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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필자의 논문, 「일제강점기 한반도의 공간훼손과 풍수정치-경주지역을 중심으로-」,
신라문화 제56집,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2020년 6월.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했음을 밝힌다.
풍수의 단맥과 풍수정치
풍수에서는 땅의 기운(地氣)이 산줄기를 타고 이동한다고 본다. 그래서 풍수에서는 산줄기가 起伏之玄 변화를 하는 형태를 龍에 비유해 龍脈이라 표현하는데, 그 중에서도 후방의 祖山 및 主山에서 터까지 직접 이어지는 용맥을 터의 길흉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건으로 간주한다. 이에 예로부터 마을이나 도시로 이어지는 용맥의 풍수적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조선왕조는 한양을 둘러싼 內外四山의 地脈을 보전하고자 禁山제도를 두어 경작․벌목․채석․민가조성 등을 금지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특히, 補土峴은 삼각산에서 북악산으로 이어지는 잘록한 고개인데, 이곳은 경복궁으로 이어지는 主脈이 지나는 곳으로서, 조선왕조는 해마다 흙을 보태고 떼를 입혀 고개의 허한 기운을 보충하였다.
그런데 전국 곳곳에는 마치 용맥의 풍수적 중요성을 알고 그런 듯, 일제에 의해 자행되었다고 여겨지는 풍수 단맥 사례들이 산재해 있다. 대표적으로 일제 강점기 건설된 철도(도로)가 전통마을이나 주택, 또는 역사적 인물의 묘소를 직접 가로지르거나 인접해 부설된 사례, 철도(도로)가 마을의 풍수적 形局을 훼손한 사례, 도시나 마을로 이어지는 풍수적 중요지점의 산줄기에 쇠말뚝이 박혀 있는 사례, 큰 인물이 나올만한 지세를 가진 마을의 산줄기를 끊은 사례 등이 있다. 그것들은 대부분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따라 풍수적 훼손 의도로 자행된 풍수침략으로 이해되어 왔다.
문제는 전국에 산재한 풍수 단맥과 관련한 일제의 공식 문서나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들이 실제로 일제가 풍수적 훼손 의도로 자행한 풍수침략인지, 아니면 일제의 식민지 통치사업 과정에서 발생한 부가적인 훼손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정확한 기준이 부족하다.
이에 본 연구는 전국의 풍수 단맥을 바라보는 관점의 시기적 기준으로 무라야마 지준의『조선의 풍수』(1931)를 제시하고자 한다. 물론 조사보고서 한 권을 두고 단맥을 포함한 일제에 의해 자행된 공간적 훼손 양상을 완벽하게 판단한다는 것은 논리적 문제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에 대한 공식 문서나 기록이 없는 현재의 상황에서, 이것은 전국에 산재한 일제의 공간적 훼손을 바라보는 관점을 세우는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된다.
굳이『조선의 풍수』가 그 기준으로서의 자격이 있음을 덧붙이면, 우선『조선의 풍수』는 조선총독부의 구관조사에 의해 발간된 공식적인 보고서이다. 그리고 이 보고서의 발간시기를 통해, 일제가 1920년대 후반에 들어 조선풍수에 대한 식민지 통치 자료로서의 활용가치를 인정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일제는『조선의 풍수』발간 이후 습득한 풍수적 지식을 바탕으로, 1930년대부터는 식민지 통치사업에 풍수를 활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조선신사의 사례에서, 1930년대 이후 신사의 입지에 풍수적 특징이 개입되는 비율이 절대적으로 높아지는데, 이것은 일제가 풍수를 활용했음을 뒷받침한다.
따라서『조선의 풍수』(1931)의 발간 시기를 기준으로, 1920년대까지의 단맥을 포함한 일제의 공간적 훼손은 일제의 일반적인 식민지 통치사업에 따른 부가적인 훼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 풍수 보고서가 발간되기 이전에, 일제가 조선의 풍수 지식을 습득하고 식민지 통치 사업에 풍수를 체계적으로 활용했다고 추정하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30년대 이후의 공간적 훼손은 일제가‘풍수적 의도’를 가지고
조선의 공간을 훼손 또는 활용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그 사례로서, 조선총독부 신청사(1912년 입지선정, 1926년 준공)를 경복궁 근정전 앞에 건립한 것을 들 수 있다. 조선총독부 신청사 부지를 물색하던 1910년대 초의 일제는 아직 조선의 풍수를 식민지 통치에의 활용가치를 인식하지 못했으며, 당연히 풍수에 대한 지식체계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따라서 당시의 일제의 조선총독부 신청사의 건립은 정복자의 권위와 통치를 상징하는 조선총독부를 강조하고, 조선 왕권을 상징하는 경복궁 근정전을 억압하는 일종의 공간(상징)정치의 발현이지, 구체적인 풍수 지식이 개입된 풍수정치라고 볼 수 없다.
경주에서의 풍수 단맥의 사례로 거론되는 대표적인 것에는 양동마을, 선덕여왕릉 및 김유신장군 묘, 여러 마을에 전설로 전해오는 斷脈說 등이 있다. 먼저 양동마을의 사례를 보면, 경주와 포항을 연결하는 慶東線 철도가 良洞里 일대에서 남동쪽으로 크게 휘어져‘U’자형을 그리며 有琴里로 이어져 있다(그림4). 그런데 일제 강점기 당시, 일제가 최초 수립한 경동선 철도부설계획에는 철로가 양동리~내동~유금리를 지나가도록 되어 있었다.
이럴 경우, 양동마을은 서백당에서 무첨당을 거쳐 향단, 관가정으로 이어지는 마을의 경관축이 파괴된다. 그리고 풍수의 관점에서는 마을의‘勿’자 형상이‘血’자로 바뀌어 불행이 닥친다고 여겨졌으며, 마을의 주산인 설창산에서 안산인 성주봉을 연결하는 산줄기를 끊게 된다. 이에 지역주민들이 결사적으로 반대함으로써, 현재와 같이 선로를 우회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이때, 이곳의 단맥(未遂) 사례를 정확한 관점으로 볼 필요가 있다. 즉 최초의 경동선 부설계획이 일제가 양동마을의 경관을 훼손하고 지기를 끊기 위한‘풍수적 훼손’의도로 마을을 가로지르도록 계획한 풍수침략인지, 아니면 식민지 통치 사업(여기서는 철도사업)에 따른 부가적인 훼손인지를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
먼저 일제의 조선 풍수에 대한 인식 변화의 맥락 속에서 살펴보면, 대구를 기점으로 한 경주, 포항, 불국사역으로 이어지는 경동선은 1918년에 개통되었다. 경동선 개통 당시의 1910년대는 아직 일제가 조선의 풍수를 식민지 통치사업에 활용할 가치를 인식하지 못했을 시기이다. 따라서 이때의 경동선 부설계획에는 풍수 단맥과 같은 특별한‘풍수적 의도’가 담겨 있었다기보다는, 철로 부설에 유리한 지형 및 비용 등에 대한 고려가 더 우선시되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좀 더 정확한 판단을 위해 일제 강점기 당시의 일제의 철도사업의 방향에 대한 맥락을 살펴보면, 한일병합 이후 철도건설은 조선총독부가 주력한 사업의 하나로서, 그 목적은 대륙침략 및 수탈을 위한 교통망 확보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정치·경제적인 이유로 철도사업을 직접 추진할 여건이 되지 못해, 보조금 등 각종 지원책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私設철도회사들을 활용했다. 이에 1910년대 조선총독부는 조선 전역에서 전체 14개선, 총연장 245.847km에 달하는 사설철도사업을 계획하고, 이를 시행할 10여개의 사설철도회사를 운용했다.
그러나 이때, 사설철도회사가 부설한 철도는 철도부설 기간 및 비용의 절감을 위해 노선과 차량규격을 간편화한 輕便鐵道였으며, 궤간은 일반철도의 절반 정도인 협궤(762㎜)였다. 이후 1927년부터, 조선총독부는‘조선철도 12년 계획’을 수립해, 기존 사설철도 매수, 철도사업의 직영화를 통해 조선 전역의 국유철도 네트워크를 구축하고자 했으며, 그 일환으로 기존 협궤노선의 표준궤로의 확장공사도 시행했다.
양동마을을 지나가는 경동선은 그 시행업체가 조선중앙철도주식회사(私設)였으며, 궤도가 협궤였다. 이때, 경동선의 시행업체가 사설이고, 철로가 협궤인 것은 그 최대의 관심사가‘비용절감’이었음을 예상케 한다. 실제로 사설철도회사는 철도개통 후 이익을 내지 못할 경우에 조선총독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았다. 또한 주민들의 철로우회 요구에, 철도업체가 난색을 보인 이유는 공사비용의 추가 문제였다고 한다. 반대로 만약 그들의 철도부설의 목적에 양동마을의 풍수적 훼손이 포함되어 있었다면, 주민들의 철로우회 요구는 당연히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양동마을을 가로지르도록 계획되었던 경동선 부설 당시인 1910년대는 아직 일제가 조선의 풍수를 식민지 통치사업에 활용할 가치를 인식하지 못했던 시기였다. 그리고 경동선의 시행업체가 사설이었으며, 철로가 협궤인 것은 철도부설의 과정에서 비용절감이 가장 우선시되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양동마을과 관련한 경동선 부설계획은 일제의‘풍수적 훼손’의도가 있었다기보다는 식민지 통치 사업(여기서는 철도사업)에 따른 부가적인 훼손의 관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경주에서 풍수 단맥으로 거론되는 두 번째 사례는 선덕여왕릉과 사천왕사지다(그림5). 그림의 왼쪽 상단에서 오른쪽 하단으로 이어지는 흰색 실선은 경주-울산을 잇는 7번 국도이다. 국도 위쪽의 흰색 점선은 현재의 동해남부선이다. 풍수 단맥의 관점에서, 일제가 동해남부선을 부설하면서‘풍수적 훼손’의도를 지니고 고의적으로 신라시대의 대표적 유적지인 선덕여왕릉과 사천왕사지 가운데를 끊고 지나갔다고 보는 것이다.
먼저 일제의 조선 풍수에 대한 인식 변화의 맥락 속에서 살펴보면, 경주에서의 동해남부선이 개통된 것은 조선총독부가‘조선철도 12년 계획’에 따라 표준궤로로 부설한 1936년도였다. 이때, 1936년은 무라야마 지준의『조선의 풍수』가 출간된 지 5년이 지난 시점으로, 일제가 풍수에 대한 기본적 지식을 습득하고, 또 일정 부분 활용하고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시기다. 이에 시기적으로 보면, 철로가 선덕여왕릉과 사천왕사지 사이를 갈라놓은 것이 일제의 풍수적 훼손 의도가 담긴 풍수침략으로 규정할 수 있다.
좀 더 정확한 판단을 위해 현장 지형을 들여다보면, 1930년대 동해남부선이 가설될 당시, 그 이전에 가설된 협궤철길이 지금의 국도와 나란하게 깔려 있었다. 그런데 협궤철길은 사천왕사지 아래로 놓여 있어 별다른 훼손을 발생시키지 않았으며, 동해남부선 부설을 하면서 그 훼손을 유발하고 있다. 이것은 일제의 풍수적 훼손 의도를 짐작하도록 만든다. 물론 협궤와 비교해, 표준궤로는 기차의 속도와 무게 때문에 직선화가 중요하며, 이에 터널 및 교량 건설이 수반되는 차이점이 있다. 이를 감안하더라도, 기존 협궤철길이 평지를 지나가고, 또 협궤철길과 인접해 추가적인 공간이 있었음에도, 굳이 표준궤로(현 동해남부선)가 선덕여왕릉과 사천왕사지 사이를 가로질러 가설된 것에는 일제의 풍수침략 의도가 엿보인다.
경주에서 풍수 단맥으로 거론되는 세 번째 사례는 김유신장군 묘다(그림6). 풍수 단맥의 관점에서, 1936년에 가설된 표준궤로(현 철로)가 김유신장군 묘 하단 산줄기를 끊고 지나가는 것을 일제의 풍수침략으로 본 것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1930년대는 일제의 단맥 행위에 풍수침략 의도가 담겨 있을 가능성이 높은 시기다.
좀 더 정확한 판단을 위해 현장 지형을 살펴보면, 표준궤로 부설 당시, 이미 협궤선이 舊서악역에서 서천 강변을 따라 가설되어 있었으며, 이때는 김유신장군 묘와 많이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1936년 개통된 표준궤로 철길을 보면, 서악역을 지나면서부터 기존의 협궤선보다 오히려 왼쪽으로 크게 휘어져 있다. 직선화가 중요시된 표준궤로가 협궤선보다 더 곡선으로 휜 것은 당시 일제의 김유신장군 묘소에 대한 훼손의도 가능성을 높여준다. 실제로 표준궤로는 김유신장군 묘 하단의 산줄기를 포함해 인근의 네 개(★지점)의 산줄기를 잘라놓고 있다.
그러나 풍수의 관점에서 좀 더 세부적으로 들여다보면, 표준궤로에 풍수침략 의도가 담겨있다고 확신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 풍수에서는 땅의 기운(지기)이 산줄기(용맥)를 타고 이어져 온다고 보기에, 후방의 조산 및 주산에서 터까지 이어지는 용맥의 상태를 중요하게 여긴다. 이런 관점에서, 현재의 철길은 김유신장군 묘에 대해 그다지 풍수적 단맥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일제가 확고한 풍수 단맥 의지가 있었다면, 땅의 기운이 이어져 오는 옥녀봉과 김유신장군 묘소 사이의 산줄기(A지점)를 끊도록 철로를 부설했어야 했다.
결과적으로, 일제에 의한 풍수 단맥을 정확한 관점으로 보기 위해서는 몇 가지 기준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 가장 기본적인 기준은 무라야마 지준의『조선의 풍수』(1931) 출간시기이다. 이를 기준으로, 1920년대까지의 단맥은 일제의 통치사업에 따른 부가적인 훼손의 관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며, 1930년대 이후의 단맥은 일제의 풍수침략 의도가 담겨 있을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단 1930년대의 단맥을 모두 풍수침략의 관점으로 보는 것 또한 무리가 있다. 이 시기의 단맥은 일제의 철도(도로)사업 추진과정, 각 사례지역 철도(도로)의 부설시기, 당시 현장 지형 등을 고려한 종합적인 맥락과 분석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경주에서 풍수 단맥과 관련한 사례로, 斷脈說이 전해오는 마을이 8개소가 있다(표3). 각 마을에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李如松이, 또는 일제 강점기 일제가 큰 인물이 탄생할 만한 지세가 있는 마을의 혈(산줄기)을 자르자 피가 쏟아져 흘렀다는 등의 전설이 전해온다. 그러나 각 마을에서 정확한 단맥 장소를 확인하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오랜 세월이 흘러 단맥 전설에 대해 알고 있는 주민들이 거의 없었고, 또 풍수의 관점에서도 정확한 지점을 찾기가 불가능했다. 이러한 어려움은 비단 경주의 사례만이 아니고, 풍수 단맥설이 전해오는 전국 대부분의 마을에도 해당될 것이다.
단맥설은 임진왜란 시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의 주요 등장인물이 이여송이다. 이여송은 그의 父가 명나라로 귀화한 조선인 출신의 명나라 장수이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원군으로 조선에 왔지만, 여러 핑계로 왜군과의 전투에 소극적이면서도 조선에는 갖가지 횡포를 자행함으로써, 많은 조선인들로부터 원성을 받았다.
이여송에 대한 시각은 역사적으로 양면성을 갖는다. 그가 사대종주국인 명나라에서 파견된 구원군의 장수라는 긍정적인 시각과 우리 민족에게 보여준 온갖 행패에 대한 저주의 부정적인 시각이 있다. 이에 임란 후 유행했던 임란설화에서 이여송에 대한 이야기 또한 두 가지 시각으로 갈린다. 양반계층을 중심으로 한 문헌설화 속의 이여송은 왜군과의 전투에서 전공을 세우고, 때로는 신비로운 능력을 보여주는 인물로 부각되는 등 긍정적으로 비춰진다.
그러나 일반 민중을 중심으로 전승된 구비설화 속의 이여송은 그가 조선에서 자행한 갖가지 트집과 횡포가 부각되는 부정적인 인물로 비춰진다. 이여송의 횡포가 문헌설화보다 구비설화에서 더 부각된 것은 이여송으로 대변되는 明軍의 피해를 가장 많이 경험한 계층이 민중들이었으며, 구비설화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그의 횡포는 민중들의 민족적 응징의 표출이라 할 수 있다.
이여송에 대한 민중의 부정적인 시각은 세월이 경과하면서 풍수의‘산줄기(용맥)의 강조’개념과 합쳐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즉 이여송이 조선의 山川이 마음에 들어 차지할 욕심에도 그렇게 하지 못하자,‘산천의 혈맥을 끊었다’는 내용으로 다양한 구비설화에 담겨져 내려오게 된 것이다. 이여송 단맥설은 이후 민간에 널리 유포되어 사실처럼 고착화되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일제 강점기에는 일제에 대한 민중들의 저주와 울분에 의해‘일제 단맥설’로 변질되어 전승된 것으로 추정된다.
마지막으로, 풍수 단맥의 사례 중 경주 지역에서 발견되지 않은 것은 쇠말뚝이다. 전국 곳곳에서 풍수침략 의도로 보이는 쇠말뚝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경주에도 아직 발견이 되지 않았을 뿐이지, 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러나 그것이 일제의 풍수침략인지, 식민지 통치사업의 부가물인지는 종합적인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관련 문서나 기록이 없는 현재의 상황에서, 그 판단을 위한 기본적인 기준은 쇠말뚝의 설치년도가 될 것이다. 물론 설치년도 확인은 어려운 작업이지만, 본 연구의 분석결과에 따르면, 1920년대까지의 쇠말뚝은 일제 통치사업의 부가물일 가능성이 높으며, 1030년대 이후의 것은 풍수침략의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