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소서 성령님!
찬미예수님! 불당동 성당 교형자매 여러분!
오늘 평신도 주일을 맞아 이 자리에 서게 됨을 무안히 죄송스럽고 떨리는 맘으로 서 있습니다. 저는 무엇하나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이지만, 지난 달 사목회에서 올 평신도 주일을 맞아 모든 것이 부족한 저에게 강론 준비를 하라기에 극구 사양하였으나 여러분의 권유와 본당 신부님의 협박(?)과 교도권 발동으로 이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저는 본당 선교분과장이라는 과분한 직책을 부여 받고 있습니다만, 신부님께서 선교에 관하여 말씀드리라는 지침을 받았으나 저의 가정도 제대로 성가정을 못 이루고 있는 이 사람이 무슨 선교의 말씀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저의 넋두리 같은 신앙고백을 말씀드리고자 하오니 넓으신 마음으로 경청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1986년 12월 20일 서울 중림동 성당(약현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당시 저의 집안에 우환이 있었는데 아버님께서 환갑이시던 해 4월 말경 폐암 말기라는 극형 선고를 받으시고 3개월가량 투병생활을 하시다가 8월 8일 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저의 아버님은 워낙 건강하신 분이셔서 병원을 다니신 적이 별로 없으셨습니다. 젊은 시절에 누가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면 오히려 자신의 주먹을 믿으라며 극구 부인하시며 자신감을 보이시던 분이 막상 죽음의 문턱에 이르자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심정으로 당시 아래층에 사시는 아주머니께서 개신교 신자였는데 자기교회 목사님이 안수를 잘해서 자기교회로 나오면 어떠한 병도 완쾌된다는 말에 불편한 몸을 이끌고 그 교회의 기도원에 다녀오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적은 일어날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아버님께서는 종교의 필요성을 느끼신 것 같습니다.그 때 저희 외가는 이미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의 부친은 굉장한 효자였다 하십니다. 저희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 시제는 못하였지만 3년 동안 아침이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할머니 산소에 문안 인사드리고 하루 일과를 시작하셨다 합니다.
그런 분이기에 저의 큰집, 저의 아버지 형제들은 이북에서 피난 내려오신 분들이라 넉넉하지 못한 살림들이었습니다. 저의 집도 아들만 다섯이어서 생활비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지금은 가족도 많지 않고 먹을 것도 풍족하기에 식비가 생활비에 큰 부분을 차지하지는 않지만 그 당시에는 생활의 전부가 식대로 충당되던 때지 않았습니까?
그런 어려운 살림에도 부모님은 제사 젯물 만큼은 당신께서 준비하셨습니다. 어쩌면 조상님 모시는 것이 저의 부친의 신앙이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 효심 깊으신 분이 처갓집은 등한시 하셨겠습니까?
저의 외조부모님은 대세로 돌아 가셨기에 외갓집 제사에 다녀와서는 언제나 얹잖아 하셨습니다. 제사상에 지방도 신주도 모시지 않고 지내는 것이 이상하게 보이신다며 못마땅해 하셨습니다. 그렇게 완고하시던 분이 대세를 받고 토마스로 새로 태어나신 날 굉장히 기쁘고 즐거워하셨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면서 이제 죽으면 천주교 공원묘지에 묻히게 되었다고 대단히 기뻐하셨습니다.
투병 중에 저희 부친은 날이 더워지면서 욕창으로 엄청난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아시겠지만 욕창이란 살이 썩어가는 것 아닙니까? 얼마나 고통스러워겠습니까? 그 때 아버님 연세는 지금 한창 나이인 환갑이셨습니다. 저는 그것이 너무 억울합니다. 한 평생 고생만 하셨던 아버지 이제 편안히 사시는 일만 남았는데 돌아가시다니 저는 너무도 억울해서 어느 날 저녁에는 술 한 잔하고 돌아와 아버지 앞에서 펑펑 울었습니다.
그런 저를 보고 부친께서 오히려 위로해 주셨습니다. “인간은 언젠가는 다 죽기 마련이다 너무 슬퍼하지 말아라 나는 조금 일찍 갈 뿐이다.” 하시며 당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계셨습니다.
한번은 원자력 병원에서 항암치료차 입원하시어 문병을 갔었는데 내일은 주일이니 꼭 성당에 가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 때 예비자 교리를 받고 있을 때였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생각하니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이었습니다.
부친께선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조상님 모시기를 신앙으로 알고 사셨던 분이셨는데 “너희는 내가 죽으면 내 제사상을 안차려주어도 좋으니 하느님, 예수님 믿으며 이 세상에서 잘 살다가 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친께서 돌아가시기 이틀 전에 낮에 잠깐 눈을 붙이셨는데 환상을 보셨는지 꿈을 꾸셨는지 돌아가신 저의 할머니께서 어린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저의 부친을 기다리고 계신다는 겁니다. 저의 부친께서 “어머니! 저는 그쪽으로 가지 않습니다.”라고 하니 할머니의 얼굴색이 확 달라지더랍니다. 후에 그 여자아이가 누구냐며 어머니께 물어보니 아주 어려서 죽은 저의 고모라는 겁니다.
이렇게 저승길이 다른다는 것도 일러 주신 것 같습니다. 저는 저의 아버지의 고통속의 투병생활과 삶의 마지막 골짜기에서 하느님의 존재하심과 은총을 많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해 12월 20일 아오스딩 이란 새로운 이름으로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후로 한 10여년은 아버지의 말씀이 유언이라 생각하며 미사참석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그 때 저의 직장은 12시간 교대근무를 하던 때라 아주 힘든 시기였습니다. 살아생존 못다한 효도 미사 참례를 해서라도 아버지 영혼이 하느님 나라에 가시도록 하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어쩌면 힘들었어도 그 시기가 저의 신앙심을 키워주는 시절이 아니었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저는 직장을 서울에서 천안으로 옮기면서 한 2년 가까이 냉담자 생활도 해 보았습니다. 어쩌다 주일 미사 몇 번 빠지다 보니 그저 자연스럽게 쉬게 되더군요, 그 때 주일날 성당에 안갈 때 육체적으로는 편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하느님께 죄송한 생각이 들더군요.
아마도 지금 우리 주위에 쉬는 교우들의 심정도 저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여겨집니다. 마음 한 구석은 언제나 찝찝하고 죄송함을 느낄 겁니다.
그러던 차에 대전교구 87차 꾸르실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1997년 1월에 받았으니 이제 10년이 되어가는군요, 저는 꾸르실료를 통하여 많은 회개와 반성과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중에 하느님께 약속드린 것은 주 2회 이상 평일 미사에 참석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서약은 주일 미사에 참석하기도 급급했던 제 신앙생활을 확 바꾸어 주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 생활 중심이 세속보다는 하느님 중심이 되더군요.
주 2회 참석하려면 수요일 저녁미사, 토요일 새벽미사를 해야 하는데 지금도 저는 제조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만 제조업은 주로 수요일은 잔업이 없어 일찍 끝납니다. 일찍 끝나면 주로 남자들이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로 음주문화가 아닙니까? 수요일에 저녁 미사 후 레지오를 하니까 자연 음주 문화와는 거리감이 생기죠.
또 직장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요일이 무슨 요일입니까? 지금은 주 5일근무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금요일 저녁이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하느님께 평일 미사 2회 이상 참여하겠다고 서약했으니 토요일 새벽 미사를 참석해야겠지요! 해서 자연이 세속적인 모임은 점점 등한시 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성당 중심의 생활이 되면서 제 생활도 건전하게 바뀌게 되었습니다.
저는 또 그때부터 일상적인 주일 신자에서 레지오 마리애에 입단하면서부터 소극적인 삶에서 적극적인 신앙생활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레지오 마리애라는 단체는 성모님을 총사령관으로 모시고 단원들의 聖化(성화)를 통하여 성모님의 군사로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단체입니다. 이 단체에 가입하면 처음은 어렵고 서먹서먹하지만 좀 지나면 부모형제와 같이 동고동락을 할 수 있는 친교단체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도 레지오 마리애에 입단하지 못한 형제자매님께 입단을 적극 권유합니다.
레지오 주 회합 시에는 활동보고 시간이 있습니다. 주로 이웃사랑, 봉사활동, 성당봉사, 평일미사참례, 묵주기도 이러한 것을 보고하게 되는데 처음에는 마음의 부담이 되지만 우리가 마치 자동차 운전 처음 배우고 도로에 나설 때 무섭다가 세월이 흘러 능숙해지면 초보운전 때를 생각하면 멋적은 웃음이 나듯이 레지오 마리아 단원 생활도 그러합니다. 오히려 하루라도 기도 생활을 안하면 무언가 빠뜨린 것 같고 무엇이 허전한 감을 느끼게 됩니다.
한참이나 함량미달인 제가 우리 본당에서 선교분과장, 꾸리아단장 등 몇 가지 직책을 맞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제 능력이 아님을 이 자리에서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자비의 은총입니다.
모든 것이 부족한 제가 이 말씀을 드린다고 어떻게 생각하실 줄 모르겠으나 저는 제 아들과 딸에게 줄 것이 딱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저는 두뇌가 명석한 편이 못되어 좋은 머리를 줄 수도 없고 재산이 많아 재산을 물려 줄 형편도 못됩니다. 하지만 꼭 물려주고 싶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드리는 사랑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저의 아이들이 잘못하면 다른 것은 용서해 주어도 주일 미사 만큼은 빠져서는 안 됨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저는 저의 아이들 고등학교 3학년 때도 주일 미사만큼은 꼭 지키도록 해 왔습니다.
제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제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어떤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알면 이 세상 어떤 어려움이나 난관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고 험한 세상 헤쳐 나갈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제가 아까 서두에 아버님 말씀을 드렸지만 저는 창세기 성경공부를 하면서 저의 아버님(토마스)가 어쩜 저의 집안의 아브라함이라 생각하고 묵상도 해 보았습니다. 그 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백성으로 인도되었음을 감사드리며 살고 있습니다.
제가 2년 전 불당동 성당에 오기 전엔 일주일에 2~3일 정도 성당에 다녔지만 여기서는 4~5일 정도는 다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만큼 제가 한가하냐구요?
결코 그렇지는 않습니다. 직장에서 제가 하는 일은 많습니다. 잠시라도 자리를 비우면 제자리에 서류가 넘치고 있습니다.
성당에 오는 횟수가 많을수록 마음의 여유가 더 생기고 시간도 더 쪼개서 쓰고 있습니다. 또한 회사의 사정도 더 좋아짐을 느끼고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지극한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신앙의 중심은 믿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께서도 복음 말씀 중에서 종을 고쳐 달라는 백인대장의 믿음(루카7.1~10, 마태 8.5~13, 요한4.43~53) 청 하여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루카 11.9~13, 마태 7.7~11) 사도들이 주님께 믿음을 더 주십사하자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 무화가 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거라”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17.5~6, 마태17.20.21.21 마르 11.22~23) 이렇게 끝임 없는 믿음을 강조하셨습니다.
우리 성당이나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한 것도 역시 상호간의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환자가 의사와의 믿음이 없다면 그가 건강을 되찾을 수 있겠습니까?
부부간의 믿음이 없다면 원만한 가정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우리 불당동 신자와 본당 신부님과 믿음이 없다면 성당 설립 2년 만에 새로운 성전을 짓는 대 역사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저는 원래 내성적이고 소극적이며 자신감이 결여된 사람이었습니다. 때문에 어디를 가든지 무슨 일을 할라치면 모든 것을 예수님과 성모님께 의지하며 주모경부터 시작합니다.
주님께서는 부족한 저에게 함께하시어 채워주시리라 믿으며 살아갑니다. 또 그것이 잘 되었건 못 되었건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라 하시는 데로 따르리라 다짐합니다.
지금 우리 성당은 모든 것이 풍요롭지는 못해서 작지만 서로 서로 사랑과 격려로 살고 있지 않습니까?
행복의 척도는 아파트 평수나 성당의 크고 작음이 아닐 것입니다. 내 마음 속에 사랑자체이신 하느님이 함께 하시고 계시냐? 안계시나? 가 더 소중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부족한 이 죄인의 횡설 수설을 잘 들어 주신 교형자매님께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께 항상 가득하시길 간구 드립니다.
- 아 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