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18:1-12
찬송가 24장 “왕되신 주”
오늘 본문은 사사기에서 두 번째로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는 말씀을 합니다. 왕이 없었다는 말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왕으로 삼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사무엘상 8장에서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라”는 말씀에서 그 의미가 분명해 집니다. 이스라엘 족속은 하나님을 왕으로 삼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은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왔지만, 거기서 하나님이 아닌 자기 생각대로 살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의 언어와 행위는 종교적이고 신앙적이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앞선 본문에서 미가와 그의 어머니의 언어와 행위는 하나님을 말하고 종교적이지만 실제는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게 될 단 자손에게도 같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의 기자는 등장인물과 사건에 대해 평가를 하지 않고 사실만을 기술하므로, 그 판단을 우리에게 맡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더 큰 도전을 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성경 말씀에 따라 섬기는가, 경험과 필요에 따라 섬기는 가를 진지하게 돌아봐야 합니다. 분명히 우리에게는 그런 모습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말씀으로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같이 오늘 본문을 보겠습니다.
(1)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단 지파는 그 때에 거주할 기업의 땅을 구하는 중이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그 때까지 기업을 분배 받지 못하였음이라
여호수아에서는 모든 지파가 다 땅을 분배받았다고 하지만, 오늘 말씀은 단 지파가 기업을 분배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는 그들이 땅을 분배받았지만, 그 땅을 정복하지 못했음을 의미합니다. 2장에서 이스라엘이 땅을 다 정복하지 못하여 하나님께서 이방 민족을 그 땅에 남겨 두신 이유에 대해 말씀하시길, 이스라엘을 시험하여서 순종하는지 알고자 하셨더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따를 때, 단 지파가 땅을 정복하지 못한 것은 능력의 문제가 아닌 믿음의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삶에 있는 실패와 고난은 늘 믿음의 문제로 작용합니다. 삶에서 고난과 실패를 마주할 때, 그 이유와 의미를 해석하는 것은 참 어려운 부분입니다. 그런데 고난과 실패를 겪을 때 중요한 것은 ‘그 고난과 실패를 어떻게 대하는 가’ 입니다.
그때 단 지파는 어떻게 했습니까. 다른 땅을 찾아 다녔습니다. 실패한 그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에 고난과 실패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고난과 실패를 대하는 방식은 알 수 있습니다. 지난 5월 9일에 미국 리디머 교회를 설립했던 ‘팀 켈러’ 목사님이 췌장암으로 투병하다 별세하셨습니다. 목회자이자 신학자로 영향력을 미쳤던 목사님이, 갑작스럽게 췌장암 4기 진단을 받은 후 치료가 잘 되는 듯 했지만 72세의 많지 않은 나이에 별세하셨습니다. 훌륭한 신앙인이던 그를 하나님께서 왜 질병으로 고통을 받게 하시고 비교적 이른 나이에 데려가셨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고난을 대하는 그의 방법은 명확했습니다. 그는 투병을 통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기도는 더욱 간절했으며, 나를 지탱하는 것은 오직 말씀 뿐”이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이전 갑상선암으로도 투병을 했는데, 그때도 ‘투병기간을 통해 기도로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갈 수 있어 감사하다.. 과장되게 들릴지 모르지만 저와 아내는 암을 겪기 전의 기도생활과 영적인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누구도 고난과 실패가 삶에 없기를 바라지만, 고난과 실패는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기회인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 앞에 한 없이 납작 엎드려 하나님만을 바랄 수 있는 자리입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런데 단 자손은 다른 땅을 찾아 다녔습니다.
(2) 단 자손이 소라와 에스다올에서부터 그들의 가족 가운데 용맹스런 다섯 사람을 보내어 땅을 정탐하고 살피게 하며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가서 땅을 살펴보라 하매 그들이 에브라임 산지에 가서 미가의 집에 이르러 거기서 유숙하니라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단 자손에게 용맹스런 사람이 남아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실패하지 않기 위해 용맹한 다섯 사람을 보내 땅을 정탐하게 합니다. 합리적인 전략을 세운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믿음의 수준이 거기까지 임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문제는 거주할 땅을 찾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주신 땅을 정복할 믿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분배받은 땅을 정복하지 못한 것에 대한 문제의식 없이, 다른 해결 방법을 찾아 나섰습니다. 계속 전개되는 내용을 보면 점입가경입니다.
(3) 그들이 미가의 집에 있을 때에 그 레위 청년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리로 돌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누가 너를 이리로 인도하였으며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며 여기서 무엇을 얻었느냐 하니
단의 정탐꾼들이 미가의 집에서 레위 청년을 만났습니다. 정탐꾼들은 레위 청년에게 관심을 가집니다. 단 지파 정탐꾼들의 관심은 ‘어찌하여 레위인인 너가 여기에 있는냐?’가 아니라 ‘여기에서 무엇을 하며 대가로 무엇을 얼마나 얻느냐?’입니다. 지금 말로 하면 ‘어떤 일을 하며 연봉과 대우가 얼마냐 좋으냐?’고 묻는 것입니다. 요즘만 그런 것이 아니라 과거에도 ‘그 사람의 직업과 수입’은 사람들의 주 관심사인 것 같습니다. 심지어 레위인에게까지 그러했습니다.
그들의 의도는 뒤에 본문을 보면 더 분명해집니다. 19절에서 단 지파는 레위 사람에게 ‘네가 한 사람의 집의 제사장이 되는 것과 이스라엘의 한 지파 한 족속의 제사장이 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낫겠느냐 하는지라 그 제사장이 마음에 기뻐하여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우상을 받아 가지고 그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니라’
레위인이 정해진 성읍에 있지 않았다는 것은, 레위인에 대한 율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음을 가리킵니다. 레위인은 스스로 생계를 이어 가야 했고, 그래서 그들의 직무는 생계의 수단으로 변질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계속되는 이들의 대화를 보면, 이미 그것이 이스라엘 사회에 만연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미가가 이러이러하게 나를 대접하고 나를 고용하여 나를 자기의 제사장으로 삼았느니라 하니라
‘이러이러하게 나를 대접하고 나를 고용’해서 ‘자기의 제사장’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고용한다는 말은 ‘사카르’로 값을 지불하고 노동력을 산다는 의미입니다. 신약의 언어로 하면 이 레위인은 품꾼 내지는 삯꾼 입니다. 이는 제사장의 직무가 직업화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레위을 미가가 ‘자기의 제사장’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이는 신앙이 기복화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들의 내용은 세속화되고 기복화된 신앙인들의 전형적인 대화를 보여줍니다.
(5-6)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 보아서 우리가 가는 길이 형통할는지 우리에게 알게 하라 하니 그 제사장이 그들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너희가 가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 하니라
표면적으로는 신앙적인 대화이지만 상황적으로 보면 맥락이 없는 대화입니다. 단 사람들은 처음 우연히 만난 레위인에게 자신들의 형통에 대해 묻고, 레위인은 처음 보는 사람의 앞날에 대해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평안히 가라 너의 가는 길이 여호와 앞에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정복하지 못한 것에 대한 단 자손의 반성도 문제의식도 찾을 수 없습니다. 제사장인 레위인을 만나서 하나님께 묻는 말이 자신들의 앞날이 형통할 것인지 입니다. 레위인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좋은 말을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레위인도 그들이 왜 하나님께서 주신 땅이 아닌 다른 땅을 찾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듣기 좋은 말을 거리낌 없이 여호와의 이름을 빌어 해줍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레위인의 말처럼 실제로 단 자손은 순조롭게 땅을 찾아서 거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7-10) 이에 다섯 사람이 떠나 라이스에 이르러 거기 있는 백성을 본즉 염려 없이 거주하며 시돈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평온하며 안전하니 그 땅에는 부족한 것이 없으며 부를 누리며 시돈 사람들과 거리가 멀고 어떤 사람과도 상종하지 아니함이라 그들이 소라와 에스다올에 돌아가서 그들의 형제들에게 이르매 형제들이 그들에게 묻되 너희가 보기에 어떠하더냐 하니 이르되 일어나 그들을 치러 올라가자 우리가 그 땅을 본즉 매우 좋더라 너희는 가만히 있느냐 나아가서 그 땅 얻기를 게을리 하지 말라 너희가 가면 평화로운 백성을 만날 것이요 그 땅은 넓고 그 곳에는 세상에 있는 것이 하나도 부족함이 없느니라 하나님이 그 땅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하는지라 단 지파의 가족 중 육백 명이 무기를 지니고 소라와 에스다올에서 출발하여 올라가서 유다에 있는 기럇여아림에 진 치니 그러므로 그 곳 이름이 오늘까지 마하네 단이며 그 곳은 기럇여아림 뒤에 있더라
신앙생활에서 정말 위험한 것 중에 하나는, 하나님께 멀어져 있는데 형통하게 잘 풀리는 것입니다. 단 자손은 아무런 장애 없이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땅을 찾습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단 자손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그 땅을 너희 손에 넘겨주셨느니라”고 거리낌 없이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가장 두려운 심판은 징계와 고난이 아니라 내버려 두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단 자손이 형통한 것 같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내버려두심 이었습니다. 이때부터 단은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의 본거지가 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짓기 전까지 미가의 그 신상이 단에 있었고,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질 때도 단에 금송아지를 두고 섬기는 우상숭배의 본거지가 됩니다. 표면적으로는 형통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타락의 시발점이 됐습니다(삿18:31, 왕상12:28).
로마서 1장 28절에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디까지 내버려 두셨는지, 19장에는 상상도 하기 싫은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왕으로 삼지 않고 자기 소견대로 행하는 이스라엘의 일면을 보았습니다. 이런 모습은 반면교사이기는 하지만, 우리에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왕이 없던 이스라엘을 영원히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에 왕을 세워주셨고 그 왕들도 실패했지만, 그 왕들을 통해 진정한 왕의 필요성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직접 오셔서 왕이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우리를 대속하여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레위인과 단 자손을 봐도 알지만, 언제나 해결점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단 자손과 레위인 같은 모습이 없다고 장담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이킬 실 때 넙죽 엎드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 되심을 고백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왕이 없어 자기 소견대로 살며 멸망해 가던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그 피로 대속하여 우리의 왕이 되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혹은 세상에서 실패하거나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나의 왕이 되시기 원하신다는 부르심으로 듣고 주님으로 참된 소망을 얻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고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는 말씀의 또다른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나에게는 왕이 있는지 왕이 있다면 누가 왕인지 묵상해 봅시다.
2. 단 지파가 거주할 땅을 찾아 다닌 이유를 생각해보고, 나는 어려움과 고난을 겪을 때 어떻게 하는지 묵상해 봅시다.
3. 단 자손의 정탐꾼들은 미가의 집에 있던 레위 사람에게 무엇을 물었고 그는 어떻게 대답했는지 생각해보고, 우리는 그러한 모습이 없는지 묵상해 봅시다.
4. 단 자손은 원했던 대로 손쉽게 거주할 땅을 찾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평안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관점으로 평안을 구하는 부분은 없는지 묵상해 봅시다.
5. 하나님께서는 왕이 없던 이스라엘을 영원히 내버려 두시지 않으시고 직접 왕이 되셨는데, 어떤 방법으로 왕이 되셨는지 묵상해 봅시다.
(작성 : 조광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