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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서 전
심 정 숙
part 1. 새로운 시작
나는 중매결혼을 했다.
맞선을 보기 전에 시어머님께서 관선(당신이 미리 며느리 감을 만나 보는 것)을 먼저 하셨다.
그 시대에 관선을 하는 것이 거의 없어진 풍습이라서 조금 민망하셨는지 ‘남의 귀한 처녀를 함부로 총각이 보는 것이 실례라서’ 라는 단서를 다셨지만, 당신 맘에 들어야 아들에게 만나 봐도 좋다는 허락을 하려는 심산이셨다.
그 후 친정어머니가 마음에 드니 선을 보라는 허락이 떨어졌다고 한다.
며느릿감이 맘에 안 들어도 친정엄마만 좋으면 결혼을 시킬 수 있을까?
선을 보고 남편은 매일 전화를 해서 만났다.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에 설득력 있게 말을 잘 하는 사람이었다.
집에서는 그만하면 괜찮으니 결혼 하라고 떠밀리고 있었다.
두어 달 데이트를 하다가, 이쯤에서 청혼을 하겠구나 싶은 시점에 내가 결혼을 한번 해보자고 했다. 그러고 한 달 후에 결혼을 하니, 만나서 석 달 만에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함이 들어오는데, 친구들이 얼마나 많이 왔는지, 그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나의 어리석음이 또 드러났다. 함이 들어와 잔치가 벌어졌는데, 벌떡 일어나더니 자기가 노래를 해야겠다는 것이다. 나를 일으켜 세우고 내 손을 꼭 잡고 ‘ 나 하나의 사랑’을 불러서 처가 식구들의 인기몰이를 하고 갔다. 기타를 치며 노래도 잘하고, 그 당시 유행했던 춤 인 디스코도 아주 잘 추었다. 나와는 달리 낭만적인 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우리는 너무 다른 환경에서 자라서 무척 힘이 들었고, 조율하는 데 십년이 더 걸렸다. 남편은 친구가 많았으며, 좋아하는 사람이 줄을 서있었다. 그러다보니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고, 귀가는 거의 다음 날이었다.
또, 시어머님은 얼마나 깐깐하신지, 그 앞에만 가면 주눅이 들어 귀하디귀한 미제 그릇을 마구 깨어버려서 얼마나 민망했는지....
시댁의 풍습은 시댁 가족과 정도 들고, 식성도 알아야 한다고 육 개월을 시댁에서 살아야 했다.
위의 형님도 시숙님이 서울에서 하숙을 하면서 까지도, 시집을 산 후 살림을 나셨고, 우리 또한 그랬다. 어렵기는 하지만, 그 기간에 시부모님과 정을 들이고, 음식을 배우고 하는 시간들이 되어 힘은 들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살림을 나 시골 문간방을 얻어서 사는데, 얼마나 환경이 열악했는지 남편이 숙직만 하면 천정에서 달리기를 하던 쥐가 구멍을 뚫고 내려와 밤을 새기 일쑤였고,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잘 살아보겠다는 의지는 간 곳없었다. 밝던 표정이 어두워져가고, 웃음을 잃어가는 나를 보고, 시어머님께서 걱정을 하셨다는 말을 들었다.
난 이혼을 할 용기도 없었고, 그 때의 이혼은 꼬리표를 다는 일이었고, 부모님 얼굴에 먹칠을 하며, 동생들 혼인길도 막히는 때이었다.
남편도 인정을 한다. 시댁에서 살던 6개월을 빼고는 자기가 심했다는 걸.
성질도 급하고, 나 밖에 모르고 자랐던 내가 많은 생각을 하며, 참느라 죽을 만큼 힘이 들었다.
그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며 포기하고,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서 해결이 되어갔다.
어리석게도 다름을 인정하기가 왜 그리도 힘이 들었는지...따지고 보면 내 욕심 때문임을 안다.
가끔 엄마께 떼를 부리기도 했다. 엄마가 시집가라고 했으니 대신 가서 살라고... .
남편은 항상 술이 문제였다. 내보기엔 술인데, 절대 아니란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는데, 마땅한 놀이 문화가 없으니 술이 되더라는 말이다. 그 말이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 술이 정말 싫었다. 더러는 데리려도 가고, 음주운전도 해서 집을 발칵 뒤집기도 했다. 그런데, 술이 아무리 취해도 내가 좋아하는 거나, 그 날 먹어보고 맛있는 것은 꼭 손에 들려 있었다. 과한 술만 빼면 백점이었다.
성격이 느긋해서 별로 화를 내는 일이 없었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지 지금도 모르겠지만, 남의 남자와 이야기만 해도 싫어하고 남자가 있는 곳엔 가질 못하게 했다.
한 번은 봉사를 하고 해질녘에 집에 오는데 이웃에서 난리가 났다. 남편이 오전에 퇴근을 했는데, 열쇠가 없어서 하루 내 밖을 서성였으니, 한 바탕 싸움이 날거라는 기대를 한 모양이다.
싸움은커녕 자기 실수를 인정하고 마는 그런 사람. 내가 미안한 일이 있으면, ‘잘못했으니 여기 손들고 벌 받음 되지?’ 하면서 한 귀퉁이에 손들고 있으면 금방 픽 웃고 마는 사람이었다. 나는 밝고 성격이 활달해서 남편에게 애교를 잘 부리며 살았다.
또, 어느 여름날 자기 열쇠를 안 가져가 문을 열어달라는데, 장난기가 발동을 해서 ‘나 하나만의 사랑’을 부르면 열어 주겠다고 하니 술은 한잔 했겠다 대문을 잡고 열창을 하는 바람에 동네 사람들에게 앵콜을 받으며, 콘서트 아닌 콘서트를 하게 된 적도 있었다.
나이가 사람을 만든다고 우리는 서로에게 익숙해져 상대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며, 음악회와 소극장 연극에 빠져 다니기도 했고, 겨울방학이면 그 당시 베스트셀러이던 토지, 태백산맥, 아리랑, 장길산 등 많은 책을 읽고 때론 피가 튀게 독후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아들보다는 딸 없으면 못사는 딸 바보, 장모에게 둘도 없는 착한 사위, 어머님에게는 효자아들. 나에게는 동지애로 산다는 진심인지 농인지 모를 소리를 한 사람.
가랑비에 옷 젖듯 우린 서로에게 익숙해지며 없어선 안 되는 존재가 되어갔다.
행복하기만 할 때 그는 우리를 그렇게 떠나고 말았다.
야속하기 짝이 없게....물론 자기 잘못도 의지도 아니었지만.
1. 하늘과 땅이 맞닿다.
울적하고, 보고 싶고, 그리울 때는, 농에 깊이 넣어 둔 점퍼 하나를 꺼내어 가슴에 안고 냄새도 맡아보고, 여기 저기 뒤적여
보면서 혹여 그이 냄새가 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보지만, 어느 날 부터는 그저 옷 냄새 일 뿐인 것이 서운하고, 서럽게 느껴진다. 놓아야 된다고, 놓아버리라고 하지만, 어찌 그것이 마음대로 된단 말인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아무 흔적도 없다. 당연할 거라 생각은 하지만, 서러움이 복받쳐 꺼이꺼이 속울음을 운다.
남편을 생각하면, 너무 아프고 힘이 들어서, 억압을 하고 지내는 시간들이다.
2012년 10월 26일 저녁 9시 경에 전화벨이 울리는데, 모르는 번호이고 괜히 가슴이 철렁하면서 전화를 받았다. 동생 먼저 보낸 올케가 간암 수술과 쌍둥이 조카들이 수능을 보름정도 앞 둔 시기여서, 난 분당에 가 있었다,
한 시간 전까지 전화 통화를 한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해 의식이 없으니, 빨리 대학병원 응급실로 오라는 소식이었다. 말이 안 나와 펄펄 뛰면서 울었던 기억. 조금 있으니 둘째 시누님의 통곡소리와 그이가 떠났다는 연락이었다. 가족들의 도움으로 밤 12시가 되어 전주로 내려왔는데, 남편은 내일 가족이 모두 오면 보라며, 영안실만 하나 내어준다,
상상도 못한 일에, 억장이 무너지며, ‘난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라는 말만 되풀이 하며 내 머릿속은 텅텅 비어갔고,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딸은 아빠를 부르며 계속 울어대느라 지쳐서 쓰러지고, 나는 그저 멍하니 넋이 나간 채 앉아 있었던 것 같다. 남편은 눈가에 퍼런 멍만 들었을 뿐 잠자는 모습 그대로 이었다. 직접 보고도 믿기지 않는 일, 믿을 수 없었다.
4일장을 치르는데, 눈은 떴으되 보이지 않고, 몸은 그저 망연히 초점을 잃은 채로 물 한 모금 넘기지 않고, 잠 한숨 자지 않아도 남편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마치 보릿자루 인양 앉아만 있었던 것 같다.
주위에서 모두 흉을 보았던, 딸 바보 아빠는 어떻게 그 사랑스런 딸을 두고 갈 수가 있으며, 시어머님 누워계실 때 대소변 받아내며 정성스레 간병해줘 고맙다고, 늙어서 잘 보살펴준다고 했던 약속은 무엇이란 말인가?
백일 간은 영혼 천도에 매달리느라 밤낮이 없었고, 아무 생각 또한 없이 지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 잠깐 조는 시간에도 밤마다 꿈을 꾸는 것이다.
남편이 없어서 수소문을 해 찾아 나서면 어긋나고, 또, 물어서 걸어 찾아가면 매번 어긋나는 꿈이었다. 한 번은 어렵게 만나 집으로 가야지 왜 그러고 거기 있느냐고 집으로 가자니, 안가겠다고 손사래를 쳐서, 또 울고……
거듭되는 꿈에서 남편을 찾아다니느라, 밤이 두렵고 몸은 더 쇠락해갔다.
애가 타서 몸부림을 치며, 울다보면 엉엉 큰소리로 울게 되어 딸이 온 날은 곁에서 꿈이라고 깨워, 같이 서러워 서러워서 통곡을 하던 것이 어디 한 두 번이란 말인가?
어느 날 부터인가는 그이의 죽음을 대신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남편은 육남매의 가운데인 넷째여서 조금은 치어서 자랐고,
난 씨족만 사는 동네의 공주로 사랑이란 사랑은 다 받고 자라온 터라, 그렇게 가버린 남편이 불쌍하다는 생각에 부처님께 바꿔달라고, 간절하게 매달리며 기도도 해보고, 어느 영화에서처럼 한 달이 아니어도 좋으니 단 며칠, 몇 시간만이라도 만나 이야기라도 나누게 해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애간장이 녹는 다는 말이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인가 싶을 정도로 모든 기력을 다 소진해 버렸다.
성질이 급한 나는 무슨 일이 생기면 금방 죽을 것 같아 울며불며 이야기를 한다. 그런 날은 바로 퇴근을 해서 논리적으로 조근 조근 비근한 예를 들어가며 이야기를 해주면 내 마음은 봄눈 녹 듯 아무 근심, 걱정 없이 사라지곤 했다. 그렇게 남편을 의지하고 믿고 살아왔다. 이제 어디서 위로를 받으며, 누구를 위해 어떻게 살아야할지 망막했다.
모임에 다녀오면서 집 앞 횡단보도를 건너는 중 여자 친구와 장난을 치다 남편을 못보고 사고를 낸 27세 청년.
휴대폰 가계 점원으로 일하면서 할부로 차를 사고 보험도 들지 않은 상태였다. 세상에 필요한 사람은 그 청년보다 내 남편인데, 왜 그랬냐는 말도 안 되는 원망도 해보았다.
말없이 자상하고 언제나 나를 지지해주어, 어디서든 당당할 수 있게 해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내 남편은 그렇게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한 채 우리 곁을 떠났다.
나는 나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서로를 챙길 겨를 없이 서로 자기 상처 안에서 몸부림 쳐가며 보낸 시간들…….
밤이면 잠을 못자고, 시도 때도 없이 사고 난 자리에 가서 주저앉아 엉엉 울어 본 것이 하루 이틀이던가.
수면제를 먹어도 잘 수가 없었던 시간들. 그 젊은 청년을 용서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도를 했던가.
그러다보니, 도저히 사람 꼴이 아니라며, 일 하기를 권했다.
조울증도 있고, 감정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내가 과연 아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을까? 오히려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 처한 학생들에게 피해가 될까봐 오랜 시간을 두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 아무 생각 없이 흘러가기만을 바랐던 시간들을 좀 더 의미 있는 시간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하는 내 욕심으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전주시 지역아동센터 중학생 수학담당으로 2013년부터 일을 시작했다.
오전엔 도서관에 가서 독서치료를 받으며 강의를 듣고, 오후엔 출근해서 밤 9시까지 수업을 한다. 집에 오면 수업준비를 족히 서너 시간을 하다 보면 어느 새, 나도 모르게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들기도 했다, 또한, 주말엔 전주시 건강가정지원센터 소속으로 조부모와 사는 초·중학생 수학을 가르친다. 다른 선생님들이 마다하는 거리가 먼 순창, 동계, 고산, 경천까지 다니게 되었다. 한 번은 운전하며 남편 생각을 하다 사고가 나서 차를 폐차했는데, 그렇게 간절히 따라 가기를 원했어도 나는 전혀 다치지 않았다.
아무런 의욕도 삶에 의미도 잃어버린 채 나를 학대하며 보낸 시간들.
그래도 천직이었던지 학생과 수업을 하면 모든 시름과 서러움을 잊어버릴 수 있었다.
주중은 센터에서 보내고, 토요일엔 건강가정지원센터 배움 지도사로 아침 7시에 집을 나서면, 한 시간 반 운전에 수업을 8시간 하고 오후 4~5시가 되면, 목이 컬컬하고 다리가 후둘 거려서 겨우 집에 와 쓰러지곤 했다.
- 새로운 인연의 시작
평일에는 혼자 집에 있을 수가 없어서, 한 시간 일찍 출근을 하여 학생들 상담과 소위 수포자(수학을 포기한 학생)를 설득하여 수업을 하고, 사회복지사 선생님의 일을 거들기도 하며, 견뎌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학생들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전부가 되어 버렸고, 나를 웃고, 또는 울게도 만들어준 소중한 인연들이었다.
경제적 어려움과 질병 속에서 여태껏 당신 자녀들 뒷바라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손자 여를 돌봐야 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손가정의 학생들을 주말에 만나 정서, 심리, 학습 지원을 하러 다녔다.
이런 경우의 학생들은 조부모님의 보호나 사랑을 받기는커녕 구박덩어리로 생각하는 가정이 많아 가슴이 아팠으며, 도와 줄 방법이 그리 많지 않아 안타까웠다.
그래서 인지 자신감이 없고, 자기표현에 서툴고, 눈치 보는 아이들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사랑과 배려, 존중을 받아 보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을 하찮은 존재로 여기는 것이 더 큰 문제 이었다.
그 아이들에겐 부족한 성적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부터 알려줘 가며 자존감을 갖게 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비록 지금은 부모님과 같이 살지는 못하지만, 엄마, 아빠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우리 모두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것과, 자기가 자기를 사랑할 줄 알아야 된다는 것과 조금은 유치하지만, 자기 암시를 하게 하였다.
“나는 소중한 존재이며, 나는 나를 사랑한다!”를 세 번씩 외치고, 한 주간 즐겁거나, 힘들었던 이야기를 듣고 나눈 후 공부를 시작했다.
처음엔 몹시 쑥스러워 하던 아이들이 차츰 익숙해져가는 모습과 친숙해 지며, 거리낌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보면 흐뭇했다.
그런 환경에 있다 보니, 성적 부진아가 대부분이어서 어디서부터 가르쳐야할지 막막했다.
삼남매를 두고 부모가 이혼을 하고 각자 가정을 가진, 나보다 젊은 할머니의 아이들. 중1인데 구구단이 안 되어 구구단과 덧셈, 뺄셈부터 공부를 시작하는데 사사건건 할머니께서 간섭을 하신다. 중학교 수학은 언제 하느냐고.
그 해에는 눈도 많이 와서 어른도 힘든 때 할머니는 집을 나가셨고, 수돗물이 안 나와 밥도 못 먹고 있는 아이들을 우리 집으로 데려와 일주일 동안 같이 생활하는데, 막내는 다섯 살이라 남의 집인지도 모르며 지내고, 할머니가 오셔서 집에 가자니 우리 집에서 살고 싶다던 아이들.
그렇게 시작해서 이학기 중간고사가 끝난 어느 날 갑자기 전화기의 목소리가 흥분되어 ‘선생님 수학 찍지 않고 풀어서 62점 받았어요!’ 하며 기뻐하던 아이의 음성이 아직도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물론 이런 경우엔 상으로 그동안 갖고 싶었던 것도 사주고, 작은 축하 파티를 열기도 했다.
그렇게 조금씩 자존감을 갖게 되며, 학교와 학습에 흥미를 느끼면서 달라지는 모습은 나의 아픔과 시름을 조금은 잊게 해 주었다.
마음이 산란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경우엔, 세 번을 갈아타고, 차 시간이 맞지 않아서 시골 정류장에서 3~40분을 기다려야만 가는 생전 처음 가보는 순창군 동계면 수정. 그 곳엔 부모님과 형이 지적장애가 심하고, 이 학생만 정상이었다.
초등 3학년인 장애를 가진 형은 분노조절이 안되어 걸핏하면 칼을 들고, 엄마를 죽이겠다고 쫓아다니고, 아무리 곁에서 조부모님과 내가 말려도 안 되는 그런 환경에 밤톨처럼 예쁘고 영리한 귀한이가 있었다.
공부도 곧 잘하고, 조부모님 사랑도 많이 받고, 생활이 부족하지 않는데 단지 시골이라서 친구가 없었다. 그 아이에겐 학습보다는 놀이 위주로 만남을 가졌다. 나이 육십이 다 되어 해보지 않았던, 농구, 축구, 배드민턴, 연날리기 등을 하는데, 다녀오면 온 몸이 쑤시기도 하며 몸살이 날 때도 있었다.
시골이라서 공, 연등 놀이기구가 필요한 것은 선물로 가져가곤 했다.
일 년을 다니고 후원이 종결이 되었을 때, 특히 할머니께서 개인적으로 따로 와 줄 수 없느냐는 제안을 받았지만, 너무 멀어서 아쉬움을 뒤로 하고 끝이 났다.
올 해 유월에 일부러 선물을 사가지고 그 먼 길을 찾아갔다.
사랑하는 내 놀이친구 귀한이는 어느 새 키는 나보다 훌쩍 크고, 잘 생긴 청년이었다. 6학년이 되어있었고. 공부를 잘해서 시골에 있기는 아까운데, 마땅히 갈 곳이 없다는 말에 내가 데리고 있을 수 없어서 안타깝기만 했다.
형은 그룹 홈에서 지낸다는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 동거를 시작하다.
전주에서 멀지 않은 시골의 중학교 3학년과 같이 공부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조부모님의 사랑 속에서 자란 학생을 만나 반가웠지만, 본인 말이 중1때 조금 놀았다는 이야기를 서슴지 않는 어딘지 모르게 반항심이 조금 있는 학생 이었다. 그런 학생은 처음이어서 당황스러웠다.
같이 공부를 하다 보니 다행히 우리는 잘 통했고, 여느 학생보다 수학의 기본은 조금 되어 있어서, 재미있게 수업을 하고, 성적도 오르기 시작했으며, 시험이 끝나는 날엔 시내에 나가 좋아하는 음식을 사 먹기도 하며, 친한 친구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고민 상담을 한다면서 전주로 진학을 하고 싶은데 기거할 곳이 없어서 망설인다는 것이다. 오빠도 머물 곳이 없어서 지방에서 학교를 다닐 수밖에 없었다는 말과 함께. 며칠을 고민을 하고 이런저런 경우를 생각하다 우리 아이들과 상의도 안하고 결정을 내렸다.
합격을 하면 우리 집에서 같이 살아보자고. 단 6개월에서 1년까지만 적어도 같이 살며, 형편이 허락하면 졸업 때까지 있어도 된다는 제안이었다. 그때의 내 거처는 남편의 부재로 인해, 친정아버님과 살림을 합쳐야 할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학생은 합격을 하고, 나와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퇴근을 하면 불도 켜있지 않은 집에 혼자 있어야 하는데, 가족이 되어 같이 잠도 자고 이야기도 나누니, 그나마 조금 사는 것 같았다. 끼니도 제대로 챙겨먹어야만 했고, 때론 귀찮고 버거울 때도 있었지만 우리는 좋은 룸메이트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엘 다녀오면서 아빠를 만나서 집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고 한다. 그때까지는 아빠가 전주에 머물고 있는지도 몰랐었다.
몇 개월이 지나 집엘 다녀오더니, 아빠가 곧 집을 구하면 아빠와 함께 살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아빠는 이혼 후 술과 담배로 일관하며 직장도 없었고, 방탕한 삶을 살고 있었다고 한다. 무엇을 보고 느꼈는지 약속대로 몇 개월이 지난 후 아빠가 학생을 데려다가 가정을 꾸렸다. 비록 엄마는 없었지만.
좀 더 신경써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 사실 그때도 나는 남편의 부재를 실감치 못하고 힘이 들었던 때이다.
섭섭했지만, 이 보다 얼마나 더 좋을 수가 있을까 싶어, 우리는 그렇게 헤어진 후, 가끔 전화도 하고 방학엔 맛있는 점심도 같이 먹곤 하였다.
그 무엇보다 마음이 흐뭇했던 것은 비록 엄마는 없지만, 아빠가 정신을 차리고 술과 담배를 줄여가며 일자리를 얻었고, 가정이 꾸려졌다는 것이었다.
- 졸업 전에 취업을 하게 되다.
그 후 한동안 일이 있어서 졸업식에도 못 갔고, 졸업 축하 겸 만나서 점심을 먹었다.
졸업 전에 취업이 되어 출근을 하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과 자기가 하는 일, 동료, 상사 이야기를 하면서 즐겁게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내가 취업이 된 듯이 기뻐 마음껏 축하를 하고, 맛있는 점심을 먹고, 할머니께서 손수 깎아 만드신 곶감을 선물로 내놓으며,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대학은 이삼년 후 동일계 진학을 해보겠다는 포부도 가지고 있고, 앞으로의 진로가 확실해서 더욱 좋았다.
우리 아이들이 상의도 안하고 학생을 들였다고 항의를 했었지만, 그 학생이
전주로 학교를 오게 됨으로 해서 꿈을 이루게 되었으며, 무엇보다 아빠와 온전한 가정을 꾸리게 되어 큰 보람을 느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작은 손 내밂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가?
그때의 내 선택이 옳았고, 삶에 친구를 하나 더 얻었던 것이다.
- 가장 행복한 시간을 선물하게 되다.
그날도 센터에 일찍 출근을 했는데 형제가 다투고 있었다, 서로 책임을 전가하는 소리가 들려서 상담실로 둘을 데리고 가서 자초지종을 들어보았다.
아버지의 폭력이 심해 학교 상담시간에 사실을 이야기했더니 학부형 소환이 내일인데, 아버지가 학교에 다녀오면 또 폭력에 시달릴 거라는 것이었다. 예전에도 삽으로 맞아서 다리가 부러지기도 하고, 머리가 찢어져서 꿰매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중3과 중2 남학생이 벌벌 떨면서 울기 시작한다.
경찰에 신고를 해보았지만, 아버지께서 내 자식 내가 버릇 고치는데, 당신들이 웬 상관이냐고 하면 아이들을 내어 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내일 만약에 아버지의 폭력이 시작되면 둘이니까 막아서고 일단 도망을 나와 나에게 전화를 하라고 했다.
마침 토요일 이어서 센터의 아이들은 현장학습을 가고 열한시쯤 되어서 전화가 왔다, 베란다 한쪽에 예전에 때려서 다리가 부러졌던 삽이 있었고(아버지가 버렸다고 했다고 함) 아버지 차 소리가 들려서 하나는 슬리퍼 바람으로, 하나는 맨 발로 도망 나와 센터에 있는데, 아버지가 쫓아와서 문을 두드리며, 여기에 숨은 것 다 알고 있으니 어서 집으로 오라며 화를 내고 가셨다며 아이들이 어쩔 줄 몰라 했다.
바로 센터로 가서 애들을 우리 집으로 데리고 와서 아버지께 전화를 했다.
센터에 근무하는 선생이며, 집 주소와 전화번호, 이름을 알려드리고, 애들이 무척 겁을 먹었으니 진정시켜서 보내마고 잘 말씀을 드렸다.
그리고 센터 장에게 전화를 해서 어제부터의 일을 이야기하고 일단 우리 집에서 보호를 하고 있었다.
센터장과 아버지, 학교 담임선생님과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해결책이 보이지 않았고, 아이들을 우선 보호할 만한 곳을 찾지 못하여 우리 집에서 당분간 지내기로 했다. 아침이면 등교를 시키고, 센터에서 수업 후 데리고 퇴근을 하게 되었다.
한참 성장기 아이들이라서 집에 오면 이것저것 먹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야식도 먹고, 이야기도 많이 하고 그렇게 이 주 정도를 지냈지만, 아이들은 이혼한 엄마에게로 가겠다고 하고, 아버지는 못 준다고 팽팽하게 맞서 해결이 되지 않고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나는 좀 떨어진 곳으로 이삿날을 받아놓은 상태였다. 결국 이사를 가기까지 해결이 안 되어 이부자리를 챙겨서 센터의 방으로 옮기고 한 동안 지내다가 수원에 있는 엄마에게 가게 되었다.
두 학생이 담임선생님과 센터의 친구들에게 ‘선생님 집에서 지낸 이 주간 자기들이 철이든 후 제일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이야기를 해서 눈시울이 붉어지며 더 함께하지 못함이 못내 서운하기만 했다.
지금도 카카오 톡과 전화를 하고, 방학에 전주에 내려오면 시간을 내서 만나는데, 어느 새 철이 들어 취업해서 엄마를 도와드리겠다고 한다.
따로 많이 챙긴 것도 없고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을 좀 하게 해주었을 뿐이었는데 그 시간이 행복했다니 내가 고마울 따름이었다.
- 나눌 수 있음에 감사드리는 시간을 갖게 되다.
그동안은 여러 가지 봉사를 하면서 맘껏 경제적 도움을 줄 수 없어서 안타까웠다. 그런데, 이렇게 힘든 시간을 견디게 해준 아이들에게 많지 않은 월급이지만, 그들을 위해 쓰고 싶었다. 센터에 다니는 아이들과, 조손가정 학습지원 대상자는 대부분 경제적으로 어렵고 힘든 상황이었다. 아이들이 많은 센터에서는 센터 자체도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다. 그래서 어려운 학생 교복 맞춰주기(춘추,하, 동복), 겨울 센터 난방비, 현장학습 간 식비, 아이들 생일 찾아주기, 년 말 시상식과 졸업, 입학식에 상품사주기, 조손가정 아이들 동화책 선물, 생일 찾아주기 등 그렇게 나누어 쓸 수 있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그 숫한 시간들을 얼마나 큰 고통 속에서 고립되어 지내고 있었을까?
받는 기쁨보다 주는 기쁨은 두 배가 아니던가.
원불교 경전에 ‘ 봄바람은 사 없이 불지마는 산 나뭇가지라야 그 기운을 느낀다.’라는 말씀이 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어떻게든 산 나뭇가지가 되어보려고 늘 마음에 새기며 살아온 시간들이었다.
어디선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이 떠나면 마치 내 자신을 잃어버린 것처럼 착각을 일으켜서 내 자신도 잃어버렸다고 느끼고 허무함과 무력함을 느끼는 것이라고.
나 역시 그랬던 시간이었다.
살면서 봉사활동을 하거나 좋은 인연들은 수없이 많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이 아이들 이야기가 하고 싶었던 것은 가장 힘든 시간에 있었던 사람들 이야기라서 더 쓰고 싶었던 것 같다.
순간순간 슬픔을 잊게 한다는 의미가 내 자신의 최종적인 치유는 아니었을지 모르겠지만, 결국 사람에서 오는 봄바람만이 사람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남편을 잃어버리면서 나도 잃어버렸던 내 자신을 그 아이들을 보면서 조금씩 찾아갔던 시간이 아닌가 싶다.
결국 그 봄바람은 그 아이들의 나를 향한 애정과 믿음의 눈빛이었고, 그걸 느꼈던 남편과 함께 죽어버린 나뭇가지 같았지만 나 역시 산 나뭇가지였다.
자칫 우울증에 빠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시간들을 아이들과 인연을 맺고, 나누고 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던가.
남편이 있었다면, 자랑스러워하고 잘 했노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 뼈아픈 나날들을 그나마 잘 보낼 수 있었음에 감사드린다.
또한, 중학교 입학식 전까지 한 학기 수학을 마쳐야 되는데, 한 단원을 공부하지 못했다고 3월1일 우리 집까지 와서 문제집을 마무리 하고 간 모범생 유 영현, 걸핏하면 ‘나는 분노조절 장애예요’ 하며 화를 내던 학생 등 많은 아이들을 잊을 수가 없다. 그 누구하나 소중하지 않고, 사랑스럽지 않은 아이가 있었던가. 지금도 그 일을 하고 싶은 충동을 가끔 느낀다.
Part II 인생을 U턴하다.
채워지지 않는 욕구
집에서 애들 키우면서 멍하니 시간보내기가 싫어서 이것저것 잡다하고 소소한 취미생활을 시작했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실력이 된다 싶으면 흥미가 떨어지고 성취 욕구를 채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눈을 돌린 것이 봉사였다. 내 스스로가 사회에 공헌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장애인 목욕, 재가복지 등을 오랫동안 해왔지만 체력적인 한계로 인해 몸이 지쳐갔고 뿌듯한 마음 한편에 나의 숨겨진 자아실현에 대한 욕구가 채워지지 않아 마음 역시 지쳐갔다.
젊은 시절 나는 외벌이인 남편의 월급으로 애들 둘 교육에 시부모님 용돈에 빠듯한 생활을 했던지라 소소한 취미나 봉사에만 열중해왔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크고 경제적으로 조금이나마 안정이 된 후에야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할 여유가 생겼다.
나는 공부가 하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건 젊은 시절에는 그냥 그리 지나쳐버렸던 공부였다. 공부하기를 그토록 바랐던 것은 내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열등의식이었던 것 같다.
나의 오래된 강한 열등의식은 아마 이때부터로 기억 한다.
보리가 누렇게 익어가며, 뻐꾸기가 목이 쉬게 울어댈 때면 지금도 가슴이 싸해지며 며칠은 가슴앓이를 한다.
고2때 다섯 명이서 덩어리로 한참을 어울려 다녔다. 둘은 여자, 셋은 남자.
다 고향이 같고 서로 집안끼리 잘 하는 사이였다.
이후로 가끔 같이 만나서 놀기도 하면서 둘은 지방 의대에, 한 친구는 서울의 명문대에 합격을 해서 서울로 가면서, 공부해서 꼭 서울로 대학을 와서 만나자는 말을 심각하게 했지만, 난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몰랐다.
그는 방학이나 집에 내려올 때면 항상 우리 집엘 먼저 들러 밥도 먹고, 같이 나가 놀면서 정이 깊어져갔다. 모자라는 용돈으로 읽으라며 사 준 책들이 지금도 친정서가에 꽂혀있을 것이다.
대학원 졸업을 한 학기 앞 둔 어느 날부터 연락이 없었지만, 그 시절에는 마땅히 연락할 방법도 없고 그냥 공부하느라 그러나 보다하고 지내던 중 다른 사람에게 그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결혼할 여자와 함께 미국 유학을 떠났다고.
이게 무슨 청천벽력이란 말인가?
난 식물인간 비슷하게 되어, 밤과 낮 구별도 없이 그저 내 방에 처박혀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그냥 누워 지냈다. 무려 반년 정도를·…
그런 나를 보며 어머니는 왜 송장처럼 누워만 있느냐고 말을 해보라고 달래기도, 으름장을 놓기도 하셨지만, 나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어머니도 그 사람이 집에 들른 지가 오래 되니 눈치를 채셨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종가라 기제사면 제군(제사를 지내러 오는 분)들이 삼십 여명, 시골에서 고등학교 진학을 와 같이 지내는 친척이 여섯, 남동생이 셋이니 아주 대가족이었다.
이런 속에서 내 상처를 다스리기엔 너무 힘든 시간들이었다.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고, 중학교는 기숙사에서 학교를 다니니 그리 힘들지 않아서 성적이 상위권 이었지만, 고등학교 때 집이 전주로 이사를 오면서 학교는 멀고, 도시락 두 개, 참고서에 문제집이 무거워 학교에 다니는 것만으로도 내겐 힘겨웠다. 그래서 반복학습을 할 여유도 없었고, 공부를 해야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게 지내다 대학입시에 실패를 했다.
그때 주변에 조언을 해 줄 사람이 있었거나, 내게 꿈이 있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내 생활은 그저 편하고 별달리 불만도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도 되는 걸로 막연히 생각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우리 교육은 스스로 알아서 하기를 바라실 뿐 당신이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걸로 몸소 보여주시기만 했다. 우리는 꾸중을 들어 본적도 공부하라는 말을 들어 본적도 없었다.
아래 남동생은 다들 알아서 공부하고 전교 1~2등을 했으니까.
대학진학을 못해서 내 삶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철부지였다. 아프기만 했던 것이 아니고 난 그때부터 열등감과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도태된다는 생각에 나를 매여 놓고 조이며 살아왔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친정어머니께서 물으셨다, 그때 그 ㅇㅇ이 사위가 될 줄 알았는데, 어찌 된 영문이었느냐고, 무척 섭섭하셨다고 하셨다
‘최고의 대학을 졸업한 엄마 아들이 고졸 출신하고 결혼한다면 찬성하시겠어요?‘ 그 대답을 하면서 가슴이 탁 막혀서 먹먹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당신 잘못이라며 대학 말만 나오면 자탄을 하셨다. 동생들 서울로 대학 보낼 생각만 했지 그냥 사립대라도 보낼 것을 당신 잘못이라고.
그렇게 난 부모님의 아픈 손가락이기도 하다.
호되게 아프기도 했고, 열등감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난 그 뒤로 배움에 게으름을 부리거나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쓰며 살아왔다.
왕언니 생활의 시작
일 년 먼저 방송대 입학한 후배의 권유는 있었지만 자신이 없어 일 년을 머뭇거리고 말았다. 2006년도엔 딸아이가 적극적으로 권유하며 힘을 실어주었다.
혼자는 갈 용기가 나지 않아서 딸의 차를 타고 같이 출신교교에 성적증명서를 하러 갔는데, 차마 딸에게 보여 줄 수가 없었다.
성적이 더 좋았다면 얼마나 떳떳할까 싶은 생각에 얼굴이 화끈 거렸지만
속이 꽉 찬 딸아이는 무심한 척 했다.
그렇게 어려운 결정을 하고 방송대 교육과에 입학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 내 나이가 53세 이었다. 그동안, 나에게는 누구 엄마나 아주머니 이었지만, 이제부터는 시험지에 내 이름을 쓰고 딸 비슷한 연배의 아이들로부터 왕언니라는 호칭을 받게 되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고, 뭘 그리 어렵게 생각했었는지 모르겠다.
입학하고 이주쯤 후, 출석 수업하고 첫 시험인데 시험문제는 생각이 나지 않지만 전지에 ‘~에 대해 논하시오’ 이었다.
가슴이 두 방망이질을 하면서 떨려오는데 머릿속이 하해지 며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서 대여섯 줄을 쓰고 나니 더 이상은 이어 나갈 수가 없었으며, 아~ 왜 그리 시험 시간은 길던지…… 잘 쓴다는 글씨는 지렁이가 기어가는 형상이었다. 그런데 곁에 앉은 같은 동아리의 남희는 얼마나 빨리 많이 쓰는지 책상 위를 닥닥 거리며 전지 앞뒤를 꽉 채워 쓰고 있었다.
결과는 뻔해 30점 만점에 22점을 받았다. 공부한 기간을 통틀어 최악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공부가 내 유년 시절을 빼고 가장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들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만나 도시락을 먹어가며 학습동아리에서 하던 공부. 대부분 가정 형편으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늦게 시작했다는 공통점이 있어서 서로를 챙기며,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이 포기하지 않도록 이끌어가는 아주 끈끈한 정을 나누는 학습동아리가 있어서 나는 적응하기도, 공부하기도 한결 수월했다.
시험 때가 되면, 내가 힘들어 할까봐 요점정리 한 것도 나누어 주고, 난 도서관에서 열두 시까지 공부를 하면 남편의 전화가 빗발쳤고, 남편의 지원 또한 대단했다.
좋은 스피커, 헤드 셑, A4용지등 미리 준비해 주고 시험공부를 하고 있으면, 끼니를 준비하기도 했다.
동아리 동생들이 장학금을 받는 걸 보고, 오기가 나 열심히 공부해서 나도 장학금을 받아 가족들에게 체면치레도 했다.
막 재미를 붙였고 어렵게 시작한 공부에 신바람이 나있는 상황에 원불교에서 봉공회장 직을 제의를 받았다. 여러 번 거절을 했지만, 나의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 곳이었고 거절을 못하는 성격과 교도들의 기대감도 저버릴 수가 없어서 결국 수락을 하게 되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힘이 들었다. 공교롭게도 학교 시험 날과 중요행사가 겹치다 보니 주위의 따가운 시선과 죄책감, 나 자신이 떳떳하지 못함 때문에 견딜 수가 없어서 휴학계를 내고 한 학기를 열심히 원불교에서 일은 하지만, 늘 가슴 한편에 이러다 학교를 못 다니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나를 조바심치게 했다.
다음 학기에 복학을 하고, 둘 다 평균치만 하자는 생각에서 공익 보다 사익을 취해버렸다. 지금도 그때의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 한다.
대학 4년 동안에 가장 가까운 세 사람을 하늘나라로 보냈다. 입학식에 다녀오니 아버님이 병환이 나셔서 익산까지 다니며 간병을 하다 결국 기말고사 끝나는 날 열반을 하셨다.
맘먹고 열심히 공부 좀 해보자 생각했건만 이 학기를 시작할 무렵에 막내 남동생이 대장암이 재발하여 간병을 하기위해 분당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 와중에 레포트도 써내곤 했는데, ‘루소의 에밀, 은 너무 난해해서 도저히 쓸 수가 없다고 하니, 번역이 잘못 되어 그렇다며 동생이 써주었는데, 학교에서는 전문가에게 산 것인 줄 알고 점수를 16점을 주기도 했다. 결국 4개월여 만에 동생을 보내고 집에 오니 친정어머님이 막내아들을 잃고 정신을 놓아 버리셔서 아버지와 그 뒷바라지를 하면서 결국 졸업시험 보는 날 어머니 또한 막내를 따라 가셨다.
대학을 다니는 동안 마음 아픈 일들이 내 발목을 잡아버리기도 했지만, 난 더 이상 학업을 포기 할 수가 없었다. 학습동아리의 친구들 덕분에 졸업을 하면서 자격증을 이것저것 더하게 되었다.
학점도 우수했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생각지 않게, 첫사랑과 대학을 못가서 헤어지면서 생긴 열등감이 싹 사라지게 된 것이다.
4년 동안 힘든 일도 많았고, 시작은 열등의식 이었지만, 나중에는 공부에 대한 열정 이었다,
앎에 대한 기쁨, 지식의 나눔이 공부를 포기 하지 않게 했다.
또한, 일을 하려면 컴퓨터를 알아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육 개월 동안에 걸쳐, 한글·엑셀․ 파워포인트를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자격증이 생기니 일선에서 일을 해보고 싶은 욕구가 점점 커져서, 이곳저곳에 지원을 해보고, 자기소개서도 써보고, 면접도 보았으나, 나이가 많으니 매번 낙방이었다.
주위에서 용기가 대단하다고 하였으나, 일에 대한 내 욕구는 무척 강했었다.
결국엔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고, 원래 생각대로 봉사로 눈을 돌려서 국제 성취포상제의 포상담당관으로 청소년들을 만나는 일을 하면서, 전주시건강가정지원센터에서 배움지도사를 뽑는데 가보니, 모두가 대학 1~2년생이었는데 나만 할머니였지만, 면접에서 통과하고 교육을 이수하고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나이가 많아서’ 라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더 성실히, 열심히, 정성껏 지도해서 그 해 년 말에 첫 번째로 수상을 하게 되었다.
또 상담을 하고 싶어서 국가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열심히 준비하면서, 매월 열리는 슈퍼비젼을 빠지지 않고 쫓아다니며 상담 스킬을 배우고 모르는 것은 질문을 하는 열정을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준비 했는데, 딸의 결혼식 날과 시험이 겹쳐서 시험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평생 아쉬움으로 남긴 하지만, 해 놓은 공부가 어디로 가는가?
사람을 만날 때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고 공감하고, 같은 말이라도 곱게 듣기 좋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것을 한참 후에야 알고서 그 또한 기쁨이었다.
나머지는(그리고 중 어떤 제목이 나을지)
남편의 부재는 많은 어려움이 따르지만, 제일 마음 아픈 것은 애들에게 짐이 되는 것이다.
난 딸아이의 쌍둥이를 기르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는데, 딸은 엄마를 혼자 둘 수가 없어서 라는 서로 다른 마음으로 이곳 오송으로 이사를 왔다.
시골이고 나를 모르는 사람들 속에 섞여 좀 활발하게 살아보리라 생각했지만, 갈 곳도, 할 일도 마땅히 없어서, 또 쳐지고 우울감에 빠지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퇴행성관절염으로 두어 달을 아프고 나니, 자신감도 저하되어 힘든 시간들이었다.
쌍둥이가 어린이 집을 가고 나면 뭘 해야 할지... 많은 것들을 하고 싶었던 욕구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이 프로그램이 이미 시작된 것을 알게 되었다. 글을 써 본적도 그렇다고 책을 많이 읽은 것도 아닌 내가 항상 그랬듯이 망설임 없이 능력껏 하면 된다는 심산으로 무모한 도전을 또 하게 된 것이다.
수업 계획서만 보아도 설레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고, 이 번엔 어떤 인연들과 만나서 공부를 하게 될까 하는 기대감도 나를 조금은 들뜨게 하였다.
요즘은 내 표정이 조금 밝아지고 있는 것같다. 생활에 활력이 생기고 때론 머리가 아플정도로 생각을 해도 잘 풀리지 않는 글같지 않는 글을 쓰면서도 말이다.
열심히 공부해 조각 글이라도 써서 주변에 좋은 영향을 주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고, 글 쓰는 멋쟁이 할머니로 늙고 싶다는 상상을 하면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아직도 배움에 대한 욕구가 강해서 칠십 전에 해야 할 버킷리스트가 있다. 그 중 오페라 아리아를 한 곡 원어로 불러보고 싶어서 베르디의 오페라 춘희 중 ‘축배의 노래’를 배운다.
혼자서 멜론을 틀어놓고. 처음 해보는 이태리어로. 노래는 연음 때문에 힘이 들고 또, 키도 맞지 않는다. 한 옥타브 내려 부르면 되는 것이지. 곁에서 딸아이는 빙그레 웃기만 한다. 몇 년이 걸리면 어떠한가? 배우면서 즐거우면 되는 것이지 싶다.
십분의 일 정도는 곧 잘 부른다,
또 배우다 만 통기타도 배워야하고, 추구집(우리 선조들이 애송한 다섯 글자로 된 시)을 더 공부해서 옛 선조들의 멋과 맛을 더 알고 싶다.
어디 그 뿐인가? 책 몇 권과 음악만 들고 국내를 한 달쯤 여행하고 싶다.
이렇듯 오송 도서관에서 자서전 쓰기를 하면서,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고 활력을 되찾게 되었다. 또한, 다시 한 번 내 삶을 뒤돌아보게 되었으며, 언제부턴가 넉넉한 마음으로 상대가 실수를 하거나 잘못을 해도 이해가 되고,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아지고, 서로 다름을 인정하게 되는 넉넉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조금은 낯 선 나를 보게 되었다.
내가 편안해야 남의 성공도 마음껏 축하해 줄 수 있고, 사랑도 받아 본 사람이 사랑을 나눌 줄 안다. 내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이 나도 남을 사랑하고 나눌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해 주신 것에 대해 무한히 감사드린다.
이제 새로운 희망이 생겼다.
너무 늦었는지 모르지만 내 생각을 글로 표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가 못 되면 어떻고 내 글이 좀 부족하면 어떠랴.
글을 쓰는 과정이 즐겁고 행복하면 되는 것이지.
부끄럽기 짝이 없는 글이지만, 교수님 말씀대로 자녀에게 깨우침이 되거나 본보기가 되는 글이면 된다는 말씀에 용기를 얻어 나를 발가벗기게 되었다.
나의 철없음과 어리석음. 또 쟈녀 교육에서 어릴 때부터 꿈을 꾸게 하고, 진지하게 자기의 삶에 대해 깊이 있게 고민하는 시간들을 갖게 하고.
많은 관심과 깊이 있는 대화의 시간을 많이 갖아야 되지 않을까 싶다.
늦은 공부를 시작하게 된 동기가 처음엔 열등감이었는지 모르지만 원래 난 욕심이 아주 많다.
특히 앎에 대한 것은.
이 글을 쓰므로 해서 남들이 남편에 대해 물으면 사실을 말 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좀 더 솔직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물론 앞으로도 쭉 배우는 곳엔 계속 기웃거릴 것이다.
그것이 나고, 나 또한 그러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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