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것은 언제나 좋다. 잠깐의 즐거움을 위해 새것을 찾는다. 최신형 핸드폰을 갖고 싶은 마음도 그렇다. 그러나 새것은 쓰다보면 헌것이 된다.
우리집 개가 새끼를 낳았다. 한달 된 새끼들은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엽다. 딱 3개월 지나면 성견이 된다. 징그럽다.
아장 아장 걷는 아이가 귀엽다. 그렇게 유아기를 보내고 아동기 ,청소년기, 청년기, 중년기, 노년기를 보낸다. 20살 전후로 성장이 멈추며 노화가 시작된다.
육체는 한계가 있다.
제한된 육체는 피곤함, 질병, 유혹, 욕심에 노출되어 있다. 몸이 피곤하면 만사가 귀찮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는 핑계가 일상이 된다.
이런 육체를 영지주의는 악하다 하였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이 인간의 몸이며, 예수님도 이런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다.
때문에 육신은 악하지 않다. 마음이 악할 뿐이다.
지인 선교사님의 딸이 혈액암으로 지난 토요일 주님 품으로 갔다. 참 가슴이 아팠다. 선교사님은 하늘 나라에서 만날 딸을 생각하니 위로가 되신다 하였다.
더 이상 아픔도 없고 질병도 없는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
인생살이 힘들면 천국을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의 육체의 장막이 무너지면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을 것이라 하였다. 무너진 장막은 우리의 몸이다. 죽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하늘의 장막은 무엇일까? 천국일 수 있다 하지만 본문의 의미상 그것은 '부활채'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몸을 의미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몸은 우리와 똑같은 몸이셨지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신령한 몸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면 우리의 육체도 그리스도와 같은 부활의 몸으로 변화된다는 것이다.
만약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실때 부활채로 오셨다면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을 것이며, 십자가의 고통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육체로 오셔서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고통과 아픔을 당하셨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이 육체를 입고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제한 된 육체의 삶 동안 그리스도를 닮으라는 것이다.
깨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육체에 보배로운 그리스도를 담고 사니 그분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교인이 몇 천명이 모인들, 박사학위를 몇 개를 따든, 억마장자가 되든 이 모든 것들은 언젠가 사라지는 것이다. 오직 남는 것은 겉사람이 아닌, 속사람이다.
고 옥한흠 목사님은 몇 만명의 교인을 목회하셨지만 항상 주님 앞에 자신을 대면했다. 자신의 속사람이 어떤지 살펴보았다. 속사람을 귀중하게 여기지 않으면 겉사람에 관심이 많다. 없어질 것을 귀하게 여기지 말고 영원할 것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다시 주님께서 오실때 부끄럽지 않도록,
내 안에 계신 보배로운 예수님을 사랑하자!
(고린도후서 5장 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