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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수필세계 원문보기 글쓴이: 수필세계
좋은 수필의 조건
― 문장을 중심으로
장 세 진
1. 수필시대
우리는 그야말로 수필시대에 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IMF 때보다 더 심한 불황이라는 뉴스를 증명이라도 하듯 책의 판매율이 급격히 떨어져도 수필 전문지들은 끊임없이 발간되고 있다. 말할 나위 없이 거기서 ‘규칙적으로’ 수필가들이 ‘탄생’하고 있다. 신문사 신춘문예와 문학잡지를 통해 간간이 배출되는 시인·소설가에 비해 ‘수시로’ 수필가들이 양산되고 있는 것이다. 혹 모르겠다. 수필가 양산의 수필시대는 일제침략기, 그 발아에서부터 알게 모르게 받아 온 홀대를 만회하려는 몸부림인지도.
그러나 그때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수필은 문학의 의붓자식 취급을 당하고 있다. 물론 나만의 편견이 아니다. 일례로 유력 문학잡지들이 거의 수필을 싣지 않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꼭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는 건 아니지만, 일부 지방신문 외 중앙일간지 신춘문예에 수필 공모가 없는 것도 하나의 예가 될 터이다. 무엇보다도 소설가의 소설(집)처럼 수필가의 수필집이 서점 판매라는 공식 유통망을 통해 독자들에게 거의 어필하지 못하고 있는 현상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간혹 베스트셀러 어쩌구 하는 일이 있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수필가의 수필집이 아니다. 전문 직업인이거나 유명 종교인 등 수필지를 통해 수필가로 활동하는 이들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거리가 멀다. 그런데도 수필시대이니, 그 말이 아이러니컬할 뿐이다. 그러면 과연 왜 그럴까? 거기엔 많은 이유가 있을 테지만, 나는 ‘좋은 수필‘이 아닌 것을 1순위로 꼽고 싶다. 그러면 또 좋은 수필이란 무엇인가? 역시 많은 조건이 있겠지만, 나는 맨 먼저 문장을 떠올린다.
2. 문장이 먼저다
문장은 단어와 단어가 모인 것을 말한다. 우리가 일상 하는 말도 그렇지만, 문장이 모든 글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요소임은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러니까 문장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거기에 따라 글도 ‘개판’이 된다는 뜻이다. 수필의 경우 소설에 비해 말도 안 되는 문장을 훨씬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기존 수필가들의 글이거나 신인의 데뷔작이거나 거의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심각한 문제의 공통점이다. 치열한 문장 수련 없이 뭣에 쫓기듯 명함부터 내밀게 하는 수필지들의 등단 관행이 이미 한몫 했거나 지금도 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사실은 고등학교 작문 시간도 아니고 연륜의 깊이로 따져 두 번째 하라면 서운해 할 대부분 수필가들에게 새삼스럽게 문장론을 늘어놓는 것이 한심하고 짜증스럽긴 하다. 왜냐하면 이런 문장 이야기는 데뷔 전 충분한 습작을 통해 이미 끝났어야 할, 그야말로 기초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기초가 되어 있지 않은 ‘부실 수필‘의 주범은 말도 안 되는 문장인 셈이다. 그만큼 정확한 문장은 좋은 수필의 조건, 가장 우선적 조건이라 할 수 있다.
(1) 문장의 성분
문장의 구성 요소를 문장의 성분이라고 한다. 문장의 성분에는 주성분과 부속성분이 있다. 주성분은 필수적인 요소로 주어, 서술어, 목적어, 보어가 있다. 당연히 주성분이 빠지면 불완전한 문장이 된다. 이에 비해 부속성분은 필수적이지 않고, 문장의 내용을 꾸며 주는 역할을 한다. 부속성분에는 관형어와 부사어가 있다. 이 밖에 독립성분인 독립어가 있다. 독립어는 대개 느낌표 표시로 독립하는 경우가 많다. 예문을 통해 확인해 보자.
(가) 새가 운다. (주어)
(나) 나는 처녀이다. (서술어)
(다) 나는 처녀가 아니다. (보어)
(라) 아줌마가 잠을 잔다. (목적어)
(마) 파란 하늘에 비행기가 난다. (관형어)
(바) 그녀는 아주 예쁘다. (부사어)
(사) 아! 벌써 가을이다. (독립어)
덧붙일 것은 (가)의 경우 주격조사이다. 주격조사는 ‘는’, ‘은’, ‘이’, ‘가’, ‘께서’ 등 5개가 있다. 다른 조사와 마찬가지로 반드시 앞말에 붙여 써야 한다. (나)의 서술어는 서술격조사 ‘∼이다’를 수반한다. 바꿔 말하면 서술격조사 ‘∼이다’가 있으면 서술어라는 얘기다. 서술격조사는 ‘∼이다’ 하나뿐이다. (다)의 보어는 ‘아니다’와 ‘되다(또는 된다)’가 있다. (라)에선 목적어를 나타내 주는 목적격조사 ‘을’, ‘를’이 있음을 기억해두자. (마)의 관형어는 주로 형용사, (바)의 부사어는 부사로 이루어짐을 기억해 두면 좋다.
얼핏 ‘그까짓 것 뭐 어려울 게 있냐’라며 눈살을 찌푸릴 독자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특히 문장의 성분을 결정짓는 조사의 무분별한 사용은 치명적으로 말도 안 되는 문장을 낳는다. 또한 그것이 부실 수필의 주범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 점은 주어와 서술어가 하나씩만 있는 홑문장(단문)보다 겹문장(복문)에서 두드러진다. 그러니까 주어와 서술어가 2개 이상 사용되는, 비교적 긴 문장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아래 인용을 보자.
남편을 소신 있는 지도자로 내조를 잘하고 자식농사도 잘 지어 놓았다는 친구들도 있는가 하면, 남편의 학대로 인한 불행을 참고 견뎌낸 희생 어린 부덕을 쌓고 살아온 친구도 있다.
애써 출처를 생략한 이 문장은 어느 잡지의 데뷔작 중 일부이지만, 도대체 무얼 말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조사와 어미가 적재적소에 쓰이지 못해 문맥이 매끄럽지 않기 때문이다. 인쇄 과정상의 오류라고 믿고 싶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남편을 소신 있는 지도자로 내조를 잘하고”를 “남편을 소신 있는 지도자가 되도록 내조를 잘하고”로 고쳐야 맞다. 또 “남편의 학대로 인한 불행을 참고 견뎌낸 희생 어린 부덕을 쌓고”를 “남편의 학대로 인한 불행을 참고 견뎌냄으로써 희생 어린 부덕을 쌓고”로 해야 맞다.
하긴 그렇게 고쳐 표현해도 ‘을’, ‘를’, ‘도’ 따위의 조사와 ‘친구’ 같은 명사, 그리고 ‘있다’ 등 서술어의 중복 사용이 걸린다. 긴 문장이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도 모르게 쓰는 긴 문장에서 빠질 수 있는 함정이기 때문이다. 간결체든 만연체든 그 사용은 수필가의 자유지만, 긴 문장은 자칫 의미전달의 불명확함이라는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예문의 경우 두 개의 문장으로 나누는 것이 좋다. 우선 “자식농사도”의 ‘도’를 ‘까지’로 하고, ‘그런가 하면’이라는 이음말(접속사)이 필요하다. 별행을 잡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남편을 소신 있는 지도자가 되도록 내조를 잘하고 자식농사까지 잘 지어 놓았다는 친구들도 있다. 그런가 하면 남편의 학대로 인한 불행을 참고 견뎌냄으로써 희생 어린 부덕을 쌓고 살아온 친구도 있다.
(2) 문장 성분의 호응
말도 안 되는 문장의 주범 중 하나가 바로 호응이 안 되는 문장 성분이다. 호응은 글자 그대로 서로 응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문장 성분들이 서로 유기적 관계를 맺어 통일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야 문장의 의미 전달이 명확해진다. 가장 먼저 생각해 볼 것이 주어와 서술어의 호응관계이다. 주어는 문장 전체를 지탱하는 주체이고, 서술어는 그것의 동작이나 상태를 말해 주는 구실을 한다. 아래 예문을 보자.
(가) 확실한 것은 그들이 이제까지의 잘못을 반성하고 앞으로 진실한 국민으로 살아갈 것은 틀림없습니다.
(나) 바다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나의 머리를 씻고 옷자락을 씻으며 스며들어, 내 가슴의 구석구석을 정갈하게 씻어 내리고 싶었다.
(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인간이 문명의 이기를 사용할 때, 그것이 인간을 위하여 지혜 있게 사용되어야 한다.
먼저 (가)는 주어가 중복되어 서술어와의 호응이 매끄럽지 못하다. ‘확실한 것은’을 주어로 살리려면 “살아갈 것은 틀림없습니다”를 “살아갈 것이 틀림없다는 점입니다”로 고쳐야 한다. 그래도 ‘것’의 중복사용이 걸리는데, 그보다 간편한 방법이 있다. ‘확실한 것은’을 빼버리면 자연스러운 문장이 된다. (나)의 경우 ‘씻어 버리고 싶었다’와 호응하는 주어가 없어 어색하다. ‘내 가슴의’ 앞에 ‘나는’이라는 주어를 넣어 주면 그런대로 말이 된다.
더 확실하게 말이 되게 하려면 두 개의 문장으로 하는 것이 좋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나의 머리를 씻고 옷자락을 씻으며 스며들었다. 나는 내 가슴의 구석구석을 정갈하게 씻어 내리고 싶었다”가 그것이다. (다) 역시 주어와 서술어의 호응이 안 된 경우인데, 잘못된 주격조사의 사용도 눈여겨볼 만하다. 고쳐 보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인간이 문명의 이기를 사용할 때, 그것이 인간을 위하여 지혜 있게 사용되어야 한다는 점이다”가 될 것이다.
그 다음 생각해 볼 것이 수식어와 피수식어의 호응관계이다. 우리말의 문장 구조는 피수식어가 수식어 바로 앞에 오도록 되어 있다. 수식어는 관형어와 부사어로 나누어진다. 관형어는 체언(명사, 대명사, 수사), 부사어는 용언(동사, 형용사)을 수식한다. 이러한 수식관계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 의미전달이 불분명해진다. 특히 여러 개의 수식어가 있는 문장에서는 수식어와 피수식어의 관계가 잘 드러날 수 있도록 그 위치에 신경을 써야 한다. 수식어와 가장 가깝게 피수식어가 오는 게 좋다. 다음 예문을 보자.
(가) 나는 훔볼트의 언어는 유한한 수단을 무한하게 부려 쓰는 것이라는 언어관에 공감하게 되었다.
(나) 나는 꾸준히 젊은 사람 못지않은 봉사활동을 하였다.
(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선배의 스승
(가) (나)는 각각 체언·용언을 수식하는 경우이다. (다)는 무엇을 수식하는지 애매한 예이다. 먼저 (가)는 피수식어 ‘훔볼트의’가 수식어 ‘언어관’ 앞에 놓이면 된다. (나)는 ‘꾸준히’가 ‘하였다’를 수식하므로 그 앞에 오면 자연스러워진다. (다)의 경우 ‘존경하는’이 ‘선배’를 수식하는지 ‘스승’을 꾸미는지 애매하다. 이런 문장은 가급적 안 쓰는 것이 좋지만, 불가피할 경우 쉼표로 구분할 수 있다. ‘존경하는’ 뒤에 쉼표를 쓰는 것인데, 이 때는 ‘스승’을 수식하게 된다. 물론 쉼표가 없으면 ‘존경하는’은 ‘선배’를 수식하는 것이 된다.
거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이 불필요한 수식이다. 앞에서 잠깐 말한 것의 연장선일 수도 있겠는데, 단어·어구는 물론이고 심지어 조사까지도 중복사용하는 건 좋은 수필에 치명적이다. 수식어의 중복사용도 마찬가지다. 말할 나위 없이 단어나 어구 등이 수식어로 기능하고 있어서다. 비슷하거나 같은 뜻의 수식어를 겹쳐 사용함으로써 군말이 되게 하고, 결국 부실 수필의 한 빌미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다음 2개의 예문 및 수정을 통해 그 점을 확실히 해두자.
(가) 바른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회악을 뿌리뽑아 근절하여야 한다.
(나) 어제 국제영화제 상영관에 갔었다. 그 곳은 전혀 질서가 없는 무질서 속에 사람들이 이곳 저곳으로 우왕좌왕 옮겨 다니고 있었다.
(가)에서 ‘뿌리뽑아’와 ‘근절하여야’가 겹치고 있다. (나)에선 ‘전혀 질서가 없는’과 ‘무질서’, ‘이곳 저곳으로’와 ‘우왕좌왕’이 같은 뜻이다. 각각 둘 중 하나를 빼면 매끄러운 문장이 된다. “바른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회악을 뿌리뽑아야 한다”와 “그 곳은 전혀 질서가 없는 속에 사람들이 이곳 저곳으로 옮겨 다니고 있었다”가 그것이다. 또는 “바른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회악을 근절하여야 한다”와 “그 곳은 무질서 속에 사람들이 우왕좌왕 옮겨 다니고 있었다”로 해도 무방하다.
3. 급한 건 문장 수련
역시 글을 써 놓고도 씁쓸한 마음이 가시지 않는다. 아무리 원고청탁의 주제가 ‘새로 쓰는 수필론’이라 하더라도 앞에서 다룬 내용은 고등학교 작문시간용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소설가나 수필가 등 ‘글쟁이’가 되려는 의지나 포부가 거의 없는 고교생들에게 글쓰기의 여러 기초단계 중 하나인 앞에서와 같은 내용을 오랫동안 가르쳐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필전문지, 그러니까 전적으로 수필가들의 참여로 지면이 구성되는 잡지에 문장론을 새삼스럽게 늘어놓게 되어 씁쓸한 것이다.
아마도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그 씁쓸함이 수필문단의 부인하기 어려운 한 단면에서 온 것임을. 유감스럽게도 말도 안 되는 문장의 수필이 범람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수필문단이다. 그 뿌리깊은 부실 수필의 내력을 이 짧은 지면에서 어떻게 다 헤아릴까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하는 말이지만, 철저한 문장수련 없이 덜컥 데뷔부터 하는 ‘관행’이 그것이다.
누구나 좋은 수필을 쓰고자 열망한다. 또 노력한다. 그런 열망을 받쳐 주는 것이 바로 문장이다. 그런 노력의 증거가 되는 것 또한 문장이다. 정확한 문장의 사용 없는 글은 마치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그만큼 부실할 수밖에 없다. 결국 그것은 일제침략기 발아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필이 문학의 의붓자식 취급을 당하는 한 빌미가 되고 있다. 몹시 떫어하거나 부정하려 해도 내가 보는 한 그것은 이 수필시대의 자연스런 현상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이론처럼 문장으로서의 좋은 수필 쓰는 일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불세출의 천재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혹 모를까 대부분 글쟁이 지망생들은 피를 말리는 습작에 매달린다. 무릇 수필가들은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시인이나 소설가와 같이 치열한 문장 수련에 정진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그리고 과연 몇 편이나 습작을 한 후 수필가로 데뷔하는지도 차제에 새겨 볼 일이다. 급한 것은 데뷔가 아니라 철저하고 치열한 문장 수련이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문장은 글을 쓸수록 좋아지게 되어 있다. 물론 그냥 저절로는 아니다. 퇴고과정에서 필수적으로 문장의 호응관계만 따져 보아도 어느덧 말이 되는 문장을 느끼게 된다. 그러기 위해선 간결체의 홑문장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200자 원고지의 경우 3줄(행), 워드(12포인트)는 2줄이 벗어나지 않게 하려는 주의 내지 노력이 필요하다. 앞에서 미처 말하지 못했지만, 문장과 관련해 문단 나누기도 유념해야 한다. 어쨌든 형식은 내용과 함께 좋은 수필의 두 축이다. 말도 안 되는 문장으로는 아무리 그럴듯한 내용이라도 좋은 수필을 빚어낼 수 없다.
※일부 예문 인용은 작문(권영민, 지학사, 2000) 교과서를 참조했음.
수필세계 2004년 가을호 -제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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