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돈오돈수에 직입하기 / 김형효 교수
초탈적 이중부정 사유로 소유욕 버리고
여래심으로 세상과 공동존재 형성해야
“깨친 즉 그만이요, 더 이상 공덕을 베풀지 않나니, 모든 유위법과 같지 않도다.
주상(住相)이 있는 보시는 천복(天福)을 생하게 하지만,
그것은 하늘에 화살을 쏘는 것과 같도다.”
영가(永嘉)대사의 말을 음미해 보자.
영가대사는 돈오돈수(頓悟頓修)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선가적인 입장에서 깨친다는 것은 사고방식의 전환을 의미한다.
즉 소유론적 입장을 떠나 홀연히 존재론적 사고방식에로
일시에 회전하는 것이 곧 부처되는 길을 밟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가의 사유에 따르면, 불교는 어떤 정신적인 것(something spiritual)을
점진적으로 터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고방식(mentality)을 전적으로
소유의 의식에서부터 이중부정적인 초탈의 사고방식(非∼非∼=neither∼nor∼)과
동시에 이중 긍정적인 차원에서(亦∼亦∼=both∼and∼) 생각의 틀을
단박에 변혁시키는 것을 뜻한다.
이런 생각의 내용을 우리가 지난번의 글에서
원효대사의 생각을 빌려서 말한 바가 있었다.
돈오돈수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의식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것을 끊어 버려야 하겠다.
의식의 생각은 필연적으로 대상을 설정하고
그 대상을 궁리하려고 바라기 때문에 타동사적인 의식의 태도를 지니지 않을 수 없다.
의식이 대상을 생각할 때에는
필연적으로 의식이 그 대상을 소유하려는 입장을 견지하게 된다.
그런 입장의 선택이 바로 소유론적 태도와 같다.
소유론적 입장이라 하여서
곧 경제적이고 물질적인 획득의 의미로서만 좁혀 생각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모든 학문적 지적 탐구나 도덕적 당위의 태도를 강구하는 일도
다 어떤 소유의 입장을 전제해서 가능하다 하겠다.
세속의 모든 이해나 연구는 다 이 소유법을 전제로 한 것이고,
이것이 이른바 유위법의 세계다.
점진적인 도덕적 수행과 공부인 점오점수(漸悟漸修)도
이 소유법의 점차적인 획득을 전제로 해서 가능한 일이겠다.
돈오점수는 점오점수보다 소유법의 중력을 훨씬 벗어난 것이지만,
그러나 돈오돈수보다 아직 순수한 존재론의 상태에 이른 것은 아니다.
이것이 영가대사의 사상이고, 그것을 해설한 성철 큰스님의 견해다.
돈오돈수의 세계에 직입하기 위하여 우리는 다시 원효대사의 가르침에 의지하고자 한다.
거기에로 직입하기 위하여 먼저 이중부정인 초탈적 사유와
그 다음에 이중긍정인 존재론적 사유를 자연적으로 수행하는 이중적 방편을 거쳐야 한다.
초탈적 사유는 모든 의식의 소유법을 다 끊어버리는 길을 가르쳐 준다.
해탈은 곧 소유의 생각으로부터의 초탈을 의미한다.
개념적으로 대상을 잡으려 하는 모든 의식의 기도가 다 소유법의 영역이다.
해탈은 개념의 영역을 다 잊은 공의 세계에 노니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원효대사의 표현처럼 ‘비유비무’(非有非無)의 차원이다.
단적으로 해탈은 곧 소유로부터의 해탈이다.
그러나 그것은 존재로부터의 초탈은 아니다. 공이 즉 존재이다.
해탈은 자칫 염세주의나 부정관에 너무 젖어
세상을 여여히 긍정하는 실상의 의미를 망각하기 쉽다.
한국 불교가 때로는 너무 부정관에 젖어 염세주의와 고행주의에 사로잡혀
흐느적거리는 경우가 없는가를 성찰할 필요가 있다.
그런 경우에 불교의 대중화와 생활화를 불교에서 구하기 힘들 것이다.
불교는 결코 염세주의나 고행주의가 아니다.
초탈적 이중부정의 사유로 모든 소유의 탐욕을 버리고,
무심으로 세상을 여여하게 긍정하는 여래의 마음으로
세상의 모든 것들과 공동존재를 형성하는 존재론적 사유를 찬양해야 한다.
존재론적 사유는 모든 존재자들에게 힘을 주고 활력을 주는 예술적 사유와 같다.
돈오법은 무위법이지 유위법이 아니다.
2012. 05. 02
김형효 서강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