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주제는 "세계를 전복하는 불온한 동력" 이었습니다.
세계를 전복하는 불온한 동력이 뭘까요? 수업 시간동안 다루었던 것은 어떤 경계를 뛰어넘는 사랑의 이야기들 이었습니다.
결국 첫번째 주제에서 다루었던 것은 세계를 전복하는 사랑의 역동적 힘과 그로 인해 바뀌는 사람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랑은 두 세계의 충돌이라고 교수님이 말씀 하셨던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부부싸움을 한 부부들을 말리는 단골 대사도 얼핏 떠오릅니다. "20몇년간 따로 살아왔는데 하루아침에 같이 사는게 어디 쉬운 일이야?" …….
서로 만나게 되는 두 사람은 필연적으로 다른 부분을 갖습니다. 때로는 아주 개인적으로, 누구는 찻잔마다 다른 차를 마시지만 누구는 차를 마구 섞어 마실 수도 있습니다. 또 아주 사회적으로, 한 사람은 부자고 다른 한 사람은 가난 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 한사람은 집이 부자라서 찻잔을 구별해서 사용하는 것일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랑하기 때문에 두사람은 차를 어떻게 마시든, 아니면 찻잔을 아예 엎어버리던 간에 서로 마주 걸으려고 할 것입니다.
교수님께서 처음 보여주신 헝겊을 쓰고 키스하는 연인들의 그림은 그런 경계를 다 무시해 버리고 서로를 받아들이려는 연인들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그들은 서로의 모습을 아예 볼 수가 없습니다. 그를 보는 것은 그라는 세계의 구성요소들을 함께 보는 것이고 그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의 배경까지 사랑하거나, 혹은 '극복'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사랑의 미학은 무섭도록 혁명적인 미학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나의 사랑, 나의 귀신>은 친구의 어머니를 사랑하는 사랑이지만, 아이가 넘어야 하는것은 그 벽 뿐이 아닙니다. 아이가 당골네와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아이는 달동네를 밀어버리려고 다가오는 불도저를 극복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사랑의 힘은 세계를 지배하는 질서마저도 '전복' 하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페도라처럼 가족제도와 가부장제마저도 전복 하려하고, 사랑 앞에선 자본주의적 교환법칙도 의미가 없어집니다. 사랑 앞에서 그 질서를 유지 하는 억압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두번째, 그리고 세번째 주제에서는 레즈비언과 게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었습니다. 사실, 저는 이런 동성애를 다룬 소설들을 무척 좋아합니다. 어떤 '철벽같은 장애물이 있는 사랑' 에 대한 판타지가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작품들에 묻어나는 절절함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걸 뛰어넘던지, 아니면 거기에 철저히 무너져 버리던지.
그런데 수업을 들으면서 어떻게 보면 저야말로 레즈비언/게이 판타지를 적극적으로 소비하는 사람으로서 실제의 그들을 더 힘들게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그 모든 세상의 잣대를 능가하는 사랑' 으로서 게이들을 그리는 모든 소설의 공통적인 죄일지도 모릅니다. 교수님께서는 특히 레즈비언이 그런 식으로 -아주 순결한, 타락한 이성애의 대체물 처럼-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고 하셨는데, 'Antique'등 절세 미남 게이가 유행하는 것을 보면 요즘은 남성(잘생긴 남성으로 한정)간의 사랑역시 그런 필터를 씌워 보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결국 '어떤 지극히 순수한 사랑' 에 대한 우리의 환상이 평범한 사랑을 하고 있는 그들을 제물 삼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브로크백 마운틴이라는 에덴동산과 같은 순수한 공간과, 그런 유토피아적인 사랑과 삶을 원하는 우리가 짐과 에니스를 만든 것은 아닌가.
현실의 그들은 우리의 생각처럼 순수하지도 , 혹은 그 반대로 욕망적이지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네멋대로 해라는 상당한 매니아를 가진 드라마였고, 저도 매니아는 아니지만 이 드라마를 참 좋아했습니다. 빚진 데 없는 루저들의 쿨한 연애담이라는 그 말 대로, 이들은 '내가' '지금' '어떻게 느끼는가' 를 가장 큰 행동 기준으로 삼고 행동합니다. 졸부의 딸과 소매치기. 구식 설정이지만, 그것이 그들에게는 사실 별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그들은 딱히 세상을 '전복' 하려 들 지는 않지만, 자신의 마음에 따라서, '하고 싶어서' 라는 위대한 동기로 사랑합니다. 그들을 재단하는 세상에 별 관심도 두지 않고서. 이를 혁명을 꿈꾸지 않는 세대로 독해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폄하하기엔 그들은 그러한 세상에서 너무나 자유롭고 사랑에 너무나 충실합니다. 모두가 이들과 같아 진다면 세상의 재단 역시 사멸할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을 혁명시킨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교수님께서는 어떤 평론가의 평 - "브로크백마운틴은 사랑을 거부함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인생을 망치는지를 보여준다." - 을 들어 말씀하신 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사랑은 그만큼 치명적이고, 우리가 역동적으로 행동하게 만듭니다. 그런 사랑을 애써 돌리려고 한다면, 서서히 몸도 마음도 파국을 맞을지도 모릅니다. 수업을 들으면서 얼마나 치명적인 유혹으로 처음 제게 사랑이 다가왔었는지, 그 사랑을 위해서 내가 얼마나 많은 부분을 바꾸었는지가 기억났습니다. 조금 씁쓸하더군요. ^^; 현재는 물론, 미래까지도 사랑이 그 열쇠를 쥐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 때가 떠올랐습니다. 사랑이 끝난 지금에도 그가 방향을 바꿔놓은 부분들 중에 여전히 그대로의 방향성을 지닌 부분들이 남아 있습니다. 사랑은 모두 끝날 지언정, 모두에게 남아 있는 방향의 선회가 사랑의 혁명을 이루는 걸 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