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은
‘위령성월’입니다.
지난 11월 1일을
‘모든 성인 대축일’로 지냈고
다음날인 어제 2일에는
‘위령의 날'로 지냈습니다.
모든 성인 대축일이나 위령의 날이나
공통점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이렇듯이
기억하고 통공함으로써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의 시작』이라고
하는가 봅니다
11월은
돌아가신 분들을 기억하고
또 장차 있을 우리의 죽음에 대해서도
묵상하는 달입니다.
위령 성월순례자의 길
순례는
하느님을 만나는 여정입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희생과 보속을 바치며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합니다
나의 지향을 바치며
오늘의 순례를 시작합니다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 111곳을 따라서~ 108번째
( 2015.11.03 )
충남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274-10 ☎ (041) 688-3183
'100년 동안 무려 3천 명의 신자들을
참혹하게 처결한 조산리 순교 현장'
해미 성지는
100년 동안 무려 3천 명으로 추정되는 천주교 신자들을
참혹하게 처결한 조산리 순교 현장이다.
특히 1866년 병인년으로부터 1868년 무진년에 이르는
대박해 때에는
수많은 죄수들을 한꺼번에 죽이면서
시체 처리의 간편함을 위하여 생매장형이 시행되던
거룩한 순교터입니다.
2014년 8월 17일(일요일)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 폐막미사'를 집전하셨던
"해미 순교성지"입니다.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 폐막미사'
오늘도 11시 미사 참례차 서둘러 왔죠.
30분 여 조금 일찍 도착하여
미사 시작까지는 여유가 있어서 잠시 성지를 둘러봅니다
미사 참례는 안했었지만
그동안 여러번 왔던 성지라서..
해미성지는 편한 마음으로 왔습니다
정겹게 보이는 초가집이 있어요..
「이름없는 집」 명패가 붙어 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니
'성서 이어쓰기'를 하는 곳이더군요
로사리아와 세실리아는 5절씩 이어쓰기 하고
저는 사진만 한장 찰칵 하고는
패스하였습니다.
두 타입의 성모자상
솔뫼 성지로 가면서 찾는데 헤매였던
순교자 인언민의 탄생지 배나드리 성지
기억하시나요..
▲ 인언민(마르티노, 1737~1800)은
황사영(알렉시오)에게서 천주교 신앙을 듣고 교리를 배운 후
주문모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그림/ 탁희성 화백
해미 첫 순교자 인언민(마르티노)"그렇구 말구
기쁜 마음으로 내 목숨을
천주님께 바치는 거야"
인언민은 프란치스코 교황으로부터 시복되어 이제는 복자위에 올랐습니다.
원래 위치는 해미 진영 서문 밖이었으나
2009년 1월 8일자로 옮겨져 보존하고 있는 자리개돌(피의 제사장)이죠.
이 돌다리 위에
자리개질로 특별히 더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되었다고 합니다.
성당으로 들어갑니다..
↑ 대성당 내부 ↓
1층에는 소성당이 있고, 2층에는 대성당이 있어요.
그런데 오늘은 소성당에서 미사를 드린답니다
오늘도 전례 봉사자가
'독서를 해줄 수 있냐?'고 부탁하셔서
기꺼이 그러겠다고 하고 봉독하였습니다.
신부님은 강론 중에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잔치에는 누구나 초대 받을 수 있으나
아무나 잔치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잔치는 곧 하느님 나라를 가르키는 것이죠.
우리 신자들도 다시 한번
스스로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하셨죠.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주교님들과 이 소성당에서 미사를 보셨다고 하더군요.
소성당 입구 벽면에..
속칭 '해뫼'라 일컬어지는 해미 고을은
'진영'이 있던 군사 요충지였다고 합니다
1790년대부터 1880년대까지 거의 100여 년 동안
천주교 신자 수 천여명을 국사범으로 처형하였다고 하네요.
**
아픈 역사가 담긴 순교 성지라서인지
소성당 좌우에는 이런 역사적 아픔을 나타내는 그림이 있어요.
복자 인언민(마르티노), 이보현(프란치스코), 김진후(비오)
1800년 1월 9일 순교한 해미의 첫 순교자 인언민(마르티노)와
이보현(프란치스코),
1814년 10월20일에 해미옥에서 옥사한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비오)
이 세분이 1914년 8월 15일 "시복식"에서 시복되어 복자위에 올랐죠.
해미 순교자 3위 복자 상
이곳 해미 순교 성지에는
아직도 이름 모를 많은 순교자들이 남아있답니다.
이제 밖으로 나가서 나머지 성지들을 둘러 봐야겠죠..
야외 미사터로 왔습니다.
제대 앞에 돌의자들이 줄지어 있습니다
제대와 신자석이 모두 큰 돌들로 놓여 있어요.
순교자들을 기리며 미사드리는 모습들을 상상해보세요
높이 16m의 순교탑과
무명 생매장 순교자들의 묘가 있어요.
해마다 수많은 신자들이 이곳을 찾아와
이름 없는 순교자의 넋을 위해 기도한다고 합니다.
무명순교자 묘 옆에 있는 초봉헌대에서
- 무명 순교자들의 영혼을 위하여
- 돌아가신 4 부모님의 영혼을 위하여
- 며칠 전 1주기를 지낸 이석재 친구의 영혼을 위하여
각각 촛불 봉헌을 하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이들에게 영원한 안식과 영원한 빛을 주소서"무명순교자 비문 / 최석우 신부
'여기는 영원한 생명이 숨 쉬는 곳,
순교자의 뜨거운 피가 뿌려진 성스러운 땅이다.
여기는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한 믿음의 땅이다.
신앙의 자유를 부르짖던 외침이 스며든 소망의 땅이다.
순례자여
이곳에서 머리를 숙여
순교자가 남긴 뜻을 새롭게 하여라.
그리하여 이곳을 그대의 승전지로 만들어라."'여숫골' 표지석입니다.
'여숫골' 표지석과 시복 기념비
여숫골의 유래는 죽음의 길을 걸으며 하는
순교자들의 "예수 마리아"기도 소리가
동네 사람들에게는 "여수머리"로 들렸기 때문에
이 곳을 "여숫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는군요
순교 현양탑, 야외 제대, 해미 순교탑
해미 순교 성지 기념관
해미 순교 성지 기념관에는
1935년 프랑스'범바로(베드로)'신부의 발굴을 시작으로
발견된 유물과 유해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순교자들을 표현한 부조를 지나 들어가 봅니다.
갖가지 방법으로 처형당하는 모습을 재현해 놓았네요.
진둠벙 호야나무 자리개돌 생매장
'진둠벙'에서 수장 당하는 순교자, 호야나무에 매어 달린 순교자
자리개돌 들어올려 내던져지는 순교자, 교수, 참수,압사, 생매장 등등..
자리개질은 볏단을 두손으로 잡고 털듯이
사람을 내리쳐 죽이는 방법으로 잔인하기 그지 없었다고 합니다.
상상할수 없는 여러 가지 형벌로 생의 마지막길을 갔던 순교자들이
이 땅에 신앙의 뿌리를 내리게 해주었던 것 같습니다.
2004년 나무 수술시 제거된 해미읍성에 있는 '호야나무' '가지' 일부분 과,
1986년 8월 16일 '진둠벙' 위쪽 뚝 밑에서 발견된 '휘광이의 칼' 입니다.
무명순교자들의 여러 유해 조각들이 모셔져 있네요.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렸던
수많은 순교자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린다는 마음으로
묵상과 기도를 드렸습니다.
'진둠벙'으로 갑니다.
개울 위의 외나무 다리 위에서 둠벙에 밀어넣어
순교자들은 둠벙 속에 쳐 박혀 죽어갔습니다.
십자가의 길 기도를 빼먹을 수는 없겠죠..
해미성지에 맞는
기도로 적혀있는 십자가의길 14처입니다.
제1처 - 감옥에서 의연한 순교자The Station of The Cross(십자가의 길)유해 발견터
이제 다시 차를 타고 해미읍성으로 이동합니다.
해미 읍성으로 왔습니다.
2014년 8월 17일 교황 프란치스코께서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 폐막 미사를
집전하신 순교 성지입니다.
해미읍성 전경
해미읍성(사적 116호)은 왜구를 막기 위해
태종 때 축성 230여 년간 병마절도사영이 있던 곳으로
성벽 길이는 1800m, 높이가 5m이며 진남문이 정문이다.
1578 년 이순신 장군이 군관 시절 10 개월간 근무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여기저기 해미읍성 방문 기념 조형물도 있어
오신 분들이 기념사진들도 찰칵찰칵
진남문으로 들어가보겠습니다
천주교 박해 때 신자들을 매달아 처형하던
'순교목'인 '호야나무'입니다.
순교기념비
옥사가 바로 옆에 있습니다.
들어가 봐야겠죠
형틀이 놓여진 옥사 마당이구요..
옥사 안에는 이렇게 당시의 모습들을 재현시켜 놓았네요.
동 헌
'동헌'은 조선시대 지방 관서에서 정무를 보던 곳으로
신앙 선조들의 재판이 행해지던 곳이었습니다.
십자가의 길 기도가 시작 되는
제1처(동헌 옆)과 제2처(호야나무 앞)입니다.
계단을 통해 성곽으로 올라가
성곽길을 따라 돌면서 산책하는 것도..
성곽길에서 해미읍성을 내려다보는 것도..
성곽길을 따라가다 보면
해미읍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청허정(淸虛亭)입니다.
"잡된 생각이 없어 마음이 말고 깨끗하다"라는 뜻이라죠.
동헌 뒤 청허정에 올라 천수만을 바라보는 것도..
나름으로는 꽤 괜찮을 듯 하답니다
이제 홍주(홍성) 성지로 이동합니다.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 111곳을 따라서~ 109번째
홍주(홍성) 순교 성지
(2015.11.03)
충남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 ☎ (041)572-8691
'신앙을 증거한 80년간의 순교터'
충청도의 첫 순교자 '원시장(베드로)'을 탄생시킨
"홍주(홍성)순교성지"에 왔습니다.
홍성군을 비롯한 내포지역은 일찍부터 천주교가 크게 퍼졌으며
그만큼 천주교 박해로 인한 순교자도 많아(212명)..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천주교 순교자가 많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첫번째는 공주 황새바위(250명)]
'순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정언 이의채가
“홍주는 사학(邪學)에 가장 심하게 물든 지역이니
홍주목사를 붙잡아 국문하자”는 내용의 상소를 올릴 정도로
천주교의 교세가 강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792년 신해박해 때 원시장(베드로)이 홍성지역 최초의 순교자로 기록된 이래
신유박해 6명, 을해박해 1명, 기해·병오박해 6명, 병인박해 117명 등
천주교박해 초기부터 박해 말기에 이르기까지 순교자가 나왔다.
[출처 : 중도 일보]
생매장 순교터
홍주(홍성) 순교 성지는 넓게 퍼져 있는 바,
우리보다 앞서 순례의 여정을 갔었던
어느 자매님의 안내와 대전교구의 안내대로 순례하고자 합니다.
성지 순례 코스는
①근민당-> ②홍주 옥-> ③경사당-> ④저자거리-> ⑤참수 터->⑥생매장 터-> ⑦홍성 본당 으로 제시하는군요.
충청도의 첫 순교터박해 초기부터 병인박해까지 100년 동안
지속적으로 순교한 곳 :
한국 교회 최초의 신해박해(1791) 여파로
이곳 홍주에서 원시장(베드로)이 체포되어
충청도 최초의 순교자가 된다.예비자들의 모범 성지 :
천주님을 알고 수년 동안 예비자의 신분으로
신해박해 때 옥에 갇혀, 옥중 세례를 받고,
입교 5년만에 순교한 원시장(베드로),
순교 직전 자기 자신에게 세례를 베풀고
하느님을 영접한 이여삼(바오로)..
이들이 바로 예비신자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홍성군청'에 주차합니다.
군청 뒤에 넓은 잔디밭이 있습니다.
군청 안에는 예쁜 기와집이 있었는데
옛날에 사또가 살던 집이었다는군요
'안회당(동헌)'이 보이고,
다시 뒤로 돌아가니 '여하정'과 '목사동헌'
표지석이 있네요.
신앙 증거 터인 목사의 동헌 근민당과 진영장의 경사당
안회당(홍주동헌)
'목사의 동헌'앞에서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 받은 지도층 신자들이
가해지는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신앙으로 극복했던
순교 선조들의 신앙이 깊게 배어있는 곳입니다.
홍주 아문을 나와서 직진하면
홍주읍성 한일약국 옆 위치 … 순례자 안내역할 담당하는
2014년 3월 23일 ‘홍주성지성당’의 문을 열고 첫 미사를 봉헌했다고 한다.
(전화: 041-633-2402)
홍주 성지 성당
사무장님으로부터 순례 안내를 자세히 받고
움직이는 것이 훨씬 좋을 듯 합니다.
성당 내부 중앙 제대
성당 건너편에
'홍주 옥 순교 성지'가 있습니다.
박해(1791-1869)가 계속 되는 동안
홍주로 끌려온 신자들은
갖은 문초와 형벌을 받고
이 곳 옥에 수감되어 순교합니다.
교수형과 옥사로 113명이 순교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답니다
홍주 읍성 우물터에 왔습니다.
홍주 읍성 안 3개 우물 중 하나로,
영세도 받지 않은 예비신자인 원시장(베드로)에게
엄동설한 한밤중에 온 몸에 물을 뿌려
1793년 1월 28일 61세에 동사로 순교합니다.
▲ 얼려 죽이다.
원시장(베드로 1732~1793)이 온갖 회유와 고문에도 신앙을 버리지 않자
얼려 죽이려고 형리들이 그의 온 몸에 물을 붓고 있다.
그림/ 탁희성 화백"저를 위해 온몸에 매를 맞고,
내 구원을 위해 가시관을 쓰신 예수여
당신의 영광을 위해 얼고 있는 이 몸을 보십시오"
- 원시장 베드로
▲ 홍주성 역사관
ZONE 2 의 '천주교 박해'를 보시면 되겠죠..
엄동설한에 물을 뿌려 동사시키는 장면/원시장(베드로)
이제 차를 타고 조양문으로 이동합니다.
KT 전화국 앞 작은 화단에 표지석만 세워져 있군요
*
↑ 홍주 조양문과 .
구 장터인 저자거리도 순교자들이 수난을 겪은 곳
마침 열리고 있는 국화 축제장, 국화로 단장된 조양문 모형을 입구에.. ↑
홍주 진영의 동헌(경사당)이었던 이곳은
체포된 방 프란치스코와 수 많은 신자들이 우선 이 곳에서
갖은 문초와 형벌을 받았던 곳이랍니다.
옛 저자거리 터로 왔습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공영주차장 입니다
(태평식당 자리)
순교자 이여삼(바오로)외 211명이
순교하기전 군들로부터 몰매와 조리돌림을 당한 곳이라죠.
참수 순교터로 왔습니다.
북문교 인근의 월계천변은 참수 터인 형장
순교자 황일광(시몬)은 서울에서 형을 선고 받고
1801년 12월 26일(음) 이곳에서 참수당했다고 합니다.
생매장 순교터에 왔습니다
홍성천과 월계천의 합수머리 주변은 순교자들의 생매장 터
1868년 최번상(베드로), 김조이(루치아)부부와
원 아나타시아 등이 바로 이 형벌 생매장으로 순교했다고 합니다.
야외 미사터 홍주 천주교 순교비
4월 15일 유흥식 주교와 사제단, 신자 1,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순교자 현양 미사 및 홍주순교 성지비 제막식'을 거행했다고 합니다.
이곳 홍주(홍성) 순교 성지 212명의 순교자 중
4위의 복자가 탄생하였답니다.
원시장(베드로), 방 프란치스코, 박취득(라우렌시오), 황일광(시몬)
◎ 성지 홈페이지 등에서 일부 자료 인용.
홍주 천주교 순교비 순례를 끝으로 해서
오늘의 순례 여정을 모두 마쳤으나
함께 동행한 처제 '세실리아'가
시간도 아직 이르니 공세리 성당에 들려가면 어떠냐고 하네요..
그래서 작년 10월 9일
18번째로 순례하면서
미사 참례를 하였던 공세리 성당에 들려
천수만이 내려다보이는 십자가의 길에서 기도도 드리고
성체 조배실에서
잠시 묵상과 기도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느새
가을 속으로 깊숙히 들어선
언제나 예쁘게만 보이는 공세리 성당
작년 10월에 순례했던 공세리 성당
오늘
단풍이 막바지에 이른 공세리 성당에는
성당과 성모상 그리고 십자가의 길.. 등등등
단풍과 나목 사이에서 깊어가는 가을 속으로
그림을 예쁘게 담기위해 이리저리 뒤섞이며
많은 사진 동호회원들로 북적북적 거리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