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조선시대 수학자의 활동과 침체원인
분야 ; 수학Ⅰ 수행평가 우수 과제물
필자 ; 부산과학고 2302 신혜경
1. 조선시대의 수학
고려왕조가 망한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조세 부과에 따르는 농지측량의 문란 이었다. 따라서 세종은 과거의 잘못을 거울삼아 전제 평정소를 설치하고 농지제도의 확립을 꾀하였다. 여기서 필연적으로 통일신라나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정치 기술상의 필요 때문에 수학지식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게 되었다.
세종은 산술적 기초에 주목하여 산사의 양성과 임용을 꾀하였고 왕 스스로 당시 부제학이었던 정인지로부터 '산학계몽'에 관한 강의를 받았다.
세종 20년에 제정된 '잡과십학'에 관한 교육과정 중에서, 산학의 내용은 상명산, 양휘산, 계몽산, 오조산, 지산의 5교과로 되어 있다. 세조 시대에 착수되고 성종 16년에 완성된 '경국대전'에는 산학의 제도가 더욱 정비되었으며 산학박사대신 산학교수 1명, 별제 2명, 산사 1명, 계사 2명, 산학훈도 1명을 두었다.
세종 때 '오조산'을 교과서로 채택한 것은 눈길을 끄는데 오조는 전조, 병조, 집조, 창조, 금조의 5대 관서를 뜻하며 이러한 부처에서 필요한 계산술을 정리한 책이 '오조산경'이다. 각 항목별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전조(田曺) - 농지 면적의 계산법에 관한 문제.
예) 환전(環田, 두개의 동심원 사이의 농지)이 있다. 외주가 30보, 내주가 10보, 경이 3보일 때 그 면적은 얼마인가?
병조(兵曺) - 병사의 징집, 양곡이나 의복의 급여, 소나 말의 사료 등에 관한 문제
예) 장정 23,692명 중에서 5,923명을 징집하려고 한다. 몇 사람 중 하나 꼴로 뽑으면 되는가?
집조(集曺) - 음식에 관한 문제
예) 조 560섬이 있다. 조 8말에 대하여 보리 5말의 비율로 교환한다고 하면, 모두 보리 몇섬에 해당하는가?
창조(倉曺) - 곡물의 수확, 농지면적, 곡식창고의 용적 등에 관한 문제
예) 900무의 관전이 있다. 1보마다 조 3되 2홉의 수확이 있다고 하면, 모두 얼마나 되는가?
금조(金曺) - 주로 물가에 관한 문제
예) 생사 1근에 대하여 연사 12량의 비율로 교환된다고 한다. 연사 1,587량이면, 생사 얼마에 해당하는가?
'상명산법'은 고려말에 명나라에서 들여온 책을 세종 시대에 복각한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상업적인 시대상을 반영하고 서민생활에서 많은 소재를 얻은 계몽적인 수학서의 특징으로, 각 장마다 노래의 형식을 빌어 공식을 내세우고 있는 점이 눈에 뛴다. 이러한 스타일은 '양휘산법', '산학계몽'의 경우도 거의 마찬가지이다. 이 책에서 쓰이고 있는 계산 수단은 오로지 '산목'뿐이고 '주산'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언급이 없는데, '산목'에 대한 사용법은 일체 생략하고 있는 걸로 보아 산목 계산은 너무나 상식적이었던 것 같다.
조선시대에는 중국에서는 없어졌던 '천원술'이 계승되고 있었다. 수시력의 계산에는 고차방정식이 다루어지는데 천원술이 그 열쇠가 된다. 어림잡아 늦어도 세종대에 천원술의 방법을 충분히 터득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한국의 전통과학은 수학사의 면에서만 보더라도 단지 중국의 옛 수학책을 충실히 보관하는 정도에 그치는 소극적인 구실이 아니라 훨씬 적극적인 면이 있었다는 것을 넘겨보아서는 안 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우리 나라 수학분야에도 큰 손실을 끼쳤다. 많은 서적이 불에 탔거나 약탈당해 왕실의 서고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중국 수학사의 황금기 시대인 송, 원나라 시대의 수학을 흡수하여 세종대를 거쳐 이러한 동란이 일어나기까지 약 150년 동안에 한국인의 손에 의해 수학책도 출간되었을 터이고, 그런대로 독자적으로 다듬어진 한국 수학이 싹트고있었을 터인데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는 문헌은 일체 소멸해 버리고 말았다.
실학이 들어오면서 산학의 규모가 커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영조는 많은 개혁과 국정의 정상화에 큼 힘을 쏟았는데 이 때 산학제도도 정비되었다. '속대전'에서는 산생의 정원이 15명에서 61명으로 대폭적인 증가를 보이고 있다.
실학 후기에 접어들면서 수학의 내용이 계몽적인 단계를 뛰어넘어 전문적인 연구쪽으로 심화되어 갔다.
2.조선시대의 수학자
(1) 경선행 (경선징) (1616~1690)
조선 중기의 수학자로 교하면 하지석리에 묘가 있다. 초명은 선징, 자는 여휴, 본관은 청주 주별제인의를 지낸 위의 아들 이다.
활인서의 별제로 당대에 널리 이름을 떨친 산학자 였다. 경선징에 대해서는 중인산사의 합격자 명단인 '주학입격안' 이외에는 인적사항을 알려주는 기사가 아무것도 없다. 인명사전에서도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가 중인 출신이었다는 것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당시 그는 수학자로서 대단히 뛰어났다는 사실이 최석정의 '구수략'에 "서양에서는 마테오 리치와 아담 샬이 있고, 우리나라에는 …… 근세에 있어서는 경선징이 가장 저명하다"라고 격찬하고 있다. 그가 저술한 수학서 중에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은 겨우 '묵사집' 하나 뿐이다.
이 책은 '천원술의 책'으로 유명한 '산학계몽'의 스타일을 본받고 있다. 그러나 '구구함수'의 대목에서는 '산학계몽'의 경우와는 반대로 곱셈 구구가 구구팔십일부터 시작하고 있으며, 이것을 나눗셈 구구에까지 철저하게 적용시키고 있는 점이 이색적이다. 이 보수성은 일본의 수학사가를 감탄시키고 있을 정도로 옛 방식에 충실하다. '묵사집'에 감돌고 있는 짙은 옛 풍은 동양 전통수학의 정통의 입장을 되찾으려는 적극적인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율력지나 옛 수학서 등을 인용하여 일부러 구구의 순서를 역전시킨 이유를 달리 찾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2)최석정(1645-1715)
영의정을 비롯하여 왕조의 고위직을 두로 걸쳤던 최석정은 당시의 사대부가 이상으로 삼은 교양을 고루 갖춘 조선조의 전형적인 대귀족학자 정치가였다. 최석정의 '구수략'은 중인산학자의 수학과는 일질적인 조선조 사대부층의 수학사상의 단면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흥미가 있다.
'구수략'은 동양에 있어서의 중세적 보에티우스 수학에 견줄 수 있을 만큼 그 서술이 유럽 중세의 사원 수학의 스타일과 비슷하며, 형이상학적인 역학사상에 의해서 수론을 전개하는 등 특이한 일면을 지니고 있다. 이 책에는 '양휘산법'에서 차용한 듯한 내용과 그 자신이 작성한 여러가지 마방진이 실려있다. 그러나 그의 마방진 연구는 중국이나 일본에서처럼 단순한 수학 퍼즐이었던 것이 아니고, 훨씬 심각한 신앙 고백이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인용서적과 고대의 수학자를 소개하는 대목에서 보수적이고 반상업적이었던 사대부수학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인용한 책 중에는 주역, 주례, 예기, 논어 등이 들어가 있고, 수학자 명단에는 최치원, 황희, 서경덕, 이황, 이이 등 수학과는 전혀 상관없는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다.
(3) 홍정하(1684-??)
그는 산학 교수를 지냈다는 사실이 밝혀져 있고, 대표적 저서로는 ‘구일집’이 있다. 『구일집』은 천, 지, 인 등의 8권과 부록을 구성되어 있다. '구일집'의 내용은 '산학계몽'을 골자로 하고, 일부를 '구장산술'이나 '상명산법' 등에서 문제를 추려내고, 당시의 사회적 실정에 알맞도록 수치를 약간씩 바꿔놓는 정도의 형태로 엮어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수학책을 넘겨보아서는 안 된다.
'구수략'으로부터 겨우 10여년이 지난 다음에 엮어진 이 책에는 전자에는 전혀 보이지도 않았던 천원술의 방법이, 그것도 '산학계몽'에서의 27개에 대하여, 그보다 엄청나게 많은 166개를 헤아리는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다. 그 동안 중국 본토에서는 완전히 잊혀지고 말았던 천원술의 전통이 한국의 중인 산학자 사회에서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홍정하에 관련된 일화
1684년에 태어난 홍정하는 조선시대 숙종과 영조 때의 수학자이다. 홍정하는 대대로 수학을 하는 수학자 집안에서 자랐다. 수학자 집안이라 수학 공부를 더 쉽게 할 수 있었다. 요즘 같으면 집안이 대대로 수학을 했으니 학자 집안이었겠지만 그 당시 수학자들은 산학자로 불린 중인 계급으로 양반은 아니었다. 조선시대에는 산학 시험이라는 것이 있어서 이 시험에 합격해야 산학자가 되는 공인 수학자 제도가 있었다. 당시 유럽에서도 상인들이 셈을 전문으로 하는 '셈사'를 고용했는데, 셈사들은 그것이 직업이 되었다. 1713년 5월 29일 홍정하는 같은 수학자인 유수석과 함께 조선에 온 중국의 사력 하국주를 만나 수학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력은 중국 천문대의 관직으로, 하국주는 천문과 역산에 밝았고 산학에도 뛰어난 실력자였다. 홍정하는 수학 공부를 위해서라면 누구라도 찾아가서 가르침을 받으려고 했다. 하국주와 홍정하의 만남은 요즘처럼 공식을 암기하거나 문제 풀이나 하는 수학 공부와는 달리 대화를 하는 식이었다. 옛날에는 공부를 대화하는 식으로 했다. 그렇게 대화와 토론을 통해 생각의 부족함을 채우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며 어려운 문제를 풀어 나가려 했다.
홍정하가 쓴 수학책 『구일집』에는 수학의 대화가 소개 되어 있다. 홍정하는 하국주를 만나 공손히 "아무것도 모르니 산학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했다. 하국주는 문화 대국의 일류 학자인 양 어깨를 우쭐대며 '이런 문제를 알겠는가.' 하는 얕보는 마음으로 문제를 냈다.
① "360명이 한 사람마다 은1냥 8전을 낸 합계는 얼마나 되겠소?
그리고 은 351냥이 있소. 한 섬의 값이 1냥 5전한다면 몇 섬을 구입할 수 있겠소?"
어릴 적부터 산학 문제를 풀면서 실력을 갈고 닦은 홍정하는 금세 답이 나왔다.
"앞 문제의 답은 648냥이고, 다음 문제의 답은 234섬이 되옵니다."
홍정하가 금방 문제를 풀자 하국주는 다음으로 도형 문제를 냈다.
"제곱한 넓이가 225평방자일 때 한 변의 길이는 얼마요?"
이 문제는 여러분도 모두 풀 수 있을 것이다. 제곱해서 225일 수는 15가 되니까 답은 15자가 되지요. 홍정하는 이 문제도 맞추었다.
하국주는 또 문제를 냈다.
② "크고 작은 두 개의 정사각형이 있소.
두 정사각형의 넓이의 합은 486평방자이고, 큰 정사각형의 한 번은 작은 쪽의 한 변보다 6자만큼 길지요. 두 정사각형의 각 변의 길이는 얼마가 되겠소?"
물론 이 문제도 홍정하, 유수석 두 수학자들은 모두 풀었다.
이렇게 모두 정답을 맞추자 옆에서 지켜 보고 있던 한 중국 사신이 홍정하의 실력을 얕잡아 보고 하국주의 체면을 살리려는 듯 말참견을 했다.
"사력은 계산에 대해서는 천하의 실력자요. 사력의 수학의 조예는 깊기가 한량이 없소. 여러분 따위는 도저히 견줄 바가 못 되오. 사력은 많은 질문을 했는데 여러분도 그에게 문제를 내야 하지 않겠소?
③ "지금 여기에 공 모양의 옥이 있습니다. 이것에 내접한 정육면체의 옥을 빼놓은 껍질의 무게는 265근이고 껍질의 두께는 4치 5푼입니다. 옥의 지름과 내접하는 정육면체의 한 변의 길이는 각각 얼마입니까?"
이 문제를 듣고 하국주는 한참 고민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아주 어려운 문제요. 당장에는 풀지 못하지만 내일은 반드시 답을 주겠소."
그러나 하국주는 다음날에도 끝내 정답을 내놓지 못했다. 홍정하는 정육면체의 한 변의 길이는 약 5치이고 옥의 지름은 약 14치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답 풀이를 해 주었다. 옥의 지름을 구하려면 구의 부피를 내는 공식을 알아야 하는데, 홍정하는 구의 부피를 으로 하여 구했다. 오늘날 우리가 중학교 1학년 수학 시간에 배운 구의 부피를 내는 공식은 (r: 구의 반지름)이다. 따라서 홍정하는 구의 부피를 내는 공식에서 차질이 생겨 답이 약간 달라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π 의 값을 3으로 했다.
어찌 되었건 홍정하는 구의 부피를 내는 공식을 생각했고 하국주는 전혀 생각을 못했다.
이번에는 하국주가 어려울 것이라는 표정으로 문제를 냈다.
"지름이 10자인 원에 내접하는 정오각형의 한 변의 길이와 넓이는 각각 얼마요?"
그러자 유수석이 말했다.
"조선에는 아직 이런 학문이 없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하는 것입니까?"
이에 대해 하국주는 보충 설명을 해 주었다.
"원은 360도이고 정오각형의 꼭지각의 하나는 72도가 되는데 그 반인 36도에서 정현수(sine)의 값을 구하게 되오."
하국주의 설명을 듣고 유수석은 다시 물었다.
"정현수는 어떤 방법으로 얻은 것입니까?"
"8선표가 있으면 그것으로 곧 값을 구할 수 있지만 일일이 계산하자면 매우 어렵기 때문에 여기서는 대답하기가 어렵소."
여기서 8선표는 삼각함수표를 말한다. 홍정하는 하국주의 대답에 만족하지 않고 꼬치꼬치 캐물었다.
"이치가 아무리 심오하고 어려울지라도 배울 수 있습니다. 그 길을 알려 주십시오."
홍정하의 열의에 하국주는
"『기하원본』과 『측량전의』 두 책을 읽으면 이해할 수 있소."라고 대답했다.
유수석도 적극적으로 물었다.
"어떻게 하면 볼 수 있습니까?"
"중국에서 출발할 때 봉화성에 두고 왔소. 귀국하면 보내 드리겠소."
잠시 뒤 홍정하가 말했다.
"우리 두 사람의 수학 실력은 어느 정도입니까?"
"두 사람의 실력은 상당하오.
17~18문제 중 풀지 못한 것은 불과 두셋에 불과하지 않소?"
하국주는 자신이 쓴 『구고도설』이라는 책을 보여 주었다.
이 책은 서양의 피타고라스 정리와 같은 구고현의 정리를 이용한 문제들이었다.
하국주가 내놓은 문제 가운데에서 고차 방정식의 문제가 있었는데 조선의 두 수학자는 그것을 '산목셈'으로 척척 풀었다. 산목셈이란 대나무 가지 같은 것으로 계산하는 계산기의 일종이었다. 하국주는 중국에는 이러한 것이 없으니 가지고 돌아가서 모두에게 보이고 싶다고 했다. 하국주가 살았던 때의 중국에서는 산목셈이 이미 사라져 버렸고 조선에는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중국에서는 뒷날, 조선의 수학이 없었다면 이 부분에서 동양 수학의 명맥이 끊어졌을지 모른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홍정하가 고차 방정식을 푸는 방법은 지금에는 '호너(Honer)의 고차 방정식 근사 해법'으로 알려져 있다. 이 방법은 영국인 호너가 처음 발견한 것보다 500여년이나 앞서 중국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것은 호너의 방법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4) 황윤석(1719-1791)
대표저서 <산학입문>, <산학본원>이 있다. 조선조의 이름난 유학자이자 실학기의 대표적 계몽학자의 한 사람이기도 한 황윤석의 이 2부작은 그의 백과사전식 편저 '이수신편' 중의 일부이다.
'산학입문'의 서장 부분에서는 고금의 역사서, 역서, 수학서를 갖가지로 인용하면서 저자의 박식을 과시하고 있다. 전체적인 구성은, 가감승제에 관한 기초편은 '상명산법', 중 정도의 문제는 '양휘산법'과 '산학계몽', 그리고 고급의 것은 '산학계몽'에서 인용한다는 짜임새를 보이고 있다.
'산학본원'의 내용은 주로 구고현, 즉 직각삼각형의 성질을 이용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천원일술' 의 항에서는 "'산학계몽' 중의 '천원술'과 '수리정온'의 '차근방'(유럽계의 방정식)은 명칭만 다를 뿐 내용은 동일하다"라는 글이 보인다. 이보다 훨씬 뒤에 저술된 남병길의 '산학정의'에도 같은 주장이 있지만 이 점에 관해서는 '이수신편'의 저자가 이미 선구적인 발언을 한 셈이다.
(5) 홍대용(1731-1783)
홍대용(1731~1783년)은 조선 시대 실학파 학자 가운데에서도 가장 진취적인 사상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중국의 북경에서 서양 문물을 견학하면서 유럽 과학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래서 동양의 음양오행설을 부정하고 지구 자전설을 논하기도 했다.
경제 정책에서는 균전제, 부병제를 토대로 농민의 생활을 보장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학문과 재주가 많은 사람을 신분에 관계없이 등용하고 과거제를 폐지하고 하급 교육 기관에서 재능이 있는 사람을 추천하는 제도를 제창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마을마다 학교를 설치하고 8세이상의 어린이 모두 취학시켜야 한다는 혁명적인 의무 교육제를 주장했다. 또 신분에 관계없이 청소년은 모두 노동에 종사해야 한다는 것과, 공평한 발언권을 보장하고 언론의 평등을 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홍대용은 그의 집안에 사설천문대까지 꾸며놓을 정도로 실천적인 과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수학자라기보다는 진보적인 과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가 쓴 책들을 보면 수학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대단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홍대용의 가장 대표적인 저서인 <담헌서>의 외집 4~6권 <주해수용>에서는 수학과 천문학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주해수용>의 서문을 보면 그의 수학관이 잘 나타나 있다.
서문에서 그는 그때까지의 수학책이 <구장산술>의 범위와 방법을 벗어나지 못한 것을 비판하면서 수학이 새로운 창조와 경험에 의해서 새롭게 풍부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해수용>에서 그는 수학을 배우는 목적은 사고 능력을 길러 품성을 형성하는데 있다고 하면서 특히 수학을 창조적으로 학습해야 한다고 말했다.
홍대용은 <수학계몽> <수학통종> <수법전서> <구장산술>이외의 많은 책을 참고로 하여 정리하고 연구하여 당시 수학을 집대성했다. 우리 나라와 중국 수학의 성과와 서양수학의 성과를 수집하여 정리, 발전시켰다.
홍대용의 수학수준은 대단히 높았다. 당시 수학의 거의 모든 부분을 망라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결점까지 발견하고 분석했다. 그 내용도 비율법, 약분법, 면적 체적 등 근대적인 표현들을 썼다. 또한 그것은 실제로 필요로 하는 지식만을 대상으로 하는 그의 현실주의적이고 합리적인 기본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6) 남병철(1817-1863)과 남병길(1820-1869)
조선조 말기의 최대의 과학적인 이 두 사람이 이른바 실학파와는 인연이 먼 당시의 파벌 정치의 파도를 타고 정부의 고위직을 누린 사대부였다는 것은 아리러니컬한 이야기이다.
남병철의 대표저서로는 천문학서를 비롯하여 측량술에 관한 '해경 세초해'가 있다. 이 책은 천원술의 창시자로 알려진 이야의 '측원해경'의 해설서이다. 여기서 2차방정식의 해법으로 천원술을 사용하면서, 이 방법은 서양의 소위 차근법과 같다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그는 "총명하기 그지없고, 산술추보(수학과 역산)에 정통하였다."고 명성이 높았으나, 단명의 탓인지 저서는 많지 않다.
동생인 남병길은 1820년에 태어나 철종 때 이조, 예조 판서까지 지낸 대정치가 이자 학자였다. 1869년 49세의 나이로 죽기까지 남병길이 지은 책은 무려 30권이나 된다. 그가 남긴 천문학 및 수학에 관한 저술은 실로 방대하다. 천문학서를 제외한 측량술과 수학에 관한 것으로는 '양도의도설', '측량도해', '구고술도요해', '무이해', '산학정의', '구장술해', '집고연단', '옥감세초상해' 등이 있다.
이 중 '양도의도설'은 천문 계산과 항해, 측량술 등에서 쓰이는 구면삼각법의 공식을 푸는 복잡한 계산을 기계적으로 손쉽게 치루는 계산기에 관한 해설서이다. 이 계산기구는 구면삼각형의 두 면의 길이와 그 변들 사이의 각의 크기가 알려지면 나머지 한 변의 길이를 기계적으로 측량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당시의 천문 계산은 종전에 비해 삼각법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크게 발전하였으나, 각도의 크기에 따라 많은 도표를 일일이 대조해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무이해'는 저서라기보다도 논문이다. 이 기발한 제목은 문자 그대로 표면상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근본적인 해법은 똑같다는 뜻이다. 방정식의 연구로 유명한 이예(1773-1817)가 차근법(대수방정식의 해법)은 천원술에서 나온 것이긴 하지만 상소법에 있어서는 다르다고 한 주장을 논박한 것이다.
(7) 이상혁(1810-??)
남병길의 수학상의 공동 연구자인 이상혁은 중인 출신의 산학자이다. 그에 대한 기록은 산학의 고시에 급제한 다음 서운정, 그러니까 역계산을 다루는 천문관리직에 있었고, 남병길보다는 10세 연상이었다는 정도의 인적 사항 밖에는 그에 대해서 알려진 것이 없다.
이상혁의 저서 가운데 현재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천문학서 외에 수학서로 '익산', '차근방몽구', '산술관견' 등이 있다.
'산술관견'에서 펼쳐진 이상혁의 독자적인 연구는 한국 수학사를 그저 결과적으로 나타난 수학상의 업적만으로 평가하려고 했던 일본의 수학사가로 하여금 "모두가 중국 수학의 주해 뿐이었던 조선에 있어서 그야말로 전인미답의 경지를 개척하였다"고 감탄시키기까지 하고 있다.
이상혁이 전통적인 한국수학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사대부 출신의 남병길이 마지막까지 떨쳐버릴 수 없었던 형이상학적 수리사상과 교양주의적 수학관이 중인 산학자인 그에게는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공동 연구자이면서 남병길과 이상혁의 수학이 그토록 큰 격차를 보이고 있는 이유는 수학적인 소질이나 능력의 문제에서보다 두 사람의 의식을 지배한 이데올로기의 강도의 차이에서 찾아야 옳을 것 같다.
(8) 장기원
일본 제국주의는 우리 민족을 우민화하기 위해서 이 땅에 대학으로 경성제국대학(서울대학교의 전신) 하나만 두었는데 그것도 학생들은 거의 다 일본인이었다. 한국사람이라고는 친일 지주 아들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밖의 고등교육 기관으로는 미국인이 세운 연희전문학교와 호남의 대지주이자 자본가인 김성수 선생이 경영하는 보성전문학교뿐이었다. 또 일제는 우리 민족을 우민화하기 위해 자연과학 분야 학과의 설치도 제한했다. 순수과학 분야는 오직 연희전문학교에 수물과만 있었다.
장기원은 연희전문학교 수물과를 가장 먼저 졸업했다. 그는 일본 센다이에 있는 동북대학 수학과를 졸업하여 우리 나라에서는 가장 먼저 수학으로 이학사가 되었다. 그리고 모교인 연희전문학교 수물과 에서 수학 교육을 담당했다.
장기원은 1966년 죽을 때까지 연세대학교 이공대학 수학과에서 후진을 지도했다. 돌아가신 뒤 제자들이 정성을 모아 연세대학교 교정 한 쪽에 '장기원 선생 기념관'을 지어 그가 애써 모은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수학책 들을 보관하고 있다.
3. 조선시대 수학의 침체원인
○ 조선시대 수학의 특징
․사대부의 교양수학과 관료조직에서 요구된 실용수학의 이원적 구조를 이루고 있다.
․ 민간 수학 또는 민간 수학자가 존재하지 않았다. 즉, 수학자는 어떤 의미로는 예외 없 이 관학자들 이었다.
․ 관영과학의 하나인 산학을 담당하는 하급 기능직 관리사이에서 점차로 길드조직이 이 루어졌다. 조선시대에는 세습적인 조직체로 형성된다.
․ 상업적으로 이용되면서 회계문화가 발달한다.
동양에서는 서양과 달리 여러 과학분야를 통일적으로 지배하는 기본 학문으로서의 성격을 갖추지는 못했다. 그것은 당시의 사회적 ․ 사상적 여건과 전통적인 과학관이 도저히 수학을 과학의 여왕으로 삼을 수 있는 형편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