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산의 붉은 혼을 안고. - 정다운 재건
[다시 뭉친 세 친구]
2026년 2월 23일 아침 8시, 함양군 안의면 황석산(1,190m)을 향해 오랜 벗들이 다시 뭉쳤다.
고암 염규성, 현보 강덕희, 그리고 나까지 세 명의 산객은 내룡 베이스캠프에서 반가운 안부를 나눴다.
사실 나는 2주전 지난 2월 11일 와불산 산행 때 눈길에 미끄러져 무릎 부상으로 고생을 좀 했던 터였다.
"무릎은 좀 어떠냐"며 걱정스레 묻는 친구들에게
나는 "2주 동안 도가니탕을 부지런히 챙겨 먹었더니 진짜 도가니가 싹 나은 것 같다"며 짐짓 너스레를 떨었다.
그 웃음 섞인 농담을 싣고 우리는 함양으로 향하는 차 안에 몸을 실었다.
[천혜의 요새 황석산성,]
그곳에 서린 7천의 비명 황석산은 단순한 명산이 아니다.
정유재란(1597년) 당시, 7만 5천 명의 왜군에 맞서 안의와 함양 등 7개 고을의 백성 7천여 명이 최후까지 항전했던 눈물의 현장이다.
비록 7천명의 백성들은 전멸했고 성은 무너졌지만 꺽기지않았다,
왜병은 2만 7천명만 살아나간 황석산 대첩의 현장을 탐방하는 계획이다
차 안에서 우리는 식민사관에 의해 왜곡된 역사를 성토하며, 456년 전 그날의 처절했던 '황석대첩'을 뜨겁게 논의했다.
황암사 주차장에서 방문인증을 하고 제일 짧은 코스. 우전마을 사방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등산을 시작한 지 20여 분,
계곡을 꽉 채운 높이 100m의 거대한 빙벽 '피바위'가 우리를 압도했다.
정절을 지키기 위해 왜놈들에게 굴복하지 않고 치마를 뒤집어쓴 채 바위 아래로 몸을 던진 여인들 흐르던 물조차
그 슬픔을 차마 잊지 못해 붉은 핏빛을 감추려 겹겹이 얼어붙은 것일까.
나는 한동안 고개를 숙여 이름 없이 스러져간 그 숭고한 영혼들을 위해 묵념을 올렸다.
다시 가파른 능선을 타고 오르니 거대한 남문 성곽이 턱 하니 버티고 서 있다.
아래서 올려다본 성벽은 높이가 20m는 족히 되어 보였다. 지형을 살피니 무릎을 탁 치게 된다.
산세가 워낙 험해 아무리 대군이라 해도 한두 줄로밖에 올라올 수 없는 천혜의 요새였다.
조총을 쏘려 해도 몸을 노출할 수밖에 없는 구조니, 단 몇 명이서도 수만 대군을 막아낼 만한 지형이다.
이 험한 바위산에 성벽을 쌓아 올린 선조들의 지혜와 기개에 가슴이 웅장해졌다.
하지만 이토록 완벽한 요새도 결국 자기만 살겠다고 동문과 북문을 열고 도망친 배신자들과
중과부적으로 달려드는 왜군들에게 함락되어 전원이 몰살당했다는 기록을 읽을 때,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다.
성 안은 의외로 완만했다. 수백 년 세월이 숲을 길러냈다.
‘건물지’ 안내판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군창이 있던 자리. 식량 70석이 저장되었다는 기록.
이곳에서 안의현감 곽준, 함양군수 조종도, 거창좌수 유범개가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백성들.나는 생각했다.
역사는 왕의 이름으로 기록되지만, 산은 백성의 이름으로 기억한다.
정상을 앞두고 가파른 바위 언덕을 오르자니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무릎이 비명을 지른다.
그때 먼저 올라갔던 현보가 마중을 내려왔다.
"힘들지? 배낭 이리 줘." 다섯 자도 채 안 되는 작은 체구로 산을 날아다니는 현보를 보며 고암이 한마디 거든다.
"저 녀석은 키가 작아서 아예 무릎 관절이 없는 모양이야. 우리는 다리가 길어서 관절을 많이 굽히니까 아픈 기고!"
그 실없는 농담에 우리는 배를 잡고 웃으며 잠시 피로를 잊었다.
[황석산 정상에서]
동문지를 지나 암봉 사이로 오른다. 하늘은 청색으로 맑다.
남쪽으로 대봉산, 계관봉, 감투산이 펼쳐지고, 멀리 감악산 풍력기가 바람을 자른다.
정상은 좁고 험했다. 삐끗하면 끝이다. 우리는 서로를 챙기며 인증 사진을 남겼다.
혼자 온 산꾼의 사진도 찍어주었다. 산에서는 누구나 동행이다. 정상 인증을 마치고 볕 좋은 바위 아래서 점심을 펼쳤다.
점심 자리에서 매실주 한 병을 꺼냈다.
먼저 술 한 잔을 따랐다
“곽준 현감과 조종도 군수, 그리고 이름 없는 7천 영혼께.” 술을 바위에 붓고 잠시 묵념했다.
바람이 지나간다. 누군가 잔을 받는 듯했다.
산천에 뿌렸다. 음복 후 거망산으로 향할지를 두고 고민이 시작됐다. 산대장인 나에게 결정권이 넘어왔다.
"무릎도 안 좋은데 그냥 내려갈까?" 현보가 묻자, 고암도 슬쩍 내 눈치를 본다.
속으로는 '그만 가자'고 해주길 바랐지만, 알량한 자존심이 앞섰다. "가보자! 거망산이 저기서 우리를 보고 있잖아!" 능선 4km.
오를 때는 용기였고, 내려갈 때는 오기였다.
[거꾸로 걷는 고행길과 거망산의 수수께끼]
그러나 거망산으로 향하는 4km 능선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60대 후반의 나이는 한 끼 한 끼가 달랐다.
무릎 통증이 밀려와 빙판 내리막길에서는 아예 뒤로 돌아서 뒷걸음질로 내려가야 했다. "아이젠 신어라!" 고암의 외침을 들으며
게걸음과 뒷걸음으로 사투를 벌였다.
드디어 도착한 거망산. 그런데 참으로 이상했다.
아까 지나온 이름 없는 봉우리가 훨씬 높았는데, 정작 이 초라하고 작은 흙봉우리가 '거망'이라는 이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거 순 이름값 못 하네. 왜 여기가 거망산이야?" 고암이 투덜대자 현보가 나름의 해석을 내놨다.
"거망산은 자기가 높아서가 아니라, 저 거대한 황석산을 바라보고 있어서 거망산인 모양이다."
[하산길의 고통과 친구의 우정]
지장골 하산길은 혹독했다.
급경사, 얼어붙은 계곡, 암벽 같은 돌길. 정비되지 않은 원시계곡 그대로댜. 무릎은 점점 저항을 시작했다. 내리막은 뒷걸음으로 내려왔다.
두 발을 같은 계단에 딛으며 한 걸음씩. 시간은 두배로 소요된다
현보는 먼저 내려가 택시를 불렀다.
고암은 끝까지 내 보폭에 맞췄다. “먼저 가라”는 내 말에 고암은 고개를 저었다.
“같이 올라왔는데 같이 내려가야지.” 그 말 한마디가 등산 스틱보다 더 큰 지지대였다.
어둠이 계곡에 먼저 내려앉았다. 멀리 불빛이 보였다.
택시였다. 구조선처럼 반가운 빛이 보였을 때, 나는 거의 '장애자'처럼 다리를 끌고 있었다.
하지만 그 고통을 견디게 한 것은 어둠 속에서 내 보폭에 맞춰 걸어준 친구들의 발소리였다.
[등산의 교훈]
"다음엔 절대로 두 봉우리 안 탄다! 약속해라!" 현보가 꾸짖듯이 소리친다
오늘 우리는 황석의 아픈 역사를 온몸으로 겪었고, 거망의 능선에서 60년 우정의 깊이를 확인했다.
김해로 돌아오는 길, 무릎은 쑤셨지만 마음만은 황석산 정상의 하늘처럼 맑고 푸르렀다.
황석산은 오늘 나에게 두 가지를 남겼다.
하나는, 역사는 바로 세우지 않으면 다시 무너진다는 것. 7천 민초의 죽음은 패배가 아니다. 그것은 존엄을 지킨 선택이었다.
또 하나는, 나이 든다는 것은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계산을 배워야 한다는 것.
거리는 오를 때만 계산해서는 안 된다. 내려올 길까지 포함해야 한다.
함양 읍내에서 한우 갈빗살로 늦은 저녁을 먹으며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밤 10시 30분, 김해 집에 도착했다. 몸은 만신창이였지만 마음은 단단했다.
황석산성은 함락되었지만, 그날의 의지는 함락되지 않았다.
오늘 우리의 무릎은 흔들렸지만, 우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산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고,
우리는 다시 오를 준비를 한다.
다음에는, 두 봉우리를 한 번에 넘지 않기로 약속하면서.
그리고 다시 한 번 마음속으로 술 한 잔을 따른다.
황석산!, 잊지 않겠다고!
피바위
선조30년 정유년(1597)에 조선을 다시 침략한 왜군 14만명중 우군 2만7천명이 그헤
음력 8월 16일에 왜군의 가또, 구로다 등의 지휘로 이곳 황석산성을 공격해 왔다.
이때 안의현감 곽준과 전 함양군수 조종도는 소수의 병력과 인근 7개 고을의 주민들을 모아 성을 지킬 것을 결의하고
관민남여 혼연일체가 되어 조총으로 공격하는 왜군에 맞서 활과 창칼 혹은 투석전으로 처절한 격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마침내 음력 8월 18일 황석산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7만 5천 300 명
왜구와의 격전이 벌어지면서 여인들도 돌을 나르며 부서진 병기를 손질하는 등 적과의 싸움에 온갖 힘을 다하였으나
황석산성이 함락되자 여인들은 왜적의 칼날에 죽느니 차라리 깨끗한 죽음을 택하겠다고 치마폭으로 얼굴을 가리고
수십척의 높은 바위에서 몸을 던져 순절하고 말았다.
꽃다운 여인들이 줄줄이 벼랑으로 몸을 던졌으니이 어찌 한스러운 비극이 아니겠는가,
그때의 많은 여인들이 흘린 피로 벼랑아래의 바위가 붉게 물들었다. 피맺힌 한이 스며들어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에도 그 헌혈은 남아 있어 이 바위를 피바위라 한다.
함양 황석산성
咸陽 黃石山城
함양 황석산성은 안의면과 서하면의 경계에 위치한 황석산(해발 1,190m)에 있는
삼국시대 산성으로 황석산 정상에서 좌우로 뻗은 능선을 따라 전북 장수와 진안으로 가는 길목에 축성되어 있다.
형식은 계곡을 감싸듯이 쌓은 포곡식 산성인데, 당시 상황으로 보아 신라가 백제와 대결하기 위해 쌓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고쳐 쌓았고 정유재란(1597)때는
이곳 황석산성에서 함양군수 조종도외 안의현감 곽준 등이 왜적과 격전을 벌여 500여 명이 순국한 곳이기도 하다
성벽의 전체 길이는 2,750m, 높이는 3m 정도이고 산성의 면적은 444,609평방미터인데,
신증동국여지승람 에는 산성의 둘레가 29,240척(약 8.9km)이며, 성 안에는 창고가 있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성문은 동.서:남.동북쪽의 4곳에 있으며, 산성 안의 계곡 주변에서는 크고 작은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황 암 사 (黃 巖 祠)
경상남도 함양군 서하면 황산리
이 곳은 1597년 정유재란 때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왜적과 싸우다 순국한 순국선열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황석산성 전투는 조선을 다시 침략한 왜군 14만명 중 우군 7만 5천명이 음력 8월 16일에 가도, 구로다 등의 지휘로 황석산성을 공격하면서 일어난 3일간(8월 16일 ~8월 18일)의 처절한 공방전이었다
이 때 안의 현감 곽준과 전 함양군수 조종도는 소수의 병력과 인근의 7개 고을(거창 초계. 합천. 삼가. 함양. 산음. 안의)의 주민들을 모아 관민남녀 혼연일체가 되어, 피아간의 포격과 함께 조총으로 공격하는 왜군에 맞서 활과 창칼과 투석전 으로 대항하였 으나 중과부적으로 마침내 음력 8월 18일 황석산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이 전투에 참여한 주민 및 병사의 수를 일부 사서(史書)에서는 500여명 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당시의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수 천에 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숙종 40년(1714)에 황석산 밑에 사당을 짖고 황암사라 사액되어 당시 황석산성 싸움에서 순절한 모든 분들의 원혼을 달래는 위령제를 지내왔으나 일제강점기에 사당이 헐리고 추모행사 마저 중지 되었다.
1987년 황석산성이 사적 제322호로 지정된 것을 계기로, 지역민의 정성을 모아 2001년 호국 의총을 정화하고 사당을 복원하여 순국선열들의 숭고한 호국정신을 이어받고자 한다
2001년 9월
함 양 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