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 일화로 돌아본 법고창신 정신 및 온고지신의 의미
한국학중앙연구원 ・ 2023. 3. 15.
여러분들은 조선시대 최고의 학자라면 누구를 떠오르실까요? 저는 열하일기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연암 박지원을 떠올리곤 합니다. 연암 박지원을 소개하는 가장 대표적인 수식어는 바로 법고창신 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온고지신이라는 의미와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온고지신이라 함은 옛것을 익히고 그것을 미루어서 새것을 앎." 이라는 뜻으로, 옛 학문을 되풀이하여 연구하고, 현실을 처리할 수 있는 새로운 학문을 이해하여야 비로소 남의 스승이 될 자격이 있다는 뜻입니다. 연암 박지원이 현실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법고창신과 온고지신은 연암 박지원의 여러 일화와 함께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열하를 방문한 박지원이 봤을 법한 북경 및 열하는 이러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연암 박지원은 조선후기의 실학자이자 소설가입니다.
명나라를 숭배하고 오랑캐로 인식을 하던 청나라를 향한 배청의식이 강하게 작용하던 시기에 홍대용, 박제가 등과 함께 북학론을 전개하였으며, 중상주의를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저서로는 <열하일기>, <허생전>, <연암집> 등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연암 박지원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당시 허위의식에 빠진 세태를 비판하며, 당시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배우고 실천하려고 하였던 북학의 선두 주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항상 더 멀리 바라보고 배우려고 했던 그의 자세는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전해주는 의미는 남다를 것이라 생각합니다.
당시 가장 큰 나라였던 중국을 방문하며,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를 저술하였습니다.
연암 박지원이 열하까지 간 여정을 대략 살펴보면 압록강에서 연경까지 약 2300여리, 연경에서 열하까지 700리로 육로 3000리의 긴 여행이었습니다.
거리도 상당히 멀었고 정말 끝없이 펼쳐지는 중원의 변화무쌍한 날씨는 여행을 더욱 힘들게 하는 큰 요소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어려움에도 항상 모험을 즐기며 가는 곳마다 세심하게 기록하였습니다.
실제로 여행 기간은 5월25일부터 10월27일까지 약 5개월간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박천→의주→요양→성경(심양)→거류하→소흑산→북진→고령역→산해관→풍윤→옥전→계주→연경(북경)→밀운성→고북구→열하 등이 주요 행선지였습니다. 실제로 그는 무조건 옛 것만을 우선시하고 숭배했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더 넓은 세상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워야 한다는 정신을 항상 갖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 신념은 열하일기를 쓰는 과정에서 더욱 굳게 믿음을 갖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가 방문했던 당시 열하 지역은 강희제 이후 중국 역대 황제들의 별궁으로 활용되었으며, 여름 최고기온이 24도를 넘지 않는 시원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열하로 가는 길은 험준한 지세에다 황제의 불 같은 재촉이 이어지면서 사신단 일행은 하룻밤에 아홉 번이나 강을 건너는 강행군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전해집니다. 열하는 당시 북방의 오랑캐들을 제어할 수 있는 ‘천하의 두뇌’에 해당하는 곳으로 인식되었으며, 연암 박지원은 이곳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동물, 몽골, 위구르, 티베트, 서양 등 이국문명을 접하면서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다른 문화충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열하일기’의 일신수필에서 언급한 청나라의 수레를 묘사한 그림.
당시 청나라를 오랑캐의 나라로 생각했던 많은 실학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북경과 열하에 방문한 그는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됩니다. 수레를 본 그의 일화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릇 수레라는 것은 하늘이 낸 물건이로되 땅 위를 다니는 물건이다. 이는 뭍 위를 달리는 배요 움직이는 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중략) 우리 조선에도 수레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바퀴가 완전히 둥글지 못하고 바퀴 자국이 궤도에 들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수레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조선은 산과 계곡이 많아 수레를 쓰기에 적당하지 못하다고 한다. 이런 얼토당토않는 소리가 어디 있는가? 나라에서 수레를 이용하지 않고 보니 길을 닦지 않는 것이요, 수레만 쓰게 된다면 길은 저절로 닦일 것이 아닌가? 거리가 비좁고 산마루들이 험준하다는 것은 아무 쓸데없는 걱정이다. (중략) 그래도 사방의 넓이가 몇 천 리나 되는 나라에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이다지도 가난한 까닭은 대체 무엇이겠는가? 한마디로 말한다면, 수레가 나라에 다니지 않는 탓이라 할 수 있다.”(‘열하일기―일신수필’ 중 ‘수레 만든 법식(車制)’에 관하여)
‘연행도’ 제13폭 ‘유리창(琉璃廠)’. 연경 유리창의 화려한 가게들과 번화한 거리를 묘사한 그림.
2명의 인물이 각각 낙타를 타고 이동하는 모습(가운데 아래)은 조선에서 구경하기 어려운 낯선 풍경.
위의 기록에서 보듯이 ‘열하일기’ 곳곳에는 연암 박지원의 북학사상, 실학사상, 법고창신, 온고지신 등 다채로운 사상이 진하게 배어 있습니다. ‘조선은 산과 계곡이 많아 수레를 쓰기에 적당하지 못하다고 한다’는 변명에 대해 연암 박지원은 “나라에서 수레를 이용하지 않고 보니 길을 닦지 않는 것이요, 수레만 쓰게 된다면 길은 저절로 닦일 것이 아닌가?”라 하여 수레를 만들어 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자세를 신랄히 비판하였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현대의 교통망 확보와도 흡사한 점이 있습니다. 1970년대 경제개발 기간 중 산을 깎고 터널을 뚫어 고속도로망을 확보한 것이 여러 측면에서 경제의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것과도 비슷한 이치입니다. 수레를 단순한 교통수단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수레의 활용에서 비롯되는 도로망 건설 등 국가산업 전반의 발전을 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연경(베이징) 뒷골목에서 접한 뒤 크게 놀랐다는 요지경.
청나라에 도착한 후에도 연암 박지원은 가는 곳마다 보고 관찰한 내용들을 정리하여 거의 모든 것을 ‘열하일기’에 담았다. 털모자에 대한 단상(斷想)을 담은 다음과 같은 글이 대표적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많이 쓰는 털모자는 다 이곳에서 나오고 있다. 털모자 점은 세 군데 있었는데, 한 점포가 40∼50칸씩이나 되고 모자 만드는 장인바치들이 백 명씩은 족히 될 것 같았다. 의주 상인들은 벌써 이곳에 우글우글 모여 모자들을 계약하고 돌아가는 길에 실어갈 모양이다. (중략) 모자는 사람마다 겨울에만 쓰다가 봄이 되어서 해지면 버리고 마는데, 천 년을 가도 헐지 않는 은으로 한 겨울만 쓰면 내버리는 모자와 바꾸고, 산에서 캐내는 한정 있는 은으로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땅에 갖다 버리니 그 얼마나 생각이 깊지 못한 일인가?”(‘열하일기―일신수필’ 중에서)
베이징으로 가는 조선 연행 사신단의 모습. 1780년 6월부터 약 6개월간 청 건륭제 70회 생일 축하 연행사절단의 일원으로 선양, 베이징, 열하 등을 둘러본 연암 박지원은 그때의 체험을 토대로 1783년 <열하일기>를 탈고했다.
당시 털모자는 청나라에서 만들어져 겨울철 조선에 인기리에 수입되고 있었지만, 연암 박지원은 털모자 수입에 대해 은을 낭비하는 행위라 하여 부정적으로 인식한 것입니다. 최근에도 일부 부유층을 상대로 하는 수입업자들이 외국산 모피나 명품 의류나 가방 등을 수입하면서 막대한 달러를 해외에 유출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해본다면, 연암 박지원의 이러한 이야기는 그저 그런 옛 일화로 치부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에서도 명품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사치품들이 거래가 되고 있고, 실용성보다는 과소비를 조장하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무조건 실용적인 것이 좋고 올바르다는 것은 아니지만, 옛 일화에서도 우리가 현재 배울 점이 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상기하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또 다른 일화로 열하를 방문한 연암 박지원은 추후 안의현감으로 재직하며, 열하에서 보고 온 수차·베틀·물레방아 등을 제작 사용케 하여 백성들 생활환경 개선에 애썼습니다. 큰 힘을 들이지 않고 물을 이용해 쌀을 찧을 수 있는 ‘물레방아’를 전국에서 처음 만들었습니다. ‘물레방아’를 사용하게 됨으로써 백성들의 사회생활과 생산증대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베이징에서 열하로 가는 길목에 있는 만리장성.
이렇듯 연암 박지원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대표적인 실학 사상가이자 행동가였습니다. 연암 박지원이 광녕성(廣寧城)에서 설파했던 수레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많은 시사점이 있습니다. “당시 조선에는 도로도 없었고, 관료들은 백성들의 삶을 돌보지 않아 수레를 끌 소나 말도 충분하지 않았다.” 실제로 연암 박지원은 항상 백성들의 삶이 제일 중요하다는 생각하였고, 다른 무엇보다도 실용적이고 삶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들을 직접 행하였습니다.
라마교 사원 양식을 본떠 지은 열하의 건물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실제의 삶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일을 대할 때, 대부분 공리공론, 탁상공론에 그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또한, 현실은 똑바로 보지 않고 항상 이상적인 공상만을 하며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합리적인 대안은 도출되지 않고,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연암은 항상 이러한 것들을 경계하였고 국민의 눈높이에서 실제 삶에 도움되는 생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의 현실과 삶이기 때문입니다.
위의 여러 일화로 살펴볼 때, 연암 박지원은 법고창신과 온고지신에 대한 재해석을 시도하였습니다. 연암 박지원에게 있어서 법고는 근본정신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이고 창신은 변화하는 현실에 따라 적합하게 구현된 것이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으며, 현실이 창작에 반영되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러한 교훈은 비단 그 고전 속 일화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에서도 충분히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 번 조선시대의 훌륭했던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을 알아보며, 우리의 현실에서도 꼭 필요한 법고창신의 정신과 온고지신의 의미를 되새겨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출처] [인물] 연암 박지원 일화로 돌아본 법고창신 정신 및 온고지신의 의미|작성자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