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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국천하(列國天下)-통권 84화
현무(玄武)는 북쪽 방위에 있으면서 동방의 청룡(靑龍), 남방의 주작(朱雀), 서방의 백호(白虎)와 함께 사신수(四神獸)의 하나다. 현무는 거북과 용이 모인 것을 이른다 했고 북방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현(玄)이라 하고, 몸에 비늘과 두꺼운 껍질이 있으므로 무(武)라 했다. 현무는 사방신(四方神) 가운데 전투를 나타내는 무신(武神)으로 오행(五行) 중 물(水), 바로 수기(水氣)를 맡은 태음신(太陰神)이며 검은색(玄)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현무는 뇌전(雷電)을 부린다 했다. 칸 대륙의 굉(宏), 우(于), 앙(殃), 조(祚), 신(伸)의 다섯 신룡(神龍) 중 앙(殃)의 형상이 바로 그러했다. 앙(殃)은 칠흑 같은 검은 비늘이 뒤덮은 두꺼운 몸에 비해 다리가 짧아 거북이와 닮아 있으며 천지간에 가장 강한 기운인 뇌전을 부렸다. 그리고 그가 사는 곳은 북쪽 끝의 황량하고 얼어붙은 땅이었으니 현무는 그를 부르는 다른 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지금 긴 잠에서 깨어 수백 년을 사색과 명상으로 시간을 보내다 어느 날 문득 산책을 나와 낭녀(狼女)와 관계하여 스스로 자기 자신을 낳았다. 그것이 바로 웅랑교 소종사(小宗師) 낭호인(狼好仁)이다.
난공불락이라는 제평을 간단히 함락시킨 낭호인은 절세웅랑기(絶世熊狼旗)들에게 사흘간의 약탈을 허용했다. 약탈이 계속되던 사흘간 제평의 여자구실을 하는 거의 모든 여인들, 7세의 소녀부터 50세 귀부인까지 가리지 않고 겁간당했으며 대항의 기미를 보이는 사내들은 여지없이 목이 잘려나갔다. 그리고 제평을 굳건하게 지키던 성문이 깨진 그 순간, 제평을 보호하던 현무산을 곰과 늑대들이 넘어선 순간, 제평의 모든 것은 이미 웅랑교 소종사이며 절세웅랑기주(絶世熊狼旗主)인 낭호인의 것이 되었다.
“형님, 이래서는 안 됩니다. 제평은 흑막 제일의 성시(盛市)입니다. 이곳을 파괴하는 것은 전혀 현명하지 않습니다.”
“승자가 모든 것을 갖는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 제평은 우리 웅랑교에게 짐 이상의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너도 잘 알 것 아니냐?”
웅랑교 소종사 낭호인과 꼭 닮은 사내 낭호의는 낭호인과 한 어머니 배에 같이 머물던 쌍둥이 형제였고 낭기를 이끄는 낭기영주(狼旗領主)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제평을 파괴하는 것이 무슨 이득이 됩니까?”
“네 뜻은 알겠다만 이미 일은 벌어졌고, 지금 명을 거두면 웅랑교의 위엄만 손상될 뿐이다.”
“형님….”
“그만! 그 문제는 더 이상 꺼내지 마라. 그보다 곧 대종사께서 제평으로 와서 대승을 거두도록 도와준 푸른 이리와 검은 곰에게 감사드리는 제사를 지낼 것이다. 너는 제사에 쓰일 제물과 저기 후산 산봉에 제단을 마련해라! 이것은 명령이다.”
“….”
앙(殃)은 재앙(災殃), 죽은 이에게서 나오는 악기(惡氣)를 뜻했다. 그런 이름을 가진 앙(殃)이 칸의 다섯 신룡 사이에 맺은 마음에 들지 않는 약속 때문에 잠잠하게 지냈어야 했다. 그러나 이름을 걸고 맹세한 약속을 어기지 않는 선에서 벌어지는 살육의 흥분을 거부할 리 없다. 그러니 비록 한 배를 타고 나온 형제지만 고작 늑대 인간인 낭호의의 말은 어느 집 개가 짖는 소리일 뿐이었다.
웅랑교는 십이진가가 천하를 제패할 때 서로를 견제하느라 세상에 나서지 못했다. 그러다 천하를 열두 수인 가문이 나누어 가지고 중주의 풍요로움을 만끽할 때까지 척박한 흑막에서 쟁패를 계속했다. 그들의 쟁패는 서로간의 살육전으로 번졌고, 천하의 안위를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이미 천하의 주인 된 십이진가는 당시 호제를 주축으로 대군을 편성하여 흑막을 평정하기에 이른다. 그 일로 곰이든 늑대든 닥치는 대로 떼로 몰살되어 나갔고 곰과 늑대들은 살아남기 위해 하나의 세력으로 뭉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웅랑교의 전신인 흑청회(黑靑會)다. 곰과 늑대가 말 그대로 무차별적으로 사냥당하던 때 웅랑(熊狼)이란 이름을 함부로 걸 수 없어 상서로운 푸른 이리와 검은 곰을 상징하는 흑청(黑靑)이란 이름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 번의 거센 태풍 속에서 살아남은 웅랑들은 시간이 지나 원주 조정의 관심이 멀어지자 그제야 웅랑이란 이름을 건 단체인 웅랑교를 만들 수 있었다. 웅랑교는 각 무리별로 사사로운 싸움을 계속하는 늑대 부족과 곰 부족을 하나로 통합하여 수백 년 간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여 드넓은 흑막에 그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본시 곰과 이리로 기원이 다른 두 세력은 웅랑교 내부에서 끊임없는 권력의 암투를 계속하는데 낭호인을 낳은 낭녀 또한 그 암투에 희생될 뻔했었다.
흑청회라 불리기 시작했을 때부터 회주는 낭족(狼族)들이 차지했다. 흑청회 자체가 청랑 부족이 발의하여 주축이 되고 흑웅 부족이 그간의 대립과 은원을 잊고 거기에 가입함으로써 만들어졌다. 그러나 보니 낭족이 중심이 된 흑청회는 낭족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고, 웅랑교가 되었어도 낭족이 대종사가 되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웅족의 힘이 점점 커지면서 사문화되다시피 하던 웅족은 웅족의 대종사 계승권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이에 낭족은 대종사의 피는 웅랑교의 전신 흑청회를 만든 낭청수(狼靑首) 조사(祖師)에서부터 이어져왔다는 사실을 통해 그의 피가 끊이지 않는 한. 피로써 전통성을 갖는다는 논거를 펼쳤고, 곰과 이리를 불문하고 낭청수는 누구나 존경의 대상이기에 웅족은 낭족들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어디에나 급진적인 세력은 있게 마련이고 그 급진적인 세력이 웅족이 웅랑교 대종사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웅랑교 조사 낭청수의 핏줄을 끊으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낭호인과 낭호의의 모친이되는 낭녀를 노린 이유였다.
오랜만에 둥지를 벗어나 광활한 대지를 두 다리로 걷던 앙(殃)은 낭녀를 쫓는 회색 곰들을 발견했다. 둥지를 벗어나 수백 일을 걷고, 걷고 또 걸어 처음 마주치게 된 그들은 다짜고짜 앙(殃)을 공격했다. 진노한 앙(殃)은 벼락을 내쳐 그들을 단숨에 태워버렸다. 그러나 추격자 중 천하를 뒤흔들 만한 무공을 가진 존재가 있어 그의 목숨을 내놓는 동귀어진(同歸於盡) 수법에 상처를 입고 만다. 비록 인간으로 화(化)한 상태이긴 하지만 자신이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이 너무도 흥미로웠던 앙(殃)은 낭녀에게 웅랑교의 비밀스런 비사(秘事)를 알게 되고 유희를 시작하게 된다. 앙(殃)은 낭녀의 눈앞에서 본신으로 화하여 그녀가 낳을 아이는 웅랑교를 크게 성하게 할 것이라는 말을 하고 낭녀의 자궁 속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얼마 후 낭녀는 낭족에서 선발된 낭재천과 결혼하여 낭재천은 웅랑교 대종사가 되었다. 형식적으로 웅랑교 조사 낭청수의 유일하게 남아 있는 핏줄인 낭녀가 남편이기도 한 그에게 대종사 지위를 넘겨주고 자신은 피를 잇는다는 일에 전념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낭녀는 두 명의 쌍둥이 형제를 낳는데 그때 자신이 현무를 만난 사실을 남편인 낭재천에게 털어놓고 지금껏 비밀을 지켜오다 18년 전 강무세가의 제의를 받자 이것은 천명(天命)이라 생각하여 두 아들 중 제왕지도(帝王之道)가 엿보이는 낭호인의 신격화 작업을 시작했다. 이런 이유로 공식적으로도 낭호인은 현무의 아들이고, 낭호의는 대종사 낭재천의 아들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차이는 영광의 중심에 서 있는 낭호인과 그림자로 머물러야 하는 낭호의의 차이이기도 했다.
사흘간의 생지옥이 끝나고 웅랑교 대종사 낭재천이 제평의 후산(後山), 또는 현무산(玄武山)이라 불리는 산봉에서 웅랑천하(熊狼天下)를 선포하는 제사를 지냈다. 제평의 후산은 노인이라도 천천히 걸으면 산꼭대기까지 한 시진(2시간)이면 다다를 수 있는 낮은 산이었다. 그러나 끝없이 펼쳐진 평야에서 그 정도 높이면 가히 천산(天山)에 버금갔다. 한때 제평이 있던 자리에 먼저 자리 잡고 있던 마을 사람들은 그 산을 신으로 섬겼지만 후에 수인천하가 도래하고 웅랑의 난을 정벌하러 온 호제가 제평을 거대한 도시로 키우면서 후산은 그냥 후산이 되었다. 웅랑교 입장에서는 후산, 아니 현무산은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원주 조정에 소외당한 신(神)과 같은 심상을 느꼈기에 이곳에 산에 대한 제식(祭式)을 한 것이다. 그리고 제평 전역에 더 이상의 약탈은 금지했다. 이미 산의 신에게 제사를 바치는 순간 웅랑교는 정식으로 제평을 백성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토금전장의 제평 총관 석은추는 초췌하기 이를 데 없는 몰골로 지하 창고에 숨어든 지 이레 만에 밖으로 나섰다. 창고에 한 달 이상 먹고도 남을 넉넉한 식량을 준비해두었지만 무호우 장자가 식솔들은 물론이거니와 평소에 친분이 있는 자들까지 데려오는 바람에 준비한 식량은 며칠 만에 동이 나고 말았다. 석은추는 최소한 보름간은 숨어 있고 싶었지만 그때까지 굶을 수는 없었기에 마침 웅랑교에서 더 이상 약탈하지 않는다는 말을 믿고 밖으로 나섰다. 석은추가 있던 곳은 제평의 부호들이나 고관들의 관저가 모여 있는 곳이라 불에 탄 건물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어디선가 하나 둘 거리로 나와 멍한 얼굴로 양지바른 담벼락에 기대앉아 햇볕을 쬐는 사람들 사이로 길을 걷던 석은추는 바람 사이에서 비릿한 탄내를 맡을 수 있었다. 아마도 부호들이 사는 집은 자신들이 사용할 요량으로 불까지는 지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외의 지역은 성한 집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잡아라!”
“헉!”
한순간 모든 것을 잃고 망연자실(茫然自失)해 있는 사람들을 지켜보며 멍하게 서 있던 석은추를 웅랑교의 교도들이 잡아챘다.
“이, 이보시오. 사, 살려주시오. 나는 그저 사람들을 구경했을 뿐이오.”
―퍽!
“허억!”
“시끄럽다.”
석은추의 반항 아닌 반항이 짜증나는지 무쇠같이 억센 주먹으로 배를 때린 웅랑교도는 반쯤 실신지경인 석은추를 어디론가 질질 끌고 갔다. 석은추는 자신의 임무와 자기 자신을 구명해줄 패를 생각하며 죽음의 공포에 질려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지난 이레 동안 무호우 장자가 이야기해준, 과거 흑막에서 일어섰던 세력이 어찌하여 흑막 사람들이 나약하다고 깔보는 남쪽 사람들에게 휘둘려왔는지를 계속 되뇌었다. 그리고 석은추가 도착한 곳은 제평대도독부(齊平大都督府)였다. 원주 조정에선 땅은 넓고 사람은 없는 흑막에 제평을 중심으로 그들을 다스리는 도독부를 설치했다. 도독부를 설치한 본래 목적은 웅랑들을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웅랑교는 오랫동안 조정에 반하는 일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조정이 바라 마지않는 흑막의 안정을 위해 힘을 썼다. 이에 도독부는 웅랑교를 견제하면서도 그들의 활동을 거의 방임하며 제평의 주위에 들끓게 된 마적들의 퇴치에 더욱 힘을 썼다. 그런데 오늘 그 제평대도독부의 관사에 웅랑교의 지휘부가 들어섰으니….
“아니? 무 장자님?”
“오오, 석 대인도 왔소?”
“이게, 무슨 일입니까?”
“보시오. 여기 잡혀온 사람들 대부분 낯익은 사람들이지 않소?”
“오 장자, 운 장자, 보 대인?”
석은추는 그제야 주변을 돌아보며 다소 지저분하기는 하지만 값비싼 비단 화복 차림의 사람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마 이들이 숨겨둔 재산을 받아내려는 것일 테지.”
무 장자의 말은 사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 장자님, 창고의….”
“거긴 아마 찾아내지 못했을 것이오. 석 대인이 창고를 나선 이후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나도 창고를 나섰다가 잡혔으니 말이오.”
웅랑교는 사흘간 제평의 약탈을 허락하면서도 부자들이 사는 지역은 직접 관리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제평의 유지를 회유하여 막대한 군자금을 확보해 나갔다.
“향신료상 무호우 장자, 한데 같이 온 그대는 누구요?”
“본인은 토금전장의 제평 총관 석은추라 하오.”
“토금전장?”
웅랑교 장로이며 제평의 유지들을 회유하는 작업을 책임진 구영문(邱英紋)은 토금전장이란 말에 관심을 보였다. 웅랑교는 흑막 전역에 세력을 떨치고 있었는데 그 구성원은 웅족이나 낭족뿐만이 아닌 십삼인가(十三人家)들이 상당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토금전장에서 무 장자에게 향료를 공급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니 이상할 것 없지만 같이 나섰다는 것은 뭔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토금전장 내부에서 상당한 지위에 있는 것 같아 아마 몸값을 제시하고 일신의 안전을 꾀할 것이란 예상을 했다.
“그래,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본데 해보시오.”
“나는 토금전장을 대표해서 한 가지 제안을 하려 하오.”
“….”
“토금전장과 거래할 용의가 있소?”
“무슨 거래를 말씀하시는 거요?”
“철기, 군량, 차, 말린 채소.”
웅랑교의 구영문 장로는 토금전장의 제평 총관 석 모라는 사내가 하는 말이 하나도 현실성 없게 들렸다. 이미 북지성의 대종도가 막혀있어 적은 분량도 아니고 웅랑교가 필요로 하는 양을 대려면 동해의 바닷길뿐이었다. 그러나 앞으로 동해는 바다 전역에서 후선과 조정의 쟁패가 계속될 것이 분명하기에 어디에도 길은 없었다.
“철기와 군량은 지금 당장 움직일 수 없지만, 차와 말린 채소나 과일 정도는 가져올 수 있소.”
“그럼 당신을 풀어주어야 할 텐데 당신을 어찌 믿고?”
“편지 한 통이면 되오. 의백성 토금전장 지점에 제 편지를 전할 수 있다면 100일 내로 가져올 수 있소.”
구영문의 사내의 말에 잠시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신도해서 웅랑교에 나쁠 일은 없었기에 선선히 수락했다.
“좋다. 한번 믿어보지. 편지를 전하는 것 정도는 간단한 일이니. 하지만 만약 우릴 놀린 것이라면 곱게 죽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많은 장자들이 토금전장에 전 재산을 맡겼다는데 그것은 웅랑교의 재산이다.”
석은추는 구영문의 말에 마른침을 삼키며 마음을 다잡았다. 황금은 어차피 그들에게 빼앗길 것이지만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며 떨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당당함을 위장해 말했다.
“그것은 토금전장의 재산이오. 하나 그것을 함부로 빼앗으려 든다면 우리와 거래하지 않는다 생각하겠소.”
“내가, 아니 내가 토금전장과 거래하지 않는다, 결정하면 너는 이미 산 목숨이 아님을 아는가?”
“웅랑교가 토금전장의 ‘투자’를 바란다면 제평 총관인 제 직권에 따라 투자를 할 수도 있지만 만약 그대로 갈취한다면 도적의 무리와 다를 바 없으니 더 이상의 거래는 없소.”
“….”
석은추는 이레 동안 어둠침침한 지하 창고에서 생각하고 준비한 모든 패를 내보였다. 이미 전환을 통해 중경 토금전장 본장에 자신의 생각을 전했고 금 대부에게 물건을 준비하겠다는 연락을 받은 상태였다. 차와 말린 채소와 말린 과일은 군량으로서 중요한 것이지만 상대적으로 구하기 쉬웠다. 언제나 신선한 채소를 구할 수 있고 봄이 되면 산속에서 먹을 수 있는 풀들이 많았기에 굳이 그런 것들을 준비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거친 흑막에선 그런 것들이 무척 중요한 군수품이었다.
“좋소. 웅랑교에 투자를 하면 향후 웅랑천하가 도래했을 때 부귀영화(富貴榮華)를 함께할 수 있을 것이오. 그럼 얼마나 투자하겠소?”
“황금 1만4천1십3관, 은 5만 1천관이오.”
“황금 140만 냥?”
1관은 100냥이니 물경 황금 140만 냥이란 어마어마한 거금에, 현실감이 없는 어마어마한 재산에 구영문 장로는 입이 떡 벌어졌다. 토금전장이 어마어마한 거액을 내놓자 제평대도독부에 잡혀 있던 제평의 장자들은 모조리 방면되었다. 넉넉하다 못해 넘치는 군자금을 확보한 이상 굳이 무리하게 그들을 닦달해가며 회유할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토금전장은 웅랑교의 비호 아래 흑막 전역에 상권을 보장받는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상단이 되었다. 그리고 흑막은 의백성과 더불어 철광이 많은 곳이었다. 웅랑교의 수중에 들어간 그 철광에서 산출된 철광석은 흑막의 군마들과 함께 주요한 거래 품목이 되었다. 토금전장에서는 그것들을 식량과 주요 물품과의 물물 교환을 중심으로 교역했다. 그리고 그 모든 책임을 석은추가 흑막 대총관이 되어 총괄하게 되었다.
***
흑막 제평이 웅랑교에 의해 생지옥을 연출할 무렵, 라혼은 하남천원군을 이끌고 초로역방 근처 평지에 포진한 반란 진토인의 대군과 마주하고 있었다.
“상병은 운용하기 힘든 병과(兵科)입니다. 코끼리란 짐승은 본래 겁이 많아 조금만 놀라도 난동을 부리기 일쑤입니다. 게다가 한번 돌진을 개시하면 멈출 수 없다는 점도 이용해볼 만합니다.”
“하지만 코끼리 등에 올려진 가마의 궁수들이 그것을 보완하고 있지 않나?”
“병서에 기록된 전법을 보면, 초지의 풀을 묶어 달리는 말의 발을 걸어 방해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건 하나마나 한 이야기잖수! 저렇게 보란 듯이 포진한 놈들의 눈을 피해서 언제 그 짓거리를 한단 말이오.”
하남천원군이 포진을 하고 고우, 표상치, 웅장모 등 백호십일걸과 주작대의 정령(正領) 상초(狀初), 청룡대 참령(參領) 목남(牧南) 등이 말에 탄 그대로 라혼 주위에 모여 간단한 작전 회의를 했다.
“뭐라?”
“그만! 코끼리는 백호영이 맡는다. 작전은 정면 돌파다. 상 정령이 예비대를 맡고 나머지는 전군이 일제히 돌격하여 승부를 결정할 것이다.”
“부원수, 그것은 너무 무모한!”
“목 참령, 그대가 직급상 참령이나 역량이 부족하다면 지위를 박탈할 것이다.”
“그, 그런….”
라혼은 그와 동시에 앞을 나서며 목소리에 내공을 실어 외쳤다.
“이 전투에서 나는 너희들을 평가할 것이다. 너희들이 얼마나 용맹하게 싸우는지, 과연 어느 정도의 역량을 가졌는지 지켜볼 것이다. 내게 너희들이 정예군임을 증명하라!”
―와!
―히히히히힝!
―두두두두두두….
그리고 라혼은 홀로 적진을 향해 돌격을 개시했다. 그러자 병사들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라혼이 돌격 명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움직이지 마라! 돌격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다!”
“…!”
총대장군의 돌격에 앞으로 뛰어나가려 하던 군사들은 대장(隊長)들의 고함에 일시 주춤했다. 그리고 라혼의 명령이 떨어졌다.
“전군 돌격!”
―와아~!
그러자 전면에 포진했던 중기병부터 차근차근 질서정연하게 앞으로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반란 진토인 쪽에서도 마주 달려오기 시작했다.
―크앙~!
―캬오~!
―우오~!
표상치와 웅장모가 반인반수의 모습으로 화신(化身)하고 포효했으며 초강남, 만력, 고우, 달성모, 잔폭광마도 내가공력이 섞인 함성을 내질러 기세를 북돋우었다.
―뿌우~!
라혼은 홀로 거칠 것 없다는 듯이 말을 몰아 성난 파도처럼 밀려오는 열지족 전사들과 붉고 푸른 물감을 칠한 코끼리를 바라보며 마상 전투를 위해 들고 나온 언월도에 진기를 주입했다. 진기가 주입된 언월도는 누런 황금빛 도강(刀罡)을 머금었다.
“금강월영참(金剛月影斬)!”
―슈와~! 팍!
―와아~!
라혼이 황금빛 도강은 거대한 코끼리를 세로로 양단하는 신위를 보였고, 그 모습은 백호나한의 등 뒤를 쫓던 하남천원군의 마음속에서 무한한 투지를 이끌어냈다. 거대한 코끼리를 1합에 양단한 라혼은 멈추지 않고 그대로 하얗게 칠한 코끼리가 있는 곳으로 내달았다. 그러나 추장이 타고 있는 하얀 코끼리 주위엔 열지족 전사들이 겹겹이 감싼 채 버티다 나중엔 라혼이 탄 힘차게 내달리는 군마의 다리를 부여잡는 방법으로 목숨을 아끼는 것을 도외시한 채 육탄으로 저지했다. 그러다 열지족 전사가 목숨을 버리며 말의 다리가 자르자 라혼은 말을 버리고 어기충소(馭氣沖宵)의 신법으로 몸을 뽑아 올려 하늘을 걸어다닐 경지에 이른 것으로 경공의 최상의 경지인 신법 능공허도(凌空虛道)를 펼쳤다.
“우왁! 하늘을 난다!”
“막아!”
라혼이 능공허도 신법을 펼치자 말을 타고 내닫는 것보다 몇 배는 빠르게 하얀 코끼리에게 접근했다. 간간이 몇 대의 화살이 날아왔으나 태반이 빗나갔고 서너 대는 정확히 날아왔으나 라혼에게는 위협이 되지 않았다.
“단폐장(斷肺掌)!”
―뻥!
―컥!
하얀 코끼리를 몰던 코끼리 몰이꾼은 어느새 바로 곁에 접근한 코끼리를 둘로 쪼개버린 장수의 일장을 가슴에 맞고 입으로 내장을 토했다. 거추장스런 언월도를 던져버린 라혼이 사용한 단폐장에 당한 흔적으로, 단폐장에 맞으면 폐가 터지면서 식도를 몸 밖으로 밀어내게 된다. 라혼은 몰이꾼을 참살함과 동시에 허공으로 몸을 띄워 하얀 코끼리가 지고 있는 탑으로 난입했다.
―와창!
라혼이 난입한 그 순간 사방에서 창이 찔러왔지만 라혼의 여의금나수(如意擒拿手)에 모조리 잡혀 부러지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동시에 라혼은 허리춤에서 협봉검(陜蜂劍)를 뽑아들어 누런 검기로 사방벽을 잘라냈다.
―촤아!
하얀 코끼리 등에 지어진 탑이 충천하는 황금빛 검기에 잘려 쓰러졌다. 라혼은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노을을 머리에 이고 말했다.
“열지족 추장 소노리는 나서라!”
“….”
그러나 탑 안에 있던 다섯 명의 진토인들은 아직까지 투지를 불태우며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라혼은 천지를 압도하는 피어(fear)를 내뿜으며 대사자후(大獅子吼)를 내질렀다.
―우아아아아앙~!
―쿵!
동시에 일보를 걸으며 진각(震脚)을 시전했다. 그러자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한 코끼리가 그대로 무릎을 꿇으며 억만 근 무게의 짓누름에 구슬픈 비명을 내질렀다. 내공으로 무게를 더하는 천근추(千斤墜)의 일종으로, 과거 일보천자(一步天子)라는 제왕이 사용했다는 천복일황보(天伏一皇步)였다. 일보천자는 이 일보로 만조백관을 굴복시켰다고 하는 전설을 품고 있는 보법(步法)이었다.
“나서라!”
“….”
그리고 열지족 추장 소노리가 라혼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자 그것으로 싸움은 끝났다.
―와아~!
―백호나한 만세!
―만세!
반란 진토인의 수괴 열지족 추장 소노리가 라혼의 무지막지한 기세에 눌려 항복하자 호도와 호도 주변의 대부분 지역이 토벌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라혼은 항복한 소노리의 딸 메이를 모원과 혼인을 맺게 함으로써 휘하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원주 조정에 올리는 장계(狀啓)에 소노리를 반란 진토인의 수괴가 아니라 하남천원군을 도운, 조정에 귀순한 대추장으로 표현했다. 이로써 남례성 전역의 모든 반란 중 큰불이 꺼지고 밀림을 잘 아는 5만 대군을 얻은 셈이 된 라혼의 하남천원군은 거칠 것 없이 남례성의 반란 진토인들까지 토벌 또는 회유를 통해 순식간에 남례성을 제압하기에 이른다.
11#85***
천하의 중심이며 근원이라는 원주(元州) 중경 청인성의 천호궁(天虎宮)에서는 천원대원수(天元大元帥) 마동치의 평안천원군(平安天元軍)이 대패하여 고작 수만의 패잔병을 이끌고 포란산(抱卵山)까지 밀려난 사실에 대해 대경실색(大驚失色)하여 연일 대책을 논의했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사실상 최고 실권자인 서제이자 상국(相國) 서포틈(鼠暴闖)과 천자인 호황이 같은 자리에서 앞으로의 대책을 논의했다.
“신, 임주사마(壬州司馬) 학오(鶴澳) 아뢰나이다. 반적 강무가 동해에 배를 띄워 북상하는 것이 종종 보고되는바, 임주는 물론 신주의 백성들까지 두려움에 떨고 있나이다.”
“신, 신주사마(辛州司馬) 견치(犬齒) 아룁니다. 임주사마의 말이 옳습니다. 저희 신주에서도 그들의 대선단이 종종 목격되고 있습니다.”
“신, 정주사마(丁州司馬) 사모자(蛇某子) 아룁니다. 그들의 선단은 저희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동해(東海)를 면한 3주의 사마들이 일제히 나서며 보고하자 위기감은 더욱더 증폭되었다. 후선의 강무세가는 예로부터 바다를 이용할 줄 아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선단이 중주의 가장 북쪽에 있는 정주에서까지 보인다면 일이 매우 심각해질 수 있었다. 비약하면, 장강의 수로를 따라 원주을 노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신 신주사마 견치 아룁니다. 이대로는 잘못하면 동경이 위험합니다. 하니 서경의 수군 일부를 동경에 두어야 합니다.”
“신 무주사마 양초지 아룁니다. 그것은 불가하옵니다. 그렇게 하면 서경이 위험해집니다. 듣기로 강무세가와 대대로 사돈 관계에 있는 해남 군도의 해왕이 서남해안을 어지럽힌다면 남상의 반란은 물론 남례성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신주의 견제가와 무주의 양제가가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자 곤란에 빠진 것은 상국인 서포틈이었다. 현제 원주 조정에서 서제 서포틈을 지지하는 진골십가(眞骨十家)는 사(蛇), 마(馬), 양(羊), 견(犬)이었고, 천림왕 호천린(虎天潾)을 지지하는 가문이 돈(豚), 우(牛), 토(兎), 원(猿)이었다. 그리고 계제가는 아직까지 중립으로 남아 있었다. 상국의 입장에선 지지 세력 내의 내분이므로 나서서 어느 한 편을 들어주기 참으로 곤란한 지경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의 해결책은 엉뚱하게 천림왕이 나서자 해결되었다.
“폐하.”
“천림왕께서 좋은 방법이 있다면 말해보시오.”
“예, 폐하!”
천림왕이 앞으로 나서자 다소 복잡한 시선으로 무주와 신주의 대립을 지켜보던 호황이 그가 조정에서 말하는 발언권을 허락했다. 원주에서 중원십일주(中原十一州)와 중외오성(中外五省), 변방사역(邊方四域)을 대표하는 중신들이 회의하는 자리에선 발언권은 오직 20명의 대표들에게만 있었다. 그러나 지금 열리는 회의는 중원십일주의 대표들만 참석해 있었다. 변방사역과 중외오성 대부분이 반란 중이었고 전에도 천하의 노른자위를 차지한 진골십가들의 등쌀에 참가해보아야 자리만 차지하는지라 어느새 조정의 천원회의(天元會議)는 그들만 참가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갑주사마를 대신한 서제 서포틈은 언제든지 발언을 할 수 있었으나 천림왕은 천원회의의 주재자인 천자에게 발언권을 얻을 필요가 있었다.
“남상의 반란과 반역을 꾀한 강무세가와 인연이 깊은 해남 군도의 세력을 견제하려면 서해는 수군이 꼭 필요합니다. 하나 동해는 적이 오직 강무세가뿐입니다. 이번에 천원대원수 마 원수가 패배했다 하나 갑주엔 10만 이상의 대군이 있습니다. 그들을 임주에 보내 동인성을 압박하고 앙신성으로 재차 대군을 보내면 바다에 신경쓸 여력이 없을 겁니다. 게다가 곧 겨울이니 그것에 준비할 시간은 충분하고 동경을 둘러싼 장호(莊湖)와 분호(分湖), 그리고 장강의 모든 배를 징발하여 바다에서 장강으로 들어오는 입구를 틀어막는다면 동경 황술성은 충분히 지켜낼 수 있을 겁니다.”
“과연 그렇겠군.”
천림왕이 제시한 계책은 참으로 절묘했다. 이것은 신주와 무주가 동시에 만족할 만한 계책임과 동시에 갑주에 대군이 임주로 감으로써 상국이 서제의 힘을 빼앗는 계책이었기 때문이었다. 상국인 서포틈이 이것을 수락하지 않으면 스스로 무주의 양제가와 신주를 견제가의 지지를 더 이상 기대하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모든 시선이 서제의 입을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천림왕은 한발 물러서서 과연 신기묘산(神技妙算)이라는 서제가 또 뭐라 말을 할까 하는 생각을 하며 흥미로운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그때….
“폐하, 흑막에서 보내온 전령입니다.”
“흑막에서?”
그리고 전령이 가져온 소식은 또다시 온 조정을 발칵 뒤집기에 충분했다.
“이럴 수가! 웅랑들이 반란을 일으키다니….”
제평에서 웅랑교의 눈을 피해 달아난 자는 없었지만 제평 전역을 순찰하던 순군들이 제평이 무너지는 것을 확인하고 의백성으로 그 소식을 전해왔다. 그것을 의백안찰사(義白按察使) 숭태평(崇泰平)이 지급으로 바닷길로 보내온 것이다. 그리고 더불어 의백성으로 웅랑들이 넘어올 가능성이 있음을 말하면서 원군을 청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폐하, 흑막은 원래 그런 땅이옵니다. 그러니 너무 크게 심려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상국, 그게 무슨 말이오.”
“북지성의 대종도는 망극하게도 정립천하를 외치는 무리들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웅랑들과 손을 잡을 리 만무하니 일단 중주로 내려올 가능성은 적습니다. 그리고 흑막의 웅랑들 입장에서도 굳이 북지성을 쳐서 자신들의 힘을 소모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면 의백성은, 의백성은 어찌하시려오?”
“의백성에는 쓸 만한 성이 많습니다. 금세 무너지진 않을 것이니 시간은 충분히 있습니다. 그리고 전령이 가져온 장계에도 제평대도독부의 군사들 태반이 아직 그 세를 잃지 않았으니 당분간은 어떠한 운신하기 어려울 겁니다.”
여기까지 말한 서포틈은 천자인 호황에게 길게 읍(揖)하며 비장한 어투로 진언했다.
“폐하, 천하가 어지러워지고 각지에서 반란이 끊이지 않으니 앞으로가 두렵습니다. 이는 중주에 힘이 없음으로 생기는 일이니 징병령(徵兵令)을 내려주십시오.”
“크음!”
“….”
서포틈의 진언에 장내에 있던 모든 중신들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수인이 도래하고 수인천하가 안정된 후 최소한의 치안을 위한 군사들만 남겨두었다. 그런데 최근 일련의 일들로 천하가 어수선해지자 진골십가는 이런저런 명분을 붙여 군사들을 모았다. 그러나 천자가 천하에 징병령을 내리면 천하가 각 군벌로 나뉘게 될 것은 그야말로 불 보듯 뻔한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진골십가 모두가 내심 바라는 일이었다.
“폐하.”
“천림왕은 나서지 마라.”
“폐하!”
호황은 발언권을 재차 요청한 천림왕을 손을 들어 말리고 장고(長考)에 들어갔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러나 거북스런 침묵을 깬 것은 호황이 아니었다.
“폐하, 하남천원군의 전령입니다.”
“….”
천호궁의 정전(正殿)은 다시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전령이 가져온 소식은 희소식이었다.
“폐하! 남례성의 주도 호도를 탈환했습니다.”
“오오~!”
“장계를 가져오라! 짐이 직접 읽겠다.”
장계를 들고 있던 내관에게 장계를 건네받은 호황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장계를 읽어내려 갔다. 그리고 다시 내관에게 주어 큰 소리로 읽게 했다.
<신(臣) 하남대원수 금영월 삼가 상(上)께 아뢰나이다. 신이 불민하야, 폐하께서 마련해주신 하남천원군을 잃을 뻔하였으나, 다행히 하늘이 제 곁에 훌륭한 장수를 두어 어려움은 있으나 결국 가장 큰 세력을 떨치던 반란 진토인들을 토벌할 수 있었나이다.
…중략….
이에 많은 진토인들이 반역의 창칼을 거두고 자발적으로 성문을 열어 하남천원군을 맞이하니 삼가 남례성의 반란은 토벌되었음을 아뢰나이다.>
―오오~!
“들어라! 천하 남북에서 반역이 일어나 짐이 심히 괴로웠도다. 하나 다행히 하늘이 짐을 버리지 않아 승전보를 전해주었으니 하남대원수 금영월을 상장군에 봉하고 공이 높은 참장 라혼을 대장군에 제수하여 서해수군의 제독(提督)에 봉하노라!”
“폐하! 하오나….”
“그리고 상국의 의견을 받아들여 천하에 징병령을 내리니 대군을 모아 남과 북의 적도들을 상대하라!”
호황이 이렇게 선언하자 내심 서해수군의 지휘권을 넘보던 기주의 양제가, 무주의 우제가, 계주의 돈제가에서는 당황한 빛이 역력했지만 서해수군에 별 관심이 없던 다른 제가들은 천자의 징병령에 만족하며 천자가 결정한 일을 추인했다. 그리고 서제는 갑주에 있는 10만 대군의 일부를 임주에 보내 후선의 영역이 된 동인성을 견제하기로 했다.
***
남례성에서 일어난 반란이 거의 토벌되었다는 소식이 후선의 황실에 들어가자 그곳에서는 이불리(利不利)를 따지느라 연일 격론이 벌어졌다. 그러다 원주의 호황이 징병령을 내렸다는 소식이 지급으로 전해지자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어차피 예상했던 일입니다, 아버님.”
“정아, 호황의 징병령은 예상한 일이지만 남례성이 이토록 빨리 안정되리라곤 예상치 못하지 않았느냐?”
강무세가의 가주였던 강무정은 선(鮮)을 개국하고 일선에서 물러난 노가주이자 그의 부친이 되는 강무전을 황제로 모셨다. 일국의 황제가 되면 천하의 중심으로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기에 가주였던 강무정은 운신의 폭이 극히 좁아지는 것을 저어했고, 선이 안정되려면 거센 파고를 몇 번이나 넘어야 하기에 강무정은 보위(寶位)를 포기한 것이다.
“어차피 사전 정지 작업은 모두 끝났습니다. 흑막의 웅랑교가 거병했고, 남례성이 안정되었다 하나 실상 목 하나만 떨어지면 더욱 걷잡을 수 없이 혼란해질 겁니다.”
“그건 그렇고, 한은 아직도 그러고 있느냐?”
“태자는 젊습니다. 그러나 차차 나아질 것이니 아버님은 심려를 거두십시오.”
“그렇다면 한에게는 우리 가문과 대선제국의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책임져야 하는 막중한 사명이 있다. 여느 젊은이와는 다르니 하는 말이다.”
“태자는 현명합니다.”
후선의 황실에는 일곱 명의 영걸(英傑)과 한 명의 제왕지재(帝王之才)가 있었는데 정왕(正王) 강무정(姜武政), 낙왕(樂王) 강무산(姜武山), 평왕(平王) 강무운(姜武雲), 백왕(白王) 강무원(姜武原), 순왕(純王) 강무식(姜武植), 해왕(海王) 강무해(姜武海), 오왕(吳王) 강무승(姜武勝)과 태자 강무한을 말했다.
“폐하, 해왕 전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해가? 들라 해라.”
나라를 개국하고 급조된 황실이어서인지 법도가 제대로 서지 않았다. 그래서 강무정은 황제인 강무전을 그냥 아버님이라 불렀고, 강무전 또한 제후의 반열에 있는 아들들을 그냥 이름으로 불렀다. 그러나 지금 강무세가는 천하를 차지하기 위해 공전절후(空前絶後)의 도박을 벌이고 있어 아직 그런 허례허식(虛禮虛飾)에는 별로 신경쓰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전조(前朝) 선(鮮)의 이름으로 개국을 천명(天命)한 것은 수인 조정을 자극하기 위해서였을 뿐이었고 강무세가가 원하는 것은 천하이지 천하의 한 귀퉁이가 아니었다.
“아버님, 형님!”
“네가 어찌 구도에 남아 있는 것이냐?”
“구도에 남아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나갔다가 다시 돌아온 거요.”
“왜? 무슨 일로?”
“동영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오.”
“동영에서?”
“동영 각지에서 요괴들이 출몰하고 죽은 자가 산 자를 뜯어먹는다 하니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소. 아무래도 동영은 우릴 돕고 싶어하지 않는 모양이오.”
강무정은 강무해의 말에 미간을 좁혔다. 동영의 돌격선의 도움 없이 동해를 제압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동해를 장악하지 못하면 흑막과 연결되는 길이 없다는 말이 되었다. 그것은 또한 수만 리 바닷길을 후선의 힘만으로 완전히 장악해야 한다는 뜻이니….
***
고학은 도대체 주군의 능력이 어디가 끝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고학이 주군의 질문에 진언한 것은 반란 진토인을 대파하고 열지족 중심으로 모여 있는 제 부족의 족장들을 하나하나 회유하고 회유된 진토인 부족을 길잡이로 삼아 남례성 진토인의 반란을 각개격파(各個擊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군은 남례성에서 가장 큰 세력의 진토인 부족 중 하나인 열지족의 추장 소노리의 머리를 조아리게 함으로써 오히려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나기 전보다 더 남례성을 안정시켰다. 소노리의 굴복을 받아냄으로써 효과는 상상을 초월했다. 열지족에게 직․간접적으로 입김이 닿아 있는 부족들이 소노리가 머리를 조아린 순간 하남천원군의 영향력 안에 들었고, 진토인 부족은 부인과 아이들이 있는 마을을 지키던 모든 전사들을 모두 끄집어냄으로써 단숨에 8만 대군을 확보할 수 있었다. 열지족은 물론 다른 부족들도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해 마을에 많은 수의 전사들을 남겨두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을 호도 주변으로 끌어들이고 호도에 수만 군사를 주둔시키자 전사들이 굳이 집에 남아 있어야 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조치는 그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임무를 띤 고학과 모원, 토사귀 등 문관들에게는 그것이 다 일거리였다. 주군은 8만 진토인 전사들을 하남천원군으로 받아들이고 싶어했기 때문에 그들의 녹봉을 책정하고 그들이 원래 가지고 있던 지위를 고려하여 직급을 배분해야 하는 일은 정말 끝이 없었다.
“모원, 신혼이라 한참 마누라 품속에서 노닐어야 하는데 미안하군.”
“아닙니다, 고 대인!”
모원은 고학의 농에 얼굴을 붉히며 손사래를 쳤다. 고학은 그런 모원을 보고 미소지어주고는 말했다.
“아무래도 주군은 남례성을 완전히 장악할 셈인가 보네.”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확신이 서진 않지만 주군이 남례성 전역의 진토인 세력 분포와 부족들의 정보를 수집하시는 것을 보니 뭔가 새로운 일을 벌이시려는 것 같더군요.”
“이것을 보게.”
“전환 아닙니까?”
“이것은 참으로 획기적인 물건일세. 우리에게는 이런 전환이 122개가 있네. 이것만으로도 군사의 상호 의사소통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네. 전환으로 서로 의견을 조율하니 서로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한곳에 뭉쳐 있는 군대처럼 움직일 수 있게 되었어.”
전환의 덕을 가장 톡톡히 본 것은 다름 아닌 양엽구 구만혁이었다. 구만혁은 천수교 서안 방향의 밀림 속에서 백호영들을 전환의 수만큼 조를 나누어 밀림을 수색해 들어갔다. 그리고 매 순간순간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고 숨어 있던 진토인들을 발견하면 사냥감을 몰이하듯 한곳으로 몰아 손쉽게 그들을 처리할 수 있었다. 그러한 성과는 전환을 통한 서로간의 의사소통이 원활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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