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유설교(83)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본문 : 눅 16:19-31
예수님은 앞서 제자들에게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들려주시면서.....
말세를 사는 지혜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비록 불의한 재물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미래를 대비하는 일에 사용해야 함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가르치십니다.
마치 불의한 청지기가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의 빚을
탕감해 줌으로써 자신의 미래를 지혜롭게
대비했던 것처럼,
그렇게 제자들도(우리들도) 자신의 마지막 날을
지혜롭게 대비하여 재물을 나누며
살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반응>.....
이 비유를 제자들에게 한 것이지만
공개적인 장소에서 가르치시다 보니.....
곁에서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던
바리새인들이 들었습니다.
그들의 반응은 이러하였습니다.
눅16:14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비웃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다른 이를 위하여
돈을 쓰는 것을 낭비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자신의 배를 불리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이 땅에서 호위호식하며 사는 것이
삶의 목표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 들으라고
비유 한 가지를 더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입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삶>......
‘한 부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면서 살았습니다.
19절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이 부자는 단순한 부자가 아니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자색 옷’은 아주 비싼 염료로서
물들인 옷감으로 만든 옷입니다.
고대에 왕족이나 귀족들,
부자들이나 입는 옷입니다.
고운 베옷은 당시 금값의
두 배였다고 합니다.
아주 값비싼 사치품 옷입니다.
(참고 - 행 16:14절에 나오는 ‘루디아’라는
여인이 두아디라 출신으로서
자색 옷을 파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면서 살았습니다.
‘호화롭다’는 말은 ‘빛이 나다’는 말입니다.
NIV에서는 “luxury”(사치스러운)로
번역했습니다.
아마도 온 몸을 명품으로 치장하고
자랑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그리고 친구들을 불러다가 잔치를 베풀고
서로 잔을 부딪치며 ‘
이대로!’를 외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집 대문에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거지 살고 있었습니다.
<본문 20-21절 읽어라>
20절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21절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나사로’는 부자의 집 대문 앞에 누워서
부자의 잔칫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고픔을 채우려고 하였습니다.
단지 배만 고픈 것이 아니라
“헌데를 앓았다”고 합니다.
‘헌데’는 종기나 고름이 나는
피부병입니다.
치료 받을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게다가 개들이 헌데를 핥았습니다.
이것은 나사로에게 고통을
더 주었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거지 나사로”는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같은 날 죽음 – 뒤바뀐 처지>.....
공교롭게도 이 둘은 같은 날 죽었습니다.
22절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아마도 이 부자의 장례식은 성대하게
치러졌을 것입니다.
장례식도 화려하게 치렀을 것입니다.
반면에 거지 나사로는
제대로 매장되지도 못하고..
동네 밖 어느 들판에 버려졌을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두 사람의 처지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으셨습니다.
- ‘나사로’는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22절) 들어갔습니다.
- 반면에 ‘부자’는 ‘음부’에
들어갔습니다.
23절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아브라함의 품’과 ‘음부’라는
다소 생소한 단어가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의 품’은 ‘낙원’을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막12:26, 행7:32)이시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약2:23)으로서
낙원에 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간접적으로나마 사후의
중간 상태에 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하는 부분입니다.
인간이 죽은 후 머무는 처소에 대하여
성경이 결정적인 확증을 해주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 여러 곳의 종합적
고찰을 통해(단7:10, 마25:41, 46, 롬14:10,
고전15:44, 히9:27) 대략 다음과 같이
추론하여 볼 수 있습니다.
즉 사후에 인간의 육체는 무덤에서 부패하나.......
영은 천국과 지옥의 중간상태인
낙원과 음부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영은 낙원에(오른편에 달린 강도에게
-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불신자들의 영혼은 음부에 가는데 ...
- 낙원은 이 세상에 비해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곳인 반면....
- 음부는 이 세상에 비해 고통스러운 곳입니다.
그러나 종국적으로 도래할 완전한 천국과
지옥에 비하면 그야말로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눅23:43, 고후 12:4, 계2:7, 6:9-11, 7:9,10, 20:13).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왜 부자는 음부에 떨어지고......,
거지는 ‘아브라함의 품’
곧 낙원으로 들어갔을까 ?
부자는 부자였기 때문에
음부에 간 것은 아닙니다.
부유하게 살았다는 것
그 자체가 죄악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아마 부자는 지옥에서 하나님께
이렇게 항변하였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저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보십시오. 적어도 저는 나사로를
우리 집에서 쫓아내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잘못 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를 죽이지도 않았고 도둑질하지도 않았고
간음하지도 않았습니다.
도대체 왜 내가 여기에 있어야 합니까?”
이런 전도지가 있습니다.
앞면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지옥을 가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 뒷면에는 또한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 아무 것도 없다 …” 지옥을 가기 위해서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는 겁니다.
단지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가르쳐주는 진리입니다.
이 부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죄........
아니 자신의 배를 채우는 일에만
골똘한 죄로 음부에 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지 ‘나사로’는
왜 낙원에 들어갔을까 ? .......
가난하고 어렵게 산 사람들은
모두 낙원(천국)에 들어갑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그 이유를 명확하게 찾아볼 수는 없습니다.
한 가지 실마리가 있다면 바로 ......
거지의 이름입니다.
특이하게도 비유에서 부자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거지의 이름은 ‘나사로’라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누구의 이름이 더 유명했겠습니까?
당연히 이 세상에서 살 때는 분명 부자의 이름이
유명했을 것입니다.
누가 거지의 이름에 관심이나 가졌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에는 부자의 이름은 없고,
거지 나사로의 이름만 소개됩니다.
‘나사로’는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다’라는
뜻입니다.
그가 얼마나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며 살았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의 이름으로 미루어
매우 신앙적인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한 방울의 물을 요청하는 부자>.....
부자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보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았습니다.
(실제 낙원과 음부는 서로 마주볼 수
없는 곳이겠지요.
교훈을 위한 비유이니 가능한 이야기)
부자는 나사로를 알아보았습니다.
자기의 대문에서 자신이 먹다 남은
음식으로 연명하던 나사로임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간청하였습니다.
24절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부자의 요청을
냉정하게 거절합니다.
<본문 25-26절 읽어라>
25절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26절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거절의 이유는.....
음부와 아브라함의 품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서
아무도 건널 수가 없기’(26절) 때문입니다.
이 모습은 성경 다른 곳에서 묘사되고 있는
천국과 지옥의 극명한 대조와 똑같습니다.
천국은 위로의 장소입니다.
거기는 눈물도, 사망도, 애통하는 것도,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도
다시는 없는 곳입니다(계21:4).
그러나 지옥의 특징은
‘불꽃’과 ‘어둠’과 ‘괴로움’
그리고 ‘절망’입니다.
아무리 뜨거운 곳에서 괴롭게 지낸다고 하더라도
얼마 후에 빠져나올 수 있다면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습니다.
한 번 들어가면 그뿐입니다.
지옥에서 천국으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다섯 형제를 걱정하는 부자>...
한 방울의 물조차 얻지 못한 이 부자는 .....
고통 가운데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자신의 남은 다섯 형제를 기억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다시 간청하였습니다.
<본문 27-28절 읽어라>
27절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절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성도님들 !
이 부자의 안타까운 마음이 느껴지십니까? ....
자신이 고통을 당해 보니
자기 형제들이라도 여기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직접 세상에 나갈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압니다.
자신에게는 어떤 기회도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렇다면 나사로를 대신 보내서라도
이 이야기를 전해달라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전도를 해보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 부모님이 예수 믿지 않다가 돌아가셨는데,
의리가 있지 어떻게 나 혼자 예수 믿고
천국갈 수 있겠습니까?”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
그러나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말입니다.
만일 성도님들의 부모님이 예수 믿지 않고
돌아가셨다고 합시다.
그리고 만일 그 분들이 성도님들에게
오실 수 있다면 뭐라고 그러실까 ?......
“너희들은 여기 오면 안 돼.
제발 살아있을 때 예수 잘 믿고
천국 가야해!”그러지 않으시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음부에 떨어진
부자의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아브라함은 거절합니다.
29절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여기에서 ‘모세와 선지자’는 ...
하나님 말씀...,
구약 성경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부자와 가족들에게도
모세와 선지자의 가르침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천국과 지옥에 대한
이야기가 있으니까.
그걸 듣고 믿으면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부자는 다시 간절히 부탁합니다.
30절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죽었다가 부활한....
그런 기적을 보여주는 사람이 가서
설득하지 않으면.....
절대로 그들이 회개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부자는 “표적과 기사 중심”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사로가 죽었는데 살아서 다시 간다면....,
이 표적을 보고 자신의 형제들이
믿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이
예수님께 끊임없이 요청했던 것이....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이었습니다.
그러면 주님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이 부족했습니까?
아닙니다.
주님께서 행하신 표적은
충분한 계시가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을 보면 .....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나사로와 동명이인(同名異人)인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빠 나사로를
부활시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부활한 나사로를 보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지요.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믿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하는 일이
더욱 진행이 되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요 11장 53절).
그렇습니다. 부활한 사람을 본다고
회개하고 믿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
아브라함의 입을 통해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31절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
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사랑하는 성도님들 !
이 말씀은 우리의 신앙이
철저히 기적이 아닌 말씀에 근거해 있어야 함을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예수님만으로 충분합니다.
<맺는 말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는....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을
책망하기 위하여 주신 비유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그들의 탐욕과 위선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저와 성도님들에게
큰 도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누리는 부와 명성과
지위는 이 세상으로 끝납니다.
호화롭게 즐기며 사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그것을 잘 활용하여 영원을 준비하십시오.
말세를 준비하며 살아가십시오.
그것이 믿음의 지혜입니다.
저와 우리 금산교회 온 성도님들은 !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이든(재물, 시간, 은사 등등) .....
나의 탐욕을 채우고
타락하고 즐기는데 사용하지 말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웃을 사랑하기 위하여 사용하셔서 .....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날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듣고......
천국에서 다시 만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