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우, 들불처럼 일어서는 연두색 들녘. 못자리엔 반짝반짝 황금볍씨가 뿌려지고, 제비 두엇 절창(絶唱)을 부르고 간다. 논두렁 샛밥이고 건너오는 *몸뻬바지. 고사리순마냥 꽉꽉 감은 파마머리에 수국처럼 얹은 수건. 쳐든 팔 저고리 사이로 수줍은 속살이 보였다 감춰지고 고무신은 질컹질컹 물을 씹는다. “어이”. 아버지 손사래 보고 그제야 번지는 말간 웃음, 우리네 어머니.
가난한 농군의 아내이자 밥내 나는 기억 속 어머니는 늘 몸뻬 모습이었다. 굽은 허리 끌고 밭고랑 풀을 뽑을 때도, 빨래터에 주저앉아 방망이를 휘두를 때도, 5일장 푸성귀 한 줌 올려놓고 손님 기다릴 때도, 봄날 주체 못하는 춘곤증에 괭이잠을 잘 때도 몸뻬차림이었다.
“패션이 뭔 패션이여, 편하면 됐지”
광목에 검정물을 들여 허리와 발목만 잘록하게 만든 헐렁한 바지. 비록 *‘관절염 앓는 펭귄’마냥 뒤뚱뒤뚱 모양새는 흉했으나 어떤 체형이든 입을 수 있는 만능 간이복이었다. 고무줄 넣은 허리는 훌렁훌렁 입기도, 벗기도 편했다. 겨울에는 두둑이 솜을 넣어 누벼 입고 여름엔 잠자리 날개 같은 홑겹 속으로 바람이 솔솔 들어왔다. 또 몸태가 드러나지 않아 어른 앞에서 왔다갔다 해도 민망하지 않았다.
특히 삼태기 하나 들고 부역 나갈 땐 몸뻬 행렬을 이뤘다. 남편 바지를 개조하거나 그것도 마땅치 않으면 시어머니 고쟁이 밑을 꿰매 입었다. 군대간 오빠가 휴가 때 숨겨 나온 담요로 여동생들은 몸뻬와 코트를 만들어 입는 곤궁한 시기도 있었다.
‘진달래 먹고 물장구치고 다람쥐 쫓던…’ 이용복의 ‘어린 시절’을 동네 사랑방에서 읊조리던 사춘기 가시내들도 몸뻬세대다. 아버지 낡은 와이셔츠를 줄여 만든 블라우스에 몸뻬를 입고 뒷방에서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며 풋내나는 사랑을 키웠다. 모양이야 어쨌든 어른들 눈 피해 누룽지나 고구마를 밖으로 나를 때 요긴했다. 발목 바지춤에 넣고 달리지만 않으면 사립까지 무사통과였다. 어른들도 배곯는 자식 생각에 잔칫집에서 떡이며 전 조각을 숨겨 나올 때 이 ‘발목 호랑’을 애용했다.
갈래 머리 잘라 *‘후카시’를 넣고 미니스커트로 멋 한 번 부릴 수 있는 장날. 미리 말을 맞춘 가시내들은 아침이면 몸뻬 차림으로 마을 어귀에 모였다. 나무 뒤에서 서로 망봐주며 스커트로 갈아 입고 완행버스에 몸을 실었다. 들키면 ‘다 큰 처녀가 허벅지 내놓고 다닌다’며 지청구는 물론이고 ‘금족령’이 떨어졌다. 아버지보다 무서웠던 오빠는 스커트를 불쏘시개로 살라 버려 어린 맘에 상처를 주기도 했다. 게다가 읍내에선 경찰들이 대나무자를 들고 다니며 즐기듯이 허벅지를 훑고 다녔다. “병수와 사귄다는구먼” 하는 소문이라도 돌면 그날은 머리를 가위질당하고 몇 달 꼼짝없이 근신해야 했다. 사내놈들은 가죽점퍼에 바지를 허리춤까지 올리고 휘파람 휙휙 불며 근동을 고릴라처럼 어슬렁거렸다.
또 여학생 교복도 몸뻬 형이 많았다. 흰 칼라 *‘우와기’에 발목을 *‘호꾸’로 여미는 몸뻬형 ‘쓰봉’이 입혀졌다. 핀으로 고정시킨 빵떡모자까지 쓰고 나면 절구통이 굴러다니는 것 같았다. 그래도 교복은 부잣집 딸의 상징으로 부러움을 샀다.
대부분 농부의 딸들은 가발, 피복공장에 취직했다. 볕 안드는 지하실에서 얼굴은 백지장처럼 뜨고, 그래도 고향 한번 내려올 때는 온갖 멋을 다 부렸다. 야밤 뾰족 구두에 뒤꿈치 물집 잡혀 절뚝절뚝 마을로 숨어들면 멋모르는 동생은 한없이 부러워했고, 어머니는 아궁이 곁에 앉아 눈물만 찍어냈다.
좁은 골방에서 실먼지 하얗게 쓰고 더럭더럭 미싱만 돌렸을 모습이나, 어느 뒷골목에서 술살이 풀썩 오른 얼굴에 꼼장어 익듯 자글거릴 가난의 연기가 한탄스러웠으리라.
몸뻬와 함께 아낙들의 사랑을 받았던 *월남치마. 월남에는 월남치마가 없다고 하던가. 화려한 꽃무늬에 고무줄 허리, 발목까지 닿는 이 한국식 통치마는 여전히 아줌마의 대명사다.
치마를 들추면 속바지가 나오고 그 속에 꽃술처럼 드러나던 빨간 내복. 할머니들은 속바지 앞쪽에 무명천을 덧대 ‘호랑’을 달았다. 비밀상자처럼 아이들의 호기심을 당기던 불룩한 주머니. 옷핀을 빼면 그 속에 손수건이 정성스럽게 둘둘 말려 있었다. 고깃고깃 접혀 있던 지폐 한 장. 종종 오래돼 눅눅해진 박하사탕이나 대추, 밤도 어린 손주를 기쁘게 했다. 점방 앞에서 만난 할머니는 그 많은 옷을 걷어올리고 아끼고 아꼈을 지폐 한 장을 쥐어 주셨다. 아이들은 흔치 않은 단것을 혓바닥에 녹여 내며 행복해 했다.
밥상 들고 팔락팔락 문지방을 넘던 새색시의 가벼운 걸음새나, 고개 너머 다락밭 매러 갈 때 바람에 나부끼던 어머니의 월남치마 모습은 잊혀지지 않는 추억의 패션이다.
박수근의 그림 속 수건 두른 어머니가 광주리를 이고 겨울나무 아래 서성거리던 흑백 영상. 한복 저고리에 까만 몸뻬바지의 미학. 안기면 분내 살짝 나던 마흔의 ‘젊은 엄마가 길모퉁이를 막 돌아나올 것만 같다.
▶그시절 이런말 저런말
*몸뻬
허드렛일 할 때 입는 바지. 본래 일본 여성의 노동복으로 1940년대 일제가 전시에 동원하기 쉽도록 한복 대신 입게 강요했다. 반발이 심하자 몸뻬를 입지 않으면 전차나 버스를 못타게 했다. 쌀 배급, 징용을 통해 보복도 일삼았다.
*관절염 앓는 펭귄
일제가 몸뻬 착용을 강요하자 당시 아사히신문은 ‘몸뻬가 웃긴다’는 글을 실었다. ‘방공연습하는 부인들의 류머티즘 앓는 펭귄 같은 차림에 웃음이 절로 나온다’고 비꼬았다.
*라디오
목침 만한 라디오에 몸집보다 더 큰 건전지를 고무줄로 둘둘 묶어 들고 다니며 들었다. 흔치 않지만 다리가 네개 달린 큰 전축이 있는 집도 있었다. 이 일제 전축을 사려면 소 한마리 값은 줘야 했다.
*후카시
크게 부풀린 머리. 바가지 머리와 함께 멋쟁이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우와기
윗도리.
*호꾸
옷의 터진 곳을 맞물리어 잠그는 갈고리 모양의 물건. 호크의 일본식 발음. 걸단추.
*월남치마
1960, 70년대에 많이 입었던 길이가 긴 치마. 한국군이 베트남전에 참전하면서 베트남 여자들이 입던 원피스를 들여왔는데 불티나게 팔렸다. 베트남(월남)에서 들여왔다고 하여 월남치마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