 한 존재가 생을 마감 하고 새롭게 재생하게 되었을 때 이 재생연결식에 의하여 정신과 물질이 생겨난다고 한다. 단지 알음알이에 불과한 식이 어떻게 하여 정신과 물질을 만들어 내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모든 불교에서 식은 찰나생/찰나멸임을 잊으면 모든 문제가 꼬이기 시작합니다. 식은 찰나생/찰나멸이기 때문에 앞 찰나의 식과 뒤 찰나의 식은 등무간연에 의해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찰나생멸을 거듭합니다. 그리고 같은 한 찰나에 식은 명색(색수상행)을 일어나게 하고 명색은 다시 식을 지탱해주는 서로 지탱하는 조건이 되어 서로 관계 맺으면서 이렇게 찰나생멸을 거듭하면서 흘러가는 것이 중생의 삶의 모습입니다.
등무간연(等無間緣)이란
먼저 등무간연(等無間緣, 사마난따라 빳짜야)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무간(無間)이란 간격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재생연결식 또한 무간이라 볼 수 있다. 북방불교에서 같이 중유가 있어서 ‘49일 동안 머문다’라는 간격 의 개념이 없이 즉, 죽음의 마음 다음에 간격 없이 재생연결식이 일어나 새롭게 태어난다는 이야기이다. 바로 이런 것이 법의 찰나생 찰나멸에 대하여 잘 설명해 주는 예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등무간연은 간격 없이 식이 찰나생 찰나멸 한다는 조건을 말해 주고 있다.
상호연(相互緣)이란
다음으로 식은 12연기에 있어서 뒤 이어 일어나는 명색과 상호연(相互緣, 안냐만냐 빳짜야)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상호연은 ‘서로가 서로를 지탱해 주는 조건’을 말하는데 식과 명색과의 관계를 가장 잘 설명해주고 있다. 이와 같은 식과 명색의 관계를 ‘식연명색’ 또는 ‘명색연식’이라고 한다. 이런 관계를 밝혀 주는 이야기가 초기경전에 있다.
“알음알이가 정신/물질의 조건이 되고, 정신/물질이 알음알이의 조건이 되어, 이 둘이 서로 지탱하는 조건(相互緣)으로 조건이 되는 것이다” (대인연경, D15 §22)
이렇게 설명하는 것은 12연기에 있어서 명색에 대하여 식을 제외한 ‘색수상행’ 넷으로 이해 하기 때문이다. 즉 명색이 색이라는 ‘물질’과 수상행이라는 ‘마음부수’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말한다. 흔히 오온을 ‘색수상행식’이라고 말하는데 여기에서 식이 재생연결식을 말하고, 색수상행이 명색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오온이 되려면 재생연결식과 명색이 결합 되어야 한다. 이런 관계를 상호연으로 설명 하는 것이다.
구생연(俱生緣)이란
다음으로 구생연(俱生緣, 사하자따 빳짜야)이다. 구생연은 ‘함께 생긴 조건’을 말한다. 이는 마음과 마음부수를 설명하는 데 사용된다. 즉, 한생의 최초의 알음알이인 재생연결식은 일어나는 순간부터 업에서 생긴 물질을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식은 반드시 심소법들 즉 ‘수상행’들과 함께 한다는 것이다. 임금 가는데 신하가 따르듯이 마음이 가는 곳에 마음의 작용 즉 심리현상도 함께 한다는 것이다. 이런 설명은 식과 명색의 관계를 설명하는 상호연과도 매우 밀접하다.
중중무진연기와 같은 빳짜야
찰나생 찰나멸하는 식들은 더욱 틈없이 뒤따르는 조건인 등무간연, 동시에 함께 생기는 구생연, 서로가 서로를 지탱해 주는 상호연등이 중중무진으로 겹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 난다는 것이다. 이런 관계를 12연기에 있어서 식과 명색과의 관계를 표로 만들어 보았다.
12연기에서 식과 명색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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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
상카라 |
재생 연결식 |
정신-물질 |
여섯 감각장소 |
감각 접촉 |
느낌 |
갈애 |
집착 |
존재 |
태어남 |
노사 |
無名 |
行 |
識 |
名色 |
六入 |
觸 |
受 |
愛 |
取 |
業有 |
生 |
老死 |
아윗자 Avij-ja |
상카라 Sankh-ara |
윈냐나 vinnana |
나마루빠 nama-rupa |
사라야따나 Salayata-na |
팟사 phassa |
웨다나 vedana |
딴하 tanha |
우빠다나 upadana |
바와 bhava |
자띠 jati |
자라마라나 jara-marana |
마음 |
명색(색수상행) |
식과 명색을 오온으로 보는 경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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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
마음부수(수상행) |
식과 명색을 마음과 마음부수로 보는 경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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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무간연 상호연 구생연 |
틈없이 뒤따르고, 동시에 발생하며, 서로를 지탱하여줌 |
표와 같이 재생연결식이라는 마음이 물질과 심리현상인 명색을 만들어 내고 또한 상호 작용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24가지의 빳짜야가 화엄의 중중무진연기 내지는 법계연기와 같은 맥락으로 보는 것이다.
<마음에서 어떻게 물질이 만들어지는가, 식연명색과 빳짜야/진흙속의 연꽃>
위 내용을 보면..
마음(식)에서 물질이 만들어지는 것으로 말을 하면서도 구체적인 곳에 이르면 어물쩡 또는 명색을 정신적인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차라리 그것보다는 다음의 내용이 더욱 우리에게 와 닿는다.
앞에서 이 세상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불교의 연기법과 영점장, 홀로그램, 비국지성이라는
이론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은 나라는 존재 안에, 심지어
나의 모든 세포 하나 하나에도 이 우주적인 시공을 초월하는 모든 정보와 가능성과 힘이 고스란히 주어져 있으며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일으키는 의도적인 생각 하나 하나가 고스란히 내가 바라보는 물질세계에 영향을 미치며, 영향을 미치는 정도가 아니라 그 물질의 특성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했단 말입니다. 즉 내 마음 하나로 내 밖에 있는 물질세계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그
세상을 창조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일체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 냈다는 화엄경의 가르침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일으키는 마음, 생각, 의도 하나
하나에 따라서 이 우주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영점장의 모든 정보를 내가 얼마든지 가져다 쓸 수 있고,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 우주는 영점장으로써, 연기법으로써
완전히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나는 나와 연결되어 있는 이 우주의 모든 것을, 또 내 안에 영점장의 형태로 존재하는 우주의 모든 정보를 가져다 쓸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 보면, 이 물질적인 세상은 원자로 만들어졌고, 그 원자는 고정된 실체가 없이 입자와 파동으로 바뀌며 그것은 물질이기도 하지만 에너지의 특성으로 언제든 변환될
수 있는 가능성의 장이라고 했습니다. 그 가능성의 장에서는 원자를 관찰하는 자의 주관성이 곧 그 원자와
물질을 구성하는 주요한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물질과 에너지, 입자와
파동은 언제든 서로서로 변환될 수 있습니다. 즉 우리의 마음, 생각, 의도가 곧 현실의 물질세계화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펌 글 (법상 스님: 홀로그램과 법계 그리고
수행)
그렇듯이 우리에게 이해하기 쉽다해도..
과연 부처님께서 [식연명색]을 그런 바탕 위에 설하신 것인지..
의심이 남아 있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식연명색]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먼저 [명색]을 글자 뜻대로 보기를 권한다.
명색에서 명이란 이름(名)이요, 색(色)은 물질이란 뜻도 있지만 본래는 빛깔을 의미한다.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이름이 있다.
사과, 책상, 해, 달..
그리고 이름이란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글자 그대로 이름일 뿐이다.
나를 효진이라 하는데.. 그 말은 나 자체가 효진이 아니라 나를 부르길 효진이라 이름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효진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달제님이나 정글, 산사님과 다른 모습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만일 다른 모습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상대는 내가 효진인지 아닌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다르게 보이는 것은 다르게 보이는 색 때문이다.
결국 명색에서 색은 그자체를 설명하는 게 아니라 그자체가 어떻게 보이는 지를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명색이란 그자체를 지적하는 게 아닌..
그자체의 이름(名)과 그자체가 어떻게 보이는 지(色)를 설명하고 있는 게 된다.
하여 [식연명색]이란.. 식에 의해 물질(색)이 생기다는 게 아닌..
식에 의해 이름과 보이는 모양이 생긴다는 것이다.
첫댓글 효진님 의견에 한 표 드리고 싶습니다.
대상을 통해 식이 드러나면(연기하면) 식을 바탕으로 심소들인 수, 상, 사 등의 작용이 다시 연기하는데, 이 때
식을 드러나게 했던 대상(색)과 심소들인 수상사 등을 일컬어 명색이라 부르게 됩니다.
명색을 이름과 형태로 이해해도 무관한 것은 바로 이름 자체가 수상사 그리고 식의 중연으로 만들어지는(조작)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상에 대한 이름은 이렇게 표상을 떠올리고 표상에 대한 의도가 결정됨으로써 조작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렇다면 명색은 식에 분별된 대상에 대한 하나의 의식이라는 말이 되는데,, 이를 두고 3세설대로
식이 몸안에 착상된다고 하는 해석을 고집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남게 됩니다.
이는 십이연기 자체를 완전히 재해석하게 만드는 중요한 관점의 차이를 낳게 합니다.
그렇다면 명색을 인연으로 하는 육입은 어떻게 보아야 하겠습니까?
기술한 대로 명색은 식에 의해 연기한 대상과 대상에 대한 이름이라는 새로운 의식이라 할 때,
명색이 인연이 되는 육입이란 감관과 감관에 대한 이름 즉,, 존재화된 감관이라는 말이 됩니다.
여전히 무명이라는 유전문에서의 육입이기에 여기서의 육입은 연기한 법으로서의 육입이 아닌
존재로서의 육입,,노사하는, 괴로움 받는 육입이 아닌가 하는 개인적 의견을 가져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