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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그림 길 (106) 임천고암] 너른바위 투성이인 백마강 건너편을 그리다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부여에서 금강을 따라 내려가면 강경을 지나고 익산을 거쳐 군산과 장항으로 흘러간다. 이 금강 구간 중 부여읍의 강 건너 북쪽 마을 규암면 천정대에서 강 따라 내려오면서 고란사, 낙화암, 구드레 나루, 수복정, 장하리(삼층탑), 봉무정 나루, 옛 임천(林川) 반조원(頒詔院) 나루까지 이어지는 물길을 백마강(白馬江)이라 부른다 한다. 참 가슴 시린 강이다.
오늘은 겸재의 그림 따라 옛 임천군으로 간다. 부여읍에서 백마강 건너 남쪽 지역 큰 고을이었던 임천군(林川郡)은 1914년 일제하에서 쪼개져 부여에 속하는 일개 면(面)이 되었다. 오늘은 옛 임천군에 속했던 임천면, 세도면(世道面), 장암면(場岩面)으로 여행을 떠나 보자. 좀처럼 여행을 가지 않는 지역이라서 대조사 대불(大佛) 답사를 오는 사람 이외에는 외지인이 드물다. 다행히 임천 가림성(加林城)의 사랑나무가 SNS 바람을 타고 젊은이들의 인증 사진 배경으로 뜨다 보니 그나마 이곳을 찾는 주변 지역의 젊은 커플들이 늘고 있다.
‘세도면 반조원’이라는 거창한 지명의 유래
겸재의 그림 임천고암(林川鼓岩)의 배경은 이제는 임천에 있지 않고 세도(世道)에 있다. 세도고암(世道鼓岩)이라 해야 할까. 이 그림의 배경은 부여군 세도면 반조원리이다. 반조원의 지명 유래를 마을유래비에 써 놓았는데 나당연합군 침략 시에 금강을 타고 이곳에 이른 당나라 소정방이 이곳에서 당고종(唐高宗)의 칙서를 반포해서 반조원(頒詔院)이 되었다는 속전(俗傳)을 전하고 있다. 1400년 전 역사가 오늘에 남아 있음이 마음 아프다.
반조원리에는 세도면 사무소가 자리했는데 1930년에 이전해 갔다고 한다. 큰 동리에서 꼬불꼬불 마을길 언덕을 넘으면 너른 터전이 나타나고 저 뒤 강가에 자리 잡은 기와집이 나타난다. 삼의당(三宜堂) 터와 반호정사(盤湖精舍)다.
간송에 소장되어 있는 그림 ‘임천고암(林川鼓岩)’을 최완수 선생의 설명을 따라 살펴보려 한다. 아마도 겸재 70대 이후의 작품일 것이라는데 그렇다면 양천현령을 끝내고 편안히 인곡에서 독서하며 지내던 시기에 그린 그림일 것이다. 그림에는 백마강 변 우뚝한 바위 절벽 위에 건물이 하나 있다. 책 읽고 시 짓고 벗들과 한담(閑談)하든지 후학을 지도할 만하니 독서당이라 불렀다. 그 앞으로는 정자관(程子冠)에 도포 입고 동자 하나 거느리고 지팡이 짚은 선비가 고개를 조금 들어 강 건너를 바라보고 있다. 은일(隱逸)하게 은거한 은자(隱者)의 모습이다. 겸재가 이 먼 곳까지 찾아가서 그림을 남긴 것을 보면 많이 가까웠던 사이였을 것 같다. 그 주인공은 겸재의 삼종질(三從姪)인 삼회재(三悔齋) 정오규(鄭五奎, 1678~1744)일 것이라 한다. 삼종질은 팔촌 형제의 아들이니 구촌 조카가 되는 셈이다. 요즈음에야 먼 촌수(寸數)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팔촌은 가까운 사이였다.
1676년 생인 겸재로 보면 조카이지만 같은 연배였으니 뜻만 맞으면 가까웠을 것이다. 삼회재는 사천 이병연과도 가까운 사이였고 겸재의 백부인 반곡 정시설(盤谷 鄭時卨)이 편찬한 광주정씨세보의 초본을 바탕으로 족보를 완성해 낸 인물이라서 일문(一門)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한다.
삼회재의 조부 반주(盤洲) 정시형(鄭時亨)은 기사년(己巳年 = 1689년)에 송시열이 사사되는 등 서인(西人)이 몰락하는 것을 보면서 고향인 임천의 이곳에 은둔했다 한다. 1657년(효종 8년)에 진사가 되고, 의금부도사를 비롯하여 공조정랑, 호조정랑 한성판관 등을 역임했던 그가 자리 잡은 이곳에 손자 삼회재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은일하며 성리학에 몰두한 것이다.
웅장했던 바위절벽은 높아진 물에 잠기고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자. 깎아지른 절벽은 이제는 금강하구언으로 물길이 막혀 수위가 높아지니 상당 부분 물에 잠겨 이 그림과 같은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강으로 내려오는 층계는 오늘 날에도 바위길 위에 놓여 있다. 뒤로는 산들이 보이는데 강 건너 산은 석성산성, 용머리산, 국사봉 방향이다. 집 뒤로는 우뚝한 산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이곳에 이런 산은 없다. 100여m 조금 넘는 토성산, 군관산을 그림 구도를 위해 높이 그린 것이리다.
살림집은 목책으로 울타리를 두른 모습이다. 사립문 쪽 앞채는 ㄱ자(字) 초가이고, 본채는 소박한 한옥으로 보인다. 집 앞으로는 어느 농군이 소를 몰고 강가로 나오고 있다. 농토가 있는 방향이 아니니 목마른 소에게 물을 먹이려는 것일까?
그림 속에는 나무들도 몇 그루 서 있는데 삼회재 머리 위로 가지를 늘어뜨린 나무는 누가 보아도 버드나무임에 틀림이 없다. 그 옆 활엽수는 필자의 눈으로는 구분할 수 있는 나무가 아니다. 다시 옆 전나무처럼 보이는 나무와 층계 옆 나무는 혹시 회(檜)나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왜관 수도원에 돌아온 겸재 화첩 속에는 ‘夫子廟老檜(부자묘노회)’라는,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그림이 있다. ‘공자 사당에 있는 늙은 회나무’를 그린 것이다. 이 나무의 모습과 흡사하니 그런 생각이 든다. 지금 이곳 고암에 가면 이런 나무는 없고 노거수가 큰 그늘을 이루고 있다.
그림 속 학은 상징 아닌 애완용 학?
그런데 이 그림에서 재미있는 것은 독서당 앞을 거니는 학(鶴) 한 마리다. 은자(隱者)가 사는 곳이니 찾아와 노는 것일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옛 선비들은 매처학자(梅妻鶴子: 매화를 아내 삼고 학을 자식 삼아 사는 은자의 삶)로 사는 송나라 임포를 숭앙하였다. 그러다 보니 실제로 학을 길렀다. 홍만선의 산림경제(山林經濟)에는 학 키우기가 소개되고 심수경의 견한잡록에는 학이 알 깐 이야기도 있으며 미수 허목도 학 키우는 이야기를 기록하였다. 심지어는 홍문관에서도 학을 키웠고 학 컨테스트가 열리기도 하였다 한다.
일부 옛 선비들은 파초 키우기와 학 키우기의 마니아들이였다. 우리 시대에 반려견 키우기 열풍 같은 것이 옛 시절에도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그냥 키우는 이도 있었지만 날아가는 학을 어이 하리? 깃털을 잘라 훨훨 날지 못하게 하는 비법도 동원되었으니 동물을 학대하는 동물 애호가인 셈이었다.
겸재는 또 다른 그림 초당춘수(草堂春睡)에서 학이 마당에서 노는 모양을 그렸다. 단원과 또 다른 이들도 마당에서 노는 학을 그린 그림들을 남겼다. 임천고암의 학도 아마 그런 학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임천고암의 광주 정씨 이야기에서 겸재의 이 그림 이외에 필자는 아직 더 이상의 자료를 접할 수가 없었다. 광주정씨세보에는 무슨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일까? 이어지는 이 터의 이야기는 파평윤씨(노성윤씨) 집안으로 이어진다. 삼의당(三宜堂)과 반호정사(盤湖精舍)로 이 터의 생명은 이어진다.
필자는 임천고암 글을 쓰려고 지난해에 이어 지난달에 다시 이곳을 찾아 갔다. 마침 이 터를 7대(?) 째인가 가꾸어 온 윤 씨 가문의 윤 선생을 만날 수 있었다. 이 지역 원로들이 별채 반호락(盤湖樂)에서 모임 중이었는데 사진 찍고 이곳저곳을 살피는 필자도 불러 굳이 소주 한 잔 권하는 것이었다. 사양도 예의가 아닌 듯해서 술도 한 잔 하고 삼의당 이야기도 듣고 올 수 있었다. 공짜가 어디 있으랴? 겸재의 그림 주제는 아니지만 간단히라도 삼의당과 반호정사를 돌아보려 한다.
파평윤씨 가문의 한 줄기가 장가들어 1540년 경 노성(魯城: 논산)에 자리 잡았는데 그 후 이 지역 명문가로 발전하였다. 이른바 연산 김씨, 회덕 송씨, 노성 윤씨 가문이 그들이다. 이 가문의 인재 중 한 사람이 지헌(止軒) 윤광안(尹光顔, 1757~1815)이다. 그는 과거에 급제한 후 대사간, 대사성과 이조 참의를 거쳤는데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에 영양(英陽) 운곡영당(雲谷影堂)을 훼철하여 주자의 영정을 철거한 일이 있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사문난적이라는 죄명으로 함경도 무산부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주자라면 토씨 하나라도 고치면 안 된다는 망령에 사로잡힌 유생 273명이 상소에 참여했으니 어찌 무사할 수 있었겠는가? 벼슬에서 물러난 후 그가 자리 잡은 곳이 바로 겸재의 그림 배경이 된 임천고암의 삼회재 자리였다. 아마도 광주 정씨들이 더 이상 삼회재 자리를 유지할 수 없는 사연이 있었던 듯하다. 지헌(止軒) 윤광안(尹光顔)은 우리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인물인데 다산의 목민심서 곳곳에는 목민관으로서 모범이 될 자료로 지헌의 일이 예시되어 있다.
목민심서 해관(解官) 6조 귀장(歸裝) 편에는,
“참판(參判) 윤광안(尹光顏)이 경상 감사(慶尙監司)로 있다가 돌아와서 의장(義庄)과 전원(田園)과 서적(書籍)을 마련해 두어 종족들이 그 혜택을 입었다.(尹參判光顏以慶尙監司歸. 置義莊田園書籍. 宗族賴焉)”라 했다.
부임(赴任) 6조 치장(治裝) 편에는 한암쇄화(寒巖瑣話)를 인용해
“참판 윤광안(尹光顏)이 나와 외각(外閣)에서 교서(校書)할 때, 거친 베 도포가 마치 상복 차림 같았다. 그가 경상도 감사가 되어서는 위엄이 가는 곳마다 행해졌다(寒巖瑣話云. 尹參判光顏. 與余校書于外閣. 麤袍如齊疏之服. 其爲慶尙監司. 威行一路)”라 한 것을 보면 존경 받을 만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왕조실록 곳곳에도 그의 활동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벼슬에서 물러날 무렵 삼회재(三悔齋) 자리에 삼의당(三宜堂)을 지었는데 정면 8간, 측면 세 간이었다 한다. 아쉽게도 1909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하며, 지금도 그 자리에는 8기의 초석이 남아 있다.
겸재의 그림 속 살림집 자리에는 1806년인가 반호정사(盤湖精舍)가 세워졌다 한다. 반호정사는 옛 모습 그대로는 아니겠지만 지금도 그 자리에 남아 후손들이 경영하고 있다. 담 너머로는 배롱나무 빨간 꽃이 여름을 장식하고 있다. 별채 벽에는 후손들이 삼의당기(三宜堂記)와 반호팔경(盤湖八景)을 번역하여 원문과 함께 벽걸이 현수막으로 만들어 붙여 놓았다.
삼의당기는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처사로 성리학에 매진한 해은 강필효의 해은선생유고(海隱先生遺稿)에 실린 기(記)이다. 아마도 평소 알고 지냈을 해은은 지헌 윤광안(止軒 尹光顔)이 충청관찰사로 부임해 오자 1806년(순조 6년) 3월 그의 서숙(書塾)을 방문하였고, 벼슬을 마친 뒤 1814년(순조 14년) 지헌이 백마강 반주(盤洲) 삼의당(三宜堂)으로 돌아오자 초여름 6월 방문하여 함께 뱃놀이하며 몇 날을 지내기도 하였다. 이때 그가 지은 글이 삼의당기이다. 해은선생유고 잡저(海隱先生遺稿 雜著)에 따르면, “반주의 윤지헌을 방문했다. 지헌은 관찰사 직을 그만두고 돌아왔다. 영화로움을 버리고 한가로움을 좇아 이곳에 자리 잡았다. 호수와 산의 즐거움이 가득하다. 당호를 삼의(三宜)라 했다. 이른바 밭 갈만 하고, 고기 낚을 만 하고, 책 읽을 만하다는 뜻이다(訪尹止軒于盤洲. 止軒自嶺臬歸. 辭榮就閒. 卜居于此. 極有湖山之樂. 扁堂以三宜. 蓋云宜耕宜釣宜讀也)”.
이런 뜻을 살려 해은 강필효는 지헌 윤광안을 위해 삼의당기를 썼다. 한문 원문은 해은선생유고 삼의당기 사진으로 대신하고 번역문은 후손들이 벽걸이로 건 번역문을 기초로 해서 이곳에 소개한다.
삼의당기
지헌 윤공이 일찍이 편히 지낼 당(堂)을 참의(參倚)라 편액했는데, 이는 충심(忠)과 믿음(信)과 돈독함(篤)과 존경하고 낮추고(敬) 하는 가르침을 깊이 터득한 것이 있어서 참전의형(參前倚衡: 서 있을 때는 눈앞에 청실함과 독실함이 있나 살피고, 수레를 타면 멍에에 독실함이 있나 살핌)의 뜻을 취한 것이었다.
그리고 벼슬에서 물러난 다음 반주가에서 지낼 때에는 고향을 의지해 거처를 지으며 선영을 의지해 당을 세우고는 또 편액하여 삼의라 하였으니 그 의미는 밭 갈기에 적당하고 낚시하기에 적당하며 독서하기에 적당함을 말한 것이고 과거에 그 글자(參倚/삼의)와 소리가 가까워 취한 것이다.
내가 일찍이 가끔 그 당에 올랐고 그 거처를 좋아했었는데 (지헌이) 무릇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오니 동북으로 펼쳐진 밭은 농사 짓기에 적당하였고 호수를 마주보며 당에 지낼 때 배 한 척과 낚싯대 하나면 낚시하기에 적당하였으며 휘장을 내리고 책을 볼 때 향로와 맑은 날씨면 독서하기에 적당하였다. 진실로 유유자적하기에 충분하여 밖에서 구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내가 삼가 걱정스러운 것은 집안에서는 마땅하나 세상에서는 그렇지 않을까 하는 일이다. 가령 옛날 이윤과 부열과 여상이 아직 등용되지 못했을 때는 간혹 들에서 밭 갈고 반수에서 낚시하며 바위에서 독서하기를 종신토록 할 것 같았으나 명군과 현신이 때에 만나 법도와 계책으로 잘 다스려진 나라에서 세상의 위에 오르면 그 세상에서 마땅한 것이니 또한 어찌 크지 않겠는가?
공은 일찍이 젊어서 등용되어 승정원과 홍문관의 관원으로 임금의 가까운 신하였으며 호남과 영남의 관찰서로 사랑을 남겼으나 끝내 펴지 못하여 지금은 은혜가 빛을 감추고 강호에 물러나 지내고 있다.
그러나 이 한가함에 이른 것은 능히 할 수 없었던 것을 증진하여 장차 큰일을 맡기려 함이 아니겠는가? 지금의 성상께서 보위에 오르셔서 명철한 용안으로 계속 비추시고 마음을 가다듬고 나라를 잘 다스리려 현자를 구하는 일에 힘쓰고 계시니 장차 멀어진 이들이 등용되고 물러난 이들이 나오게 되면 지난 세월 당(堂)에 알맞던 사람은 당(堂)에 알맞을 뿐 아니라 조정에도 알맞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백성에게 요순의 은택이 입혀져 생업을 편안히 하고 효성과 우애(孝悌)가 흥하게 되는 것은 모두 공의 밭 갈고 독서하는 가운데에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공에겐 어떤 결과가 될까? 나이가 물러날 때가 되어 공을 이루고 물러난다면 이는 옛사람의 마땅히 세 번 쉬는 것이 되니 이 또한 옛 사람들만 아름답겠는가? (이후 줄임)
지헌(止軒)은 이곳 반주(盤洲)에 복거(卜居: 택하여 자리 잡음)하면서 반호(盤湖)라는 호(號)를 사용하기 시작한 듯하다. 이곳 강가 바윗돌 위에는 盤湖(반호)라는 각자가 남아 있다. 이곳 사람들 이야기로는 이곳의 지형은 모두 평평한 암반을 형성하고 있다 한다. 그 바위 위에 약간의 흙이 나무를 키운다고 한다. 곰곰 살펴보니 흙 사이로 드러난 곳은 모두 반석(盤石)이다. 겸재가 임천고암(林川鼓岩)이라 그림에 제호(題號)한 것은 이런 까닭인 것 같다.
장암면에서 맛보는 투박한 고려 시대 미학
이제 반호정사를 떠나 장암면(場岩面)으로 향한다. 기왕 이 지역에 왔으니 빼어 놓으면 아까운 유적을 보려 함이다. 장하리에는 아름다운 삼층석탑(보물 184호)이 있다. 전해지기로는 이곳이 한산사(寒山寺) 터라 한다. 부여 정림사 탑 계열의 고려 초 탑으로 보고 있다. 여름 비 추륵추륵 내리는 날 탑은 참 아름다웠다. 1931년과 1962년 두 번에 걸쳐 수리했는데 탑 속에서 상아불상, 목제탑, 다라니경 조각, 사리를 담은 은병과 금병이 발견되었다.
향하는 곳은 임천 대조사(大鳥寺)다. 이곳에는 은진미륵 다음쯤 되는 대불이 있다. 보물 217호로 지정된 미륵보살입상(彌勒菩薩立像)이다. 고려 원종 때(1259~1274년) 수리한 기록이 남아 있으니 고려 초 조성된 불상으로 여겨지고 있다.
고려는 각 지방 토호들이 왕건을 지지하면서 일종의 토호(土豪) 연합국으로 만들어지고 출발하였다. 그러다 보니 각 지역의 토호들은 그들의 세(勢)를 과시하고 싶어 했다. 경기와 충청의 고려 옛길이 이어지는 고장은 많은 고려 시대 불교 유적이 남아 있다. 특히 투박은 하지만 위용을 자랑하는 대불(大佛)은 고려의 유산이다. 많은 이들이 경주, 부여, 익산 등 왕궁 지역 유적과 유물을 찾아다니지만 토호들이 지원한 유적, 민중들이 시주하여 조성한 유적들이 주는 순박한 유물 유적은 또한 각별한 느낌이 있다. 옛 임천에서 만나는 탑과 불상은 그런 것이다.
대조사 미륵불은 그 키를 가늠할 수 있도록 필자가 까메오 출연을 하였다. 대불에서 법당으로 내려오면 순박한 삼층석탑이 있고 대웅전 안에는 조선 시대 조성한 목조보살좌상이 있다.
백제부흥 실패하고 지방 살리기도 실패하나
이제 임천의 마지막 여행길은 임천 읍내 성흥산 가림성(加林城)이다. 이른바 뜨는 지역이 아니면 지방 읍(邑)이나 면(面) 소재지 인구는 날로 급감하고 있는 게 보인다. 거리가 한산함을 넘어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다. 임천도 너무 한산하다. 시외버스 정류장에 가면 각지로 떠나는 버스들이 많던 시절이 얼마 전 같은데, 백제 때도 그랬을 것이고, 고려-조선-대한민국 초기에도 사람이 북적거렸을 읍내가 너무 한산하니 마음이 스산하다. 임천의 진산 성흥산(聖興山) 가림성으로 향한다.
서기 660년 여름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그날의 일을 삼국사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7월) 18일, 의자왕이 태자 및 웅진방의 영군(領軍) 등을 데리고 웅진성으로부터 와서 항복하였다.(十八日, 義慈率太子及熊津方領軍等, 自熊津城來降)
이것이 사실일까? 신당서(新唐書)와 구당서(舊唐書)를 보자.
그 대장 예식이 또 의자왕을 모시고(거느리고) 와서 항복하였다.(其大將禰植 又將義慈來降)
어찌 된 일인지 의자왕은 웅진성주 예식의 손에 끌려 당장군(唐將軍) 소정방 앞에 왔고 예식이 항복한 것이다. 그 내막은 접어 두고 백제는 이렇게 멸망하였다. 그러함에도 사비성(부여)과 웅진성(공주)을 제외한 대부분의 성(城)은 온전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 성들을 중심으로 백제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복신과 도침, 흑치상지 등이 중심이 된 부흥 운동은 한때 위세를 떨쳤으나 전력의 열세와 도침이 복신을 살해하는 내부분열로 인해 3년여 만에 실패로 끝나고 백제는 영원히 역사에서 사라졌다. 이 아픔이여.
살해당한 복신을 못잊는 이들은 요즈음도 은산별신제(恩山別神祭)를 열어 그 원혼을 위로하고 있다. 이런 부흥 운동의 한 축을 담당했던 산성이 가림성(加林城)이다. 성은 성흥산 정상에 퇴뫼식 산성으로 쌓여 있다. 성을 오르려면 절벽이거나 급경사 성흥산을 올라야 하니 천연의 요새였을 것이다. 동성왕 23년(501년)에 쌓았다고 한다. 성벽에서 보면 강 건너 석성산성과 부여가 보이고 강 따라 논산, 강경, 익산, 서천도 보인다. 무너진 성벽은 복원해서 뭐 한다고 생경하게 복원해 놓았다. 사라진 나라 무너진 성은 시간 속에 놓아두면 좋았을 것을.
성 안에는 고려의 개국공신 유금필 장군의 사당이 있다. 이곳과 연고가 없는 유 장군인데 후백제 정벌 후 임천을 지나면서 어려운 백성을 구휼(救恤)한 인연으로 이곳 백성들이 모시지 않았나 하는 추측이다.
이번 여행의 피날레는 사랑나무 아래에서 사진 한 장 찍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가림성에는 400여 년 된 천연기념물 564호 느티나무 한 그루가 헌칠하게 서 있다. 이 나무 뻗은 가지 아래서 사진을 찍어 접으면(데칼코마니) 하트 모양이 된다 해서 젊은 커플들이 사진 찍으러 오는 명소가 되었다. 이렇게 인증 샷을 올리면 영원히 사랑하게 된다 한다. 필자도 어줍게 사진 한 장 찰칵!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제729호 이한성 옛길 답사가 2022.08.11 10: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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