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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목조목 잘 정리하여 질문해 주셨습니다.
먼저 가문의 내력에 관하여 간단히 설명한 다음 저가 알고 있는 범위에서 답변 드리겠습니다.
안렴사공파의 파조(派祖)이신 안렴사공(按廉使公) 휘 용생(龍生)은 시조 문성공(文成公) 휘 아(阿)의 장남(長男)으로 전북 전주 혹은 고려의 수도 개성에서 태어나신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고려는 칭기즈칸이 세운 원(元)나라의 속국(屬國)으로 국왕(國王)은 어릴 때부터 원나라의 수도 대도(大都, 지금의 베이징)에 볼모로 잡혀가서 그곳에서 자랐고 또 반드시 원나라 공주와 결혼해야 했으므로 고려의 왕비는 바로 원나라의 공주였습니다.
또한 원나라는 고려의 어린 아이들을 조공(租貢)으로 잡아가 노비(奴婢)로 삼았는데 그 중 일부는 원나라에서 내시(內侍)로 출세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공녀(貢女)로 바쳐진 고려 여인 기씨(奇氏)는 고려 출신 내시들의 도움으로 원나라 궁중에 들어가 황제의 총애를 받아 황후에 올랐고 그녀의 아들 아유르시리다르는 원나라 황제(소종)에 올랐습니다.
고려 조정은 기황후(奇皇后)의 오빠 기철(奇轍) 일당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원나라에서 내시로 출세한 자들이 어향사(御香使, 사신)가 되어 고국 고려에 와서 온갖 만행과 가렴주구를 일삼았지만 어향사의 말 한마디에 국왕도 바뀌는 엄중한 상황에서 감히 누구도 나서서 그들을 만류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안렴사공은 관리들의 잘못을 탄핵하는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정5품)이었는데 감히 어향사의 가렴주구를 탄핵하였기 때문에 원나라를 추종하는 세력들에게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이었습니다.
1350년(충정왕 2) 기철 일당이 장악한 고려 조정은 안렴사공을 수도 개성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경상도의 안렴사(종4품)로 승진발령을 내어 쫓아버리려고 했습니다.
이에 격분한 안렴사공은 원나라 내시들의 만행을 글로 적어 곳곳에 방을 붙여 폭로하므로 어향사 주완지첩목아(朱完之帖木兒)가 고려의 왕비가 된 원나라 공주에게 참소하여 안렴사공을 경상도안렴사에서 해임하고 김유겸(金有謙)을 대신 경상도안렴사로 발령하도록 만들었습니다.(고려사 세가 37)
결국 안렴사공은 경상도안렴사로 발령만 받았을 뿐 부임도 해 보지 못하고 바로 해임 당한 것입니다.
하지만 안렴사공은 경상도안렴사에서 체직된 후 벼슬을 낮추어 진주목사로 근무하면서 1354년(공민왕 3) 졸옹(拙翁) 최해(崔瀣, 경주최씨)의 문집(文集) 졸고천백(拙藁千百)을 간행하여 그 원본이 일본국(日本国) 이시카와켄(石川県) 손케이가쿠분코(尊經閣文庫)에 소장되어 전해오고 있으며 또 1355년(공민왕 4) 동인지문사륙(東人之文四六, 보물 제710-5호) 진주판을 간행하여 대구 계명대학교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습니다.
졸고천백의 간기(刊記)에 의하면 진주목사 안렴사공은 품계(品階)가 중정대부(中正大夫, 종3품 상)로 자신의 상관 경상도안렴사 곽충수(郭忠守)의 봉선대부(奉善大夫, 종4품)보다 두 단계나 더 높은 것을 통하여서도 위 사건의 배경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 졸고천백의 간기 -
이상을 근거로 생각할 때 당시에는 비록 원나라 기황후를 등에 업은 기철 일당의 권세가 하늘을 찔렀지만 안렴사공을 비롯한 그에 저항하는 정치세력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안렴사공이 진주목사로 부임하기까지는 문하시중을 지낸 문성공의 뒤를 이은 정치세력과 기황후를 등에 업은 정치세력 사이에 수많은 힘겨루기와 협상이 있었을 것이고 그 결과로 안렴사공이 벼슬을 낮추어 진주목사로 부임하는 선에서 타협이 이루어 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안렴사공은 진주목사 임기를 끝내고 도성으로 돌아가지 않고 진주목 관할 지역인 지금의 사천시 정동면 풍정리 부근으로 낙향하였는데 당시에 만약 안렴사공이 도성으로 돌아갔다면 기철 일당과 끝까지 싸우겠다는 의지를 표현하거나 아니면 머리를 숙이고 그 아래로 들어가겠다는 의지를 표현하는 것으로 되는데 안렴사공은 끝없는 투쟁도, 굴욕적 항복도 선택하지 않고 자신이 사천으로 물러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 배경을 안렴사공이 도성을 떠나 있는 중에 안렴사공이 소속한 정치세력, 즉 문하시중을 지내신 문성공의 후계세력의 정치적 몰락과 관련이 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1357년(공민왕 6) 8월에 전주에 살고 있는 안렴사공의 동생 대호군공(大護軍公) 휘 용각(龍角)이 “양민 70여 호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힘든 일(力役)을 시키고 다른 사람의 토지를 빼앗으며 재물을 함부로 약탈하였다.”는 핑계를 들어 검교대호군에서 해임시키고 방어소의 병졸로 편입시키는 사건(고려사 세가 39)이 있었는데 이는 모두 문성공의 배후세력이 정치적으로 몰락하면서 일어난 사건으로 추정 됩니다.
그로 인하여 안렴사공파 후손들은 하동에서 고성에 이르는 서부경남을 중심으로 터를 잡아 대대로 살아오게 된 것입니다.
안렴사공파 7세 검재공(儉齋公) 휘 수지(水智)는 개령현감공(開寧縣監公) 휘 자경(子涇)과 진주정씨(晋州鄭氏)의 장남으로 경상도 사천에서 태어나 전부인(前夫人) 함평모씨(咸平牟氏)와 혼인하여 장남 군수공(郡守公) 휘 이식(以湜)을 낳았습니다.
검재공은 1447년(세종 29) 식년 진사시에서 생원 1등 4위로 급제하고 1453년(단종 1) 식년 문과 정과(丁科)에서 진사 21위로 급제하여 비안현감(比安縣監), 현풍현감(玄風縣監) 등을 역임하고 1455년(세조 1) 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었습니다.
전부인이 돌아가신 뒤 후부인(後夫人) 선산김씨(善山金氏, 일선김씨 혹은 해평김씨라고 부르기도 합니다)와 재혼하여 경상도 선산(현재 경북 구미시 해평면)에서 살면서 좌통례공(左通禮公) 휘 이회(以淮), 휘 이하(以河), 참판공(參判公) 휘 이한(以漢) 등 3남 2녀를 낳았으며 선산에서 돌아가셔서 묘소는 현재 경북 구미시에 있습니다.
이와 같이 벼슬에 있다가 처가(妻家)가 있는 고장으로 낙향(落鄕)하여 사는 일은 조선 전기(前期)에는 매우 흔한 일이었으며 좋은 사례로 중랑장공파 5세 연촌공(烟村公) 휘 덕지(德之)의 영암으로 낙향을 들 수 있습니다.
연촌공은 전주에서 태어나 남원부사를 마지막으로 벼슬을 버리고 후부인(後夫人) 평양조씨(平壤趙氏)의 고향 전남 영암으로 낙향하신 바 있습니다.
검재공이 실직으로 근무한 벼슬은 높지 않았으나 손자 송정공(松亭公) 휘 응용(應龍)이 입신(立身)함으로 인하여 도승지에 증직 되었습니다.
검재공의 장남 군수공 후손이 경남 사천에서 고성으로 이주하여 살면서 고성종중{무과공파, 통덕랑공파, 완헌공파, 화헌공파, 찰방공파, 소연공파, 의숙공파, 학생공(완식)파, 처사공파, 대은공파, 모제공파, 참봉공파, 학생공(백중)파, 충순위공파}을 이루었으며
차남 좌통례공, 휘 이하, 참판공 후손이 경북 구미시 해평면을 중심으로 살면서 선산종중{석문공파, 인재공파, 월담공파, 선무랑공파, 봉사공파, 학생공(이하)파, 참봉공파, 송정공파}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상을 바탕으로 질문에 답변하도록 하겠습니다.
1. 처음 보는, 그리고 제 이름을 알게 되는 어떤 분이 저에게 묻습니다. 본관이 어디냐고요...
저는 자랑스럽게 대답합니다. "전주입니다"라고요. 그러면 그 분이 무슨 파냐고 묻습니다.
저는 "안렴사공파"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그 분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대충 족보에 대한
이야기는 얼버무리시고 다른 이야기를 하십니다. 제가 잘못 대답한 것인가요?
아니면 그 분이 자기 파 밖에 모르고 계시는 것인가요?
답변 : 전남 일대에는 중랑장공파 일가들이 많이 살고 계신데 중랑장공파와 안렴사공파는 고려
말기에 갈라져서 종중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자세하게 모르는 경우도 많고 특히
소파(小派)에 이르면 아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아마도 질문자께서도 중랑장공파의 소파(예를 들어 동복공파, 의령공파 등)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을 것입니다.
2. 족보에 저는 22세손으로 올라 있습니다.
족보의 돌림자를 보면 "20세 0植 --> 21세 炳0 --> 22세 0基 --> 23세 鍾0 --> 24세 0浩" 입니다. 문성공계의 항렬인 "洪 --> 秉 -->烈 --> 圭 --> 鎬"와는 한자의 오행 외에는 맞지 않습니다. 과연 저의 항렬은 "基"자 항렬인가요? 아니면 "烈"자 항렬인가요? 그리고 제 족보의 항렬과 문성공계 항렬이 각기 틀린 이유는 무엇인가요?
답변 : 항렬자는 정해져 있으나 반드시 항렬자를 따르지 않는 경우도 많고 또 종중 마다 다른
돌림자를 만들어 사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문성공계 전주최씨 22세의 항렬자는 翰자, 혹은 烈자가 맞습니다.
3. 제 족보에 보면 13대조 할아버지때부터 인재공, 석문공, 월담공, 선무랑공, 봉사공,
송정공파로 나뉩니다. 저는 인재공파 면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안렴사공파를 대파로 인제공파를 소파로 보면 될까요?
답변 : 그렇습니다.
4. 안렴사공파를 대파로 인제공파를 소파로 본다면 족보 겉표지에 쓰인 해평파는 또 무엇인가요?
7대조 할아버지이신 수 字 지 字 할아버지 때 경북 구미시 해평면이라는 곳에 터를 잡아서
해평파라고 하였다는 글을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답변 : 족보에는 시조부터 모든 계파를 망라한 대동보가 있고 한 계파만 적은 파보도 있는데 우리
전주최씨는 대개 대파(안렴사공파, 대호군공파, 판사공파, 중랑장공파)를 중심으로 파보를
만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소파나 혹은 지역종중(예를 들어 고성종중, 선산종중, 남원종중, 영암종중 등)을
중심으로 족보를 만든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현재 가지고 계신 족보는 선산종중에서 만든 족보인 것 같은데 해평파(해평종중을 의미하는
듯함)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 같습니다.
5. 우리 문성공 할아버지께서는 문열공 할아버지의 7세손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열공이나 문충공 등은 문성공보다 더 위에 계시는 분들인데 그 자손들은 7세를 손해(?)를
보고 있는 형국입니다. 그렇다면 문성공 할아버지의 22세손인 저는 29세손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답변 : 문성공을 문열공(文烈公) 휘 순작(純爵)의 7세손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은 주로 화수회
(花樹會)에 참여하는 분들인데 화수회는 문열공계(주로 양도공파, 경절공파)가 주축을
이루고 있으며 문정공(文貞公) 휘 재(宰)의 묘비문을 근거로 문열공계가 큰 집이고
문성공계가 작은 집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 설은 오류가 너무 많아 사실로 인정하기
매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 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문성공 휘 아(阿)와 문정공 휘 재(宰)의 휘가 한자(一字)로
비슷하고 문성공의 아버지 상호군공(上護軍公) 휘 입평(立坪)과 문정공의 아버지 전서공
(典書公) 휘 득평(得枰)의 휘도 평(枰)자 돌림이라하여 문성공이 문정공의 사촌 동생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연대를 상고해 보면 문성공은 전서공과 같은 연대 사람이고 문정공은 안렴사공과
같은 연대 사람이어서 상호군공 역시 전서공의 아버지 중랑장공(中郞將公) 휘 정신(正臣)
과 같은 연대 분이며 전서공의 아들이 되기에는 상호군공의 나이가 너무 많습니다.
좋은 예로 안렴사공이 은퇴 직전에 간행하신 보물 제710호 동인지문사륙은 복주(福州,
경북 안동)에서도 함께 간행 되었는데 동인지문사륙 복주판은 당시 복주목사로 재직하고
있었던 문정공이 주관하고 진주판은 안렴사공이 주관하여 간행한 것입니다.
안렴사공과 문정공은 같은 시점에 같은 목사 직위에 있었지만 안렴사공은 그 이전에 이미
안렴사로 발령을 받았다가 벼슬을 낮추어 목사가 된 사실도 있어서 문정공보다 나이가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만약 문정공이 안렴사공의 큰 당숙(堂叔)이라면 이런 일은 벌어지기 어려울 것입니다.
따라서 문성공계와 문열공계 전주최씨는 같은 혈족(血族)이라는 점에는 틀림없지만
문성공이 문열공의 후손이라는 설은 근거가 없고 특히 중랑장공 휘 정신이 문성공의
할아버지라는 말은 성립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감찰공(監察公) 휘 세영(世榮)께서 족보 초성일권을 만들 때 문성공의 아버지
상호군공의 휘 입평(立坪)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 설들이 나와 혼란을 초래하므로
문성공에서 잘라 시조로 정하고 그 이유를 변오고증(辨誤考證)에 자세하게 적은 것입니다.
문열공이 문성공의 선조라는 설은 믿을 만 한 근거가 없으며 그 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근거로 내 세우는 고문헌은 하나 하나 검증해 보면 수많은 오류가
발견되지만 여기에서 그 내용을 모두 나열하면 너무 길어지므로 생략하고자 합니다.
자세한 것은 이 카페의 “전주최씨 상고사”, “오해와 진실” 등을 참고 바랍니다.
6. 저를 이야기할 때 "전주 최씨 안렴사공파 22세손"이라고 해야 하나요?
아니면 "전주 최씨 문성공파 22세손"이라고 해야 하나요?
답변 : 문성공은 파조가 아닌 시조이므로 ‘문성공파’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입니다.
문열공계 전주최씨 등과 혼동을 막기 원한다면 문성공계 전주최씨 정도의 표현에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문성공계 전주최씨 안렴사공파 22세가 되겠습니다.
7. 참고로 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고향은 고흥군 포두면이고 아버지 함자는 덕 字 환 字 를 쓰시는데 "炳"의 돌림자를 쓰시고 할아버지 휘자는 관 字 식 字(자는 貴童), 증조부님 휘자는 진 字 석 字 를 쓰십니다.
답변이 없습니다.
부족한 점이 있으시면 추가로 질문하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가슴 뿌듯한 답변을 받아서 기분이 정말 좋습니다. 더불어 여수님의 해박한 지식에 감탄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연촌공의 부인 평양조씨가 후부인이 아닙니다.
연촌선조의 부인은 처음부터 평양조씨이십니다.
그리고3형제의 아들를 두셨습니다.
연촌공의 아들 세 분과 딸 두 분이 모두 평양조씨 소생이라는 것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평양조씨는 후부인이 맞습니다, (족보에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
저가 연구한 바에 의하면
연촌공의 전 부인은 연촌공 나이 20대 초반에 돌아가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