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마을의 유래를 찾아서] 2. 대정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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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뜨르 비행장은 1930년대에 일제가 대정읍 상모리 송악산 아래 들판에 건설한 공군 비행장으로 2002년 근대문화유산 제39호로 지정됐다. 알뜨르 비행장에는 폭 20m, 높이 4m, 길이 10.5m 격납고 20개가 조성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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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모·하모·안성리 등 13개 마을 모여 이뤄진 지역
알뜨르 비행장·추사적거지 등 문화·역사 숨쉬는 곳
대한민국 최남단 마라도와 도내 최대 고인돌 군락지 가파도. 수십만 명이 찾는 제주의 '보배' 대정읍. 대정은 추사적거지 등 역사와 문화가 숨쉬는 곳이기도 하다. 마늘 주산지로 이름을 알리는 동시에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쉬는 대정 마을을 살펴보자.
13개 마을 '올망 졸망'
대정읍의 행정구역은 2010년 기준 13개 법정리, 23개 행정리로 구성됐다.
대정읍은 1416년 조선조 태종 16년 현재 보성리에 제주목 대정군을 설치한 이후 일제강점기에 대정면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후 1946년 도제 실시로 남제주군 대정면으로 새로운 출발을 했고, 1956년 대정면에서 대정읍으로 승격했다.
1981년 4월1일 대한민국 최남단 마라도가 가파리에서 분리되는 등 상모·하모·안성·인성·일과·무릉·가파·신평·동일·보성·영락·구억·신도리 등 13개 마을은 상모 1·2·3리, 하모 1·2·3리, 안성리, 인성리, 일과 1·2리, 무릉 1·2리, 가파리, 마라리, 신평리, 동일 1·2리, 보성리, 영락리, 구억리, 신도 1·2·3리 등 모두 23개 행정리로 나뉘었다.
모슬포는 '모래'와 '포구'
모슬포는 '모슬개·모실개'로 불렸다. 모슬개의 '모슬'은 모래의 제주방언 '모살'이 변한 것으로, 한자음을 빌어 모슬(摹瑟)'로 표기한 것이고, '개'는 포구를 뜻하는 '포(浦)'다. 모슬포는 '모래가 있는 포구'란 의미로 알려졌다.
대정읍 상모리 옛 이름은 '웃모슬개·웃모실개'고 18세기 중후반부터 '상모슬포리' 또는 '상모슬리'라 하다 19세기부터 상모리로 사용했다.
하모리 옛 이름은 '모슬개·모실개' 또는 '알모슬개·알모실개'로 불리다가 19세기부터 하모리로 표기했다.
인성리와 안성리, 보성리는 모슬봉 동북쪽에 있는 중산간 마을 가운데 하나로, 인성·안성리는 '성내' 또는 '대정골'이라 불렸다. 18세기 중후반부터 대정현성 동문 일대 형성된 마을을 동성리라 하고, 서문 서쪽 일대 형성된 마을을 서성리라고 했다. 19세기 말부터 동성리를 동문과 동문 북쪽 일대의 안성리와 남문과 남문 남동쪽 일대의 인성리 2개로 나뉘어졌다.
보성리는 대정현성 주변에 있다는 데서 읍외촌 또는 읍촌이라 하다가 18세기 중반부터 서성리라 불렸고, 19세기 중반에 보성리라 했다. 보성리는 대정현성 안과 남문 서쪽, 서문 일대에 있는 '하동'과 대정현성 서북쪽에 있는 돗귀동산 일대 '상동' 등 2개 자연마을로 이뤄졌다.
일제 아픔 스며든 '알뜨르'
알뜨르는 모슬봉 앞의 상모리와 하모리의 들(평지)을 말한다. 북쪽 산간마을이 있는 곳은 '웃뜨르'라고 했고, 남쪽 모슬봉 앞들을 '알뜨르'라고 불렀다. 대정 지역 사람들은 북쪽을 '우'라고 했고, 남쪽을 '알'이라고 했는데 우와 알은 '위'와 '아래'의 제주방언이기도 하다. 알뜨르는 넓은 들이기 때문에 일본은 대륙침략의 전초기지로 하기 위해 비행장을 설치했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는 '알뜨르 비행장'으로 불리고 있다.
알뜨르 비행장은 1930년대에 일본이 대정읍 상모리 송악산 아래 들판에 건설한 공군 비행장으로, 2002년 근대문화유산 제39호로 지정됐다. 일본은 1920년대부터 제주도에 대규모 군사시설을 마련했다. 1930년대 중반에는 대정읍에 알뜨르 비행장이 완공됐고,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이곳에서 출격한 전투기들이 700㎞ 가량 떨어진 중국 난징을 폭격하기도 했다. 알뜨르 비행장에는 폭 20m, 높이 4m, 길이 10.5m 격납고 20개가 조성됐다.
크게 고요하고 평온한 '대정'
대정(大靜)은 고유어에서 딴 지명인지, 아니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이름인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대정현을 본읍으로 해 주현인 대정현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어 학계에서는 고려시대부터 대정이란 고유 지명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큰 대(大)'와 '고요할 정(靜)'이란 한자 표현을 쓴 것으로 봐서 '크게 고요하고 평온한 지역'이란 의미로 대정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 문헌상 기록은 아직 찾지 못했다.
대정읍 모슬포를 상징하는 오름은 '모슬봉'이다. 모슬봉은 모양이 거문고를 세워 둔 모양과 같다는 의미다. 마을 주민들은 '탄금봉'이라고도 부른지만 모슬포 근처에 있는 오름이라 모슬개 오름으로 부르다 모슬봉으로 굳혀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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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사적거지는 조선후기 문신이자 서화가였던 김정희(1786~1856)가 유배생활을 하던 곳으로, 기념관과 함께 초가 4채가 단장돼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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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문화, 관광의 대정읍
대정읍의 관광지는 송악산, 추사적거지, 섬속의 섬 가파도와 국토 최남단 마라도 등이 있다. 역사 유적지는 대정성지와 추사적거지, 군사유적지 등이 있다.
추사적거지는 조선후기 문신이자 서화가였던 김정희(1786~1856)가 유배생활을 하던 곳으로, 기념관과 함께 초가 4채가 단장돼 있다.
특히 김정희는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1844년 제자 이상적의 의리에 보답하기 위해 '세한도(歲寒圖)'를 그려준다. 세한도는 '추운 계절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르게 남아 있음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라는 공자의 명언을 주제로 삼아 겨울 추위 속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청청하게 서 있는 모습을 화폭에 담아낸 것이다.
윤주형 기자 21jemin@jemin.com
"파란만장 제주史 점철된 곳" |
'마을'에 듣다 / 양신하 대정읍지편찬위원장
대정은 현이 설치됐던 유서깊은 고장이다. 국토 최남단이자 시작을 상징하는 대정읍은 한반도 정세에 따라 바람 타는 땅으로서 조선시대에는 유배지였고, 태평양전쟁과 4·3사건, 그리고 한국전쟁을 겪는 동안 세계사의 한가운데 있었던 파란만장한 고을이기도 하다.
대정읍에 산재해있는 석요와 고인돌 등 500여곳에 이르는 문화유적들은 그 어느 곳보다 소중한 역사적 의미를 담아 장구한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대정은 조선왕조 시대에는 부정과 불의에 직언하거나 바른 길을 향해 과감히 항거하다가 유배된 충신 중의 충신들과 문무를 겸비한 추사 김정희, 동계 정온, 이세번 선생 등 곧은 선비들의 적거지가 됐다. 또 이들과의 인적교류는 다른 지역에서는 접할 수 없었던 높은 학문을 터득하며 전파하게 됐고, 충신들의 충·의의 근원이 되는 주체성도 일깨우며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됐던 것이다.
'현자는 역사에서 배우고 어리석은 자는 경험에서도 깨닫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과거를 보면 미래를 알 수 있다했으니 우리들이 누리는 영광과 번영은 어려울 때일수록 빛을 발했던 선조들의 도전과 개척정신의 산물이었기에 지금까지 계승되고 있는 이 고귀한 정신을 오늘을 사는 우리는 후세에 물려줘야 한다는 절박함을 느낀다.
대정읍지편찬위원회는 설촌유래와 함께 문화유산·자연환경·역사·상업·경제·교육·종교와 무속신앙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를 기록하는 「대정읍지1」을 발간했고 「대정읍지2」와 「대정읍지3」도 발간할 계획이다.
대정읍지는 기록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대정읍의 내일을 어떻게 열어 나갈 것인가에 대한 비전이 제시되는 지침서로 밑거름이 되길 바란다.
출처: 제민일보 윤주형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