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원불교 초창기에 교조 소태산대종사 친방(親訪)의 인연으로 1924년(원기9) 익산총부건설 이전에 12인의 제자와 더불어 처음으로 수선(修禪)했던 만덕산 일대. 전북 진안군 성수면 중길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초선지(初禪地)와 만덕산 농원을 포함하여 성지로 보고 있다.
역사 및 변천
만덕산 성지는 1924년(원기9) 5월에 소태산이 친방하여 한 달 동안 수선했으며, 그 과정에서 원불교의 3대 종법사인 대산종사를 만나기도 했다.
만덕암에서는 소태산을 스승으로 성주의 정산종사, 영광의 김광선ㆍ오창건, 임실과 진안의 최도화와 전삼삼ㆍ전음광 모자, 노덕송옥과 손자 대산, 전주의 이청춘, 경성의 박사시화ㆍ이동진화ㆍ김삼매화 등 12인이 김광선의 주관으로 1개월 선회(禪會)를 열고 총부건설도 준비했다.
소태산과 창립총회에 참여했던 정산과 김광선, 오창건이 만덕암에 들어와 수선에 참여했고,
최도화는 화주로 식량을 담당하며 참여했다.
전주의 이청춘은 불법연구회 창립발기인 모임에 유일한 여성으로 참여했고,
창립총회에도 참여한 후 소태산이 만덕암으로 들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와 선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소태산의 첫 상경에서 만나 경성의 첫 제자로 전무출신을 서원한 박사시화는 전라도로 소태산을 만나기 위해 내려왔다가 만덕암 선회에 참여했으며,
전삼삼은 최도화의 인연으로 1922년(원기7) 변산 봉래정사를 찾아 소태산에 귀의하고, 그 후 소태산이 만덕암에 오자 외동아들 전음광을 데리고 찾아와 귀의시켰다.
그 후 소태산의 명에 의해 전주로 이사했다가 선회에 모자가 함께 참여했다.
이동진화는 경성에서 소태산을 뵙고 귀의한 후 소태산이 전라도로 내려가자 침모인 김삼매화와 함께 찾아 나서 임실과 진안 마이산 등을 거쳐 수소문 끝에 만덕암에 찾아와 선회에 참여했다.
최도화가 수선하며 식량을 시주 받아오던 좌포 노덕송옥의 집에 찾아가 그의 장손자인 대산에게 ‘생불님을 뵈러가자’고 자주 권했으며,
열한 살 난 대산이 머슴의 등에 업혀 할머니 노덕송옥과 집안의 산제당인 만덕암에 가 소태산에 귀의하고 선회에 참여했다.
만덕산의 초선은 이렇게 소태산 주위의 인연 중 초기의 핵심적인 인물들이 대거 참여하여 수선했던 것으로,
그 의의가 크다 할 수 있다.
특히 소태산과 정산, 대산으로 이어지는 원불교 3대의 종법사가 최초로 만난 곳이며, 만덕산 초선을 인연으로 당시 11세 소년 대산이 출가하게 되었다는 점이 원불교의 역사를 통해 드러내는 상징성이 있다.
이러한 훈련을 바탕으로 이듬해(원기10) 3월에 새 교법을 지도 훈련하기 위해 정기훈련법과 상시훈련법을 제정ㆍ발표했으므로,
원불교 초기 공부법을 체계화하는 과정에서도 만덕산성지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만덕산 초선을 중심으로 형성된 법문으로는
《정산종사법어》 기연편 4장, 《대종경선외록》 교화기연장 1절, 《한울안 법문과 일화》 14절, 《대산종사법설집》 3집, 신성 81장, 《대산종사법설집》 3집, 법위 80절 등을 통해 찾아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만덕산 성지의 중심은 초선지로서의 의미가 가장 크다.
그러나 처음으로 수선했던 김씨 소유의 산제당인 만덕암은 한국전쟁 때 소실되고 말았다.
원불교 교단에 있어 성지 또는 성적지의 분류는 변화를 보여왔지만,
만덕산 성지는 영산ㆍ익산ㆍ변산ㆍ성주와 더불어 일관되게 성지로 분류되어 왔다.
하지만 원불교 초선지라는 상징성에도 불구하고 교단적으로 일찍 만덕산에 선훈련 도량의 체제를 갖추지 못하다가,
1983년(원기68) 7월 26일에 이르러 비로소 만덕산 훈련원을 준공ㆍ개원했다.
동년 9월 15일 중앙문화원 운영위원회에서는 교단의 중요 사적지에 기념비를 세우는 것을 결의했는데,
고창 연화봉ㆍ정읍 화해리ㆍ진안 만덕산ㆍ성주 박실 등 4곳을 선정했다.
이후 1985년(원기70) 8월 19일 만덕산 현지의 중심지점에 만덕산 초선지 입비가 세워졌다.
연화봉 삼매지, 소성동 구도지에 이어 세 번째로 세워진 초선비 사적지는 거북좌대에 용관을 씌운 전통양식으로 좌대 포함 총 높이 4m의 형태로 제작되었다.
1986년(원기71) 11월에는 전주교구 출가교화단에서 만덕산 초선지에 안내표지판을 설치하고 길을 보수 및 확장하며 식수를 개발하는 등의 초선지 개발에 대한 결의를 하고 시행하기로 했다.
1987년(원기72) 5월 13일에는 만덕산 훈련원 부속건물 신축기공식을 거행했으며,
동년 9월 9일에는 대지 200여평 연건평 137평 규모의 콘크리트 2층 현대식 건물의 소법당과 숙소를 갖춘 만덕산훈련원 본관을 건축했다.
아울러 중앙문화원은 만덕산초선지비 둘레에 돌난간, 판석 등 추가장엄공사를 완공하고 대산과 남녀수위단 전원 및 관계요인 다수가 참석한 가운데 준공축하행사를 가졌다.
동년 9월 27일 대산은 중앙훈련원에서 훈련 중인 교무들과 동산훈련원 예비교무, 그리고 예비교역자 등 300여 명을 접견하고 ‘4대성지’에 대한 법설을 했다.
이날 대산은 소태산의 행적이 담긴 곳으로 영산대성지ㆍ변산 제법성지ㆍ만덕산 초선의 성지ㆍ익산 중앙총부 대성지 등을 4대성지로 정했다.
원불교의 4대 성지에 대한 관념이 구체화된 것은 이때부터라 할 수 있다.
1989년(원기74) 11월 정기수위단회에서는 교단 창립의 얼이 담겨 있는 각종 사적 및 유물을 합리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사적 및 유물관리 규정 개정안을 승인했다.
여기서는 그동안 사적 및 유물을 혼합 4급으로 구분하던 것을 성지ㆍ사적ㆍ유물로 세분했다.
성지는 소태산의 탄생ㆍ구도ㆍ대각 및 제중사업 등 교단 창립에 관련된 터와 구조물이 밀집되어 있는 영산ㆍ변산ㆍ익산ㆍ만덕산의 특정 지역 일대를 성지라 하여 특별보호 구역으로 정했으며,
사적은 교단적 가치와 성격에 따라 성적지와 사적지, 기념지로 구분했고, 유물은 원불교 보물이라 하며, 보존가치와 비중에 따라 성보와 사보, 유물로 분류했다.
만덕산은 원불교의 성지로 그 위상을 확고히 하게 되었다.
2000년(원기85) 1월 17일 유물 및 사적관리위원회 소위원회에서는 다시 사적을 성적지와 사적지, 유적지로 분류했다.
이때에는 소태산을 비롯한 대원정사의 탄생ㆍ구도ㆍ대각ㆍ제중사업과 직접 관련된 성적지는 대종사탄생가ㆍ정산종사탄생가ㆍ대산종사생장가 등 26곳, 또한 범현동 재각ㆍ불법연구회창립총회지인 익산 보광사ㆍ법인기도봉은 별도의 성적지로 분류되었다.
사적지는 구호동 집터ㆍ중앙총부 세탁부를 비롯 9곳, 유적지는 방언사무소ㆍ장수수양원 등 12곳으로 각각 분류되었다.
만덕산 미륵사를 비롯 경북 성주 백세각과 금산사 송대 등 8곳은 별도 유적지로 분류되었으며,
분류된 성적지ㆍ사적지ㆍ유적지는 동년 7월 6일 임시수위단회를 거쳐 확정되었다.
2001년(원기86) 5월 29일 전북교구가 제37회 사적 및 유물관리위원회의에 상정한 ‘만덕산 초선터 선실 계획안’을 결의하면서 초선터 선실 건립을 추진하게 되었다.
초선터 선실 건립 예정지로 만덕암터가 거론되기도 했으나, 초선지에서 너무 가까워 사적지를 성역화할 때 장애가 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 건립장소를 유보했다.
결국 원형보존 차원에서 입구쪽으로 위치를 정하고 2002년(원기87)에 기공하여, 2004년(원기89) 10월 14일 원불당과 적공실의 신축봉불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원불당은 초선지 입구에 마련된 기도실이며, 적공실은 초선지 가는 산길 입구에 마련된 수행도량이다.
역사적 의의
만덕산성지는 원불교 초선지로 영육쌍전의 훈련도량을 갖추고 있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훈련방법을 통한 수행체계를 제시하고 있으며, 원불교 4대성지로서 많은 교도들이 성지순례를 통해 영성을 함양하는 성지이다.〈權正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