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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특별한 체험의 알베르게 페냐 사크라 예배당과 멘도사 성
한 중년의 안내로 들른 교회 사무실에서 5유로를 받은 사제는 키를 주며 나를 전망좋은
호텔같은 집을 독점하게 된 유일한 수에르투도(suertudo/행운아)라 했다.
마을 홍보 리플릿의 지도를 펴놓고 가르쳐준 알베르게는 만사나레스 강과 거의 나란히
2km 쯤 서북쪽으로 올라가야 한다.
파노라믹(panoramic)한 페드리사의 성스러운 암봉(巖峰/Pena Sacra) 위에 세웠다는
16c 건물 페냐 사크라 예배당(Ermita de la Pena Sacra)이다.
외딴 곳이므로 먹거리를 꼭 준비해서 가야 한다는 당부대로 잔뜩 사들고 올라갔다.
우니코(unico/유일)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여러 여자가 드나들고 있다니?
아뿔싸, 장례식과 추도식 등 의식을 거행하는 곳이며 지금 한 의식이 진행중이란다.
산에서 통비닐 또는 천막의 최고 터는 늘 묘역이었는데 장례식장이 문제되겠는가.
그러나 고백컨대, 눈의 성모 마리아 교구교회(Iglesia de Ntra. Sra. de las Nieves)가
2010년에 개설한 알베르게라는데, 이 정보를 갖게 된 것을 잠시나마 원망했다.
2층 널따란 공간에 들여놓은 벙크들이 이용자가 없기 때문인지 먼지로 뒤덮혀 있으며
씻지 않은 그릇들이 널려있는 너른 주방이 참으로 을씨년스러웠기 때문일 것이다.
먼지를 털어내고 대충 정리한 후 빵으로 저녁식사하며 맥주를 평소보다 많이 마셨다.
이런 때는 독한 양주가 더 효과적인데 짐을 더느라 빼놓은 것이 아쉬웠다.
잠을 청해보지만 바로 아래층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에 잠이 올 리 없다.
고요히 별들과 속삭이다 스르르 잠들어 가는 묘역이야 말로 이처럼 밤내 소란한 실내에
비해 낙원임을 절감하는 밤이었다.
특히 부자집 묘보다 가난한 효자 효손의 선영이 더욱 안락하다.
부자는 묘역을 돈으로 관리하지만 효자는 지성으로 돌보므로 지성이 돈보다 안온하다.
건물 한 모퉁이 석주에 레푸히오 데 페레그리노스(refugio de peregrinos순례자숙소)
표지가 붙어있으나 하루 1명꼴도 못되는 순례자를 위해 이처럼 많은 벙크가 필요한가.
그러니까, 장례 관계자들을 위해 만든 시설을 순례자에게 할애하고 있는 것이겠다.
스페인 가톨릭교의 독특한 의식인지 가톨릭교의 보편적 의식인지를 나는 모른다.
하지만, 밤을 꼬박 새우며 하는 낭송에 잠못이루는 사람이 있음을 왜 고려하지 않을까.
어차피 이룰 수 없는 잠 포기하고 먼동이 터오는 시각에 나섰다.
잠못이룬 몸은 천근같아도 페드리사의 정기를 받아서인가 머리만은 가볍고 상쾌했다.
맨 먼저 만난 것은 양 옆구리가 터질 듯 부풀어 있으면서도 새벽부터 자유자재로 산책
하며 풀을 먹거나 청정한 만사나레스 강물을 마시며 무척 행복해 보이는 우공(牛公)들.
사도 야고보의 길을 걷는 동안 늘 한국에 태어난 가축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을 해왔는데
이 아침에는 그 연민이 절정에 이른 듯 했다.
저들이 우공이라면 건초가 고작이며 살 빠질세라 비좁은 우리 안에 갇혀 살아가야 하는
우리 소들이야 말로 한(恨)많은 축생(畜生) 아닌가.
마을 광장(Plaza del Pueblo)으로 내려와 교회 우편함에 키를 넣은 후 아직 깨어나지
않은 마을을 잠시 거닐었다.
마드리드 북북서 50km 지점, 페드리사 돌산과 저수지 산티야나(Presa de Santillana)
사이에 있는 인구 7.000여명의 대형 지자체 마을에서 가장 돋보이는 건물은 멘도사 성
(Castillo de los Mendoza)이다.
중세 카스티야의 최고 귀족가문중 하나인 멘도사가(家)의 성으로 15c(1.475년)에 축성
했다는데도 마드리드 자치지방에서 가장 잘 보존중인 성이란다.
세고비아 성이 영화 백설공주로 인해 더 유명해졌다면 멘도사 성은 '엘 시드'(El Cid)의
영화에 등장함으로서 더 알려졌단다.
엘 시드는 그의 행적이 어떠했던 스페인의 국민적 영웅으로 각인되어 있다.
로마의 지배로 시작하여 게르만과 서고트 족, 이슬람 시대가 끝날 때까지의 7세기 반에
걸친 레콘키스타(국토회복운동)는 스페인에서 전쟁이 끊임 없이 이어졌음을 의미한다.
통일 스페인은 15c, 16c에 바다를 통해 무수한 영토를 확보하고 약탈함으로서 한 때는
지상 최강국이 되었으나 명분과 이해에 얽힌 각종 전쟁은 20c까지 계속되었다.
시대가 영웅을 배출하는가 영웅이 시대를 만드는가.
한가한 자들의 부질없는 논쟁이지만, 아무튼 전쟁에서는 영웅이 태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전쟁으로 날이 새고 지던 나라 스페인의 도체에 영웅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삼국시대 이래 외침이 끊이지 않은 우리의 왕조마다 불세출의 영웅들이 탄생한 것처럼.
이 늙은 길손도 정녕 한가해서 이같은 생각을 하며 걷고 있는가.
한 때 회자되었던 군부독재기의 날조된 영웅 이야기가 끼어들려고 했으니.
콜메나르 비에호의 페께냐 통역관
다음 마을 콜메나르 비에호(Camino de Colmenar Viejo) 길을 찾아나섰다.
지도가 가리키는 카미노 콜메나르 비에호는 산티야나 물 위로 나있다.
지도대로 가려면 물 위를 걷거나 수영을 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예수가 아니며 맥주병이다.
물 위로 걸을 수 없으며 수영도 못한다는 뜻이다.
M-608도로가로 난 낮은 소로가 있으나 저수지 수량이 늘어나고 있는 탓인지 물에 잠긴
곳이 많아 도로로 올라오기를 반복했다.
신흥 주택지 페냐 엘 가토 로터리(Rotonda Pena El Gato/고양이 바위?/바위산 비탈에
들어선 마을)까지는 그렇게 라도 해서 차를 피할 수 있었으나 이후가 난감했다.
만사나레스 엘 레알의 남동쪽이며 마드리드의 북북서에 위치한 콜메나르 비에호 길은
내가 걸어온 사도 야고보의 길에서 가장 오래 긴장하고 걸은 길이다.
어렵사리 자전거 도로에 진입했으나 주말인 탓인지 대단위 경주 자전거들이 달렸다.
벗어나는 듯 할 때 어린이 단체 행렬이 또 꼬리를 물어 교행의 애로가 극심했는데 다시
긴 자전기 행렬이 어어졌다.
인구가 44.000명이 넘는 콜메나르 비에호에 어렵사리, 그리고 무사히 도착해서 맨 먼저
가고 싶은 곳은 교회였을 정도로 자전거와 사람에 부대끼며 걸었다.
안내판 따라 간 교회는 1480~90년쯤에 착공하여 16c중반에 완성했다는 성모 몽소승천
대성당((Basilica de Nuestra Senora de la Asuncion)이다.
1560~83년에 플래터레스크 양식(Plateresque style)으로 제작한 제단 뒤의 조각품이
가장 특출하다는 교회다(플래터레스크양식은 16세기의 스페인 건축양식으로서 극도로
기교적인 르네상스 장식법이 특징이란다)
정오 미사중인 대성당에 들어가 격동적인 감사를 드렸다.
어느덧 적응력이 자랐나 미사 과정이 별로 어색하지도 않으며 미사가 끝난 후 마드리드
길을 묻기 위해서 신부관으로 갔다.
청바지를 입은 젊은 흑인 신부는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 스탬프를
비치하고 있으면서도 30km쯤 밖에 되지 않는 마드리드 길을 모른단다.
신도들도 하나같이 모른다거나 마드리드 자동차 도로만 가리키니 어찌된 일인가.
성당 문앞 우측에 데 마드리드 아 산티아고의 근교 이정표가 있는데도 그리 무관심한가.
소득 없이 M-607도로쪽으로 나가 컴퍼스로 살펴보았으나 방향만 확인될뿐 마드리드로
가는 사도 야고보의 길은 오리무중.
어찌 해야 할지 궁리하고 있는 내 옆에 와서 멎는 승용차가 마냥 반가웠다.
꼬마 딸과 함께 어딜 가는 중인 듯 한 중년남이 차를 세운 것은 확인할 것이 있었던 듯.
나를 도우려고 세운 것은 아니지만 그에게 길을 물을 수 있으니까 반가웠을 것이다.
"디스쿨페, 아블라스 잉글레스"(Disculpe, hablas ingles/실례지만, 영어 하십니까)?
아빠의 노(no)가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아이 캔"(I can)
페께냐(pequena/꼬마)의 한 마디가 얼마나 반갑고 고마웠는지.
학교에서 외국어 시간에 배우고 있다는 꼬마가 통역을 자임하고 나선 것이다.
내 물음을 아빠에게 스페인어로 전달하고 아빠의 길 안내를 영어로 내게 설명했다.
이 소녀 덕에 산타 아나 예배당을 거치는 마드리드 길을 소상히 알았다.
도중에 물이 없으므로 물을 꼭 준비해 가라는 당부까지 한 부녀는 내가 디카를 꺼내는
사이에 떠나버렸다.
깜찍하고 고마운 어린이를 디카에 담아오지 못한 아쉬움이 영 지워지지 않는다.
마드리드가 보인다
거의 정사각형 구조로 된 산타 아나 예배당((Ermita de Santa Ana)에 도착했다.
대형 홍예석((虹蜺石) 원형 아치로 된 출입문이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는 작은 교회다.
대성당이 빤히 보이며 직선로가 있는데 적잖이 우회한 것이다.
도로에서 살짝 떨어진 예배당 앞은 나무그늘이 있는 작은 쉼터다.
긴장이 풀리고 배도 고픈데 졸음까지 왔다.
바게트와 잼으로 배를 채우고 모처럼 시에스타(siesta?)를 잠시 즐긴 후 길을 나섰다.
곧, 마주친 고령의 스페인 부부로부터 다음 마을 트레스 칸토스 길 안내를 다시 받았다.
건강을 위해 이 길을 자주 걷는다는 75, 72세 그들도 코레아를 모르지만 내가 77세 영감
이라는데 놀라고 마드리드로 가는 페레그리노라는데는 의아해 했다.
모든 순례자가 "데 마드리드 아 산티아고"인데 당신은 왜 반대의 길을 걷느냐는 것.
5개루트 2.000km이상 걸어왔으며 마드리드까지 걸어가서 귀국비행기를 탈 것이라니까
부부가 합창하듯 '마라비요소'를 연발했는데 무슨 뜻인지 내가 어찌 알겠는가.
께 시그니피카?(Que significa/무슨 뜻이냐)라고 물었더니 '아드미라블레'로 달리 말해
영어 애드머러블(admirable/경이, 감탄)과 같은 뜻으로 짐작하고 고맙다고 응수했다.
('maravilloso', 'admirable'임을 정확하게 안 것은 귀국후 사전을 통해서)
그들은 동남 방향으로 멀리 보이는 검은 물체들을 마드리드의 새 명물 쿠아트로 토레스
(Cuatro Torres/4쌍둥이 고층빌딩)라고 알려 주며 내일 거기에 도착하게 될 것이란다.
사도 야고보의 5개 길 대장정의 끝이 드디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영감에게도 동양 늙은이가 기념물처럼 보였나.
카메라를 꺼내며 자기의 늙은 아내와 포즈(pose) 취하기를 원했으니까.
그들과 헤어진 후 공동묘지를 통과했다.
대형 마을답게 묘역도 대형이며 성벽같은 돌담의 보호를 받고 있다.
콜메나르 비에호(해발883m)에서 트레스 칸토스(해발750m) 사이, 130m쯤의 표고차가
있는 12km는 분지형 야산을 개발한 농목축지라 할까.
그래서 페레그리노들도 가축들의 길(vias pecuarias)을 잠시 실례해야 한다.
실은 나바세라다 이후 줄곧 그래왔지만.
사도 야고보의 마드리드 길(Senda Real GR124)은 트레스 칸토스 지자체 서부의 거대
농장(finca municipal de la zona oeste)을 남하하다가 농장 중앙을 동진한다.
남하때는 맑은 물이 돌고도는 개울(Arroyo Real de Tejada)의 아슬아슬한 징검다리를
무수히 건너야 한다.
둘 또는 셋으로 보이던 쿠아르토 토레스가 드디어 네 개로 보이기 시작할 때 마드리드
국제공항 또한 지근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간단 없이 뜨고 내리는 비행기의 굉음을 들으며 여기가 바로 마드리드의 화곡동이구나.
트레스 칸토스 입구에 올라설 때까지 만난 사람은 단 한명도 없는데 이베리아 반도에서
처음으로 내가 가장 혐오하는 파충류와 조우했다.
꽤 길고 큰 뱀이며 에덴동산 설화와 관계없이 음흉한 이미지에 독을 품고있기 때문인데
앞으로 목초지를 걸을 일이 없으므로 다행히도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이다.
이후의 마드리드 길은 마드리드~바야돌리드 AVE(Alta Velocidad Espanola/고속열차)
육교를 통해 자전거 순례길에 합류한 후 M-607 자동차전용도로(autovia/de Colmenar
Viejo a Madrid)와 한동안 나란히 간다.
멀리나마 마드리드가 시야에 들어옴으로서 신명났기 때문인가 걷기 좋은 길을 만나서
그랬는가 트레스 칸토스의 대형 간판을 보았으면서도 왜 전진을 계속했을까.
한여름을 방불케 하는 더위에 이미 27km이상 걸었는데도 더욱 신나게 걸어 마드리드를
10km쯤 남겨둔 푸엔카랄 코앞까지 10km이상을 더 갔으니.
마드리드 자치지방에는 알베르게가 전무한 것으로 책자들은 안내하지만 푸엔테 두에로
에서 얻은 정보에 따라 세르세디야, 만사나레스 엘 레알에서 알베르게를 이미 이용했다.
마드리드 직전도시 푸엔카랄에는 없지만 트레스 칸토스에도 알베르게가 있다는 정보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곳에서 마드리드 길 마지막 밤을 보내려 했건만.
거역할 수 없는 힘이다
트레스 칸토스(Tres Cantos)는 스페인에서 가장 최근인 1970년대의 도시 설계로 태어
난 수도 마드리드의 신생 위성도시다.
마드리드에서 북쪽으로 22km쯤 되며 인구가 41.000여명(2012년)인 마드리드 자치지방
정부의 한 지자체다.
한데, 내가 얻은 정보와 달리 트레스 칸토스에도 알베르게가 없단다.
여러 사람에게 물었으며 엘 골로소 역(El Goloso)에 가서 묻기까지 했으나 하나같이 똑
같은 대답인데도 왜 1.5유로를 내고 트레스 칸토스행 버스에 올랐을까.
되돌아가기는 했으나 트레스 칸토스에서 만난 사람도 모두 금시초문이란다.
그런데도 묻기를 계속하다가 문득 시청사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일련의 과정은 자의적이 아니고 거역할 수 없는 어떤 힘에 의한 피동적 행동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지극히 비이성적이거나 치기(稚氣)에 휘둘리는 늙은이다.
알베르게 묻는 짓은 포기하고 시청사(Ayuntamiento)를 묻고물어 찾아갔다.
시청직원들의 말이 가장 믿을만하다고 판단되어 퇴근하기 전에 도착하려고 서둘었는데
너른 청사를 젊은 청경(?) 홀로 지키고 있었다.
이런, 토요 휴무일인데다 6시가 넘은 석양이다.
한국영감이 방문한 까닭을 알아차린 청경은 우리말로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2년 전에 묵고 간 두 한국여인이 가르쳐 주었단다.
그들이 자고 간 곳을 알려달라는 내 말에 청년은 빙그레 웃으며 여권을 보여달란다.
인적사항을 적은 후 나를 안내하겠다는 그가 고맙기는 하나 청사를 비워야 하기 때문에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사양하며 위치의 약도를 그려달라고 주문했다.
그래도 그는 내 무거운 배낭을 들고 엘리베이터 앞으로 갔다.
일체 말이 없는 그를 따라 내려간 곳은 벙크와 책상이 1씩 있을 뿐인 지하1층 끝방이다.
비로소, 그는 내게 키를 주며 입을 열었다.
트레스 칸토스 시가 지하 공간 일부를 순례자를 위한 숙소로 제공하고 있다고.
그는 또 샤워장과 사용 가능한 시설들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고 주방 시설이 없으므로
외부 식당을 이용해야 한다며 좋은 식당도 추천했다.
한데, 마드리드에서 출발하는 순례자들 대부분이 콜메나르 비에호까지는 교외선 열차
또는 버스편으로 가기 때문에 트레스 칸토스에는 알베르게가 필요치 않은 실정이란다.
그러니까, 간혹 있는 마드리드부터 걷는 이를 위해 마련한 것이며 역방향 순례자에게는
더없이 안성맞춤이지만 지금껏 내가 유일하므로 고려할 여지가 없었다는 것.
종점을 목전에 두고 가장 편히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는 곳.
역 코스에 험난만 있는 것이 아니며 역 방향 순례자만이 누릴 수 있는 희열이며, 형극의
길이었기에 성취의 포만감도 배가되는 트레스 칸토스!.
마드리드에서 출발하는 순례자가 여기에서 묵을 이유가 거의 없으며 있다 해도 막 시작
한 사람에게는 감동과 희열은 커녕 무미건조한 곳일 것이다.
청경은 과묵한 인상과 달리 약간 짓궂은 데가 있는 젊은이다.
그래도, 이 청년은 내 사도 야고보의 마지막 길인 마드리드 길의 마지막 밤과 함께 길이
잊혀지지 않을 마지막 에스파뇰이다.
그와 함께 축배를 들고 싶었으나 그도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솔로다.
혼자 자축이라도 하려고 대형 까르푸(Carrefour)에서 여태껏 보다 다양하게 구입했다.
맥주와 음료수 등 일부를 청경에게 나눠주고 내려와 먹고 마시기를 밤 늦도록 했다.
젊었을 때 혼자 술집에 가는 일이 이따금 있었다.
궂은 일로 속이 상했을 때인데 무관한 삼자에게 부담주지 않으려고 그랬다.
그런 때는 잔을 두 개 주문해 마주 놓고 혼자 주거니 받거니 했는데 단골집에서는 혼자
가도 두개의 잔을 내놓았다.
슬픔은 나눌수록 작아진다는데 공동체의식의 결여와 개인주의적 결벽성 때문이었을까.
기쁨은 나눌수록 커진다는데 지금 나는 나눌 사람이 없지 않은가.
캔맥주 두개를 마주 놓고 바꿔가면서 마시며 옛일을 회상하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다.
한심한 늙은이, 네가 어째서 혼자냐?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