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정 심(正心)
신이 살피건대, 윗 두 장(章)의 공부는 정심(正心) 아닌 것이 없으나, 각각 주장하는 바가 있으므로, 따로 정심을 주로 한 선현의 말씀〔前訓〕을 편집하여 함양과 성찰의 뜻을 상세히 논하였습니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경(敬)은 성문(聖門)의 제일의(第一義)이므로 철두철미하게 하여야지 간단(間斷)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글의 대요는 경(敬)을 주로 삼았습니다. (제 3 장의 수렴(收斂)은 경의 처음이요, 이 장은 경의 끝입니다.) ◆ 함양(涵養)에 대한 말씀 맹자(孟子)는 말하기를, "그 마음을 간직하여〔存〕그 성(性)을 기르는〔養〕것은 하늘을 섬기〔事〕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맹자)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존(存)은 잡고 놓지 않는 것을 말한 것이요, 기른다〔養〕는 것은 순하여 해(害)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며, 섬긴다〔事〕는 것은 봉승(奉承)하여 어기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심성(心性)은 하늘이 나에게 준 것인데, 존양(存養)하지 못하여 이를 잃어버린다면, 하늘을 섬기는 소이가 아니다." 하였습니다.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사람에게는 다만 하나의 천리(天理)가 있는 것인데, 만일 보존하여 얻지 못한다면 다시 무슨 사람이 되겠느냐."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만약 존양(存養)할 수 없다면 다만 말뿐인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살피건대, 맹자(孟子)의 이른바 존양은 동(動)과 정(靜)을 통관하여 말한 것으로서, 즉 성의와 정심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선현들이 정(靜)한 때의 공부를 논할 적에는 흔히 존양과 함양을 말하였으므로, 그 절요(切要)한말을 가려내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함양하면 곧 청명(淸明)하고 고원(高遠)한 데에 도달한다."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희(喜)·노(怒)·애(愛)·락(樂)을 하기 전에 동(動)이라고 하는 것이 옳습니까, 정(靜)이라고 하는 것이 옳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정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정한 가운데 목적하는 것이 있어야 비로소 얻게 되는 것이니, 여기가 바로 어려운 곳이다. 배우는 사람은 먼저 공경을 이해하는 것만 같지 못한 것인데, 능히 공경하면 스스로 이를 알 수 있다."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정좌(靜坐)할 때에 물(物)이 앞을 지나가면 보입니까, 안보입니까." 하니, 답하기를, "일이 어떠한가를 보아야 한다. 만약 큰 일이라면, 가령 제사(祭祀)때와 같이 구슬〔旒〕로 눈 앞을 가리우고, 솜〔〕으로 귀〔耳〕를 막았다면, 모든 물이 앞을 지나가도 보이지 아니하고 들리지 아니할 것이요. 만약 일이 없을 때라면, 눈으로 보고, 귀로는 들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소병(蘇昞)이 "희·노·애·락이 발현하기 전에 중(中)을 구하면 됩니까." 물으니, 대답하기를, "옳지 않다. 이미 희·노·애·락이 미발(未發)하기 전에 구한다고 하면, 바로 이는 생각한 것이니, 이미 생각한 것은 바로 이발(已發)이다. 이미 발하였으면 화(和)라 이르며, 중(中)이라 이르지 못한다. 희·노·애·락이 미발할 때에 존양을 한다고 말하는 것은 옳으나, 만약 희·노·애·락이 이발하기 전에 중을 구한다는 말은 옳지 않다." 하였습니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정자(程子)의 '조금이라도 생각했다〔才思〕하면 곧 이미 발한 것〔已發〕이라'고 한 일구(一句)는 자사(子思)가 말한 이외의 뜻을 발명한 것이다. 이는 대개 희·노·애·락의 발현을 기다림이 없어도, 다만 생각하는 바가 있으면, 이것은 이발인 것임을 말한 것이다. 이 뜻은 정미(精微)하여 미발의 경계에 대해 충분히 다하였으니, 여기서 더할 수 없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보지도 않고 듣지고 않을 때가 바로 희·노·애·락의 미발처이니, 항상 이 마음을 제기(提起)하여 여기서 미연에 방지하여야 한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계신(戒愼)·공구(恐懼)는 너무 중하게 여길 것은 없고, 다만 이를 수습(收拾)하여 나가면 곧 여기에 있는 것인데, 이것은 이천(伊川)의 이른바 공경이다." 하였습니다. ○서산 진씨(西山眞氏)는 말하기를, "계신·공구는 다만 사물이 형성되지 않았을 때에, 항상 지경(持敬)으로 혼매(昏昧)케 하지 않을 따름이다. 생각이 형성되지 않아서 지각(知覺)이 몽매(蒙昧)하지 않으면, 성(性)의 체(體)는 스스로 가릴 수 없는 것이니, 정자(程子)의 이른바 '정(靜)한 가운데에 물(物)이 있다'는 것을 배우는 사람들이 깊이 음미하여 실천해 보면, 마땅히 스스로 볼수 있을 것이며, 오로지 말로써만 구해서는 안된다." 하였습니다. 신이 살피건대, 미발할 때에는 마음이 적연(寂然)하여 진실로 털끝만한 생각도 없지마는, 다만 적연한 가운데서도 지각이 불매(不昧)하여, 마치 충막무짐(沖漠無朕) 하지마는, 만상(萬象)이 삼연(森然)하게 이미 갖추어져 있음과 같습니다. 이 경지는 극히 이해하기 어렵지마는, 이 마음을 공경으로 지키어 함양이 오래 쌓이면, 스스로 마땅히 힘을 얻게 됩니다. 이른바 '공경으로 함양한다'는 것은, 다른 방법이 아니라 다만 정적(靜寂)하여 염려가 생기지 않게 하고 성성(惺惺)하여 조금도 혼매(昏昧)하지 않게 할 뿐입니다. ○어떤 사람이, "미발할 때에도 견문(見聞)이 있는가." 묻기에, 신은 대답하기를, "만약 물(物)을 보기도 하고 소리를 듣기도 할 때에 염려가 따라 발현되면, 이는 진실로 이발에 속한 것이요, 만약 물이 지나가는 것을 눈으로 보기만 하고 이것을 보는 마음이 일지 않았거나, 귀에 지나는 것을 듣기만 하고 이것을 듣는 마음이 일지 않았거나, 비록 견문이 있더라도 사유(思惟)를 하지 않았다면, 곧 그것이 미발이 되는데 방해 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눈으로는 모름지기 볼 것이요, 귀로는 모름지기 들을 것이다.'하였고,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만약 반드시 보고 듣는 것이 없는 것을 미발처라고 한다면, 다만 일종의 의식(意識)이 혼매한 사람이 수면(睡眠)이 부족할 때에, 사람에게 경각(驚覺)한 바 되면, 잠시 동안 주위(周圍)를 알지 못하는 시각(時刻)에 이런 기상(氣象)이 있는 것이다. 성현의 마음은 담연(湛然)하여 못과 같이 깊고 고요하며〔淵靜〕총명이 통철(洞徹)하므로, 결코 이와 같지 않다.'하였다. 이것으로 보면, 미발시에도 견문이 있다." 하였습니다. ○또 "보통사람〔商人〕의 마음이, 진실로 미발한 때가 있는데, 그 중체(中體)도 성현의 미발과 분별이 없는가."묻기에, 신은 대답하기를, "보통 사람은 함양과 성찰의 공부가 없으므로, 그 마음이 어둡지 않으면 어지러워져서 중체가 서지 않지마는, 다행히 잠시 동안이라도 혼란(昏亂)하지 않게 되면 그 미발의 중(中)은 성현과 분별이 없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혹시 방자하여지기도 하고, 요란하여지기도 하여, 도로 그 본체를 잃게 되니, 삽시간의 중(中)으로 어찌 온종일의 혼란을 구하여 큰 근본을 세울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또, "연평(延平) 선생은 정(靜)한 가운데서 희·노·애·락이 미발의 중(中)이라는 것을 본다고 하였는데, 미발은 어떤 기상(氣象)이 되는 것인가. 주자(朱子)는, '이선생(李先生)은 정(靜)한 가운데서 큰 근본을 체인(體認)하였다.'하였는데, 이 설은 어떤가."묻기에, 신은 대답하기를, "조금이라도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바로 이발이므로, 이미 체인이라고 하였으면 성찰의 공부요, 미발시의 기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주자(朱子)는 만년(晩年) 정론(定論)에 체인자(體認字)의 글자를 중하게 놓았다 하니, 이것을 살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학자가 정좌(靜坐) 하고 있을 때에 이 공부를 하여, 미발시의 기상을 가만가만히 살펴보면, 학문에 나아가는 것과 마음을 기를 적에 반드시 유익할 것이니, 이는 또한 하나의 방법이다." 하였습니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미발(未發) 전(前)은 찾을 수 없고, 이미 깨달은 뒤에는 알맞게 갈라 부쳐서 안배(安排)하는 것을 용납되지 못한다. 그러나 평시에 장경(莊敬)으로써 함양하는 공부가 지극하여, 인욕(人欲)의 사사로운 것으로 어지럽히지 않는다면, 그 미발에는 밝은 거울이나 흔들리지 않는 물과 같고, 그 발하는 데도 중절(中節)하지 않은 것이 없다. 이것은 나날이 쓰는 본령(本領)의 공부인 것이니, 일에 따라 성찰하고 물에 나아가 미루어 밝히는 데도 반드시 이것을 근본으로 삼는다. 종래의 사색(思索)하고 강론하는 것은 단지 마음이 이발한 것이며, 일용의 공부 또한 일의 본말 시종〔端倪〕을 살피고 인식함으로써, 최초의 입각점〔下手處〕으로 삼았다. 이러므로 평시에 함양하는 한 토막의 공부가 결여되어, 사람의 가슴 속을 들떠, 심잠순일(深潛純一)한 맛이 없게 하고 발하여 말하고 행동하는 사이에도 항상 급박하고 들뜬 느낌을 나타내어서 다시 마음에 화락하고 온화〔雍容〕하며 심후(深厚)한 기풍이 없다. 대개 소견이 한 번 어긋나면 그 해로움이 이와 같이 되므로, 살피지 않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 ◆ 다음은 성찰(省察)에 대한 말씀 ○성(誠)은 무위(無爲)이요, 기(幾)는 선악(善惡)이다. (주자(周子) 통서(通書))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진리는 자연스러운 것인데 무엇을 하는 것이 있겠는가. 미발시입니다. 기(幾)라는 것은 움직임의 미미한 것이니, 선악의 분별이 연유하는〔由〕것이다." 하였습니다. ○조치도(趙致道)는 말하기를, "이것은 사람의 마음에서 미발의 체(體)를 밝히고, 이발의 단서(端緖)를 가리킨 것이다. 대개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물이 맹동(萌動)하는 미미한 것에서 살펴 나가, 결단하고 선택하여, 거취(去取)할 바를 알아서 본심의 체를 잃지 않게 하고자 한 것이다. 선과 악은 비록 상대되었지만, 마땅히 손〔賓〕과 주인〔主〕을 갈라야 하며, 천리와 인욕이 비록 분파(分派)되었지만 본 줄기〔宗〕와 곁 가지〔孼〕를 살펴야 한다. 정성이 동(動)하여 선(善)으로 나가는 것은, 나무가 뿌리로부터 줄기로 <통하고> 줄기로부터 잎〔末〕으로 <통하여> 상하(上下)로 서로 통달하는 것처럼, 천리의 유행은 마음의 근본〔本主〕이요, 성의 정통을 이은 본 줄기〔正宗〕인 것이다. 혹시 곁가지가 잘되고 옆으로 빼어난 것이 혹시 사마귀가 기생(寄生)하는 것과 같다면 이것이 비록 정성이 동이라도 사욕의 유행이기 때문에, 이른바 악인 것이니 마음의 고유한 것이 아니라, 이는 대개 손〔賓〕으로서 의탁하는 것이며 정성의 본 줄기가 아니라, 이는 대개 곁 가지인 것이다. 실로 일찍이 변별(辨別)하지 않거나 세밀히 가려내지 않는다면, 손〔客〕이 주인〔主〕을 타〔乘〕고 곁 가지〔庶子〕가 본 줄기〔宗子〕를 대신하게 되는 것이다. 배우는 사람은 사물이 맹동하는 기미의 사이에 그 발하는 바 향배(向背)를 살펴본다면, 곧게 나가는 것은 천리(天理)가 되고, 곁으로 나가는 것은 인욕(人欲)이 되는 것이니, 곧게 나가는 것은 잘 인도하고, 옆으로 나가는 것은 막고 끊어야 할 것이다. 어러한 공력이 이미 지극하면 마음이 발하는 것은 자연히 한길〔一途〕에서 나오고 천명(天命)을 보전할 수가 있다." 하였습니다. ○범양 장씨(范陽張氏)는 말하기를, "한 생각〔一念〕이 선(善)하면 하늘의 신, 땅의 신, 상서로운 바람, 화평한 기운이 모두 여기에 있고, 한 생각이 약하면 곧 요망한 별·염병의 악귀·흉년·악질의 전염병이 모두 여기에 있기 때문에, 군자는 혼자 있을 때를 삼가한다." 하였습니다. 아무리 성(聖)이라도 생각치 아니하면 광(狂)이 되고, 아무리 광(狂)이라도 잘 생각하면 성이 된다. (주서(周書) 다방(多方)) 채씨(蔡氏)는 말하기를, "성(聖)은 본래부터 하기 어려운 것이니, 광(狂)이라도 능히 생각하면 성이 되는 공부에 대해, 그 향하는 곳을 알 것이다. 성은 본래부터 이른바 망념(罔念)이 없지만, 조금이라도 어긋난 생각이 있으면, 비록 광에는 이르지 않았더라도 광이 되는 이치가 또한 거기에 있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공자(孔子)는 말하기를, "잡으면〔操〕있고 놓으면〔舍〕없으며, 나가고 들어오는 데 때가 없어서 향할 곳을 알지 못하는 것은 오직 마음을 두고 말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맹자(孟子))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마음이란 잡으면 여기에 있고 놓으면 잃어버리고 그 나가고 들어가는데, 정(定)한 때가 없고, 정한 곳도 없어 위태롭게 움직이고 안존하기가 어려움이 이와 같음을 말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출(出)과 입(入)의 두 글자는 선도 있고 악도 있기 때문에, 다 놓아서 없는 소치(所致)라고 할 수 없다. 이것은 바로 마음의 체(體)·용(用)을 가리켜, 그 두루 흘러 변화하여 신명의 예측할 수 없는 묘(妙)를 말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어떤 이가> "불자(佛者)에는 관심(觀心)의 설(說)이 있다는데, 그렇습니까."물으니, 대답하기를, "마음은 몸의 주(主)가 되는 것으로서 하나이지 둘은 아닌 것이다. 이제 다시 어떤 물체가 있어서 마음을 관조한다면, 이것은 이 마음 외에 다시 한 마음이 있어서, 이 마음을 주관(主管)하는 것이 되므로, 이 말은 틀린다." 하였습니다. 묻기를, "'아직 발하기 전은 다만 공경으로써 지양(持養)하여야 하고 이미 발한 뒤에는 마땅히 공경으로써 살펴야 하는 것이나, 이미 발한 정(情)은 마음의 용(用)이어서, 이것을 심찰(審察)하면 마음으로써 마음을 보는 〔以心觀心〕병통을 면치 못한다.'어떠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이미 발한 곳을 마음의 본체의 권도(權度 : 권(權)은 저울, 도(度)는 자(尺))로하여 마음의 발한 것을 살피는 것은 경중(輕重)·장단(長短)의 차이가 있을까 염려해서이다. 만약 발한 바의 마음으로 따로 마음의 본체를 구하려고 한다면 그럴 리가 없는 것이다. 대저 잡아 둔다는 것은, 저것으로서 이것을 잡아두는 것이 아니며, 놓아서 잃는다는 것은 저것으로서 이것을 놓아서 잃어버린다는 것은 아니다. 마음으로 스스로 잡으면 잃었던 것을 두게 되고, 놓고 잡지 않는다면 두었던 것도 잃을 뿐이다." 하였습니다.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사람은 꿈꾸는 사이에도 자기가 배운 바의 얕고 깊은 것을 점칠 수 있는데, 꿈에 전도(顚倒)하는 것은 심지(心志)가 정해 있지 아니하거나, 잡아 두는 것이 굳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였습니다. 묻기를, "사람의 마음에 걸려 있는 일이 착하다고 하더라도 꿈에 보는 것은 해로운가." 하니, 대답하기를 "착한 일이라 하더라도 마음은 역시 동(動)하는 것이다. 무릇 일에 조짐(兆朕)이 있어 꿈에 나타난 것은 해롭지 않으며, 이 밖에는 다 망동(妄動)이 된다." 하였습니다. ○장자(張子)는 말하기를 "마음이 맑을 때가 적고 어지로울 때가 많아 마음이 맑을 때는 보면 밝고 들으면 총명하여 사체(四體)가 얽매인〔束〕것이 없어서 자연히 공근(恭謹)하여 지고, 마음이 어지러울 때는 이와 반대인데 이와 같은 것은 무엇인가 하면 대개 마음을 가다듬는 것이 미숙(未熟)하여 쓸데없는 생각을 많이 하고, 상심(常心)이 적기 때문이요, 세 속의 마음을 없애지 않아서 실심(實心)이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였습니다. ○주자(朱子)가 주차(奏箚)69)에서 이르기를, "사대부(士大夫)로서 의견을 아뢰는 자들이, 폐하의 몸에다 근본을 두지 못하고, 어떤 사건의 지엽적인 문제만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니 신(臣)은 그 정치가 나오는 근본을 단정히 하고, 사물에 응하는 근원을 맑게하여 폐하의 정대하고 굉원(宏遠)하신 의도를 도와서, 천하의 일을 다 성지(聖志)의 바라시는 대로 되게 하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신이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한 생각이 싹트면 반드시 이것이 천리(天理)냐, 인욕(人欲)이냐를 삼가 살피시고, 만일 천리이면 공경으로써 충하시되 조금이라도 막히지 않게 하시며, 만일 인욕이라면 공경으로써 극복하시되 조금도 얽혀 막히지 않게 하시어, 언어와 동작으로부터 사람을 쓰고 일을 처리하는 데까지도 이것으로써 미루어 결단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옳다는 것을 아시면 행사하시는데 힘이 부족하지 않을까 두렵게 여기시고, 그것이 그르다는 것을 아시면 버리시는데 결단성이 없지 않을까 두려워 하신다면 성심(聖心)이 환하게 트여서 안팎이 서로 투철하여 털끝만한 사욕도 그 사이에 끼일 수 없게 되고, 천하의 일은 폐하의 원하시는 바의 뜻대로 아니 되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몸에 노여워하는〔〕바가 있으면 그 바른 것을 얻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른 것을 얻지 못하며, 좋아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른 것을 얻지 못하고, 걱정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른 것을 얻지 못한다. (「대학」하동)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몸에 있다고 하는 몸은 마땅히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 하였습니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분치(忿)는 노(怒)한다는 것이다. 대개 이 네 가지는 모두 마음의 작용이므로, 사람에게 없을 수 없다. 그러나 한 번 있어 살피지 못한다면, 욕(欲)이 움직여서 정이 이겨, 그 작용의 행하는 바가 바른 것을 잃지 않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 ○또, "이 네 가지는 다만 아무 것도 없는 곳으로부터 나와야 하며, 미리 마음 속에 있어서는 안된다. 만약 노여운 마음이 있으면 죄 있는 자를 때려 주되, 그러고 나면 마음이 바로 화평하면 이것은 그 마음을 두지 않은 것이다. 만약 마음이 늘 화평하지 못하면 이는 곧 마음을 둔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마음은 물(物)에 얽히면 즉시 동(動)하게 되고 물에 얽히는 까닭은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일이 오기 전에 기대하는 마음을 가진 것이요, <둘째는> 일이 이미 끝났는데도 아직 마음에 두고 잊지 못하는 것이며, <세째는> 바로 일에 응하여 편중(偏重)하는 뜻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물에 결박하여 매여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있는 것이므로 다른 일이 면전(面前)에 오게 되면, 곧 어긋나게 되는 것이니 어찌 마음의 바른 것을 얻겠는가. 성인의 마음은 형연(瑩然)히 허명(虛明)하여, 사물을 보면 크나 작으나 4방 8면으로 물에 따라 응하지 않는 것이 없고, 이 마음에는 처음부터 그런 일들이 있지 않다." 하였습니다. ○정자(程子)가 단주(州)에서 다리를 수리할 때, 긴 통나무 하나가 부족하여 널리 민간에 구하였다. 뒤에는 나들이 하다가도 숲의 좋은 나무를 보게 되면 꼭 계산하여 보는 마음이 일어났기 때문에 배우는 사람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마음에는 한 가지 일〔事〕도 있어서는 안된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자기 자신을 자책하는 마음이 없을 수 없으나, 가슴 속에 오래 두고 뉘우치는 것은 부당하다." 하였습니다. 마음이 있지 아니하면 보아도 보이지 아니하고, 들어도 들리지 아니하며,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마음이 있지 않다면 곧 주재하는 것이 없어서 그 몸을 검속할 수 없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이 마음의 신령한〔靈〕것은 한 몸의 주(主)가 되는 것이므로, 진실로 그 바른 것을 얻어서 이에 있지 아니함이 없다면, 귀·눈·코·입과 사지백해(四肢百骸)가 명령을 듣지 않는 것이 없이 그 일에 이바지하고, 동정(動靜)·어묵(語默)·출입(出入)·기거(起居)가 오직 내가 할 대로 하게 되어서 이(理)에 맞지 않는 것이 없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몸은 여기에 있으되 마음은 저기로 팔려서 혈육의 몸〔軀〕을 관섭(管攝)하는 것이 없어서, 얼굴을 들어 새를 바라보다가 머리를 돌려 다른 사람에게 딴 소리 하지 않는 일이 드물다." 하였습니다. ○또, "오늘의 배우는 자들이 놀라운 진보를 이루지 못하는 것은, 다만 마음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기억하건대, 내가 소년시(少年時)에 동안(同安)에서 살았는데, 밤에 종 소리가 울리면 한 번 울리는 소리가 끊어지기도 전에 이 마음은 이미 달리기 시작했다. 이로 인하여 경계하고 반성하였으며, 이 때문에 위학(爲學)은 모름지기 치지(致志)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였습니다.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마음은 반드시 내 몸 속〔腔子裏〕에 있어야 한다." 하였습니다. 강자(腔子)는 구각(軀殼)과 같은 말입니다. ○남헌 장씨(南軒張氏)는 말하기를, "마음이 있다는 것은 공경을 말한다." 하였습니다. (교봉 방씨(蛟峯方氏)는 말하기를, "위에서는 마음이 있는 것의 병을 말한 것이요, 여기서는 마음이 없는 것의 병을 말한 것이다. 신이 살피건대, 이는 비록 마음이 있고 마음이 없는 구별이 있지마는, 그 실상은 마음이 편벽되게 얽히는 것이 있으므로, 주재를 세울 수가 없어서 있지 않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즉 유심과 무심은 두 병이 아닙니다. ◆ 다음은 함양과 성찰에 대한 통론 ○이윤(伊尹)은 말하기를, "이〔〕하늘의 밝은 명령〔明命〕을 돌아본다〔顧〕." 하였습니다. (상서(商書) 태갑(太甲)) 주자(周子)는 말하기를, "고(顧)는 항상 눈〔目〕을 거기에 두는 것을 말한것이요, 시()는 이〔此〕와 같은 말이다. 하늘의 밝은 명(命)은 곧 하늘이 나에게 준 것으로서, 나의 덕(德)이 된 것이니, 항상 눈을 여기에 둔다면 밝지 않을 때가 없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다만 도리가 오래도록 눈 앞에 있는 것을 보며, 사물에 막히거나 꺼리끼지 않게 되어서, 한 사물도 있지 않으면 그 형상(形象)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쌍봉 요씨(雙峯饒氏)는 말하기를, "정존(靜存)과 동찰(動察)은 다 돌아보는 것이다. 고요할 때는 보이지 않는 데서도 삼가고 들리지 않는 데서도 두려워하며, 그 동함에는 물에 당하여 이치를 보고〔卽觀物理〕일에 따라 마땅한 것을 헤아리는 것, 이것을 항상 눈을 거기에 둔다고 한다." 하였습니다. ○호계수(胡季隨)는 말하기를. "아직 발하기 전은 다만 함양(涵養)할 것이요, 발하는 곳에서는 반드시 성찰(省察) 공부를 할 것이니, 함양하는 것이 익숙할수록 성찰도 더욱 정(精)하여 진다." 하였습니다. 불경(不敬)하지 말고〔母〕엄연(儼然)히 생각하듯 하며, 말〔辭〕이 편안하며 일정하면 백성을 편안하게 할 것이다. (예기(禮記)) 진씨(陳氏)는 말하기를, "무(無)는 금지하는 말이다." 하였습니다. ○범씨(范氏)는 말하기를, "경례(經禮) 삼백(三百)과 곡례(曲禮) 삼천(三千)을 한마디로 말하게 되면, 불경(不敬)한 것이 없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불경(不敬)하지 않으면 상제(上帝)라도 대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마음이 안정된 사람은 그 말이 편안하고 조용하며, 안정되지 못한 사람은 그 말이 가볍고 빠르다." 하였습니다. 이상의 네 가지는 경의(經意)를 해석한 것입니다. ○또 말하기를, "마음을 오로지 하나로 하는 것〔主一〕을 공경이라 하고, 잡념을 가지지 않는 것〔無適〕을 일(一)이라 한다." 하였습니다. (주일무적(主一無適)을 물으니,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다만 달려가지 않는 것인데, 예를 들면 지금의 세상 사람들이 한 일〔一事〕을 끝내기도 전에 또 다른 일을 하려고하여, 마음에 일일이 가려 낼 수 없을 만큼 많은 일의 갈피〔千頭萬緖〕를 갖고 있는 것과 같은데, 학문은 다만 전일(專一)하여야 한다." 하였습니다. ○설씨(薛氏)는 말하기를, "첫 걸음을 가면 마음이 첫 걸음에 있고, 두 걸음을 가면 마음도 두 걸음 위에 있는 것을 공경〔敬〕이라 한다. 만일 첫 걸음에 마음은 두세 걸음 밖에 있고, 두 걸음에 마음이 다섯 여섯 걸음 밖에 있으면 공경이 아니다. 따라서 글씨를 쓴다든가 처사(處事)하는 데서도 다 그렇지 않은 것이 없으니, 첫 글자를 쓰면 마음이 첫 글자에 있고, 첫 일을 할 때는 마음도 첫 일에 있어서, 일마다〔件件〕전일하면 바로 공경〔敬〕이다." 하였습니다.) ○각헌 채씨(覺軒蔡氏)는 말하기를, "주일(主一)이란 것은 동정(動靜)을 포괄한다. 일이 없을 때는 마음이 담연(湛然)하여 항상 존(存)하면 이것은 정할때 주일한 것이요, 일이 있을 때는 마음이 이 일에 응하여 다시 다른 일이 섞이지 않으면 이것은 동할 때 주일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일이 없을 때는 공경〔敬〕이 이면(裏面)에 있고, 마음 속을 이르는 것입니다. 일이 있을 때는 공경이 일 위에 있어서, 일이 있든 없든 나의 공경은 일찍이 간단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자(程子)는, '배움은 전일(專一)한데에 이르러야 좋다.'하였는데, 대개 전일하면 일이 있든지 없든지 모두 이와 같은 것이다." 하였습니다. ○정자는 말하기를, 정제(整齊)하고 엄숙(嚴肅)하면 마음이 곧 전일해지는 것인데 전일하면 그르거나 편벽된 것이 범(犯)하지 않는다. 엄위(嚴威)와 엄각(儼恪 : 공경하고 조심함)은 공경의 도가 아니지만, 공경에 이르려면 모름지기 이를 좇아 들어가야 한다." 하였습니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이천(伊川)의 정제 엄숙(整齊嚴肅)의 한 마디는 간절하고 지극한 공부를 사람에게 말하여 주었다." 하였습니다. ○상채 사씨(上蔡謝氏)는 말하기를, "공경은 항상 성성(惺惺)하는 법이다." 하였습니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성성(惺惺)이란 곧 마음이 혼매(昏昧)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공경을 저에 엄숙한 것으로 말한 것이 진실로 옳다. 그렇지만 마음이 만약 혼매하여 촉리(燭理)에 밝지 않다, 비록 억지로 위엄을 부린들 어찌 공경이 될 수 있겠는가.")하였습니다. ○화정 윤씨(和靖尹氏)는 말하기를," 공경이란 것은 그 마음을 거두어 들여서 일물(一物)도 용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하였습니다. (윤씨(尹氏)는 말하기를, 공경에는 형(形)과 영(影)이 없고, 다만 심신(心身)을 수렴하면 곧 주일(主一)인 것이다. 예컨대, 사람들이 신을 모신 사당〔神祠〕에 가서 경건한 자세를 가질 때에, 그 마음을 수렴하고 다시 털끝만한 잡념도 없이 하면, 그것이 주일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세 선생의 (정자(程子)와 사씨(謝氏)와 윤씨(尹氏)입니다.) 공경〔敬〕에 대한 말이 다른 것을 물었더니, 주자이 대답하기를, "비유하면 이 방〔室〕으로 사방에서 다 들어올 수 있지만, 만약 한 쪽으로 따라서 여기까지 들어왔다면, 나머지 세 쪽〔三方〕에서 들어오는 곳도 다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요자회(廖子晦)는 말하기를, "정자(程子)는, '주(主)가 있으면 실(實)하여진다.'하였고,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주가 있으면 실하게 되고, 외환(外患)이 들어 올 수 없다." 하였습니다.) 또, '주가 있으면 허(虛)하여진다.'고 하였는데,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주가 있으면 허하여진다고 한 것은 간사한 것이 들어갈 수 없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허(虛)와 실(實)의 두 설(說)은 비록 같지 않지만, 모두 공경을 위주(爲主)로하여 말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자회(子晦)의 말은 매우 좋다. 공경하면 곧 안으로 욕심이 싹트지 못하고, 밖으로 유혹이 들어오지 못하는 것이다. 안에서 욕심이 싹트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면 허(虛)요, 밖에서 유혹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면 실(實)로서 이것은 단지 동시적인 일이다." 하였습니다. (이상의 여덟 가지는 공경의 뜻을 논한 것입니다.) ○정자(程子)는, "예기(禮記) 표기(表記)의 '군자가 장중하고 공경하면 날로 강하고, 편안 하고 방자하면 날로 게으르다.'는 말을 가장 좋아했다. 대개 보통 사람의 정(情)은 기탄 없게 되면 날로 광탕(曠蕩)하여지고, 스스로 검속(檢束)하면 날로 규구(規矩)를 이룬다." 하였습니다. ○정자는 말하기를, "공경은 백사(百邪)를 이긴다." 하였습니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공경은 사람을 붙들어 주는 도리이다. 사람이 기탄없이 행동하고 몹시 게으를 때 공경하면, 바로 이 마음을 붙들어 주고 받쳐 주게 되는데, 항상 이와 같이 하면, 비록 방벽사치(放僻邪侈 : 아무 꺼리낌 없이 제 마음대로 분수에 넘친 치레만 함)하려는 의사가 조금 있더라도 스스로 물러나게 된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공경은 인욕(人欲)을 대적(對敵)하는 소이(所以)인 것이니, 사람이 항상 공경하면 천리(天理)가 스스로 밝아지고 인욕이 올라 오지 못하게 된다." 하였습니다. (이상의 네 가지는 공경이 인욕을 이기는 것을 논한 것입니다.) ○주자는 말하기를, "정(靜)한 가운데 사사로운 마음이 넘쳐 나오게 되는 것은 배우는 사람들의 통환(通患)이다. 마땅히 경(敬)을 위주로하여, 사사로운 뜻이 싹트는 것이 주로 어떠한 일인지를 깊이 살피고, 그 가장 심각한 곳에 나아가 무섭게 억누르는〔窒懲〕노력을 가하여, 오래 순숙(純熟 : 완전히 익음) 하여지면 스스로 그 효력을 볼 것이다." 하다가도, 또 곁에서 따로 한 소념(小念)이 생겨서 점차 널리 퍼져 가는 것이니 살피지 않으면 안된다." 하였습니다. ○묻기를, "평소 지경(持敬)하는 데는 정(靜)한 때가 가장 좋으나, 일에 임하면 염증이 나고 게을러진다든가. 일에 임하여 혹 힘을 쓰면 분요(紛擾)한 것을 깨닫는다든가. 그렇지 않으면 공경을 지니고 있을 때에 갑자기 생각에 끌려 가버리게 되니, 이 세 가지 것을 어떻게 이길 수 있겠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지금 세상의 사람들이 공경을 따로 하나의 일로 간주하기 때문에, 염증이나 권태를 느끼고 생각에 이끌려 가는 것이다. 공경은 다만 자기의 한 마음이 항상 성성(惺惺)한 것이요, 이것을 따로 어떤 일로 간주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선생이 묻기를, "백우(伯雨)는 어떻게 공부를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정좌(靜坐)를 배우고 생각을 억눌렀다."고 한다. 말하기를, "억눌러서는 안되고 다만 방퇴(放退)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방퇴(放退)는 다만 염려(念慮)에 끌려 함께 가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전혀 사려(思慮)가 없다는 것은 안되고, 단지 간사한 생각이 없을 뿐이다." 하였습니다. ○묻기를, "오로지 마음을 잡고 있다가 놓아버리면 문득 다시 해이하여 흩어지니 어찌하여야 되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그것은 그렇게 힘써 잡을 것은 아니다. 만약 힘써 잡으려 하면 또 한 개의 마음을 더하게 될 것이다. 그대가 만약 마음을 놓는 것이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정신을 일으키면 이것이 곧 공경〔敬〕공부인 것이다." 하였습니다. 묻기를, "고요히 정좌(靜坐)를 오래하고 있으면 <어느>한 생각이 발동되는 것을 면하지 못하니,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그 생각이 어떤 일을 하려는 것인지를 살펴야 한다. 만약 좋은 것이라면 마땅히 그대로 진행할 것이요, 혹시 일을 요량하는 데 투철하지 못하다면 더 생각을 해 볼 것이며, 만약 좋지 못한 것이라면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자신이 이와 같이 깨닫게 된다면 공경의 공부는 곧 그 속에 있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공경하는 마음이 있으면 몸 가짐이 자연히 수렴(收斂)되고 힘써 조절되기를 〔安排〕기다리지 않아도 온 몸이 저절로 안정되어진다. 만약 너무 힘써 몸을 조절하려 하면 오래하기가 어렵고 병통이 생긴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정연하게 수렴하면 너무나 힘쓰는데 빠지게 되고 조용히 마음을 놓으면 또 해이해져서 타락하게 되니, 이것이 배우는 자의 공통되는 근심이다. 그러나 정자(程子)가 일찍이 말하기를, '역시 반드시 이렇게 스스로 공부해 가면서 덕이 성하게 되면 자연히 이럭 저럭 하여도 그 정당한 것을 얻게 된다.'하였다. 지금은 역시 마땅히 정연하게 수렴하는데 힘쓰되, 다만 몸가짐을 너무 조절해서는 안 된다. 이는 곧 병통을 이룩하기 때문이다." 하였습니다. 위의 7조목은 병통을 살펴 다스리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장자(張子)는 말하기를, "정심(正心)의 처음은 마땅히 자기의 마음을 엄한 스승(嚴師)으로 삼아서 모든 동작(動作)을 하게 되면, 두려운 바를 알아야 한다. 이렇게 1·2년 동안 굳세게 지켜 가면 자연히 마음이 바르게 된다." 하였습니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공경이란 송연(然 : 황송하여 옹송그림)히 두려워하는 바가 있는 듯하다는 뜻인데, 항상 두려워하는 바가 있는 듯하게 되면 감히 자기의 마음을 속이지 못하게 되고 성(誠)에 나아갈 수 있다." 하였습니다. ○면재 황씨(勉齋黃氏)는 말하기를, "공경은 주일무적(主一無敵)을 말한다고 정자(程子)는 말하였으나, 선생(주자朱子를 가리킴)의 설은 또한 '공경은 오직 두려워하는 것이 거기 가까운 것'이라 하였으니, 대개 공경은 이 마음이 숙연(肅然)하여 두려워하는 바가 있는 것을 말한다. 두려워하면 마음이 하나〔一〕로 주재〔主〕된다. 가령 종묘(宗廟)에 들어가 군부(君父)를 뵈올 때는 스스로 잡념이 없게 되고, 한가하여 제 멋대로 행동할 때에는 생각이 어수선하고 혼란하여 하나로 주재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설은 서로 표리(表裏)가 되므로, 배우는 자가 체험해 보면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각헌 채씨(覺軒蔡氏)는 말하기를, "사람의 일심(一心)은 허령 지각(虛靈知覺)한 것이니, 항상 숙연(肅然)하여 어지럽지 않고, 형연(炯然)하여 어둡지 않으면 고요하여는 이(理)의 본체가 존재하고 감응하여는 이(理)의 작용이 행하여지지 않는 것이 없다. 다만 허령 지각이 능히 욕심에 움직이지 않을 수 없으므로, 곧 이 마음의 체용(體用)도 따라 어두워지고 어지러운 것이며, 이 때문에 공경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진실로 척연(然 : 두려워하는 모양)하고 송연(悚然)하여, 항상 귀신이나 부사(父師)가 위에 임한 듯이 하며, 아래로는 깊은 못이나 살얼음이 있는 듯이 할 수 있다면 허령 지각이 스스로 어둡거나 어지러운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공경의 뜻이 오직 두려워하는 바가 거기 가깝다는 것이다." 하옵니다. 이상 네 가지는 두려움을 가지고 공경〔敬〕의 뜻을 풀이한 것입니다. ○남헌 장씨(南軒張氏)는 말하기를, "이계수(李季修)가 묻되, '공경은 마땅히 힘써야 할 것이요 진실로 게을러서는 아니 되나, 해가 저 안식(安息)할 때에도 마땅히 때에 따라 힘 쓸 것이다.'하였는데, 나의 생각으로는, 해가 져서는 안식으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 공경인 것이니, 해가 져 안식하는 것이 게으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 가히 공경의 이치를 논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공경이 있지 않을 때가 없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대개 주야(晝夜)의 동정(動靜)에 마땅히 끊임이 없어야 할 것이니. 만약 밤이 되어 안식하는 것을 공경이 아니라고 한다면, 공경을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설씨(薛氏)는 말하기를, "'공경은 덕(德)이 모이는 것이라.'고 한 옛말이 있는데, 이 말은 아주 체득(體得)해야 할 말이다. 대개 도(道)의 묘한 것은 헤아릴수가 없고 정(定)한 바가 없으나, 오직 공경하면 능히 엉겨 모여서 이 이치가 항상 있게 된다. 마음이 공경하면 능히 엉겨 모여서 덕이 마음에 있게 되며, 용모〔貌〕를 공경히 하면 엉겨 모여서 능히 덕이 용모에 있게 되명, 귀·눈·입·코와 같은 종류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공경하지 않으면 마음이 방일(放逸)하여, 온 몸이 해이하게 이지러져서 비록 사람의 형체가 있다고 해도, 그 실상은 괴연(塊然 : 홀로 있는 모양)한 혈기의 몸뚱이일 뿐이요 만물〔物〕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敬)이란 한 글자가 곧 덕을 엉겨 모으는 근본이고, 천형진성(踐形盡性)하는 요령이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공경으로써 덕을 모은다는 말입니다. 군자는 공경〔敬〕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의리〔義〕로써 밖을 방정하게 하여 공경과 의리가 서게 되면 덕(德)이 고립되지 않는다. 역(易) 곤괘(坤卦) 문언(文言)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군자는 공경을 주로 하여 그 안을 곧게 하고 의리를 지켜서 그 밖을 방정하게 한다. 공경이 서면 안이 곧게 되고 의리가 나타나 밖이 방정하게 되는 것인데, 의리가 밖에 나타난다는 것은 밖에 있다는 것이 아니다. 공경과 의리가 서 있으면 그 덕이 성할 것이니, 덕이 고립되지 않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본령(本領)은 마땅히 공경을 위주로 삼고 또 집의(集義)의 공효를 얻어 이욕(利欲)이 가리는 것을 물리치면 공경에 더욱 도움이 되는 것이니, 다만 이 하나의 진작과 경각이 동정(動靜)을 관통(貫通)하는 것이다. 단지 일이 없을 때는 한결같이 지양(持養)하여야 하나, 일이 있으면 시비(是非)와 취사(取舍)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안을 곧게 하고 밖을 방정하게 하는 구별이 있게 되는 것이며, 동정으로 판연히 이물(二物)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였습니다.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존양(存養)을 익숙하게 하고 나서 태연하게 행해 나가면, 길이 나아갈 수 있다."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공경으로써 안을 곧게 하는 데만 힘쓰고, 밖을 방정하게 하는데는 힘쓰지 아니한다면 어떠합니까." 하니, 정자는 말하기를, "안〔中〕에 있으면 반드시 밖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오직 안이 곧지 않은 것을 걱정할 뿐이요, 안이 바르면 반드시 밖에도 방정하게 된다." 하였습니다. ○오봉 호씨(五峯胡氏)는 말하기를, "공경한다는 것은 의리를 밝게 하는 소이다." 하였습니다. ○묻기를, "공경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의리로써 밖을 방정하게 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니,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말로는 이렇게 하였는데, 모름지기 스스로가 공부를 해 가야 이러한 것을 볼 수 있다. 공경으로써 안을 곧게 한다는 것〔敬以直內〕은 조금도 사사로운 뜻이 없고 가슴 속이 통연(洞然)하며, 위로도 통하고 아래로도 통하는 표리(表裏)가 한결같은 것이요, 의리로써 밖을 방정히 한다는 것〔義以方外〕은 바른 곳을 보면 이렇게 결정하고, 바르지 않은 것을 보면 그렇지 않게 결정하여, 절연(截然 : 칼로 끊은 듯이 확연한 모양)히 방정하게 하여서, 반드시 스스로 공부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성문(聖門)에서 배운 사람들은 한 귀(句)를 물을 때에, 성인이 한 귀로 답해 주면 곧 이해하여 실천에 옮겼다. 지금은 말만 많이 하고 실행하려고는 하지 않지만, 만약 실지로 공부를 해보려면, 단지 경이직내(敬以直內)와 의이방외(義以方外)의 여덟 자(字)를, 일생동안 다 사용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공경〔敬〕이 게으른 것을 이기는 이는 길(吉)하고 게으른 것이 공경을 이기는 이는 멸(滅)하며, 의리가 욕심을 이기는 이는 순(順)하고 욕심이 의리를 이기는 이는 흉(凶)하다. 대대례(大戴禮)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공경하면 설 수 있고, 게으르면 쓰러지는 것이다. 이(理)로서 일에 따르는 것은 의리요, 이로서 일에 따르지 아니하는 것은 욕심이다. 공경과 의리는 체용(體用)이다." 하였습니다. ○진씨(眞氏)는 말하기를, "공경하면 만가지 선(善)이 함께 서고, 게으르면 만가지 선이 함께 폐해진다. 의로우〔義〕면 이(理)가 주재되고 욕심스러우면 물이 주재하여, 길흉 존망(吉凶存亡)이 나누어지게 되는 것인데, 옛 성인들은 이미 이것을 조심하였다." 하였습니다. (차단(此段)의 말은 단서(丹書)70)에서 나온 것입니다. 단서에는 황제(黃帝)·전제(帝) 도(道)가 실린 까닭으로 옛〔上古〕성인들이라 한 것입니다.)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공경과 의리를 겸비〔夾持〕하면, 이것으로부터 곧 천덕(天德)에 상달(上達)한다." 하였습니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협지(夾持)의 두 자(字)를 놓은 것은 매우 좋다. 경(敬)은 안〔中〕에서 주재하고, 의리는 밖에서 막아, 둘이 서로 겸비〔夾持〕하여, 놓아 두려고 해도 되지 않아 조금도 주실(走失)이 있게 하지 말아야 한다. 이와 같이 하면, 아래에서는 물욕(物欲)에 물들지 않고, 다만 천덕에 상달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살피건대, 공경〔敬〕은 체(體)요, 의리〔義〕는 용(用)이라 하여 비록 내외(內外)로 나눈다 하더라도 그 실은 공경이 의리를 겸비하고 있습니다. 대개 안을 곧게 하는 경은 공경으로서 존심(存心)하는 것이요, 밖을 방정하게 한다는 의리는 공경으로써 일에 응하는 것입니다. 주자의 경재잠(敬齋箴)에 발명이 친절하므로 삼가 다음에 기록합니다. 잠(箴)에 이르기를, "의관(衣冠)을 바르게 하고, 높이 바라보며, 마음을 정(靜)하게 하여, 상제(上帝)에 대월(對越)하라. (이것은 정(靜)에 어김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발의 움직임은 무겁게 해야 하고, 손의 움직임은 공순해야 하며, 땅을 가려서 밟고 개미둑〔蟻封〕은 돌아가라. (의봉(蟻封)은 개미둑이요, 협소한 땅도 능히 돌아서 간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동(動)에 어기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문(門)을 나갈 적에는 손님을 보는 듯하며, 일하기를 제사 받들 듯이 하라. 전전긍긍(戰戰兢兢)하여 감히 혹 쉽게 하지 말라. (이것은 겉〔表〕의 바른 것을 말합니다.) 입을 지키기는 병(甁)같이 하고 뜻을 막기는 성(城)같이 하라. 조심하고 조심하여 가볍게 하지 말라. (이것은 속〔裏〕의 바른 것을 말합니다.) 동으로 간다 하고는 서로 가지말 것이며, 남으로 간다 하고 북으로 가지 말라. 일을 당하면 간직하여 다른 데로 가지말라. (이것은 마음의 바른 것이 일에 미치는 것을 말합니다.) 두 가지로써 마음을 이(貳)로 하지말 것이며, 세가지로써 마음을 셋으로 하지 말 것이며 오직 마음을 전일하게 하여 만변(萬變)을 관찰하라. (이것은 일은 주일(主一)하여 마음에 근본함을 말합니다.) 여기에 종사(從事)하는 것을 지경(持敬)이라 하는데, 동정(動靜)에 어기지 않게 하며 표리(表裏)를 서로 바르게 하라. 이것은 윗 글을 다 맺는 것입니다. 잠시라도 틈이 있으면, 사욕이 만갈래로 일어나서, 불을 놓지 않아도 뜨거우며, 얼음이 얼지 않아도 차진다. (수유(須臾)는 때를 말합니다. 이것은 마음이 무적(無適)하지 못하는 병통을 말합니다.) 조금〔毫釐〕이라도 어긋나는 것이 있게되면, 천지(天地)의 위치가 바뀌어, 삼강(三綱)이 이미 문란하게 될 것이고, 구법(九法)71)도 무너질 것이다. (호리(毫釐)는 일을 말합니다. 이것은 일의 주일(主一)하지 못하는 병통을 말합니다.) 아아, 너희들은 생각해야 하고 공경해야 할 것이다. 묵경(墨卿)에게 이 경계를 맡겨서 감히 영대(靈臺 : 마음)에 고(告)한다." 하였습니다. 이 일편(一篇)은 총괄하여 맺는 것입니다. ○서산 진씨(西山眞氏)는 말하기를, "공경의 뜻은 여기에 이르러 더 남은 것이 없으니, 성학(聖學)에 뜻을 둔 이는 마땅히 익히며 반복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주자(朱子)의 집 양쪽에는 좁은 방이 두 개가 있었는데, 한가한 날은 그 안에서 묵좌(默坐)하여 독서하였으니, 왼쪽은 경재(敬齋)라 이름하고, 오른 쪽은 의재(義齋)라 이름하여, 기록하기를, "주역〔易〕을 읽고 두 가지 말을 얻은것은, 경이직내(敬以直內)와 의이방외(義以方外)이며, 학문하는 큰 요령은 이와 바꿀 것이 없다고 여겼으나, 힘쓸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하였다. 「중용」을 읽고 수도(修道)의 가르침을 논한 것을 보니, 반드시 계신 공구(戒愼恐懼)를 처음으로 삼아야만 지경(持敬)하는 근본을 얻으며, 또 「대학」을 읽고 명덕(明德)의 차례를 논한 것을 보니 반드시 격물 치지(格物致知)를 먼저 하여야만 명의(明義)의 단서(端緖)를 얻을 수 있었다. 이미 본 두가지의 공부는 일동일정(一動一靜)이 서로 용(用)으로 되는 것이었으며, 또 주자(周子)의 태극(太極)의 논에 합쳐져 천하의 이(理)가 유명 거세(幽明鉅細)와 원근 천심(遠近淺深)이 일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완미(玩味)하고 즐거워서, 족히 내가 종신토록 해도 싫지 않을 것이니, 또한 밖으로 사모할 겨를이 어찌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 다음은 존성(存誠)을 반복하여 정심(正心)의 의(義)를 다하였으며, 또한 함양 · 성찰을 겸하여 말씀드림 ○공자(孔子)는 말하기를, "간사한 것〔邪〕을 막아 그 성실이 존재토록 한다." 하였습니다. (역(易) 건괘(乾卦) 문언(文言))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간사한 것을 막으면 성실은 절로 간직되는 것이니, 사람이 집에서 낮은 담〔坦牆〕을 고치지 않으면 도둑을 막지 못하는 것과 같다. 도둑이 동쪽에서 들어온 것을 쫓으면 다시 서쪽으로 들어오고, 한 도둑을 쫓으면 다시 한 도둑이 들어오는 것은 그 낮은 담을 고쳐서 도둑이 자연히 이르지 않게 하는 것만 같지 못하기 때문에 간사한 것을 막고자 한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공경은 간사한 것을 막는 도(道)이니, 간사한 것을 막는 것과 정성을 보존하는 것은 다만 이 한 가지 일이다. 선(善)을 버린다면 곧 악(惡)이요, 악을 버린다면 곧 선인 것인데, 비유하면 문을 나가지 아니하면 들어오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였습니다. ○묻기를, "생각〔思慮〕은 비록 많지만 바른 데서 나온 것이라면, 역시 해가 없는 것이 아닙니까." 하니, 말하기를 "가령 종묘〔宗廟〕에서는 공경을 주로 하고 조정에서는 씩씩한 것을 주로 하며, 군려(軍旅)에서 엄숙한 것을 주로 하는 것이라면 좋으나, 만약 때가 아닌데도 발하여 분연하게 절도가 없다면 비록 바른 것이라도 간사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이(李)선생이 '사람 마음 가운데 커다란 악념(惡念)은 제복(制伏)하기 쉽고, 대단치 않은 이해(利害)를 계교(計較)하여 잠간 오고가는 염려 (이것은 부념(浮念)입니다.) 가 부단히 서로 이어져서 몰아내어 없애기가 가장 어렵다'고 하였는데, 이제 보니 사실 그렇다." 하였습니다. ○임천오씨(臨川吳氏)는 말하기를, "범인(凡人)들도 자못 이것이 이(理)가 되고 선(善)이 되는 것을 알며, 저것은 욕(欲)이 되고 악(惡)이 되는 것을 알되, 뜻이 기(氣)를 이기지 못하여, 한가히 홀로 처하는 사이에 간사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인데, 간사한 생각이 있게 되면 곧 막고 누르는 것이 스스로 속이지 않는 성실인 것이다. 대저 이미 간사한 생각이 없다면 생각하는 바가 다 이(理)요, 선(善)이다. 그런나 한 생각이 일어나자 마자 또 한 생각이 싹트거나, 그것이 그치지도 않았는데 여러 생각(諸念)이 서로 이어진다면 이것은 이(二)이요, 잡(雜)인 것이다. 욕(欲)이나 악(惡)은 아니나 역시 간사한 것이라 한다. 대개 먼저 사욕과 악념의 간사한 것을 끊어버린 뒤에 이(二)나 잡된 간사〔邪〕한 것을 치료할 수 있는 것이니, 성의 정심(誠意正心)의 차례를 어찌 뛰어 넘을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시경(詩經) 삼백편(三百篇)의 뜻을 한 마디로 총괄한다면 "생각〔思〕에 간사한 것〔邪〕이 없다." 하엿습니다. (「논어」 ○역시 공자(孔子)의 말)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시경(詩經)에 내용이, 선한 것은 사람의 착한 마음을 감동시켜 일으킬 수 있고, 악한 것은 사람의 나쁜 뜻을 징창(懲創 :징계하고 벌함)할 수 있어, 그 작용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 정성(情性)의 바른 것으로 돌아가게 할 따름이다. 그러나 그 말은 미완(微婉)하고, 또 각각 한가지 일로 인하여 발한 것도 있어서, 그 전체를 바로 가리킨 것을 구하면, 이보다 명백하고도 다한 것이 있지 아니하므로, 공자〔夫子〕가 '시 3백 편인데 오직 이 한 마디로써 그 뜻을 충분히 다 덮을 수 있다, 한 것이다. 그 사람에게 명시(明示)한 뜻이 깊고 간절하다." 하였습니다. 신이 살피건대, 공자의 이 말씀은 시를 논하기 위하여 말한 것인데, 다만 사무사(思無邪)는 성이라고 생각하므로, 정심(正心)의 장(章)에 실었습니다.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사무사(思無邪)와 무불경(毋不敬)의 이 두 귀〔二句〕만을 따라 행하면 어찌 어긋남이 있겠는가. 어긋남이 있는 것은 다 불경(不敬)과 부정(不正)에 말미암은 것이다." 하였습니다. ○소자(邵子)가 말하기를, "입으로 말하는 것은 몸으로 행하는 것보다 못하고, 몸으로 행하는 것은 마음으로 다하는 것만 못하다. 입으로 말하는 것은 사람이 들을 수 있고, 몸으로 행하는 것은 사람이 볼 수 있으며, 마음으로 다하는 것은 신(神)이 알 수 있다. 사람의 총명한 것도 속일 수가 없는데, 하물며 신의 총명한 것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입이 부끄럽지 않은 것은 몸이 부끄럽지 않은 것만 못하고, 몸이 부끄럽지 않은 것은 마음이 부끄럽지 않은 것만 못하다. 입의 허물은 없애기 쉬우나, 몸의 허물은 없애기가 어렵고, 몸의 허물은 없애기 쉬우나, 마음의 허물은 없애기가 어렵다." 하였습니다.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생각에 간사한 것이 없다는 것〔思無邪〕은 성이다." 하였습니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생각은 말과 실천보다 먼저 있으므로 생각에 간사한 것이 없으면 말하는 바와 행하는 바가 다 간사하지 않은 것이다. 실천에 간사한 적이 없다는 것은 성이 아니며 생각에 간사한 것이 없다는 것이 곧 성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표리(表裏)가 다 간사하지 않은 것이니, 진정 털끝만한 부정(不正)도 없다." 하였습니다. 신이 살피건대, 정성이란 것은 하늘의 실리(實理)요, 마음의 본체인데, 사람이 그 본심을 회복하지 못하는 것은 사사(私邪)가 있어 가려졌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공경을 주로 삼아 사사를 다 없애면 본체는 곧 완전하게 됩니다. 공경은 용공(用功)에 긴요한 것이요, 정성〔誠〕은 수공(收功)하는 곳이므로, 공경으로 말미암아 정성으로 이르릅니다. 신이 살피건대, 마음의 본체는 담연(湛然)히 비고 밝아서 빈 거울과도 같고, 평평한 저울대와도 같은데, 물(物)에 감응되어 동하면 칠정(七情)이 응하는 것이니, 이것은 마음의 작용입니다. 다만 기(氣)가 구속되고 욕심이 가려져서 본체가 능히 서지 못하므로 그 작용이 혹시 그 바른 것을 잃기도 하는 것이니, 그 병통은 어둡고 어지러운 것에 있을 따름입니다. 어두움〔昏〕의 병통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 하나는 지혼(智昏)이란 것으로 이는 궁리를 못하여 시비에 몽매(蒙昧)한 것을 말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기혼(氣昏)이란 것으로 게으르고 방일(放逸)하여 잠잘 생각만 있는 것을 말합니다. 어지로운〔亂〕병통도 두 가지가 있는데, 그 하나는 악념(惡念)이란 것으로 외물(外物)에 유혹되어 사욕을 비교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부념(浮念)이란 것인데, 도거(掉擧) 산란(散亂)하여 (도거(掉擧)는 생각이 일어나는 모양입니다.) 끊임 없이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생각은 선(善)도 아니고 악(惡)도 아니므로 부념(浮念)이라고 합니다. 보통 사람은 이 두 가지 병통에 곤란을 겪게 되어, 아직 물에 감응되기 전에는 어둡지 않으면 어지러워서 이미 미발(未發)의 중을 잃고, 물에 감응되었을 때에는 지나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하는데, 어찌 그 이발(已發)이 화(和)할 수 있겠습니까. 군자는 이 때문에 근심하므로 궁리하여 선(善)을 밝히고, 돈독한 뜻으로 기(氣)를 거느리며, 함양하여 정성을 보존하고, 성찰하여 거짓을 버리어 이로써 그 혼란(昏亂)을 다스린 뒤에 감응하지 않았을 때에는, 지허지정(至虛至靜)하여 감공형평(鑑空衡平)한 체(體)가 비록 귀신이라도 그 끝을 엿볼 수 없고 감응할 때에는 절(節)에 맞지 않는 것이 없어서 감공형평의 작용은 유행하여 머물지 않으니, 정대하고 광명한 것은 천지(天地)와 서참(舒慘)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학자의 용력(用力)으로 가장 효과를 얻기 어려운 것은 부념(浮念)입니다. 대개 악념(惡念)은 비록 실(實)하더라도, 만일 성실하게 위선(爲善)에 뜻을 둔다면 이것은 고치는 데 쉽습니다. 다만 부념(浮念)은 무사할 때에 문득 일어났다가 문득 없어져 자유를 얻을 수 없는 것이므로, 대개 온공(溫公)의 성의로도 오히려 분란(紛亂)한 것을 근심 하였는데, 하물며 초학자는 어떻겠습니까.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군실(君實 : 사마온공의 자)이 일찍이 사려(思慮)의 분(란(紛亂)한 것을 근심하여, 때로는 밤중에 일어나 새벽까지 잠을 자지 않았으니 가위 스스로 고생한다 하겠다." 하였습니다. 다른 날 또 말하기를, "군실이 근년에 와서 그런 병이 점차 비교적 줄었다." 하였습니다. ○신이 살피건대, 학문을 모르는 사람은 방심하여 그의 생각대로 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부념인 불 스스로 알지 못합니다. 학자는 정좌수심(靜坐收心)하여 바로 부념의 요란한 것을 알게 됩니다.) 학자는 모름지기 항상 공경을 주로 하여 경각(頃刻)이라도 잊지 말 것이니, 일을 당하면 하나〔一〕를 주장하여, 마땅히 머물러야 할 데에 각각 머무르게 하고, 일이 없이 정좌하고 있을 때에는, 만약 생각이 일어나면 반드시 무슨 일인가 곧 각성하되 악념(惡念)일 것 같으면 곧 용맹하게 단절시키어, 털끝만큼이라도 나타날 실마리〔苗脈〕를 머물러 두지 말 것이요. 만약 선념(善念)이면서 마땅히 생각해야 할 일이라면 (이것은 선념이 때에 맞는 것입니다.)그 이치를 궁구할 것이요, 아직 요해(了解하지 못한 것을 요해하여 이 이치를 미리 밝게 할 것이다. 만약 이해(利害)와 관계없는 생각이거나, 혹시 선념일지라도 적당한 때가 아니면 이것은 부념입니다. 부념이 일어나는 것을 일부러 싫어하면 더욱 어지럽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이 싫어하는 마음도 역시 부념인데 부념인 것을 깨달아 안 뒤에는 다만 가볍게 추방하고 이 마음을 수습하여 그것과 함께 가지 말게 하면 그런 생각이 일어나도 다시 그치게 됩니다. (염려가 분란할 때에, 이 마음으로 살펴 깨달아 그것이 부념인 줄 알고, 끌려 함께 가지 않으면 차츰 스스로 그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용공(用功)하여 아침 저녁으로 씩씩하게 하여 속히 이루어지기를 바라지 말고 게으른 생각을 내지 말 것이니, 만일 힘을 얻지 못하여 혹 가슴이 답답하고 우울한 생각이 들 때에는, 역시 반드시 정신을 가다듬어 일으키고, 마음 속을 정결하게 하여 일념(一念)도 없게 하고, 기상(氣象)을 청화(淸和)하게 하여, 오랫동안 순수하게 익혀서, 엉겨 정해지면, 항상 이 마음이 탁월하게 서 있어서, 사물에 이끌려 더럽혀지지 아니하고, 나의 시키는 대로 되어 뜻과 같지 않은 것이 없어서, 본체의 밝은 것이 가려지는 바가 없고, 밝은 지혜가 비추어 권도(權度)가 어긋나지 아니할 것입니다. (장자(張子)는 말하기를, "정(定)한 연후에 광명(光明)이 있는 것이니, 만약 이역(移易)하여 정하지 않으면, 어찌 광명이 있겠느냐." 하였습니다.) 가장 좋지 않은 것은 급하게 조석(朝夕)으로 효과를 기대하여, 효과가 없으면 곧 타락(墮落)하는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정심(正心)은 종신의 사업입니다. 그 중요한 것은 방씨(方氏)의 이른바 "중허(中虛)하면서 주재(主宰)가 있다."는 것이오니, 바라옵건대 유념(留念)하시옵소서.
< 주 > 69) 임금에게 올리는 간단한 형식의 상소문(上疏文). 70) 도가(道家) 계통의 서적을 말한다. 〔黃帝頊之道存乎 師尙父曰 在丹書〕《大戴禮武王踐》 71) 홍범(洪範)의 구주(九疇)를 말한다. 〔聖賢之道不明 則三綱淪 而九法〕《韓愈與孟尙書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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