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상정(李相定, 1897~1947)선생은 대구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북만주 기행>민속원.2020-에서 만주(滿洲)라는 지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만주(滿洲)는 본래 지명이 아니고 부족명(部族名)이라 한다. 청조(淸朝) 발흥시에는 국호를 후금국(後金國)이라 칭하였다가 후금 태종 천총(天聰, 1626-1636)에 이르러 만주(滿洲)라 시칭(始稱)하였으니 태종이 이 명칭을 선정함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하는데, 하나는 그 아버지의 존칭이 만주(滿洲)라 함이요, 하나는 서장소헌(西藏所獻)의 서책에 모다 만주사리(曼珠師利) 대황제라 하였으니 만주(滿住,曼珠)는 인도어에 문수(文珠)란 번역이니, 묘길상(妙吉祥)을 의미한 것이라 한다.
백산흑수(白山黑水)가 그네의 발상지이며 만주(滿洲)의 洲자가 백산(白山)지명의 뜻을 함(含)하였으니 그 명칭을 빌려서 일반으로 통용하게 되었다.
위 글을 통해 보면 후금(後金)의 발상지는 백산흑수(白山黑水)라 했으니, 바로 조선의 백두산인 현 알타이산 북쪽의 송화강(松花江)과 흑룡강(黑龍江)인 현 오비강을 중심으로 그 터전이 최초로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북만주(北滿洲)에서의 일들을 말하고 있음이다.
위대한 조선독립군(朝鮮獨立軍)이 1920년10월21일-26일까지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을 벌인 전장(戰場)에 대해 이범석(李範奭, 1900~1972)장군은 명확히 북만주(北滿洲)라 지칭하고 있으니, 필자가 고증한 현 알타이산(백두산)이북 간도(間島)의 서북방지역에서의 웅장(雄壯)한 서사시(敍事詩)였음이 증명되고도 남음이 있다.
그렇다면 백두산(白頭山)인 현 알타이산의 아래쪽에 위치했을 남만주(南滿洲)의 강역을 어떻게 고증해 나갈 것인가의 어려운 문제가 남아 있게 된다.
또한 남만주(南滿洲)의 강역이 확정되면 역사상 가장 웅대한 민족혼과 광대한 강역을 보유했던 고구려(高句麗)의 위치와 이후 발해(渤海)의 정확한 강역을 스케치해 나갈 수 있기도 하다.
제임스 게일(James Scarth Gale,1863-1937)은 그의 책 <조선, 그 마지막 10년의 기록>에서 만주(滿洲)의 요양(遼陽)-심양(瀋陽)-통화(通化)의 경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다.
<계속해서 몰아치던 모래폭풍으로 도시관광이 어려웠는데, 떠나는 날까지 强度는 더해만 갔다. 다시 한번 수레는 단조로운 平原을 가로지르며 정처없이 나아갔고, 여기에도 모래가 날았다. 완벽한 沙漠의 모래폭풍이었고, 모래는 눈처럼 소용돌이치며 휘몰아쳤다. 노새는 목구멍으로 들이치는 모래를 뱉으려는지 끝도 없는 기침을 해댔고, 사람들은 모든 구멍으로 들어닥치는 모래를 그냥 無氣力하게 들이마시고 있었다.>
위글의 내용은 명확히 사막(沙漠)지역의 일들임을 제임스 게일은 스스로 말하고 있는데, 따라서 북경(北京)이 현 감숙성(甘肅省)의 주천(酒泉)임을 인식하고 바로 그 위쪽 서북방면으로 남만주(南滿洲)가 위치하게 되면 현 신강(新彊)지역이 해당됨과 동시에 모래폭풍의 일들이 자연스럽게 해석되어 버린다.
지그프리트 겐테(Siegfroied Genthe: 1870~1904)는 독일의 언론인이자 지리학 박사로 1901년에 출간한 그의 책 <신선한 나라 조선, 1901>에서 남만주(南滿洲)에 대해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거대한 요하(遼河)강은 만주의 아주 비옥한 평야지대(平野地帶)로 이어지는 넓은 수로(水路)를 따라 내륙(內陸)으로 통하는 가장 편안하고 저렴한 운송로다. 대륙(大陸)의 가장 북쪽에 위치해 자연스럽게 교통요지가 된 흑룡강(黑龍江)과 길림(吉林)은 산림지대라서 성경(盛京-심양,봉천,묵덴)의 비옥한 농지(農地)에 비하면 그 가치가 한참 뒤떨어진다. 무엇보다 정착지로서 성경(盛京)은 광대하고 관개용수(灌漑用水)가 풍부한 평야(平野)와 농사에 적절한 기후(氣候)로 그 가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현 반도위쪽의 심양(瀋陽)은 도시 한 가운데를 커다란 강이 흘러가고 있어 따로 관개용수가 필요없는 지역이다.
지금의 신강(新彊)지역인 우루무치(烏魯木齊-오노목제)와 투루판(吐魯番-토노번)지역에는 고대(古代)로부터 이어오는 관개(灌漑)시설이 있다. 연간 강수량이 워낙 작아서 농사에 부적합하나 천산(天山)으로부터 흘러내리는 물을 지하 관개시설을 이용해 공급함으로써 풍부한 과일을 생산해 내고 있다. 관개시설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관개용수가 있어야 하니, 제임스 게일이 말한 관개용수는 바로 이 부분을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3.
알렉산더 윌리암슨(Alexander Williamson,1829–1890)은 1864, 1866,1867년 이렇게세번에 걸쳐 만주(滿洲)를 방문하고 1870년에 <Journeys in north China>를 출간하는데 이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Manchuria may be said to lie within north latitude 39° and 49° and east longitude 120° and 133°. These lines embrace the limits in both directions, but the bulk of the country lies like a parallelogram across the map, norht-east by south-west, and measures approximately 800 miles in length and 500 miles in breadth.
It is bounded on the south by the Gulf of Pe-chil-li and the highlands of Corea ; on the east by the River Usuri, which divides it from the newly-acquired Russian territory ; on the north by the Amoor ; and the west by the Rivers Nonni, Soongari, and the South-western Palisades.
Southern Manchuria may be divided into two distinct regions, the one a plain, and the other an elevated country full of high mountains.
The climate of Manchuria includes the extremes of heat and cold ; in summer, the temperature varies from 70° to 90° and in winter from 50° to 10° below zero. The rivers are generally frozen over by about the 20th November,and are not navigable till the middle of March.---The winter generally begins with a snow-storm. Cotton is grown in several places in considerable quantities.
만주는 북위 39°와 49°, 동경 120°와 133°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선은 양방향의 한계를 포함하지만 국토의 대부분은 지도를 가로지르는 평행사변형처럼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놓여 있으며 길이는 약 800마일(1,280km), 너비는 500마일(800km)입니다.
만주는 Pechilli만(발해만)과 조선의 고원에 의해 남쪽으로 경계를 이룹니다. 동쪽으로는 러시아가 새로 얻은 영토에서 만주를 분할하는 Usuri 강에 의해, 북쪽으로는 Amoor에 의해, 북쪽으로는 논니 강, 숭가리 강, 남서쪽으는 목책에 의해 경계가 이루어집니다.
남만주는 두 개의 뚜렷한 지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평원이고 다른 하나는 높은 산으로 가득한 고지대입니다.
만주의 기후는 극한의 더위와 추위를 포함합니다. 여름에는 기온이 70°(21도)에서 90°(32도)까지, 겨울에는 50°(10도)에서 10°(-12도)까지 다양합니다. 강은 일반적으로 11월 20일경에 얼고 3월 중순까지 항해할 수 없습니다. --- 겨울은 일반적으로 눈보라와 함께 시작됩니다. 목화는 여러 곳에서 상당한 양으로 재배됩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경도(經度)는 1884년 미국에서 그리니치를 중심으로 확정한 이후 사용하고 있으며, 따라서 1870년이면 포르투칼의 서쪽 해상에 있는 카나리아를 기준으로 경도가 표시되어야 한다고 볼 수도 있으나 당시 서구열강들간의 갈등을 고려한다면 그리니치를 중심으로 쓰여졌다고 보아도 큰 무리는 없어 보인다. 그러니 위의 경도(經度)는 정확히 반도 위쪽의 위치와 똑같이 형성되어 있으니 이는 명확히 교열된 부분이고, 위도(緯度)의 경우 아래쪽을 39도로 표기함에 따라 이는 반도위쪽 만주(滿洲)의 설명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여름,겨울의 기온 분포를 보면 특히 겨울기온은 현 반도위쪽의 기온이 아니며, 더군다나 열대성 작물인 목화가 많이 재배된다는 기록 또한 우리의 의구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내용들이다.
4.
북경(北京)의 위치와 백두산(白頭山) 그리고 북만주(北滿洲)가 고증되면 남만주(南滿洲)의 위치는 결국 백두산(白頭山)의 아래쪽이면서 북경(北京)의 위쪽이 되어야 마땅하다. 이 중간지역에서 청나라가 초기 수도로 삼았던 묵덴(盛京-성경)과 장춘(長春)이 찾아져야 하며, 이를 통해 남만주(南滿洲) 또한 고조선과 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북륙조선(北陸朝鮮)의 판도에 들어와 통치된 강역이었음을 분석해 낼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 대륙조선사연구회(大陸朝鮮史硏究會)는 현 대륙 천산(天山)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형성된 신강(新彊)지구가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 로 이어지는 상고역사의 강역판도에 들어왔었음을 밝혀낼 수 있게 되었다.
이를 지도를 통해 고찰해 보면 다음과 같다.
2023.02.08. 松溪
첫댓글 고맙습니다
네....감사합니다.
항상 좋은 것을 가르쳐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모든 일에 소원성취 하시길 기원합니다
응원에 감사드립니다. 항상 건강하십시오
소중하신 글
고맙고 감사드려요
항상 건강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우리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과 지명 이동 전 만주의 위치가 송계님이 고증하신 대로 맞다면 과연 우리 민족의 영토는 어느 정도였을까요?
정조임금이 기록한 全有大東을 생각하며 하나씩 고찰해 나가다 보면 완벽히 찾아낼수 있지 않을런지요?
아,, 머리 아프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