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남부민동
남부민동(南富民洞)은 부민동에 속해 있다가 1914년 부산부제가 실시되면서 남부민동으로 분리하여 나온 동이며, 본래는 부민동과 함께 부민포(富民浦)로 불리던 곳이다. 따라서 이곳의 옛 이름은 「샛디」인 셈이다. 일부에서는「샛디」를「신성(新姓)」이라고 풀이하여 구초량을 하단으로 비정하고 있다. 하지만 샛디는 초량이라는 뜻으로 구초량을 의미한다. 「샛디」는 남부민동과 초장동 일대의 옛 지명이며,「샛디재」는 충무로 광장에서 송도로 가는 윗길 입구의 고개를 말하는 것이다. 옛날에는 지금의 송도로 가는 아랫길은 없었고, 또 송도가 바로 바닷가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송도로 가려면 배를 타지 않는 한 이「샛디재」를 넘어가야 했다. 이 지역의 故老들중에는 아직까지도 이 곳을「샛디」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1914년 앞 바다를 매립하여 새로운 터를 만들었는데, 이때 부민동 남쪽에 있다하여 남부민정이라 하였다가, 1947년 7월 일제식 동명 개정 때 남부민동으로 바꾸었다. 1959년 남부민1,2동으로 분동, 1970년 남부민2동을 2,3동으로 분동되었다.
동대신동
동대신동(東大新洞)의 옛 지명은「닥밭골(楮田)」또는 「고분도리」이다. 딱박골 또는 딱밭골 등은 닥밭골을 말하며 닥나무가 많이 나는 골이라는 뜻이다. 또 전하는 바로는 보수천가에 버드나무가 많았다고도 한다. 고분도리란 마을 이름은「고불」·「드르」에서 온 이름이 아닌가 생각된다.「고블」은 고리짝을 말하며,「드르」는 들을 말하므로 「고블드르」는 고리짝을 만드는 들이 된다. 닥나무와 버드나무 그리고 고리짝 들판을 미루어 생각해보면 이 일대에「부곡(部曲)」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대신동이란 마을 이름이 처음 생긴 것은 1914년으로 추정되며, 보수천의 호안공사 이후 일본인이 대거 밀려와서 생긴 새로운 시가지를 한새벌이라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 한새벌의「한」은 큰길을 한길이라 하듯이 큰대(大) 또는 태(太), 새는 새로운 이라는 뜻의 신(新), 벌은 넓은 땅이라는 뜻을 가진 동(洞)이므로, 대신동은 한새벌의 한자식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대신동은 일본인 주거지가 되기 이전까지는 부민포에 속하기도 하고, 대치리의 일부에 속하기도 하던 곳이 대신리라는 새로운 지명을 얻게 되었다. 동대신동은 1926년 동대신정과 서대신정으로 구분하게 되었고, 광복 이후 1947년 7월 일제식 동명개정 때 명칭만 바꿔 동대신동 1,2,3가로 불리게 되었고, 1959년 1월 동명개정 때 동대신1,2,3동으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신리, 동산리, 북산리의 자연마을이 있었다.
부민동
부민동(富民洞)은 보수천 하구일대로 갈대밭과 풀밭이어서 예로부터「샛디」라고 불러왔다.「샛디」는 초량(草梁)이란 말로 해정리 (海汀里, 지금의 초량)까지도 초량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인가가 매우 적은 시대이긴 하지만 이 넓은 지역을 모두 초량이라고 부르기에는 불편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해정리를 신초량리라 하고, 원래의 샛디는 구초량리라고 불렀으며, 이러한 지명은 개항(1876년) 당시까지도 있었다고 한다.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이 부임(1864년)하여 같은 고을에 똑같은 초량이 두 개가 있을 수 없다고 하여 구초량을 부민동이라 개명하였다 한다. 부민동이란 이름의 유래는 보수천 하구의 부민포에서 따온 것으로 보이며, 부민포는 부산부곡의 옛 명칭이 부산(富山)이며, 부산부곡의 사람들이 쓰던 포구라는 뜻으로서 부민(富民)이란 명칭이 생겨났다고 추측된다. 또한 부민의 유래에 대해서는 이곳이 천석(千石)을 하는 부자가 살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1901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보수천을 경계로 부민동에서 부평동이 분할되었고, 1925년 4월 경남도청이 진주에서 부산으로 이전하여 1983년 7월 창원으로 이전하여 갈 때까지 행정의 중심지 역할을 한 곳이다.
부용동
부용동(芙蓉洞)은 시약산에서 발원한 계류가 서대신동 중앙을 지나 지금의 부민초등학교 뒤쪽을 돌아 보수천으로 흐르는 냇물과, 아미골짜기에서 발원한 계류가 지금의 토성중학교 부근을 거쳐 보수천으로 흐르는 시냇물과 그 작은 계류들로 인하여, 이 일대는 마치 시냇물에 둘러싸인 섬처럼 보이는 지대였다. 이와 같은 보수천가의 섬같이 생긴 형태로 말미암아 원래 행정구역상 부민동에 속하던 곳이지만 최근에는 부용동(芙蓉洞)으로 통칭되었으며, 일제시기에는 중도정(中島町)이라 불렀다. 광복 이후 1947년 7월 일본식 동명을 우리의 동명으로 개칭할 때 부용동으로 고쳤다. 이 지역은 원래 행정구역상 부민동이었다가 분리되었다는 점에서 부민의 부(富)라는 글자와 부(富)를 상징하는 부용화(芙蓉花)를 동시에 고려하여 지은 동명인 듯하다. 이 지역의 고로(古老)들에 의하면, 부용화가 많이 피어 있어서 부용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959년 시조례에 의해 부민동에 통합되었다가, 1962년 부민동에서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대신동
서대신동(西大新洞)의 옛 지명은「닥밭골(楮田)」또는 「고분도리」이다. 딱박골 또는 딱밭골 등은 닥밭골을 말하며 닥나무가 많이 나는 골이라는 뜻이다. 또 전하는 바로는 보수천가에 버드나무가 많았다고도 한다. 고분도리란 마을 이름은「고불」·「드르」에서 온 이름이 아닌가 생각된다.「고블」은 고리짝을 말하며,「드르」는 들을 말하므로 「고블드르」는 고리짝을 만드는 들이 된다. 닥나무와 버드나무 그리고 고리짝 들판을 미루어 생각해보면 이 일대에 부곡(部曲)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대신동이란 마을 이름이 처음 생긴 것은 1914년으로 추정되며, 보수천의 호안공사 이후 일본인이 대거 밀려와서 생긴 새로운 시가지를 한새벌이라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 한새벌의「한」은 큰길을 한길이라 하듯이 큰대(大) 또는 태(太), 새는 새로운 이라는 뜻의 신(新), 벌은 넓은 땅이라는 뜻을 가진 동(洞)이므로, 대신동은 한새벌의 한자식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대신동은 일본인 주거지가 되기 이전까지는 부민포에 속하기도 하고, 대치리의 일부에 속하기도 하던 곳이 대신리라는 새로운 지명을 얻게 되었다. 서대신동은 1926년 서대신정과 동대신정으로 구분되었고, 광복이후 1947년 7월 일제식 명칭만 바꾸어 서대신동 1,2,3가로 부르게 되었다가, 1959년 동명개정 때 서대신1,2,3동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1970년 서대신3동을 3,4동으로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에는 닥발골마을, 고분도리마을, 꽃마을의 자연마을이 있었다.
아미동
아미산의 아미동(峨嵋洞)이다. 그러나 아미산은 아미골이란 골짜기 이름이 먼저 나고, 그 골짜기 이름에서 아미동이란 마을 이름이 생긴 뒤 아미산이란 산 이름이 생겼다. 그렇게 마을 이름을 따라 산의 이름이 생겼지만 마을의 이름과 산의 이름이 같음으로 마을과 산은 보다 분명해진다. 아미동의 본래의 아미의 뜻은 지금의 아미동 지역에서 내려다보는 토성동의 옛 토성이 반월형이 되어서 누에나방이 가진 예쁜 눈썹 같아서 미인을 가리켜 아미라 하는 그 아미로 미화된 것으로 본다. 또 하나는 이곳에 있던 토성의 모양인 반월형을 후세에서 아미월(峨眉月)이라 부른데서 아미골이라는 이름이 생겼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아미월이란 음력 초사흘 달인 초생달을 말한 것으로 반월성의 모양이다. 아미란 누에나방처럼 예쁜 눈썹을 가진 미인을 말하는데, 이 눈썹 모양이 초사흗날의 달 모양이라 한다. 『동래부지(1740)』방리조에 보면, 사천면 구초량리 지역이었다가 1866년(고종 3) 사하면에 소속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따라 부민동 일부를 곡정(谷町) 1,2정목(丁目)이라 하다가, 1947년 7월 일제식 동명 개정 때 아미동 1,2가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초장동
초장동(草場洞)은 조선시대 때 지금의 천마산·아미산· 시약산·승학산으로 이어진 산지에는 옛날 조정에서 운영하던 목마장으로 다대포첨사가 관장하고 있었다. 천마산의 산 이름만 해도 용마가 초원이 좋아서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전설을 따라 생겼다고 한다. 동리에 구전되고 있는 전설에 의하면, 이곳은 초원이 좋아서 용마(龍馬)가 하강한 곳이라고 한다. 이곳을 초원이었다고 하여 초장동이라는 이름이 생겼지만 이곳은 역시 목마장은 초장동 뿐만 아니라 주변일대가 거의 다 조선시대 조정에서 운영하는 목마장이었다. 초장동이란 이름 역시 초원의 장(場)인 초장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초장정(草場町)이란 기록은 일제 때인 1933년에 비로소 나타난다. 광복 이후 1947년 7월 일제식 동명개칭 때에 일제식 지명이 아니라 하여 그대로 초장동1,2,3가라 하게 되었다. 1957년 1월 시조례에 의해 초장동1,2가는 토성동에 병합시키고, 3가를 초장동으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충무동
충무동(忠武洞) 지역은 원래 부민포에 속한 해변이었다. 대정공원(大正公園, 현 서구청 자리)이 1918년 설치되면서 그 아래 광장이 생겨났으며 이 곳이 유명한 충무동광장이다. 이 광장에는 도로 개설로 인해 로터리가 생겼다. 로터리가 되기 이전의 충무동광장은 당시 부산에서 가장 넓은 지대였기 때문에 많은 군중이 모일 수 있는 집회 장소였다. 그래서 일제시대의 모든 행사와 집회 등이 자주 개최되었다. 따라서 이 광장은 부산의 심장부와도 같은 자리로서 이후 남쪽해안과 서쪽해안이 매축되고 시가지가 번창하면서 이곳의 비중은 더욱 커졌다. 일제시기 한때 일본천황의 연호를 따 소화정(昭和町)이라 불리었다. 1947년 7월 일제식 동명 개칭 때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부산포해전 승리를 기념하는 비석을 세우고 충무동로터리로 명명하면서 동명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충무동의 지명은 일본인이 물러간 후 일본천황의 연호를 따서 지은 이름을 일본을 무찌른 장군의 시호를 딴 이름으로 바꾼 것이다. 1959년 동경계 조정으로 충무동1,2,3가는 중구 남포동에, 충무동4가는 서구 충무동으로 편입, 충무동5가는 남부민동에 편입되었다. 1982년 완월동을 충무동에 병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토성동
토성동(土城洞)이란 토성이 있었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토성은 아미동 구 화장장 부근을 중심으로 아미골 아래쪽에 반월형으로 축조된 성으로서 현 토성중학교 부근을 통과하며, 성내 면적이 3∼4천평 되는 반월성이다. 성의 높이는 4∼5척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성의 모양이 반월형이라는 사실이 주목된다. 이 성은 1906년 일본거류민단에 의해 설립된 부산고등여학교(현 부산여자고등학교 전신)를 현 토성중학교 자리에 신축할 때부터 파괴되기 시작하여 토성초등학교 건물을 비롯한 건물이 차례로 들어서서 지금은 거의 흔적을 찾기 어렵지만, 단편적으로 토성지(土城地)임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아미동 중턱에 올라서서 이 부근을 관찰해 보면 토성이 있었던 높은 지대를 헤아릴 수 있다. 대마도 문서인『초량화집』에 보면, 이곳에 토축성(土築城)이 있다고 하나, 이 성의 양식이 일본성의 축조방식과는 아주 다른 반월성이므로, 예부터 전하여 오는 토성을 일본군이 진소(鎭所)로 이용한 것에 불과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토성동이란 이름은 바로 이 토성에서 비롯된 것이 명확하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부민동 일부를 분할하여 토성정 1,2,3정목이라 하였다. 1947년 7월 일제식 동명 개정 때 일제식 명칭이 아니라 하여 토성동1,2,3가로 고쳤다가, 1959년 1월 시조례에 의해 초장동1,2가를 병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