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빙고는 얼음을 저장하기 위한 석조창고로서 겨울에 얼음을 채취 저장하였다가 여름철에 사용
한다.
장기간 얼음을 효율적으로 보관하기 위해 거의가 지하 깊숙히 설치한다.
*현존 석빙고
-현존하는 것들은 모두 조선시대의 것으로
-경주 석빙고
-청도 석빙고
-안동 석빙고
-창녕 석빙고
-영산 석빙고
-달성 현풍 석빙고 등이다.
*석빙고
신라:빙고전 이라는 기관이 있었다.
*석빙고의 구조
-반지하식구조(온도변화에 민감 하므로)
-얼음 채취가 용이한 개천가 근처에 설치 되었다.
-출입구는 ㄱ자 형태를 취하고 있다.
*석빙고의 구조는 지하 깊숙히 장방형의 횡갱을파고 4면을 석재로 쌓아 올리고
천장은 가공석으로 홍예를 틀어 궁륭형을 이루며 홍예 종석에 환기공을 두어 공기
유통을 꾀했다
*빙실의 구조형식
-목빙고 ,석빙고
-외관:고분의 형식
-설치위치:얼음 채취운반이 용이한 개천가 근처
-완만한 경사지역 출입구는 긴방행의 수평이상의 경사지 상부 ㄱ자형태 외기차단
-빙실은 장방형 내부는 기둥이 없는 공간조성
-가구형식: 일정 높이의 수직벽위에 홍예보 천정
-빙실내부는 경사지게하고 배수로 설치(용해수 배출)
-빙실의 규모설정에서 폭은 제한되나 길이는 자연스러움(면적의 결정요소)
-환기공 설치 및 개석
-외기 영향의 최소화에 필요한 이정폭이상 성토유지 단열재의 사용
-출입문의 최소화 주변 열손실대책 강구(이중문,외벽 이중담장)
-출입로의 계단화
-석빙고 석실 내부는 구배가 5~10%정도 있어 집수정을 설치 용해수를 외기로 배출
할수 있게 되어있다.
*석빙고의 종단 횡단 도면은 추후에 올리겠습니다.(사실 아직 스캐너가 없어서..*^^*)
경주 석빙고
1738년(영조 14) 경북 경주시 인왕동(仁旺洞) 월성(月城)의 북쪽에 축조한 조선시대의 화강석제 얼음창고.
지정번호 : 보물 제66호
소재지 : 경북 경주시 인왕동
시대 : 조선
크기 : 길이 18.8m, 홍예 높이 4.97m, 너비 5.94m
종류 : 얼음창고
보물 제66호. 길이 18.8m, 홍예(紅霓) 높이 4.97m, 너비 5.94m. 남북으로 길게 조영하고, 출입구는 남쪽에 있는데 너비 2.01m, 높이 1.78m이다. 여기에서 계단을 따라 실내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빙실의 밑면도 외부의 형태와 같은 직사각형으로 입구에서 안으로 들어갈수록 밑바닥은 경사져 있으며, 바닥 중앙에 배수구가 있어 내부의 물이 이 경사를 따라 외부로 배출된다. 내부는 연석(鍊石)으로 5개의 홍예를 틀어 올리고 홍예와 홍예 사이에 길쭉한 네모 돌을 얹어 천장을 삼았다. 벽은 직사각형의 작은 석재로 정연하게 쌓아올렸고, 밑부분은 장대석을 연결하여 지대석(址臺石)을 삼아 견실하게 축조하였다. 천장에는 3곳에 환기 구멍을 마련하여 외기와 통하게 하였는데, 조각한 돌로 구멍을 덮어 비와 이슬을 막고 있어 다른 석빙고와는 달리 정연한 양식과 축조를 보여 주목을 끈다. 환기 구멍은 중심부에서 북쪽으로 치우쳐 시설하였는데, 이것은 입구가 남쪽에 있으므로 안으로 내려가는 층계가 몇 단 있어서 그만큼 자리[房]를 차지하고 얼음창고의 주실(主室)은 좀더 깊이 들어간 내부의 북쪽에 있는 까닭이다. 이 석빙고 옆에는 석비가 있어 축조연대를 알 수 있는데, ‘崇禎紀元後再戊午’는 1738년(영조 14)에 해당하고, 다시 입구의 미석(楣石)에 ‘崇禎紀元後再辛酉移基改築’이라 새겨져 있어, 축조한 지 4년 만에 현위치에 옮겨 개축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서쪽으로 약 100m 되는 곳에 옛터로 전하는 자리가 있다. 조선 후기에 몇몇 석빙고를 축조하였으나, 그 규모나 기법에서 이 석빙고가 가장 정연한 걸작으로 꼽힌다.
경주 석빙고
경주 석빙고 내부
경주 석빙고 배기통
경주 석빙고
석빙고 (보물 66호)-석빙고 유적 안내문
보물 제66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인장동
원래의 석빙고는 조선 영조 14년(1738)에 축조하여 얼음을 저장하던 곳이나 남쪽 이맛돌에 새겨진 기록에 의하면 그후 3년만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음을 알수 있다. 그 규모는 길이 12.27m, 높이 5.21m,폭 5.76m이며 구조는 화강암 홍예로 골조를 이루어 지붕을 덮고, 3개의 환기통을 배설하였으며, 바닥을 경사를 지워 물이 흘러 배수될 수 있게 만들었다. 기록에 의하면 우리 나라에서 얼음을 저장하던 시설은 이미 신라 지증왕 6년(505)부터 있었다고 한다.
얼음이 귀했던 옛날에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만든, 우리 조상들의 지혜의 산물인 석빙고는 한겨울에 얼음을 저장하였다가 여름철 등에 꺼내 쓰던 돌로 만든 창고입니다. 지증왕 6년 (505)에 얼음을 저장하는 창고를 만들라는 왕명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현재 반월성에 남아있는 석빙고는 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조선시대 영조 14년 (1738)에 부윤 조명겸이라는 분이 해마다 얼음 보관창고를 지어야 하는 백성들의 괴로움을 덜어주기 위해 석재로 영구적인 창고를 만들어서 남아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영조때 만든 석빙고가 여러 개 현존하지만, 경주 반월성에 남아있는 석빙고의 상태가 가장 완전하다고 합니다.
이 석빙고의 구조는 월성 북쪽의 성둑에 잇대어 석빙고를 쌓고 남쪽에 입구가 있습니다. 안쪽의 바닥은 경사지게 하여 물이 밖으로 빠지도록 하고 바닥 중앙에 배수로를 설치되어 있다고 합니다. 출입구는 높이 1.78m, 너비 2.01m이며 계단을 설치하여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내부는 동서로 아치 모양의 홍예(虹霓) 다섯 개를 틀어올리고 그 사이마다 장대석을 걸쳐서 천장을 삼고 있습니다. 북벽은 수직으로 쌓았으며 홍예와 홍예 사이의 천장 세곳에는 배기통로가 있다고 합니다. 지금 밖에서 볼 수 있는 배기 통로는 근래에 수리하면서 석탑의 지붕돌을 사용한 것이지 원래의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석빙고(石氷庫)
석빙고란, 겨울에 얼음을 채빙하여 태양열과 직사광선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여 여름에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창고인데, 현재 월성의 북쪽 성벽 중간지점에 성벽을 가로질러 석빙고가 지어져 있습니다.
신라는 오래전부터 얼음을 저장하여 사용하였는데,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제3대 유리왕 때부터 얼음을 저장하여 사용하였으며, 『삼국사기』신라본기에는 지증왕 6년 11월에 유사에게 명하여 얼음을 저장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나타납니다.
현재 월성에 설치되어 있는 석빙고는 홍예(虹霓)처럼 된 석재 5개를 틀어 올리고 홍예석(虹霓石)과 홍예석 사이의 천장에는 세 곳에다 배기공(환기통)을 설치하였는데, 현재 배기공 위를 덮고 있는 석재는 근래의 수리 때 석탑의 옥개석을 사용한 것입니다.
높이 1.78m, 너비 2.01m의 출입구를 통해 계단으로 내려가면 바닥을 경사지게 하여 어름에서 녹아 내린 물이 성 밖으로 배출되도록 바닥 중앙에 배수로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현재의 석빙고가 지어진 연대에 대해서는 조선시대에 지어진 것이라는 견해와 신라시대에 축조한 것을 현 위치로 옮겼다는 신라시대 축조설(築造說) 두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이곳에 석빙고를 위치했다는 견해는 월성 남쪽에 남천이 흐르고 있어 채빙하기에 편하다는 점과 성루의 경사를 이용할 수 있었다는 점 등을 들고 난 뒤 전체적인 구조와 설계가 조선시대에 세워진 청도 석빙고, 대구시 측후소 내에 있는 석빙고 비명(碑銘), 안동의 석빙고, 경남 창녕읍 석빙고 등과 같이 18세기 전반에 축조되었을 것이라는 견해를 보이고 있습니다.
또한, 석빙고 좌측에 있는 비문에 의하면 1738년(영조14년)에 당시 경주부윤이던 조명겸이 목조(木造)의 빙고(氷庫)를 석조(石造)의 빙고로 다시 축조하였다는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고, 석빙고 입구의 이맛돌에는 '숭정기원후재신유이기개축'(崇貞紀元後再辛酉移基改築)이라고 쓰여 있어 4년 뒤에 동쪽으로 100m정도 옮겨 현 위치에 재 축조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옮기기 전의 옛 위치는 서쪽에 웅덩이로 남아 있는데, 현재 영조 당시 축조한 석빙고 가운데 경주의 석빙고가 가장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으나, 아직까지 신라시대에 축조된 석빙고의 위치 확인과 조선시대의 석빙고와는 구조면에서 어떠한 공통점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은 밝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라시대에 축조한 것을 현 위치로 옮겼다는 견해로는 삼국유사, 삼국사기 등에 얼음을 저장한 기록이 있으며, 조선 영조 당시 인적마저 외딴 이곳에 석빙고를 축조하였을 까닭이 없다는 점 등을 들어서 신라시대의 것을 개축한 것에 지나지 않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습니다.
창녕 석빙고
돌로 지은 얼음저장소 석빙고는 겨울에 얼음을 채빙하여 태양열과 직사광선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여 여름에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창고이다. 우리나라에는 전국에 걸쳐 여러 개의 석빙고가 남아 있고 창녕석빙고도 그 중 하나이다.
창녕 석빙고는 창녕읍 송현동 창녕교육청 앞 개울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고 보물 제310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쪽으로 흐르는 개울과 직각이 되게 남북으로 길게 구축되어 있는데, 석빙고의 봉토가 거의 완전하여 외부의 모양이 마치 큼지막한 무덤처럼 보인다. 표면 높이는 5.4m이고 전체 길이는 13m이다
내부구조를 보면 입구는 남쪽으로 나 있는데 모양은 방형이다. 빙실의 내부는 석재로 4개의 홍예(虹霓)를 틀어 올리고 홍예 사이에는 길고 큰 돌을 옆으로 건너질러 쌓아 올려서 천장을 구성하였으며 천정에는 외부로 통하는 환기공이 설치되었다. 벽은 돌로 쌓아 벽면이 평평하도록 다듬은 것으로 보인다.
석빙고 남쪽에 돌비석이 있는데 「영조 18년(1742년)에 현감 신후선 등이 2월 초하루 날 공사를 시작하여 그 해 4월 초여름에 끝마쳤다」고 하여 창녕 석빙고의 내력을 적고 있다.
□ 석빙고의 역사와 구조, 얼음의 사용용도
얼음을 저장하는 풍습은 문헌기록만 따져도 신라 지증왕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아쉽게도 조선시대 이전의 석빙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조선초기에는 나무로 만든 얼음저장소가 세워지기도 했으나 세종 이후에 석빙고가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그 뒤 석빙고의 형태가 정착되었다. 석빙고의 얼음은 비변사, 홍문관, 승정원 등 조선관청의 관료들에게 제공되었다. 태조 때 한양에는 동빙고와 서빙고가 존재하였는데 동빙고는 음력 3월 1일부터 상강(霜降: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는 날)까지 왕실제사에 필요한 얼음을 제공했으며 서빙고의 얼음들은 관료들에게 지급되었다.
석빙고는 외견상으로는 고분의 형태를 띄고 있지만 얼음저장실인 빙실의 공간이 절반은 지상, 절반은 지하로 나누어져 있다. 이는 자연 현상의 얼음골 원리와 비슷하다. 빙고의 바닥은 흙 다짐이나 그 위에 큰돌을 깔아 놓았고 바닥을 경사지게 만들어 얼음이 녹은 물이 자연적으로 흘러 배수가 되도록 하였다. 홍예로 틀어 올린 빙실 공간은 기둥이 없어 미끄러운 얼음을 다루는 데 용이하고 공간활용도 쉬웠다. 기체의 대류현상 등 과학적 원리를 이용한 건축물이며 여름에도 얼음을 먹을 수 있도록 한 일은 세계적으로도 유래가 없는 우리 조상들만의 슬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