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은 역사학자 브리기테 하만이 "오스트리아 역사에서 가장 사랑받는 여성"이라고 칭한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1717~1780)의 탄생 3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하여 빈과 빈 근교 여러 곳에서는 이 전설적인 여인을 기억하기 위한 행사들이 많이 치러졌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이 이처럼 300년이 지난 후까지 기억되는 것은 그녀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유일한 여왕이었기 때문이거나,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머니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이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의 수도 빈의 발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계몽전제군주의 전형이었다는 사실이다.
마리 앙투아네트
17세기 말부터 19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빈 도심의 윤곽을 결정지은 것은 1683년에 있었던 오스만 제국의 침공이었다. 빈은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던 헝가리 지역의 국경에서 150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1683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4세는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빈으로 향했고, 선발대는 7월 13일 빈에 도착했다. 이에 로트링겐 대공은 오스만 제국군이 엄폐물로 사용할 수 없도록 도심을 둘러산 성곽 바깥의 모든 것을 불태우도록 명령했다. 이렇게 생겨난 폭 최대 450미터, 총길이 5.2킬로미터에 이르는 공터는 우선 비어 있는 상태로 유지되었으며, 18세기 후반에 가로수가 심어진 이후 공원처럼 이용되다가, 군사적 의미가 완전이 사라진 19세기 중반에야 개발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빈의 구도심을 둘러싼 거리, 링슈트라세다. 1683년 두 달 동안이나 빈을 포위했던 메흐메트 4세의 군대는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고 있던 폴란드 군대가 도착하자마자 마침내 퇴각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오스트리아의 황제이자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버지였던 카를 6세는 이미 1713년에 국본 조직을 통해 왕위를 계승할 아들이 없을 경우 딸이 왕을 계승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아들이 없었던 카를 6세가 1740년 10월에 버섯 요리를 먹고 갑자기 사망하자 장녀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이때 마리아 테레지아는 스물세 살에 불과했으며, 네번째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국본 조직에도 불구하고 마리아 테레지아의 입지는 불안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보다 6개월 앞서 프로이센 왕으로 즉위한 프리드리히 2세(프리드리히 대왕)가 슐레지엔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전쟁을 일으켰다. 오스트리아의 영토 일부에 대한 상속권을 주장하던 바이에른의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가 작센 및 합스부르크가의 오랜 적대 관계에 있던 프랑스 부르봉가와 손잡고 오스트리아를 침략해 흔해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40~1748)'이라 일컬어지는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왕위에 오른 지 두 달 만에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러나 세 차례에 걸친 슐레지엔 전쟁과 8년이나 이어진 왕위 계승 전생을 극복해냄으로써 합스부르크 제국을 성공적으로 지켜냈다.
1683년 오스만 제국 침공을 막아내고 전쟁의 위협에서 자유로워진 오스트리아 왕족과 귀족들은 그들의 고양된 감정을 화려한 바로크 문화를 통해 드러냈다. 이탈리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18세기 초반 빈의 바로크 문화는 건축, 음악, 가구, 의상, 정원, 무대예술 등 모든 예술 분야에서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당시 지어진 바로크의 건축물들은 오늘까지 그대로 남아 당시 오스트리아 귀족들이 누렸던 영화를 자랑하고 있다.
왕립도서관은 카를 6세의 명령으로 요한 베른하르트 피셔 폰 에클라흐( Johann Bernhard Fischer von Erlach)가 짓기 시작해, 그가 죽은 후 그의 아들인 요제프 에마뉴엘 폰 에를라흐(Joseph Emanuel von Erlach)가 완성했다. 이 도서관의 일부인 프룽크잘(Prunksaal)은 '화려한 홀'이라는 이름 그대로 바로크 실내 장식의 화려함을 잘 보여준다. 프룽크잘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역사적 도서관 홀' 중 하나로 꼽히며, 이탈리아 출신 조각가 로렌초 마티엘리의 조각과 다니엘 그란의 천장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다.
오스트리아 왕립도서관
1713년에는 흑사병이 빈을 휩쓸었다. (이것이 빈에서 발생한 마지막 흑사병이었다.) 이에 카를 6세는 흑사병의 치료자로도 알려진 16세기 밀라노의 대주교 카를로 보로메오의 이름을 딴 교회를 짓기로 결정했다. 카를스 교회 또한 왕립도서관과 마찬가지로 요한 베른하르트 피셔 폰 에를라흐와 그의 아들 요제프 에마누엘 폰 에를라흐가 1716년부터 1739년에 걸쳐 지었다. 카를스 교회는 알프스 북쪽에 남아 있는 대표적인 바로크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힌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황의 개혁
마리아 테레지아가 왕위를 물려받았을 당시 오스트리아는 아직 행정체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혼란스러운 다민족 국가였다. 또한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으로 재정 상태도 열악했고, 군 체계도 효율적이지 못했다.
이러한 문제들으로 인한 개혁의 필요성을, 마리아 테레지아는 왕위 계승 전쟁과 슐레지엔 전쟁을 겪으면서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리고 거의 8년 동안이나 이어진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오자 그는 곧장 행정과 사법, 경제, 교육 등 사회 전 분야에 걸친 개혁에 착수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적국이었던 프로이센을 모델로 삼아 신분제 의회를 국가 행정조직에서 배제하고 행정 조직을 재편암으로써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했다. 대법원을 설립하고, 행정과 사법을 분리하는 동시에 귀족과 성직자, 지주들의 재판권을 크게 제한해 법치의 토대를 마련했고, 귀족과 성직자들도 세금을 내도록 하는 조세법 개정, 독점 기업 금지, 길드(동업조합) 규약 철폐 등 일련의 경제개혁 조치들을 토앻 근대적 경제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또한 의무제 초등교육 기관인 보통학교를 설립하고, 예수회 교단을 빈 대학의 감독에서 배제함으로써 고등교육이 종교가 아닌 국가의 책임과 감독하에 이뤄질 수 있도록 만드는 등 과감한 교육개혁을 단행했다. 그밖에 태형, 마녀재판, 농노제도, 농민들의 부역 등 중세적인 제도들도 철폐하거나 제한했다.
쇤부른 궁전
쇤브룬 궁전은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궁궐이자, 그녀가 가족들과 함께 생활하는 거쳐였다. 원래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의 할아버지인 레오폴트 1세가 계획해 마리아 테레지아의 삼촌인 요제프 1세 때 세워졌으나, 마리아 테레지아가 왕위에 오르고 나서 오늘날의 모습으로 보수, 확장되었다. 이때 마리아 테레지아는 피셔 폰 이를라흐의 화려한 바로크식 원안을 폐기하고 니콜라우스 파카시(Nocolaus Pacassi)의 상대적으로 수수한 로코코식 설계에 따라 궁전을 확장했다. 이는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기도 했지만, 국민과 주변국가들한테 전쟁 중에 호사스러운 낭비를 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이후 쇤부른 궁전은 여왕과 여왕 가족의 주거처가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의 궁으로 기억되고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와 가족
1723년에 카를 6세는 보헤미아의 왕위에 오르기 위해 가족들과 함께 프라하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당시 다섯 살이었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녀보다 아홉 살 많은 프란츠 슈테판 폰 로트링겐(Franz Stephan von Lothringen, 프란츠 1세)을 운명적으로 만났다. 프란츠 슈테판 폰 로트링겐은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의 소꿉친구가 되었고, 이어 평생토록 그녀의 유일한 사랑으로 남았다. 열아홉 살이 되던 해 그와 결혼한 마리아 테레지아는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1765년에 남편을 잃은 후 마리아 테레지아는 "나는 남편을, 내 친구를, 내 사랑의 유일한 대상을 잃었다"고 썼으며, 죽을 때까지 상복을 입고 지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모두 열 여섯 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녀는 천 년에 가까운 신성로마 제국의 역사상 가장 많은 자식을 낳은 황실의 여인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
마리아 테레지아는 자녀들의 결혼을 외교적 목적, 특히 프랑스 부르봉강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이용했다. 그 결과 결혼한 네 명의 딸 중 세 명이 부르봉가 출신의 왕족에게 시집을 갔다. 이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마리아 안토니아, 즉 마리 앙투아네트다. 그녀는 열다섯 살에 프랑스왕 루이 16세에게 시집을 갔으며, 프랑스 혁명 와중에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장남이었던 요제프 2세는 아버지 프란츠 1세가 죽은 후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자리를 물려받았다. (여성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왕관을 쓴 사람은 실질적으로 황제 역할을 한 마리아 테레지아가 아니라 남편인 프란츠 1세였다.) 이후 요제프 2세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죽을 때까지 15년간 오스트리아와 신성 로마 제국을 공동으로 통치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왕위에 있을 때에도 죽은 후에도 오스트리아의 영원한 국모로 사랑과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18세기 후반의 빈은 그녀가 이룩한 개혁, 그리고 그녀가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인 빈의 시민들에게 받은 사랑과 존경이 있었기에 '마리아 테레지아의 빈'이라 불릴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