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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시[華城市]의 역사와 자연환경, 관광문화
경기도 서남단 해안가에 위치한 시.
개관
동쪽은 용인시, 서쪽은 황해, 남쪽은 평택시·오산시, 북쪽은 바다를 거쳐 안산시·시흥시·군포시·수원시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6°31′∼127°09′, 북위 37°00′∼37°17′에 위치하며, 면적 689.7㎢, 인구 88만 1154명(2021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은 4개 읍, 10개 면, 10개 행정동(16개 법정동), 525개 행정리(177개 법정리)로 되어 있다. 시청은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남양리에 있다.
자연환경
광주산맥의 끝이 북부로 뻗어 지나고 있어 동쪽과 북쪽에는 200∼400m의 산지가 솟아 있고 남부와 서부는 낮은 구릉이 넓게 펼쳐져 있다. 해안과 하천 주변에는 해안평야가 있고 해안가에는 간석지가 발달해 있다. 동쪽에는 칠보산(七寶山, 239m)·성화산(439m) 등이 수원시와 접해 있고, 서쪽에는 와룡산(臥龍山, 405m)·창명산(155m)이 해안가에 연해있으며 북쪽에는 해안산(126m)·수리산(475m), 중앙에는 비봉산(185m)·태행산(太行山, 235m)·태봉산(泰峰山, 236m)·성화산(139m) 등 100m 정도의 낮은 구릉이 곳곳에 솟아 있다. 시의 주천(主泉)인 발안천(發安川)이 아오천·두곡천에 합류되고, 이것이 서남진하여 남양호에 흘러들어 가면서 주변에 넓은 해안평야를 만들고 있다. 동쪽에는 진위천(振威川)이 정남향으로 흘러 아산호로 흘러들어 간다. 해안선은 비교적 복잡하고 해안에는 남양(楠楊)·조암(朝巖) 등의 반도와 남양·분향(汾鄕) 등의 만이 발달해 있으며 연해에는 제부도(濟扶島)를 비롯하여 여러 섬들이 있다. 조석간만의 차가 심하고 바다는 멀리까지 얕아 항구가 발달하지 못하고 있다. 송산·마도·우정·장안면에는 해안 간석지가 넓게 발달하고 있는데, 이들 간석지는 강우량이 적고 일사량이 많은 자연조건을 이용하여 염전으로 이용되고 있다. 연평균 기온은 10.9°C, 1월 평균기온 -5.1°C, 8월 평균기온 25.6°C이며, 한서(寒曙)의 차가 30°C를 넘는다. 첫 서리는 10월 하순에, 마지막 서리는 다음해 4월 초에 내린다.
역사
수원시 서둔동 여기산 일대와 팔탄면·양감면·동탄면·서신면·마도면 등지에서 돌칼·철촉·토기 등 신석기 시대부터 초기 철기시대에 해당하는 유물들이 다수 발굴됨으로써, 이미 신석기시대부터 시내 여러 곳에서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시내에는 현재까지도 26군데에 산신제의 유습이 남아 있는데, 이로 보아도 이 같은 사실이 입증된다.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원양국(爰襄國)과 상외국(桑外國)이 남양부(南陽府)와 쌍부현(현재의 남양반도와 우정읍·장안면 일대)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점유하고 있던 5세기 말엽부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까지는 고구려의 매홀(買忽)로 불리었으나 757년(경덕왕 16) 9주(州)를 두고 군·현으로 명칭을 고칠 때 수성군(水城郡)이라 하였다. 남양은 고구려의 당성군(唐城郡)에 해당하던 지역으로, 신라 경덕왕이 당은군(唐恩郡)이라 개칭했던 것을 흥덕왕 때 없애고 진(鎭)을 설치하였다.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공략하기 위하여 남정(南征)할 때 김칠(金七)·최승규(崔承珪) 등 200여인이 귀순하였다. 그 덕으로 934년(태조 17)에 수주(水州)로 승격되었으며, 995년(성종 14)에는 도단련사를 두었다가 1005년(목종 8)에 없앴다. 이때 고을의 명칭은 한남(漢南) 또는 수성(隋城)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1018년(현종 9)에 지수주사(知水州事)를 둠과 동시에 정송(貞松)·용성(龍城)·광덕(廣德)·쌍부 등의 현을 영속시켰다. 1271년(원종 12) 몽골병이 대부도에 침입하였을 때, 섬주민들이 몽골병을 죽이고 부사 안열(安悅)이 이를 평정시켰다고 하여 그 공으로 수원도호부로 승격되었다. 그 뒤 도읍이 겪은 여러 사건에 따라 승격 또는 강등되는 등 여러 명칭으로 불리었으나 비교적 오랫동안 수원이라는 이름은 바뀌지 않았다. 1362년(공민왕 11) 홍적(紅賊)이 침입하였을 때 고을사람들이 이들을 도와 적이 세력을 떨치게 했다는 이유로 부에서 군으로 다시 강등되었다가 뒤에 다시 부로 승격되었다.
남양은 고려 초기에 옛 명칭인 당은군이 되었다가 1018년(현종 9)에는 수주군에, 그 뒤에는 인주군에 속하게 되었다. 1172년(명종 2)에는 감무를 두었고 1290년(충렬왕 16)에는 원나라의 관리로 있던 홍다구(洪茶丘)의 내향(內鄕)이라 하여 지익주사(知益州事)로 승격되었다. 뒤에 강녕도호부(江寧都護府)가 되었으나 1310년(충선왕 2) 모든 목(牧)을 없앨 때 남양부로 강등되어 조선 초기까지 별다른 변동 없이 유지되었다.
1394년(태조 3)의 한양천도로 양광도에서 그 이듬해 경기도에 편입되었으며, 1413년(태종 13) 도호부가 되었고, 1456년(세조 2)에 판관을 두어 진으로 하면서 경사(京師) 수호를 하는 보(輔)의 한 곳이 되었다. 1526년(중종 21)에는 고을에서 부모를 죽인 사건이 발생하여 군으로 강등되면서 진을 혁파하였고, 그 뒤 인천에 속했다가 1535년 다시 복구되었다. 남양은 1413년(태종 13)에 다시 도호부가 되고 1644년(인조 22)에 현이 되었으나 1653년(효종 4)에 또 다시 도호부로 복구되었다. 1661년(현종 2)에 주인을 죽인 하인이 있어 다시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74년 도호부로 복구되었다. 1895년(고종 32)의 지방관제 개정으로 군이 되었으며, 다음해에 경기도관찰부의 소재지가 되었다가 1910년 경술국치 후 서울로 이전되었다. 『수원군읍지』에 따르면 1899년 당시의 호수는 1만 2579호, 인구는 4만 9708인이고, 40개 면에 449개 리가 있었다고 한다. 1931년에는 수원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남양은 1895년에 수원군과 함께 인천의 속군이 되었다가 다음해 경기의 4등군이 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영흥면·대부면이 부평군에 편입되고 나머지는 수원군에 병합됨으로써 남양군은 없어지게 되었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어느 곳보다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이 치열하였으며, 일본군에 의한 제암리교회 참변사건은 가장 처참했던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근대의 인물로는 제암리교회에서 순사한 안종후(安鍾厚) 등 23인, 그리고 독립운동가인 문상익(文相翊)·김교철(金敎喆)·홍원식(洪元植) 등이 있다. 또한 민족음악의 선구자인 홍난파(洪蘭坡)와 문학가 홍사용(洪思容)도 이곳 출신이다.
1949년 수원읍이 시로 승격됨에 따라 나머지 지역은 수원군에서 화성군으로 개칭되었다. 1960년 1월 1일 오산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63년 1월 1일에 일왕면이 시흥군과 수원시로 각각 분할 편입되고, 태장면의 3개 리와 안룡면의 5개 리가 수원시로 편입되는 한편, 태장면의 5개 리와 안룡면의 6개 리를 병합하여 태안면을 신설하였다.
1970년 6월 10일 수원시에 위치했던 군청사를 오산시의 신청사로 이전하였으며, 1983년 2월 15일 반월면의 2개 리가 시흥군 의왕면에, 비봉면 상기리가 봉담면에 편입되었다. 1985년 10월 1일 태안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7년 1월 1일에는 서신면 심곡리가 송산면에, 동탄면 금곡리가 오산읍에 편입되는 등 군내·외와의 많은 행정구역 조정이 있었다. 1989년 1월 1일 오산읍이 시로 승격, 분리되었다. 1994년 12월 26일태안읍 영통리 일원, 신리·망포리 일부, 반월면 당수리·입북리가 수원시로 편입되고, 반월면의 건곤리·사사리·팔곡리가 안산시로, 둔대리·속달리·도마교리·대야미리가 군포시로 각각 분할 편입되었으며, 1995년 4월 20일에는 태안읍 신리·망포리가 수원시로 편입되었고 1998년 4월 1일에는 봉담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2001년 3월 21일에는 화성군이 시로 승격되었으며, 남양면이 시에 속하게 되면서 면이 폐지되었다. 2003년 6월에 우정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2006년 1월 1일 태안읍이 4개의 행정동으로 분리되고 태안읍은 없어졌다. 2007년 1월 29일 향남면이 향남읍으로 승격되다.
유물·유적
팔탄면 율암리, 양감면 용소리, 동탄면 중리, 서신면 홍법리, 마도면 해문리 등지에서 돌칼·철촉·토기 등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산성으로는 서신면 광평리의 남양장성, 상안리의 당성(사적, 1971년 지정)을 비롯하여, 안녕동의 수원 고읍성(경기도기념물, 1986년 지정), 우정읍의 화산 토성지, 향남읍의 요리성지, 봉담읍의 수기리 토성지와 덕리의 서봉산봉수, 마도면 백곡리의 토성이 있으며, 봉수로는 송산면 독지리의 해운산 봉수, 서신면 상안리의 염불산 봉수, 우정읍 화산리의 흥천산 봉수 등이 있었다. 유교문화재로는 남양읍에 남양향교, 서신면 상안리에 안곡서원(安谷書院), 송시열(宋時烈)을 모셨던 매곡 서원지(梅谷書院址), 팔탄면 창곡리의 금산사(金山祠) 등이 있다.
또 고가옥으로는 서신면 궁평리의 화성 정시용 고택(국가민속문화재, 1984년 지정)·화성 정수영 고택(국가민속문화재, 1984년 지정), 송림동의 정원채 고가(경기도 민속문화재, 1985년 지정), 정남면 문학리의 홍승인 고가(경기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 등이 있으며, 노인들의 휴식처인 남양읍의 남양기로소도 있다.
이밖에 안녕동의 융릉·건릉(사적, 1970년 지정), 향남읍의 제암리 삼일운동 순국유적(사적, 1982년 지정), 남양읍의 윤계선생 순절비(경기도유형문화재, 1979년 지정)·화성 남양리 신빈김씨(愼嬪金氏)묘역(경기도기념물, 1994년 지정)이 있고, 비봉면 남전리의 남이 장군묘(경기도기념물, 1973년 지정), 봉담읍 왕림리의 서거정선생 묘지석(경기도유형문화재, 1989년 지정), 기안동의 백천장선생묘(경기도 기념물, 1985년 지정), 안녕리의 만년제(경기도기념물, 1996년 지정), 동탄면 영천리의 남계 박세채 영정(경기도유형문화재, 1996년 지정) 등이 있다. 무형문화재로는 향남읍 구문천리에 부의주(경기도무형문화재, 1987년 지정)가 있으며, 양감면의 정문리 느티나무, 남양면의 남양리 홰나무 등 많은 고목들이 있다. 송상동의 용주사 화양나무는 1979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2년 수형 훼손과 노회로 인하여 지정 해제되었다.
교육·문화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으로는 1397년(태조 6)에 남양읍에 창건된 남양향교가 있다. 1667년(현종 8)에는 남양현감이 서신면 상안리에 안곡서원을 세웠으나 고종 때 철폐되었다가 1976년에 건물이 복원되었다. 이밖에 매송면 천천리에 송시열을 모셨던 매곡서원과 팔탄면 창곡리에 1871년 건립된 금산사가 있어 이 지역 교육을 담당하였다.
신교육기관으로는 1899년 남양공립소학교가 개교된 뒤 1913년 오산공립보통학교(지금의 성호초등학교), 1920년 송산공립보통학교(지금의 송산초등학교), 1921년 태장공립보통학교(지금의 태장초등학교)와 팔탄공립보통학교(지금의 팔탄초등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뒤 1개면 1개교의 교육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중등교육기관으로 8·15광복 후인 1948년에야 오산중학교가 설립되었고, 이어 송산중학교·화성여자중학교가 각각 설립되었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76개교, 중학교 34개교, 고등학교 21개교, 특수학교 2개교와 수원과학대학교, 장안대학교, 수원가톨릭대학교, 수원대학교, 협성대학교가 있다. 1964년에 개원한 화성문화원은 각종 문화·예술행사를 주관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는 매홀문화제의 개최 등 향토문화의 계승·발전에 공헌하고 있다.
민속
이 고장의 대표적 민속놀이는 배연신굿이다. 이 굿은 황해도 해안지방이나 도서지방에서 배의 무사고와 풍어를 빌기 위하여 행하던 대동굿인데, 이 고장 역시 바다에 나가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아 매년 봄 출어기가 되면 배를 소유하고 있는 집이 주축이 되어 이 굿을 성대히 거행한다. 이 굿은 신청올림·당산맞이·부정풀이·초부정과 초잠홍·영정물림·소당제석·먼산장군거리·대감놀이굿·그물올림(영산할아범과 할멈굿)·쑹기주는굿·다리발용신굿·강변놀이굿 등 12거리 굿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굿을 하는 배에 임경업 장군기·산신님기·서낭당님기를 앞세우고 30∼40명의 인원으로 편성되어 놀이를 펼치게 된다. 처음 출어를 할 때나 만선이 되어 귀항할 때에도 남녀노소가 모여서 한데 어울려 놀이를 한다. 이밖에도 두레놀이 및 연날리기·널뛰기·윷놀이 등의 세시(歲時) 놀이가 전한다.
동제로는 유래가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정남면 발산리의 발이산〔鉢山〕 산신제가 유명하다. 이 산신제는 매년 음력 10월 1일 자정에 발이산 중턱에 있는 소나무숲으로 둘러진 당집에서 거행된다. 제물로는 소 한마리를 통째로 바치고 조라술을 올리는데 제물의 진설과 제의절차가 엄격하다. 제관은 상제관·축관·집행관 등 모두 5명을 제사날 7일 전에 선출하며 이들은 그때까지 목욕재계하고 근신하여야 한다. 이 산신제는 음식을 차려 먹거나 농악을 울리는 일이 없이 엄숙한 분위기 속에 진행되며, 제가 행하여지는 동안에는 누구를 막론하고 동네의 출입을 금지하는 등 부정한 일이 없도록 특별히 규제한다. 이밖에도 정남면에 9군데, 팔탄면에 1군데, 양감면에 6군데, 동탄면에 7군데, 서신면에 1군데, 우정읍에 1군데, 송산면에 1군데, 향남읍 1군데 등에서 산신제·당제·정제가 거행되는데 제의 방법은 발이산 산신제와 대동소이하다.
설화·민요
이 고장에는 「봉림산 봉혈(鳳穴)전설」·「북양리 충절비 전설」·「나주정씨 효자비 전설」 등 지명과 충효에 얽힌 설화가 다수 전한다. 시의 북양동에 있는 봉림산에는 봉혈이라는 굴이 있는데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태종이 이곳을 지나다가 이 굴에 살고 있는 봉황을 보기 위하여 솔잎을 따다 불을 지르고 연기를 굴 속으로 피워 넣었다. 그러자 연기가 가득한 굴 속에서 무엇인가가 튀어나왔는데, 그 때 굴 안을 쳐다보던 청태종의 왼쪽 눈을 치고 사라졌다. 그래서 청태종은 결국 봉황은 보지 못하고 한쪽 눈만 멀게 되었다는 것이다. 같은 마을에 있는 충절비에는 흥선대원군과 한 노인에 얽힌 유래담이 전해온다. 구한말 흥선대원군이 청나라 군사에 의하여 중국으로 압송당할 때 송산면 마산포로 향하고 있었는데 도중에 의관을 정제한 어떤 노인이 대원군 일행의 앞을 가로 막으며 “만백성을 두고 홀로 떠나시면 이 나라는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하면서 통곡하였다. 대원군도 같이 눈물을 흘리며 훗날을 기약하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환국한 흥선대원군이 그 노인을 찾았으나, 그때 노인은 이미 죽었으므로 대원군은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충절비를 세우게 되었다.
신남동의 나주정씨 효자비에 100여년 전 이 마을에 살았던 효자의 이야기가 전하여 온다. 그는 어머니가 몸져눕게 되자 수십리의 산길을 걸어다니며 읍내에 있는 의원에게서 약을 지어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그의 효성에 감동한 호랑이가 나타나 그를 업고 읍내까지 데려다주곤 했다고 한다. 이밖에도 지네들이 독을 품어 왜구들을 물리쳤다는 「지네산전설」, 마고할미가 육지에서 돌을 날라 쌓았다는 「형도(衡島) 탑전설」, 중을 한 사람 잡아넣고서야 어려운 공사를 완성할 수 있었다는, 송산면 용포리의 「용수동(龍水洞) 제방전설」, 시주승을 학대하다가 벌을 받아 못이 되었다는 정남면 귀래리의 「방아못전설」 등이 전한다. 이 고장에 구비전승되는 민요는 노동요·의식요·여요·신앙성요 등 많은데 노동요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그 중에도 모심기소리와 논매기소리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이 고장의 향토색을 잘 나타내는 노래로는 논매기소리인 「얼카덩어리」·「면생이」·「몬돌이」·「선소리」 등과 신앙성요인 「목살경」·「고사반」, 여요인 「자장가」등을 들 수 있다. 그 중에도 대표적인 것은 「면생이」이로, 4, 5명이 한 조가 되어 교대하면서 부르는데, 이 노래는 가락이 아주 길고 높게 뻗으며 가사는 없고 후렴구 일변도의 보기 드문 특수한 형식으로 그 가락이 매우 구성지다. 그 일부를 소개하면 “응∼아∼/ 오우∼우/ 에에∼/ 오오∼/ 아∼아∼에∼/ 에에∼에∼(선창//응아∼아(교대 후창)/ 우∼/ 에에∼에 우∼우/ 오오∼/ 아∼아∼에∼/ 에에∼에∼”다.
이밖에 「선소리」와 「몬들이」도 이와 비슷하나 가사가 가끔 끼어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얼카덩어리」를 일부 소개하면 “얼카덩어리/ 얼카덩어리(후렴)/ 우여차데기/(후렴 생략)/ 저건너 갈미봉에/ 비가 가무랗게/ 몰려온다/ 우장을/ 허리에 둘러/ 김―매러/ 갈 것인가/ 가는구나/ 가는구나/ 떨쳐버리고/ 내가 간다.”이다.
「얼카덩어리」의 후렴은 김매는 시늉을 나타낸 그 가락이, 선창자가 가사를 부르면 다른 사람들이 사이사이 이것을 제창하면서 논을 맨다. 가락은 단조롭고 느리나 일의 속도에 따라 조정된다. 가사의 내용은 젊어서 실컷 놀자는 것과 임을 그리워하는 연정을 읊은 내용이 많고 일부 인생을 자연의 순리에 비유한 표현이 뛰어나다. 그 다음 「자장가」의 일부를 소개하면 “일가간에 화목동이/ 부모에는 효자동이/ 나라에는 충신동이/ 우리애기 잘도잔다/ 하늘나라 신선동이/ 잘도 자는구나.”이다. 4음, 2음보가 정연한 음영민요로 고요하게 잠자며 꿈꾸는 어린이의 청순한 모습을 그림 그리듯이 잘 표현한, 낭만성이 뛰어난 노래이다. 그리고 「범벅타령」도 월별로 떡타령을 하다가 끝에 가서 “섣달에는 흰떡범벅/ 이도령 잡수실 맵쌀범벅/ 김도령 잡수실 찹쌀범벅.”과 같이 끝나는, 해학성의 뛰어난 노래이다. 또한, 신앙성요인 「목살경」은 악귀를 겁주어 쫓는 내용의 경으로, 무격신앙의 일단을 잘 표현한 걸작이고, 「고사반」은 일종의 염불소리로 가내의 평안과 부귀공명을 기원하는 내용을 잘 표현한 뛰어난 작품이다.
산업·교통
전토지의 38.1%가 임야이고 37.0%가 경지로 도내에서 경지율이 가장 높은 지역이다. 저수지로는 발안저수지·지천저수지·대성저수지·보통저수지 등이 농업 관개용수로 이용되고 있다. 비교적 넓은 경지가 있고 수리시설도 잘 발달되어 있는데 경지 중 논 1만 6782㏊, 밭 8,662㏊이며, 주요 농작물은 쌀 이외에 밭작물로 고추·배추·무·파·마늘·당근·참외·수박·상추·토마토·시금치, 과실류로 복숭아·배·포도·사과, 특용작물로 참깨·땅콩·들깨 등이 생산되며, 축산업은 젖소·한우·돼지·닭 등이 많이 사육되고 있다. 그리고 해안 지역에서는 천일제염업도 활발하다. 최근까지 우리나라 소금 생산의 3분의1 이상을 담당하고 있었으나 노동력 부족, 해수의 오염 등으로 생산량이 계속 줄고 있다. 수산물로는 굴·바지락·새우·조기 등이 잡히며, 우읍도 등에서는 굴과 가무라기의 양식도 활발하다. 임산물로는 밤·도토리·대추·은행, 그리고 표고버섯이 생산되고 있다.
농업인구는 전체 인구의 11%이고 제조업 인구는 전체 인구의 27.7%이다. 주요 광산물은 규석·고령토 등이 생산되고 있다. 대도시와 인접해 있고 고속도로변에 인접에 있어 최근 공업화가 빨리 진행되고 있는데 주요 제조업은 조립 금속업, 전기, 전자공업, 화학 공업, 비금속 공업, 섬유공업, 식료품 공업이 발달되고 있다. 상업시설로 정기 시장, 상설시장, 연쇄점이 있는데, 정기시장은 남양읍의 남양장이 1·6일, 향남읍의 발안장이 5·10일, 우정읍의 조암장이 4·9일, 송산면의 사강장이 2·7일에 열린다. 발안장은 우시장으로 남양장은 바지락·꽃게·굴 등 해산물 시장으로 알려져 있으나 소득의 증가, 교통기관의 발달 등으로 점차 쇠퇴하고 있다. 도로는 경부고속도로가 동쪽의 동탄면을 남북으로 지나고 서해안고속도로가 서쪽에서 남북으로 지나고 있다. 국도 1호선이 고속도로와 나란히 북상하고 있다. 국도 39호선이 서해안고속도로와 나란히 남북으로 지나고 국도 43호선이 향남읍에서 33호선과 분기하여 동북진하고 국도 42호선이 반월면을 동서진하여 국도 43호선과 수원시에서 합류한다. 철도는 경부선이 국도 1호선과 나란히 남북으로 지나고 협궤철도인 수인선이 매송면을 동서로 지나고 있었으나 1994년 철거되었다. 2016년에는 수서와 평택을 잇는 수서평택고속선이 개통하여, 화성시를 지나고 있다.
관광
광주산맥의 말단부에 발달한 칠보산·서봉산·대봉산이 화성땅을 감싸면서 주변에 관광지를 발달시켜주고 있다. 특히, 수원·화성·안성과 연계된 관광유적지가 많다. 이 곳은 신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아온 흔적들이 발굴되면서 고유한 문화를 형성해온 유서 깊은 고장으로 알려졌다. 화성은 본래 수원이 포함된 고장이었는데, 이 고장의 중심지는 지금의 화성 화산릉 일대로 알려져 있다. 화성땅은 팔달산 아래에 있던 읍치(邑治: 수령이 파견되어 근무하는 곳)가 1949년 수원시로 승격되면서 서쪽의 외곽에서 수원을 감싸주고 있으므로 수원시와 공유하고 있는 독특한 문화유산으로서의 관광지를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화성시는 수원과 더불어 조선 후기 문화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1789년 정조가 양주 배봉산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성군 화산으로 이장하면서 수원성을 비롯한 성곽문화를 탄생시키고, 아버지의 넋을 위로하고자 원찰로 삼은 곳이 이곳 용주사이다. 또한 이곳에는 그 당시 김홍도가 부모은중경이란 목판 원화를 그려, 뒷날 문화유산을 창출해 낸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화성과 오산의 경계지역인 석대산에는 권율 장군의 대첩 일화가 간직되어 있는 독산성과 세마대가 있고, 서신면 상인리에는 독특한 복합산성인 당성이 있어 관광객이 자주 찾고 있다.
또한 안녕동에는 융건릉이 있고, 합장릉으로 알려진 융릉과 건릉이 있으며, 송산리에는 용주사가 있는데 범종과 부모 은혜에 대한 불교경전인 부모은중경판이 소장되어 있어 훌륭한 문화 관광지가 되고 있다. 이 경전에는 부모의 은혜를 10가지로 제시하고, 보은의 어려움을 8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보은의 방법으로는 남에게 베풀고 진리를 실현하는 것이 제일의 덕이요 바른길이 되지만 불효를 저지르면 틀림없이 지옥으로 간다는 경전의 내용을 목판에 새겨둔 것이다. 목판 부모은중경은 용주사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좋은 관광자원이 되고 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23-01-15 작성자 명사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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