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골목에서 퍼올린 동화 2002년 8월 19일 월요일 오마이뉴스
홍종두. 그는 사회적 장애를 가진 장애인이다. 그는 나이에 따라 '올바로' 사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는 서른줄에 들어선 나이에 일정한 직업도 없으며, 사회적 책임이나 의무에 대한 어떤 강박도 갖고 있지 않다. 게다가 그는 '별'을 셋이나 단 전과자다. 무엇보다도 그의 가장 큰 장애는 자신의 입장을 변호할 의사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사회에 받아들여지기 위해 결백을 호소하거나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지 않는다. 그는 별로 할 일도 없고, 이미 전과가 있으며, 무엇보다 "교도소로 가는 길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형을 대신해서 감옥에 다녀왔다.
한공주. 그녀는 신체적 장애를 지닌 장애인이다. 그녀는 나이에 따라 '제대로' 사는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그녀는 방안에 틀어박혀 거울로 벽에 빛을 만드는 일로 소일한다. 그녀는 남의 도움 없이는 혼자서 집안 일을 하지도 못하고 외출도 하지 못한다. 무엇보다 그녀의 가장 큰 장애는 냉혹한 현실의 벽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서지도 못하는 주제에 덜컹거리는 버스에 서서 애인과 장난을 할 생각을 하고, 걷지도 못하는 주제에 그 가파른 지하철 계단을 달려와 애인에게 사랑의 노래를 들려줄 꿈을 꾼다. 그렇다. '분수'를 모르는 것, 그것이 그녀의 가장 심각한 장애다. 어딜 감히 '비장애인'의 꿈을 꿔? 장애인 주제에.
그 두명의 장애인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비장애인이다. 사회적으로, 신체적으로 모두 완벽한. 그 비장애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들이었기에, 불필요한 사회적 장애자 한 사람을 대신해서 감옥에 보내는 지혜를 발휘했다. 사회부적응자들이야 어디서 지내든 무슨 상관인가? 그들은 아예 사회밖으로 가두어 두는 편이 더 안전할 수도 있다. 그리고 비장애인들은 사회의 유지와 재생산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므로 안락한 주거공간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장애인용 아파트를 빼앗아 지내고 있다. 장애인들이야 죽기만을 기다리며 어둠속에서 숨어지내야 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비장애인들은 비장애인들과만 식사하고, 배설하고, 성교한다. 따: 라서 한 남자가 장애인 여자와 사랑을 나누고자 했을 때, 비장애인은 이렇게 물어야 했다. "너 변태지? 그 여자를 보고도 성욕이 생기든?" 아무렴. 비장애인이라면 서로에 대한 사랑때문이 아니라 '성욕'때문에, 외모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 상대의 부와 지위 때문에 성교해야 한다.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는 이 '비장애인들'의 눈에 가려진, 아니, 우리 스스로 애써 고개를 돌려온 또 다른 사람들의 삶에, 그리고 그들의 꿈과 사랑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그렇다. '장애인'이라는 이름을 강요당한 이 사람들은 '정상인'을 자처하는 그 잔혹한 존재들보다 아름다운 꿈을 꾸고, 더 인간적인 삶을 살고, 무엇보다 더 멋지게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한공주가 홍종두에게 "자고 가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요?"라고 투정부리듯 말할 때, 이 어눌한 대사는 "저희 집에서 차 한 잔 하고 가실래요?"라고 세련되게 말하는 고혹적인 여자의 목소보다 아름답고, 그녀의 굽고 경직된 몸을 드러내는 낡은 운동복은 다이어트로 다듬어진 몸매를 덮는 관능적인 란제리보다 우아하다. 단언컨대 한국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베드신'이 이어진다.
다소 과장되게 보일 수도 있는 문소리의 연기는 이런 면에서 충분한 변명의 여지가 있다. 추하게 비틀어진 골격과 일그러진 피부 속에 비장애인과 다르지 않은 아름다움이 감추어져 있음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문소리를 향하는 찬사는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벌써 따 놓은 듯한 그 연기력 이외에, 한국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을 위해 고운 얼굴을 일그러뜨릴 용기가 있는 여배우가 드물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녀는 가장 흉한 얼굴로 가장 아름다운 역할을 연기해 냈다.
문소리의 한공주는 도저히 '문명국'이라고 할 수 없을만큼 미개한 장애인 정책과 시민의식을 가진 한국사회에 현실적인 구체적인 토대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넬>을 연기한 조디포스터보다 아름답고, 설경구가 연기한 홍종두는 일탈적 삶을 관념적으로 미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퐁네프의 연인>의 알렉스보다 정직하다.
그러나 <오아시스>에서 거슬리는 부분은 홍종두와 한공주의 관계 설정이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홍종두가 한공주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는 드러나지 않는다. 자책감이나 동정심 때문인지, 아니면 그? ?말대로 "그 정도면 여자얼굴로는 괜찮은 편"이기 때문에 그녀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인지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한공주가 자신을 범하려 했던 홍종두에게 먼저 연락을 한다는 설정은 충분한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두 사람의 관계는 과일바구니-꽃-외출의 연대기 형식으로 다소 지루하게 진행되다가 전반부를 지나서 힘이 실리기 시작한다.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앞의 설정들이 서서히 아귀가 맞아들어가며 흥미를 더해간다.
낡은 벽지 위에 비친 거울빛에서 비둘기와 나비를 뽑아내고, 정체시간의 청계고가 위에서 로맨스를 찾아내는 감독의 상상력은 놀랍다. 이창동 감독은 <오아시스>에서 가장 추한 것으로부터 가장 아름다운 것을, 가장 평범한 것에서 가장 특별한 것을 찾아내는 일상의 연금술사가 된다. 특히 홍종두의 독백이 흐르는 가운데 한공주가 뒤돌아 앉아 방을 쓰는 마지막 장면은 압권이다. 창밖에서 들어온 햇빛 사이로 피어오르는 먼지는 눈송이가 되어 그 불우한 연인의 꿈 위로 쌓인다.
이 영화는 결코 그 자체로 '해피엔딩'이 아니다. 결국 그 '장애인' 연인들의 사랑은 '비장애인' 사회 속에서 끝없이 부대끼고 상처입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열린 결말 뒤로 남는 것은 결국 관객의 몫이다. 우리가 가꾸어 갈 사회의 미래에 따라 이 영화는 희극이 될 수도 있고 비극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는 이창동 감독의 말은 옳을지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건 영화를 보는 관객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강인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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