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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돈 북일고 감독은 현역 당시 빙그레 이글스의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2번타자였다. 2회 최다안타상과 세 번의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며 최고의 타자로 이름을 떨쳤다.한국프로야구 사상 두 번째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하는 등, 강한 근성과 뛰어난 야구 실력으로 빙그레의 영원한 2번 타자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사진=이강돈 제공\n |
[매경닷컴 MK스포츠 김원익 기자]
빙그레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선봉장, 빙그레의 캡틴 등 이강돈 현 북일고 감독을 수식하는 말들은 많다. 포기를 모르는 근성으로 5점을 내주면 10점을 되갚아줬던 빙그레 이글스하면 영원한 2번타자이자 캡틴 이강돈을 빼놓을 수 없다. 이 감독은 이글스를 대표하는 타자로 12년간 1217경기에 출장해 통산 타율 2할8푼4리 1132안타, 87홈런, 556타점, 533득점, 88도루를 기록했고, 외야수 부분 3회 골든글러브 수상, 2회 최다안타상 수상, 한국프로야구 사상 두 번째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하며 1980년대와 1990년대 초 큰 족적을 남겼다.
이 감독은 올해 롯데 퓨처스 타격코치직에서 물러나 현재 고교야구 최강팀 북일고의 사령탑을 맡고 있다. 눈이 쏟아지는 한 겨울 실내연습장에서 선수들을 지도 중이던 이 감독은 환한 미소로 MK스포츠를 맞았다. 열정 넘치는 이 감독의 목소리에는 80년대와 90년대 불꽃처럼 뜨거웠던 빙그레와 그의 기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빙그레부터 한화까지 이글스의 오랜 팬들 중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향수를 기억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빙그레하면 감독님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당시 빙그레는 어떤 팀이었나요.
화끈한 팀이었다. 경기 초반에 많은 실점을 하더라도 경기는 끝까지 가봐야 알았다. 경기 후반에 7점, 10점을 더 얻어내서 역전하는 경우도 많았으니까. 강정길, 유승안, 이정훈, 고원부, 김상국, 장종훈, 황대연, 전대영 등이 다 한 팀이었으니, 참 좋은 타자들이 많았다. 투수력은 조금 떨어졌지만 그만큼 시원시원한 야구를 했던 것 같다. MBC청룡이 대전구장에서 우리한테 18연패를 당했다. 거의 몇 년 동안 못 이겼다는 거다. 대전구장에 오면 버스에서 내리기 전에 소금부터 뿌렸다고 하더라. 그만큼 강력했다. 그런데 사실 초창기 조직력은 떨어졌다. 우리는 외인구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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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그레 이글스 원년 멤버들. 왼쪽부터 이강돈 감독, 김한근 전 삼성코치, 김정태, 김성갑 넥센 2군 감독. 사진=이강돈 제공 |
화려한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빙그레와 외인구단이라니 무언가 어울리지 않는 조합 같습니다.
사실이 그랬다. 당시 빙그레는 1986년에 뒤늦게 창단한 신생팀이었다. 그때는 신생팀이 창단되면 기존 구단에서 선수를 5명씩 보내줬는데 그렇게 모인 선수들이다보니 사실 팀웍이 다소 맞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외인 구단 같은 면이 있었다. 야구를 잘한 선수들이 모였던 것도 아니었다. 이후로 달라졌지만 시작은 그랬다. (웃음)
야구는 언제부터 시작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나는 조금 늦게 시작했다. 중학교 1학년때부터였다. 원래 초등학교시절에는 수영선수였다. 특별히 운동을 하려고 고른것도 아니고 추첨을 해서 포항중학교에 진학하게 됐는데 1학년 때 체육 시간에 사건이 터졌다. 선생님이 51번부터 뒷번호까지 다 나오라고 호명해서 불려나갔다. 고무 수류탄 던지기를 시키더라. 수영을 했었으니 어깨는 좋았다. 던지고 나니까 내가 반에서 제일 멀리 던졌다. 더군다나 왼손이었으니까 체육 선생님이 나를 콕 집어서 방과 후 남아보라고 했다. 이후 야구 감독님을 처음 만나고 야구를 시작하게 됐다. 당시에 나는 사실 야구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다음날 유니폼 그런 것도 없이 트레이닝복 입고 가서 방망이 쥐는 법부터 하나 하나 차근 차근 배웠다. 재밌었다. 그런데, 야구를 하다가 한 번 그만둬야 했다.
왜였나요.
선배들이 하도 때리는 통에 견딜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들어온 지 얼마 안됐다고 집합에서 빼줬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열외 없이 무조건이더라. 이유 없는 단체 기합이나 구타들이 계속되니까 이러다 죽겠다 싶어서 그만두겠다고 했다. 그렇게 잠깐 동안 야구를 안했는데, 어느 날 감독님이 찾으러 오셨다.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더니 ‘그럼 내가 못 때리게 할께’라고 장담하셔서 마음을 돌렸다. 다시 야구를 하니까 재밌었다. 그래서 외야수로 포지션을 정하고 진짜 야구인생이 시작됐다. 고등학교 1학년까지 투수를 병행했다. 공은 빨랐는데 제구는 좋지 않아서 투수는 그만뒀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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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창단된 빙그레 이글스의 초창기 모습이 담겨있는 이강돈 감독의 사진. 1985년 창단을 준비하던 당시 왼쪽부터 이광길 현NC 코치, 당시 박상조 트레이닝 코치, 이강돈. 이 감독의 설명에 따르면 UDT출신의 박상조 코치는 당시 체력 전담 코치라는 명목하에 빙그레 선수들에게 ‘지옥’을 선물했다고 한다. 사진=이강돈 제공 |
그 선택이 전화위복이 된 것 같네요. 어릴 적부터 야구를 잘한 편이셨나요.
늦게 시작한데다 덩치도 작아서 눈에 띄는 편이 아니었다. 중학교 입학 때 키가 145cm밖에 안됐다. 그래서 중학교에서 1년을 꿀었다(웃음). 유급을 해서 4년을 다녔다는 말이다. 그때는 특별한 이유 없이 그런 경우들도 많았다. 나도 그랬는데 중학교 4년을 다니면서 야구가 조금씩 늘데. 그래서 야구 명문 대구상고에 들어가게 됐다.
대구상고 졸업 이후 많은 야구 명문 대학 중 건국대학교에 진학했습니다.
대구상고 선배님이던 강태정 감독님이 건국대학교에 감독으로 계셨다. 그래서 대구 출신 선수들을 많이 데려갔다. 그 때 황병일, 양일환, 권기홍 같은 대구출신 선배들이 건국대에 있었다. 당연히 가야되는 줄 알았고, 또 다들 그렇게 갔다.
대학 재학 시절부터 전국적인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는데요.
아마추어는 투수가 더 주목을 받는 시기다. 타자들은 국제대회가 아니면 이름이 알려지기 어려웠다. 나는 대학에 가서 대표선수로 국제대회에 출전하면서 그때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한미 친선대학야구대회, 세계선수권대회, 아시아선수권대회, LA 올림픽 시범경기에 연달아 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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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감독은 올해 롯데 퓨처스 타격코치에서 물러나 고교야구 최강팀 북일고의 사령탑을 맡았다. 눈이 쏟아지는 한 겨울 실내연습장에서 선수들과 구슬땀을 흘렸다. 현역 당시 78kg을 유지했던 당시보다는 살이 다소 쪘지만 군더더기없는 타격폼이 현역시절을 연상케 한다. 사진=김현민 기자 |
화려했던 대학교 시절을 마치고 1985년 드디어 프로에 입성합니다. 그런데 고향 연고지 팀인 삼성이 아닌 난데 없는 창단도 하기전이었던 빙그레였습니다.
뒷이야기가 있다. 당시 졸업을 하고 원래 나는 삼성에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때 병역 문제가 걸려 무산됐다. 현역 판정을 받았는데 삼성에서는 군대를 먼저 갔다 오라고 권했다. 당시에 삼성 외야진이 탄탄했기 때문에 미래를 대비하는 차원의 판단이었던 것 같다. 장효조, 허규옥, 장태수, 이종두 등 쟁쟁한 선수들이 외야를 채우고 있어서 자리가 없었다. 나는 일단 프로에서 먼저 뛰고 싶었기에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군대를 가는 대신, 그럼 다른 팀으로 보내달라고 했다.
삼성에서 순순히 놓아주던가요.
조건을 걸었다. 당시 창단하는 빙그레로 가는 조건이면 보내주겠다고 하더라. 빙그레 입장에서는 땡큐였지. 안그래도 선수가 없는데 국가대표에 뽑히던 선수가 제 발로 찾아온다니까 맨발로 환영했다. 가만 생각하면 당시 김영덕 삼성 감독도 혜안이 있었던 것 같다. 나중에 빙그레로 오실 줄 아셨나 보다. 그래서 미리 나를 보내놓은 것 같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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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런을 치고 전대영, 양용모와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는 이강돈 감독. 통산 87홈런을 기록한 이 감독은 경기수가 많지 않았던 당시 한 시즌 16홈런을 기록한 적이 있다. 장타력은 충분했지만 그러나 팀 배팅을 먼저 생각했다. 홈런에 대한 욕심보다는 2번타자의 역할에 충실했다. 그럼에도 타자로서 100홈런을 돌파하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쉬움이 남는다는 이 감독이다. 사진=이강돈 제공 |
연고도 없는 지역인데 텃세는 없었습니까.
그런 건 전혀 없었다. 충청지역 선수들도 있었지만 대구서 간 선수들도 계속 많이 합류했다. 북일고 출신인 이상군같은 지역 출신도 있었지만, 대구에서 온 강정길, 이정훈 등 대구 출신들이 많았다. 고등학교때부터 이어져 온 인연들이 프로에서도 이어졌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대구 지역 선수들이 야구를 잘하다보니 누가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었다. 적응하는 건 어려움이 없었다. 완전 대구판이었는데 뭐. (웃음)
당시 빙그레는 1986년 창단 첫 해 7위였던 성적이 다음해 6위를 거쳐, 1988년 2위로 껑충 뛰었습니다. 신생팀이 불과 몇 년 만에 강팀으로 거듭난 비결은 어떤 것이었나요.
피나는 노력을 했다. 정말 훈련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잠시 말을 멈추고) 호텔에서 오전 10시에 집합해서 밤 10시까지 훈련을 했다.
고등학생보다 더 심한 수준인데요. 다들 머리 굵은 프로인데 불만을 가진 선수들은...
우리 때는 그런 건 전혀 없었다. 감독님이 하라면 무조건 하던 시기였다. 1987년 11월에 김영덕 감독님이 삼성에서 오셨는데 그때부터 정말 훈련을 많이 하면서 실력이 늘기 시작했다. 1986년과 1987년 프로에 맞는 야구를 하기 위해 몸을 만드는 과정이었다면 그 다음부터 강훈을 하면서 진짜 야구를 알게 되고, 제 몸에 맞는 야구를 시작하게 된 것 같다.
(이강돈은 데뷔 첫해 104경기서 타율 2할9푼7리 103안타 10홈런 10도루를 기록하며 성공적인 데뷔 시즌을 치르고 2년차인 1987년에는 적응기를 거쳤다. 단내나는 훈련을 했던 1987년 겨울을 지나, 1988년 타율 3할1푼3리 118안타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폭발했다. 1989년과 1990년 2년 연속 리그 최다안타를 기록하며 우뚝 섰다.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뇌관도 이정훈이 입단하고, 이강돈이 불타오르고 새로운 타자들이 속속들이 채워지면서 점점 뜨거운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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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그레 이글스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핵심 삼인방은 1990년 골든글러브 시상식의 주인공이었다. 유격수 장종훈(좌), 중견수 이정훈, 좌익수 이강돈은 항금장갑 3개를 빙그레에 안겼다. 최다 수상은 빙그레의 숙적인 해태(4개)였다. 이강돈감독은 1988년부터 1990년까지 3년 연속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사진=이강돈 제공 |
프로 통산 역대 2번째 사이클링히트의 주인공인데요. 대기록에도 뒷이야기가 있습니까.
사실 그날 사이클링히트는 나오지 못할 뻔 한 기록이었다. 여러 행운들이 겹쳐졌다. 정말 그랬다.
中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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