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 그는 고려 후기 온건개혁파로 마지막까지 왕조의 종묘사직을 지키고자 했던 충신이었다. 그는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어, 당대 최고 수준을 자랑하던 대학자였다. 그런 그가 울산과 인연이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포은은 울산에서 귀양생활을 했거니와, 우왕 1년(1375) 언양으로 내려와 1년 넘게 지냈다.
이 기간 동안 포은이 어떻게 살았는지 직접 알려주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지금까지 이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가끔씩 반구대(盤龜臺) 등지를 찾아 외로움을 달랬으며, ‘나그네 마음이 오늘은 더욱 처량하여(客心今日轉凄然)’로 시작하는 한시(漢詩)를 지었다고 언급하는 정도에 머물고 있다. 그래서 귀양이후 포은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서도 별로 언급이 없다.
포은에게 울산 귀양생활은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단편적 사료라 하더라도 적극 해석해 보면, 새로운 이해도 가능할 것이다. 여기서는 고려 후기 시대상을 주목하면서 그것을 추적해 보기로 하겠다.
정몽주는 24세에 장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쳤다. 39세이던 우왕 1년에는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이때 이인임(李仁任) 일파의 친원(親元) 정책 추진에 대해 강력 반대하다가 밀려나, 언양 요도(蓼島, 현 어음리)로 귀양 오게 되었다.
우리는 귀양이라고 하면,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과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를 떠올린다. 이들의 경우, 귀양지 장소와 그 일상이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이들은 비교적 오랜 기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현지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돌아갔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역경을 딛고 학문과 예술에 매진하여, 한국 문화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던 것이다.
정몽주의 귀양생활은 과연 어떠했을까? 우선 그는 출세 가도를 달리던 관리였기에 좌절감이 컸을 것이다. 고달픈 나날에, 외로움과 울분에 휩싸일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기간 동안 낮은 위치에서 백성의 삶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이력을 볼 때, 백성의 어려움과 고통을 이해하며 그 해결 방안도 모색해 보았을 것이다. 이러한 것은 중앙 관료생활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정몽주가 백성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김해산성기(金海山城記)>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이 글은 박위(?∼1398)가 김해부사에 임명되어 왜구를 격퇴하고 읍성을 보수했던 사실을 적은 글이다. 여기서 그는 관리가 백성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언급하고 있다.
그는 민생을 보호하고 안정시켜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평소 농사와 고기잡이 등 생업에 종사하여 생활이 안정되도록 힘써 주고, 미리 성곽(城郭)을 보수 유지시켜 유사시에 백성이 외적으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언양 유배 시기에도 이런 인식을 했을 것으로 봐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정몽주에게 있어 유배 기간은 왜구(倭寇) 문제를 절감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왜구는 공민왕(恭愍王, 1351∼1374)∼우왕(禑王, 1374∼1388)대에 극렬하게 노략질을 일삼아 나라의 큰 근심거리가 되었다.
울산 지역도 여러 차례 침략을 받아 고을이 황폐해졌다. 사료를 보면, 고려 후기 울산은 강화도와 마산지역 다음으로 왜구의 침탈을 많이 받았던 지역이었다. 심지어 포은의 유배 기간이었던 우왕 2년(1376) 11월과 12월에도 울산지역은 왜구의 공격을 받았다. 포은도 이때 왜구에 상당한 위협을 느꼈을 것이며, 아주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장차 이 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각오를 하게 된 것은 아닐까?
정몽주는 우왕 3년(1377) 3월 유배에서 풀려나면서, 9월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거기서 그는 왜구 금압(禁壓)을 촉구했다. 이듬해 7월 귀국하면서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 수백 명을 데려 왔다. 이때 일본 사행은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위험이 따랐다. 조정에서는 이같은 점을 고려해 포은을 유배에서 풀어준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그가 왜구 문제 해결에 적극적이었음은 이후에도 잘 드러난다. 즉, 우왕 6년(1380) 이성계(李成桂) 휘하에서 조전원수(助戰元帥)로 활약하며, 전라도 운봉(雲峰)에서 왜구를 물리쳤다. 이 승리가 바로 황산대첩이다.
요컨대 정몽주는 울산에서 왜구 침탈에 고통받고, 사회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던 백성들의 살상을 보았다. 이렇게 지방의 현실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면서, 이것은 그의 현실 인식에도 적잖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한편, 울산 선비들은 포은에게 찾아가 학문을 배우려고 했을 것이다. 포은은 30대에 이미 성균관에서 성리학을 강설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으로부터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조(祖)’라는 극찬을 받을 정도로 학문 수준을 자랑했던 터였다.
울산에서 정몽주에 대한 숭모(崇慕) 열기는 조선 후기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매우 높았다. 울산도호부의 대표 서원이었던 구강서원(鷗江書院)과 언양현의 반고서원(盤皐書院, 현 반구서원)에서 모두 포은을 배향했다. 울산에는 포은대(圃隱臺) 등의 유적과 그를 기리는 시문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런데 현재 정몽주에 대한 이해는 지역사회에 널리 확산되고 있지 못하다. 단지 서원에서 제향 대상으로만 기념하고 있는 정도이다. 다른 지역 사례를 보면, 포은과 관련한 작은 인연이라도 있으면 적극 부각시켜 활용하는 추세이다.
포항시의 경우 한때 영천시와 포은 출생지에 대한 논쟁을 벌였으나, 몇 년 전 시립도서관과 어린이도서관을 개관하면서 ‘포은’이란 이름을 붙였다. 도서관 현관에는 포은 흉상을 설치하고, 벽면에는 그 일대기와 시(詩)를 패널로 전시하고 있다. 해마다 포은문화제도 열고 있다. 영천시는 임고서원(臨皐書院)을 정비해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포은의 묘소가 있는 용인시도 포은을 기념하는 문화제를 해마다 개최하고 있다. 앞으로 울산에서도 포은을 조명하고 기념하는 프로그램이 마련되면 좋겠다. 포은과 관련한 여러 유적과 공간을 연결하는 코스는 아주 좋은 답사여행지가 될 수 있다. 울산에서 포은을 부각시켜 다양하게 활용하여, 울산 지역사의 폭도 넓혀나갔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