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어디에 서야 할까?
최경희 사모님
오렌지를 편집하는 집사님이 내게 원고를 부탁해 왔다. 주제는 없고 소소한 일상에 관해서 쓰라고 한다. 나를 배려함인 것 같다. 나의 일상...?
두 해 전에 우리 가정에 시집을 온 마음에 쏙 드는 착한 며느리 이야기를 할까? 듬직하고 성실해서 딸보다 더 믿음이 가는 든든한 사위 자랑을 할까? 그건 아니지. 혼기에 찬 자녀들을 둔 성도들을 생각하면 결혼한 아들과 딸을 자랑하거나 자녀들이 내게 준 최고의 선물인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스러운 손주들을 말하면 너무 자랑질(?)하는 것 같아 억지로라도 참아야 한다.
나의 일상이 무엇일까? 몇 주 전에, 은퇴한 권사님 한 분이 “사모님은 시집을 잘 갔잖아? 목사님 잘 만났어! 잘 만났지!” 하신다. 분명 듣기 좋으라고 나를 칭찬하시는 말이겠지만, 왠지 심사가 뒤틀린다. “권사님! 같이 살아 봤어요?”라고 마음속으로 냅다 소리쳤다. 이것이 소심한 나의 성격이다.
나는 불신 가정에서 예수님을 믿었다. 예수님이 첫사랑이어서 교회에 다니는 것이 너무 좋았다. 특히나 예배 시간에 온 가족이 특송을 하는 것을 보면서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나도 꼭 믿음의 가정에 시집을 가야지 하는 야무진 꿈을 꾸었다. 마침내 교회 친구의 소개로 신학을 하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였다. 주위에서는 믿음의 배경이 없는 나에게 염려와 걱정의 눈빛을 보냈다. 그런데도 나는 보란 듯이 잘 해낼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너무나 쉽게 사모가 되었다. 남편이 전도사였으니까.
애송이 전도사의 아내인 내게 어머니 같은 권사님들도 깍듯하게 사모님이라고 불러주셨다. 그때부터 겉모습으로는 착한 사모가 되어야 했다. 예수님께도 잘 보이고 싶고, 성도들께도 괜찮은 사모라는 칭찬을 듣고 싶었다. 그때 나는 갓난 아들을 업고 구역장도 했다. 뒤돌아보니 삶이 팍팍하고 힘든 성도들을 돌아보는 것이 마냥 감사한 일이었고, 기쁨이었다.
그 후에 남편이 신학 대학원을 졸업하면서 교인 몇 명 되지 않는 농촌 교회의 담임 사역자로 임지를 옮겼다. 우리 교인들은 가난한 사람들이었고, 농사일로 지친 성도들이었다. 그들을 돌아보고, 섬기는 일이 때로는 힘겨움으로 다가오기도 했지만 어쩌면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나의 성품이 길드는 귀한 시간이었음을 한참 후에야 깨달았다.
몇 주 전의 일이다. 교회 사무실에서 나를 보고 사모인 줄 몰랐다며 미안해하던 집사님이 있으셨는데 오히려 내가 더 미안했다. 우리 교회 성도님임에도 서로가 모르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나더러 잘 섬기고 사랑하라고 맡겨주신 귀한 성도들에게 열심을 다하지 못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남편은 종종 충고한다. 나서지 말아라!, 말을 아끼고 조심하라!, 모든 것이 가하지만 유익한 것은 아니며, 꼭 그렇게 해야만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라고…. 남편은 잊을만하면 내게 은근한 잔소리를 한다. 아직도….
결혼한 지 35년이다. 남편이 목사이기에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나에게 ‘사모’라고 부른다. 가끔 직분란에 기록해야 할 때가 있다. ‘사모’라고 쓸 때도 있지만, 나는 ‘성도’라고 쓸 때가 좋다. 사모가 아니었다면 수십 년을 교회에 출석했으니까 아마도 집사 직분은 받았을 테고, ‘권사’로도 불릴 수 있지 않았을까?
사모? 분명히 직분은 아니지만, 그렇게 불리는 나는 교회에서 아주 애매한 존재이다. 이다음에 천국문에서 예수님께서 “땅에서 네 직분이 무엇이었니?”라고 물으시면 뭐라고 대답할까? 난 집사도 못되어 봤는데…. 하지만 좌충우돌 부족한 나를 사모라고 따뜻하게 불러주고 인정해 주며 사랑해 주는 우리 교회 성도님들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사모인지 아직도 더듬어 가면서 내가 가야 할 길을 걷는다.
사모? 어디에 서야 할지? 영원토록 어색한 자리이다.