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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체류한 중국동포 여성의 한국생활체험기
15년전의 아픔 기억들 인제는 물러가라!
편집자 주: 지난 10여년간 우리 중국동포들의 코리아드림에서의 희노애락을 되새겨 보는 마음으로 15년전 코리아드림을 한 중국동포 여성(연길 출신, 김경애씨 46세)의 한국생활체험기를 게재한다.
한국의 첫날은 걱정스럽고 불안하기만 했다
나는 중국 연변에서 근무하던 회사 일을 그만두고 1994년 31살 나던 해 여름, 코리아드림을 택했다. 중국동포들에게 너무도 큰 유혹중의 나라였던 한국은 처음 타보는 비행기만큼이나 내게 신비롭고 낯선 나라였다.
생전 처음 “불법”이라는 모험을 하면서 인천국제공항에 들어섰을 때 나는 엄청 큰 불안감으로 안절부절 못했다. 공무자격으로의 입국이라 옷 몇견지만 달랑 넣으라는 “브로커”의 명령에 따라 무겁지도 않은 여행용가방을 한손에 들고 핸드백 끈이 자꾸만 좁은 어깨로 흘러내려서 추스르기를 연속하면서 나는 인천출입국 심사대앞에 다가섰다.
입국심사대에 거의 당도하는 순간 너무도 당황해서 귓가까지 얼얼해나는 열기를 느끼면서 검사원앞에 다가 갔을 때 누군가 등뒤에서 놀래우기라도 했더라면 영락없이 심장이 멎어버렸을 것이다. 다행히 중국공항보다 한국쪽이 심사가 더 순조롭게 끝났다. 누가 마중 나온다고 전해듣긴 했지만 머리속엔 온통 출입국관리소를 빨리 벗어나야 한다던 브로커의 말만 맴도는지라 찾아볼 경황도 없이 무조건 사람들이 향하는 대로 공항 출구를 빠져나갔다.
공항 밖에 나와서야 안도의 숨을 휴 내쉬며 잠간 어디로 가야할지 주춤거렸다. 환하게 넓고 잘 트인 공항 도로를 건너 저앞에 줄세워 대기시켜 놓은 택시에 타야지 생각을 굴리면서 차들이 멈춰선 사이로 등뒤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도 귀가에 흘린 채 정신없이 도로를 가로 건너 버렸다. 누가 잡으려해도 저 만큼 가있으면 안전할가 싶어서였던 것 같다.
그때 “아가씨, 어디로 모실까요?” 상냥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한 택시기사 아저씨가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주소가 적힌 수첩을 꺼내 보이면서 그리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면서 막 택시에 오르려던 순간 누군가 가까이에서 내 이름을 불러서 돌아보니 1년전에 벌써 한국에 와 있던 큰 시형이였다. “아니, 부르는데 왜 그렇게 정신없이 가오?” 나를 택시에서 끌어당기는 아주버님 얼굴이 반가움보다는 약간은 억이 막힌 듯 황당하다는 표정이였다. 이국땅에서 친척을 만난 것이 얼마나 큰 감동이였는지 모른다. 잠간 시형이라는 것도 잊은 채 마치 친청오빠를 만나기라도 한듯 좋아서 어쩔바를 몰랐다. 그러고 있는 내가 재밌었던지 성격 좋으신 아주버님이 잔뜩 골려주기 시작했다. “하하하, 다른 친척들은 시간이 없고 해서 내가 아까부터 공항 나와 기다렸는데 얼굴이 안보이니 한참을 찾았지. 그렇게 처녀멋을 부리니까 못알아봤잖소. 근데 아까 저쪽에서 보니까 신호등도 무시하고 막 정신없이 허둥대는 사람이 있길래, 오, 저 사람은 무조건 중국동포겠구나 해서 다시 보니깐. 허허… 근데 그 비싼 택시 타고 어디까지 갈려구 그랬지? 담도 크오. 그 아저씨가 어디다 팔아넘기면 어쩔려고 그랬소?”
나는 얼굴이 빨개져서 한참이나 변명하느라 버벅댔지만 그래도 속으론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되뇌이고 있었다. 몇번인가 지하철, 버스를 갈아타면서 큰 시형네가 거주하고 있는 서울시 영등포의 어느 한 자그마한 지하방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오후였다.
밤이 되여가니 하나 둘 한국에 와 있던 시댁식구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는데 중국에서보담 훨씬 피곤한 모습들이였다. 젊고 이쁘고 날씬하기만 했던 막내시누한테서 눈가에 잔주름을 보게 된것도 그때가 처음이였다.
“올케가 책상머리에 앉아서 편하게 벌어 먹다가 이제 식당일을 어떻게 할란가 몰라?,,.”그때까지만 해도 나이에 비해 어려보이고 날씬해 보였던 내가 은근히 걱정되는 눈치들이였다. 환영파티라도 해야겠지만 단속이 심하다면서 시형이 간단히 식사나 하자고 말하는 모습에서 불안감이 더 한층 전해졌다.
저녁식사 후 중국 같았더라면 노래방이요 뭐요 줄지어 다녔을 사람들이 보름 후에 뒤쫓아 나오는 남편이 도착한 다음에 다시 보자는 인사말만 남긴 채 얌전히 자기자리로 돌아갔다.
연길보다 엄청 더운 한국의 한여름 날씨를 실감하며 비좁은 단칸방에서 큰 시형과 맏동서와 함께 도무지 찬바람이 느껴지지 않고 후덥지근한 더운 바람만 싣고 오는 선풍기 날개에 불안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을 식혀가며 한국에서의 내 “첫날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첫 출근을 하던 식당에서의 나의 탈출기
한국에 온 며칠 후, 막내시누가 벼룩시장 신문을 뒤져가면서 일자리를 찾아주기 시작했다. 전화상으로 연락하여 여기다 싶어 찾아 들어가면 불법체류인데다 경험도 없어 말을 건네보기도 전에 퇴짜를 맞았고 몇곳을 거쳐서 겨우 일자리 찾게 되였다. 그것도 식당에서 먹고 자면서 한달 한번씩 쉬고 70만원. 그래도 그게 어디냐며 이튿날로 시누이는 중국에서 가져간 “우황청심환” 2통을 받쳐가면서 사장한테 고맙다고 인사까지 전했다.
그렇게 나는 한국에서의 첫 출근을 시작하였는데 1, 2층으로 된 식당은 가정집 분위기의 부붸집이였다. 사장은 서글서글한 60대 초반의 경상도 아저씨이였고 사장사모님은 별반 식당하고는 상관없어 보이는 듯한 무표정한 얼굴의 화장을 찐하게 한 50대 초반의 서울아줌마였다. 식당에서 같이 일해야 하는 언니벌 되여보이는 여자 한명이 있었는데 고향이 부산이라서 그런지 “사장님예, 이랬어예, 그랬어예” 하는 귀여운 경상도 사투리를 많이 썼다.
일을 시작한 첫날 아무것도 할줄 모르는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뭐 좀 시키면 그대로 쫓아 할건데 웬일인지 다들 니가 알아서 해야 한다고 그러고 있으니 나로서는 참 미치는 일이였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 오자 손님들이 우르르 밀려들고 여기저기서 주문을 해대는데 하나를 기억하면 또 하나가 잊어지고 음식은 나왔는데 누가 시켰는지 몰라서 눈치만 보고 있고 멍청하니 같이 일하는 언니 뒤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니다가 어느 순간 깝깝해 미치겠다는 눈길들과 마주치게 되였다. 게다가 말투까지 이상한지 뭐라고 물어보면 그거 알아들을 시간이면 이거나 갖다 주라는 식으로 언니는 등을 떠민다. 손님상에 음식그릇을 갖다놓는 손길이 부들부들 떨리고 바보같이 당황해는 나를 손님들은 걱정스럽게 지켜만 보고 있었다.
하찮게 여겼던 식당일도 대담성과 요령이 필요함을 그때에야 깨달게 되었다. 전쟁 치르듯이 한바탕 법석이던 손님들이 하나, 둘 식사 자리에서 물러나고 음식그릇을 주방으로 날라가는데... 사장 사모님이 주방으로 들어오란다. 물이 가득 담겨진 싱크대에 세제며 락스까지 부어놓고는 장갑도 없이 그릇을 씻으라는 것이다. 락스가 얼마나 독한 것인지는 그때까진 잘 몰랐기에 덤벙거리며 그릇을 씻어대기 시작했다. 이왕이면 깨끗하게 하려는 마음으로 그릇을 쳐들고 보는 사이에 옆으로 어마어마하게 그릇들이 쌓여지고 있었다. “얘얘, 뭐하니, 좀 빨리빨리 해야지” 사장 사모님의 다급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고 나는 또 속이 한줌이 돼서 손놀림을 다그치다가 쨍그랑하고 접시 하나를 손이 미끄러워 주방바닥에 깨놓고 말았다.
오후 3시가 되어갈 때에야 정심을 먹기 시작했는데 밥값만큼도 일을 못한 것 같아서 밥먹는 것도 눈치보였다. 그래서 “일 못해서 죄송해요.” 가까스로 뱉은 한마디에 “첨엔 다 그래, 이제 하다보면 요령이 생길꺼야.” 그렇게 너그럽게 받아넘기는 사장 사모님이 눈물나게 고마웠다. 중국에서 말로만 들었던 야박한 한국주인들 모습하곤 너무나 차이가 큰 것 같았다. 도량이 넓다고 해야 하나? 역시 선진국 사람들이라서 뭔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헌데 좋은 날은 몇일 못가고 나에게는 스트레스만 잔뜩 쌓여 갔다. 중국의 모든 것에 익숙해졌던 나의 사고방식과 한국 사람들에 대한 이해부족의 차이에서 오는 모순도 컸다. 중국에서 상급이 지시하면 차근차근 받아하던 굳어진 사고 때문에 누군가 나한테 하나에서 열까지 가르쳐주면 참 잘 할 것 같은데 여기서는 그런 방식이 안통했다. 스스로 눈치껏 일을 배워야 했고 요령을 장악해 나가야 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순진한 듯 쫓아다니면서 이것저것 따지고 묻고 그런 내가 참 많이 바보스러웠던 것 같다.
그때 정말로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1, 2층 사이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무거운 쟁반을 나르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세집을 따로 맡지 못한 상황에서 식당의 한 쪽 방 구석에 주숙하고 있을려니 같이 일하는 언니가 열시가 되여 칼같이 퇴근해 버리고 나면 나머지는 다 내 몫이 일이였다. 사장 부부는 저녁이면 말로는 다이어트 한다고 안먹는 바람에 나 혼자서 챙겨먹기도 미안스럽고 해서 가끔은 저녁을 굶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느날 무엇을 찾으러 1층에 내려왔는데 사장 부부가 치킨을 시켜 놓고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았을 때 처량했던 나의 심정을 어디에 비할 수가 없었다. 그 뒤로도 종종 그런 일을 목격했고 혹시라도 부딪치면 마지못해 지나가는 말로 나한테 먹어보라고 그러는 것 이였다. 식당에 일하면서 굶었다는 것은 지금 와서 생각할 때 너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 온 7개월 후의 어느 날 일을 마치고 사장 부부가 자가용에 태워준 서울구경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처음으로 돌아보는 서울 야경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던 것이다. 사장 사모님의 후배인 듯한 사람이 차린 노래방에서 신나게 스트레스를 풀고 식당에 들어섰을 때는 새벽 두시가 다 되었다. 너무 피곤해서 부랴부랴 잠자리에 들었는데 새벽 다섯시가 못돼서 식당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부시시 깨여 일어나 보니 사장 부부가 그 시간에 가락시장에 물건 구입을 다녀온 것이였다. 잠이 덜 깬 상황에서 무우며 배 박스를 낑낑거리고 주방에 날라가고 나니 온몸이 해나른해져서 정말 그대로 잠들고 싶었다.
헌데 사장 사모님은 잠도 없는지 그 길로 열무를 손질한다면서 법석이고 있었다. 나보곤 그대로 올라가서 자라고 했지만 그냥 또 혼자 올라가긴 뭐하고 해서 “괜찮아요”를 연발하면서 또 한번 착한 모습을 연출하였다. 그만큼 아무것도 할줄 모르고 불법이기까지한 나를 받아주었다는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이였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함으로서 사장 사모님에게 더욱 이쁨받을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나만의 오산이였다. 시간이야 어찌됐든 나는 그날의 일들을 계속해야했다. 사장 사모님은 점심 끝나고 나서 아무 때까지나 한숨 자면 되였고 그래서 피곤한건 나뿐이였다. 장사가 좀 되였다 싶으면 가끔은 또 새벽에 가락시장을 가야하는데 어쩔수 없이 나도 따라나서군 했다. 점차 나는 체력의 한계를 느꼈다.
96년 3월 남편이 한국회사에 취직되여 방 하나를 마련했다. 그로부터 집에서 출퇴근을 하게 되였는데 사장 사모님은 영 내켜하지 않는 모양을 지었다. 며칠 후 다른 한 언니가 식당에 들어왔고, 그로부터 나는 사장사모님의 미움을 받게 되였다. 새로 나타난 언니는 손님한테 애교스럽게 써빙도 참 잘했고 일도 잽싸게 해제꼈다. 무뚝뚝하고 어정쩡한 나하고 비교할 때 내가 주인입장이였더라도 뻔한 비교였다. 그러면 차라리 속편히 나에게 일을 그만두라고 하면 될 것인데 사장 사모님은 한사코 내 결점들만 꼬집어 놓는다. 홀에서 뛰여다녀도 바쁜데 살살 걸어다닌다는둥, 뭐라하면 녜, 녜 대답 한번 시원하게 들어본적 없다 는둥... 주인 입장이라 할 말도 많았겠지만 죽어라 한다고 일하는데 잘 안되던 그때는 참으로 억울했었다.
결국은 어느날 아침인가 아침부터 이어지는 스트레스와 울분을 참지 못하고 나는 1년 반 일하던 그 식당을 탈출하고 말았다. 등뒤에서 사장 사모님이 들으라는듯 소리지른다. “중국년들은 왜 다들 저 모양이야, 맨날 개처럼 짐싸들고 이리갔다 저리갔다…” 다시 돌아서서 식당안에 돌멩이라도 뿌려던져야 속이 내려갈 것 같은 심정이였지만 나는 또 그럴수 있는 입장도 신세도 못되였다.
이제는 15년이란 세월이 흘러갔지만 그때 첫 식당에서의 탈출이 어쩌면 나머지 내 한국생활에 있어서 경험과 면역력으로 뒷 받침되여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인제는 15년전의 아픈 기억들이 다 물러 갔으면 하는 바램이다. 사장과 종업원 사이에도 일로서의 확실한 계산이 있어야 함과 한국인이 아님으로서의 부족함은 스스로가 채워가야 함은 그때 내가 느꼈던 첫 감수이다.
(김경애 구술 송춘화 대필)
첫댓글 참 많이 힘들었겠네요. ~~지난상처가 세월이 가면서 기억에서 빨리 지워지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