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여, 비를 내리소서”
이학종 시인의 당진편지 27- 태풍과 수부띠 장로
중생의 고통을 덜어준 선지식들의 출현을 기다리며
한 이틀, 강력한 태풍 솔릭을 맞기 위해 부산한 시간을 보냈다. 이틀 내내 강력한 비바람을 동반하는 태풍의 접근 소식에 걱정과 반가움이 교차했다. 서리태 콩을 파종한 직후 한 차례 비가 내린 이후로는 4개월 동안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은 터라 비를 기다리는 마음도 간절했지만, 동시에 거센 바람에 가까스로 연명해온 작물들이 휩쓸리는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근심이 일어났다.
내리는 비를 최대한 활용하고, 피해는 최소화하는 것이 관건이다. 집 안팎의 배수로를 살피고, 비닐하우스 주위를 정리했다. 바람에 날릴 수 있는 것들은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 배추와 무를 심을 밭에는 닭똥으로 만든 퇴비와 함께 직접 만든 천연액비를 진한 농도로 흠뻑 살포했다. 곧 내릴 장대비와 섞여 농도가 희석될 것을 계산한 조처다.
하늘에서 내려오면서 공기 속에 있는 질소 등 각종 영양소를 함유한 천연비료인 ‘빗물’을 받아 보관하기 위해 새로 구입한 플라스틱 수조의 뚜껑을 열어놓고, 더 많은 빗물을 받기 위해 처마 밑에 크고 작은 고무 대야를 줄지어 늘어놓았다. 빗물이 이토록 귀하게 여겨진 적은 일찍이 없었다.
텔레비전을 통해 태풍 소식을 실시간으로 점검했다. 이동경로와 속도, 피해 사례 등을 꼼꼼히 살폈다. 제주 지역에 하루 1,000밀리미터가 넘는 폭우가 쏟아져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는 보도를 접할 땐 걱정이 컸지만, 땅이 갈라질 정도로 극심했던 가뭄을 해소할 수 있다는 기대도 놓을 수 없다. 대비를 잘해 피해를 최소화한다면 태풍은 오히려 이로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뭐니 뭐니 해도 태풍의 경로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당초 서산과 당진으로 태풍이 들어올 것이라는 뉴스를 접했을 땐 초비상이 걸렸지만, 태풍의 이동속도가 늦어지면서 상륙지점이 점점 남쪽으로 이동해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끝내는 전라북도 군산 일대로 상륙지점이 변경되었고 당진은 태풍의 간접 영향권으로 위치가 변했다.
태풍의 영향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날, 밤이 깊어질수록 빗줄기가 굵어졌다. 밤새 두어 차례 우비를 입고 나아가 대야에 고인 빗물을 수조로 옮겼다. 다행히 바람도 거칠지 않았다. 작물들이 휩쓸릴 염려가 사라지니, 빗물에 온몸이 젖어도 마음이 편했다.
가뭄 끝에 굵은 빗줄기가 후리고 간 콩밭에는 녀석들의 웃음소리가 흥겹다.
날이 밝자 방송에서는 태풍이 충청도를 거쳐 강원도 지방으로 이동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었다. 수조는 빗물로 가득 찼고, 밭에 심은 고추며, 들깨며, 서리태는 함박미소를 지으며 흥겹게 춤추고 있었다. 녀석들의 웃음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신바람 난 녀석들의 몸짓에 절로 어깨가 들썩였다. 작물들의 웃음소리를 듣고 춤사위를 보는 것은 농부만이 갖는 신통이다. 어디 작물들뿐이랴. 가뭄에 목말랐던 산천초목이 저마다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비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나라만의 일이 아니다. 부처님 당시 인도에서도 비에 대한 근심은 늘 있었다. 인도 사람들은 무섭게 비가 내리는 우기(雨期)에는 이동을 자제했다. 부처님 당시에도 우기에는 안거에 들었다. 그러나 안거에 들었다고 해서 걱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비를 피해 수행을 할 처소, 즉 초암을 잘 수리하는 것이 수행자들에게는 당면 과제였던 것이다. 빗물이 새지 않도록 지붕을 잘 살피고, 비바람이 들이치지 않도록 벽면을 손보는 것은 우기를 대비해 수행자들이 해야 할 과제였다.
우리나라 불자들에게는 수보리로 널리 알려진 수부띠 장로는 우기를 맞는 선지식을 마음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알려주는 게송을 남겼다.
초암은 지붕이 잘 이어졌고
바람이 들이치지 않으니, 쾌적하다.
하늘이여, 비를 내리려거든 내리소서.
마음은 잘 집중되어 해탈되었고,
용맹정진하니, 하늘이여 비를 내리소서.
<테라가타(장로게경)> 제1장 일련시집의 제1품에 처음으로 나오는 수부띠 장로의 이 게송은 우기를 잘 대비한 것을 빗대어 수행자의 정진에 대한 그의 생각을 잘 드러내고 있다. 수부띠 장로는 부처님 10대 제자 중의 한 분으로, 우리나라에서는 공을 제일 잘 이해한 이, 즉 해공제일(解空第一)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수부띠 장로는 그 이전에 부처님의 제자 수행승 가운데 ‘가장 평화롭게 사는 님 가운데 제일(無爭第一)’이자 ‘보시 받을 가치가 있는 님 가운데 제일(托鉢第一)’이었다. 수부띠 장로는 탁발할 때에 집집마다 그 곳에서 자비의 명상을 닦았다. 그래서 그에게 보시하는 것은 최상의 공덕을 낳았고[탁발제일], 법을 가르치는데도 차별이나 한계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평화롭게 사는 님 가운데 으뜸[무쟁제일]이 되었다.
이 게송은 빔비사라 왕이 수부띠 장로가 라자가하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예경하고, 지낼 곳을 마련해주고는 초암을 지어드릴 것을 약속한 데서 비롯됐다. 빔비사라 왕은 초암을 지어 공양하겠다는 장로와의 약속을 깜박 잊고 말았다. 수부띠 장로는 처소를 얻지 못해 부득이 야외에서 지냈는데, 성자가 야외에서 지내는 것을 안 하늘이 비를 내리지 않았다. 빔비사라 왕이 자신이 약속을 잊었음을 뒤늦게 알고 수부띠 장로에게 초암을 지어 공양했다. 수부띠 장로는 이 초암으로 들어가 풀로 엮은 방석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정진했는데, 하늘은 여전히 비를 조금씩밖에 내리지 않았다. 그러자 수부띠 장로가 가뭄의 고통이 늘어나고 있음을 알고, 세상의 가뭄에 대한 공포를 제거하기 위해 자신의 안팎에 위난이 없다는 것을 하늘에 알리면서 이 시를 지어 읊은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예로부터 가뭄이 들면, 이름난 절의 수행력 높은 고승들은 기꺼이 야외에 괘불을 펼치고 지성으로 기우제를 지내는 풍속이 있었다. 실제 기우제를 지내는 도중에, 또는 기우제를 마친 직후 장대비가 쏟아져 내렸다는 이야기가 다수 전해 내려오고 있다.
요즘도 이 땅에 사는 불자들은 청정수행의 위신력으로 중생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선지식의 출현을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다. 선지식들의 위신력은 청정이 바탕이 될 때 비로소 발휘된다. 가뭄을 속 시원하게 해갈시켜준 태풍을 보내며 수부띠 장로를 떠올린 까닭이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